제3장.
윈스톤 인근, 100레벨 초반대의 유저들이 애용하는 사냥터.
“어? 저게 뭐지?”
몬스터들과 치열한 사투를 벌이고 있던 유저들이 하늘 저편에서부터 가까워져오는 흑색 점을 발견했다. 그리고 경계하며 웅성거렸다.
“새 치고는 너무 큰데? 혹시 그리폰 아니야?”
“이 근방에는 그리폰의 서식지가 없잖아? 하지만 그리폰 외에는 딱히 떠오르는 게 없네… 만약 그리폰이라면 큰일인데. 우리 다 죽을걸?”
“어, 어라? 사람?!”
처음에는 바둑알처럼 작게 보이던 점이 점차 커지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그리고 드러난 점의 정체는 놀랍게도 인간, 그것도 유저였다.
“우와… 2차 전직한 마법산가 보네.”
“랭커를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인데, 엄청 멋지다!”
“옆에서 반짝이는 저건 뭐지? 펫인가?”
쿠와아앙!!
검붉은 망토를 펄럭이며 하늘을 질주하는 사내! 그의 바로 곁을 따르는 수금 덩어리는 작열하는 태양에 의해 번쩍번쩍 빛을 발하고 있었다. 사내의 정체는 그리드였던 것이다. 그는 멈추지 않고 하늘을 날아가 곧 유저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넓게 펼쳐진 숲까지 도달하여 멈춰 섰다.
‘마나 소모 개쩌네.’
마나 물약을 이미 한 번 복용한 상태다. 그리고 물약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돌아오기도 전에 또 한 번 마나가 고갈되어버렸다.
그리드는 어쩔 수 없이 하강해서 지면에 착지했다.
“이 숲만 벗어나면 윈스톤이군. 마나가 찰 동안 슬슬 걸어가 볼까.”
인기척 없는 깊은 숲 속.
윈스톤까지와의 거리를 가늠해본 그리드가 서릿빛 오크 족장 투구를 해제했다. 이 숲만 지나면 사람들이 꽤 많이 보이기 시작할 텐데, 투구를 쓰고 있다가는 그들이 알아보고 인간 도살자가 나타났다며 소란을 피울 게 뻔했기 때문이다.
“조만간 빨리 투구를 바꿔야겠어.”
신화 속 영웅들이나 쓸법한, 엄청 멋진 투구를 반드시 만들겠다고 다시 한 번 다짐하는 그리드의 머리 위를 파브라늄이 빙글빙글 회전했다.
녀석은 기분이 좋아보였다.
“300년 동안이나 상자 속에 갇혀 있다가 바깥 공기 쐬니까 좋은 거야?”
그리드가 말을 걸어보았다. 하지만 파브라늄은 대답하지 않았다. 당연하다. 녀석이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광물이다. 말을 할 수는 없었고 대화가 성립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리드는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근데 너 엄청 빠르다? 내 비행 속도면 100미터 7초대에 주파할 것 같은데, 그걸 계속 쫓아오네? 그리고 넌 체력이라는 게 존재하지도 않아서 지치지도 않지?”
파브라늄을 바라보는 그리드의 눈빛에는 애정이 가득했다.
대장장이가 최고의 광물에게 호감을 느끼는 건 당연한 현상이었다.
“쿠워!!”
“내놔라! 인간! 목숨! 뼈와 살! 분리!”
파브라늄과 오순도순 대화(?)하며 숲을 가로지르는 그리드의 앞길을 건장한 오크들이 가로막았다. 녀석들은 죄다 조잡한 적색 갑옷을 무장하고 있었고 커다란 늑대를 1마리씩 거느리고 있었다.
인간의 언어를 상당히 잘 구사하고 있다는 특징까지 감안해보면, 녀석들은 오크 중에서도 강력하다고 알려진 늑대 송곳니족 오크들이 분명했다.
크르릉!
늑대들이 코를 연신 벌렁거렸다. 말락서스의 망토에 배어있는 피 냄새에 반응하는 것이다. 녀석들이 피 냄새를 맡고 오크 주인들을 이곳까지 인도해온 듯했다.
그 외에도…
쿠웅! 쿵!
캬오오오!
숲을 배회하던 오우거와 홉고블린, 각종 뱀류 몬스터에 이르기까지!
순식간에 100마리도 넘는 몬스터들이 피 냄새를 맡고 몰려와 그리드를 포위했다.
“헐… 저게 뭐야?”
근처에서 사냥하던 유저들이 소란을 듣고 달려왔다가 깜짝 놀랐다.
온갖 종류의 몬스터들이 누군가 한 명을 집중적으로 노리고 무리를 형성한 광경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저 사람 엿 됐네.”
“도대체 뭘 잘못 했기에 몹들한테 찍혀갖고 다굴을 맞는 거지?”
“쯧쯧~ 몹들을 어지간히도 괴롭혔었나보네~ 그러게 평소에 사냥 좀 적당히 할 것이지~”
오지랖 넓은 유저들이 사정도 모르고 지껄여대는 그때!
슈슉! 슉!
수풀 뒤쪽에 숨어있던 고블린 궁사들이 그리드를 노리고 일제히 사격했다.
파랗던 하늘을 새카맣게 물들이는 화살의 비를 보며, 유저들은 그리드가 꼼짝없이 벌집이 되어 죽을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높은 스탯을 보유한 그리드의 동체시력은 200레벨 이상 전투 직업군 유저들과 비슷한 경지였다. 그리고 한동안 신궁 지슈카의 속사를 곁에서 지켜봐온 그에게 고블린들의 서투른 활솜씨는 애들 장난이나 다름없었다.
“이딴 눈 먼 화살에 맞는 멍청이들도 있냐?”
비웃으며 이상적인 단검을 뽑아 쥔 그리드가 화살이 날아온 방향들을 향해서 칼바람을 사용했다.
쿠와아아아앙!!
그리드는 골렘의 미궁에서 레벨을 114까지 올리면서 획득한 스탯 포인트를 모조리 근력에다가 투자했다. 그리고 칼바람의 위력은 시전자의 물리 공격력에 비례한다.
이제 그리드가 사용하는 칼바람의 파괴력은 한층 더 업그레이드되었기 때문에 고작 100레벨 내외의 고블린 따위가 감당하기엔 벅찼다.
“키엑!”
“캭!”
화살의 비를 난도질하여 무력화시키고 날아온 칼바람에 팔이나 다리 등을 절단 당한 고블린 궁수들이 비명 지르며 쓰러졌다.
그를 신호로, 모든 몬스터들이 일제히 그리드에게 덤벼들었다.
“망토를 입은 보람이 있군!”
몰이사냥은 곧 광렙과 직결되는 법!
어느새 다인슬레프로 스왑한 그리드가 재사용 대기 시간이 끝난 마나 물약을 복용했다. 그리고 파(波)를 전개, 사방으로 검기를 날렸다. 그러자 그에게 접근했던 몬스터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공격당하며 피를 내뿜고 쓰러졌다. 오우거들은 워낙에 튼튼하여 제법 견뎌내는 듯했으나, 파(波)에 적중당하면서 모든 속도 감소 디버프에 걸려버렸다. 살아남아봤자 느려터진 몸놀림으로는 그리드를 위협할 수 없었고 헛손질하며 허우적거릴 뿐이었다.
퍼억! 파직!
“쿠억!”
푸우욱!
“끼에엑!”
파(波) 단 한 방으로 대부분의 몬스터들을 제압한 그리드가 남은 잔당들을 하나하나씩 확실하게 처단해나갔다.
한데 도중에, 몇 마리 고블린 궁수들이 중상을 무릅쓰고 사력을 다하여 화살을 쏘았다. 그리고 그중 몇 개의 화살이 하필이면 그리드의 사각으로 날아갔다.
“칫!”
학살에 열중하다가 뒤늦게 화살을 감지한 그리드가 닥쳐올 고통에 대비하며 이를 악 물었다. 하지만 화살은 그리드의 몸에 닿지 못했다.
콰작! 콰자자작!!
그리드의 몸 주변을 배회하고 있던 파브라늄이 드릴처럼 회전하면서 화살들을 모조리 박살낸 것이다.
“헐…”
공격력이 강한 직업군은 방어적인 면이 취약해야만 정상이 아니던가?
한데, 저 흑색 대검의 사내는 압도적인 공격력으로 몬스터들을 학살함과 동시에 금속 펫(?)으로 몸을 수월하게 보호하기까지 하였으니, 공수밸런스가 가히 완벽해 보였다.
“굉장하네요… 실례지만 직업이 어떻게 되세요?”
파브라늄의 도움을 받아서 상처 하나 없이 몬스터들을 쓸어버린 그리드가 아이템을 줍고 있는 사이, 그에게 슬그머니 다가온 유저들이 질문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옆에 떠다니는 그 금덩어리는 뭐에요? 설마 그게 펫인가요? 아니면 새로운 스타일의 방어구?”
“님, 어쩜 그렇게 세요? 사실은 엄청 고렙이죠? 고렙이 왜 이런 사냥터에 있는 거죠? 여기 뭐 좋은 템 나오나요?”
“님~?”
“님, 벙어리임? 대답 좀.”
여기 있는 유저들, 방금 전 그리드가 위기에 처했다고 여기면서도 누구 하나 도와주려 나서지 않았다.
그리고 그리드는 선천적으로 불친절한 사람이었다. 유저들의 질문에 일일이 친절하게 대답해줄 의무도 없었고 의욕도 없었다.
“남 일에 신경 끄고 갈 길들이나 가셔. 플라이.”
귀찮게 구는 유저들에게 한 마디 툭 뱉어준 그리드가 플라이를 사용하여 부양했다. 그리고 그대로 하늘을 날아서 사라져버렸다.
“…?”
자리에 남은 유저들은 어안이 벙벙해져서 두 눈만 깜빡였다.
그리고 몇 분 후부터 전 세계 각종 커뮤니티에 사람들의 흥미를 끄는 게시글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 방금 검사가 날아다니는 거 봄>
윈스톤에 포포숲이라는 곳이 있거든? 거기서 친구랑 사냥하다가 어떤 고렙 검사가 몹들 학살하는 걸 봤어. 근데 그 검사가 몹들 다 쓸어버리더니 나중에 플라이 써서 날아감. ㅋ 마검사 랭킹 1위라도 플라이는 못 쓰지 않냐? 그 검산 플라이 어케 쓴거임?
rnfkRk님의 댓글, ㅋㅋㅋㅋㅋㅋ검사가 날아다닌다길래 존나 세다는 건줄ㅋㅋㅋㅋㅋ
뚜루뚜루뚜빰님의 댓글, 검사가 플라이 씀? 난 성직잔데 힐 못 씀 ㅂㅅ야
흑화한 염룡의 오른팔님의 댓글, 크크… 그 검사가 바로 나다… 크크큭…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하였건만 내 무용을 목격한 자가 있었을 줄이야… 야레야레…
zkxhfm님의 댓글, 네다병
admiral님의 댓글, 너희 어머니께서도 너 낳고 미역국 드셨냐?
시급 3만원님의 댓글, 트래픽 아까우니까 똥글 싸지르지 마라.
대충 이런 식이었다.
플라이를 사용하는 전사 목격담을 개제했던 유저들은 부모님 안부를 물어보는 사람들이 속출하는 탓에 더 이상 함부로 목격담을 떠벌리고 다니지 않았다.
그래서 이날의 화제는 더 이상 회자되지 않고 일시적인 트러블에 그쳤다.
한편, 칸의 대장간에 도착한 그리드는 곧장 용광로 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파브라늄의 녹는점을 알아내기 위해서 파브라늄을 용광로에 넣고 온도를 조절하면서 실험을 했다.
“1,900도면 적당하네.”
파브라늄은 워낙 극소량이었던 탓에 순식간에 제련됐다.
“혼의 그릇을 만들 때까지 마냥 달걀 모양인 채로 갖고 다니기는 좀 구리니까, 이거로 뭔가를 만들고 싶은데…”
하지만 특정 아이템을 제작하기에는 양이 너무 적다. 이 정도 파브라늄으로는 단검 하나조차 만들지 못할 것이다. 굳이 아이템을 제작하려면 필연적으로 다른 재료를 섞어야만 했는데, 그리드는 이 순수한 파브라늄을 오염시키고 싶지 않았다.
“모양을 바꿔놓는 것으로 만족하자.”
파브라늄을 잠시 겪어본 바, 파브라늄은 주인의 곁을 항시 맴돌며 주인을 지키는 성향을 지녔다. 그 특징을 최대한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게 좋을 듯했다.
“달걀 모양보다 효율적으로 방어태세를 취할 수 있는 모양은… 아!”
그리드는 말락서스의 실드를 떠올렸다.
“녀석은 공격 받는 지점마다 마력으로 원반 형태의 방패를 형성시켜서 효율적으로 공격을 막아냈었지…”
따앙! 따앙!
그리드가 신중하게 망치질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파브라늄은 2개의 원반이 되었다. 각각의 크기는 어른 손바닥보다 약간 작은 정도였다.
“좋아.”
그리드가 완성시킨 원반들을 손에서 놓았다. 그러자 원반들이 둥싱둥실 공중에 떠오르더니 그리드를 중심으로 자전하기 시작했다. 그에 그리드는 든든함을 느꼈다. 대부분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때마침 대장간에 지슈카가 도착했다. 그리드가 그녀에게 부탁했다.
“화살 한 발 쏴 봐.”
“응?”
“어서.”
“흐음, 그래.”
그리드의 주변을 맴돌고 있는 소형의 황금 원반들을 확인한 지슈카가 그리드의 의도를 간파했다. 그리고 주저 없이 활을 꺼내더니 화살을 쏘았다.
슈욱!
쩌엉~!
놀라운 광경이었다.
그리드의 주변을 맴돌던 2개의 황금 원반 중 하나가 지슈카의 화살이 날아온 방향에서 멈추더니 그리드의 몸을 완벽하게 보호해줬다.
“그거 엄청나네…”
감탄하는 지슈카의 표정이 어째 썩 좋지가 않았다.
자존심이 상한 것이다.
“이렇게까지 간단하게 막히다니? 내가 화살을 너무 약하게 쐈나봐?”
“이, 이봐, 잠깐…!”
그리드가 기겁했다. 지슈카가 조금 전에는 시위를 가볍게 당겼다가 놓았던 반면, 이번에는 팔을 뒤로 활짝 젖히면서 시위를 최대한으로 당겼기 때문이다.
쐐엑!!
“으아아악~!”
신궁이 전력을 다하여 발사한 화살이 그리드의 어깻죽지를 향해서 날아갔다.
그리고!
쩌정!!
“…핫!”
그리드와 지슈카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지슈카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 흘린 거였고, 그리드는 기쁨에 벅차 환희하는 것이었다.
“강철마저 꿰뚫는 내 화살을 막아내다니… 엄청 튼튼하잖아? 브라함이 광물의 정점이라고 표현할만했네.”
그랬다. 황금 원반은 지슈카가 혼신을 다해 발사한 화살조차 완벽하게 막아냈다.
하지만 충격이 꽤 강했는지, 충돌지점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경직된 채 부르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리고 2초가 지나고 나서야 회복되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과도한 충격을 받을 경우에는 2초 동안 움직이지 못하는 거군…’
지슈카가 전력을 다한 화살을 연속적으로 퍼붓는 다면, 이 2개의 원반만으로는 몸을 완벽하게 보호할 수 없다는 뜻이다.
역시, 이번 퀘스트를 필히 완수하여 남아있는 파브라늄을 모조리 획득해야만 한다는 필요성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만한 크기의 파브라늄이 27개 더 있는 게 고작이라면, 그걸로는 갑옷 하나 만들기도 벅찰 텐데… 음, 뭐 그래도 문제없어. 충분히 써먹을 수 있다.’
그리드는 유연하게 생각했다.
물량이 한정 된 파브라늄을 가지고 굳이 완전체 아이템을 제작하고자 고집하기보다는, 차라리 다른 아이템에 탈부착시킬 수 있는 형태의 소형 아이템으로 여러 개 제작한다면 효율성을 극대화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예를 들면, 갑옷 등 쪽에다가 파브라늄으로 제작한 칼날을 부착시키는 거야. 그러면 그 칼날은 스스로 움직이면서 내가 반응하지 못하는 사각의 습격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거나 적이 예상치 못하는 각도에서 공격하면서 나를 든든하게 보좌해주겠지.’
세상에, 스스로 움직이는 아이템이라니! 이번 퀘스트를 클리어하고 나머지 파브라늄들을 획득할 수만 있다면, 진정한 템빨의 역사를 써나갈 수 있을 것이다.
희열에 차있던 그리드는 누군가 대장간 문을 노크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지슈카에게 물었다.
“이 원반들, 굳이 사람들한테 노출시키고 다닐 필요는 없겠지?”
“당연하지. 비장의 수단은 되도록 숨겨두는 게 상식이잖아?”
“음.”
그리드가 자전하고 있는 원반들을 붙잡아 인벤토리에 넣었다. 그리고 대장간 문을 열었다.
1명의 기사가 수십 명의 병사들을 대동하고 서있었다.
그리드에게 경례한 그가 예의바르게 말했다.
“스테임 백작님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스테임 백작? 아이린 영주님의 아버지요?”
“예.”
“오? 좋아! 어서 가죠!”
북부의 주인이자 에트날 왕국 최고의 권력가중 하나인 그 거물이 어째서 그리드를 찾는단 말인가? 애초에, 콧대 높기로 유명한 NPC 기사가 플레이어에게 깍듯이 대하는 모습 자체가 이질적이다.
지슈카는 기사와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대장간을 떠나는 그리드를 보면서 할 말을 잃었다.
“쟤 대체 뭔데?”
아무래도 반트너의 갑옷 제작 의뢰는 잠시 미뤄둬야 할 분위기다.
“그 장식은 이쪽으로!”
“어이, 새로 교체한 커튼 색감이 벽지와 매치가 안 된다. 이전 것으로 다시 교체해.”
“주방장! 음식 준비 다 됐어요?”
“카펫 위에 먼지가 남았잖아! 청소 다시 해!”
윈스톤 성에서 근무하는 80명의 하인 전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잠시 후면 윈스톤 최고의 귀빈이 당도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한데 정작 그 귀빈을 초대한 당사자, 스테임 백작의 표정이 영 탐탁치 못했다.
‘마음에 안 들어…’
스테임 백작에게 자식이라고는 아이린 한 명 뿐이었다. 그야말로 금이야 옥이야 키운 사랑스러운 딸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우며 착하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거기에 배경까지 손색없으니 내 딸을 데려 갈만한 사윗감은 최소 일국의 왕자쯤은 돼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한데!
사교계에서도 도도하기로 유명한 내 귀한 딸이 사기꾼으로 추측되는 평민 따위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이 무슨 낭패란 말인가!
“흥흥흥~”
싱글벙글, 아이린은 애비 속도 모르고 만면에 미소 지은 채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림의 시간을 만끽하는 그 모습은 마치 서방님 기다리는 새색시 같았다.
스테임 백작의 속이 점점 더 까맣게 타들어갔다.
‘그리드라고 했던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자는 사기꾼에 불과하다.’
그리드는 전 영주와 메로 상단의 마수로부터 윈스톤을 구한 영웅이며, 가문의 가보로 삼은 무아지경의 검의 제작자라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이린의 생명의 은인이기도 했다.
아니, 이게 말이나 되는가?
젊은 나이에 최고의 명검을 제작한 대장장이라는 사실조차 믿기지 않을 지경이건만, 여덟 종 중 하나인 말락서스를 해치우고 야탄교의 잔당들로부터 무사히 아이린을 구출할 정도로 뛰어난 검술 실력까지 갖췄다니?
생각하면 할수록 불가능한 일이다.
필시 아이린이 그에게 속고 있는 것이다.
‘내 딸아… 사기꾼 따위에게 농락당하다니… 네가 공교롭게도 남자 보는 눈이 없나 보구나. 어서 와라, 그리드! 내가 네놈이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밝혀줄 터이니!’
“백작각하.”
이를 갈며 벼르고 있는 스테임 백작의 곁으로 한 젊은 청년이 다가왔다.
그는 금발 벽안의 귀공자였다. 고급스러운 옷차림과 기품 있는 몸가짐을 통해서 귀족다운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블란드 데 이안!
파트리안의 영주, 아슈르 백작의 차남이자, 스테임 백작의 검술 제자이며 기사이다. 그리고 아이린의 소꿉친구이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아이린을 흠모해온 그는 현재 스테임 백작보다 더 큰 분노와 질투에 휩싸여 있었다.
“제가 밤새 생각해본 결과 그리드라는 사내는 필시 사기꾼입니다.”
스테임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나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서 그가 오길 기다리자꾸나. 그자의 실체를 우리가 반드시 밝혀내는 것이다!”
“예!”
그리고 잠시 후.
스테임 백작과 블란드, 그리고 아이린이 각기 다른 심정으로 애타게 기다려온 그리드가 드디어 입성했다.
기사들에게 알현실까지 인도된 그가 스테임 백작 앞에 무릎 꿇고 예를 갖췄다.
“위대하신 북부의 주인, 스테임 백작님을 뵙습니다.”
평소에는 꾀죄죄한 초보자용 옷차림으로 다니는 그리드였지만, 지금은 귀족을 만나는 자리이니만큼 나름 행색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성에 오는 길에 옷가게에 들러서 무려 1골드나 하는 연회복을 사 입은 것이다.
하지만 1골드짜리 연회복이라는 것은 초보 유저들에게나 사치품일 뿐, 중레벨 유저들 눈에조차 싸구려로 보일 정도로 조잡하며 재질이 좋지 못했다. 명문가 귀족들의 눈에는 거지꼴이나 다름없었다.
‘행색하고는…’
그리드는 후줄근한 옷차림에 생김새도 영 별로였다. 팔뚝과 어깨 근육이 발달한 것을 보아 육체만큼은 제대로 단련하고 있는 듯했으나 특별한 수준은 아니었다.
내가 그리드보다 못한 요소는 단 하나도 없다! 확신하고 기고만장해진 블란드가 버럭 고함쳤다.
“스스로가 누구인지 밝히는 것부터가 도리이거늘! 네놈, 아무리 근본 없는 평민이라도 그렇지 기본적인 예의조차 모르는 게냐?”
그리드는 아차 싶었다.
본래 귀족에게 인사를 할 때는 앞서 자신의 신분부터 밝히는 것이 예법이었다.
‘귀족을 너무 오래간만에 만나서 실수했군.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리드는 머리 위에 ‘블란드’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젊은 귀족 놈이 탐탁치 못했다.
‘저 새끼는 누군데 저렇게 고압적이고 신경질적이야?’
그리드는 자신이 이곳에 불려온 이유가 무엇인지 눈치 채고 있었다.
무아지경의 검의 제작자이자, 윈스톤과 아이린을 구한 영웅으로서 스테임 백작에게 공적을 치하 받기 위함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한데 환대받기는커녕 다짜고짜 저런 반응을 보이니 영 불쾌했다.
하지만 인내했다.
‘귀족들이 지랄 맞은 것이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내 장인이 될 수도 있는 스테임 백작에게 찍히고 싶지도 않으니…’
빙그레.
간신히 얼굴을 펴고 웃은 그리드가, 실수를 수정하여 다시금 예를 갖췄다.
“윈스톤에 거주 중인 대장장이 그리드가 위대하신 북부의 주인, 스테임 백작님을 뵙습니다.”
그제야 스테임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래. 내 자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네. 이렇게 직접 만나니 기쁘군. 한데 자네… 스스로를 대장장이라고 소개하는 겐가? 뛰어난 검사이기도 하다던데?”
그리드가 겸손하게 설명했다.
“검사라니, 가당치도 않습니다. 천직은 대장장이이며 검술은 얕게 익히고 있을 뿐입니다.”
“허허, 말락서스를 해치울 정도의 검술이라면 결코 얕다할 수 없을 터인데? 최고라 자부해야하지 않겠는가?”
“말락서스는 저 혼자서 해치운 것이 아닙니다. 동료들과 함께였습니다.”
“하지만 수십 명의 야탄의 신도를 단신으로 해치운 것은 사실이겠지? 아이린이 직접 목격하였다는데.”
“그것은 사실이지만… 야탄의 신도들이 워낙 약하여 제 얕은 검술로도 상대할 수 있었던 것뿐입니다.”
“허… 야탄의 신도가 약하다? 온 나라의 병사들과 백성들을 수십 년 째 괴롭혀온 그들이 그렇게 하찮은 존재였던가? 자네가 싸운 상대들이 정녕 야탄의 신도가 맞았던 겐가? 애초에 아이린을 납치한 것이 정녕 야탄교인가? 어쩌면 누군가가 자신을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서 모든 일을 거짓으로 꾸미고 아이린을 속인 것은 아니었을까?”
꼬치꼬치 캐물으면서 이야기를 이상한 방향으로 몰아가는 스테임 백작이 영 수상했다.
사태를 파악한 그리드가 이를 갈았다.
‘스테임 백작, 무아지경의 검을 푼돈에 팔아주고 네 딸내미의 목숨까지 구해준 나를 대려 사기꾼으로 몰아가는 거냐?’
심히 불쾌하다.
그리드는 울화통이 치밀었다. 상대가 대귀족인만큼 겸손함의 미덕을 보이고자 노력하였건만, 괜한 짓이다 싶었다.
그리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그때, 보다 못한 아이린이 나섰다.
“아버님! 대체 무슨 의도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건가요? 지금 그리드 님을 의심하고 계신 건가요?”
“그렇다!”
결국 스테임 백작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그리드! 미안하네만 자네가 영 수상하다네! 대륙 최고 수준의 대장장이임과 동시에 최강의 검사라니? 상식적으로 그런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믿기질 않는군! 우선 검술 솜씨가 진짜인지부터 확인해보겠네! 블란드!”
“예, 각하!”
차앙~!
스테임 백작이 호명하자, 블란드가 기다렸다는 듯이 칼을 뽑았다. 그러더니 문답무용으로 그리드에게 달려들었다.
‘그래, 차라리 잘 됐다.’
이렇게 솔직하게 나와 준다면 의심을 해소하기가 오히려 편해진다. 긍정적으로 생각한 그리드가 인벤토리로부터 다인슬레프를 꺼냈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어차피 이렇게 됐으니 내숭 따위 관두죠! 예, 사실 제 검술은 결코 얕지 않습니다! 저 겁나게 세니까 각오하쇼!”
“각오? 그런 건 네놈이나 해라!”
높이 도약했던 블란드가 어느새 그리드의 머리 위로 검을 내리 찍고 있었다.
쩌엉!
“…?!”
블란드는 당혹을 금치 못했다. 육체의 무게까지 실어서 전심전력으로 가한 일격이, 그리드가 한 손으로 휘두른 대검에 의하여 간단하게 무력화되었기 때문이다.
‘칫! 천한 것이라 평소에 힘쓰는 일을 많이 하다 보니 근력만큼은 발달했나보군!’
힘겨루기는 어렵다고 판단한 블란드가 검격을 교환하며 발생한 반발력을 이용, 공중에서 한 바퀴 회전하면서 착지했다. 그리고 착지와 동시에 몸을 최대한 낮추고 그리드의 하단을 노려 공격했다.
그리드가 대검을 바닥에 꽂았다.
그러자 그리드의 발목을 향해 날아가던 블란드의 검이 대검에 가로막히고 멈춰버렸다.
‘싸움에 능숙하다!’
블란드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리드를 필시 사기꾼이라 여겼고, 겉모습을 보아 허접한 거지놈이라 확신하였건만 직접 겨뤄보니 실력이 제법이지 않은가? 급히 몸을 일으켜 재정비하려는 그의 옆구리를 그리드가 발로 뻥! 걷어찼다.
“컥…!”
위액을 쏟아내며 우당탕탕 날아가 버리는 블란드!
어지럽혀진 카펫 위에 축 늘어진 그에게 그리드가 살짝 고개 숙였다.
“귀한 집 자제분 같은데 손찌검… 아니, 발찌검을 해서 죄송하게 됐군요.”
“이, 이놈…!”
기사 NPC들의 레벨은 최소 180이다. 그리고 기사 중에서도 실력이 출중한 편인 블란드의 레벨은 무려 200이었다.
그만한 존재가 지금, 114레벨에 불과한 그리드에게 압도당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리드의 스탯은 200레벨 이상이라고 여겨도 손색없을 정도로 높았으며, 그리드가 무장한 아이템들은 대부분 사용 조건이 200을 상회하고 있었다. 특히 다인 슬레프는 현존 최강의 무기다.
스탯빨과 템빨, 거기에 전사 시절 쌓아온 전투 기술까지 복합 된 그리드의 강함은 레벨 차이를 무의미하게 만들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블란드도 만만치 않은 존재였다.
그의 아버지 아슈르 백작은 에트날 왕국 최고의 마법사 중 한 명이다. 그 또한 아버지의 재능을 이어받아 마법에 일가견이 있었다.
그렇다. 사실 그는 마검사였던 것이다. 그것도 공격이나 방어계열 마법이 아닌, 버프 마법과 디버프 마법에 능통한, 1대1 대인전에서 가장 강력한 속성의 마검사였다.
“검의 은총! 갑옷의 의지!”
마법을 사용한 블란드의 검과 갑옷이 푸른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마력이 깃들어 강화된 것이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폭풍의 격노!”
블란드를 중심으로 거센 바람이 휘몰아쳤다. 바람 속성의 마력이 블란드의 모든 속도를 증가시켜주었으며 일정량의 실드를 제공했다.
‘이제 무조건 이긴다!’
확신한 블란드가 여유를 되찾고 지껄였다.
“나는 위대한 대마법사 아슈르 백작의 차남! 그 피를 이어 강력한 마법을 구사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하하! 스테임 백작님의 검술과 아버지의 마법까지 함께 구사하는 나를 네놈이 어찌할 수 있을쏘냐?!”
“아슈르 백작…?”
그리드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아슈르 백작!
그가 누구인가?
전사 시절의 그리드에게 북쪽 끝의 동굴을 찾아 파그마의 기서를 가져오라 지시했던, 요새도시 파트리안의 영주이다.
당시 그리드는 레벨대에 맞지 않는 퀘스트를 강제로 떠맡은 탓에 몇 달 동안 개고생을 했었다.
수십 번도 더 넘게 죽고 끝없는 렙따를 경험하였으며, 수많은 아이템을 잃고 빈털터리가 되어 빚쟁이 인생이 더욱 더 나락으로 떨어지는 계기가 됐다.
그때 그리드는 정말이지 몇 번이고 게임을 접고 싶었었다. 게임에 접속하는 것 자체가 지옥 같았다. 차라리 군대를 한 번 더 가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진즉에 게임을 접고도 남았을 고통을 느꼈다.
하지만 그리드가 가진 장점이라고는 끈기밖에 없었기에, 그는 인내하고 또 인내하여 퀘스트를 진행했고 끝내 파그마의 기서를 발견했다.
하지만 해피엔딩을 맞이하지는 못했었다. 여차저차 하다 보니 아슈르 백작에 의해서 요새도시 파트리안에서 쌓아왔던 모든 명성이 악명으로 전환됐고, 아슈르 백작의 기사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등, 당시로서는 최악의 결과를 맞이하게 됐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아슈르 백작이 준 퀘스트 덕분에 파그마의 후예라는 레전드리 직업으로 전직, 인생 역전의 발판으로 삼을 수 있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그리드의 노력으로 쟁취할 수 있었던 결과물이다. 그리드는 아슈르에게 악감정만 가득했다.
“오호라, 아슈르 백작님의 아드님이라 이거지?”
그리드는 언젠가 고렙이 되면 반드시 아슈르 백작을 찾아가 죽여 버리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했었다.
그리고 지금! 그 깊은 원한 중 일부라도 갚을 수 있을만한 대상을 포착하였으니!
스스로를 아슈르 백작의 차남이라고 밝힌 눈앞의 블란드였다.
그리고 블란드는 여전히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있었다.
“하하하! 내 정체를 알게 되었으니 더욱 더 두려울 테지! 하지만 이미 늦었다! 네놈은 내게 완전히 찍혔어!”
블란드는 대귀족의 자제로서 귀하게 자랐고, 뛰어난 재능을 가진 덕분에 승승장구해왔다. 하여 그는 스스로를 위대하다고 자부하였다. 눈앞의 거지꼴인 평민 따위가 일생일대의 강적이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기고만장했다.
“폭풍의 주박!”
블란드가 자랑하는 디버프 마법이 그리드를 목표로 발동되자 강력한 바람의 기운이 그리드의 전신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로서 그리드는 손 끝 하나 움직이지 못할 터!
회심의 미소를 지은 블란드가 전과 비할 바 없이 빠른 속도로 그리드에게 돌진, 그리고 마력이 깃들어 강화 된 검을 찔러 넣었다.
[강력한 바람이 당신의 육체를 억압합니다. 2초간 민첩성이 0이 되며 움직일 수 없습니다.]
[저항하였습니다.]
알림창을 확인한 그리드가 피식, 조소했다.
“파그마의 검무.”
‘파그마? 파그마라고?! 서, 설마!’
작게 읊는 그리드의 목소리를 명확하게 들은 스테임 백작이 경악했다. 그리고 그리드가 더 없이 현란한 검무를 펼쳤다.
“연(連)!”
쩌정! 쩌저정! 퍼퍼퍼퍼퍽!
거대한 대검이, 그 육중한 무게에 걸맞지 않게 신속하게 10회 동시다발적으로 휘둘러졌다.
그에 블란드의 공격은 쉽사리 무력화되었고, 블란드의 육체를 보호해주고 있던 바람의 실드는 산산조각 났으며, 마력에 강화되어 있던 갑옷조차 무참히 찢겨져나갔다.
“크아아아악!!”
블란드는 믿을 수가 없었다.
손 끝 하나 움직이지 못해야할 녀석이 어떻게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것인가! 그리고 듣도 보도 못한 이 광속의 검술은 무엇이란 말인가!
피피피핏!
각기 다른 궤도로부터 그려지는 10개의 묵색 검광에 휩쓸린 블란드의 육체에서 붉은 선혈이 낭자했고, 블란드는 결국 무릎 꿇고 말았다.
‘내가 지다니…! 내가! 이 내가!’
사모하는 여인과 존경하는 스승 앞에서 꼴불견을 보였다.
블란드는 이대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몸을 일으켜 그리드를 찢어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상처투성이 몸이 의지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좌절하고 있는 그에게 콧방귀 뀌어준 그리드가 상석에 올라있는 스테임 백작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고개를 빳빳하게 세우고 따지듯이 물었다.
“이것으로 검술 실력에 대한 의심은 풀렸습니까? 그럼 다음은 대장장이 실력까지 보여드릴까요? 예?”
“그래! 그거 좋지! 좋아! 나는 자네의 모든 것을 알고 싶다네! 하지만 그 전에!”
스테임 백작이 허둥지둥, 상석에서 내려와 그리드 앞까지 달려왔다. 그리고 그리드의 두 손을 꽉 붙잡고 말했다.
“그리드! 부디 내 딸을 신부로 맞이해주게나!”
최고의 대장장이임과 동시에 최강의 검사인 존재가 역사상 딱 한 명 존재했었다.
바로 그 이름도 유명한 파그마다. 그리고 스테임 백작은 그리드가 파그마의 후예임을 눈치 채고 말았다.
지금 이 순간, 그리드는 Satisfy를 플레이하는 20억 유저 중 최초로 귀족의 사위라는 지위를 획득하려하고 있었다.
과거, 유라의 방해를 받아 도란의 퀘스트를 실패하고 획득하지 못했던 그 지위 말이다.
그리드에게 있어서는 최상의 전개였다.
‘최고의 돈줄이 생기는 건가!’
영주의 남편이 되어 영주를 잘만 구슬린다면, 직권을 남용해서 세금을 일부나마 슬쩍 가로채는 게 가능하지 않겠는가?
윈스톤은 에트날 왕국을 대표하는 대도시 중 하나로 성장했다. 이곳에서 거둬들이는 세금은 막대하였으니, 그중 일부만 챙길 수 있어도 금방 부자가 될 터였다.
그리고 아이린은 명문 귀족 가문의 후계자다. 그녀와 혼인하면 단순히 부자만 되는 게 아니라 고위 귀족이 될 수도 있다.
‘재물과 권력을 동시에 거머쥘 수 있다는 뜻이지.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린은 예뻤다.
반짝이는 은발. 커다란 눈망울과 끝이 살짝 처진 눈꼬리. 항상 웃고 있는 입가와 앙증맞은 콧대.
그녀는 온화한 인상의 미소녀였다. 성품이 훌륭하기로도 유명하였으니, 가슴 사이즈가 평균적이라는 점만 제외하면 흠 잡을 곳 없는 최고의 여성이었다.
그리드로서는 이 혼담을 거절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짚고 넘어가야할 부분이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백작님께서는 저를 사기꾼이라 의심하지 않으셨습니까? 한데 갑자기 따님을 신부로 맞이하라 말씀하시다니… 진심이십니까?”
수상쩍게 쳐다보는 그리드에게 스테임 백작이 설명했다.
“최고의 대장장이 실력과 최강의 검술 실력을 겸비한 존재가 역사상 딱 한 명 존재했다는 사실을 상기하였다네. 바로 파그마 말일세.”
“…….”
“자네가 사용한 검무, 전설 속에 묘사 된 파그마의 검무와 매우 흡사한 구석이 있더군. 그래, 자네는 사기꾼 따위가 아니었어. 필시 파그마의 후예일 테지.”
“제가 파그마의 후예인 이상 사윗감으로 충분하다, 이 말씀이군요?”
“그렇지! 충분하다마다! 오히려 과분할 지경일세!”
힐끗, 시선을 돌린 그리드가 아이린의 반응을 살폈다. 얼굴에 홍조를 띄운 채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는 모습을 보아, 그녀 또한 이 혼담에 긍정적인 듯했다.
‘흐흐흐!’
그리드가 주르륵, 군침을 흘렸다.
첫사랑과 최악의 결말을 맞이한 이후, 두 번 다시는 여자와 인연이 없을 줄로만 알았건만 아이린이라는 최고의 신붓감을 맞이할 기회가 오다니!
혹자는 게임 NPC 따위를 어떻게 여자로 치냐고 비웃겠으나, Satisfy는 보통 게임이 아니고 또 하나의 현실이다.
Satisfy의 NPC들은 현실의 인간들과 살고 있는 세계만 다를 뿐이지 감정, 생각, 육체, 생리욕구 등등 모든 면에서 인간과 똑같았다.
감격에 겨운 그리드가 급기야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드디어 총각 딱지를 떼는 건가…!’
27년 동안 원치 않게 지켜온 순결을 박살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그리고 신분 상승과 동시에 부자가 될 수 있다.
그리드는 이 일생일대의 기회를 결코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당장 결혼해서 첫날밤부터 치르고 싶지만… 우선은 전직 퀘스트부터 진행해야하는데… 대장장이 생활도 계속해야하고.’
그리드가 사정을 설명했다.
“저야… 아름답고 상냥하신 아이린 영주님과 부부의 연을 맺을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영광입니다. 하지만 개인적인 용무가 있는 터라 당장은 혼인하기가 어렵습니다. 또한, 혼인 후에도 저는 대장장이 일을 계속 하고 싶습니다만… 대귀족가문의 사위가 한낱 대장장이여도 괜찮으신 겁니까?”
“자네는 보통 대장장이도 아니고 파그마의 후예이지 않은가? 자네가 대장장이 일을 하는 것은 치부가 아니라 대려 가문의 자랑거리가 될 것일세. 그리고 혼인 일정은 자네가 편한 시기로 맞춰줄 의향이 있다네.”
“안 될 말씀입니다!”
그리드와의 싸움에서 패배한 후,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던 블란드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각하! 저자는 부정한 존재입니다! 신의 저주를 받았단 말입니다! 죽어도 다시 되살아나며 심지어 늙지도 않습니다! 명확히 말해서 인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저딴 자를 사위로 맞이하시겠다니, 진심이십니까?!”
부정한 존재란, Satisfy의 NPC들이 유저들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호칭 중 하나다.
NPC들의 입장에서는 죽어도 되살아나며 늙지도 않는 유저들이 도저히 같은 인간으로 보이질 않았다. 그래서 NPC들은 유저들을 신의 저주를 받은 존재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 반대로 생각하는 NPC들도 많았다. 스테임 백작이 그런 경우였다.
“영생이 어째서 저주지? 오히려 축복이 아니더냐? 나는 저들을 부정하다 생각하지 않고 축복 받은 존재라 여기고 있다. 저들은 필시 신의 사랑을 받고 있을 터다. 내 딸의 신랑이 될 사내가 신의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사실이 나는 기쁠 따름이다.”
블란드가 이를 갈았다.
“축복? 착각하시는 겁니다! 아이린 영주님 혼자서만 늙어갈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각하께서는 아이린 영주님께서 얼마나 외롭고 슬픈 말년을 보내게 될지 정녕 예상치 못하시는 겁니까?! 지금 각하께서는 욕심에 사로잡혀서 아이린 영주님을 전혀 배려하지 못하는 게 아닙니까!”
“그건 두 사람이 감당해야할 문제다. 우리가 왈가왈부할 것이 아니지.”
아이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블란드 경, 나는 그리드 님을 연모하고 있어요. 그리드 님의 모습은 앞으로 평생 변치 않고, 나 혼자만 늙어가는 처지가 설령 슬프고 외롭게 느껴지는 날이 올지라도 감당할 수 있어요. 그리드 님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꽈드득!
사실, 지난 수년간 블란드는 아이린에게 자신의 마음을 몇 차례나 고백했었다. 하지만 아이린은 블란드를 이성으로 봐주질 않았고, 결국 블란드는 아이린과 맺어지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멀리서나마 그녀를 지켜보는 길을 선택하고 그녀 가문의 기사가 됐다.
그리고 진심으로, 아이린이 훌륭한 남자를 만나 행복하기를 기원해왔다.
한데 결국 선택한 남자가 저따위라니!
‘각하께서 이리 나오실 줄 몰랐다… 파그마의 후예라는 것이 신분을 초월할 정도로 대단한 존재인건가?’
파그마는 전설이 된 존재다. 파그마가 대단한 인물이라는 사실쯤은 블란드 또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파그마의 능력을 계승한 인물일 뿐, 파그마 본인이 아니다. 분명히 파그마보다 못할 것이었다.
블란드는 그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다. 자신이 그리드를 쓰러뜨린다면, 파그마의 후예는 파그마와 달리 별거 아닌 존재로 전락할 것이고, 스테임 백작이 마음을 바꿔 이 혼담이 취소될 수도 있었다.
결심한 블란드가 다시금 검을 쥐었다.
“그리드! 재결투를 신청한다!”
아까는 방심했던 것이 컸다. 다시 싸울 경우 필시 아까보단 나은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믿은 블란드가 온갖 버프 마법으로 능력치를 강화했다. 그리고 스테임 백작에게 전수 받은 기술에 자신의 마력을 접목시켜서 탄생시킨 비기, 폭풍검을 사용할 태세를 갖췄다.
쿠오오오오오!!
블란드가 마력으로 생성시킨 폭풍이 알현실의 카펫과 장식들을 이리저리 휘날리게 만들었다. 사방이 난장판이 되는 가운데, 블란드의 검 끝으로 막강한 마력이 집약됐다.
그 기운이 어찌나 강맹하고 매서운지, 한참이나 물러나 있는 아이린의 여린 살결에 저절로 상처가 생겨날 지경이었다.
“블란드 경! 멈춰요!”
아이린이 애타게 소리쳤지만 블란드는 막무가내였다.
‘기필코 내 선에서 저 녀석을 정리하겠다!’
이는 신성한 의무다.
사랑하는 여인이 불행해지지 않도록, 잘못 엮어지려하고 있는 인연의 끈을 끊는다!
콰앙!
“우오오오오!!”
폭풍을 부스터엔진으로 삼은 블란드의 육체가 순식간에 그리드에게 근접했다.
그를 마주한 그리드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다시 덤벼? 이 자식이 주제파악을 못하고 있군.’
그리드는 제(制)를 사용하여 블란드를 스스로 물러나게 만들 수도 있었고, 플라이를 사용하여 블란드의 공격을 가뿐히 회피할 수도 있었으며, 파브라늄을 꺼내서 공격을 방어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정면승부를 택했다.
블란드가 두 번 다시는 덤비지 못하도록, 확실한 힘의 차이를 주지시킬 의도였다.
“파그마의 검무, 살(殺)!”
퍼어어어어엉!!!
증오와 살의가 집약 된 다인슬레프와, 폭풍의 마력이 집약 된 블란드의 검이 정면에서 충돌했다.
그와 동시에 발생한 충격파가 알현실을 지탱하고 있던 기둥들과 내벽을 박살냈고, 그로 인해 알현실의 천장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블란드, 이놈!”
멋대로 행동한 블란드 탓에 아이린이 크게 다칠 뻔했다. 폭발 속에서 아이린을 간신히 구출한 스테임 백작이 격노했다.
“아이린이 상처를 입게 만들다니! 네가 본분을 망각하였구나! 내 아주 혼쭐을…!”
스테임 백작이 도중에 말을 멈췄다.
이미 블란드는 넝마가 되어 쓰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그리드는 상처 하나 입고 있지 않았다. 싸구려 연회복이 조금 찢어졌을 뿐이다.
정신을 잃은 채 스테임 백작의 품에 안겨있는 아이린을 확인한 그리드가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말했다.
“제 탓에 영주님께서 다치시고 말았군요.”
스테임 백작이 정색했다.
“이게 왜 자네 때문인가? 모두 내 불찰일세. 애초에 자네를 무조건 의심하고 난폭하게 굴어 이번 일을 자초했네. 자네에게는 큰 실례를 범했군. 미안하네.”
스테임 백작이 고개 숙여 사과했다.
긍지 높은 귀족. 그것도 대귀족이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상대에게 고개 숙이는 경우는 없다. 하지만 스테임 백작은 다른 귀족들에 비해서 권위보다 도리를 중요시했기에 솔직히 사과할 수 있던 것이다.
‘장인이 될 양반이 생각보단 덜 꼬장꼬장해서 마음에 드는군.’
흡족함을 느끼고 얼굴을 편 그리드가 스테임 백작에게 요청했다.
“진심으로 미안하시다면 사죄의 뜻으로 부탁하나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당돌하게도 말하는 그리드 탓에 스테임 백작은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당당하기가 이를 데 없군… 과연 전설의 후예라 이건가.’
그 패기가 마음에 든다.
시원스럽게 생각한 스테임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자네는 아이린과 윈스톤의 은인이며 무아지경의 검의 제작자로서 포상 받아 마땅하다네. 그래, 무엇이든지 부탁하게나. 내 최선을 다해 들어주지.”
“스테임 백작가문은 예로부터 레베카교와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 들었습니다. 용무가 있어서 레베카교의 교황을 알현하고자 하는데… 혹시 소개서를 써주실 수 있겠습니까? 백작님의 소개서가 있다면 교황이 저를 만나줄 수도 있을 듯해서요.”
스테임 백작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자네는 말락서스를 해치운 인물이 아닌가? 교황께서도 기꺼이 자네를 반겨줄 것일세.”
그 후, 소란 탓에 연회는 취소되었고 그리드는 아이린과의 혼인을 약조한 뒤 소개서를 받아 성을 떠났다.
그리고 칸의 대장간으로 되돌아온 그를 기다리고 있는 인물이 있었으니…
“네가 그리드냐?”
양쪽 뺨에 짐승의 발톱을 연상시키는 문신을 새겨놓고 있는, 건장한 체구의 사내였다. 벼락이라도 맞은 것 마냥 위로 치솟아 있는 회색 머리카락이 시선을 끌었다.
그의 아이디는
‘툰’
. 얼마 전, 강도 높은 실력 테스트를 통과하여 체다카 길드에 새로 가입한 6명의 랭커 중 한명이었다.
그가 초면인 그리드에게 명령조로 말했다.
“네가 그렇게 대단한 대장장이라며? 내 무기도 하나 만들어봐라. 거 뭐냐, 얼마 전에 길거리에서 자이언트 길드 놈들 박살낸 가면 쓴 놈 있지? 걔랑 한 번 싸워보려는데 기왕이면 좀 더 센 무기가 필요한 것 같아. 그러니까 얼른 내 무기 만들어. 새무기 들고 가서 그 새끼랑 싸우게. 캬악~ 퉤!!”
가래침을 뱉으며 건들건들 말하는 툰은 전형적인 건달 같았다. 그리드를 한동안 괴롭혔던 엄마 마음 행복금융의 임직원 일동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리드가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너, 지금 어디다가 침 뱉었냐?”
“핫? 하하핫!!”
툰은 눈을 부릅뜨고 말하는 그리드가 가소로웠다. 길드 정보창에서 확인해보니 100레벨 초반밖에 안 되는 대장장이 나부랭이 자식이 세게 나오니까 귀여울 지경이었다.
“얌마, 네 대장장이 실력이 뛰어나서 다른 길드원들이 꽤나 예뻐해 주나보던데… 난 달라. 내가 이 길드에 가입한 이유는 오로지 그 가면 쓴 놈에게 접근하기 위해서다. 난 그놈이랑 싸워서 이기면 이깟 길드 바로 떠날 거야. 알겠냐? 이제 분위기 파악 돼? 나는 남들과 달리 네 비위 맞춰줄 생각 따위 없다, 이거야. 죽기 싫으면 좋게 말할 때 빨리 무기 만들어라. 엉~? 캬악! 퉷!!”
“…….”
새로 가입한 6명의 길드원들은 길거리에서 자이언트 길드를 박살낸 가면의 사내가 바로 그리드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아직 완벽하게 신용할 수 없는 그들에게 그리드의 정보를 유출시키지 않으려고 길드원들이 쉬쉬했기 때문이다.
“야, 근데 너도 그 가면 쓴 놈 아이디 모르냐? 다른 길드원들한테 물어봐도 죄다 누군지 모르겠다고 시치미 뗀단 말이지? 썩을, 그냥 가르쳐주면 될 것을 왜 굳이 숨기는 거야? 찾아다니기 귀찮게시리… 캬악~~ 퉤!!”
그리드의 인내심이 한계치에 이르렀다.
“아… 거참, 귀족 앞에서 내숭 떨다 오느라 안 그래도 피곤하던 차였는데, 이젠 별 호로새끼까지 나타나서 사람 더 피곤하게 만드네. 야, 이 #$!~새끼야.”
이 대장간은 그리드에게 매우 소중한 곳이었다.
칸과의 인연이 시작된 장소이며, 대장장이로서 본격적으로 일하기 시작한 장소이다. 벌써 많은 추억이 생겼고, 앞으로도 쭉 이곳을 사용할 예정이다. 조금 과장되게 표현하자면 운명의 장소라고 말해도 좋다.
이곳에 별 잡놈이 함부로 발을 들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열 받는데, 계속 가래침을 뱉어대니 그리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진심으로 분노한 그가 이상적인 단검을 뽑아 쥐었다.
“내 신성한 일터를 더럽힌 죄로 넌 혼 좀 나야겠다.”
“풋!”
툰이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푸하하하핫!! 이야~! 이거 대장장이 나부랭이가 엄청 화났나보네? 신성한 일터? 크하하하하!! 프로의식 한 번 죽여주는구먼!!”
철컥!
툰이 오른손을 힘차게 휘둘렀다. 그러자 그의 손목에 장착된 채 칼날을 숨기고 있던 크로우로부터 3개의 칼날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대로 그리드에게 접근한 툰이 살기등등한 표정으로 말했다.
“감히 내 앞에서 무기를 빼들어? 괘씸한 새끼, 죽어라.”
진심이다.
툰은 그리드가 두 번 다시 까불지 못하도록 일단 한 번 죽여줄 각오였다.
쩌엉!!
맹수의 발처럼 빠르고 무겁게 휘둘러진 툰의 크로우가 그리드의 가슴을 크게 할퀴었다. 이상적인 단검을 들어 방어한 그리드가 반쯤 주저앉았다.
‘열라 세네?’
그리드는 당황했다. 말락서스 레이드 이후, 유니크 아이템과 레전드리 아이템을 제작하고 레벨업을 반복하면서 부쩍 성장한 그의 근력 수치는 현재 1,000을 상회하고 있었다. 그 누구와 힘겨루기를 하더라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한데 난처하게도 툰과의 힘겨루기에서는 완전히 밀리고 있었다.
끼긱! 끼기긱!
크로우에 맞물린 단검이 경련하며 차츰 아래로 내려간다.
이대로는 크로우의 기다란 칼날에 가슴이 베이겠다고 판단한 그리드가 결국 한 발 물러섰다. 단검을 비스듬히 기울여서 크로우를 흘려보낸 뒤 공격을 회피, 툰과의 거리를 벌렸다.
‘내가 이기기 힘든 상대인건가?’
그리드는 스스로가 강하다는 사실을 이제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아직 통한의 가시를 얻기 전, 길드 내에서 가장 약했던 이벨린보다는 확실히 강하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이벨린은 자이언트 길드원들을 상대로 패배했지만 그리드는 압도적으로 승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길드원들과는 강함의 척도를 정확하게 재볼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그리드는 자신의 실력이 몇 위대 랭커에게까지 통용되는지 확실하게 알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눈앞의 툰은 통합랭킹 40위였다.
툰이 휘파람을 불었다.
“휘익~ 뭐냐, 너? 내 공격을 막은 것으로 모자라 흘려보낸거야? 훌륭한데?”
씨익.
툰의 입 꼬리가 치솟아 올랐다. 그리드가 보통 대장장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 채고 흥미를 느낀 것이다.
“재밌어!!”
번쩍!
툰의 안광이 붉게 물들었다. 그리고 그의 근육 투성이 몸 위로 회색털이 마구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 순간 폭발적인 기운이 발산되며 그리드를 위축시켰다.
‘엄청난 힘이 느껴진다…!’
그리드는 이자와 제대로 싸우려면 전력을 다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인벤토리로부터 다인슬레프와 서릿빛 오크 족장의 투구를 비롯한 모든 아이템을 꺼내 무장하려는 순간이었다.
뻐엉!
갑자기 발차기가 날아오더니 툰의 거구가 ㄱ자로 꺾였다.
“컥!!”
뿌드드득!!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소름 돋게 울려 퍼졌고, 흰자위를 드러낸 툰이 게거품을 물며 날아가 쓰러졌다.
“미친…! 어떤 개자식이!!”
한바탕 나뒹군 후, 걸쭉한 욕설을 지껄인 툰이 자신을 공격한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하고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레가스를 발견하더니 피식 웃었다.
“이거야 원, 레가스 님. 비겁하게 뒤에서 기습하는 겁니까? 권성이라는 이름이 울겠군요.”
비꼬는 툰을 레가스가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툰, 한 번만 더 그리드 님에게 결례를 범했다가는 머리통이 날아가는 수가 있습니다.”
언제나 싱글벙글, 누구에게나 친절한 레가스가 이토록 분노하는 모습을 그리드는 처음 보았다.
당황하기는 툰도 마찬가지였다.
‘순둥이라고 소문난 녀석이… 화나니까 무섭네.’
툰이 슬그머니 일어났다. 조금 전 기괴한 방향으로 뒤틀렸던 그의 허리가 어느새 정상적으로 회복되어 있었다. 경이적인 회복력이다. 크로우의 칼날을 거둔 그가 말했다.
“권성 레가스… 언젠간 당신과도 승부를 봐야겠지만 지금은 안 되겠어. 저 대장장이 녀석이 좀 의외라… 2대 1은 솔직히 힘들 것 같거든. 뭐, 나중에 차근차근 하자고.”
“야, 이 새끼야! 청소해놓고 가라!”
자기 할 말만 하고 돌아가 버리는 툰을 뒤쫓으려는 그리드를 레가스가 말렸다.
“저자, 야수화하면 상당히 강합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싸우기엔 벅찬 상대이니 오늘은 이쯤 하시죠.”
“아니! 지금 당장 조져놔야 직성이 풀리겠는데요! 그리고 애초에 저딴 놈을 왜 길드원으로 받아들인 겁니까? 저거 하는 행동이 같은 편이 아니라 완전히 적인데! 길드원 받을 때 사상검증도 안 해요?”
“그의 성향은 지극히 단순하기 때문에 충분히 제어할 수 있다고 지슈카가 판단했습니다. 딱히 염려하실 필요 없어요. 그보다 신성의 방패를 찾았습니다.”
“……!”
말락서스 레이드 전부터 지금까지 쭉, 그리드가 강도당한 신성의 방패의 행방을 찾아다녔던 레가스가 드디어 성과를 낸 것이다.
희소식을 듣자 툰에 대한 관심을 딱 끊어버린 그리드가 흥분해서 물었다.
“어디죠? 어디에 있습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