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파그마의 검무와 피아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시피,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폭포는 베네수엘라의 앙헬 폭포다. 그 높이가 무려 979미터에 이른다고 한다.
앙헬은 Angel의 스페인식 발음으로서, 즉 앙헬 폭포는 Angel Falls(천사의 폭포)다. 폭포 하부에 포말이 끼고 안개가 일어나는 모습이 장엄하고 신비로워서 이런 이름이 지어졌다는 설이 있다.
라고, 언젠가 TV에서 보았다.
어쨌든, 천사들의 모습을 연상시키게 만들 정도로 신비롭고 아름다운 폭포! 지구상 최고의 비경 중 하나로 손꼽히는 장엄한 폭포!
Satisfy의 제작진은 그야말로 신이 빚은 예술이라 표현할 수 있는 그 앙헬 폭포를 비웃기라도 하듯, 그보다 더욱 장엄하고 신비로우며 아름다운, 그야말로 환상보다 더 환상적인 폭포를 Satisfy에 창조해 놓았다.
그리고 그 폭포는 에트날 왕국 북부에 위치해 있다.
북부 어디냐고?
“바로 여기지.”
콰아아아아아아아아!!!
케산 협곡의 북쪽.
협곡이 끝나는 지점에 1,300미터 높이의 폭포가 위용을 뽐내며 떨어진다.
폭포 주변에 가득히 떠다니는 물안개는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했고, 사방에 비산하는 물줄기가 환상적인 무지개를 곳곳에 그려 내며 마치 동화 속 세상에 들어온 듯한 착각을 느끼게 만들어 주었다.
나는 끝을 모르고 떨어지는 물줄기와 5개의 무지개가 교차하는 장관에 압도당했다.
“이게 바로 소문으로만 듣던 로란의 폭포인가.”
에트날 왕국의 시조, 로란이 북부를 제패하고 귀환하던 길에 발견하였다고 전해지는 이 폭포의 이름은 발견자 로란의 이름을 고스란히 따왔다.
에트날 왕국민들에게는 가장 성스러운 장소 중 하나로 손꼽히는 곳이지만 관광객의 수는 전무하다시피 하다. 케산 협곡에 위치한 만큼 너무 위험했기 때문이다.
일반인들은 협곡의 몬스터들이 두려워서 이곳을 감히 함부로 찾아오지 못했고, 그저 ‘이런 곳이 있다’는 식으로 구전할 뿐이다.
아마 유저들 중에서도 이곳을 찾아왔던 이는 몇 되지 않을 것이다.
쿠와아아아아!!
“진짜 굉장하다.”
본래 나는 자연 경관을 숭배하지 않는다. 살면서 이름 난 관광지들을 굳이 찾아가 본 적도 없다. 자연이 아름다워서 뭐하냐? 아름다운 자연이 있으면 나한테 밥 먹여 주냐? 하는 생각으로 자연을 경시했었다.
하지만 이 순간 생각이 변했다.
나는 사람들이 왜 그토록 명소를 찾아다니고자 애쓰는지 알 수 있었다.
“대단해……. 여태까지 내가 살아온 아스팔트 세상이 얼마나 답답하고 하찮았던 건지 알 것 같아.”
세계 최고의 건축 디자이너가 설계하고 건축한, 고층의 화려한 현대 건축물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과거의 웅장하고 위엄 있는 건축물들?
그것들 또한 분명, 절로 탄성이 나올 정도로 멋지며 위대하기는 하다. 하지만 자연의 위용 앞에서는 감히 명함조차 내밀지 못할 것이다.
내 머릿속의 좁은 세계관이 조금 더 확장되고, 안목이 상승한 듯한 기분이 든다.
‘가상현실 속 경관을 보고도 이런 감동을 느낄진대, 현실에서 보는 경관은 얼마나 멋질까? 나중에 빚 다 갚고 여유가 생기면 여행을 다녀야겠어. 앙헬 폭포도 가 보고, 이구아수 폭포도 가 보고, 아마존도 가 보고, 그랜드 캐니언도 가 보고……. 생각해 보니, 그 외에도 유명한 곳이 셀 수도 없이 많네.’
기분 좋은 여운에 잠긴 채 폭포를 바라보길 한참.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이런 미친. 배부른 소리 하고 있었군! 어서 파그마의 검무나 찾자!”
북쪽 벼랑은 로란의 폭포 바로 아래를 칭한다. 나는 낑낑거리며 곡벽을 타고 내려와 북쪽 벼랑에 새겨져 있다는 파그마의 검무를 찾기 위한 수색에 나섰다.
하지만 10분이 지나고 30분이 지나고 1시간, 2시간, 3시간이 지나도 파그마의 검무를 찾을 수는 없었다.
심지어 암벽 등반까지 해 가면서 사방의 벽이란 벽을 죄다 둘러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벽화라 칭할 만한 게 보이질 않았다.
어느덧 석양이 지고 있다.
무지개가 걷히고 금빛으로 물든 폭포수의 모습이 또 장관이었다. 마치 황금이 쏟아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그를 감상하고 있을 여유조차 없다.
“아, 놔. 슬슬 짜증 나네.”
북쪽 벼랑에다가 파그마의 검무를 새겨 넣었다고 말했던 칸의 선조!
혹시 그자는 거짓말쟁이가 아닐까? 난 그의 거짓말에 속아서 이곳까지 찾아와 헛고생하고 있는 거고?
“…애초에 귀신의 말 따위를 신용한 내가 병신이지.”
본래 영적인 존재는 사악한 것 아니던가!
그래서 공포 영화에 등장하는 귀신들은 대부분 추악하며 잔혹하지 않던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일생 동안 귀신을 경계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퀘스트에 낚여서는 귀신에게 홀려 버리는 우를 범하다니!
“크으! 일생일대의 수치… 음?”
좌절하던 나는 문득, 쉬지 않고 떨어져 내리고 있는 폭포의 뒷면에 시선을 사로잡혔다.
“설마?”
중학생 시절, 반세기 전 출시되었던 무협 영화들에 심취되어 한동안 감상한 적이 있다.
근데 그 무협 영화들을 보면, 꼭 폭포의 뒷면에는 동굴이 있고 그 안에 기연이 숨어 있었다.
‘혹시 Satisfy의 제작진들도 나처럼 옛날 무협 영화들을 감상했다면……?’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폭포 속에 뛰어들었다.
폭포의 뒤편에는 역시나 작은 동굴이 있었고, 그곳에는 대검을 손에 쥔 사내가 춤추는 듯 움직이는 과정을 순차적으로 그려 넣은 벽화가 새겨져 있었다.
“헐.”
역시 귀신은 사악한 존재였다.
“그 귀신 놈……! 파그마의 검무를 새겨 넣은 장소가 로란의 폭포 뒤편이라고 설명해 줬으면 금방 찾았을 걸, 왜 북쪽 벼랑이라고 뜬구름 잡듯이 설명해 가지고 사람을 개고생시키고 앉았어! 에이, 빌어먹을! 칸의 선조만 아니었다면 찾아가서 혼쭐을 내줬을 텐데! 칸의 선조니까 한 번 봐준다!”
…혹시 귀신한테 내 소리가 전해지진 않겠지?
나는 만에 하나라도 귀신이 깜짝 등장할까 봐 노심초사하며 사방을 경계한 후에야 벽화를 감상할 수 있었다.
벽화는 매우 오래전 새겨진 것으로, 많이 낡고 흐려져 있었다. 하지만 알아보는 데 지장이 있을 정도로 손상되진 않았다.
“이게 파그마인가…….”
벽화 속 사내의 얼굴은 길게 찢어진 눈매가 강조되어 있었다. 갸름한 달걀형 얼굴과 위로 치켜진 입술, 눈웃음 흘리기 좋은 눈매를 가진 것을 보아 여자들에게 엄청 인기가 많았을 상이다.
“제길… 파그마가 꽃미남이었다니…….”
여태까지 봐 왔던 대장장이들처럼, 파그마 또한 구릿빛 피부의 마초적인 인상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가녀린 몸을 지녔고, 남자에게 이런 표현을 써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청초한 인상이었다.
세상 모든 미남, 그중에서도 특히 꽃미남을 혐오하는 나로서는 파그마에 대한 호감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미 죽은 사람 외모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건 좀 아닌가.”
잡념을 털어 낸 나는 벽화 감상에 집중했다.
“저건 다인슬레프로군.”
벽화 속 파그마의 비율을 고려해 볼 때, 파그마는 상당한 장신으로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그마의 손에 쥐어진 대검이 파그마보다 훨씬 더 컸다. 이는 저 대검이 다인슬레프라는 것을 증명하는 묘사다. 실제로 다인슬레프의 총길이는 3미터 20센티미터에 육박했기 때문이다.
“신기하다.”
벽화 속 파그마는, 가녀린 몸매의 소유자임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다인슬레프를 한 손에 쥔 채 자유자재로 휘두르고 있었다. 몸매와 어울리지 않게 박력이 넘쳤고, 때로는 나비처럼 우아했다.
폭발력이 느껴질 정도로 강력한 힘과 고고한 부드러움을 동시에 표현하는 검무라니? 저게 가능한 건가?
벽화를 통해 파그마의 검술 실력이 극의에 달해 있음을 엿볼 수 있었다.
그렇듯, 벽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몇 번이고 감상하고 있던 나는 의아함을 느꼈다.
“뭐야? 왜 파그마의 검무를 습득하지 않는 거지?”
나는 이 벽화를 감상만 하면 파그마의 검무를 자연스럽게 습득하는 건 줄 알았다. 하지만 어째 낌새가 이상하다. 감상만 해서는 습득이 불가능한 것 같다.
“만져 봐야 되나……?”
나는 벽화에 손을 올려 보았다. 하지만 역시 파그마의 검무는 습득되지 않았다.
“뭐야? 감상만 해서도 안 되고, 만지기만 해서도 안 되면 대체 어떻게 해야 습득할 수 있는 건데? 벽화 속 검무를 직접 따라 하면서 혼자 알아서 익히기라도 하라는 건가?”
…설마 진짠가?
나는 내 몸으로 직접 이 벽화 속 파그마의 검무를 재현하고 습득해야만 하는 건가!
“아, 귀찮아…….”
하지만 귀찮다고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는 투덜거리면서도 이상적인 단검을 뽑아 쥐었다. 그리고 벽화 속 파그마를 따라서 검무를 춰 보았다.
처음에는 익숙하질 못해서 비슷하게도 따라 하질 못했다. 그래서 다시 시도해 보았다. 그래도 부족하자 몇 번이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3시간 뒤.
대체 벽화 속 검무를 몇 번이나 따라 해 본 것일까? 의외의 운동량을 소모하는 검무 탓에 숨까지 헐떡이게 된 나는, 쉬고 싶은 마음에 주저앉으면서 깨달았다.
“나는… 몸치였군.”
벽화 속 검무를 몇 번이나 감상하고 따라 하면서 나는 심지어 검무를 외우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걸 몸으로 완벽히 재현하질 못한다.
생각해 보니, 나는 살면서 춤이라는 걸 춰 본 경험이 없다.
“클럽 가서 여자들한테 비비적거린 경험만 몇 번 있지, 제대로 된 춤을 춰 본 기억은 없네. 그랬군. 하하하! 나는 몸치였어! 그래서 파그마의 검무를 익히기가 어려운 거였어!”
…는 개뿔!
“미친!”
춤을 못 춰서 게임 스킬을 습득하지 못한다고? 그게 말이냐, 방구냐?
“춤을 못 춘다고 해서 스킬을 익히지 못한다는 건 말도 안 돼. 뭔가 다른 문제가 있을 거야.”
그 후, 나는 벽화를 뚫어져라 주시한 채 문제점을 찾기 위해 고심했다. 그러다가 벽화의 가장 끝부분에 잔뜩 끼어 있는 이끼를 보며 헛웃음 흘렸다.
“설마, 벽화의 마지막 부분이 저 이끼에 가려져서 누락되어 있기라도 한 건가? 하하, 그런 바보 같은 전개가 있을 리 없지.”
나는 설마, 설마 하면서도 이끼를 떼어 내 보였다.
그리고 보았다.
이끼에 감춰져 있던 또 다른 벽화를!
그 순간 알림창이 떠올랐다.
[파그마의 검무를 습득하였습니다.]
[첫 번째 전직 퀘스트를 완료하였습니다. 대장장이 칸에게 돌아가십시오.]
“…나, 여태까지 몇 시간 동안 삽질하고 있던 거야?”
이런 썩을……. 치가 떨린다. 고작 이끼 따위의 농간에 넘어가서 시간과 체력을 낭비하고 있었다니!
평소의 나였다면 억울함을 조금이라도 해소하기 위해서 이끼를 잔인하게 갈기갈기 찢으며 욕설을 지껄였을 것이다.
하지만 난 참았다.
그토록 고대하던 파그마의 검무를 손에 얻게 된 작금, 이끼 따위에게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이끼 너 이 새끼… 운 좋은 줄 알아라.”
나는 벽에서 떼어 낸 이끼를 발로 쾅쾅! 밟아 준 뒤 심호흡했다.
전설이 된 대장장이가 보여 줬던, 하늘조차 꿰뚫는 기세를 간직했다는 검무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소드 마스터리 같은 패시브 스킬? 아니면 막강한 공격 스킬?
둘 중 무엇이 되었든 간에, 전투 스킬이 부족한 내게는 반드시 필요한 스킬이다.
환희에 찬 나는 곧바로 스킬창을 열어 보았다.
그리고 파그마의 검무는 내 예상과 기대를 가뿐히 상회하는, 그야말로 위대한 스킬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파그마의 검무>
Lv.1
-스킬 비활성화 시-
언제라도 검과 하나가 될 수 있도록 집중하고 있습니다. 물리 공격력이 20퍼센트, 치명타 확률이 10퍼센트 상승합니다.
*도검류 무기를 장착하였을 경우에만 적용되는 효과입니다.
*스킬 소모값 없음.
-스킬 활성화 시-
검과 하나가 됩니다. 파(波), 제(制), 연(連), 살(殺), 초(超). 총 다섯 가지의 검무를 출 수 있게 됩니다.
*스킬 비활성화 시의 효과가 사라집니다.
*스킬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20의 마나가 필요합니다.
*스킬 활성화 후 10초가 지나야지만 스킬을 다시 비활성화시킬 수 있습니다. 비활성화 시 소모값은 없습니다.
<파(波)>
높고 세찬 파도처럼 격렬한 검무를 춥니다.
당신의 반경 1미터 내에 존재하는 모든 적들에게 물리 공격력 155퍼센트의 피해를 입히고 모든 속도 감소 상태로 만듭니다.
스킬 사용 조건:도검류 무기 장착
스킬 마나 소모:350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120초
<제(制)>
비장함이 깃든, 절제된 검무를 춥니다.
주위를 압도시킵니다. 3초 동안 아무도 당신에게 접근하지 못합니다.
*언데드에게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스킬 사용 조건:도검류 무기 장착
스킬 마나 소모:300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300초
<연(連)>
나비의 날갯짓처럼 현란한 검무를 춥니다.
단일 대상에게 물리 공격력 500퍼센트의 피해를 입힙니다.
스킬 사용 조건:도검류 무기 장착
스킬 마나 소모:350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100초
<살(殺)>
증오와 살의를 표현한 검무를 춥니다.
단일 대상에게 물리 공격력 1,500퍼센트의 피해를 입힙니다. 그리고 출혈과 절망 효과를 부여합니다.
스킬 사용 조건:도검류 무기 장착
스킬 마나 소모:1,200
스킬 체력 소모:현재 체력의 50퍼센트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500초
<초(超)>
상상 속 초월자를 표현한 검무를 춥니다.
당신의 공격력이 2배 증가하며, 기본 공격이 원거리 공격으로 변합니다.
스킬 사용 조건:도검류 무기 장착
스킬 마나 소모:1,800
스킬 지속 시간:30초.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3,000초
“쩐다…….”
파그마의 검무는 나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가히 상상조차 못했던, 엄청난 기능과 위력의 스킬이었다.
‘하나의 스킬이 패시브 효과와 여러 개의 액티브 기능을 갖추고 있다니……. 마스터리류 스킬이 전무하고, 전투 스킬은 부족한 내게 있어서 그야말로 천금 같은 스킬이다.’
대부분의 직업은 웨폰 마스터리라든가 아머 마스터리 등의 패시브 스킬을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마스터리류 스킬을 보유한 사람은 패시브 효과 덕분에 무기나 갑옷의 성능을 보다 높게 끌어 올리는 게 가능하다.
하지만 파그마의 후예에게는 마스터리류 스킬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치명적인 단점이며 매우 아쉬운 부분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
파그마의 검무가 비활성화 시 공격력과 치명타 확률을 상승시켜 준다고 한다. 이는 즉, 웨폰 마스터리류와 비슷한 효과라고 볼 수 있다.
‘그것도 중급 웨폰 마스터리 이상의 성능……! 활성화시킬 경우 그 효과가 사라진다지만 아쉬워할 문제가 아니야. 활성화시키면 액티브 스킬이 무려 5개나 생성되니까.’
파그마의 검무! 과연 레전드리 직업의 전용 스킬다운 위용이다!
나는 이제야 진정한 레전드리 직업 전직자라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게 됐다.
‘내 직업이 지금까지만으로도 충분히 사기적이긴 했지만, 제작에만 특화되어 있던 부분이 아쉬웠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는 전투 직업으로서도 손색없게 됐어. 기본적으로 상태 저항력이 높고 탱커로서 역할을 수행하는 게 가능한 직업이기 때문에 공격 스킬만 발달하면 더욱더 사기가 될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다.
“…스킬들 마나 소모량이 왜 이러냐?”
현재 내 총마나량은 570에 불과하다. 그나마 이것도 꾸준히 아이템 제작을 하면서 스탯 노가다를 한 덕분에 지력이 올라서 획득할 수 있던 수치다. 본래라면 지력에 스탯 포인트를 아예 투자하지 않아서 총마나량이 100도 안 됐을 것이다.
어쨌든 결론은, 현재 내 마나량으로는 새로 익힌 검무들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이런 빌어먹을!”
파(波)! 제(制)! 연(連)! 살(殺)! 초(超)!
총 5개의 매력적이고 위력적인 검무들!
이 검무들은 사용 시 마나 소모량이 최소 300 이상이다. 특히 살(殺)의 마나 소모량은 1,200, 초(超)의 마나 소모량은 1,800이었다.
이 스킬들을 자유롭게 쓰기 위해서는 마나 수치를 지금보다 훨씬 더 높여야 한다는 뜻이 되며, 지력에 상당량의 스탯 포인트를 투자해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하지만 나는 전사 시절부터 지금까지 지력에 스탯 포인트를 투자한 경험이 없다.
‘마법사들이야 지력 수치가 높을수록 마법 피해량이 상승하니까 부담 없이 지력에 포인트를 투자한다지만…….’
나로서는 지력에 스탯 포인트를 투자해야 한다는 게 솔직히 달갑지 않다.
내 입장에선 되도록 많은 스탯을 근력과 체력에 집중 투자하는 게 이상적이다. 근력과 체력이 높아야 아이템을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제작할 수 있으며 전투력도 상승한다.
하지만 지력? 내가 보유한 스킬 중에 지력 수치의 영향을 받는 게 있던가? 당연히 없다.
오직 마나량을 늘리겠다는 이유만으로 지력에 스탯 포인트를 투자해야 하다니!
“제길… 그렇다고 투자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그렇다. 아무리 불만을 토로해 봤자 소용없다. 나는 결국 지력에 스탯을 투자할 수밖에 없다.
검무 스킬들을 써먹어야만 하니까!
“상태창!”
이름:그리드
레벨:92 (1,531,400/3,798,000)
직업:파그마의 후예
*아이템 제작 시 추가 옵션을 더하는 확률이 상승합니다.
*아이템 강화 확률이 상승합니다.
*모든 장비 아이템을 조건 없이 착용할 수 있습니다. 단, 아이템 등급에 따른 페널티가 발생합니다.
칭호:전설이 된 자
*상태 이상에 잘 걸리지 않습니다.
*생명력이 최소치일 때 잘 죽지 않습니다.
*쉽게 인정받습니다.
칭호:최초의 유니크 아이템 제작자
*손재주 +200
칭호:유일한 레전드리 아이템 제작자
*손재주 +350
칭호:나이트 슬레이어
*체력 +100
*근력 +30
칭호:정의의 사도
*모든 능력치 +10
*정의의 사도는 용맹무쌍합니다.
생명력:8,330/8,330 마나:522/522
근력:775 체력:523 민첩:208 지력:180
손재주:855 끈기:210
평정:155 불굴:176 위엄:155 통찰력:155
용기:99
능력치 포인트:0
무게:9,404/19,700
어제, 케산 협곡에 발을 막 들였을 때까지만 해도 내 레벨은 85였다. 하지만 케산 협곡의 무지막지한 몬스터들을 사냥하다 보니 어느새 92레벨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70개의 스탯 포인트를 획득했었다.
“그걸 남겨 뒀어야 하는 건데…….”
보다시피 현재 내 스탯 포인트는 제로다.
왜냐고? 70개의 스탯 포인트를 모두 근력에 몰빵했거든.
“협곡 거미들을 좀 더 쉽게 사냥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협곡 거미의 방어력은 굉장히 뛰어나다. 그래서 나는 공격력을 조금이라도 더 높이기 위해서 근력에 투자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후회가 된다.
“파그마의 검무를 얻기 전까진 스탯 포인트를 함부로 소모하지 말고 모아 뒀어야만 했던 건데…….”
지력이 1개 오를 때마다 최대 마나량이 3씩 상승한다. 어제의 내가 70개의 스탯 포인트를 섣불리 사용하지 않고 남겨 뒀었다면, 지금쯤 나는 지력 수치를 높이고 마나를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 게 아쉽다.
“…지력을 올려야 돼.”
기껏 배운 스킬을 마나가 없어서 못 쓰게 생겼으니 매우 거슬린다.
쓰려고 배운 스킬을 써 보지도 못하게 생겼으니 초조해지는 게 당연하잖아?
그래서 나는 특단의 선택을 내렸다.
“사냥이다! 렙업이다! 레벨을 올려서 지력을 높인다! 그리고 최소한 살(殺)의 검무를 한 번은 사용할 수 있는 마나를 확보한다!”
대상에게 무려 1,500퍼센트의 데미지를 가한다는, 듣도 보도 못해 본 필살의 스킬, 살(殺)!
하지만 살(殺)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1,200의 마나가 필요하다.
즉, 내 지력이 최소 400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지력 400 찍을 때까지 렙업이다!!”
…는 개뿔.
“하, 짜증 난다.”
오직 파그마의 검무를 얻기 위해서, 나는 파그마의 후예로 전직한 이후 최초로 사냥을 시작했다.
북쪽 설원에서는 서릿빛 오크들을, 이곳 케산 협곡에서는 온갖 협곡의 몬스터들을…….
오래간만에 맛본 사냥의 재미에서 나는 헤어 나오기가 어려웠다.
‘맞다. 내가 이 맛에 Satisfy에 중독됐던 거지?’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을 정도로 사냥이 즐거웠다.
성장하는 레벨을 통해서 내가 강해져 가고 있음을 실시간으로 체감할 수 있고, 인벤토리에 차곡차곡 쌓여 가는 골드와 잡템들을 보면서 뿌듯했다.
당분간 이 케산 협곡에 머물면서 사냥에 열중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하지만 실상은 어떤가?
내게 사냥은 사치다.
나는 빚더미에 앉게 된 집안의 가장이 되리라 자처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부모님과 세희는 근심을 털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가족들이 한시라도 빨리 두 발 뻗고 잘 수 있도록 만들어 주기 위해서 나는 사냥할 시간에 아이템을 제작해야 한다.
“그래, 빨리 칸의 대장간으로 돌아가자. 다인슬레프도 갖고 싶고. 좋잖아?”
사냥 욕구를 간신히 잠재운 나는 폭포 속 동굴에서부터 빠져나왔다. 그리고 완전히 어두워진 밤하늘에 떠다니는 별들을 감상하면서 아쉬움을 달래는 그때였다.
“쿠워어어어어!!”
폭포 하부에 잔뜩 일어나고 있는 포말 속에서 포효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급기야 거대한 물보라가 곳곳에서 일어나더니 나는 어느새 6마리의 머맨들에게 둘러싸이게 되었다.
“…비린내가 진동을 하네.”
머맨은 남성형 인어를 뜻한다. 하지만 동화 속에 등장하는 인어들은 미형인 데 반해, Satisfy의 머맨들은 매우 흉측한 몰골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머맨들의 따귀에 달려 있는 아가미가 역겹게 숨 쉬는 것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너희들 뭍으로 나와 있다가 숨 막혀 죽는 거 아니냐?”
머맨들이 삼지창을 위협적으로 내세우며 소리쳤다.
“쓸데없는 걱정 말고 심장이나 내놔라!”
머맨들은 인간의 심장을 영양식으로 삼는다. 생김새만큼이나 식성이 끔찍한 놈들이다.
‘머맨이 6마리라…….’
머맨은 물만 있다면 어렵지 않게 자연환경에 적응한다. 그래서인지 대륙 전체에 분포하고 있다. 하지만 그 수많은 머맨 중에서도 케산 협곡에 서식하고 있는 머맨이 가장 악명 높았다. 케산 협곡의 머맨들은 레벨이 175로서, 대륙의 수많은 머맨들 중에서도 레벨이 가장 높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특히 머맨은 물가에서 강하다. 근데 그 숫자가 무려 여섯이라면…….’
파그마의 검무를 습득하기 전의 나였다면 이 자리에서 당장 어떻게 도망칠지 강구하느라 바빴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나는 어둠보다 더 짙은 푸른색에 휘감겨 있는 +8 이상적인 단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머맨들에게 순순히 심장을 넘겨주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너희들이 내 심장을 빼앗는 게 먼절까? 아니면 내가 너희들을 모조리 회 처먹는 게 먼절까?”
머맨들이 콧방귀를 뀌었다.
“흥! 가소로운 인간 놈이 허세를 부리다니!”
쏴아아아아!!
머맨들은 파도를 제대로 만난 서핑보드처럼 엄청난 속도로 물살을 가르며 덤벼 왔다.
나는 녀석들이 내 바로 지척까지 접근하길 기다렸다. 그리고 녀석들의 삼지창이 내 몸에 닿기 직전!
“파그마의 검무, 제(制)!”
스킬을 사용한 순간, 내 몸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달빛과 별빛에 반짝이는 수면 위로 이상적인 단검이 발산하는 푸른빛을 흩뿌리며 나의 몸은 조용히, 그러나 비장한 기운을 내포한 채 움직였다.
그리고!
“……!!”
거침없이 돌진해 와서는 내 사지에다가 삼지창을 꽂아 넣던 머맨들의 행동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그리고 녀석들은 갑자기 안절부절못하며 나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애썼다.
나는 녀석들이 제(制)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전에 서둘러서 스킬을 연계했다.
“대장장이의 분노!”
[대장장이의 분노 효과가 발동합니다. 20초 동안 공격력과 공격 속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칼바람!”
쿠콰콰콰쾅!!
“키야악!!”
물살을 가르고 날아간 칼바람이 머맨들의 상체에 날카로운 생채기를 만들었다.
[대상에게 3,75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대상에게 3,802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머맨들은 비늘로 뒤덮인 하반신의 방어력이 뛰어난 반면 인간의 피부와 다를 바 없는 상체의 방어력이 취약했다. 그래서 상체에 공격을 당하자 매우 고통스러워했다.
나는 연달아서 공격을 가하려다가 멈췄다.
‘제길, 마나가 벌써 다 떨어졌군.’
서둘러 인벤토리를 연 나는 하급 마나 회복 물약을 꺼내서 복용했다. 그리고 마나가 완전히 회복한 것을 확인한 뒤 파그마의 검무를 비활성화시켰다. 거기에 이어서 스킬을 전개했다.
“정의의 바람!”
퍼펑! 퍼퍼퍼퍼펑!!
안 그래도 정의의 바람은 칼바람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파괴력을 발휘하는 스킬이다. 그런데 파그마의 검무를 비활성화시킴으로써 공격력과 치명타 확률을 상승시킨 상태로 사용하자 그 파괴력이 더욱더 엄청나졌다.
정의의 바람이 스쳐 지나간 자리의 수면이 폭발에라도 휘말린 것처럼 좌우로 높이 솟아올랐고, 정의의 바람에 상체를 강타당한 머맨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눈을 뒤집은 채 입만 뻐끔거렸다.
“신속한 몸놀림!”
[신속한 몸놀림 효과가 발동합니다. 1분 동안 민첩성과 회피율이 비약적으로 상승합니다.]
첨벙첨벙!
나는 순식간에 머맨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녀석들의 상체를 +8 이상적인 단검으로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키야아아악!”
‘좋아! 좋았어!’
나는 검에 베일 때마다 괴로워하는 머맨들을 보면서 희열을 느꼈다.
강해졌음이 실감났기 때문이다.
[최상의 건틀릿의 옵션 효과가 발동하여 대상을 2번 공격합니다.]
[이상적인 단검의 옵션 효과가 발동하여 대상이 즉사합니다.]
6마리의 머맨 중 오직 1마리에게만 이상적인 단검의 옵션 효과가 발동하여 즉사했다.
남아 있는 5마리의 머맨은 어느새 피해를 수습하고 반격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단검을 무기로 사용하느라 초근접전을 펼치는 나와 달리 머맨들은 길이 2미터가량의 삼지창을 무기로 사용한다. 녀석들이 나를 제대로 공격하려면 일정한 거리가 필요했다.
“크르!”
결국 머맨들은 즉각적인 반격을 포기했다. 그리고 분한 듯 사나운 표정을 지은 채 나로부터 거리를 벌리고자 물러났다. 나는 숨 돌릴 틈도 없이 그중 한 마리를 집요하게 추적했다.
퍽퍽퍽!
“키익!!”
머맨은 동족애가 매우 강하기로 유명한 몬스터다.
머맨들은 내가 자신들의 동료에게 거머리처럼 들러붙어서 단검으로 찔러 대자 어찌할 줄을 몰랐다. 도와주고는 싶은데, 도와주겠답시고 삼지창을 찔렀다간 자칫 동료까지 가격할까 봐 걱정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미련한 놈들이 아닐 수가 없다.
‘머맨… 빌어먹을 놈들!’
전사 시절, 나는 파비앙 호수에서 머맨들과 싸운 경험이 있다. 파비앙 호수의 머맨들은 이곳의 머맨들과 달리 레벨이 엄청 낮은 편이었지만, 당시의 내게는 굉장히 강한 적수였다. 결국 나는 녀석들에게 살해당했었고 말이다.
‘그때의 복수다!’
푸욱!
“끅!”
내 단검에 인정사정없이 찔리던 머맨이 결국에는 생명력이 최하치가 되어서 사망하고 말았다. 그에 구경만 하고 있던 머맨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거센 맹공을 가해 왔다.
[2,9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2,83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과연 머맨은 공격력이 뛰어난 몬스터다. 나는 머맨들의 공격을 단 2대 허용한 것만으로도 생명력의 절반 이상을 잃고 말았다.
‘무시무시한 놈들! 서릿빛 오크 족장의 투구와 칸의 역작을 무장했는데도 이 정도 피해량이라니!’
하지만 두려워할 필요 없다.
마나 물약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끝났기 때문이다.
“꿀꺽.”
나는 순식간에 차오른 마나 게이지를 확인한 후 곧장 새로운 스킬을 사용했다.
“파그마의 검무, 파(波)!”
나의 몸이 바로 등 뒤의 로란 폭포처럼 격하게, 하지만 때로는 냇물처럼 잔잔하게 춤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파도처럼 물결치는 검기가 사방으로 쏘아졌다.
퍼퍼퍼퍼퍼펑!
“끼야아악!!”
동시다발적으로 타격을 당한 4마리의 머맨들이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이를 악물고 반격을 시도하지만, 파(波)의 영향 탓에 이동속도와 공격속도가 전보다 2배 가까이 느려진 상태였다.
어렵지 않게 피해 낸 나는 마무리 일격을 가했다.
“칼바람!”
“끄아아악!”
결국, 기세등등하게 등장했던 6마리의 머맨들은 모조리 사망하고 말았고, 나는 머맨을 해치웠다는 문구와 함께 쏟아져 들어오는 돈과 잡템, 그리고 경험치를 확인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능력치 포인트 10개를 지력에 분배해.”
[능력치 포인트 10개를 지력에 투자합니다. 맞습니까?]
“그래.”
그렇게 10의 지력이 상승한 내 마나량은 정확히 600이 되었다.
아직은 갈 길이 멀지만, 그래도 나름 뿌듯하다.
‘어차피 아이템을 만들다 보면 스탯은 상승한다. 언젠가는 파그마의 검무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정도의 마나를 보유하게 되겠지.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빚을 다 갚게 될 때쯤이면, 수천의 마나를 가지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즐거운 상상을 하면서 떠나기 위한 채비를 했고, 그런 내 앞에 웬 남자가 나타났다.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라 있는 남자는 봉두난발이었다. 입고 있는 옷차림도 허름하기 그지없었다.
한눈에 봐도…
‘거지다.’
뭐지? 이 거지는?
‘설마 돈 달라는 건 아니겠지?’
혹 동냥이라도 할까 봐 염려한 나는 서둘러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런 나를 거지가 불러 세웠다.
“한 가지 청이 있다.”
“…아, 놔.”
역시나, 이 거지는 내게 구걸을 하려는 것이 틀림없다.
‘사람 잘못 봤어.’
자랑은 아니다만, 26년을 살면서 구세군 모금함에 10원짜리 하나 넣어 본 적 없는 나다. 거지에게, 그것도 게임 속 거지에게 도움을 줄 생각 따윈 추호도 없다.
‘애초에 내가 거진데 어떻게 거질 도와줘?’
냉정하게 돌아서는 내 어깨 위로 거지가 손을 얹었다.
“내 말이 안 들리나?”
“들리는데요?”
“근데 왜 대답을 안 하지?”
“초면에 다짜고짜 동냥하려 드는 거지를 왜 굳이 상종합니까?”
거지의 얼굴이 콱 구겨졌다.
“뭐? 동냥? 내가 거지라고?”
“그럼 아닙니까? 딱 봐도 거지구만.”
“큭! 크하하하하!!”
저 거지가 실성했나? 갑자기 왜 웃는 거야?
“이봐요, 아저씨, 조용히 하는 게 좋을걸요? 안 그래도 머맨의 피 냄새를 맡고 다른 머맨들이 나타날 수도 있는데 큰 소리까지 냈다간 위험할 거라고요.”
부글부글!
말하고 있는 와중에 폭포 하부에서 거센 포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결국 새로운 머맨들이 등장하려는 것이다.
이번엔 그 숫자가 앞서 나타났던 6마리보다 더 많을 것이라 추측되었기 때문에, 나는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피하고 싶었다.
‘싸워 보니까 7마리 이상은 내가 질 수도 있을 것 같아.’
“이봐.”
걸음을 서두르는 나를 거지가 또다시 불러 세웠다. 하지만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대꾸했다.
“이봐요, 거지 아저씨, 죽기 싫으면 그냥 튀어요. 뭐, 댁이 죽든 말든 나랑은 관계없지만. 그럼 이만…….”
퍼엉! 퍼엉! 퍼엉!
…염병. 거지 탓에 시간을 너무 지체하고 말았다.
11마리의 머맨들이 물속에서 튀어나와서는 나와 거지를 둘러싸 버린 것이다.
“누구냐……. 어떤 놈이 우리의 동족을 처참히 살해한 거냐!”
“죽여 버리겠다……. 죽여서 그 심장을 자근자근 씹어 먹겠다!”
나는 피눈물을 흘리는 머맨들에게 소리쳤다.
“이 사람이 당신들의 동족을 살해하는 걸 제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내 손가락은 거지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건 고의가 아니라 본능적인 행위다.
내가 살기 위해선 남을 희생하는 게 자연의 섭리 아닌가!
“놈……! 네놈이냐!”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머맨들이 일제히 거지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나는 그 틈에 서둘러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한데…
챙!
‘…검?’
이건 분명히 발도하는 소리다.
나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고, 거지의 손에는 과거 조선의 무장들이 사용했을 법한 모양새의 장검이 뽑혀 쥐어져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명검! 거지가 어떻게 저런 걸 가지고 있는 거지?’
설마 거지가 아니었던 건가?
그래,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케산 협곡에 평범한 거지가 있을 리 없다. 평범한 거지는 이곳에서 하루도 살아남을 수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저자는……!’
나는 뒤늦게야 거지의 머리 위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리고 이름을 확인했다.
‘피아로.’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NPC다.
그리고 NPC가 먼저 내게 접근했다는 것은 필시 퀘스트와 관련된 일일 터!
거지, 아니 피아로가 작게 읊조렸다.
“나는 비린내가 싫다.”
사삭! 사사사사삭!
나와는 차원이 다르다.
나는 머맨들을 해치울 때 스킬에 의지했을 뿐이지 검술을 활용한 건 아니다. 하지만 피아로는 아무런 스킬도 사용하지 않고 그저 검술로써만 11마리의 머맨들을 찰나지간에 베어 버렸다.
철컥.
섬광이 수차례 번쩍이면서 머맨들을 덮친다 싶더니 피아로는 장검을 칼집에 돌려 넣었고, 입을 몇 번 뻐끔거리던 머맨들은 잠시 후 동시다발적으로 피를 뿜더니 빛으로 화해 사라져 버렸다.
말도 안 되는 강함을 목격한 탓에 멍청하게 서 있는 내게 피아로가 다가왔다. 그리고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너는 살아남기 위해서 무고한 자에게 죄를 전가시키는 유형의 인간인가……. 내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인물과 쏙 닮았군.”
“죄, 죄송…….”
혹 살해당하는 거 아닐까 염려해서 급히 사과하는 내게 피아로가 손을 저었다.
“가식은 필요 없다. 너와 그리 길게 상종하고 싶지 않으니 용건만 밝히지. 나를 도와라.”
띠링~
익숙한 알림음이 울리면서 퀘스트 알림창이 떠올랐다.
<적기사단의 진정한 배신자 처단>
난이도:S
적기사단은 한때 대륙 최강의 기사단이었다. 적기사단이 있었기에 지금의 사하란 제국이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데 적기사단의 부단장이었던 아스모펠이 감히 황비와 밀회를 즐겼다. 그리고 우연히 그 사실을 알게 된 피아로에게 도리어 누명을 씌웠다.
황비의 힘을 빌려 교묘하게 수작을 부린 아스모펠 탓에, 결국 황실의 배반자로 몰리게 된 피아로와 그의 부하들은 이후 도망자 신세로 전락해 버렸다.
황실을 능멸한 것으로도 모자라서, 오로지 자기만 살아남기 위해 전우들의 인생을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아스모펠을 피아로는 결단코 용서할 수가 없다.
하지만 아스모펠이 풀어놓은 추적자가 대륙 전역에 산재해 있는 탓에 피아로가 직접 움직이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결국 자신의 손으로 직접 복수하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된 피아로는 당신에게 복수의 대행을 맡긴다.
퀘스트 클리어 조건:아스모펠을 처단
퀘스트 클리어 보상:칭호 <복수의 대행자>
*복수의 대행자:잔혹함 능력치가 개방됩니다.
공격력 +100. 스킬 ‘살인 충동’ 생성.
퀘스트 실패 시:레벨 -4.
사하란 제국은 윈스톤 왕국과 가장 인접해 있는 국가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오가는 데 시일이 걸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처단해야 할 대상이 적기사단의 부단장이었다고 하지 않는가?
북부의 신성이라고 불렸던 레오조차도 그 앞에서는 햇병아리에 불과할 것이다.
‘보상은 마음에 들지만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고, 거리가 너무 멀어. 퀘스트할 시간에 대장간에 틀어박혀서 아이템 만드는 게 현명하다.’
충분히 생각해 보고 결정한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제게는 당신을 도울 능력도, 시간도 없습니다.”
[퀘스트를 거절하였습니다.]
피아로가 혀를 찼다.
“보상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거군.”
“그런 게 아니라 능력도 없고 시간도 없다고요.”
“나는 너 같은 유형의 사람을 잘 알고 있지. 너는 내가 난처한 상황에 처한 것을 이용해서 더 큰 보상을 바라고 있는 게 분명해.”
“아니라니까요? 보상은 마음에 들지만 능력이 없고 시간도 없어서 못 도와주는 거라고요.”
“흥, 보상으로 내 검을 얹어 주마.”
[피아로가 퀘스트의 보상을 변경했습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칭호 <복수의 대행자>. 피아로의 장검.
*복수의 대행자:잔혹함 능력치가 개방됩니다.
공격력 +100.
스킬 ‘살인 충동’ 생성.
*<피아로의 장검>
등급:유니크
내구력:110/213 공격력:387 명중률:+10%
*스킬 ‘증오’ 생성.
*체력 ?100.
다소 훼손된 부분이 있지만 대단한 명검이라는 건 변하지 않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피아로의 강렬한 원한이 담겨 있어 저주받았습니다. 사용함에 있어서 다소의 위험이 따릅니다.
사용 조건:레벨 190 이상. 근력 900 이상.
민첩성 300 이상. 고급 소드 마스터리.
증오라는 스킬이 무엇인지 파악이 불가능한 이상, 옵션에 대해서는 논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공격력만큼은 최상급이다.
‘한 손 검인데도 레전드리 등급인 무아지경의 검을 상회하는 공격력이라니……. 물론 무아지경의 검보다 레벨 제한이 30이나 높기는 하지만 등급의 차이를 감안해 봤을 때 이 공격력은 정말 굉장한 거야. 비싼 값에 판매할 수 있는 아이템임은 확실해.’
욕심이 생긴다.
내가 아이템 제작에 매진하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돈을 벌기 위해서다.
하지만 수십, 수백 개의 아이템을 제작한다고 해도 유니크 이상 등급의 아이템이 제작된다는 보장은 없다.
어쩌면 아이템을 만들 시간에 이 퀘스트를 수행해서 보상을 얻고, 보상을 돈으로 파는 게 더 큰 이득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역시, 내게는 무리야.’
나는 강해졌다. 하지만 한때 대륙 최강이었다는 기사단의 부단장씩이나 해먹은 기사를 처단할 정도로 강해진 건 아니다.
진정하고 주제 파악할 필요가 있다.
눈을 질끈 감은 나는 피아로의 장검을 외면했다.
“내게는 당신의 부탁을 수행할 능력이 없어요.”
[퀘스트를 거절하였습니다.]
피아로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래도 화가 난 듯이 보인다.
“참으로 욕심이 많은 녀석이구나. 네놈은 과한 욕심이 도리어 독이 될 수도 있음을 모르는 건가?”
말이 통하질 않는다.
왠지 익숙한 상황을 겪고 있노라니 잊고 있던 누군가가 떠오른다.
그래, 도란이다.
내가 아무리 퀘스트를 거절해도 막무가내로 졸라 대며 결국엔 퀘스트를 떠안긴 도란!
피아로는 그 도란과 닮았다.
‘확실한 태도를 보이지 않고 끌려다녔다간 도란 때처럼 퀘스트를 떠안게 될 수도 있다.’
판단한 나는 강하게 나갔다.
“대체 몇 번을 말합니까! 내가 언제 보상이 마음에 안 든다고 했수? 능력이 안 된다고, 능력이! 왜 멋대로 착각하고 사람을 이상한 방향으로 몰아가면서 강제 노역을 시키려는 거야?!”
“능력이 안 된다고? 협곡 도마뱀, 리자드맨, 거미, 독수리, 악어, 늑대를 비롯해 이제는 6마리의 머맨까지 동시에 해치운 네놈이 그런 되도 않는 거짓말을 치는 게 가소로울 따름이다.”
“헉…….”
뭐, 뭐지 이 녀석? 케산 협곡에서의 내 행적을 모조리 알고 있잖아?
이것이 바로 말로만 듣던……!
“다, 당신! 내 스토커지?! 대체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설마 내 순결을……! 이런 더러운 놈!”
“너한테 이미 말했을 텐데? 내가 원하는 건 아스모펠의 죽음이다. 그보다 어른에게 사용하는 말투가 너무 버르장머리 없군.”
퍽!
피아로가 칼집으로 내 허벅지를 한 대 때렸다.
그리고 나는 그대로 무릎을 꿇고 말았다.
[7,5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정의의 사도는 용맹무쌍합니다.]
[정의의 사도는 위기에 강합니다. 눈앞의 적들을 해치우기 전까지 쉽게 쓰러지지 않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30퍼센트 상승합니다.]
“뭐, 뭐……?”
고작 칼집으로 허벅지 한 대 맞았다고 생명력이 이렇게 떨어지다니? 11마리의 머맨을 순식간에 해치운 점도 그렇고, 이 녀석 도대체 정체가 뭐지?
경악하고 있는 나를 피아로가 차가운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확실히 대답해라. 내 청을 받아 줄 테냐? 아니면 나한테 죽을 테냐?”
“…….”
피아로가 도란과 닮았다고 생각한 건 단순히 내 착각이었다.
도란은 단지 막무가내 성향이 강했을 뿐, 따지고 보면 여러모로 착했지만 이놈은 전혀 다르다. 오히려 악마 같다.
지독하게 이기적인 악마!
“마, 말도 안 돼……. 퀘스트 거절하면 죽이겠다는 NPC가 존재하다니……. 뭐 이런 개막장이…….”
“무슨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지껄이고 앉은 거냐? 어서 대답이나 해라.”
“에이, 빌어먹을! 차라리 죽여라! 퀘스트에 실패하면 레벨도 4개나 떨어지고 시간까지 낭비하게 되지만, 여기서 너한테 죽으면 경험치만 잃고 끝나니까! 헹! 차라리 잘됐네! 너한테 죽으면 곧바로 윈스톤에서 부활할 테고 오히려 시간 절약이 되겠어!”
“…정말이지 여행자란 족속들은 목숨 아까운 줄을 모르는군. 신은 어찌하여 너희 같은 불사의 존재를 창조하였으며, 무슨 의도로 우리같이 평범한 인간들과 함께 지내게 하신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군.”
NPC가 유저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다.
무서울 정도로 소름 돋는 인공지능 탓에 나는 잠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런 내게서 피아로가 시선을 거뒀다.
“꺼져라.”
“응?”
“내 앞에서 사라져.”
“퀘, 퀘스트. 아니, 당신의 부탁 거절하면 죽인다며?”
“흥, 죄 없는 자를 죽이는 취미는 없다.”
피아로는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잠시 멈춰 서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혹시 나중에라도 내 부탁을 들어줄 마음이 생긴다면 이곳을 찾아와라. 이건 강요가 아니다. 단지 소망이다.”
그렇게 나와 피아로의 짧은 만남은 끝이 났다.
그리고 나는 윈스톤으로 돌아갔다. 그 과정에서 협곡의 몬스터들과 몇 차례나 맞닥뜨리며 싸운 덕에 내 레벨은 95가 되었고, 나는 모든 스탯 포인트를 지력에 투자했다.
‘쓰벌, 이러다가 마법사 되겠네.’
단지 마나량을 올리기 위해서 지력에 스탯을 투자하다니! 역시, 아무리 생각해 봐도 스탯 포인트가 너무 아깝고 아쉽다.
하지만 기쁜 소식도 있었다.
[대장장이의 분노 스킬의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꺾을 수 없는 정의 스킬의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대장장이의 분노>
Lv.2
30초 동안 모든 공격력을 15퍼센트, 공격 속도를 30퍼센트 상승시켜 줍니다.
스킬 마나 소모:40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60초
<꺾을 수 없는 정의>
Lv.2
물리 공격력 320퍼센트의 광역 피해를 입힙니다.
스킬 마나 소모:300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90초.
칼바람과 신속한 몸놀림의 경우는 이상적인 단검에 내장된 스킬이기 때문에 아무리 사용해 봤자 스킬의 경험치도 오르지 않고 레벨도 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대장장이의 분노와 꺾을 수 없는 정의는 내 고유 스킬이다. 그래서 당연히 평범한 스킬들처럼 경험치와 레벨이 올랐다.
나는 상승한 스킬들의 효과를 보면서 한층 더 강해졌음을 자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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