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44화 (6권) (40/1,7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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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 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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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B사가 올 하반기 출시한 13시리즈는 역대 시리즈를 통틀어서 가장 비주얼을 중시한 중형 스포츠 세단이다.

매끄럽게 잘 빠진 곡선 위주의 옆 라인은 도회적이고 날렵하였으며, 직선으로 균형감 있게 배치 된 전면부는 단순함을 강조한 범퍼와 무게감 있는 조화를 이루었으니 스포츠성과 포스를 동시에 지녔다고 찬사받기에 마땅했다.

낮은 차체와 대비되게 높은 후면부. 그리고 과도할 정도로 큰 은색 머플러팁은 중요한 매력 포인트 중 하나다.

최근 저명한 잡지사로부터 디자인적으로 정점을 찍었다고 극찬 받은 이 8억짜리 차가 바로 내꺼다.

“크으… 진심 멋지다.”

집 앞.

도착한 차량과 마주한 나는 감동했다.

안 그래도 잘 생긴 녀석이 내가 선택한 무광 블랙 색상 덕분에 한층 더 높은 품격이 느껴지게 했다. 당장 이 차를 끌고 도로로 나가고 싶은 심정이다.

전 세계 199대 한정으로 출시 된 이 최고급 차량이 도로에 나타나는 순간 모두의 시선이 집중 될 것은 자명한 일…

나는 모두 다 보는 앞에서 가장 예쁜 여자한테 당당히 소리쳐보고 싶다.

야, 타! 라고.

13시리즈는 여자들이 조수석에 타보고 싶어 하는 모델 1순위의 차량이니만큼, 제아무리 나라도 쉽게 헌팅에 성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샘솟았다.

“하지만 헌팅은 다음 기회에 하고 우선은…”

나는 차에 시동을 걸었다.

부우우우우아앙!!

무겁고 강력한 엔진소리가 포효하며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든다.

사실 13시리즈는 12. 8시리즈와 비교해서 엔진이 상당히 다운사이징 됐다. 슈퍼 세단을 표방했던 12. 8시리즈와 달리 위력보다는 디자인 위주로 설계 된 모델이기 때문에 불가피한 사항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 580마력, 최대 토크 72kg. m, 제로백 3. 8에 이르는 괴물급 성능을 보유했다.

13시리즈 역시 슈퍼 세단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는 것이다.

“가자!”

나는 십삼이와 함께 출발했다.

부와아아앙-!

발진 후 4초도 안 돼서 100km에 다다르는 경이적인 힘과 속도!

운전미숙 초보자의 급커브에도 불구하고 전~혀 쏠림이 느껴지지 않는 완벽한 승차감!!

“우오오오옷! 대단해!! 십삼이 너 정말 대단하다고!! 푸하하하하핫!!”

지금 이 상황이 너무 기쁘고 꿈만 같아서 웃음만 나온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빚쟁이 게임 폐인에 불과했던 내가 지금은 8억짜리 차의 주인이 되다니!

그야말로 인생 역전의 표본이 아닌가!

만족시키다. 희망 등을 충족시키다. 라는 뜻을 가진 Satisfy!

Satisfy는 과연 그 이름 그대로 나를 충족시켜주는 멋지고 환상적인 게임이었다.

가상현실게임이라는, 과거에는 상상조차 못했던 장르의 게임이 절묘하게도 딱 내 시대에 출시되어 내게 이런 성공을 안겨주었다는 사실에 새삼 감사함을 느끼며 나는 십삼이의 속도를 더욱 더 높였다.

***

숙녀고는 여고 중 유일하게 전국 탑10에 꼽히는 명문고다.

역사는 짧아 채 50년이 못되지만, 각계의 저명한 여성 인사들을 수도 없이 배출한 업적을 가졌다.

그리고 숙녀고의 명성은 올해 정점을 찍고 있었다.

곧 고2가 되는, 신세희와 박예림 두 여학생 때문이다.

그녀들은 전국 모의고사에서 매번 5위권 안에 드는 최상위 성적자들임과 동시에 연예인보다 더 우월한 미모를 가졌다.

우선 박예림.

그녀는 항상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속눈썹이 매우 길어서 눈가에 그늘이 지게 만들 지경이었는데, 눈매가 촉촉하고 눈빛이 흐리흐리한 것이 상당히 퇴폐적이었다.

왼쪽 눈 밑에 자리 잡은 눈물점과 두꺼운 아랫입술. 하얗고 부드러운 살결까지 합쳐진 전체적인 인상이 야한 상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전형적인 도화상이다. 도저히 고등학생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성적 매력을 운명적으로 어필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녀 스스로가 교복 치마를 짧게 줄여 입고, 상의는 단추를 몇 개씩 푸르고 다니면서 특유의 매력을 강조하였으니, 동년배들은 그녀를 생각하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기 일쑤였고 자신들의 성적이 떨어지는 1순위 원인으로 매번 그녀를 지목했다. 일부 성인조차 그녀에게 반해서 자신이 소아성애자가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 정신과 상담을 받는 사례가 빈번했다.

그에 반해 신세희는 매우 청초한 소녀였다.

언제나 침착한 표정과 바른 몸가짐을 했다.

크고 동그란 눈동자에는 총기가 있었고 야무지게 닫힌 입술에서는 특유의 고집이 느껴졌다.

보면 그냥 예쁘다. 라는 감탄사가 튀어나오는 균형 잡힌 이목구비와 긴 생머리는 빼어난 조화를 이루었다. 원색적으로 표현하자면 누군가의 첫사랑이 되기에 딱 적합한 외모를 가졌다.

Satisfy에 유라와 지슈카가 있다면 한국 고교계에는 신세희와 박예림이 있다. 라고 표현 될 정도로 두 소녀의 존재감은 독보적이었다.

그리고 그 탓에 숙녀고의 등굣길과 하굣길은 매일 북새통이었다.

“나왔다! 세희다!”

“오오옷! 예림이도 같이 있어!”

숙녀고 정문 앞.

이곳이 정녕 여고가 맞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수많은 남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 남학생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세희와 예림 두 소녀였다.

그들은 하교하는 세희와 예림의 얼굴을 먼발치에서나마 구경해보고자 종례를 땡땡이 치고 이곳까지 달려와 진을 친 것이다.

그야말로 일상적인 풍경이다.

숙녀고의 여학생들은 타 학교의 남학생들이 모여서 생난리를 치고 있음에도 개의치 않고 자연스럽게 하교했다.

고통 받는 건 오직 세희 한 명 뿐이었다.

“지긋지긋해.”

세희는 솔직히 말해서 무서웠다.

학교 측에서 많은 경비 병력을 고용했기에 망정이지, 경비가 조금이라도 소홀했다간 저 남학생들이 언제 폭도처럼 변해서 덤벼들지 모를 일이었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학교생활하고 싶을 뿐인데, 연예인도 아닌 자신이 왜 이런 험한 꼴을 당해야만 하는지 억울하고 화가 났다.

하지만 예림은 달랐다. 그녀는 세희와 달리 이 상황을 즐겼다.

“어디 멋진 오빠 없으려나~?”

발정난 황소떼처럼 흥분해 있는 남학생들을 느긋하게 둘러보는 예림에게 세희가 핀잔을 주었다.

“적당히 해. 네가 매번 관심을 주니까 저 사람들이 매일 같이 지치지도 않고 찾아오는 거잖아?”

세희의 잔소리에 예림은 기분 상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싱글벙글 웃으며 세희의 허리를 꼬옥 끌어안았다.

“하지만 재밌는걸? 쟤들을 봐. 원숭이들 같지 않아? 동물원에 온 기분이야.”

“…내가 볼 때는 우리가 원숭이 같은데.”

성적이 좋다는 점만 제외하면 모든 면이 다른 두 소녀!

같은 중학교 출신인 그녀들은 사실 둘도 없는 친구 사이였다.

성격과 취향이 너무 달라서인지 오히려 두 사람은 충돌하는 일 없이 잘 어울릴 수 있었다.

그리고 세희는 예림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예림의 취향이나 가정사. 심지어 가족 구성원까지 속속들이 파헤치고 있었다.

세희가 굳이 알고 싶어서 알게 된 게 아니다. 세희와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길 원한 예림이 사소한 일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모든 걸 털어놓았던 탓에 세희는 본의 아니게 그녀에 대해서 잘 알게 됐다.

하지만 반대로 예림은 세희에 대해서 아는 게 적었다. 세희가 스스로에 대한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애초에 공부 외엔 관심분야가 없어보였다.

단 하나. 오빠를 제외하곤 말이다.

‘친오빠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표정이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한단 말이지.’

세희는 이성에게 이상할 정도로 무관심했다. 또래라면 누구나 좋아할법한 아이돌들의 이름조차 몰랐다. 그런 세희가 좋아하는 오빠란 대체 얼마나 멋진 남자일까?

예림이 습관처럼 졸라대기 시작했다.

“세희야~ 나 오늘은 꼭 너희 집에 놀러 갈래. 응? 괜찮지?”

눈을 반달로 그리고 가슴을 흔들면서 애교부리는 예림!

이성은 물론 동성마저도 껌뻑 넘어갈만한 파워가 깃든 환상적인 애교였다. 하지만 세희는 눈 하나 깜짝 안했다.

“싫어.”

“힝~ 왜?”

“싫으면 싫은 거야.”

“나도 친구네 집에 놀러가는 게 소원이라구! 소원을 들어줘!”

울상지어 봤자 소용없자 이제는 막무가내로 떼를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부질없다.

“싫어.”

“…….”

찬바람이 쌩쌩 몰아쳤다.

영어단어장을 펼치고 걷는 세희와, 의기소침해진 채 그녀의 뒤를 쫓아가는 예림.

두 소녀가 정문을 막 지나게 될 무렵이었다.

“세~희~야~”

수백 명의 학생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숙녀고 하굣길 정문 앞에 한 청년이 등장하였으니…

“엑? 뭐야, 저 사람?”

언제나 웃는 낯이던 예림의 얼굴이 거짓말처럼 굳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청년의 행색이 너무나도 불쾌했기 때문이다.

“최악이야…”

평범보다 다소 못한 외모를 가졌으면 스타일이라도 꾸며서 단점을 보완하고자 노력할 것이지, 청년은 양심 없게도 스타일에 전혀 무관심해보였다.

위아래로 후줄근한 녹색 츄리닝을 입고, 발목 위까지 올라오는 흰 양말을 신은 채 갈색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그리고 각진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5대5 가르마를 타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보기 드문 최악의 외관이다.

“토, 토할 것 같아.”

“어떻게 저런 몰골로 외출할 수 있는 거지?”

얼굴이 파랗게 질린 여학생들이 청년으로부터 슬금슬금 물러섰다.

“정문 지원 바람. 굉장히 수상한 남자가 나타났다.”

혹시 정신병원에서 탈출한 환자가 아닐까? 진심으로 의심한 경비원들이 다급히 무전을 친다.

그리고 남학생들은 도끼눈을 뜨고 공분했다.

“저딴 쓰레기가 감히 세희의 앞길을 막아서다니!”

“뭣들 해! 빨리 가서 저 새끼를 치우자! 저 세균덩어리가 세희랑 같은 공기를 들이쉬게 하지 말라고!”

고작 10명도 안 되는 경비원들의 힘으로는 100명도 넘는 남학생들의 분노를 감당할 수 없었다.

경비원들이 몸으로 친 바리게이트를 무너뜨린 남학생들이 우르르 청년에게 달려들었다.

때려죽이기라도 할 기세!

“뭐, 뭐야? 왜들 이래?”

영문 모른 채 맞아죽게 생긴 청년이 어리둥절 하는 그때, 세희가 모두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오빠가 우리 학교엔 웬 일이야?”

“헉? 오, 오빠?”

뭔가 크게 착각한 예림이 세희를 꽉 끌어안았다.

“안 돼, 세희야! 고작 저런 남자가 네 남친이라니! 인정할 수 없어!”

“나, 남친?”

세희 같은 미소녀가 저딴 놈이랑 사귄다니!

자리의 모두가 혼란스러워했다.

그리고 귀까지 빨갛게 붉힌 세희가 예림을 떨쳐내며 말했다.

“나, 남친이라니 무슨 소리야? 저 사람은 말 그대로 내 오빠야. 친 오빠라고.”

“헉…”

이건 또 이것대로 충격이다.

세희의 친오빠가 왜 저렇게 못생겼단 말인가? 세희를 닮아서 미청년이어야하는 게 정상 아닌가?

그 누구보다 충격 받은 사람은 예림이었다.

“저, 저 사람이 네 오빠라고?”

친오빠 이야기를 할 때의 세희는 언제나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었다. 그래서 분명히 세희의 오빠는 멋진 사람인 줄로만 알았다. 오래 전부터 한 번쯤 만나보고 싶었다. 하지만 세희가 결코 보여주질 않으니 궁금증은 증폭되어만 갔고, 결국 환상은 커져서 세희의 오빠는 백마 탄 왕자님일 거라고 기대하게 됐다.

하지만 이게 웬걸?

백마 탄 왕자님은커녕 서울역의 노숙자가 아닌가!

“…….”

상상을 초월하는 실망감을 맛본 예림은 머리가 새하얘지고 말았다. 그리고 평소 세희를 질투하던 여학생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들었어? 저 사람이 친오빠래.”

“하나도 안 닮은 것 봐. 세희 쟤 성형했던 거네. 어쩐지 이상할정도로 예쁘더라니.”

“당연히 성형이지. 사람이 의술의 도움 없이 저렇게 완벽하게 예쁜 게 가능한 줄 알았어? 예림이도 그렇고 그 유명한 유라도 그렇고 다~ 성형한 거야.”

혼란의 중심이 된 후줄근한 청년! 다름 아닌 세희의 친오빠이자 Satisfy 최고의 대장장이인 신영우가 손에 쥐고 있던 리모컨 버튼을 꾹 눌렀다.

그러자…

부아아아아아앙!!

자동 운전 기능이 탑재 된 13시리즈가 리모컨의 센서를 따라 스스로 주행, 신영우의 옆으로 달려와 멈췄다.

“우, 우와!!”

13시리즈는 출시 후 지금까지 연일 화제가 되었기 때문에 차에 무지한 학생들조차 대부분 알고 있는 모델이었다.

199대만 한정 출시됐다는 저 모델을 설마 실제로 보게 될 줄이야!

학생들과 경비원들 모두 다 감탄하는 그때 운전석 문을 연 신영우가 세희에게 말했다.

“타라.”

그리고 예림이 번쩍 손을 들었다.

“네~ 오빠!”

예림의 두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백마 탄 왕자님이 아니라 흑마 탄 왕자님이었네!’

세희가 한숨 쉬었다.

‘피곤해.’

이날, 얼굴 예쁘고 공부까지 잘하는 주제에 능력 있는 오빠까지 뒀다는 사실이 알려진 세희는 다른 여학생들에게 더 이상 질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냥 넘사벽 존재가 되어서 더 이상 뒷담화도 당하지도 않고 평안한 학교생활을 보장받게 됐다.

그리고 영우는 세희와 예림과 함께 도심 속을 질주했다.

“끼요오오오옷~!!”

“꺄아아아악!!”

그야말로 거침없는 드라이브였다. 십삼이가 나타날 때마다 다른 차량들이 차선을 양보해줬기 때문에 세 사람은 역사 속 모세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었다.

영우와 예림은 신나서 계속 비명을 질러댔고, 세희도 결국 이 순간을 즐기기로 했다.

드라이브가 끝난 후.

영우는 두 사람에게 부탁해서 자신에게 어울리는 스타일 코디를 완성했다.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자 각진 얼굴이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해 남성미가 부각됐고, 긴 앞머리에 가려져 있던 높은 콧대도 드러나 그럭저럭 봐줄만한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운동을 안 하는 탓에 비쩍 말라 볼품없는 몸 위로 긴 코트를 걸치자 몸매가 그나마 가려져서 나쁘지 않게 됐다.

“오빠는 키가 큰 편이고 세희 닮아서 팔다리가 기니까 롱코트가 잘 어울리네요. 피부톤은 어두운 편이니까 색감은 이거랑 요렇게…”

발부터 머리끝까지 열심히 코디해주는 예림을 보면서 영우가 흐뭇하게 웃었다.

“세희가 너처럼 예쁘고 착한 친구를 둬서 참 기쁘다. 안심이 되네. 앞으로도 우리 세희 잘 부탁해.”

“네? 아, 네…”

첫 인상은 최악이었으나, 지금의 영우는 츄리닝을 입고 나타났을 때와 이미지가 많이 달랐다.

‘성공한 어른 남자’라는 존재와 만나본 경험은 처음인 예림이 어울리지 않게 긴장하며 얼굴을 홍당무처럼 붉혔다.

세희의 안색은 점점 나빠졌다.

‘이래서 집에 데려가지 않았던 거야.’

미소녀 두 명과 함께 쇼핑하고 식사하는 영우를 목격하는 남자들의 질투로 찬 침음성이 거리 곳곳에 흐르며 밤이 깊어졌다.

그리고 다음날.

오전 내내 Satisfy에 접속해 아이템 제작에 열중한 그리드가 캡슐에서 나왔다. 그리고 전날 세희와 예림이가 꾸며준 대로 코디한 후 십삼이에 탑승했다.

30분 후면 동창회가 시작된다.

2년 만에 참석하는 동창회다.

긴장되기도 했지만, 그 이상의 흥분이 영우를 장악하고 있었다.

“나는 예전과 달라.”

더 이상 한심한 과거의 나는 없다. 최근 일련의 사건들로 자신감이 급상승한 영우의 얼굴엔 오직 자신감만이 가득했다.

영우는 마음이 급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동창들을 만나서, 난 더 이상 빚쟁이가 아니다. 십삼이를 봐라. 난 성공했다. 너희가 함부로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지난 수년간 그들이 자신을 무시하고 비웃었던 것에 대한 복수를 하고 싶었다.

부아아아아앙!!

외곽 도로를 주행하는 십삼이는 아슬아슬하게 속도 제한을 지키고 있었다.

이 속도면 10분 내로 모임 장소에 도착할 수 있을 터였다.

자신의 달라진 모습을 모두에게 보여주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자 고양되어 있던 영우가 문득 의문을 느꼈다.

‘근데… 모임 장소를 굳이 도시 외곽으로 잡은 이유가 뭐지? 대중교통도 안 다녀서 차 없는 사람은 찾아오기 곤란할 텐데. 설마 나를 겨냥한 건가?’

빚쟁이에다가 차도 없던 시절의 영우였다면, 금일 동창회 모임 장소에 찾아가기가 매우 곤란했을 것이다.

차를 빌릴만한 지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없으니 무조건 택시를 잡았어야할 텐데 택시비가 어디 한두 푼인가?

‘에이, 아무리 그래도 설마 나 하나 골탕 먹이자고 모임 장소를 이렇게 정했겠어?’

영우는 자신이 너무 오랫동안 놀림거리가 된 탓에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다고 치부했다. 그리고 다시금 운전에 집중하다가 어떤 상황을 목격하고 십삼이의 속도를 줄였다.

저 앞에, 웬 여성이 자동차 보닛을 열어놓은 채 도움을 요청하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소의 영우라면 아무 이득 없이 남을 돕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예외였다.

도움을 청하고 있는 여성, 멀리서 일견하기에도 보통 미인이 아닐 게 분명했기 때문에 호기심이 생겼다.

“비율이랑 스타일 봐라… 장난 아니네.”

여성은 청바지에 흰 티, 그 위로 검정색 라이더 자켓을 걸치고 있었다. 노출도가 전혀 없는 의상이었다. 그리고 커다란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기 때문에 멀리서는 생김새를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워낙에 완벽한 비율과 하얀 피부를 가져 미인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얼마나 예쁠지 가까이서 확인해보고 싶다. 라는 본능이 샘솟게 만들 지경이었다.

‘내가 아영이 때문에 여자라는 생물에게 부정적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인간 된 도리로서 도로 한복판에서 곤란해 하고 있는 여성을 외면할 순 없지.’

영우가 도움을 청하고 있는 여성 옆으로 차를 세웠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여성에게만 신경이 쏠려서 눈치 채지 못했었는데, 이제 보니 여성의 차량은 영우의 십삼이보다 4배 이상 고가인 C사의 S모델이었다.

C사가 창립 120주년을 맞이해 출시한 그 모델은 극소수의 재벌을 타킷으로 삼고 있었으니 13시리즈와는 격이 달랐다.

‘젊은 여자가 뭐 이런 차를… 드라마에 나올법한 재벌 2센가?’

위축 된 영우가 헛기침하며 긴장을 풀었다. 그리고 차에서 내려 여성에게 물었다.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을까요?”

이미 보험회사에 연락했을 것이다. 보통 차량도 아니니만큼 사측에서도 똥줄 타서 달려오고 있을 게 뻔하다.

굳이 영우가 나설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실제로 여성은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우는 아무 거리낌 없이 나서고 있었다.

그리고 여성이 선글라스를 벗었다.

“저를 태워주셨으면 좋겠네요.”

“헉?”

여성의 얼굴을 확인한 영우가 질겁했다.

정말이지 심장이 멈춰버릴 지경으로 놀랐다.

“유, 유라…?”

Satisfy의 랭커들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워낙 언론에 자주 노출되는 바람에 Satisfy를 플레이하지 않는 사람들도 랭커들의 얼굴과 이름 정도는 알았다.

미국 대통령 이름은 몰라도 Satisfy 랭커 이름은 안다. 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그중에서도 유라는 특별했다.

통합랭킹 10위권 유저 중 유일한 여성이며, 반세기 전까지만 해도 게임 강국이었던 대한민국의 마지막 희망으로 여겨지기도 하는 그녀는 동서양을 아울러 최고의 미녀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그리고 국내뿐 아니라 국외 CF계를 장악하여 세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중 3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런 여자와 이런 곳에서 우연히 마주치다니?

영우는 매우 당황했다.

‘이게 말이 돼? 한국이 아무리 좁다지만 우연도 어떻게 이런 우연이?’

사실 영우는 유라와 인연이 있었다. 아니, 인연이라기보다는 악연이다.

파그마의 후예로 갓 전직하였을 무렵, 도란의 퀘스트가 발동했을 때 유라와 충돌했었다. 그리고 유라의 방해를 받는 바람에 결국 퀘스트를 실패했고, 영우는 그 원한을 풀기 위해서 인터넷에 유라의 악플을 달고 다녔다.

‘설마…’

영우는 최악의 사태를 상정했다.

‘사이버 수사대에 의뢰해서 악플러가 나인걸 알아내고 복수하러 온 건가?’

유라의 재력과 권위라면 상상초월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을 테니 가능성 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아니, 아닐 거다. 내가 만화를 너무 봐서 별 망상을 다 하네… 이건 단순한 우연이야.’

진정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영우에게 유라가 쐐기를 박았다.

“이렇게 뵈니까 반갑네요, 그리드.”

“컥…”

내 정체를 알고 있다니? 이 여자가 지금 내 앞에 나타난 건 역시 우연이 아니라 의도된 것이었단 말인가!

‘복수다! 복수하러 온 거야!’

확신한 영우의 혼란과 불안이 극에 달했다.

핏빛마녀 유라의 잔학성은 이미 충분히 체험하지 않았던가!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를 일이었다.

‘서, 설마 차로 밀어버린다거나?’

영우가 후들후들 떨고 있는 사이 유라는 십삼이의 조수석에 허락도 없이 올라탔다.

“당신이 가는 곳까지 만이라도 좋아요. 동승하게 해주세요. 할 말이 있거든요.”

“…네.”

영우는 거부할 수가 없었다.

***

“신영우 이 새끼 왜 이렇게 늦어?”

학창시절, 싸움 짱이었던 이준호는 동급생들에게 폭행과 욕설을 서슴없이 퍼붓고 다녔다. 삥도 엄청나게 뜯었다. 남학생치고 이준호에게 돈 안 뜯겨본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눈 한 번 뒤집혔다하면 선생님들한테 대들기 일쑤였고, 심지어 선배들도 패고 다녔다. 몇 안 되는 친구인 심기완과 최찬성에게 폭력을 행사한 적도 있다.

그 난폭한 성향은 고등학교에 이어 전문대를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온 뒤에도 나아지질 않았다. 어느덧 27살이 되었건만 여전히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변변한 일자리도 갖지 못했다.

PC방, 편의점, 주유소 등의 일자리를 전전하고 다니던 이준호는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나 진짜 좆도 아니네.’

학생 때만 해도 싸움만 잘하면 만사 오케이였다. 성적순 따위와 관계없이 모든 놈들이 내 발 아래였다. 내가 원하는 대로 주무를 수 있었다.

하지만 사회에 나오니 상황이 전혀 달랐다.

학창시절 열심히 공부했던 놈들은 적당한 직장이라도 구할 수 있었지만, 싸움밖에 할 줄 아는 게 없고 성격이 난폭한 이준호를 받아주는 회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싸웠다하면 파출소에 끌려가고 합의금 깨졌으니 싸움 잘해봤자 쓸모도 없었다.

그리고 알고 보니 싸움이 엄청 강한 것도 아니었다. 이 유일한 재능을 살려 격투기라도 해볼까 싶어 체육관을 다녔었는데, 한 차원 강한 사람이 동네에만도 셀 수 없이 많았다.

이준호는 진심으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잘 하는 일 하나 없고 직장도 못 구한 채 평생 알바나해서야, 남들 다 하는 결혼이나 할 수 있을까? 어디서 일을 하던 성미에 안 맞아 기간을 한 달조차 채우지 못하는 실정이니, 결혼자금을 걱정할 게 아니라 당장 몇 년 내로 굶어죽지 않을까 걱정해야할 수도 있다. 아등바등 살아남아 봤자 노후대책 마련 못하고 쓸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만 같았다.

자꾸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게 되자 어느덧 하루하루를 술에 의지하게 됐다. 술 없이는 불안해서 잠조차 잘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2년 전.

동창회에서 신영우를 만난 그는 그야말로 속 시원하게 근심걱정을 떨쳐낼 수 있었다.

정말이지 오래간만에 자신보다 못한 놈을 본 것이다.

이준호는 최소한 빚은 없었고 알바라도 했다. 하지만 신영우는 게임만 하다가 빚더미에 앉았다.

준호는 영우를 보면서 안심할 수 있었다.

‘나보다 못한 놈도 잘만 숨 쉬고 밥 축내며 살고 있잖아?’

정말로 신기한 일이었다.

영우를 만나고난 이후부터 준호는 술 없이도 잠 들 수 있게 됐다. 아무리 엿 같은 인생이라도 영우보단 낫다고 생각하면 견딜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준호는 2년 전과 다를 바 없는 인생을 살고 있었다. 여전히 이 일, 저 일 전전하며 하루살이 하고 있었다.

벌써 20대 후반이다. 30대도 머지않았다.

그런데 돈을 모아놓기는커녕 여전히 일 하나 제대로 못한다.

편의점이나 PC방 카운터를 보게 되면, 진상 손님 만날 때마다 열 받아서 참지 못하고 욕하거나 폭행을 했다. 그리고 합의금 물어주느라 번 돈 다 날렸다.

주유소 알바는 자존심이 상해서 못했다. 자신은 꾀죄죄한 차림으로 기름 넣고 있을 때, 자신과 같은 또래. 혹은 어린 녀석들이 외제차에 여자 태우고 놀러 다니는 모습 보면 부아가 치밀었다.

노가다는 더 못했다. 인생 패배자 노가다꾼들 주제에 나이 많다고 잔소리해대는 아저씨들이 꼴 보기 싫었다.

그렇듯, 준호는 노력해서 변화하고 상황을 타개할 생각은 않고 이것저것 불만만 늘어놓기 바빴다.

그러면서도 스스로가 잘못되었다는 건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루하루 불안감에 휩싸여 다시 예전처럼 술에 의지하기 시작했다.

처방이 필요했다.

영우를 만나야만 했다.

고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모두 다 내 발아래 있던 놈들과 모여서, 영우를 실컷 비웃으며 한 잔 하고나면 과거처럼 근심걱정을 떨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다른 동창생들 또한 준호와 비슷한 입장이었다.

준호처럼 최저의 인생은 아닐지언정, 미래가 불안하다는 사실은 그들 또한 같았다. 그들은 어서 영우를 만나 자위하고 싶었다.

영웅고 45회 졸업생 모임 현장.

자처해서 동창회 총무를 맡은 이준호는 시간이 다 되어감에도 불구하고 영우가 나타나질 않자 초조해했다.

“야, 김아영. 영우 오는 거 확실해?”

아영이 조소했다.

“글쎄다? 네가 영우 골탕 먹이겠답시고 모임 장소를 이딴 곳으로 정한 바람에 걔가 오고 싶다고 해서 올 수 있을지 모르겠네.”

도시 외곽의 정원 식당.

개인차량이 없는 사람이 이곳을 찾아오기 위해선 택시를 타야만 했다. 빚쟁이인 영우가 과연 그 택시비를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영우를 곤란하게 만들기 위해서 일부러 이곳을 모임 장소로 택했던 이준호가 뒤늦게 후회하기 시작했다.

“그 한심한 새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설마 택시비도 없는 거야?”

그때였다.

“와! 저기 봐!”

동창들이 창밖을 보며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에 이준호와 김아영도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주차장에 진입하는 한 대의 검은 차량을 목격했다.

“13시리즈…!”

무려 8억 원을 호가하는 한정판 차량이 아닌가!

이준호는 주유소 알바하면서 수많은 외제차를 봤지만 저 정도 등급의 차를 본 적은 없었다.

‘제기랄! 어딜 가나 부모 잘 만나 호강하는 새끼들은 꼭 보이는군!’

이준호는 저 13시리즈가 어느 재벌 2세의 차량일 거라고 생각하며 치를 떨었고, 김아영은 두 눈에 하트를 뿅뿅 그리고 있었다.

‘저런 차 끌고 다니는 남자한테 시집가면 인생 펴는 건데. 나는 언제쯤 저런 남자랑 인연이 닿을까?’

그리고 주차장 한쪽에 차가 멈췄다.

이후 모두 다 경악했다.

운전석에서 내린 인물이 다름 아닌 신영우였기 때문이다.

“뭐, 뭣…!?”

이준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빚쟁이 게임폐인 신영우가 저런 고급차를 끌고 오다니?

“말도 안 돼!”

도둑질해온 게 분명하다.

비단 이준호뿐만이 아니라 모든 동창생들이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아영은 다르게 생각했다.

‘빚 다 갚고 취직했다더니… 거짓말이 아니었던 거야? 하지만 얼마나 좋은 직장에 취직했기에 저런 차를 끌고 다니게 된 거지?’

아영의 두뇌가 빠르게 회전했다.

‘어찌됐든 좋아. 영우는 나를 좋아하기도 하고… 연애경험도 없어서 다루기 편하니까 이참에 요리해놓는 게 좋겠어. 좋아, 반드시 내 남자로 만들 거야.’

한데 그때 한 여인이 조수석에서 내렸다.

그녀의 아름다움을 목도한 순간 아영은 오징어로 전락해버린 심정이었다.

한편, 어이없어서 냉수만 들이키던 준호와 동창들도 그녀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 물을 내뿜고 말았다.

“푸웃!!”

“뭐, 뭐야 저게!”

지금 모두 다 경악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건 바로 조수석에서 내린 여자의 정체 때문이었다.

그녀는 다름 아닌 유라였다.

그 극상의 미모는 멀리서 봐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을 수준이었다. 후광이 비춘다. 라는 표현을 이럴 때 하는 거구나 싶었다.

“어, 어떻게 된 거지?”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두 다 혼란스러워하는 와중에 유라가 영우에게 키스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잠시 후 입 떡 벌어질 정도로 커다란 리무진이 나타나더니 유라를 태워갔다.

“미, 밀회 현장…?”

정황상, 유라는 남들의 시선을 피해 영우와 데이트를 즐긴 후 자신의 차량을 타고 떠나는 것처럼 보였다.

영우의 동창들이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영우가 유라를 꾀인 건가? 그래서 유라가 영우의 빚을 다 갚아주고 차까지 사준 건가?’

‘어떻게 유라 같은 여자가 영우 따위랑 사귀게 된 거지? 둘이 사는 세상이 완전히 다른데 접점이 존재할 리가 없잖아? 아니, 어쩌면… 영우는 사실 잘나가는 집안 도련님이었나? 그동안 영우가 평범한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나오고 빚쟁이 행세한 건 죄다 연기였단 말이야?’

‘그럴 리가… 현실적으로 봤을 때 영우가 유라와 사귀게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역시 Satisfy가 있었기 때문에…’

‘그래. 영우가 Satisfy를 했던 세월이 헛된 게 아니었던 거야. Satisfy에서 유라를 만나서 연인 사이까지 발전하고 인생 역전을 하다니…’

‘젠장! 나도 일하는 시간 제외하면 무조건 Satisfy만 했는데, 난 왜 영우처럼 되지 못하고 이 모양 이 꼴이지?’

그리고 드디어 식당 안으로 영우가 들어왔다.

식당 안의 동창들이 바깥의 자신을 목격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던 영우는 여유 있게 손을 흔들었다.

“잘들 지냈어?”

“…….”

그 찌질하던 신영우가 맞는가?

생김새며 표정이며 행동 하나하나까지 전과는 다르다.

한쪽에 자리 잡고 앉는 영우에게 그 누구도 함부로 말을 걸지 못했다. 눈치만 살필 뿐이다.

그리고 손에 술잔을 쥔 영우가 이준호에게 그 술잔을 내밀었다.

“오랜만이다? 한 잔 따라봐.”

“어? 으, 응. 그래…”

이준호는 어이가 없었다.

내가 학창시절부터 쭉 무시했던 신영우 따위에게 위축 되서 순순히 술을 따르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이러려고 부른 게 아닌데…’

준호의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술잔을 비운 영우가 그에게 술잔을 건네며 물었다.

“너도 한 잔 받아라. 근데 너 요즘 뭐하고 지내냐? 아직도 버릇 못 고치고 쌈박질이나 하는 건 아니지? 나이도 나인데 철이 들어야지. 안 그래?”

결국 울컥한 준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영우의 멱살을 부여잡고 으르렁거렸다.

“이 새끼! 무슨 수작을 부린 건진 모르겠지만 잘난 척 하지마라! 까불다간 맞아 죽는 수가 있다!”

과거의 영우였다면 쫄아서 냉큼 빌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남자. 특히 성인 남자는 능력이 곧 힘이 되고 자신감이 된다. 능력이 생기면 어떤 상황에서도 쉽게 위축되지 않는 법이다.

“고작 그 정도로 그렇게 화를 내는 거야? 그러면 이참에 네가 나한테 그간 했던 말과 행동들을 돌이켜봐. 나는 얼마나 화가 나고 분했겠냐?”

“……!”

영우의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준호는 반사적으로 위축되고 말았다.

뇌리에 한 사내의 모습이 스쳐지나갔기 때문이다.

과거, 케산 협곡에서 자신을 복날 개 패듯이 팼던 뼈 투구의 사이코패스! 얼마 전 윈스톤에서 자이언트 길드를 박살내기도 했던 그 사이코패스의 눈빛과 지금 영우의 눈빛이 쏙 빼닮아 있었다.

‘이럴 수가? 그 미친놈이 이 자식이었다고?’

영우의 정체가 무엇인지 얼핏 눈치 채게 된 준호가 쫄아서 뒷걸음질 쳤다.

그 누구도 통제할 수 없던 미친개 준호가 찌질이 영우에게 꼬리를 만 것이다.

믿기 힘든 광경이다.

동창들은 영우를 전과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꼈다.

그리고 영우는 실실 웃었다.

“술 맛 좋네. 뭣들 해? 안 마셔?”

영우는 지난 세월 동안 수많은 난관에 봉착했었다. 그리고 동창들에게 괴롭힘 당한 기억은 가장 큰 트라우마였다.

하지만 이날 그 트라우마를 완벽하게 극복하게 되었으니, 심리적으로 안정을 찾고 성숙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 성장은 향후 Satisfy를 플레이함에 있어도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

‘이걸로 어느 정도 도움이 됐겠죠?’

조금 전, 영우의 차에서 내렸던 유라는 영우의 머리카락에 붙은 먼지를 떼어주겠다는 빌미로 그와 거리를 좁혔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식당 안 사람들이 보기에 각도상 키스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었다.

유라는 과거 야탄의 신전에서 신영우, 즉 그리드에게 신세졌던 일을 상기하며 살포시 미소 지었다.

‘빚은 갚은 거예요.’

평생 스스로의 힘만으로 각종 위업을 달성해왔던 유라!

그녀에게 있어서 타인에게 도움 받았다는 연약한 기억은 되도록 빨리 떨쳐내고 싶은 것이었다.

그래서 항상 그리드를 신경 쓰고 있던 것인데, 최근 그에 대해 조사하고 과거사를 알게 되어 이런 형식으로나마 빚을 갚게 되었으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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