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38화 (5권) (34/1,7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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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 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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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야탄 신의 여섯 번째 종, 말락서스는 야탄교의 모든 의식을 총괄하는 제사장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가 주관해온 의식 대부분은 야탄교를 적대하는 인물, 단체. 혹은 지역에 저주를 걸고 병들게 만드는 용도로 사용되어왔다.

87명의 처녀를 제물로 바쳐서 본거스트 공국의 공왕을 백치로 만든 사건과 607명의 처녀를 제물로 바쳐서 레이븐 백작령에 전염병을 창궐시킨 사건 등은 매우 유명한 일화다.

“사냥 개시? 큭큭! 크하하하하! 너희 따위가 나를 사냥감 취급하는 건가? 야탄 신의 위광을 업고 온 대륙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본교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바로 나야말로 본교를 이만큼이나 성장시킨 장본인! 감히 너희 따위가 우습게 여겨도 좋을 상대가 아니란 말이다!!”

말락서스의 주장은 일리가 있었다.

야탄교는 Satisfy에서 가장 큰 세력 중 하나이며 공포의 대상이다. 야탄교가 오늘날 이렇게까지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제사장 말락서스의 암약이 있었던 덕분이다.

그의 업적은 온 대륙의 정세에 영향을 끼치고 있을 정도로 막대하였으니 그야말로 거물 중의 거물인 셈인데, 그런 거물이 이런 촌구석 산속에서 고작 수십 명의 나부랭이들―말락서스의 입장에선― 따위에게 사냥감 취급을 받다니? 조금도 수지가 안 맞았다.

“네놈들에게 주제파악을 시켜주마. 특히 너, 계집. 너는 야탄 신께 제물로 바쳐질 것이다.”

말락서스가 일견하기에도 지슈카와 그녀의 길드원들은 모두 제법 강했다. 솔직히 놈들이 한 번에 나타났을 때에는 다소 위축됐을 정도다.

하지만 자신은 위대한 야탄 신의 여덟 종 중 하나가 아닌가? 인간의 영역은 일찌감치 초월했다.

말락서스는 저딴 놈들이 단체로 날고 기어봤자 자신에게 어떠한 위해도 가하지 못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지슈카의 생각은 달랐다.

“말락서스 너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 체다카 길드는 최강이야. 언제라도 정상에 설 수 있는 저력을 가졌다고. 너 하나 정도가 우리를 위협할 순 없어.”

싱긋.

흰 이를 드러내면서 상쾌하게도 웃는 지슈카. 그녀가 말락서스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렸다.

“넌 여기서 우리한테 죽는 걸 영광으로 알고 겸허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도록 해. 우리에게 있어서 넌 사냥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계속되는 망발에 결국 참지 못한 말락서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희들 따위가 정말로 날 해칠 수 있으리라 보는가!”

“따위가 아니야.”

“같잖다!!”

말락서스가 소리치며 손을 뻗었다. 그러자 칠흑의 마력 줄기가 일직선으로 쏘아졌다. 그것은 정확히 지슈카의 심장을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지슈카는 방어를 위한 그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녀의 왼편에 서있던 토반이 대신 나서주었기 때문이다.

“인내의 방패!!”

팔라딘 랭킹 1위이자 체다카 길드의 참모를 맡고 있는 토반!

그가 자신의 몸집보다 커다란 방패에 방어 스킬까지 더하여 칠흑의 빛줄기를 막아냈다.

꽈앙!!

귀를 찢을 듯이 커다란 충돌음이 발생하면서 사방으로 흙먼지가 휘몰아친다.

방패가 충격을 고스란히 흡수해주지 못하여 피를 토한 토반이 침음했다.

“크으… 방패 내구력이 한 방에 20이나 깎였어. 저거 저 자식의 고유 스킬도 아니잖아? 야탄 교의 고위 신도라면 누구나 사용하는 즉발 암흑 마법의 위력이 이 정도란 말이야? 대체 저놈의 마력은 얼마나 강력한 거지?”

눈살 찌푸린 지슈카가 토반의 엉덩이를 발로 뻥 걷어찼다.

“엄살피지 마. 꼴불견이니까.”

기세등등해진 말락서스가 소리쳤다.

“막강한 힘 앞에 허둥지둥하다가 죽어라! 그게 너희 하찮은 것들에게 어울리는 최후일지니!”

체다카 길드원 전원의 눈앞으로 알림창이 떠올랐다.

[야탄 신의 여섯 번째 종, 말락서스가 감춰두었던 마력을 전력으로 방출합니다.]

[경험해보지 못한 어둠의 마력에 압도당하여 공포, 쇠약, 이동 불가 효과가 적용됩니다.]

[말락서스가 마법을 사방으로 발사합니다.]

콰콰콰콰콰콰쾅!!

말락서스의 두 손으로부터 칠흑의 마력 줄기가 수십 갈래 쏘아진다.

“야, 야. 저건 너무한 거 아니냐?”

“진심 미쳤다. 개쩌네.”

지슈카를 비롯한 체다카 길드원은 당장 저 마법의 폭격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고 싶었다. 하지만 말락서스의 마력에 압도당하여 상태이상에 걸린 탓에 옴짝달싹하지 못하였으니, 어떠한 형식의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신세 한탄할 뿐이었다.

[8,9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16,503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11,027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겁나 아파!!”

“더럽게 세네!”

마법 방어력이 높거나 암흑 속성 저항력이 높은 일부 직업군을 제외한 나머지 길드원들은 말락서스가 가볍게 전개한 마법 한 방에 생명력을 30프로 이상 잃고 말았다.

특히 적의 공격을 허용하지 않고 회피하며 싸우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궁사, 지슈카의 경우는 위험한 경고 메시지와 직면하게 됐다.

[53퍼센트의 생명력을 일격에 잃었습니다.]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습니다.]

한 번에 40프로 이상의 생명력을 잃을 경우 3초간의 스턴 상태에 걸린다.

즉, 지금 지슈카는 완벽하게 무방비 상태라는 뜻이다.

“마스터를 지켜라!!”

토반을 필두로 하여 모든 체다카 길드원들이 휘청거리고 있는 지슈카의 주변을 성벽처럼 둘러쌌다.

말락서스는 그 광경을 귀엽다는 듯이 감상했다.

“이제 알겠느냐? 사냥당하는 입장은 내가 아니라 바로 너희들이다.”

지슈카는 그를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길드원들에게 명령했다.

“나보다는 그리드… 칸의 제자를 보호해!!”

지난 몇 달 동안 발바닥에 땀나도록 뛰어다니며 찾아온 특급 야파 화살의 제작자!

그리드는 그 제작자의 정보를 알고 있을 칸의 제자로 추정된다. 아니, 어쩌면 제작자 본인일 가능성도 있다.

“너희들 모두 명심해. 말락서스를 쓰러뜨리는 것도 쓰러뜨리는 거지만, 그리드의 보호를 최우선으로 해야만 한다는 걸. 혹시라도 놓쳐선 안 돼.”

마스터에게는 절대 복종!

명을 받든 길드원들이 일제히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한쪽 나무 뒤에 숨어서 멀뚱멀뚱 서있는 그리드를 발견했다.

“어? 저 녀석?”

그리드는 대장장이라지 않았던가?

평범한 대장장이라면 방금 전 말락서스의 일격에 목숨을 잃거나 최소 중상을 입었어야할 터.

한데 멀쩡하다?

“어떻게 된 영문이야?”

상처 하나 없는 그리드를 확인하고 누구보다 놀란 건 지슈카였다.

‘이제 보니까 검과 갑옷까지 무장하고 있잖아?’

또 거짓 제보에 속은 건가?

하지만 그리드는 특급 야파 화살을 보고 본인이 만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었다.

혼란스럽다.

하지만 그도 잠시.

이내 스턴 상태에서 벗어난 지슈카가 정신 차리고 생명력 회복 물약을 복용했다. 그리고 그리드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는 말락서스의 주의를 끌었다.

“말락서스. 너 너무 약한 거 아니야? 방금 그 회심의 일격으로도 우리 중 누구하나 해치우지 못했으니 네가 얼마나 무능한지 광고만 한 셈이잖아?”

저 그리드라는 놈은 어째서 아까부터 내게 압도당하지 않는가?

‘이중에 가장 허접나부랭이 같은 놈이 대체 무슨 꼼수를 부리고 있는 거지?’

마법 폭격으로부터 유일하게 무사한 그리드를 보고 자존심이 구겨져서 그에게 살기를 내뿜고 있던 말락서스의 시선이 다시금 지슈카에게 돌아갔다.

말락서스는 굉장히 신경질적이 되어 있었다.

“계집, 오기를 부리는구나. 겁에 질려 벌벌 떨어라. 그게 네년에게 어울리는 모습이다.”

“말락서스 네가 주관하는 의식들이 상식을 초월하는 기능을 발휘한다는 사실은 나 또한 들어서 알고 있어. 야탄과 동급의 신을 섬기는 종교들의 가호를 받지 못하는 인물이나 지역들은 너의 의식으로부터 안전하지 못하다며? 제물만 무한하다면야, 너는 의식을 통해서 세계정복까지 노려볼 수도 있겠지. 그래, 너의 제사장으로서의 역량은 엄청나. 인정할게. 하지만 너 말이야…”

말하는 지슈카의 요염한 입술 끝이 위로 말려 올라간다.

명백한 조소다.

그에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는 말락서스를, 지슈카가 특유의 오만한 눈빛으로 내려 보았다.

“대인전은 별 볼일 없잖아? 8인의 종 중에서 너의 전투능력이 가장 취약하다는 사실을 우리가 모를 줄 알아?”

정보는 곧 힘이다.

그렇기에, 지존을 목표로 하고 있는 체다카 길드의 정보수집능력은 필연적으로 최고 수준이다.

Satisfy에서 가장 큰 세력 중 하나이며, 현재 최고의 화제가 되고 있는 야탄교의 정보를 체다카 길드는 최대한으로 숙지하고 있었다.

여섯 번째 종 말락서스.

‘제물 사냥’이라는 유희를 즐기기 위해서 세 달 주기로 무작위 장소에 출몰함.

레벨은 310.

클래스는 암흑 주술사.

특기는 흑마법을 기반으로 한 각종 디버프 스킬과 딜레이 없이 사용 가능한 방어 마법. 그리고 경이로운 마력의 양을 밑거름으로 발동되는 압도적 자가 회복 능력을 보유.

고위 야탄의 신도들이 공통적으로 그러하듯이, 그 또한 암흑 마력을 활용한 즉발 마법 공격이 가능했기 때문에 주의해야하지만, 기본적으로 그가 사용할 수 있는 공격 스킬의 종류는 매우 한정적이다.

‘다른 야탄의 종들에 비하면 레벨도 상당히 낮은 편이고 말이야.’

말락서스는 어디까지나 제사장. 직접적으로 전투에 나서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인지 다른 종들에 비해서 레벨이 낮다.

310레벨이라면, 평균 레벨이 200을 가뿐히 상회하는 체다카 길드원들이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내려진 상태.

“네가 마지막 제물 사냥에 나섰던 건 불과 한 달 전… 원래라면 본단에 머물고 있어야할 시기일 텐데, 무슨 목적으로 지금 이 타이밍에 에트날 왕국까지 행차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고마워. 우리는 너를 제물로 삼아서 명성을 높이겠어.”

지슈카가 슬그머니 한쪽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말락서스에게 한 방씩 얻어맞고 잔뜩 열이 올라있는 길드원들에게 명령했다.

“언제까지 사냥감이 멋대로 날뛰도록 방치할거야? 어서 사냥을 시작하도록 해.”

그와 동시에 벌어진 일이다.

터엉!!

지슈카와 말락서스의 쓸데없는 수다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근육질의 중년인이 힘차게 도약했다.

파괴전차 반트너의 출격이었다.

“어이, 얌마! 레가스 이리 내놔! 그리고 넌 죽어! 죽어서 경험치 뱉어라!! 우하하핫!!”

두 자루 도끼를 수족처럼 부리는 반트너! 일반인은 양손으로 들기도 벅차할 정도로 커다란 대형 도끼를 한 손에 하나씩 쥐고서 가볍게 휘둘러댄다.

쾅! 쾅! 콰아앙!!

칠흑의 마력 실드가 반트너의 일격과 충돌할 때마다 힘들다는 듯이 물결처럼 일렁인다.

발생하는 풍압에 의해서 말락서스가 걸치고 있는 망토가 태풍이라도 맞은 마냥 사방으로 휘날렸다.

하지만 그게 다다.

반트너의 도끼는 말락서스의 실드를 뚫기는커녕 말락서스의 옷깃조차 스치지 못했다.

“얼라리?”

당황한 반트너가 일단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심호흡하며 냉정하게 생각했다.

‘저 녀석의 저 새카만 실드… 내 공격력으로는 절대로 뚫을 수 없어 보이는데? 좋아, 그렇다면 속도전이다!’

말락서스는 적으로부터 노려지는 부위 전면에 즉각적으로 실드를 전개하는 방식으로 몸을 보호하고 있다. 만약 그가 반응하지 못할 정도의 빠른 속도로 공격한다면, 그는 실드를 전개하지도 못하고 공격을 허용하지 않을까?

“우랴아아아아앗!!”

단순하게 생각한 반트너가 이를 악 물고서 전력을 다해 양팔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쩌엉! 쩌저정!! 쩡쩡!!!

두 자루 도끼가 쉴 새 없이 사선으로 그어지는데, 그 기세가 마치 벼락같이 맹렬했다.

하지만 역시 말락서스에게 타격을 입히진 못했다.

‘헉헉… 내 공격속도가 녀석의 반사속도를 상회하지 못하는군. 주술사 주제에 동체시력이 뭐 저렇게 대단해?’

어느새 반트너는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말락서스는 가만히 서 있었을 뿐인데 제 풀에 지친 것이다.

“흥, 꼴불견이군.”

산만한 덩치를 수그리고 헉헉거리는 반트너를 비웃어준 말락서스가 저편의 지슈카를 노려보며 말했다.

“확실히 나는 다른 종들에 비해서 전투력이 약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다른 종들과 비교했을 경우일 뿐. 너희들과 비교했을 때 나는 절대자 수준으로 강하…”

말락서스는 말을 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수그리고 있는 반트너의 어깨 위로부터 날카로운 장창이 섬광처럼 뻗어온 탓이다.

까앙!!

“허?”

깜짝 출현한 창과 충돌한 말락서스가 작게 신음했다.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은 일격이다. 조금만 더 방심했어도 반응하지 못하고 실드를 전개하지 못할 뻔 했다.

‘도끼를 휘두르는 저놈과 비할 바 없이 빠르고 강하다.’

정확히 심장을 노리고 날아온 창에 실린 무게가 워낙에 대단한 탓에, 공격을 실드로 막았음에도 불구하고 몇 걸음 밀려나고만 말락서스! 그의 눈앞으로 창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야~ 완벽한 기습이었는데 그걸 반응하네? 쟤가 저럴 정도면 다른 종들은 대체 얼마나 센 거야?”

감탄을 금치 못하는 창의 주인을 반트너가 신경질적으로 밀쳐냈다.

“얌마, 폰! 나 좀 방패막이로 쓰지 말라고! 이 얍삽한 놈이 툭하면 내 뒤에 숨어 있다가 꿀 빨려고 하네!”

Satisfy 최고의 창술사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일점돌파 폰!

말락서스를 위협하면서 멋지게 등장한 그가, 성난 멧돼지처럼 씩씩거리는 반트너에게 쯧쯧 혀를 찼다.

“반트너 너는 수호기사잖냐. 내 입장에서는 너를 방패막이로 쓰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탱커가 몸빵할 동안 딜러가 공격한다. 이건 완~전히 상식적인 전략이라고. 화내면서 따지기 전에 제발 생각부터 좀 해봐. 넌 뇌가 작을 뿐이지 아예 없는 건 아니잖아?”

반트너와 폰이 나란히 서있으면 나이 차이가 최소 20살은 나보인다. 하지만 둘의 올해 나이는 36세로 동갑이다.

반트너는 기본적으로 노안이면서 대머리에 수염이 덥수룩하고 배까지 나와 40대 후반 이상으로 보이는 반면, 미남인 폰은 날렵한 몸매를 가졌고 스타일이 좋아서 20대 후반으로 보였다.

그리고 둘의 사이는 썩 좋지 않다.

외모에 열등감이 있는 반트너는 폰이 자신과 동갑이라는 사실을 알았던 그 순간부터 쭉 폰을 싫어해왔고, 폰 역시 단순무식한 반트너가 바보 같아서 무시했다.

아니, 그런 건 다 차치하고 애초에 두 사람은 정신연령이 낮다. 지슈카가 두 사람을 ‘나잇값 못하는 사람끼리 동족혐오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평한 바도 있다.

“난 클래스만 수호기사지 스탯은 근력에 몰빵했다고 대체 몇 번을 말해야 기억 하냐, 이 닭대가리야! 다시 한 번 가르쳐줘? 난 수호기사지만 방어력이 낮다고! 그러니까 들러붙지 마!! 우리 길드 탱커는 토반이지 내가 아니다!!”

“멍청하긴… 기껏 방어형 직업으로 전직해놓고 스탯을 그따위로 찍으니까 네가 그 모양 그 꼴인 거야. 탱도 안 돼, 딜도 안 돼. 대체 어디다가 써먹어?”

“뭐, 뭣!! 이 자식! 올 근력 수호기사가 PVP에서 어떤 위력을 발휘하는지 직접 체험해볼래? 1대1 결투 신청 받아라!”

“좋아. 이도저도 아닌 캐릭터의 무능함을 절실히 체감하게 해주마. 라고 말하고 싶지만 지금은 패스다.”

반트너는 유저간의 전투에서 엄청난 위용을 자랑한다.

‘받는 피해량 감소’ 패시브 스킬과 기본적인 방어스킬들, 거기에 힐까지… 수호기사의 장점을 십분 활용해서 전투 지속력이 뛰어난데다가 다른 수호기사들과 달리 공격력까지 높으니 딜교환에서 쉽게 우위에 선다.

물론 상대의 공격력이 극단적으로 높으면 어중간한 방어 따위 단번에 뚫려버리고, 상대의 방어력이 극단적으로 높을 경우에는 어중간한 공격력으로 타격을 입히지 못하지만, 현재 유저들의 전반적인 수준으로는 반트너에게 그만한 위협을 주지 못했다.

특히 수호기사에게는 자기 자신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단발 무적 스킬이 있다. 타이밍만 잘 맞추면 적의 필살기를 1회 무력화 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현재 PVP에서 수호기사들은 전반적으로 활약하는 추세였다.

그래서 반트너는 기세등등했다.

“훗, 쫄았구만.”

폰이 콧방귀 뀌었다.

“전혀. 넌 지금 우리가 뭐하고 있는지 잊었어? 바로 보스 레이드 중이다. 근데 우리끼리 1대1을 하자고? 내가 어떻게 응하겠냐? 그리고 애초에 너보다 내 통합랭킹이 훨씬 위잖아? 싸워봤자 내가 이길게 뻔한데 뭘 굳이 싸우겠다는 거지?”

“닥쳐! 너 쫄았잖아! 쫄아서 피하는 거잖아! 쫀 주제에 주둥이 하난 참 잘 놀리네! 너 진짜 현실에서 만나면 그냥 확! 아오!!”

“현실에서 만나면 뭐? 현실에서 만나면 너야말로 나한테 쫄아서 한 마디도 못하고 꼬랑지 내리게 될 거다. 그러니까 제발 적당히 까불어라 이 대머리 자식아.”

반트너가 강하게 부정했다.

“나 현실에선 대머리 아니라고! 그냥 캐릭터 생성할 때 헤어스타일을 대머리로 설정했을 뿐이라니까! 진짜 몇 번을 말해야 기억하냐고, 이 닭대가리 새끼야!”

“안 그래도 노안인 네가 더 늙어 보이려고 대머리로 설정했다? 그게 말이 되냐? 너 대머리 맞잖아.”

“내가 실제로 대머리였으면 게임에서조차 대머리로 설정했겠냐! 게임에서라도 머리숱 풍성하게 했겠지!!”

“지금처럼 말하면서 대머리 아닌척 하려고 일부러 대머리로 설정했겠지.”

“이런 씨$#!~$#!!”

수호기사 랭킹 1위 반트너와 창기사 랭킹 1위 폰.

전투에서 항상 선봉장의 역할을 자처하는, 체다카 길드가 자랑하는 쌍두마차가 적을 눈앞에 둔 채 저들끼리 멱살잡이한다.

무시당하는 것 같아서 기분 상한 말락서스가 곧바로 응징에 나섰다.

“끼리끼리 어울린다고 했던가? 하나 같이 마음에 안 드는 놈들만 모여 있구나!!”

쿠오오오!!

여덟 줄기의 흑색 마력이 쏘아지더니 나선으로 회전하면서 반트너와 폰을 덮쳤다. 그를 본 두 사람은 신속히 좌우로 산개 후 도약해서 자리를 이탈했다.

한데 놀랍게도 말락서스가 발사한 마력 줄기들은 유도형이었다. 그것들은 오로지 폰만 집요하게 뒤따랐다.

“뭐야! 왜 난 안 쫓아 오냐? 무시하는 거냐!”

지면에 착지한 반트너가 버럭 소리치는 그때, 공중에서 연속해서 도약, 상공 높이 떠오른 폰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유도 마법은 또 처음보네. 과연 여덟 종 중 하나… 허명은 아니군!”

마력 줄기들을 떨쳐낼 수 없다고 판단한 폰이 창에 기를 모았다. 급기야 타오르는 불꽃처럼 강렬한 맹기가 창끝에 맺혔고, 폰이 자랑하는 스킬 중 하나가 시전 됐다.

“마하 스피어!!”

퍼어어어엉!! 퍼퍼퍼퍼펑!!

음속의 창이 전개되며 일대의 공기가 연쇄적으로 폭발한다.

그때 발생하는 폭음이 어찌나 큰지 지상의 반트너를 비롯한 체다카 길드원들은 고막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껴야만 했다.

콰자자자자작!!

순수한 물리력과 순수한 마력이 충돌하면 어느 쪽이 이길까? 딱히 상성은 없다. 그저 강한 쪽이 이길 뿐!

회전하는 여덟 줄기의 마력을 일직선으로 관통, 소멸시켜버린 폰의 창이 한 줄기 붉은 섬광이 되어 지상의 말락서스에게 떨어졌다.

까아아아앙!!

칠흑의 실드와 충돌하는 붉은 섬광!!

어지간한 일에는 동요치 않는 폰의 얼굴이 드물게 굳었다.

“뚫지 못한다고?”

그랬다.

음속에 깃든 힘으로도 말락서스의 실드 앞에서는 무력했던 것이다.

“…이건 심각한데.”

폰의 통합랭킹은 23위다. 최소한 수치상으로만 봤을 때 20억 유저 중 23번째로 강하다는 뜻이며 체다카 길드에서도 세손가락에 꼽히는 초절정 실력자다.

그는 수백 종의 보스 몬스터를 사냥해왔지만 마하 스피어가 무용지물이 된 경험은 처음이었다.

말락서스의 방어스킬이 얼마나 뛰어난 것인가 다시금 되새겨주는 대목이었지만, 폰은 다르게 받아들였다.

‘레벨을 50번 넘게 올리는 동안 무기를 한 번도 교체하지 못했어. 역시 지금의 무기로는 한계야. 더 좋은 무기가 필요하다.’

현재 폰의 레벨은 243이다. 한데 폰이 사용하고 있는 창의 레벨 제한은 190에 불과했다.

어쩔 수 없었다. 그 어떤 이름 난 대장장이를 찾아가도 지금 사용하고 있는 창보다 더 뛰어난 창을 제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왜냐?

폰의 창은 등급이 무려 유니크였다. 비록 레벨 제한이 190에 불과하다고 해도 유니크 등급인 이상, 옵션 수치들까지 감안하면 240레벨 제한의 레어, 에픽템보다 그 성능이 뛰어났다.

즉, 폰은 최소 190레벨 제한을 초과하는 유니크 창을 구해야지만 무기를 교체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최고의 창을 만들 수 있을법한 재료들을 모아서 고급 대장장이들에게 가져다 줘봤자 그들이 제작하는 아이템들은 거의 다 일반이나 레어 등급일 뿐… 가끔 에픽 등급의 무기가 제작될 경우도 있으나 전혀 만족스럽지 못했다.

‘뛰어난 대장장이가 시급해.’

특급 야파 화살을 제작해서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았었던 이름 모를 장인!

폰은 지슈카 이상으로 그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가 만든 창을 무장하고 있었더라면, 저 말락서스의 실드조차 꿰뚫을 수 있었을 텐데!’

한편 지상의 말락서스는 꽤나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실드로 창을 방어하는데 성공하기는 했지만, 창에 실렸던 무게가 고스란히 허리에 충격을 전달한 탓이다.

게다가 실드를 3겹으로 전개했기에 망정이지, 자칫하면 방어에 실패하고 큰 타격을 입을 뻔했다.

“내가 여행자 따위에게 이런 수모를…!”

다리에 힘이 풀려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말락서스를 반트너가 놓치지 않았다.

“경직에 걸린 건가!”

이때다 싶었던 반트너는 도끼를 쥐고 있는 양 손을 뒤로 힘껏 젖혔다. 그리고 젖 먹던 힘까지 쥐어 짜서 도끼를 집어 던졌다.

쐐에엑!!

무기 투척은 수호기사의 몇 없는 공격 스킬 중 하나였지만 폰의 마하 스피어에 비하면 가볍기 그지없었다.

땡강!

말락서스가 귀찮다는 표정을 짓고 실드를 전개, 도끼를 튕겨낸다.

“…….”

허무하게 날아가 버리는 도끼를 목격한 반트너가 결국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발광했다.

“으아아악!! 미치겠네, 진짜!”

그는 자신의 무력함에 분노하는 것이다.

본래 수호기사라는 클래스는 자기 자신과 동료를 보호해주는 스킬트리 위주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상급의 보호 스킬들을 익히기 위해서는 높은 수준의 체력 스탯을 요구로 했다.

빠른 레벨업을 위해서 근력 위주로 스탯을 투자한 반트너는 수호기사의 특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고, 폰의 말대로 이도저도 아닌 캐릭터가 되어서 말락서스를 상대로 제대로 된 활약을 펼칠 수 없었다.

반면 저 재수 없는 폰은 혼자서 말락서스를 간담 서늘하게 만들고 있지 않은가?

실제로 반트너의 통합랭킹은 66위로, 23위인 폰에 비해서 한참 밑이긴 했지만 자존심 구겨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스탯 초기화 아이템 언제 출시하는 거냐고 대체!!”

“Satisfy는 캐시템이 전혀 없잖아. 그런 아이템은 평생가도 출시 안 할걸?”

반트너가 시간을 끄는 동안 지상에 안착한 폰이 진심으로 조언해주었다.

“다음 레벨업부터는 모든 스탯을 체력에 투자하도록 해. 여태까지처럼 계속 근력에 투자했다간 완전히 똥 캐릭 되는 수가 있으니까. 당장은 올 근력 수호기사가 PVP의 대세로 떠오르고 있다만, 지금은 너도 깨닫고 있지? 상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올 근력 수호기사는 무용지물이라는 걸.”

“크윽!!”

반트너는 조금이라도 더 빨리 랭커가 되기 위해 스탯을 무식하게 분배해온 스스로를 한탄했다. 그리고 폰은 더 강한 무기를 갈망하는 마음에 사로잡혀 상황에 집중하지 못했다.

지금 그들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진즉에 넝마가 돼서 구석에 내팽개쳐져 있던 레가스라는 존재를!

“또 너희들끼리 수다를 떠는 거냐? 정말이지 긴장감이라고는 하나 없군. 좋아, 지금 너희가 정확히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깨닫게 해주마.”

말락서스가 피투성이 레가스의 머리통을 움켜쥐고 일으켰다.

그제야 레가스의 존재를 눈치 챈 폰이 어이없어하며 물었다.

“뭐냐, 레가스? 너 왜 여태까지 그 꼴이야? 물약 다 떨어져서 없었던 거야? 근데도 여태까지 안 도망치고 있었고?”

졸지에 말락서스의 인질이 된 레가스가 민망하다는 듯이 웃었다.

“하하, 말락서스가 얼마나 센지 최대한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고 싶었어. 분명 내 수련에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냥 죽어라.”

L.T.S 시절부터 느꼈지만 이 길드에는 바보가 너무 많다.

폰과 반트너는 레가스를 무시했다. 그리고 말락서스는 팔짱 끼고 선 채 전황을 지켜보는 지슈카에게 소리쳤다.

“계집! 너희들 전원 모두 곧 이놈처럼 만들어주마!!”

말락서스의 손끝에 마력이 집중됐다. 레가스의 머리가 곧 수박처럼 터져버릴 것이었다.

랭커에게 있어서 죽음은 심대한 타격이 되어 돌아오는 법.

최소 일주일을 쉬지 않고 사냥만해야지 획득할 수 있는 경험치를 한 번의 죽음으로 잃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래 체다카 길드원들은 동료의 죽음을 잠자코 지켜보지 않는다. 매 전투마다 최대한 동료를 지키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레가스는 충분히 살 수 있었음에도 어리석은 이유로 오기를 부리다가 죽음을 자처했다. 자업자득이라는 말이다. 굳이 위협을 무릎 쓰면서까지 도울 가치가 없었다.

“깔끔하게 한 번 죽고 이참에 정신 좀 차려.”

체다카 길드원 그 누구도 레가스를 구출하려하지 않는 그 상황에서 한 사내가 작게 읊었다.

“파그마의 검무, 제(制).”

“…?!”

말락서스와 지슈카를 비롯한 모두의 시선이 한쪽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보았다.

칸의 제자인지, 특급 야파 화살의 제작자 본인인지, 아니 애초에 대장장이는 맞는지.

아직까지 정체를 확정 지을 수 없는 흑발의 동양인 청년, 그리드가 빛나는 단검을 휘두르며 고고히 춤추고 있는 모습을!

“…….”

비장함이 엿보이는 표정과 절도 있는 춤사위.

그것은 정말로 보기 드문, 매우 능숙한 검무였다.

그 모습이 마치…

“미친놈 아니야?”

체다카 길드원들이 술렁였다.

“쟤 뭐냐? 이 상황에서 왜 갑자기 춤을 추는 거야?”

일반적인 사람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리드의 괴상한 행동!

토반이 그를 보다가 불헌 듯 과거의 일을 떠올렸다.

“저 남자 이제 보니까…”

몇 달 전, 바이란 마을에서 숲의 수호자 레이드 파티를 구할 때 있었던 일이다.

딱 봐도 80레벨 전후로밖에 보이지 않는 전사가 스스로를 100레벨이라고 속이면서 레이드에 끼워달라고 하더니, 급기야 자신은 컨트롤의 달인이기 때문에 방어구를 전혀 무장하지 않고 대검 한 자루로만 전투에 나선다는 되도 않는 허풍까지 쳤었다.

이제 보니 그때 그 허풍쟁이가 바로 저 그리드가 아닌가?

‘이거야 원…’

깊은 한숨을 내쉰 토반이 지슈카에게 귀띔했다.

“마스터. 역시 이번에도 거짓 제보에 속은 것 같다. 그리드 저자는 대장장이가 아니라 전사야. 덤으로 별 볼 일 없는 허풍쟁… 윽?”

토반은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혼자 춤추고 있는 그리드의 모습이 처음에는 미친놈 같았지만 그건 잠시일 뿐. 지켜보고 있자니 그 비장한 분위기에 취하여 심장이 두근거리고 시작했고, 이내 긴장감이 몸을 엄습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그리드로부터 엄청난 위압감을 느끼게 됐다.

‘이게 무슨?’

토반은 더 이상 그리드에 대해서 함부로 떠들지 못하고 압도당하여 뒷걸음질 치다가 문득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지슈카를 비롯한 모든 길드원들이 자신과 똑같은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심지어…

‘저 말락서스 조차도!’

“…이건!”

레가스의 머리통을 으깨버리려던 말락서스가 기겁하며 행동을 멈췄다.

‘아까 그건 우연이 아니었단 말인가?’

아직 체다카 길드원들이 이곳에 도착하기 전.

그리드와 1대1로 대치하였던 말락서스는 그리드를 죽이는데 실패했다.

그리드가 강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엄청 약했다. 마음만 먹으면 1초 만에 죽여 버릴 수 있을 정도. 즉, 벌레나 다를 바 없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어딘가 이상했다. 그는 분명히 약했으나 근원을 알 수 없는 위압감을 발산했다. 거기에 압도당한 말락서스는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해하지 못하겠군.’

아까는 우연이라고 치부했지만 지금 또 같은 경험을 하는 걸 보니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리드로부터 느껴지는 위압감은 진짜였다.

어째서 저런 애송이가 이만한 위압감을 발휘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두려워할 분은 오로지 야탄 신뿐이어야 하건만!’

말락서스는 동요하여 급기야 손아귀의 레가스를 놓쳐버렸다. 그러는 중에도 그리드는 계속 검무를 추면서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제길!’

말락서스는 그리드와 최대한 거리를 벌리기 위해서 물러섰고, 그리드는 그 틈에 레가스를 부축해 일으켰다.

“레가스 님 괜찮아요?”

“그리드 님…”

그리드를 바라보는 레가스의 두 눈은 초롱초롱 반짝이고 있었다.

단 한 번의 짧은 검무로, 저 말락서스는 둘째 치고 최강 체다카 길드원 전원을 위축시키다니!

그리드 오직 혼자서 통합랭킹 100위권 유저 17명을 압도하였으니 그의 존재감은 레가스가 여태까지 만나온 그 어떤 최상위 랭커보다도 컸다.

‘이름 난 랭커도 아닌 분이 어찌 이런 위엄을…’

레가스는 그리드를 처음 만났을 때를 회상했다.

방어구 하나 무장하지 않고 오직 검 한 자루만으로 몬스터들을 사냥한다 했던가?

모두 다 그를 허풍쟁이라고 비웃었지만 레가스만은 그를 믿었었다. 그리고 역시나 믿을만한 사람이었다.

“그리드 님은 보면 볼수록 대단하십니다.”

레가스는 통합랭킹 30위권의 최고 랭커다. 그만한 존재가 지금 그리드에게 선망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그에 그리드는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희열을 느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유저였던 내가 이제는 랭커를 감탄시키고 있다.’

원래 그리드에게 있어서 랭커란 TV나 먼발치에서만 바라볼 수 있는 아득한 존재였다.

하지만 레전드리 직업 파그마의 후예로 전직한 이후 그리드의 삶은 큰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입이 근질거리는군!’

그리드는 이참에 레가스에게 자신을 한껏 포장하면서 잘난체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제(制)의 지속 시간은 단 3초에 불과했다. 여유가 없는 것이다.

‘아쉽지만 상황이 상황이니까…’

잠자코 레가스를 부축해 도망치는 그리드의 두뇌는 손익 계산하기에 바빴다.

‘검무 한 번 춘거로 랭커의 은인이 됐으니까 개이득 맞지? 장담한다. 레가스의 성격을 고려해봤을 때, 앞으로 레가스는 나를 위해서라면 흔쾌히 빚보증도 서줄 거야.’

3초는 짧다.

그리드가 속으로 쾌재를 부르는 사이 제(制)의 지속 시간이 끝나면서 말락서스는 자유를 되찾았다. 그리고 그는 순식간에 그리드의 눈앞으로 나타났다.

순보나 이스케이프 등의 대쉬 계열 스킬이 아니라 공간 그 자체를 도약하는 고위 마법의 발현이었다.

“엥?”

그리드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 뒤편에 있던 말락서스가 어째선지 앞길을 가로막고 서있자 어안이 벙벙해졌다.

“귀, 귀신이세요?”

말락서스가 이를 갈았다.

“너로부터 느껴지던 그 위압감이 지금은 또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나는 또 착각을 했던 건가? 그럴 리 없지! 너는 나를 농락하고 있구나! 괘씸한 놈! 본 실력을 보여라! 그러지 않으면 결코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두 개의 목소리가 섞여있는 듯한, 소름 돋게도 기괴한 음성으로 끔찍한 선포를 하는 말락서스!

“히익~!”

그리드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는 목숨을 구걸해보고자 엎드려 절이라도 하려고 했다.

한데 그때 불꽃의 구체가 날아와 말락서스를 덮쳤다.

퍼엉!!

“이틈에 어서 피해요!”

말락서스가 폭발에 휩쓸려 있는 사이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본 그리드는 낯익은 미소녀를 발견했다.

그리고 영문 모르겠단 표정을 지었다.

“라엘라?”

세계적인 가수인 동시에 Satisfy 최상위 랭커로 유명한 18세 영국인 소녀 라엘라!

그녀가 어째서 이곳에 있다는 말인가!

“서, 설마!”

한때 그녀의 열렬한 팬이었던 그리드가 레가스에게 물었다.

“혹시 라엘라도 레가스 님과 같은 길드 소속인 겁니까!”

잔뜩 흥분한 그리드의 두 눈은 붉게 충혈 되었고 콧구멍은 벌렁벌렁 거리고 있었다.

뜨거운 콧김을 내뿜는 그리드에게 레가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그녀는 Satisfy가 오픈하기 전 L.T.S 시절부터 함께 해온 동료죠. 그리드 님도 그녀의 노래를 좋아하시나보죠?”

“헐 대박! 전 라엘라의 큰 가슴이 아주 좋… 아, 아니, 라엘라 노래 참 좋죠! 하하!”

라엘라의 특정 부위에 시선을 사로잡혀 넋을 잃은 그리드는 제 목숨 위태로운 것도 잊고 있었다.

그에게 지슈카가 소리쳤다.

“언제까지 멍때리고 있을 거야? 어서 이쪽으로 와!!”

파앗!

지슈카가 하늘을 향해 화살 수십 발을 연사했다.

그리고 불꽃 구체와 실드가 충돌하면서 발생한 연기 탓에 잠시 시야를 잃고 있었던 말락서스의 머리 위로 화살의 비가 쏟아져 내렸다.

그리드 탓에 평정심을 잃은데다 시야가 가려져 있던 말락서스는 실드를 전개하지 못하고 고슴도치가 되고 말았다.

그 틈에 그리드와 레가스는 지슈카들이 있는 방향으로 전력 질주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말락서스에게 따라잡히고 말았다.

“놓칠 줄 아느냐?”

쿠오오오!!

등에 박힌 화살 몇 발을 신경질적으로 뽑아낸 말락서스가 팔을 휘두르자 허공에서 칠흑의 창 3개가 솟아났다. 그리고 그대로 그리드에게 날아갔다.

“아오, 이 새끼가 왜 나만 따라오는 거야! 진짜 쓰벌! 내가 그렇게 만만하냐!!”

참다 참다 못한 그리드가 인벤토리에서 다인슬레프를 뽑아 쥐려는 순간!

하나의 인영이 기척도 없이 나타나더니만 그리드와 레가스를 확보, 자리를 이탈했다.

콰쾅!!

본래라면 그리드를 산산조각 냈어야할 창들이 지면에 꽂히며 폭발한다.

말락서스의 얼굴이 잔뜩 찌그러졌다.

“잡종 개들 사이에 쥐새끼까지 섞여 있었군.”

말락서스의 전면으로 칠흑의 칼날이 소환됐다. 그리고 그 칼날은 그리드를 빼앗아간 인영을 정확하게 조준, 발사되었다.

서걱!

그다지 멀리 도망치지 못하고 양단되는 인영!

폭포 같은 피를 쏟아내기는커녕 조용히 안개로 화해 사라진다.

“분신? 칫, 정말이지 가지가지 하는구나!!”

분노에 휩싸인 말락서스가 다시금 그리드를 쫓기 위해 순간 이동 마법을 캐스팅했다. 하지만 무심한 눈길의 젊은 사내가 나타나 방해했다.

좌우로 슬쩍 움직이는가 싶더니만 수십 개의 분신을 만들어 맹공을 퍼붓는다.

퍼퍼퍼퍼퍽!!

슈슈슈슈슉!!

각기 다른 곳을 노리고 모조리 다 다른 궤도에서부터 날아오는 발차기와 단도!

제아무리 말락서스라도 공격당하는 모든 부위에다가 일일이 실드를 전개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런 경우 몸을 완벽하게 보호하려면 어떤 수단을 써야하는가?

해답은 간단하다.

“내게 잔재주는 통하지 않는다!”

소리친 말락서스가 칠흑의 실드를 전신에다가 전개했다.

그 위용은 실로 절대방어!

지켜보던 반트너가 어처구니없어했다.

“저거 밸붕 아니냐? 실드 능력이 너무 개사기잖아? 캐스팅도 없이 사용하면서 방어력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고, 심지어 전신을 보호할 수도 있다고? 무적이잖아 저거! 저걸 어떻게 해치워!”

폰은 동의하지 않았다.

“저 놈의 방어능력이 너의 생각대로 무적이었다면, 놈은 실드를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전개하고 있었겠지. 하지만 그러지 않고 있잖아? 그래서 지슈카의 공격을 몇 번이나 허용했고 말이야. 녀석은 공격을 당할 때에 한해서, 그것도 최소한의 부위에 일시적으로 실드를 전개하고 금세 또 다시 거두기를 반복하고 있어. 아마 실드를 전개하고 유지하는데 소모되는 마력이 상당한 거겠지.”

“나도 동의한다.”

말락서스가 어둠의 족쇄를 휘둘러서 모든 분신의 발을 묶고, 이어 지옥의 업화를 소환해 전부 불태워버리자 간신히 본체만 도망쳐온 페이커.

그가 어렵사리 구출한 그리드와 레가스를 한쪽에 내려놓으며 의견을 피력했다.

“만약 말락서스가 폰의 생각대로 실드를 사용하는데 소모되는 마력에 부담을 느끼고 있다면… 이제 우리가 공격당할 차례다. 녀석은 방어만 하면서 마력이 소모되는 것을 더 이상 원치 않을 테니 이제부터라도 모든 마력을 공격에 동원할거라고 봐.”

정답이었다.

“고귀한 지옥의 주인이시여! 영겁의 세월 동안 당신께서 길들여온 맹견들의 고삐를 지금 이 순간 풀어주소서! 그리고 당신의 미천한 종을 농락한 저들의 심장을 뜯어 먹으라 명하여주시옵소서!!”

대낮의 푸르던 하늘이 밤하늘로 변해버렸다. 별도, 달도 찾아볼 수 없이 그저 검다. 그리고 이내 숲에도 짙은 어둠이 깔렸다.

경험해보지 못한 마기가 일대를 지배하며 체다카 길드원들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든다.

폰이 중얼거렸다.

“우리 죽을 것 같다?”

지슈카가 다급히 소리쳤다.

“그리드를 지켜!”

조금 전 그리드의 검무를 목격한 이상, 더 이상 그리드를 대장장이라고 특정 짓기는 무리가 있었다. 그리드의 클래스는 블레이드 댄서임이 확실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슈카는 희망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리드가 특급 야파 화살을 한 눈에 알아봤었던 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리드의 보호를 우선시했다.

“우오오!!”

토반이 그리드의 전면으로 나섰다. 그리고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방어스킬을 전개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반트너, 폰, 페이커, 라엘라를 비롯한 체다카 길드원 전원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리드를 지키고자 대비했다.

그리고 말락서스가 서있는 지면이 용암처럼 꿈틀거리는가 싶더니 시커먼 그림자들이 수십 개 솟아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림자들은 이내 형상을 갖추었는데, 그 수십 개의 그림자는 죄다 머리 3개 달린 시커먼 개였다.

크르릉!

컹컹!

3개의 주둥이에서 각각 화염, 냉기, 독기를 토해내는 2미터 크기의 개들!

새빨간 안광을 번들거리고 있는 그놈들은 맹견이라기보다 광견이라고 표현하는 게 적합해보였다. 그야말로 미친개처럼 컹컹 왈왈 짖어댄다.

놈들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둘러본 말락서스가 회심의 미소를 그렸다.

“지옥의 파수꾼 여기 강림하였노라!”

커엉!!

지옥의 파수꾼들이 체다카 길드원들과 그리드를 향해서 흉포하게 달려들었다.

“개 따위가 어딜!”

비록 나의 쌍도끼가 말락서스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지만 개들 따위 쉽게 양단내리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반트너가 지옥의 파수꾼들 사이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마치 폭풍처럼 회전하며 도끼를 사방으로 휘둘렀다.

“으랴아아아앗~!!”

퍼퍽! 퍽!

컹컹! 컹!

얼핏 보면 반트너가 선전하는 듯했다.

하지만 전투가 시작되고 채 몇 초 지나지 않아 사태는 급변했다.

지옥의 파수꾼들은 반트너의 도끼에 대가리 3개가 모조리 찍히는 한이 있어도 죽지 않고 오로지 돌진했다.

그리고 반트너가 몸 곳곳에 화상을 입고 고통스러워하는가 싶더니 급기야 두 다리는 꽁꽁 얼어붙어서 제자리에 옴짝달싹 못하는 게 아닌가? 더군다나 피부는 녹색으로 변질되고 검은 피를 토하는 등 중독증상까지 보였다.

심지어 두 자루 도끼는 완전히 녹슬어 더 이상 무기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할 지경이 됐다.

지옥의 파수꾼들이 입에서 내뿜고 있는 화염과 냉기, 독기의 영향으로 저렇게 된 것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동료.

폰은 마하 스피어를 전개해서 반트너에게 퇴로를 열어주었다.

퍼퍼펑! 퍼퍼퍼펑!!

음속의 창이 반트너를 둘러싸고 있는 지옥의 파수꾼들을 꿰뚫고 지나간다.

깨갱! 깽!

지옥의 파수꾼들이 기겁하면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틈에 상태이상에서 회복한 반트너가 무적 스킬까지 사용해가면서 전장을 이탈했다.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는 토반의 얼굴이 굳어져 있었다.

“한 마리도 죽지 않다니…”

어지간한 일반 몬스터들은 마하 스피어에 적중 당할 시 한 방에 죽어버린다. 크리티컬까지 터질 경우에는 보스 몬스터조차 심대한 타격을 입을 정도로 강력한 일격필살의 스킬이었다.

한데 지옥의 파수꾼들은 마하 스피어를 맞고도 살아남았다. 이는 즉 지옥의 파수꾼들이 일반 몬스터를 초월하는 방어력과 생명력을 보유했다는 뜻이 됐다.

지슈카가 길드원들에게 사태의 심각성을 확실하게 전파했다.

“반트너가 모든 스탯을 근력에 분배했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수호기사야. 반트너의 방어력과 마법 저항력이 우리 길드에서 최상위권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반트너가 순식간에 넝마가 됐어. 저런 경우는 몇 번 못 봤지? 저 개들의 공격력이 우리가 여태까지 만나온 몬스터 중 최상위권에 속한다는 뜻이야.”

폰이 거들었다.

“저 개새끼들의 레벨은 최소 300 이상으로 추정된다. 우리라도 혼자서 2마리, 3마리씩 상대하긴 부담되겠지.”

상대하기 까다로운 3가지 속성 공격으로 무장한 300레벨 이상의 몬스터가 정확히 29마리 출몰했다. 그리고 말락서스가 놈들을 원호한다.

승산이 희박해지고 말았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리고 지옥의 파수꾼들이 일제히 길드원들을 덮쳤다.

지슈카가 지휘했다.

“원거리 공격으로 응전해!!”

지옥의 파수꾼들을 상대로 접근전을 벌였다가는 순식간에 반트너 꼴이 되고 말 것이다.

그렇기에 지슈카의 지휘는 적합했지만, 공교롭게도 체다카 길드원 중 원거리 공격형 클래스는 몇 되지 않았다.

컹컹!

“크윽!!”

어렵지 않게 체다카 길드의 방위선을 돌파한 지옥의 파수꾼들이 토반의 방패를 할퀴고 물어뜯더니 맹독 브레스까지 발사했다.

순식간에 부식되어버리는 토반의 방패를 보면서 결국 생명의 위험을 느낀 그리드가 인벤토리에서 황금 방패를 꺼내 들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끼잉! 낑낑!

지슈카의 화살과 폰의 창에 얻어맞아도 쉽사리 물러서지 않던 지옥의 파수꾼들이 그리드의 방패를 보자마자 병 든 개마냥 끙끙 앓으면서 물러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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