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체다카 길드와의 만남
연합군과 야탄교의 전쟁이 시작되고 보름이 지났다.
그 과정에서 숱한 공적을 세운 자이언트 길드는 금일 축제를 맞이했다.
“마스터의 영주 취임을 축하하며! 건배!”
“건배!!”
자이언트 길드는 Satisfy가 출범한 이후 지금까지 쭉 최고의 길드 중 하나로 손꼽혀 왔다. 그리고 길드 마스터 크리스는 통합 랭킹 3위의 최상위 랭커였다.
금일, 전장에서의 공로와 향후 전장에서의 활약 기대치를 인정받아 페드로의 영주로 임명된 크리스가 530명의 길드원 앞에서 선포했다.
“지금은 안정이 필요한 시기다! 향후 보름 동안 우리는 출정을 중지한다! 그동안 페드로를 수호하는 것에 집중하며 전력을 정비해라! 그리고!”
말을 멈춘 크리스가 가죽 갑옷을 꺼내 손에 쥐었다. 그리고 갑옷의 정보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의외로 착용감이 좋은 쥐 가죽 갑옷>
등급:에픽
내구력:24/24 방어력:22 회피+3%
대단한 실력과 잠재력을 지녔지만, 경험과 명성은 턱없이 부족한 이름 모를 장인이 조잡한 쥐의 가죽을 무두질하여 제작한 갑옷입니다.
착용자가 행동하기에 전혀 불편함 없도록 설계, 제작되었습니다. 착용자는 조금 더 신속하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빈약한 재료로 이 정도의 작품을 만들었다는 사실만으로 감탄할 만합니다.
사용 조건:레벨 13 이상. 초급 레더 아머 마스터리.
최초의 에픽 등급 화살을 제작해서 한동안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이름 모를 장인!
그를 대체 얼마나 찾아 헤맸을까? 그간 정말로 필사적으로 찾아다녔지만 작은 단서조차 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얼마 전,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초보 유저들의 게시 글을 우연히 읽던 도중 드디어 단서를 찾았다.
‘부디 늦지 않았기를……!’
크리스는 다시 한 번 간절히 기원하면서 말을 이었다.
“길드원의 절반을 수색대로 전환! 윈스톤으로 향한다! 목표는 이름 모를 장인이다! 그를 반드시 찾아내서 길드로 초빙해라! 그가 어떤 조건을 제시하더라도 무조건 승낙해라!”
길드가 빠르게 강해지기 위해서는 고레벨의 전투 직업군이 다수 필요하다. 하지만 길드가 보다 견고하고 완벽하게 완성되기 위해서는 뛰어난 실력의 보조 직업군이 따로 필요했다.
대장장이 랭킹 1위 판미르와 랭킹 2위 스텡의 초빙에 실패한 크리스!
그나마 랭킹 4위와 5위의 대장장이는 초빙에 성공했지만 여전히 아쉬운 감은 크다.
그래서 반드시 이름 모를 장인을 초빙하고 싶었다. 크리스는 그와 함께 자이언트 길드를 지존으로 우뚝 세우고 싶었다.
***
“몸이 두 개라도 모자라겠다.”
체다카 길드의 길드원들은 너무 바빠서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척살령을 수행하기 위해서 유페미나를 수색하는 한편, 길드의 명성을 높이고자 야탄교 관련 퀘스트들을 쉴 새 없이 진행 중이다.
또한 여전히 이름 모를 장인을 찾아 헤매고 있다.
애초 체다카 길드의 총원은 17명밖에 되지 않는다.
길드원 전원이 랭커이기는 해도 숫자가 부족하니 여러 가지 일을 한 번에 해내기엔 무리가 컸다.
결국 이대로는 안 되겠다 판단한 길드원들이 지슈카에게 의견을 제시했다. 그리고 회의가 개최되었다.
“유페미나의 척살을 뒤로 미루자. 그녀를 척살하고자 하는 이유는 동료들의 복수와 길드의 위엄을 수호하기 위함일 뿐이지 당장의 이득을 위해서가 아니잖아? 반면 야탄교 관련 퀘스트와 이름 모를 장인 찾기의 경우는 길드에 직접적으로 이득이 되는 일이야. 나는 우리 길드의 발전을 위해서 야탄교 관련 퀘스트와 이름 모를 장인 찾기는 이대로 진행하고 척살령을 미루는 게 좋다고 생각해.”
“나도 동의한다. 애초에 그 계집, 쥐새끼처럼 잘 도망 다녀서 잡는 게 쉬운 것도 아니고.”
“찬성 7표. 반대 7표. 기권 3표.”
“나는 척살령을 이대로 반드시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해. 도중에 그만뒀다는 게 소문나기라도 했다간 우리 길드를 만만하게 여기는 놈들이 늘어날 거야. 차라리 야탄교 관련 퀘스트를 쉬자. 솔직히 말해서 우리들의 실력이라면 이런 잡다한 퀘스트들에 의지하지 않아도 언제든지 길드 명성을 높일 수 있잖아?”
“맞아. 척살령은 자존심의 문제야. 결코 미뤄선 안 될 일이지. 다들 체다카 길드의 긍지를 잊은 건 아니겠지?”
“찬성 7표. 반대 5표. 기권 5표.”
잠자코 회의의 진행 상황을 지켜보던 레가스가 슬그머니 물었다.
“이름 모를 장인을 찾는 일을 미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어?”
지슈카가 레가스에게 반문했다.
“미뤄야 한다고 생각해?”
레가스가 즉답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가장 우선순위라고 생각하는데? 너희들은?”
“전원 동의.”
지슈카가 결론을 내렸다.
“야탄교와 관련된 퀘스트를 수행하는 일은 지금부로 중지한다. 유페미나와 이름 모를 장인을 찾는 일에 모든 전력을 집중하도록 하자.”
“좋아!”
회의가 끝나고 길드원들은 산산이 흩어졌다.
윈스톤.
체다카 길드는 이 도시에 머무는 중이었다. 여러 정황상, 이름 모를 장인이 이곳에 거주하고 있을 가능성이 그나마 가장 높다고 추측했기 때문이다.
“하음, 회의는 참 지루해. 응?”
회의가 끝난 후.
기지개를 펴면서 여관을 나선 레가스가 한 동양인 사내를 발견했다. 그리고 얼굴 가득히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봐요! 맨몸의 검투사!”
“…엉?”
고개를 푹 숙인 채 의기소침하게 걷고 있던 그리드는 누가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으며 나타나더니 별 이상한 호칭으로 부르자 짜증을 내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레가스를 확인하고 곧장 알아보았다.
“레가스?”
“하하! 알아봐 주시네요? 기억하지 못할 줄 알았는데?”
레가스가 기뻐했다.
그리드가 분수대에 기대어 앉으며 대꾸했다.
“빚보증 잘 서 주게 생긴… 아니, 모두 다 저를 비난하던 그때 혼자서 저를 변호해 줬던 당신을 어떻게 잊겠습니까?”
수개월 전, 당시 마이너스 3레벨이었던 그리드는 바이란 마을에서 숲의 수호자 레이드 파티를 발견, 레벨을 속이고 참여하려 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일이 돌아가다 보니 레이드 파티원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그때 유일하게 그리드를 믿어 주고 편들어 줬던 인물이 바로 레가스였다.
하지만 그리드는 레가스에게 감사함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거부감을 느꼈었다. 자신과 정반대로 순수하고 착한 레가스가 생리적으로 싫었고, 더군다나 꽃미남이라서 더욱더 마음에 안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 마디 대화를 나눈 후, 레가스가 생각보다 더 순진해서 빚보증 잘 서 줄 것 같아 보이자 언젠가 빚보증을 서 달라고 요청할 심산으로 원만히 지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었다. 그래서 레가스와의 인연을 최대한 좋게 마무리 지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때 깔아 둔 떡밥을 써먹을 때가 도래하고 있었다.
레가스가 걱정했다.
“표정이 왜 그렇게 어두워요?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그리드는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짓고 설명했다.
“어떤 썩을 놈이 제 아이템을 강도질해 갔거든요.”
레가스가 화들짝 놀랐다.
“그런 악독한……! 세상에 그런 나쁜 사람이 있다니!”
“하아… 그러게 말입니다. 남의 등 처먹고 사는 놈들은 다 나가 죽어야 돼요.”
그리드는 본인 생각을 못하고 함부로 지껄였다. 그리고 레가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죽어야 한다는 건 좀 그렇지만 응당 대가를 치러야 하는 건 사실이죠.”
그리드가 슬슬 떡밥을 풀기 시작했다.
“하아… 누가 좀 도와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긴… 있을 리가 없나. 이 가혹한 세상에 남을 위해 두 발 벗고 나서 주는 사람이 존재할 리가 없지. 그쵸?”
레가스가 벌떡 일어났다.
“이 세상이 가혹하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세상이 얼마나 따뜻하고 아름다운데!”
“그런가요? 하아… 하지만 제가 겪은 세상은 가혹하기 짝이 없는걸요. 내 전부나 다름이 없는 아이템을 도둑맞기까지 하고…….”
“대체 그 아이템이 뭐기에 그러세요? 엄청 중요한 거였나 보죠?”
“네… 그쵸……. 제 삶의 전부였어요……. 근데 그걸 잃다니……. 저 자살할까 봐요…….”
레가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자, 자살이라니! 그런 죄악을 저질러선 안 됩니다! 부모님께 죄송하지도 않습니까?! 효! 태권도 정신을 잊었어요?!”
“하아, 미안합니다. 심신이 너무 지쳐서 안 좋은 생각을 하고 말았군요.”
결국 레가스가 떡밥을 물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군요! 제가 돕겠습니다! 타인에게 이토록 큰 상처를 안기고 다니는 사람을 용서해선 안 되니까요!”
‘아싸!’
낚았다!
그리드가 속으로 쾌재를 부르는 그때였다.
뻐억!
우연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게 된 지슈카가 다가와 레가스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그리고 울상을 짓는 레가스의 귓불을 잡아당겼다.
“지금 네가 남 도와줄 처지야? 할 일이 태산같이 많은 거 잊었어?”
그녀를 바라보는 그리드의 눈이 반짝였다.
갈색으로 그을린 피부! 붉고 큰 입술! 길게 찢어진 눈매! 그리고 커다란 골반과 가슴까지!
완벽한 8등신 섹시 미녀 지슈카는 그리드가 꿈꿔 온 이상형이었던 것이다.
“이, 이분은?”
말까지 더듬으면서 질문하는 그리드에게 레가스가 여전히 귓불을 꼬집힌 채 설명했다.
“우리 길드 마스터예요. 아! 아악! 아, 아파!!”
“아프라고 하는 거야, 이 한심한 자식아.”
“으아아악~!!”
레가스의 귓불을 더욱더 강하게 잡아당긴 지슈카가 그리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리드가 매우 노골적인 눈빛으로 자신의 몸을 위아래로 훑고 있음을 확인하고 한숨을 쉬었다.
남자들의 이런 시선을 어려서부터 숱하게 받아 오기는 했지만, 여전히 적응되지 않고 불쾌하다.
현실이 아닌 가상현실에서조차도 말이다.
“이봐, 너.”
“네? 네!”
지슈카의 쌀쌀맞은 부름을 받은 그리드가 저도 모르게 차렷 자세를 하면서 힘차게 대답했다.
평상시 그리드는 여자들에게 강한 면모를 보였지만 이상형 앞에서만큼은 달랐다. 옛날부터 이상형 앞에만 서면 이렇듯 바짝 긴장하곤 했다.
그를 본 지슈카가 콧방귀를 뀌었다.
“애송이네. 지금 레가스는 바쁘니까 네 일은 네가 알아서 처리해. 그럼 우리는 간다.”
일방적으로 지껄인 지슈카가 레가스의 귓불을 잡아 이끌고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애송이네. 애송이네. 애송이네. 애송이…….
멀어지는 지슈카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그리드의 뇌리에 계속해서 같은 말이 맴돌았다.
그리고 급기야…
“저런 개싸가지를 봤나.”
이상형은 어디까지나 이상형일 뿐이다.
정신을 차린 그리드가 성큼 걸어서 지슈카를 따라잡았다.
“이봐.”
“……?”
지슈카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과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던 애송이가 당당하게 앞길을 가로막고 서자 조금 놀랐다. 하지만 잠시뿐이었다.
여유로운 미소를 입가에 그린 지슈카가 팔짱을 껴서 가슴을 강조하며 물었다.
“왜 불러?”
“컥!”
그리드의 시선이 지슈카의 풍만한 가슴골에 고정되었다. 하지만 금세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고 말했다.
“레가스를 놔주지 그래? 그는 날 도와주겠다고 했어. 근데 네가 무슨 권리로 그걸 방해하는 거지?”
“당연한 권리지. 난 얘가 속해 있는 길드의 마스터야. 그러니까 얘는 당연히 내 명령에 따라야만 해. 이해돼? 구차하게 굴지 말고 꺼져.”
“단지 길드 마스터라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멋대로 부리는 건 좋은 처사가 아니야.”
“그러면? 제삼자가 부리는 건 좋은 처사라는 거야?”
입장상 우위에 있는 건 당연히 지슈카였다. 그래서 그리드는 그녀와 싸우기보다는 고개 숙이는 쪽을 선택했다.
“…부탁한다. 지금 난 정말로 절박해.”
“절박한 건 우리도 마찬가지야. 우리에겐 여유가 없어.”
“내가 더 절박하다고!”
“우리가 더 절박해!”
“내가 더 절박해!”
“우리야!”
“나야!”
수군수군.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광장에서 다 큰 성인 남녀가 유치한 말다툼을 벌이기 시작하자 금세 구경꾼이 모여들었다.
특히 지슈카는 유명인이었기 때문에 파장이 컸다.
“저거 신궁 지슈카 아니야?”
“와, 저게 그 고고한 여자 맞아?”
“고귀하신 체다카 길드의 마스터께서 웬일로 유치한 언쟁을 다 벌이신대?”
지슈카가 꽈득, 이를 갈았다. 별 시답지도 않은 놈 탓에 그간 쌓아 온 이미지가 훼손되게 생겼으니 손해배상이라도 청구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반면 그리드는 주변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아예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말로 절박했기 때문이다.
무려 수억 원을 호가하는 아이템을 눈앞에서 도둑맞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지금 그리드의 머릿속은 오로지 신성의 방패를 되찾는 일로 가득 차 있었다.
“제발 레가스를 빌려 줘!”
“…하.”
그리드가 결코 물러설 생각을 않자 결국 지슈카 쪽에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좋아, 선택은 레가스에게 맡기자.”
지슈카가 레가스의 귓불을 풀어 주었다. 그리고 부담을 팍팍 주었다.
“너는 우리 길드가 지금 얼마나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 근데 남 도와줄 시간이 있을까나?”
“으으…….”
망설이는 레가스에게 그리드가 애원했다.
“레가스, 제발 부탁해요. 내가 의지할 사람은 당신밖에 없습니다.”
레가스의 고민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그리드는 심지어 모든 걸 잃었다는 표현을 했었고, 자살하고 싶다는 발언까지 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의지할 사람이 나밖에 없다고 하질 않는가!
“도와줄게요!”
덥석!
결국 그리드의 손을 붙잡고 마는 레가스!
빠직!
지슈카의 머리에서 무엇인가가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를 주변에 모여 있는 구경꾼들 모두가 똑똑히 들었다.
하지만 정작 그리드와 레가스는 못 들었다.
“고마워요, 레가스! 당신을 평생의 은인으로 여기겠습니다!”
“하하, 별말씀을. 정의를 수호하고 어려운 자를 돕는 것은 무도인으로서 응당 해야 할 일 아니겠습니까!”
레가스는 의욕이 넘쳤다.
지슈카는 개념 없이 착해 빠져서 남들에게 뻑 하면 이용당하는 레가스에게 당장 욕과 폭력을 행사하고 싶었지만 지켜보는 눈이 너무 많아서 차마 함부로 행동할 수가 없었다.
“…그래, 그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좋아, 알았어. 잘해 봐.”
튀어나오려는 욕설을 참느라 붉은 입술이 연신 씰룩거린다. 그리고 목소리에는 영혼이 없었다.
레가스가 그녀에게 허리 숙여 사과했다.
“미안해! 한 번만 이해해 줘! 금방 도와주고 내 할 일 할 테니까! 자, 그리드! 어서 가죠!”
“네!”
그리드와 레가스는 하하호호거리면서 화기애애하게 자리를 떠났다.
결국 혼자 남은 지슈카는 정말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몇 년 동안 친구로 지냈던 나보다 누군지도 제대로 모르는 녀석을 택하다니…….”
중얼거리는 그녀를 보면서 구경꾼들이 수군거렸다.
“천하의 지슈카가 남자한테 차였다…….”
“게다가 여자도 아니고 남자한테 뺏겼어.”
“대박이다…….”
“…….”
지슈카는 귓구멍으로 쏙쏙 박혀 들어오는 잡음을 들으며 결심했다.
‘두 놈 다 반드시 부숴 버릴 거야.’
그런데 구경꾼들 중 누군가가 굉장히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냈다.
“근데 방금 저 남자, 그때 그 대장장이 아니야? 왜 있잖아? 그 엄청난 미인이랑 아이템 제작 승부했었던.”
“아~ 칸이라는 대장장이랑 합심해서 2 대 1로 승부했는데도 여자 하나 이기지 못했던 그 한심한 놈?”
지슈카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설마 저 남자가 대장장이 칸의 제자?’
체다카 길드가 유페미나의 행방을 수소문하기 위해서 찾던 인물 중 하나가 바로 칸의 제자였다. 그는 유페미나와 아이템 제작 승부를 겨룬 장본인이었기에 어쩌면 유페미나에 대해서 뭔가 아는 게 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장장이 칸이 제자의 정체를 알려 주지 않아서 찾기가 어려웠던 차다.
지슈카가 서둘러서 레가스에게 귓속말을 넣었다.
“레가스! 지금 너와 함께 있는 남자가 칸의 제자일 가능성이 높아! 내가 당장 대화해 봐야겠어! 지금 어디야?”
[상대가 귓속말 거부 상태입니다.]
“…이 자식이.”
레가스는 지슈카가 귓속말로 협박을 해 올까 두려워서 귓속말을 차단한 상태였다.
그에 발끈한 지슈카가 홀로그램 키보드를 소환했다. 그리고 길드 채팅창에다가 말했다.
{야, 레가스! 레가스레가스레가스레가스레가스레가스레가스레가스레가스레가스레가스!!}
{길마님(ㅡ.ㅡ) 채팅 도배 금지요.}
{닥쳐=_= 지금 농담 따먹기 할 때가 아니야.}
{ㅠㅠㅈㅅㅈㅅ}
{레가스! 채팅 안 보여? 야! 너 정말로 죽고 싶어?!}
{이렇게까지 도배하는데 조용한 거 보면 길드 채팅 차단해 놓은 상태인가 본데? 왜 그래? 레가스가 또 무슨 사고 쳤어?}
{레가스가 칸의 제자와 함께 있어! 근데 레가스는 상대가 칸의 제자라는 사실을 몰라!}
{잉? 칸의 제자?ㅡㅡ; 그렇게 찾아도 안 보이던 녀석이 어쩌다가 레가스랑 같이 있데?}
{어쨌든 당장 레가스를 찾아! 칸의 제자라면 유페미나에 대해서 작은 단서라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으니까, 반드시 꼭 만나야 해!}
이때까지만 해도 지슈카와 체다카 길드원들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유페미나의 행방을 알기 위해서 찾는 것에 불과한 칸의 제자가, 사실은 자신들이 그토록 만나고 싶어 했던 이름 모를 장인이라는 것을!
***
“흐음…….”
나는 레가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물론 나를 대장장이가 아니라 전사라고 알고 있는 레가스의 입장에 맞춰서 몇 가지 부분들은 생략하거나 다르게 이야기했다.
애초, 내가 확실히 전달해야 할 부분은 오직 도둑놈의 인상착의일 뿐이니까!
“그러니까, 그리드 님이 어떤 퀘스트를 받고 윈스톤 성으로 갔더니, 병사 하나가 갑자기 노인으로 변신하고 당신의 아이템을 강탈해 갔다 이거죠? 당신은 그 노인을 쫓고 싶었지만 결국 놓쳤고?”
“네, 맞아요. 병사 몸에서 검은 기운이 막 솟아오르더니 갑자기 딱 변신을…….”
“검은 기운?”
“네.”
골똘히 생각해 본 레가스가 예측했다.
“아무래도 야탄의 신도인 듯한데요?”
그럴 리가?
야탄의 신도는 신성의 방패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괴로움을 느낀다고 한다. 근데 그 늙은이는 신성의 방패를 손에 쥐고도 멀쩡했었다.
“야탄 신도 같지는 않던데…….”
내가 조심스럽게 부정하자 레가스가 고개를 저었다.
“야탄의 신도가 맞을 겁니다. 검은 기운을 다루는 건 90퍼센트 확률로 야탄의 신도예요. 일단 근방에 있는 야탄 신도들의 은신처들을 찾아내도록 하죠. 은신처를 하나씩 격파해 나가다 보면 당신의 아이템을 강탈해 갔다는 그자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결국 나는 설명을 보탰다.
“아니, 실은 그 늙은이가 훔쳐갔다는 제 아이템이 야탄의 신도에게 큰 해를 입히는 아이템이거든요. 그 늙은이가 정말로 야탄의 신도였다면 그 아이템을 만지는 것조차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하는데…….”
“변신까지 할 정도면 고위 신도였을 텐데, 고위 신도라면 워낙에 신앙심이 강해서 아이템의 영향을 잘 받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런가요? 흠…….”
잠시 고민해 본 나는 결국 결정을 내렸다.
“좋아요. 레가스 님의 말을 믿어 보죠. 그런데 야탄교의 은신처는 어디에 있죠?”
레가스가 머리를 긁적였다.
“글쎄요. 찾아봐야겠죠?”
“…….”
레가스는 권성이라고까지 불리는 막강한 사내다. 전투력은 필시 굉장할 것이다. 하지만 두뇌적인 측면에서는 부족한 부분이 많을 듯하다.
***
“…여긴?”
아이린은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지금이 언제인지, 이곳이 어디인지, 그녀는 분간이 불가능했다.
마치 아주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다.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그녀의 귓가로 2개의 목소리가 섞여 있는 듯한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두려워 마라. 본디 어둠이란 쉽게 적응되는 법. 이곳이 어디인지 금방 깨닫게 될 것이다.”
그 말대로, 아이린의 눈은 점차 어둠에 적응해 갔다.
그리고 잠시 후 아이린은 이곳이 어디인지 알게 됐다.
“야탄의 신전!”
“아니. 이곳은 단지 어디에나 있는 흔한 동굴일 뿐이다. 다만 실내를 신전과 비슷하게 꾸며 놓았을 뿐이지.”
“당신은……?”
아이린은 야탄 신을 위한 재단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사내를 발견하고 경계했다.
그녀에게 고개를 돌린 사내가 자신을 소개했다.
“말락서스다.”
“……!”
아이린은 말락서스를 알고 있다. 아니, 대륙에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몇 없을 것이다.
말락서스.
그는 야탄 신의 여섯 번째 종이며, 야탄교의 제사를 총괄한다. 한 해 야탄 신에게 바칠 처녀의 숫자를 결정하는 인물이 다름 아닌 말락서스였다. 그의 말 한마디가 대륙의 수많은 처녀들의 목숨을 좌지우지한다는 뜻이다.
“다, 당신이 어떻게……? 여긴 대체 어디죠? 그리고 전 왜 이곳에!”
말락서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혼란스러워하는 아이린에게 한 걸음씩 천천히 다가가며 말했다.
“윈스톤 성은 신성의 방패의 제작법을 보유하고 있더군. 그리고 마침 실력이 뛰어난 대장장이와 거래하는 중이고.”
“…….”
“빛이란 어둠에 물들여지기 위해 존재하는 법. 알고 있나? 신성의 방패에 암흑의 마력이 깃들면 어떻게 되는지?”
말락서스가 음침하게 웃었다.
아이린은 두려움으로 인해 벌벌 떨리는 손으로 도란의 반지를 꽉 움켜쥐었다.
‘도란… 도란!’
도란은 스테임 가문을 오랫동안 수호했던 그림자다.
아이린은 어려서부터 온갖 위험에 처할 때마다 도란으로부터 구해졌었다.
하지만 이제 도란은 없다.
그 사실이 아이린을 절망하게 만들었다.
아이린은 도란이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을 떠올렸다.
‘이 반지를 알아보는 사내를 만나시게 된다면 그에게 의지하십시오. 이번에 제가 아가씨를 구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그의 덕분……. 그를 곁에 둔다면 필시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를 반드시 곁에 두십시오.’
도란이 말했던 그 사내는 대체 언제쯤에야 나타난단 말인가?
아이린은 간절히 바랐다.
‘도란… 제발 그를 만날 수 있도록 도와줘.’
한편, 그리드와 레가스는 룰프 산에 도착했다.
그리드가 숨을 헐떡였다.
“허억… 허억… 이번에도 허탕이면 어쩌죠?”
야탄교의 은신처를 찾겠답시고 윈스톤 인근에 존재하는 모든 숲과 산을 헤집고 다닌 지 벌써 하루가 지났다.
잠도 한숨 못 자고 이동한 터라 그리드는 정말로 피곤했지만 레가스는 완전히 팔팔했다.
“허탕이면 또 다른 산을 찾아가면 되겠죠?”
“…….”
활짝 웃은 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레가스!
평소의 그리드였다면 그에게 태클을 걸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리드는 신성의 방패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아무런 불평불만 않고 사력을 다해서 레가스를 쫓아다녔다.
그리고 룰프 산의 중턱에 올랐을 때였다.
[끈기가 상승하였습니다.]
그리드가 오늘 하루 동안 벌써 10번도 넘게 본 알림창을 확인한 순간, 레가스가 빙고를 외쳤다.
“여긴가 보군요.”
그리드가 레가스를 따라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커다란 동굴 앞을 지키고 서 있는 야탄의 신도들을 발견했다.
“숫자가 장난 아니네……. 30명은 족히 넘겠는데요?”
영주의 군대가 야탄교를 토벌하겠다는 명목하에 몇 번이나 출병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윈스톤에 아직까지도 저렇게 많은 야탄의 신도들이 남아 있었을 줄은, 그리드는 꿈에도 못 꿨었다.
‘북부 최강의 기사가 이끄는 군대는 개뿔……. 무아지경의 검까지 무장하고도 전쟁에서 패해서 돌아온다 싶더니 진짜로 무능하네.’
그리드가 속으로 피닉스를 욕하면서 살금살금 움직이는 그때!
“덤벼라! 이 악의 무리들아!”
“헉.”
그리드는 기겁했다.
최대한 은밀하게 움직여서 적들의 시선을 피하고, 가능한 한 소수의 적들과 싸울 수 있도록 유도해도 부족한 마당에 레가스가 당당하게 소리치며 적진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던 탓이다.
‘저 미친 자식!’
그리드가 속으로 욕을 하든 말든, 레가스는 매우 신이 나 있었다.
“이건 제법 수행이 되겠는걸? 질풍각!”
콰차착!
레가스의 다리가 바람처럼 빠르게 위로 솟구쳤다. 그러자 그의 앞으로 다가왔던 야탄의 신도가 한 방에 나가떨어졌다.
레가스는 정통으로 얻어맞고도 곧 머리를 털며 일어나는 신도를 보면서 더욱더 즐거워했다.
“좋아! 녀석들, 역시나 강하군! 있는 힘껏 덤벼 봐라! 발경!”
퍼퍼퍼펑!
30 대 1의 싸움이 시작됐다.
“…….”
그리드는 레가스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레가스에게 적응하지 못했다.
‘나라도 정신 차리자.’
동굴 바깥에 나와 있는 30명의 신도들 중 그리드가 찾는 늙은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드는 혹시 그 늙은이가 동굴 안에 있지 않을까 싶어서 동굴 쪽으로 슬금슬금 움직였다.
야탄의 신도들은 모두 레가스에게 정신이 팔려 있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이동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동굴 안으로 막 발을 들인 순간이었다.
“불청객은 달갑지 않은데.”
2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말하는 듯한 착각을 주는, 그런 기괴한 음성이 동굴 안쪽에서부터 들려왔다.
그리고 알림창이 떠올랐다.
[야탄 신의 여섯 번째 종, 말락서스가 출현합니다.]
[막강한 어둠의 마력에 압도당하여 공포, 쇠약, 이동 불가 효과가 적용됩니다.]
[전설이 된 자는 쉽게 두려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모든 상태 이상을 저항하였습니다.]
[말락서스가 마법으로 기습합니다.]
콰콰콰콰쾅!!
“……!”
그리드는 동굴 속에서 날아오는 칠흑의 칼날을 포착하고 급히 몸을 날려 피했다.
하지만 레가스는 사정이 달랐다. 그는 동굴 바깥쪽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락서스의 마력에 압도당해서 제자리에 꼼짝도 못하고 서 있었다. 그리고 날아온 마법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큰 피해를 입고 말았다.
“크… 이건 수행 상대로 여길 수가 없겠는데.”
곧바로 생명력 회복 물약을 복용한 레가스가 시스템 설정을 변경했다.
“귓속말 차단 해제. 길드 채팅 차단 해제.”
그리고…
{너희들! 오늘도 레가스 못 찾아내면 다 죽을 줄 알아!}
{지, 진정해, 마스터.}
{그래, 흥분하면 피부에 안 좋아. 마스터도 명색이 여잔데 외모에 신경 써야지?}
{닥쳐……. 다 닥쳐! 채팅할 시간 있으면 주변 한 번 더 살피면서 레가스 그 자식 찾아내!}
“…….”
길드 채팅창은 그야말로 혼돈의 도가니였다.
레가스는 예상보다 더 미쳐 날뛰고 있는 지슈카가 두려워서 채팅을 할까, 말까 잠시 망설이다가 마음을 정하고 키보드를 빠르게 두들겼다.
{룰프 산 중턱. 지원 바람.}
안 그래도 혼란스럽던 채팅창이 더욱더 난리 났다.
{레가스!!}
{야, 레가스! 너 대체 하루 동안 뭐 하고 있던 거야! 왜 채팅이랑 귓말을 꺼 놓고 다녀! 개답답하네!}
{너 때문에 우리가 마스터한테 얼마나 고문당했는지 아냐!}
{룰프 산이라고……? 누나가 금방 찾아갈 테니까 꼼짝 말고 기다리렴.^^}
콰쾅! 쾅!
신도들이 사방에서 쏘아 오는 흑마법을 회피하고, 그중 가장 가까이 있는 신도의 얼굴에 팔꿈치를 꽂아 넣은 레가스가 채팅을 한 번 더 입력했다.
{전원, 철저한 전투 준비 후에 와 주길 바람. 말락서스 출현.}
채팅창이 한 번 더 난리 났다.
{말락서스? 여섯 번째 종?}
{엥? 걔가 왜 룰프 산에 있냐? 야탄교 본단에 있어야 하는 놈 아니야?}
{뭐여……. 너 뭔 짓 하고 돌아다니는겨ㅡㅡ}
{말락서스 렙 몇이었지?}
{전에 몬스터 정보 보니까 310렙이던데?}
{ㅡㅡ;;}
다들 말락서스의 존재에 놀라는 그 와중에도 지슈카만큼은 칸의 제자에게 집착했다.
{야! 레가스! 아직도 그리드라는 놈이랑 같이 있는 거 맞아?}
{ㅇㅇ}
{말락서스고 개뿔이고 그 자식 어디 못 도망가게 단단히 붙잡아 놔! 그 자식이 우리가 찾던 칸의 제자니까!}
“뭐?”
지슈카의 채팅을 본 레가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드 님이 대장장이라고? 그럴 리가.”
콧방귀 뀐 레가스가 야탄의 신도 둘을 동시에 발로 차서 쓰러뜨렸다. 그리고 다른 신도들의 반격을 피해 잽싸게 나무 뒤로 숨은 뒤 다시 채팅을 입력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뭘 그럴 리가 없어야.-_-^ 나는 목격자의 증언을 들었다고. 그리드가 칸의 제자 맞아.}
{그 목격자라는 사람들이 거짓 제보했거나 착각한 거겠지.}
짤막하게 입력한 뒤, 전투에 집중하기 위해서 다시 채팅을 차단한 레가스가 그리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길이가 3미터를 초과하는 대검을 무장한 채 혼자서 말락서스를 상대하고 있는 그리드를 확인하고 어깨를 으쓱였다.
“저렇게 강한 분이 대장장이일 리가 없잖아. 마스터도 참… 착각을 해도 정도가 있지.”
그리고 한편 그리드는…
‘이게 무슨 개 같은 꼴이야!’
최초에 말락서스가 나타났을 때, 그는 그리드에게 지대한 관심을 표했다.
“내 마력의 압박을 견뎌 내다니, 놀랍군.”
말락서스는 자신의 기습을 가볍게 회피한 그리드가 보통 인물일 리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니까 너는… 유라 같은 존재인 건가? 여행자들 사이에서만큼은 독보적으로 특출한?”
그리드는 말락서스와 최대한 대화로 풀고 싶었다.
“딱히 그런 게 아니라… 음, 어쨌든 저는 여기에 당신을 만나러 온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갈 길 가도 될까요?”
“허가할 수 없다.”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 주시죠. 헤헤.”
“내가 세상에서 가장 하찮게 여기는 단어 중 하나가 자비다.”
Satisfy에서 가장 잔인하다고 알려진 존재 중 하나가 바로 말락서스다. 그런 녀석과 대화를 시도한 것 자체가 어리석은 행위였다.
“에이, 썅!”
그리드가 인벤토리를 열었다. 그리고 레가스를 의식해서 무장하지 않고 있던 방어구들을 모조리 장착했다. 거기에 이어서 +5까지 강화해 놓은 상태인 다인슬레프를 꺼내 쥐었다.
<+5 다인슬레프(모작)>
등급:유니크
내구력:500/500 공격력:549~772 공격 속도:-8%
*대상의 현재 방어력의 10퍼센트에 해당하는 수치만큼 추가 피해.
*적의 숫자가 많을수록 공격력 증가.
*스킬 ‘금빛 섬광’ 생성.
아직 파그마가 등장하기 이전의 시대, 인류 최초로 ‘대장장이 장인’의 호칭을 얻었던 알바티노가 신화 속 무기인 다인슬레프를 재현하고자 만든 작품입니다.
결과적으로 다인슬레프에는 한참 못 미치는 작품이지만 다인슬레프의 특징 중 일부를 복원하는 것에는 성공하여, 다인슬레프 모작은 이미 그 자체로도 뛰어난 명품입니다.
에트날 왕국의 시조, 북방의 패왕 로란으로부터 ‘인류 역사상 최고의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았을 정도입니다.
전설의 대장장이 파그마도 이 작품에서 큰 영감을 얻었다고 전해집니다.
사용 조건:레벨 250 이상. 근력 1,800 이상. 고급 소드 마스터리.
무게:1,580
“굉장한 검이군. 하지만 그게 과연 내 몸에 닿을까?”
말락서스는 몬스터가 아니라 인간이다. 생김새도 특별할 게 없었다.
평범한 30대 남자가 검정색 마스크로 얼굴의 절반을 가리고, 기다란 망토로 전신을 두르고 있을 뿐이다.
그리드는 케산 협곡에서 만났던 끔찍한 몬스터들에 비하면 말락서스가 도리어 만만해 보일 지경이었다.
“해 보면 알겠지! 대장장이의 분노! 신속한 몸놀림! 파그마의 검무, 연(連)!”
벽화 속 파그마는 다인슬레프를 한 손에 쥐고 검무를 췄었다. 하지만 현재 그리드의 근력으로는 다인슬레프를 한 손으로 휘두르는 게 불가능했다.
그래서 다인슬레프를 양손으로 쥔 채 연(連)의 검무를 펼쳤는데, 그 모습이 현란하다기보다는 호쾌했다.
부웅! 부웅!
다인슬레프가 그 거대한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신속하게 움직이며 바람을 갈랐다. 그리고 급기야 말락서스의 몸을 베었다.
하지만 다인슬레프가 말락서스의 몸에 닿기 직전, 충돌 지점에 칠흑의 방어막이 갑자기 떠오르면서 다인슬레프의 검로를 차단했다.
까앙!
“윽!”
공격이 가로막히자 검무가 도중에 끊겨 버린 그리드는 서둘러 다인슬레프를 인벤토리에 되돌려 넣었다. 그리고 +8 이상적인 단검을 꺼내 쥐었다.
대장장이의 분노와 신속한 몸놀림, 그리고 파그마의 검무 활성 후 연(連)을 사용하면서 소모한 마나는 총 490!
그리드는 남아 있는 227의 마나로는 어차피 펼칠 수 있는 검무가 없었기 때문에 이상적인 단검에 내장되어 있는 스킬을 사용할 심산이었던 것이다.
“칼바람!”
퍼퍼퍼퍼펑!
칼바람이 말락서스의 몸에서 폭발했다. 하지만 말락서스의 옷깃 하나 스치지 못했다. 칼바람이 말락서스의 몸에 닿기 직전, 충돌 지점마다 칠흑의 방어막이 떠오르면서 모든 바람을 막아 낸 것이다.
벌컥벌컥!
그리드가 드디어 아껴 뒀던 마나 회복 물약을 꺼내 마셨다. 그리고 정의의 바람을 사용했다.
퍼퍼퍼퍼펑!!
정의의 바람은 칼바람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스킬이다.
하지만 정의의 바람조차도 말락서스의 몸에 닿지 못하고 떠오른 방어막에 충돌한 뒤 소멸했다.
그리드가 치를 떨었다.
‘뭐야, 저 개사기 방어 스킬은? 대체 피해량을 얼만큼이나 막아 주는 거지?’
말락서스가 망토 속에 숨겨 두고 있던 손을 꺼내더니 그리드에게 겨냥했다.
“너의 나약함에 흥이 깨졌다. 죽어라. 신벌……?”
마법을 사용하려던 말락서스가 두 눈을 부릅뜨며 행동을 멈췄다.
그리고 그리드로부터 슬금슬금 뒷걸음쳤다.
그리드가 펼친 제(制)의 검무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제(制)는 언데드를 제외한 모든 대상을 압도시키며, 압도당한 상대들은 3초간 그리드에게 접근하는 게 불가능해진다.
그리드는 말락서스가 제(制)의 영향력에서부터 벗어나기 전에 최대한 멀리 도망치고자 내달리며 소리쳤다.
“레가스! 튑시다!!”
하지만 레가스는 도망칠 생각을 않고 신도들을 쓰러뜨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레가스!!”
그리드가 재촉하자 레가스가 그를 돌아보고 말했다.
“저는 도망치지 않습니다. 싸울 거예요. 저렇게 강한 상대를 또 언제 만날 수 있을지 모를 일이잖아요? 싸워 보고 싶습니다!”
“…진짜 미쳤네. 죽어서 경험치랑 아이템 떨구는 게 두렵지 않은 건가?”
그리드는 레가스를 버리고 혼자 도망치는 게 내키지 않았다. 신성의 방패를 찾는 데 여태까지처럼 그의 도움을 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까지 개죽음을 당할 순 없어. 죽었다가 혹시 아이템이라도 떨어뜨리게 되면…….’
현재 그리드가 무장한 아이템들은 대부분 고가품이었다. 그중 하나라도 떨어뜨렸다간 자살 충동을 느낄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렇기에 그리드는 혼자서라도 도망치고자 했다.
그런데 그때 파공성이 들려왔다.
쐐액!
숲에서부터 쏜살같이 다가오는 물체.
그것은 화살이었다.
퍼억!
“큭!”
제(制)의 영향으로 인해 행동에 다소 제약이 생긴 상태였던 말락서스는 예고 없이 날아온 화살에 미처 대응하지 못하고 어깨에 화살이 꽂혔다.
그리고 화살이 날아온 방향에서부터 적발의 미녀가 등장했다. 다름 아닌 신궁 지슈카였다.
“저 괴물하고 나란히 화살에 꿰뚫려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구석에 찌그러져 있는 게 좋을 거야.”
지슈카가 날카로운 시선을 말락서스에게 고정시킨 채 그리드에게 경고했다. 그리고 곧장 활시위를 당겼다.
터엉!
현재 통합 랭킹 19위인 지슈카는 이미 오래전부터 신궁이라 불려 온 여자다. 그녀가 쏜 화살은 그리드의 귀에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기세 좋게 날아가더니 정확하게 말락서스의 미간에 꽂혔다.
하지만 때마침 제(制)의 영향에서 벗어난 말락서스가 칠흑의 방어막을 생성시켰다.
팅!
허무하게 튕겨 나가는 화살.
그를 보고도 지슈카는 동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5발의 화살을 시간차 없이 연속적으로 쏘았다.
슈슈슈슈슉!!
팅팅팅팅팅!!
정확히 몸의 급소들만을 노린 5발의 화살 모두 다 방어막에 가로막힌다.
“시전 속도가 굉장히 빠르네?”
감탄하는 지슈카를 보면서 말락서스가 미소를 머금었다.
“훗, 허약한 화살 따위가 내 몸에 닿을 리 없…….”
말락서스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어느새 30여 명의 야탄 신도들을 모조리 해치운 레가스가 그의 옆으로 접근해 주먹을 찌른 탓이다.
“침투경.”
퍼엉!
“꺽…….”
레가스의 공격에 옆구리를 깊숙이 가격당한 말락서스의 허리가 기괴한 방향으로 꺾였다. 그리고 눈은 흰자위를 드러냈다.
그때 지슈카가 새로운 화살을 장전했다.
“그것도 진짜가 아니야. 이게 진짜지.”
푸욱!
바람의 흐름을 제대로 탄 화살이 소리도 없이 광속으로 날아가 말락서스의 심장에 꽂혔다.
그런데 그리드는 그 화살이 왠지 매우 낯이 익었다.
“어? 특급 야파 화살? 저게 아직까지도 남아 있었어?”
그리드의 혼잣말을 포착한 지슈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가 저걸 어떻게 알지?”
지슈카와 레가스의 힘이라면 저 막강한 말락서스조차 쓰러뜨릴 수 있는 게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함께 싸웠다고 볼 수도 있는 나에게도 드롭 아이템을 나눠 주지 않을까? 그렇게 기대하면서 흥분해 있던 그리드가 별생각 없이 대꾸했다.
“아, 저거 내가 만든 거거든.”
“…뭐?”
지슈카의 두 눈이 찢어질 듯이 치켜 올라갔다.
그런데 그때 레가스가 비명을 질렀다.
“끄아아아악!”
“……!?”
지슈카와 그리드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5개의 날카로운 칠흑의 창에 온몸을 꿰뚫린 채 피를 쏟아 내고 있는 레가스를 발견했다.
칠흑의 마력을 상처 부위에 전개, 상처들을 금세 회복시킨 말락서스가 레가스의 머리통을 움켜쥐며 단언했다.
“발악해도 소용없다. 너희들은 이 자리에서 내 손에 죽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좀 늦었지?”
“여, 레가스! 살아 있냐!”
사방에서부터 15명의 체다카 길드원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하였으니, 일견해도 그들 또한 보통내기가 아닌지라 천하의 말락서스조차 위축될 정도였다.
“이런 놈들이 어떻게 이렇게 단체로……!”
만면에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머금은 지슈카가 선포했다.
“사냥 개시야.”
체다카 길드원들의 평균 레벨은 200을 상회한다. 각 직업 랭킹 1위, 통합 랭킹 100위권 이내의 인원이 잔뜩 포진해 있었다. 그리고 그리드라는 변수가 함께하고 있다. 상대가 여덟 종 중 하나라고 해도 전혀 꿀릴 게 없는 전력이었다.
5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