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45화 (41/1,794)

제2장.

동창회에 참석한 인원 대부분은 나를 놀려먹으며 즐기기 위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빚쟁이 신분을 청산하고 심지어 성공해서 나타나자 아무도 놀려먹지 못했고, 주목적을 상실한 동창회는 굉장히 어색한 분위기가 연출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준호는 끝까지 한 마디도 안하고 술잔만 기울이더니 결국 먼저 자리를 떠났다.

이때부터 슬슬 분위기가 변했다.

이준호의 눈치를 살피던 녀석들이, 이준호가 사라지자 슬금슬금 다가와 질문공세를 퍼붓기 시작한 것이다.

“13시리즈를 끌고 나타나다니,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이야? 로또 1등에라도 당첨 됐어? 저번에 봤을 때까지만 해도 빚에 허덕이고 있었잖아?”

“영우 너 혹시 Satisfy 랭커 됐냐? 방송 녹화하면서 출연료 잔뜩 번거야? 조만간 TV에서 볼 수 있는 건가?”

“그보다 유라와는 무슨 관곈데? 정말로 사귀는 거냐?”

“세상 모든 남자들의 로망이랑 사귀다니… 어떤 우월감을 느끼고 있을지 상상조차 안 간다…”

동창들의 눈동자에는 호기심과 선망, 질투가 공존하고 있었다.

이 상황을 안주삼아 즐기고 있노라니, 학창시절까지만 해도 나와 그나마 친하게 지냈었던, 내가 한때는 친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몇 명의 잡놈들이 끼어들어 기분 잡치게 만들었다.

“이야~ 영우야, 우리 학교 다닐 때 맨날 붙어 다녔던 거 기억하지? 그때 참 재밌었는데… 가끔 그립지 않냐? 우리 날 잡아서 같이 놀러갈까?”

“오! 그거 좋네! 다들 군대갔다오고 대학 복학 하고나서부터 좀 뜸해지긴 했지만, 이참에 다시 예전처럼 잘 지내보자!”

“헤헤, 놀러갈 때 유라씨도 데려와. 친구 애인인데 인사 정도는 나눠야 되잖아? 흐흐흐.”

“저기, 있잖아… 차 한 번 타 봐도 되냐? 거짓말 아니고 13시리즈 타보는 게 소원이었거든… 응? 5분만이라도 좋아. 제발 부탁한다.”

내가 도움을 필요로 할 때는 외면하고, 심지어 남들과 같이 날 괴롭혔던 놈들이 태세전환해서 다시금 친구를 자처하는 모습이 역겨울 지경이다.

나는 놈들에게 확실히 못박아두었다.

“내가 이제 와서 너희 따위랑 친구놀이하려고 여기에 온 줄 아냐? 그냥 닥치고 있어. 다른 놈들처럼 그저 나 잘 된 꼴 보고 질투하면서 배 아파해라. 난 그 꼴을 비웃어주려고 온 것뿐이니까.”

“뭐?”

“하! 이 새끼 말투가 좆나 싸가지 없네? 야, 좀 잘 되더니 눈에 뵈는 게 없냐?”

피차 취기가 오른 상태다.

내 노골적인 언사에 열 받은 녀석들이 팔을 걷어붙이며 일어났다.

나는 놈들에게 조소해주었다.

“아까 이준호도 그렇고 너희도 그렇고, 고작 한두 마디 듣고 그렇게 울컥하는 모습이 얼마나 웃기는지 아냐? 너희들은 남한테 무시당하거나 심한 말 듣는 걸 그렇게 싫어하는 주제에, 왜 남은 잘만 무시하고 욕하고 다녔던 건데? 애초에, 좆도 잘난 것도 없는 주제에 무슨 염치로 사람을 무시하고 다녔냐? 엉? 지금 봐 봐. 내가 너희 따위한테 무시당해도 좋을 사람 같아?”

“익…!”

동창들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열은 받는데, 딱히 반박하지 못하고 낯 뜨거워했다.

“저보다 못난 사람 괴롭히면서 우월감 느낄 시간에 니들 밥그릇이나 챙겨, 이 못난 새끼들아.”

속 시원하다.

이번 동창회를 끝으로 이들과의 인연은 끝이며, 지켜야할 의리는 눈곱만큼도 없다.

코트를 챙긴 나는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났다.

부아아아앙!!

십삼이로 돌아온 나는 시동을 켰다. 그리고 네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집으로 설정한 후 자동운전 기능을 선택했다.

이어 출발하려는데 누군가가 다급히 창문을 두드렸다.

아영이었다.

창문을 내려주자, 아영이가 아쉬움과 초조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어왔다.

“이대로 떠나는 거야?”

‘김아영…’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내 애틋한 짝사랑의 대상이었던 그녀!

나는 그녀와 연애하고 급기야 결혼에 골인하는 망상을 최소 100번도 넘게 했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지금은 그녀에게 일말의 감정조차 느끼지 못했다.

애초에 인연이 아닌 사람이었다는 걸 자각하고 나자 실망감과 배신감, 그리고 미련조차 사라졌다.

“나를 무시했던 애들이 이제는 나를 부러워하게 됐어. 나를 버렸던 놈들은 다시 엉겨 붙었고. 그 한심하고 구차한 모습들을 실컷 즐기면서 찌질이 나름의 복수극을 끝냈으니 이만 떠나야지. 여기 더 남아있어 봤자 계속 얼굴만 붉히다가 주먹다짐밖에 더 하겠어? 시간낭비야.”

아영이를 좋아했던 시절의 나는 그녀와 제대로 눈조차 마주치지 못했었다. 심장이 두근두근 거려서 말도 잘 못하고 헛소리만 지껄였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아무 감정도 없었기 때문에 두 눈을 똑바로 응시한 채 명확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잘 지내라, 아영아. 좋아했었다.”

그대로 떠나려는 나를 아영이가 붙잡았다.

“조, 좋아했었다고? 왜 과거형인건데? 이젠 아니라는 거니? 나는…! 나는 너를!”

아영이가 아무리 내 순정을 짓밟았다고 해도, 한때 내 첫사랑이었다는 사실은 영원히 변치 않는다.

그녀에 대한 환상을 이 이상 망치지 않고 최대한 좋은 기억으로 남기고 싶다.

그래서 나는 십삼이에 눈이 멀어 어떻게든 나를 붙잡아보려는 그녀에게 일말의 여지조차 남겨주지 않았다.

“아까 못 봤어? 내게는 이제 유라가 있어. 그녀는 너와 비교가 안 되는 하늘 위 존재야. 그녀를 두고 굳이 네게 미련을 가질 필요 없지. 난 이제 너에게 아무 감정도 없어.”

“영우, 너…!”

나는 최대한 냉소해주었다. 그리고 자존심 상해서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아영이를 남겨둔 채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이걸로 끝이다.”

과거의 찌질했던 나와의 연결고리는 이로서 모두 깔끔하게 끊어냈다.

이제는 새로운 출발을 할 일만 남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아까 차에서 유라와 나눴던 대화들을 회상했다.

“체다카 길드가 말락서스의 레이드에 성공한 이후 야탄교의 세력은 급속도로 약화되었어요. 이제 체다카 길드는 야탄교의 주적이에요. 야탄교는 체다카 길드에게 반드시 복수할 계획입니다. 그리고 모두 다 예상하다시피 저는 야탄의 여덟 번째 종이죠. 당신과 저의 충돌은 피할 수 없다는 뜻이에요.”

“그, 그래서 선전포고 하려고 굳이 날 찾아왔다는 거야? 호, 혹시 날 이대로 살해하려는 거냐?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게임에서 있었던 일로 현실에서 사람을 죽이는 건 너무한 거 아니야?!”

“…멀쩡한 사람을 살인범으로 몰아세우다니 실례군요. 저는 당신과 싸우기 전에 당신께 진 빚을 갚고 싶을 뿐이에요.”

“빚?”

“과거 야탄의 신전에서 퀘스트 도중… 당신은 저를 쓰러뜨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로그아웃해서 제가 퀘스트를 클리어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었잖아요? 덕분에 저는 교내에서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었고, 여덟 번째 종이 되는 발판으로 삼을 수 있었어요. 당신은 제게 큰 은인인 셈이니, 이 상태로는 당신에게 칼을 겨누기가 껄끄러워요.”

“내가 일부러 로그아웃해서 네 퀘스트를 도왔다니?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유라는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

“당시에 난 네 퀘스트를 도우려고 의도한 일이 결단코 없어. 넌 내게 빚 진 게 없다고.”

유라가 대체 무슨 근거로 오해를 하게 된 건지는 모르겠다만, 나는 그녀가 제발 오해를 풀어줬으면 싶었다. 되도록 그녀와 엮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깊은 공상에 빠져있었다.

“굳이 사실을 부정하시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설령 당신의 말대로 당신이 저를 도울 의도는 없었다고 해도, 제가 당신께 도움 받았다고 느낀 건 변치 않는 사실이에요. 그러니까 전 꼭 빚을 갚을 거예요.”

유라는 굉장히 제멋대로인 성격이었다. 결국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말이 통하질 않는군. 그래, 알았어. 멋대로 해라. 그리고 빨리 이 악연을 끊자. 자, 어떻게 빚을 갚을 건데?”

“악연…?”

맘에 안 든다는 듯, 유라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심지어 인상 쓴 모습마저도 아름다워 넋을 잃게 될 지경이다.

‘생긴 것 하나만큼은 개사기라니까…’

감탄하고 있는 내게 유라가 계획을 설명했다.

“야탄교와 체다카 길드간의 전쟁 발발시, 제가 당신을 죽이는 일은 없을 거예요. 은인을 죽일 순 없는 노릇이니까요. 전투불능으로 만드는 경우는 있을지 몰라도.”

“…살려 주겠다? 그것 참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날 지경이네.”

내가 체다카 길드에서 담당하고 있는 역할은 대장장이이지 병사가 아니다. 얼마 전 자이언트 길드와의 사건 때처럼 내가 직접적으로 피해 입는 일이 발생하지 않는 이상, 나는 어떠한 길드전에도 참여할 계획이 없다. 치고 박고 싸울 시간에 아이템 하나 더 만들어서 돈을 버는 게 100배 더 이득이며, 길드 입장에서도 내가 대장장이로 있어주는 걸 원할 것이다.

단언하건데 유라와 내가 전쟁에서 만날 일은 없다는 뜻이다.

안심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네가 어떻게 빚을 갚겠다는 건지 잘 알았어. 그럼 이거로 용건은 끝난 거지? 이제 약속장소도 도착해가니까 슬슬 헤어질 준비를 하자고. 그리고 심장에 안 좋으니까 제발 두 번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말아줘.”

유라는 나와 도란을 해치우겠답시고 야탄의 신전을 통째로 무너뜨린 전력이 있는 여자다.

이런 무지막지한 여자와 함께 있다는 건 고문이나 다름이 없었다. 나는 한시라도 빨리 그녀와 헤어지고 싶었지만, 그녀는 아직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끝이 아니에요. 저는 당신에게 또 다른 형태로도 빚을 갚을 거니까.”

“또 뭐?”

“실례지만, 저는 당신의 과거를 조사했어요. 그리고 당신이 고등학교시절 동창들에게 수년간 치욕을 당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뭐라고?”

아니, 이 계집은 왜 사람의 부끄러운 과거를 제멋대로 조사하는 거냐? 나는 뭐 프라이버시도 없는 줄 아나?

‘이거 완전히 스토커잖아?’

울컥한 나는 한 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무서워서 함부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입 다문 채 열을 삭히는 내게 그녀가 제안했다.

“지금 당신은 동창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가는 길이죠? 그 자리에 저도 동석할게요. 제가 당신의 동창들 앞에서 당신의 연인인 척을 해드리죠.”

무슨 개소리야?

“왜?”

어리둥절해하는 내게 유라가 친절히 설명해주었다.

“저처럼 유명하며 지적이고 아름다운 여자가 당신과 연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당신의 동창들은 더 이상 당신을 우습게보지 못하고 오히려 동경하게 될 거예요. 당신은 동창들 앞에서 기를 펼 수 있게 될 테고요. 어때요? 연인 행세하는 것. 당신에게 진 빚을 갚기에 좋은 방법이겠죠?”

“…….”

내가 장담하건데, 유라는 공주병 말기 환자다.

공주병 걸릴만한 미모와 명성, 능력을 가졌으니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만 역시, 정신이 온전한 여자로 보이진 않는다.

“영화나 드라마에 많이 나오는 장면이잖아요? 남녀의 역할이 바뀐 것 같기는 하지만…”

민망한 줄도 모르고 떠들어대는 유라에게 나는 거부권을 행사했다.

“됐어. 이제 와서 남의 도움 따위 필요 없다. 이제 나는 내 능력만으로도 스스로의 처지를 바꿀 수 있으니까.”

그래, 나는 유라의 제안을 확실하게 거절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유라가 내 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목격한 동창들은 멋대로 유라가 내 연인이라고 오해했다. 그리고 나를 엄청나게 부러워했다. 13시리즈만 끌고 나타났다면 그 정도 반응을 기대할 순 없었을 것이다.

“…생각할수록 이상한 계집이야. 뭘 멋대로 오해하고 빚을 갚는답시고 사람 뒷조사를 하는 거야? 비상식적이잖아? 빚을 갚는 형태도 일방적이고… 그냥 제정신이 아니다.”

상식이 결여 된 모습을 보면, 유라 역시 나만큼이나 인간관계가 협소한 듯싶다.

‘너무 이른 나이부터 성공해서 남들과 동떨어진 생활을 하게 된 바람에 이상해진 것 같군.’

어느새 집에 도착했다.

나는 곧바로 캡슐에 누워 Satisfy에 접속했다.

***

야탄교와의 전쟁에서 수차례 패배하여 병력을 잃고 기사단장이 중상을 입는가하면 영주가 납치당하는 등, 온갖 악재가 겹친 윈스톤의 치안은 최악이었다.

북부 최고의 도시로 거듭나면서 인구수가 급격하게 늘어났건만 치안에 투입되는 병력에는 한계가 있고 지휘계통이 혼란을 빚자 도저히 관리가 안 되고 있었다.

사정을 접한 스테임 백작이 친히 지원 병력을 이끌어 윈스톤에 입성했다.

“아버님!”

“오오! 사랑하는 내 딸아! 못 본 새 더욱 더 아름다워졌구나!!”

스테임 백작은 에트날 왕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한 귀족 중 하나이며 북부의 지배자다.

하지만 외동딸 아이린 앞에서는 팔불출 아빠일 뿐이었다.

수많은 기사와 병사들이 지켜보고 있음에도 개의치 않고 다 큰 처녀인 딸내미를 꽉 껴안은 스태임 백작이 눈물 흘렸다.

“그간 고생이 많았다! 애비가 네게 너무 큰 짐을 지어주었으니 미안할 따름이다! 무사해줘서 고맙다! 고마워!”

스테임 백작에게 자식이라고는 아이린 한 명 뿐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딸내미를 곁에 두고 지켜주기는커녕, 영주라는 중책을 맡기고 떨어뜨려놓았다가 야탄교에게 납치당하는 경험을 또 다시 하게 만들었으니 스스로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자책하는 그에게 아이린이 제안했다.

“아버님께서 잘못하신 게 아니에요. 전부 제 불찰이었을 뿐이죠. 그래서 말인데요, 아버님. 부족한 저를 돌봐줄 든든한 인물이 곁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스테임 백작이 슬그머니 피닉스를 노려보았다.

“그렇지… 든든한 사람이 필요하겠지… 북부 최강의 기사라고 받들어지는 주제에 무능한 피닉스 단장보다 훨씬 더 든든한…”

“신을 죽여주시옵소서!!”

전쟁에서 패배한 것도 모자라 주인을 지키지 못한 피닉스의 죄책감은 이루 말 할 수 없이 컸다.

당장 자결할 기세인 그를 말리기는커녕 외면한 스테임 백작이 아이린을 설득했다.

“하지만 얘야. 도란이 없는 지금, 아쉽게도 피닉스 단장 이상으로 의지할 수 있는 인물은 이 북부에 없단다. 이참에 윈스톤은 피닉스 단장에게 맡기고 넌 애비와 함께 스테임 성으로 돌아가자꾸나.”

“아니요, 이곳에도 의지할 수 있는 분이 계셔요. 그 분은 누구보다도 강하며 용맹하죠.”

“호오?”

아이린은 무가의 딸이다. 스스로 단련하지는 않았을지언정 강자를 알아보는 안목만큼은 탁월했다.

그녀가 이토록 자신감 있게 누군가를 칭찬하며 천거하려들자 스테임 백작 또한 기대가 되었다.

“그래, 뭐 하는 인물이더냐?”

“그분은 대장장이세요.”

“엥?”

활짝 웃는 딸내미의 입에서 튀어나온 대답이 너무나 의외였던 탓에 스테임 백작은 순간 자신이 치매에 걸린 줄로만 알았다.

이내 정신을 차린 스테임 백작이 똑바로 질문했다.

“얘야, 네가 의지할 수 있는 강하고 용맹한 인물이 대장장이라고? 이 애비가 제대로 들은 게 맞더냐?”

아이린이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분은 얼마 전 우리 가문의 보물로 들인 무아지경의 검을 제작한 희대의 대장장이이자 말락서스를 해치우고 저를 구해준 은인이세요. 그뿐만이 아니에요. 메로 상단과 전 영주로부터 윈스톤을 구한 영웅이시기도 하죠.”

“허! 바로 그자가 소문의…”

업적만 놓고 보면 충분히 대단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아이린의 표정을 보니 스테임 백작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내 딸이 사랑에 빠진 여인의 얼굴을 하고 있구나…!’

그가 메로 상단의 악행으로부터 윈스톤을 구원하는데 충분히 일조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대장장이로서의 능력이 전설적이라는 사실 또한 보고받았다. 하지만 대장장이가 야탄의 종을 해치울 정도로 강하다는 게 말이 되는가?

스테임 백작은 뭔가 찝찝했다.

“얘야, 아무리 생각해 봐도 세상에 그런 완벽한 인물이 존재할 것 같지 않구나… 그 인물이 꽤나 미남인 게냐? 아무래도 이 애비가 보기에는 네가 사기꾼에게 현혹당한 듯싶다만…”

아이린이 정색했다.

“현혹이라니요! 아버님께서는 제가 고작 남자의 외모 따위에 꾀어 넘어갈 한심한 여성으로 보이시나요? 애초에, 아쉽게도 그 분은 결단코 미남이 아니에요!”

피닉스와 기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자는 다 좋은데 인물이 영…”

스테임 백작은 그건 또 그것대로 마음에 안 들었다.

“못생긴 놈이 감히 내 딸을 꾀어? 괘씸한 놈! 도대체 어떤 작자인지 꼭 보고 싶군! 당장 놈을 내 앞에 끌고 와라!”

“백작각하, 송구하오나 그 분은 윈스톤의 귀인이시며 아이린 영주님의 은인이십니다. 정중히 모셔오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래, 정중히 데려와라.”

Satisfy는 완벽한 자유도를 구현하고 있다. 그리고 20억 명 이상의 유저를 보유 중이다.

자유롭게 게임하는 20억 명의 유저가 선택하거나 개척한 직업은 1만 개를 훌쩍 넘어가고 있었고, 그 1만 개 이상의 직업에는 공통점이 존재했다.

각 직업 상위 10위권 랭커들은 항상 거기서 거기라는 점이다. 매번 보이던 아이디만 보였다.

이는 각 직업 상위 10위권 랭커들이 11위 이하의 랭커들과 큰 격차를 벌리고 있다는 뜻이 되었으니, 새로운 인물이 상위 10위권 랭킹에 진입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로 치부됐었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약 6개월 전.

16개 주요 직업군의 랭킹에 대격변이 일어났다.

체다카 길드가 L. T. S에서 Satisfy로 넘어오고 단 4개월 만에 각 직업 랭킹 10위권에 진입한 것이다.

그에 유저들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고, 체다카 길드는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Satisfy에 화려하게 데뷔했다.

그리고 그 후.

랭킹은 한동안 또 다시 경직되었다.

체다카 길드가 나타난 후 반 년 이상 상위 랭커들은 변동 없이 제자리를 지켰다.

한데 지금으로부터 1달 전.

마치 과거 체다카 길드가 등장했을 때처럼 랭킹계가 또 한 번 대격변을 맞이하였으니…

10개 주요 직업군의 10위권 랭킹에 전혀 새로운 인물들이 혜성처럼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그 10명은 ‘10인의 루키’라고 불리며 사람들의 찬사와 기대를 한 몸에 받게 됐다.

“저주받은 혈통!”

[통한의 가시 속에 각인 된 피가 당신의 피와 공명하며 당신을 미쳐 날뛰게 만듭니다.]

[스킬 피해량이 150퍼센트 증가합니다. 이동 속도가 80퍼센트 상승합니다.]

[스킬이 활성화되는 동안 생명력이 지속적으로 소모됩니다.]

“우오오오오오!!”

[34,03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25,111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29,60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가시 달린 장미의 줄기를 형상화한 프람베르그가 잔학한 궤도를 그리며 몬스터들을 난도질했다. 한 번 베이면 피가 멎질 않는 상처가 발생하자 위축 된 몬스터들의 사이를 이벨린이 마음껏 헤집고 다녔다. 그러다가 한 마리 몬스터의 목덜미를 부여잡고 스킬을 사용했다.

“찢어발기기!”

[505,90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크에에에엑!!”

이벨린은 그리드로부터 통한의 가시를 구입한 이후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난이도가 높아서 몇 번이나 좌절을 맛봐야만 했던 던전들을 가뿐하게 클리어하고, 기존에 사냥하던 몬스터들보다 평균 30레벨이나 높은 몬스터들을 도륙하고 다니면서 막대한 보상과 경험치를 벌어들였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좋아!!”

200레벨 대에 진입한 후, 평균 5일에 1번밖에 레벨을 올리지 못했던 이벨린이 단 하루 만에 레벨업하는 쾌거를 달성했다.

사냥터를 옮긴 덕분에 이룰 수 있었던 위업이다. 그리고 사냥터를 옮길 수 있었던 건 오로지 통한의 가시 덕분이었으니 템빨의 위력이 경이로울 따름이었다.

‘250골드라는 거금을 투자한 것이 전혀 아깝지 않다. 완전히 신세계야!’

검사 랭킹 1위 자리는 지르칸이 지키고 있다. 지르칸은 워낙에 압도적인 존재인지라 1위 자리는 아직 노리기 어려웠지만, 이대로 성장한다면 랭킹 2위 정도는 가뿐히 차지할 수 있을 듯했다.

“기다려라, 라우엘!”

이벨린은 학업을 마무리하느라 다른 길드원보다 Satisfy를 2개월 늦게 시작했다. 그래서 체다카 길드가 데뷔할 때 함께하지 못하고 후발주자로서 10인의 루키에 포함됐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벨린은 10인의 루키 중 자신이 가장 뛰어나다고 자부했었다. 결코 체다카 길드의 명성에 누가되지 않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한데 웬걸?

이벨린이 검사 랭킹 9위로 데뷔하였을 때 기공사 랭킹 10위로 데뷔한 라우엘이라는 인물은 현재 기공사 랭킹 1위, 통합랭킹 178위가 됐다. 반면 이벨린은 검사 랭킹 3위, 통합랭킹 199위에 머물렀다.

심지어 TV 인터뷰에서 목격한 라우엘은 이벨린과 같은 또래였다.

최소한 또래 중에서는 자신이 가장 강한다고 자부해왔던 이벨린에게 있어서 이는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 후, 이벨린은 라우엘을 라이벌로 인식하고 오로지 라우엘보다 상위 랭커가 되기 위해서 노력해왔다. 하지만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 발 다가갔다 싶으면 상대는 두 발 앞서가고 있으니 슬슬 한계를 느꼈다. 라우엘이 자신보다 뛰어난 실력자임을 부정할 수 없었기에 분했다.

한데 바로 그러던 차에 통한의 가시를 손에 넣게 된 것이다.

‘템빨을 갖추는 것 또한 실력의 일환…! 라우엘,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너만큼은 앞질러주마!’

***

{그리드! 어서와~^0^~}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요!}

{네가 없는 반나절이 10년 같았다… 네가 오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렸다고!}

그리드가 게임에 접속하자마자 길드 채팅창이 난리가 났다.

마치 오랫동안 헤어졌던 연인과 재회하기라도 한 것처럼 길드원들은 그리드를 격하게 반겼다.

용건이 있기 때문이다.

{빨리 내 아이템도 만들어줘!}

{저도 레전드리템 갖고 싶어서 현기증 나요 ㅠㅠ}

{나부터다! 그리드, 네가 레전드리템을 만들어주기만 한다면 지금 당장 내 랭킹을 20위권 내로 끌어올려 보이겠어!}

제발 내 아이템부터 제작해주기를!

길드원들은 정말로 간절히 바랐다.

이제 이들에게 있어서 그리드는 없어선 안 되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

“후후훗… 그야말로 내 아이템의 포로들이군.”

우월감을 느낀 그리드가 우쭐해하며 낄낄 거리는 그때, 길드 채팅창에 불쑥 이벨린의 채팅이 떠올랐다.

{형님들, 누님들. 레전드리템이 어디 그렇게 쉽게 만들어질까요? ^^ 그리드 님한테 부담주지 마세요. ^^}

{와, 뭐야! 이벨린, 너 레벨 또 올랐어? 하루 사이에 1업한 거냐?}

{넵!^^ 사냥터를 옮겼거든요. ^^ 경험치가 팍팍 오르네요~^^ 전에는 5일에 1업하기도 벅찼었는데, 와~^^ 이게 진짜 템빨이구나 싶어요. ^^ㅋ 그리드님께 감사할 뿐. ^^}

{얌마… 아무리 신나도 그렇지 말끝마다 ^^ <-이거 붙이지마라… 재수 없으니까. }

{진짜 개부럽다 ㅡㅡ 폰도 유니크템 얻고 나더니 광렙하더만, 이벨린 저건 한 술 더 뜨네. 조만간 검사 랭킹 2위는 예약된 셈이잖아?}

{레전드리템 개쩐다… 나도 너무 갖고 싶넹ㅠㅠ}

그리드가 길드에 가입한 후 제작한 아이템은 폰의 질풍창과 이벨린의 가시 두 종류뿐이었다.

한데 둘 다 유니크, 레전드리 등급으로 완성되는 바람에 길드원들의 기대치가 너무 높아지고 말았다.

그리드가 만드는 아이템은 무조건 유니크, 레전드리 템으로 완성되는 것마냥 길드원들은 최소 유니크 아이템을 갖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이대로는 노말, 레어템 만들었다간 욕먹을 수 있겠다고 우려한 그리드가 그들에게 미리 설명해주었다.

{나라고해서 유니크, 레전드리템을 자주 만들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실제로 폰의 질풍창 3개 중 2개는 에픽템으로 완성됐고, 이벨린의 가시 2개 중 1개는 레어템으로 완성됐죠. 그리고 확률적으로 노말이나 레어템이 만들어지는 경우가 제일 많아요. 그러니까 댁들 아이템은 레어나 에픽으로 완성될 수도 있다는 점을 언제나 감안하도록 해요. }

{그래, 맞아. 다들 진정하자고. 애초에 우리가 그리드에게 바랐던 건 에픽템이었잖아? 초심을 잃지 말자. 그리고 그리드가 만드는 아이템은 등급에 상관없이 능력치가 추가 되서 동급 다른 아이템보다 무조건 좋아. 설령 레어가 뜨더라도 충분히 쓸 수 있을 거야. }

{그래… 뭐, 우리도 운 좋으면 유니크나 레전드리 제작템 얻는 날이 오겠지. }

길드원들의 흥분이 차츰 가라앉을 무렵 지슈카가 다음은 누구의 아이템을 제작해야할지 결정해주었다.

{그리드, 이번에는 반트너의 갑옷을 만들어줘. }

반트너가 거부권을 행사했다.

{갑옷? 왜 하필이면 갑옷이야? 관둬! 갑옷 따윈 필요 없어! 무조건 무기가 우선이야! 무기를 만들어줘! 무기가 좋아야지 사냥이 빨라지고 열렙이 되지!}

{닥쳐, 반트너. 지금 네 무기도 그리드 덕에 충분히 좋아졌잖아? 그것도 충분히 지존무기니까 자꾸 폰과 이벨린의 무기와 비교하지 말고 만족하면서 써. 그리고 탱부터 갖추도록 해. 지금의 너로서는 레이드에서 무쓸모라 데리고 다니기도 짜증나니까. ^^}

{ㅠㅠ 마스터…}

{뭐? 할 말 남았어?}

{아니야… 말 들을게…}

비단 반트너 뿐만이 아니라, 길드원들은 나이와 성별에 관계없이 모두 지슈카에게 절대복종했다. 평소에는 가족처럼, 친구처럼 지내다가도 명령만 떨어지면 무조건 따른다.

길드원들이 지슈카를 얼마나 신용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제작을 부탁할 갑옷의 제작법은 이미 보유한 상태야. 하지만 제작에 필요한 재료는 아직 구하지 못했어. 지금부터 레이드해서 얻어야하는데, 최대 반나절 정도 소요될 거야. 그때까지 자유롭게 보내도록 해. }

“반나절이라…”

반나절이면 아이템 하나 제작하기도 애매한 시간이었다.

“오래간만에 사냥이나 해볼까? 마침 가보고 싶었던 곳도 있으니…”

***

윈스톤에는 초보들을 위한 사냥터부터 시작해서 랭커들이 만족해할 수준의 사냥터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레벨대의 사냥터가 숱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최근 150레벨 이상의 고레벨 유저들에게 가장 각광 받고 있는 사냥터는 골렘의 미궁이었다.

과거, 어떤 대마법사가 자신의 보물들을 숨겨놓기 위해서 설계하였다는 이 미궁에 출몰하는 골렘들이 온갖 종류의 마석과 광물을 드롭하여 돈벌이하기에 적합했다. 거기다가 경험치도 짭짤하게 줬으니 금상첨화다.

한데 원초적인 문제점이 하나 존재했다.

골렘들이 물리 공격을 거의 면역하는 수준의 강력한 방어력을 보유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골렘의 미궁은 마법사들의 전용 사냥터나 다름없었다.

대부분의 파티가 마법사와 힐러만으로 구성되었거나, 탱커 역할을 수행해줄 팔라딘 1명과 마법사, 힐러로 구성되었다.

눈을 씻고 봐도 물리 공격 계열 직업군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한데 이곳에 대검을 쥐고 홀로 당당히 입장한 사내가 있었으니…

사람들이 그를 보고 비웃었다.

“저기요, 님. 설마 여기에 사냥하러 온 거에요?”

“그런데요.”

“하? 정말요? 심지어 파티도 없어 보이는데?”

“솔플을 좋아해서…”

“풋!”

“낄낄! 초보구만!”

사람들이 대검 쥔 사내를 비웃기 시작했다.

전사 주제에 혼자서 골렘을 사냥하겠답시고 찾아온 사내가 상식이 결여 된 바보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한편 대검 사내는 남들이 자신을 비웃던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수십 명의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쿵, 쿵, 커다란 발소리를 내며 슬금슬금 이동하고 있는 골렘 앞으로 다가가 섰다.

그러더니 지체 않고 칠흑의 대검을 찔러 넣었다.

“파그마의 검무, 살(殺)!”

퍼어어어어엉!!

“……!”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수십 자루의 검과 창, 화살에 일제히 공격 받아도 미동조차 않을 거대한 아이언 골렘이 대검의 일격 한 방에 몸을 들썩이는가싶더니 급기야 벽 한쪽으로 날아가 처박히는 게 아닌가?

경악한 사람들이 두 눈만 껌뻑이고 있는 와중에 누군가가 소리쳤다.

“자, 잠깐…! 저 뼈 투구와 칠흑의 대검…! 저 사람, 혹시 저번에 자이언트 길드를 혼자서 박살내서 화제가 됐었던 인간 백정 아니야?!”

“그, 그렇네! 지금 보니까 맞아! 대로의 도살자다!”

“꺄악! 실제로 보니까 더 무섭게 생겼어!!”

“와… 정말이지 더럽게 세네… 자이언트 길드가 박살날 만도 했어.”

대검의 사내, 그리드는 투구 속으로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살(殺)을 썼는데도 피가 절반 정도밖에 안 달아? 정말 더럽게 단단하구만.’

살(殺)은 일격 필살의 스킬이다. 또한 다인슬레프에는 상대방의 방어력이 높을수록 추가 피해를 입히는 옵션이 붙어있다.

그래서 그리드는 골렘 또한 손쉽게 사냥할 수 있을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이 미궁의 골렘들은 그리드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단단했다.

‘하지만 내게는 비장의 수단이 있지.’

다인슬레프를 회수한 그리드가 인벤토리에서 곡괭이를 꺼내 쥐었다.

직접 제작한 최고급 곡괭이다.

이해도 100퍼센트에 이르는 그 곡괭이를 무장하고 골렘을 주시하자, 골렘 몸 곳곳에 실선과 붉은 점 표시가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드는 붉은 점들을 노리고 곡괭이를 휘둘렀다.

그러자…

까앙! 까앙!!

[철광석을 획득하였습니다.]

[고급 철광석을 획득하였습니다.]

[손상 된 오리하르콘을 획득하였습니다.]

엔진 역할을 수행하는 마석 부분을 제외하면 오로지 강철을 비롯한 광물들로만 구성되어 있는 아이언 골렘!

전설의 대장장이이자, 이해도 100퍼센트의 곡괭이를 무장할 경우 뛰어난 광부가 되기도 하는 그리드 앞에 아이언 골렘 따위 광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았다.

“…도대체 저게 무슨 광경이냐.”

골렘을 곡괭이로 한 번 내리칠 때마다 광물이 드롭되고 있었으니 유저들은 그 광경이 황당할 따름이었다.

자신들은 사력을 다해 마법을 퍼부어야만 간신히 사냥에 성공하는 골렘을 고작 곡괭이로 때려잡는 그리드의 모습은 두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비상식적이었다.

“어디, 나도 한 번…”

평소, 부업으로 광부 일을 하는 팔라딘 유저가 지나가는 골렘 한 마리를 포착하고 슬금슬금 다가갔다. 그리고 곡괭이를 꺼내 쥐고 골렘을 세게 때렸다.

쩌엉!!

“…꺽!”

단단한 아이언 골렘을 곡괭이로 내려치자, 팔라딘 유저는 손목이 부러진 듯한 충격을 느끼며 비명을 삼켰다.

그리고 몸에 흠집 하나 안 간 골렘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그 팔라딘을 확인하더니 손으로 한 대 퍽 때려 죽여 버렸다.

그러는 와중에 그리드는 또 다른 골렘에게 다가가 살(殺)을 적중시켜 쓰러뜨린 후, 다시금 곡괭이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골렘으로부터 또 광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드는 신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크크큭…! 이게 웬 떡이냐! 역시 와보길 잘했어! 캬하하하핫!!”

뼈 투구를 뒤집어 쓴 채, 아등바등 거리는 골렘에게 곡괭이질하며 광소를 터뜨리는 그리드의 모습은 다른 이들이 보기에 사이코패스 그 자체였다.

유저들은 공포에 질리고 말았다.

“뭐야 쟤, 무서워…”

안 그래도 자이언트 길드원들을 일방적으로 잔혹하게 살해한 전력이 있는 그리드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잔뜩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왠지 살해위협을 늦기더니 급기야 차츰차츰 거리를 벌리고 도망쳐버렸다.

덕분에 넓은 미궁엔 어느새 그리드 혼자만 남게 됐다.

하지만 그리드는 광물 채집에 열중하느라 주변 상황을 제대로 인식 못했다. 혼자인 것도 모른 채 애초에 목표로 했던 양만큼 광물을 채집했다. 그러면서 레벨도 잔뜩 올렸다.

때마침 지슈카로부터 기다리던 귓속말이 왔다.

-그리드, 재료의 준비는 끝났어.

“좋아, 그럼 이만 돌아가 볼까나.”

인벤토리 한 가득 광물을 채운 그리드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미궁을 떠났다. 아니, 떠나려고 했지만 도중에 길을 잃은 탓에 결국 미궁을 벗어나지 못했다.

“아니, 씨벌! 이게 뭐야? 길이 왜 이렇게 복잡해? 여기에 있던 사람들은 또 죄다 어디로 갔어? 염병! 길을 묻고 싶어도 사람이 없으니 물어볼 수가 없잖아!! 이런 #^%!$~#!”

그리드는 한참 동안 육두문자를 지껄이며 헤매고 다녔다. 그리고 아무리 헤매도 도무지 미궁의 출구를 찾을 수가 없자 결국 길드원들을 호출했다.

{여기 골렘의 미궁인데, 누가 와서 나좀 도와줘. }

“응?”

채팅을 치면서 한쪽 벽에 등을 기대던 그리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벽이 푹 꺼진 탓이다.

“뭐, 뭐? 으아아아악~!!”

새카만 벽 속으로 빨려 들어간 그리드의 몸이 그대로 지하로 낙하했다.

쿠웅!

“컥! 쿨럭쿨럭! 응…?”

등짝부터 떨어져서 고통에 몸서리치던 그리드는 문득 찝찝한 기운을 느꼈다. 그리고 슬며시 고개를 들자, 미궁의 다른 골렘들보다 몸집이 최소 5배 이상 커다란 아이언 골렘이 붉은 안광을 번쩍이며 서있는 모습이 보였다.

“…뭐냐.”

크워어어어!!

[미궁의 수호자가 오랜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대마법사 브라함이 설치해두었던 마법 함정들이 발동합니다.]

[205,1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399,0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174,34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전설이 된 자는 쉽게 쓰러지지 않습니다. 생명력이 최소치가 되어 5초 동안 모든 공격에 저항합니다.]

퍼펑! 쿠콰카카캉!!

마법사의 함정들이 연속적으로 발동하며 온갖 속성의 공격이 그리드를 덮쳤다.

하지만 패시브 발동으로 무적 상태가 된 그리드는 공격들을 모조리 저항하며 살아남았고, 그리드의 무적 지속 시간이 끝나기 직전 마법사의 함정도 발동을 멈췄다.

그리고 드디어 미궁의 수호자가 움직였다.

최고급 생명력 회복 물약을 복용한 그리드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무적 패시브의 재사용 대기 시간은 꼬박 하루야. 보험을 잃고 시작하다니, 최악이군.’

도망칠 길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드는 미궁의 수호자를 쓰러뜨려야지만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하며 다인슬레프를 거머쥐었다.

도망칠 길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드는 눈앞의 거대 골렘을 쓰러뜨려야지만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하며 다인슬레프를 거머쥐었다.

그리고 높은 민첩성을 기반으로 상승한 순발력을 활용, 벽을 딛고 날아올랐다.

“파그마의 검무…!”

허공을 답보하며 온갖 증오와 살의를 집약시킨 검무를 펼치는 그리드!

순식간에 수호자의 얼굴 앞까지 다다른 그가 다인슬레프를 찔러 넣었다.

“살(殺)!”

쩌어어엉!!

[크리티컬!]

[이상적인 건틀릿의 옵션 효과가 발동하여 2번 공격합니다.]

[68,70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쿠워어어!!

살(殺)에 안면을 가격당한 미궁의 수호자가 일순 들썩이더니 급기야 휘청거렸다.

족히 수천 킬로그램의 거구를 움직이게 만들다니! 살(殺)에 실린 무게가 가히 대단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모습이었다.

“좋아! 통한다!”

살(殺)은 시전자의 현재 공격력의 1,500퍼센트에 해당하는 피해량을 입히는 스킬이다. 단일 타킷 스킬이라는 점이 아쉽지만, 공격력만큼은 Satisfy에 현존하는 모든 스킬 중 가장 뛰어났다.

무려 말락서스에게 최후를 선사했던 스킬이기도 하다.

그 일격을 안면에 정확히 얻어맞았으니, 제아무리 보스 몬스터라도 어찌 무사하겠는가?

지상에 착지한 그리드가 흥분해서 소리쳤다.

“한 방에 7만에 가까운 데미지를 넣었어! 가능해! 놈을 쓰러뜨릴 수 있다!”

이곳에 떨어지기 전.

그리드는 미궁의 골렘들을 수십 마리 사냥하면서 골렘들의 평균 생명력이 8만 내외라는 사실을 파악했었다. 골렘들은 방어력이 극도로 높은 대신 생명력이 낮은 편이었던 것이다.

그를 토대로 추측해 봤을 때, 미궁의 수호자 또한 근본은 골렘이니만큼 생명력이 낮을 거라는 판단이 섰다.

하지만 웬걸?

“엥?”

이 갑작스러운 1인 레이드, 잘만 하면 성공할 수 있겠다며 환호하던 그리드가 깜짝 놀라서는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뒤늦게나마 미궁의 수호자의 생명력 게이지를 확인한 것이다.

“말도 안 돼… 피가 눈곱만큼 밖에 안 달았잖아?”

그랬다. 미궁의 수호자는 막강한 방어력과 동시에 높은 생명력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드의 최강 공격 스킬. 아니, Satisfy의 최강 공격 스킬 중 하나인 살(殺)을 치명타로 얻어맞고도 피가 15분의 1정도밖에 달지 않았다.

‘단순 계산법으로 생각해봐도 살(殺)을 15번. 그것도 매번 크리티컬을 터뜨려서 맞추지 않는 이상 죽일 수 없다는 뜻인데…’

공교롭게도 살(殺)의 재사용 대기 시간은 500초였다.

한데 그리드는 의외로 긍정적이었다.

‘내게는 살(殺)만 있는 게 아니니까!’

그리드가 이상적인 단검을 꺼냈다. 그리고 미궁의 수호자의 하단을 노리고 칼바람을 쏘았다.

[1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칼바람의 공격력 따위로는 미궁의 수호자에게 흠집조차 낼 수 없었다. 높은 방어력을 관통하지 못하고 무력화될 뿐이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실망하지 않았다. 애초에 칼바람은 수호자의 시선을 끌 요량으로 사용했을 뿐이었다.

“파그마의 검무, 연(連)!”

수호자가 칼바람을 신경 쓰는 사이, 신속한 몸놀림을 사용해서 수호자의 사타구니 사이로 파고든 그리드가 어느새 다시 뽑아 쥔 다인슬레프를 8번 연속으로 휘둘렀다.

쩌정! 쩡! 쩌저정!

연(連)은 살(殺)보다 캐스팅 시간도 짧고 마나 소모량도 적으며 재사용 대기 시간도 길지 않다.

그리고 시전자의 현재 공격력의 500퍼센트에 해당하는 피해를 입힌다.

비록 살(殺)보다는 약할지언정 효율적이며 다른 스킬들에 비교해 강력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연(連)이라면 수호자에게 적게나마 피해를 입힐 수 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한 그리드였으나 실상은 전혀 달랐다.

연(連)의 공격력으로도 수호자의 높은 방어력을 관통하지 못했다.

[3,50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제길! 살이랑 너무 차이 나잖아?”

압도적인 방어력 탓에 연(連)의 피해량이 정상적으로 적용되지 않자 그리드는 당혹했다. 자신감이 급속도로 하락했다.

‘이런 괴물을 무슨 수로 잡으라고?’

쿠웅!

혀를 내두르고 있는 그리드를 향해서 미궁의 수호자가 한 걸음 내딛었다. 나름 안전거리를 확보하고 있었건만, 녀석이 워낙 크다보니 단 한 걸음 내딛은 것만으로도 거리가 확 좁혀졌다.

쿠워어어!

포효한 미궁의 수호자가 거대한 손을 내리쳤다. 마치 그리드를 파리 잡듯이 하는 기색이었다.

콰아앙!!

골렘이라 행동이 느린 게 천만다행이었다. 그리드는 수호자의 공격을 어렵지 않게 피했다. 수호자의 손은 괜한 지면에 강타했다. 그러자 이 거대한 지하 공동이 뒤흔들리면서 그리드를 휘청거리게 만들었다.

‘이건 완전히 지진…!’

균형을 잃고 쓰러지려는 그리드를 노린 수호자의 손이 재차 날아왔다.

콰앙! 콰앙!! 콰아아아앙!!

“으아아아악~!”

완전히 부처님 손바닥 위였다.

그리드가 공격을 피할 때마다 수호자의 손이 지면, 벽면을 때렸고, 그럴 때마다 지축이 뒤흔들리며 천장에서 돌이 떨어졌으니 그리드에겐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그리고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그 넓던 지하 공동이 상당히 협소해졌다.

무너진 벽면, 천장으로부터 떨어진 잔재들 탓이었다.

“엿 됐네.”

공간이 좁아진 만큼 퇴로도 적어졌다.

쥐새끼처럼 요리조리 피해 다니는 것도 이제 한계다.

쿠워어어어어!!

수호자가 끝이라고 말하는 듯 포효했다. 그리고 양손을 동시에 휘둘렀다.

좌우로부터 날아오는 거대한 손!

한손의 크기만도 그리드의 몸보다 2배 이상 컸으니, 그 큰 손들이 좌우에서 동시에 날아오자 그리드의 시야는 온통 검게 물들고 말았다.

‘도저히 피하는 게 불가능하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

신성의 방패로 방어해봤자, 방패와 함께 찌부러질 듯했다.

그 순간.

아까, 그리드가 떨어졌던 무너진 천장 위에서부터 한 여성의 급박한 외침이 들려왔다.

“그리드!!”

그리드를 부르는 여자! 그녀의 정체는 다름 아닌 지슈카였다.

그리드가 미궁에서 길을 잃었다기에 친히 데리러 왔던 그녀는, 그리드가 채팅에 반응하지 않고 미궁의 중심부 지하에서는 자꾸만 충격파가 발생하자 혹시나 해서 이곳에 달려온 차였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도착하자마자 그리드가 죽는 순간을 목격하게 되었다.

“저건 피할 수 없어.”

그리드가 수호자의 양손에 삼켜지는 모습을 보면서, 지슈카 곁의 반트너가 혀를 찼다.

그렇다. 누가 보더라도 그리드의 죽음은 당연한 것이었다.

애초에 저 거대한 아이언 골렘을 상대로 마법사가 아닌 직업군이 어떤 힘을 발휘하겠는가? 그저 무력할 뿐이다.

그리드가 어쩌다가 미련하게 혼자 저런 괴물을 상대하고 있었던 건지 의문일 따름이었다.

한데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피할 수 없으면 맞서야지.”

정신없는 폭음 사이로 그리드의 음성이 들려오는가 싶더니.

파치치칙!

수호자의 손에 삼켜지기 직전인 그리드로부터 붉은 스파크가 발생했다.

그리고.

쿠콰카카카카카캉!!

한 줄기 붉은 벼락이 천장을 꿰뚫고 나타나 수호자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파차차차차차착!!

한바탕 전류가 꿰뚫고 지나간 수호자의 몸이 부르르르, 경련한 후 멈췄다. 그리고 순식간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붉은 벼락은 일반 벼락보다 훨씬 더 높은 전압을 보유한 듯싶었다.

위에서 그 모습을 지켜본 지슈카아 반트너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마법? 그리드는 마법까지 사용할 수 있던 거야?”

“붉은 벼락…? 저런 마법은 또 처음 보네.”

그리고 그리드가 무사한 모습을 드러냈다.

모락모락 김을 피어내며 멈춰버린 수호자의 손 틈 사이로 빠져나온 그리드가 씨익 웃었다.

“이거 효과 좋은데?”

그의 왼손에는 아기 두개골만한 크기의 붉은 색 구슬이 들려있었다.

서릿빛 오크 족장을 레이드한 후 획득했던 붉은 벼락 소환구였다.

인벤토리 한편에 고이 모셔두고 있던 그 보물이 지금 이 순간 그리드의 목숨을 구한 것이다.

파치칙! 파칙!

붉은 벼락을 머금은 다인슬레프로부터 연신 스파크가 발생하고 있었다. 빨리 눈앞 괴물에게 복수할 기회를 달라며 성화를 피우는 듯했다.

어느덧 살(殺)의 재사용 대기 시간도 끝난 바.

그리드가 검무를 추었다.

쩌어어어엉!!

[크리티컬!]

[이상적인 건틀릿의 옵션 효과가 발동하여 2번 공격합니다.]

[141,00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전격 속성이 부여 된 다인슬레프는 일시적으로나마 마법검이 된 상태였다.

그리고 미궁의 수호자는 극도로 높은 물리 방어력을 가진 반면 마법 방어력은 평이한 수준이었다.

그리드의 살(殺)에 아까보다 2배 이상에 해당하는 피해를 입고 말았다.

“역시 강해!”

“강하고 자시고간에 쟤는 그냥 사기야.”

단 일격으로 보스 몬스터의 체력을 10분의 1이상 갉아먹는 그리드를 보자 지슈카와 반트너는 황당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피해를 입어 초조해진 것인지, 신경질적인 고성을 내지른 미궁의 수호자는 아까보다 더 빠르게 팔을 좌우로 휘둘러댔다.

“그래! 붙자, 자식아!”

이번에 그리드는 피하지 않았다. 전격의 다인슬레프로 맞서 싸웠다.

쩡! 쩡쩡! 콰앙!

다인슬레프에 깃든 붉은 벼락의 기운은 실로 대단했다. 수호자의 팔은 다인슬레프와 맞부딪칠 때마다 붉게 달아올랐고 이내 시커멓게 타들어가며 연기까지 피어올랐다. 그리고 심지어 일부분이 고체화 됐다.

미궁의 수호자는 당황하는 눈치였다.

물러난 녀석이 태세를 정비하는 사이, 혹시나 싶었던 그리드가 대장장이 망치를 꺼냈다. 그리고 벌겋게 달아올라있는 녀석의 팔을 세게 때렸다.

까앙~!

“…핫!”

그리드가 헛웃음을 흘렸다.

수호자의 달아오른 신체가 망치질 한 방에 변형되었기 때문이다.

‘제련 된 상태의 광물이나 다름이 없잖아?’

이거라면!

까앙! 까앙! 까앙!!

그리드가 요리조리 촐싹 맞게 움직이면서 수호자의 팔 곳곳을 망치로 때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수호자의 팔은 급격하게 모습이 변화했다.

손목과 팔꿈치의 관절이 사라졌고, 사람처럼 5개의 손가락이 달려있던 손은 호빵처럼 둥그러졌다.

이제 수호자의 양팔은 무거운 기둥에 불과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게 되었다.

쿠오?

관절이 사라진 수호자의 팔은 이제 수호자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수호자는 혼란스러워하면서 팔을 마구잡이로 휘둘러댔다. 지하 공동이 이제 완벽하게 무너질 기세였다.

이대로는 놈과 함께 이곳을 무덤 삼아 죽게 될 거라고 판단한 그리드가 마나 회복 물약을 복용했다. 그리고 새로운 검무를 추었다.

“파그마의 검무, 초(超).”

마나가 부족한 탓에 단 한 번도 사용해보지 못했던 스킬이다.

하지만 그간 렙업 할 때마다 스탯을 지능에 투자하고 말락서스의 망토까지 얻어 마나량이 상승한 그리드는 이제 이 스킬을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초(超)>

상상 속 초월자를 표현한 검무를 춥니다.

당신의 공격력이 2배 증가하며, 기본 공격이 원거리 공격으로 변환됩니다.

검무를 펼치는 그리드의 주변 기류가 급속도로 뒤틀렸다.

고오오오!

마치 중력이 반대로 작용하기 시작한 듯하다. 그리드의 머리카락이 옛날 어느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들처럼 치솟아 오르는가 싶더니, 이내 공동을 어지럽히고 있던 돌덩어리와 부산물들이 공중에 스멀스멀 떠올랐다.

그 중심에서 그리드가 다인슬레프를 한 번 휘둘렀다.

그러자 묵색 검기가 전방으로 쏘아졌다.

그 중심에서 그리드가 다인슬레프를 한 번 휘둘렀다.

그러자 묵색 검기가 전방으로 쏘아졌다.

퍼어엉!

쿠워어어!

변형된 팔 탓에 혼란스러워하며 날뛰던 수호자가 얼굴에 일격을 얻어맞자 비명 질렀다.

“호오라?”

고작 평타 한 방에 이만한 반응이라니?

초월자의 힘을 얻고 희열에 휩싸인 그리드가 입 꼬리를 잔뜩 추켜올렸다. 그리고 다인슬레프를 종으로 한 번, 횡으로 한 번 휘둘렀다.

파팟!

두 줄기의 검기가 십자가 모양으로 합쳐져 날아가 수호자의 가슴을 세차게 때렸다.

크워어!!

수호자가 전보다 더 괴로워했다. 그 꼴을 보고 급기야 광소를 터뜨린 그리드가 다인슬레프를 사선으로 유려하게 휘둘렀다.

그러자 이번 검기는 채찍처럼 유연하면서도 날카롭게 휘어져 날아가 수호자의 목뒤를 정확하게 가격했다.

그렇게, 그리드의 테스트를 겸한 검기 공격은 계속해서 이어졌고…

쾅!! 콰앙!! 콰콰쾅!!

[4,10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3,73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4,45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공격력이 2배 상승하고 다인슬레프에는 붉은 벼락의 힘이 깃든 지금!

그리드의 평타는 앞서 사용했던 연(連) 스킬보다 더욱 더 강력한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평타는 스킬과 다르게 제약 없이 사용할 수 있는 법!

“대장장이의 분노!”

[대장장이의 분노 효과가 발동합니다. 20초 동안 공격력과 공격 속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대장장이의 분노를 발동시킨 그리드가, 주춤거리고 있는 골렘을 향해서 본격적으로 검기를 난사하기 시작했다.

“죽어! 죽어! 죽어랏!! 푸하하하하핫!!”

퍼퍼퍼퍼퍼퍼퍼퍼퍼펑!!

[5,50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5,35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이상적인 건틀릿의 옵션 효과가 발동하여 2번 공격합니다.]

[10,94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5,90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쿠워어어어어!!

일방적인 전투였다.

끊임없이 날아오는 묵색 검기 탓에 미궁의 수호자는 그리드에게 접근조차하지 못했다.

팔이라도 멀쩡했다면 양팔을 들어 방어하며 진격했을 테지만, 그리드의 망치질로 인하여 모양이 변형 된 팔은 의도대로 움직이는 게 불가능했다. 방어할 시도조차 못한 채 샌드백 신세였으니 불쌍할 지경이었다.

구오오오오!!

난무하는 검기가 수호자의 몸에 충돌할 때마다 발생하는 충격파로 인해 공동이 급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천장 위에서 전투를 지켜보던 지슈카가 초조해했다.

“이대로는 그리드도 위험해.”

반트너가 지슈카에게 물었다.

“차라리 도와주지? 왜 가만히 있어?”

지슈카 또한 물리 딜러다. 하지만 그녀의 공격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설사 미궁의 수호자일지라도 그녀의 화살을 계속 맞는다면 큰 피해를 입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위치는 지슈카가 저격하기에 딱 좋았다.

하지만 지슈카가 그리드를 돕지 않고 구경만 하고 있으니 반트너는 의문이었다.

지슈카가 설명했다.

“물론 도울 수야 있지만… 내가 나섰다간 그리드가 왜 스틸하냐면서 화낼 것 같아. 안 그래?”

반트너가 이마를 딱! 하고 때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저 녀석의 성격이라면 충분히 그럴만하군. 도중에 끼어 들어서 경험치 뺏어가는 거냐고 지랄거릴 게 뻔해.”

“응, 더군다나 그리드 혼자서도 충분해 보이니까. 난 그저 그리드가 조금만 서둘러 줬으면 좋겠어.”

지슈카가 파악하기로 미궁의 수호자는 숲의 수호자보다 한 등급 아래의 보스 몬스터였다.

높은 방어력과 생명력, 공격력을 토대로 예측한 스탯은 숲의 수호자와 비등하거나 그 이상이었으나 미궁의 수호자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존재했다.

‘스킬이 없어.’

그랬다. 최소한 지슈카가 목격한 후부터 지금까지 미궁의 수호자는 단 한 번도 스킬을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숲의 수호자는 광역 스턴, 에어본, 골렘 소환 등의 온갖 까다로운 스킬을 보유했지만 미궁의 수호자는 스탯만 높은 고철덩어리에 불과했다.

위에서부터 공동의 구조를 살피던 지슈카가 그리드에게 소리쳤다.

“수호자의 등 뒤를 봐! 작은 동굴이 보이지? 공동이 무너질 것 같으면 저리로 도망쳐!”

“오케이!”

제보를 접수한 그리드가 수호자를 향해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검기를 발사하였으니, 수호자는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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