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34화 (30/1,794)

제6장

동창들과의 우연한 만남

협곡 거미는 크기만 큰 게 아니다. 그 압도적인 강함은 어지간한 보스 몬스터들과 비견해도 좋을 정도의 위용이었다.

“히, 히이익…….”

이준호, 최찬성, 심기완.

신영우의 동창생인 이들 셋은 나란히 거미줄에 몸을 칭칭 감긴 채 협곡 거미의 둥지에 잡혀 온 상태였다.

그들은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번뜩이면서 어느 놈부터 잡아먹을까 고민하는 협곡 거미를 대면한 채 극도의 공포를 느꼈다.

“젠장… 그놈의 윈스톤이 대체 뭐길래…….”

울상을 지은 이준호가 한탄했다.

대세 중의 대세 도시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윈스톤!

다양한 레벨대의 사냥터와 특산품을 자랑하는 그곳에 거주하게 될 경우, 금방 레벨을 올리고 돈까지 잘 벌 수 있다는 소문을 접한 세 사람은 윈스톤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하지만 도중에 트러블 고블린의 장난질에 당해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얼어 죽을 뻔하고, 급기야 이 케산 협곡까지 당도했다.

그리고 지금은 협곡 거미의 한 끼 식사가 되게 생겼다.

“빌어먹을, 윈스톤은 왜 가자고 해 가지고.”

심기완이 투덜거렸다. 그러자 이준호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윈스톤으로 이주하자고 최초에 말을 꺼냈던 인물이 다름 아닌 이준호였기 때문이다.

발끈한 이준호가 심기완을 노려봤다.

“이 새끼가 골 까고 앉았네? 이제 와 내 탓 하는 건 또 뭐야? 내가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냐? 엉?”

이준호는 고등학생 시절 학교에서 싸움을 제일 잘하고 성격이 난폭했었다.

동창 중에 이준호에게 삥 안 뜯겨 본 아이가 없을 정도였다.

이준호가 한창 반항기였던 시기에는 그와 가장 친하게 지냈던 최찬성과 심기완조차도 괜히 얻어맞은 경험이 있다.

이준호의 성격이 여전히 불같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심기완은 더 이상 투덜거리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이준호는 분이 풀리질 않았다.

“아, 씨발놈 그것참… 생각할수록 엿 같네. 야, 심기완. 이 새끼야, 다시 지껄여 봐. 내가 윈스톤으로 이주하자고 말을 꺼낸 이유가 저 거미 새끼한테 잡아먹히려고 했던 거냐? 우리 모두 잘되자고 꺼냈던 말이지? 너도 좋다고 했었잖아? 근데 일이 틀어지니까 바로 내 탓을 해? 이 개새끼야, 네가 그러고도 친구냐?”

“…미안하다. 네 탓 하려고 했던 게 아니었는데, 내가 흥분해서 말을 잘못했어.”

“아니, 씨발. 미안할 짓을 왜 해. 이 새끼가 진짜 뒈질라고.”

잠자코 있던 최찬성이 중재에 나섰다.

“지금 우리끼리 다툴 때야? 싸울 시간에 도망칠 방법이나 강구해 보자.”

솔직히 말하자면 최찬성이나 심기완은 이준호가 마음에 안 들었다.

말이 친구지, 이준호는 최찬성과 심기완을 자기보다 아래로 보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이다.

26살이 된 지금까지도 고등학생 시절과 별반 다를 바 없이 양아치 같은 녀석이어서 상종하기도 싫었다.

반면 이준호는 성격이 더러운 탓에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했고 친구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툭하면 최찬성과 심기완에게 어울리자고 했다.

최찬성과 심기완은 그런 이준호를 무시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나름 10년 동안 어울려 온 의리가 있었기 때문에 쉽사리 이준호를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슬슬 한계였다.

‘뒈질라고? 그게 친구라고 자처하는 새끼가 친구한테 할 말인가?’

‘이준호 저 자식, 더러운 말버릇 절대로 못 고치네. 기완이 녀석 또 자존심 엄청 구기겠어.’

분위기가 더욱더 살벌해지기 시작한 그때였다. 바깥에서부터 바람을 타고 소란이 들려왔다.

“!$#!~%”

제법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소리라 세 사람은 소란의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협곡 거미는 달랐다.

세 사람을 위아래로 훑던 협곡 거미의 소름 돋는 시선이 둥지 바깥으로 돌아갔다.

“끼기긱…….”

협곡 거미는 즐거운 듯이 기성을 토했다. 새로운 사냥감이 나타났음에 기뻐하는 듯이 보였다.

세 사람은 그대로 둥지를 떠나는 협곡 거미의 뒷모습을 확인하고서 안도했다.

“휴우… 죽는 줄 알았네.”

“그러게 말이다…….”

“이 틈에 어서 탈출하자!”

이준호는 88레벨의 전사였다. 공격적인 성향을 가진 인물답게 대부분의 스탯을 근력에 투자한 그는 거미줄을 힘으로 끊기 위해서 온몸에 힘을 줬다. 하지만 아무리 발악을 해도 그의 몸을 칭칭 감고 있는 거미줄은 도통 꿈쩍도 안 했다.

“대체 뭐가 이리 질긴 거지? 내가 온 힘을 다해도 끊을 수가 없잖아?”

잔뜩 지친 이준호가 결국 거미줄을 끊는 것을 포기했다. 그러자 87레벨의 화염 계열 마법사 심기완이 주문을 외워서 불길을 소환했다.

화르륵!

심기완의 몸을 묶어 두고 있던 거미줄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오오오!”

세 사람은 저 불길에 곧 거미줄이 재가 되고 자신들은 자유의 몸이 될 것이라 생각하며 환호했다.

하지만 잠시 후 불길이 걷히고 드러난 거미줄은 겉만 약간 검게 그을려졌을 뿐, 여전히 견고하게 심기완의 몸을 압박하고 있었다.

심기완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이게 뭐야? 불로도 태울 수 없다니?”

“내게 맡겨.”

꼼지락대고만 있는가 싶었던 89레벨 도적 최찬성이 나섰다. 전신이 포박당한 상태에서도 용케 단도를 한 손에 꺼내 쥔 그는 단도로 거미줄을 자르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날카로운 단도조차도 거미줄을 자를 순 없었다.

“이럴 수가… 흠집조차 안 나?”

협곡 거미가 자리를 비웠다고 해서 살길이 생겨난 게 아니었다. 저레벨에 불과한 세 사람은 고작 거미줄조차도 어찌할 수가 없어서 죽음을 피하지 못하게 됐다.

그들은 절망했다.

“결국 우린 저 거미 새끼한테 잡아먹히는 건가…….”

“야, 어차피 죽을 거면 우리 그냥 로그아웃하자. 저런 무시무시한 놈한테 잡아먹히는 체험을 하느니 순순히 포기하는 게 낫잖아?”

이준호와 심기완은 이미 로그아웃을 시도해 봤었다. 하지만 ‘이미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로그아웃을 할 경우 사망 처리됩니다.’라는 경고창이 떠올랐었기 때문에 망설였었다.

그러나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차라리 로그아웃하는 게 나아 보였다.

“그래, 그냥 로그아웃하자. 거미 따위한테 잡아먹히는 체험을 했다간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완전히 상실하게 될 거야.”

“좋아, 로그아…….”

마음을 결정하고 로그아웃하려는 두 사람을 최찬성이 저지했다.

“기다려. 아무리 게임일지라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는 너무 수치스럽지 않냐? 혹시 모르니까 조금만 더 버텨 보자.”

“버텨 봤자 뭐해! 이제 곧 거미가 되돌아올 일만 남았는데! 넌 거미한테 잡아먹혀도 괜찮다는 거야? 그딴 경험을 했다간 평생 거미 공포증에 시달릴 수도 있다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용기가 있다면, 그 용기로 거미에게 대항할 수단을 찾아봐.”

“무슨 개소리야! 가능한 소리를 지껄여라! 에이, 모르겠다! 우린 로그아웃할 테니까 너 혼자 남든가! 로그아웃… 어?”

세 사람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그들의 시선은 모두 동굴의 입구 쪽으로 집중되었다.

뚜벅뚜벅.

역시나, 잘못 들은 게 아니다.

동굴 입구에서부터 사람의 것으로 추측되는 발걸음 소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뭐지?”

“쉿!”

세 사람은 일단 상황을 지켜보기 위해서 숨을 죽였다.

그리고 잠시 후 한 사내가 동굴 안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거미 새끼, 몸집을 보니까 몇십 년은 살아 있던 것 같은데 둥지에 무슨 보물 같은 거 안 모아 뒀나? 짜식이, 기껏 힘들게 사냥했더니 잡템이나 떨구고 말이야.”

그 무시무시한 거미를 사냥했다고?

이준호와 최찬성, 그리고 심기완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사내를 살펴보았다.

사내는 어느 거대한 괴물의 두개골로 만든 듯한, 외뿔 솟은 뼈 투구를 뒤집어써서 얼굴의 절반을 가리고 있었다. 투구가 워낙 흉측하게 생긴 탓에 거부감이 들 지경이었다.

세 사람은 혹 사내가 들을까 염려하며 귓속말로 대화했다.

“엮여선 좋을 것 없을 놈 같은데……?”

“맞아. 저런 괴상한 미적 감각을 가진 걸 보면 사이코패스 같다.”

“그래도 일단 도움을 요청해 보자.”

“으, 으음… 하지만 위험해 보이는데…….”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그럴 수도 있어 보이는데.”

“그렇긴 하지만…….”

세 사람의 갈등이 깊어져만 간다.

그 무시무시한 협곡 거미만큼 경계해야 할 정도로 사내가 뒤집어쓰고 있는 투구의 생김새가 무시무시했던 것이다.

한편, 거미를 해치우고 동굴에 들어온 흉측한 투구의 사내, 그리드는 거미줄에 칭칭 묶여 있는 세 사람을 뒤늦게 발견했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이준호와 떨거지들 아니야? 저놈들이 여기 왜?’

이준호와 떨거지들!

놈들은 학창 시절부터 양아치로 유명했다.

특히 이준호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양아치였다.

학우들 삥 뜯기는 기본이요, 심심찮게 폭력까지 행사했다. 심지어 선생님들에게도 대들 정도였다.

그리드. 즉 신영우도 녀석에게 한두 번 당한 게 아니었다.

이미 7, 8년 전의 일이었지만 신영우는 이준호가 자신에게 저지른 악행들을 모조리 기억하고 있었다.

‘고등학생 시절… 저 새끼랑 2학년 때 같은 반이 된 후로 졸업까지 2년간 뜯긴 돈이 정확히 67,300원……. 그리고 등짝을 23대, 뒤통수를 14대… 죽빵을 3대 맞았었지.’

평소 신영우의 기억력은 안 좋은 편이다. 하지만 머리가 나빠서라기보다 집중력이 나쁘기 때문이다.

만날 정신을 다른 데다가 팔고 다니느라 사소한 것들을 잘 기억 못한다. 하지만 이렇듯 자신이 당한 일은 똑똑히 기억한다.

‘녀석의 괴롭힘은 학창 시절로 끝난 게 아니었지.’

재작년 동창회 때 동창들 앞에서 신영우를 가장 먼저 비웃고 무시했던 인물이 바로 이준호였다.

빚쟁이, 게임 폐인 생활을 하게 됐다는 신영우의 소식을 접한 동창들이 그래도 학창 시절의 정이 있어서 대놓고 비웃지 못하고 있는 그때!

오직 이준호만은 신영우를 한심한 놈이라고 계속해서 비웃고 놀려 댔다.

어찌나 즐겁게도 놀려 대던지, 동창회 자리가 길어지면서 다들 술이 오르기 시작하자 다른 동창들도 이준호를 따라서 신영우를 비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탓에 신영우는 모든 동창들에게 만만한 안주거리로 전락해 버렸다.

‘용서할 수 없는 새끼……. 제기랄, 평생 두 번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던 새끼를 어떻게 게임에서 우연히 만날 수가 있지? 재수도 없지 진짜.’

신영우가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이준호와 떨거지들을 노려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이준호가 조심스럽게 청했다.

“저… 저기요? 혹시 좀 도와주실 수 없을까요? 보시다시피 저희가 이 꼴이라. 하하.”

이준호는 투구의 사내가 설마 신영우라고는 꿈에도 못 꾼 채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신영우로서는 가소로울 따름이었다.

‘저 개자식… 내 앞에서는 악마 같은 미소만 짓던 놈이 다른 사람한테는 저런 가식적인 미소를 지을 줄도 아는군! 아, 그러고 보니까 지금 내 얼굴 가려져 있지? 그럼 저 새끼들은 내가 누군지 알 도리가 없는 거잖아? 오호, 이거 어쩌면…….’

솔직히 신영우는 서릿빛 오크 족장의 투구가 별로 마음에 안 들었다.

유니크 세트 아이템답게 기능은 매우 뛰어나지만 생긴 게 너무 구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서릿빛 오크 족장의 투구가 너무너무 마음에 들었다.

왜냐? 투구가 얼굴의 절반을 가려 주는 형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영우의 생김새가 드러나지도 않았고, 그리드라는 아이디가 머리 위로 떠오르지도 않았다.

‘지금 내가 이곳에서 저 새끼들을 만난 건 하늘이 내려 준 복수의 기회 아니야?’

흐흐흐, 신영우가 음침한 웃음소리를 흘리면서 이준호와 떨거지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투구 너머로 번뜩이는 신영우의 안광을 보면서 이준호와 떨거지들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투구 사내가 자신들에게 보내는 눈빛이 협곡 거미가 보내왔던 눈빛과 어딘지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마치 먹잇감을 보는 듯한……!

‘똥 밟은 건가?’

이준호와 떨거지들이 일이 잘못 돌아가게 되었음을 직감하고 있을 때 신영우의 시선은 최찬성에게 고정되었다.

‘최찬성…….’

분명 최찬성도 이준호, 심기완과 쭉 어울려 온 인물이다.

이준호와 심기완이 애들에게 삥을 뜯거나 폭력을 휘두를 때면, 어김없이 최찬성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하지만 최찬성이 직접적으로 애들에게 삥을 뜯거나 욕설,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을 적어도 신영우는 목격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최찬성은 이준호와 심기완이 악행을 저지를 때마다 불편한 표정을 지었었다. 그리고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준호와 다투는 모습도 자주 보였었다.

‘언젠가 내게 이준호를 대신해 사과한다는 말까지 했었지……. 동창회 때도 직접적으로 날 놀린 적은 없고……. 심지어 얼마 전에는 동창회 안 나올 거냐고 문자랑 전화까지 했었고……. 나는 전화도 안 받고 문자에 답장조차 안 했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몇 번이나 연락을 해 왔지. 마치 걱정하듯이! 응? 설마 저놈은 착한 놈인가?’

신영우의 해석은 정확했다.

최찬성은 재작년 동창회에서 동창들에게 엄청나게 무시당한 신영우를 진심으로 걱정했었다.

안 그래도 힘들 텐데 망신까지 당했으니 혹 잘못된 선택이라도 할까 염려가 되었기 때문이다.

평소 이준호와 심기완이 툭하면 신영우를 안주거리로 삼아 비웃을 때도 최찬성만큼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비록 최찬성이 고등학교 신입생 시절부터 시작된 인연 탓에 이준호, 심기완과 어울리고는 있으나, 천성은 남을 괴롭히거나 흉보길 꺼려하는 올바른 인물인 것이다.

하지만 신영우는 의심이 많았다.

‘…이준호의 친구가 착한 놈일 리가 없지. 원래 예부터 영화나 만화를 보면, 악의 진정한 배후는 겉에서 착한 척을 하는 법!’

고등학생 시절, 이준호와 심기완이 애들을 괴롭힌 배후에는 최찬성이 있지 않았을까?

재작년 동창회 때, 이준호가 나를 비웃고 놀리던 배후에도 최찬성이 있지 않았을까?

신영우는 그렇게 의심하면서 최찬성에게는 이준호와 심기환에게 보내는 것 이상의 적의를 불태웠다.

그리고 +8 이상적인 단검을 뽑아 쥐었다.

“우와…….”

“오오!”

이준호와 떨거지들이 탄성을 금치 못했다. 그야 그럴 것이, 그들은 저토록 휘황찬란하게 번쩍이는 고강화 무기를 처음으로 봤기 때문이다.

‘그 무시무시한 협곡 거미를 해치웠다더니, 과연 굉장한 인물이었어!’

‘템이 엄청난 걸 보면 레벨도 무지 높을 거야! 쩐다. 우리는 언제쯤 저렇게 될 수 있을까?’

동경의 시선을 보내오는 그들 앞에서, 신영우는 벽면에 얽혀 있는 거미줄 뭉텅이를 단칼에 베어 보였다.

그에 이준호와 떨거지들은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우리가 아무리 애를 써 봤자 꿈쩍도 않던 거미줄을 저렇게 쉽게 베어 버리다니!’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는 그들을 확인하고 기고만장해진 신영우가 어깨를 으쓱였다.

“고작 이 정도 거미줄도 자력으로 못 끊어서 처음 보는 사람에게 염치없는 부탁을 하다니, 참 무능력하고 한심한 놈들이군.”

“…….”

그야말로 싸가지 없는 말투!

이준호와 심기완은 발끈했다.

특히 이준호의 원래 성깔이라면 당장 욕을 날려 주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준호는 꾹 참았다. 자기가 아쉬운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하하, 저희가 아직 저렙이라서요……. 저희로서는 이 거미줄조차도 감당하기가 어렵네요. 그러니까 부디 좀 도와주세요. 님이 저희 안 구해 주시면 저흰 이 거미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죽고 말 거예요.”

이준호는 어떻게든 살아 보겠다고 비굴한 미소를 지었다.

그게 신영우에게는 참으로 신선한 모습이었다.

‘언제나 세상 무서울 것 없이 미처 날뛰던 놈이 저런 표정을 짓다니? 이거 엄청난 볼거린데?’

신영우는 웃음이 터져 나오려 하는 것을 간신히 억눌렀다. 그리고 정색하며 턱에 손을 괴고 고민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흠~ 내가 너희들을 왜 구해 줘야 할까? 너희들을 구해 줘서 내가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뭐지? 난 선천적으로 무료 봉사 같은 걸 혐오하는 체질이라서 말이야.”

그야말로 노골적으로 대가를 바라는 투구의 사내!

이준호는 참 인정머리 없는 놈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 그밖에 없었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약소하게나마 저희가 가진 돈을 조금씩 거두어 물약 값이라도 하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약소해선 안 되지. 너희들 목숨 값이 그리 약소하냐?”

“…아시다시피 저희가 저렙이라 돈이 많지가 않아서요.”

“장비를 보면 최소 80렙씩은 될 것 같은데? 너희들 전부 가진 돈 다 내놓으면 액수가 꽤 짭짤할 것 같구만 뭘 그렇게 겸손해?”

“전 재산을 드리면 저흰 뭘 먹고 삽니까…….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불쌍한 표정을 짓고 애걸하는 이준호의 모습을 보자 신영우는 통쾌했다. 10년 묵은 변비가 내려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내 앞에선 만날 악독한 표정만 짓고 고압적으로 행동하던 놈이……. 큭큭, 좋아! 오늘 아주 뽕을 뽑자! 그간 이 새끼한테 받아 온 수모를 모조리 갚아 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대장장이의 분노!’

[대장장이의 분노 효과가 발동합니다. 20초 동안 공격력과 공격 속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억울하게 돈 뜯기고 처맞기까지 하는 심정이 어떤 건지 알려 주겠다고 다짐한 신영우가 다짜고짜 손을 들었다.

그리고 어리둥절해하는 이준호의 대갈빡을 아무런 예고도 없이 힘껏 때렸다.

뻐억!

“커허억!”

단순한 맨손에 얻어맞은 이준호가 망치에 맞기라도 한 것처럼 과장되게 소리 지르며 고통스러워했다.

이는 연기가 아니다.

현재 86레벨인 신영우의 근력은 무려 700을 상회하고 있다.

거기에다가 대장장이의 분노까지 사용한 상태다.

신영우처럼 레전드리 직업을 가진 것도 아니고 스탯 노가다를 한 것도 아닌, 지극히 평범한 88레벨 전사, 그것도 대부분의 스탯을 근력에 투자한 공격형 전사인 이준호에게 신영우의 공격력은 가히 위협적이었다.

만약 이준호가 특출한 방어구를 무장하고 있었다면 또 모를까, 이준호는 방어구도 레벨대에 맞게 평범하게 구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영우의 맨손에 200대 정도 맞으면 사망할 우려가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저항하지 못하는 사람을 200대 때리는 건 매우 쉬운 일이다.

“이, 이게 무슨 짓이야?!”

황당해하는 이준호에게 신영우는 씨익 웃어 주었다. 입가에 번진 그 미소가 마치 악마의 것 같았다.

“살려 달라고 부탁하는 주제에 돈 주기는 싫다며? 염치가 없으니 맞아야지!”

퍼억!

“카악!”

신영우의 주먹이 이준호의 죽빵을 날렸다.

소량의 피를 토하는 그를 보고 희열을 느낀 신영우가 이번에는 양손 모두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이준호의 턱을 연타로 때렸다.

퍽퍽!

“컥! 아, 아니! 우리 살려 주면 돈 준다니까!? 돈 주겠다는데 왜 때려!”

“물약 값만 준다며?”

“설마 진짜로 전 재산을 내놓으라는 거냐!”

“그래, 이 새끼야!”

퍽!

“윽! 자, 잠깐! 그만 때려 봐! 그리고 생각해 봐라! 고작 거미줄 한 번 끊어 주면서 전 재산 내놓으라는 건 너무 날강도 같은 심보 아니야?!”

“고작 거미줄? 그래, 맞아. 나한테는 고작 거미줄이지. 하지만 너한테는 고작이 아닐 텐데? 니 새끼는 그 거미줄 하나 못 끊어서 죽게 생긴 마당에 어디서 주제 파악 못하고 지껄여!”

퍽퍽!

“아악! 아, 알았어! 미안! 내가 말실수했다! 일단 살려 줘! 살려만 준다면 전 재산 줄게!”

“됐어.”

“응?”

“돈 됐다고.”

“노, 농담했던 거야? 하핫! 하하하! 이야, 이 센스쟁이! 어차피 구해 줄 거라서 장난 좀 쳤던 거구나!”

“뭔 개소리야? 안 구해 줄 건데?”

“왜? 전 재산 주면 구해 준다며?”

“니 새끼가 나한테 진짜로 전 재산을 가져다 바칠지 내가 어떻게 알고 구해 줘? 100골드 있으면서 1골드만 주고 ‘아이고~ 죄송하지만 이게 전 재산입니다.’라고 할 수도 있는 거잖아? 엉?”

“안 그래! 내가 그렇게 치졸한 놈 같냐!”

“어. 그리고 설령 니 새끼가 진짜로 전 재산을 갖다 바치더라도 이젠 안 구해 줄 거야.”

“왜?”

“니 새끼가 반말 지껄이는 꼴이 싸가지 없어서 구해 주기 싫어졌거든!”

퍽퍽퍽퍽!

파티창에 떠올라 있던 이준호의 생명력 게이지에 약간의 공백이 생기기 시작했다.

고작 맨손으로 공격하는 것만으로 전사의 생명력을 눈에 띄게 깎다니?!

최찬성과 심기완은 기겁했다.

‘준호가 스탯을 근력에 몰빵했다고는 하지만 전사의 기본 생명력은 굉장히 높은 편인데 맨손으로 저만큼의 피해를 입히다니……. 세다……! 엄청 세다! 과연 협곡 거미를 사냥할 만하다! 근데!’

‘또라이다!’

죽게 생겨서 도움을 요청한 사람에게 도리어 폭력을 행사하다니! 도와주기 싫으면 그냥 안 도와주고 말 것이지 왜 굳이 팬단 말인가?

퍽퍽퍽퍽!

보신탕 집 뒷마당 나무에 묶여서 흠뻑 두들겨 맞는 불쌍한 개처럼 쉴 틈 없이 얻어맞는 이준호!

평소 이준호를 싫어하던 두 사람이었지만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니까 잠자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이봐요! 사람을 왜 그렇게 패는 겁니까! 우리가 뭐 잘못하기라도 했습니까!”

심기완이 따지고 들었다. 그러자 이준호를 때리느라 정신없던 신영우의 시선이 그에게로 돌아갔다.

심기완은 흠칫 놀라고 말았다.

‘저 눈빛……! 정상인의 눈빛이 아니야!’

뼈 투구의 눈구덩이 사이로 번들거리고 있는 신영우의 눈빛은 그야말로 광기에 물들어 있다고 표현해도 부족함이 없었으니…….

퍽퍽퍽퍽퍽!!!

“끄악! 엑! 윽! 어억!”

전사인 이준호와 달리 마법사인 심기완의 기본 생명력은 매우 낮은 편이었다.

그래서인지 신영우의 주먹에 대가리를 10대밖에 얻어맞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생명력이 무려 10분의 2나 소모되었다.

심기완은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있나 싶어서 속으로 연신 욕을 지껄였지만 감히 욕을 입 밖에 내지는 못하고 애원했다.

“사, 살려 주세요…….”

신영우가 광소를 터뜨렸다.

“뭐? 살려 달라고? 하하하하하! 살려 줄까? 말까? 살려 줄까? 말까? 푸하하하핫!! 이야~~ 이거 엄청나게 고민되는데? 좋아, 고민하는 동안 일단 계속 맞아라!”

“으아아악~!”

“…….”

사태를 지켜보는 최찬성은 지금이 꿈속인가 싶었다.

살려 달라고 부탁하는 사람마다 죽이려드는 미친놈을 만나다니! 이게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란 말인가!

‘설마 저게 말로만 듣던 전문 PK(Player Killer)범인가?’

Satisfy에는 아이템을 빼앗기 위해서, 혹은 누군가의 의뢰를 받아서 전문적으로 유저들을 살해하는 PK 유저들이 실제로 존재한다.

하지만 PK 유저가 되면 여러 가지 불이익이 발생하기 때문에 그 숫자가 많지는 않았다. 일반인들은 Satisfy를 매일 플레이하더라도 PK범을 만나는 경험을 거의 하지 못할 정도다.

그런데 그 드문 PK범이 지금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안 그래도 죽게 생겼던 마당에 나타나다니! 이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 아닌가?

“…적당히 해라.”

한동안 얻어맞은 후 잠시 잠자코 있던 이준호가 심기완이 바통 터치하고 대신 얻어맞고 있는 와중에 입을 열었다.

신영우의 시선이 다시금 이준호에게 돌아갔다.

“지금 뭐라 그랬냐?”

눈에 살기를 가득 머금은 이준호가 소리쳤다.

“적당히 하라고 했다, 이 씨발놈아!!”

동굴이 떠나갈 듯한 쩌렁쩌렁한 포효!

이것이야말로 전사만이 가질 수 있는 기개다.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심기완이 오래간만에 이준호에게 기대에 찬 눈빛을 보냈다.

‘그래, 준호야! 이 사이코패스 새끼한테 보여 줘! 네가 보통 놈이 아니란 것을!’

심기완은 이준호를 따라다닐 때만 양아치 흉내를 냈을 뿐이지 천성적인 양아치가 아니었다. 반면 이준호는 선천적인 양아치다. 눈 돌아가면 두려울 게 없는 놈이었다. 심지어 부모님도 못 알아볼 때도 있다는 소문이 났을 정도다.

심기완은 이준호의 그런 막 나가는 성격에 명운을 걸었다. 미친개라고 불렸을 정도의 깡다구라면, 저 해괴망측한 투구를 뒤집어쓴 미친놈을 어떻게든 해 줄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이 싸가지 없는 새끼가 어디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앉았어? 뭐? 씨발놈? 이런 개씨발놈이 덜 맞았냐? 엉?”

퍽퍽!

“그만 안 하면 너 따위가 어쩔 건데? 엉? 어엉?!”

퍼퍼퍼퍽!!

“큰소리치기 전에 니 새끼 몸 휘감고 있는 그 거미줄이나 좀 어떻게 해 보지 그래? 이 무능한 새끼야!”

퍼퍼퍼퍼퍼퍽!!!

이준호가 현실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이곳은 Satisfy다.

성깔과 깡다구만으로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곳이 아닌, 진정한 약육강식의 세계다.

깡다구고 개뿔이고 간에 실제로 강한 사람만이 위에 설 수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이준호보다 신영우가 훨씬 더 강했다.

퍽퍽퍽!

여전히 거미줄에 몸이 칭칭 감긴 채,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한동안 얻어맞던 이준호가 여전히 정신 못 차리고 신영우에게 눈깔을 부라렸다. 그리고 분노로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야, 이 씹새야. 너 어디 사냐? 어? 현실에서 보면 눈도 못 마주칠 새끼가 게임이라고 겁나 깝친다? 뒈질래? 어디 사는지 당장에 말해! 내가 찾아가서 조져 줄 테니까!”

본능이라는 게 참 무섭다.

신영우는 자신이 이준호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을 정도로 훨씬 우위에 있는 입장임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준호가 이렇게 세게 나오자 순간 쫄아서 움찔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이준호는 결코 자신의 정체를 알아낼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한 신영우가 당당하게 대답했다.

“나? 아르헨티나에 산다, 이 씨부랄놈아!”

아르헨티나!

국가 면적이 세계 8위임에도 불구하고 국가 면적 세계 109위인 대한민국보다 인구수가 더 적은 나라!

예부터 축구 강국으로 명성 높은 나라!

아사도(고기를 통으로 꼬치에 꽂아 숯불에 구워 먹는 행위) 식문화가 나름 유명한 나라!

무엇보다도 대한민국과는 완전히 지구 반대편에 있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거리가 먼 나라!

퍽퍽퍽퍽퍽!!

다시금 이어지는 폭력 속에서, 이준호는 상대가 하필이면 참 먼 곳에 사는 녀석이었구나, 안타까워하며 결국 태도를 바꿨다.

“죄, 죄송합니다, 형님. 제가 다 잘못했으니까 제발 그만 때려 주세요……. 더 이상 주제 파악 못하고 까불지 않을게요. 욕해서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제발 살려만 주세요. 저 이러다 정말로 죽겠어요…….”

템빨과 스탯빨을 갖춘 덕분에 고레벨 몬스터를 사냥 가능하며, 그래서 폭렙이 가능한 신영우와 달리 이준호는 평범한 유저다.

한 번 죽어서 경험치 떨어뜨리면 복구하는 데 엄청난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만약에 아이템이라도 떨어뜨리고 죽으면 그야말로 날벼락 맞는 셈이다.

그래서 이준호는 진심으로 죽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본래 이준호는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 앞에 약한 인물이다.

동창들 사이에서는 미친개라고 불릴 정도로 깡다구가 엄청나다고 소문이 났지만, 실제로 이준호는 전형적인 간신배 스타일이었다.

만약 거미줄에 몸이 포박되어 있지 않았다면, 납작 엎드려 발등이라도 핥았을 듯이 비굴한 태도를 보이는 이준호에게 신영우가 기회를 줬다.

“개처럼 왈왈 짖어라. 그리고 주인님 제발 살려 주세요, 라고 빌어. 그러면 살려 줄게.”

“저, 정말입니까?”

“어.”

“그, 그럼 당장! 왈……!”

이준호가 진짜로 개 짖는 소리를 내려고 하는 그 순간, 여태까지 잠자코 있던 최찬성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준호야, 설마 정말로 그런 짓을 할 생각은 아니지?”

최찬성은 이준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명색이 친구였고, 생판 처음 보는 미친놈보다야 이준호를 챙기는 게 당연했다.

“한 번 죽으면 그만이지, 뭘 구차하게 굴면서까지 살려고 해? 그리고 저 사람의 요구를 들어주더라도 저 사람이 우리를 살려 주리란 법 있어?”

겁에 질린 이준호나 심기완과 달리, 혼자서만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는 최찬성을 보면서 신영우는 확신했다.

‘최찬성……! 역시 모든 일의 배후답군! 말하는 게 과연 보스다워! 이준호가 학창 시절부터 그렇게 깝칠 수 있었던 건 모두 다 배후에 최찬성이 있었기 때문인 게 확실하다!’

드디어 신영우는 가장 최후의 먹잇감으로 남겨 두었던 최찬성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다짜고짜 최찬성의 죽빵을 때렸다.

뻐억!

그야말로 온 힘을 다해서 때렸고, 도적이라 생명력이 낮은 최찬성은 큰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최찬성은 동요하지 않고 오히려 서늘하게 웃었다.

“그래, 죽여라. 거미한테 잡아먹히는 것보단, 그리고 스스로 목숨을 포기하고 로그아웃해서 자살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미친놈에게 맞아 죽는 게 덜 쪽팔리니까.”

“이, 익……!”

신영우는 이준호와 떨거지들을 죽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최대한 오래 살려 놓고 온갖 모욕감과 폭력을 안겨 주며 절망을 느끼게 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이 받았던 고통을 되돌려 주고 싶었다.

이준호와 떨거지들이 바짓가랑이 붙잡고 애원하는 꼴이 보고 싶었다. 그런데 최찬성은 이준호와 달리 당당하기만 했으니 분이 풀리질 않았다.

“너… 너, 이 새끼! 죽는 게 정말 두렵지 않냐! 죽으면 경험치랑 아이템 떨어지는데, 그래도 괜찮아? 엉?! 그리고 맞아 죽는 게 수치스럽지도 않냐! 아프지도 않어?!”

Satisfy는 압도적인 기술력을 바탕으로 모든 감각을 현실과 똑같이 재현하고 있다.

통각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통각의 경우는 유저가 현실에서 느끼는 것보다 12배 이하의 수준으로밖에 재현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칼에 찔리면 바늘에 찔린 듯한 통증밖에 느끼지 못한다.

주먹에 맞으면 솜방망이에 맞는 듯한 통증을 느끼는 수준에 불과하다.

하지만 본래 사람은 술에 취하듯이 분위기에도 취하는 법이다.

맞을 때마다 생명력이 깎이는 것이 눈에 보이고 정신이 혼미해진다. 그리고 부가적으로 혈흔까지 튀기면 사람은 당연히 두려워지는 법이다.

Satisfy가 워낙에 현실과 똑같은 공간을 재현하는 탓에, 일부 유저들은 큰 피해를 입게 될 경우 심리적으로 나약해지면서 실제 같은 고통을 느끼게 된다.

이는 많은 유저들이 겪고 있는 현상이며 한때 사회 문제로 번진 적도 있다.

하지만 태권도 유단자인 최찬성의 정신력은 강인했다.

눈앞에 피가 난무하고, 목숨이 왔다 갔다 하면서 온갖 상태 이상에 걸린다고 해도 이곳은 게임 속 세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 신영우의 폭력을 굳이 두려워하지 않았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야말로 진정 수치스러운 행위지. 자, 죽여라. 때려 죽이든 삶아 죽이든 네 마음대로 해.”

“과연 막보(최종 보스)답군…….”

“내가 막보라고?”

최찬성은 이해할 수 없는 지칭 탓에 어리둥절했다. 그리고 신영우는 굉장히 동요하고 있었다.

‘제길, 이 자식이 이런 태도를 보이면 통쾌하지도 않고 복수하는 맛도 안 나잖아?’

한편, 최찬성과 대화를 나눈 직후 뼈 투구를 뒤집어쓴 미친놈의 기세가 한껏 꺾인 것을 확인한 이준호와 심기완은 슬그머니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리고 귓속말로 대화했다.

“야, 확신할 수는 없지만 말이야… 저 미친놈 왠지, 죽이려면 죽이라는 말을 듣고 나서 살인 욕구를 잃은 것처럼 보이지 않냐?”

“내 눈에도 그렇게 보여. 본래 사이코패스들은 특정한 무엇인가에 집착하는 경향이 강하다던데… 저놈도 그런 비슷한 거 때문에 저러는 거 아닐까?”

“그러니까 저놈은, 살려 달라고 말하면 죽이고 싶어 하고, 죽여 달라고 말하면 살려 주고 싶어 하는 사이코패스라는 거지?”

“아마도…….”

“좋아!”

눈빛을 교환한 두 사람이 동시에 소리쳤다.

“그래, 찬성이의 말이 맞다! 자, 죽여! 차라리 죽여라! 우리도 비굴하게 살아남고자 하느니 죽음을 택하겠다!”

“…….”

이제는 심지어 이준호와 심기완까지도 최찬성같이 굴자 신영우는 정말로 재미가 없어졌다. 그리고 깊은 생각에 빠졌다.

‘젠장, 이대로는 절대로 분이 안 풀리는데……. 저 새끼들을 진짜로 죽여 버릴까? 아니, 아니야. 플레이어 살인자가 됐다간 명성도 날아가고 바로 감옥살이를 하게 된단 말이다. 이런 빌어먹을! 염병!’

한참 후.

결국 신영우가 선택했다.

“에이, 썅. 난 간다. 니들 소원대로 그냥 뒈져라. 그 거미줄에 묶인 채 굶어 죽어 버려.”

그렇게 말을 남긴 신영우는 그대로 동굴을 떠나 버렸다. 정말로 깔끔한 작별이었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이준호와 심기완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우리가 바란 건 이게 아닌데?”

“크윽! 죽이라 그러면 안 죽일 거라는 우리의 생각은 맞았지만, 그렇다고 살려 준다는 보장도 없었던 거야!”

결국 모든 게 처음으로 돌아와 버렸다.

세 사람은 선택해야만 했다. 이대로 거미줄에 묶인 채 아무것도 못하다가 공복감을 이기지 못하고 굶어 죽든가, 아니면 로그아웃으로 자살을 택함으로써 시간 절약을 하든가.

어쨌든 죽는 수밖에 없다.

이준호가 치를 떨었다.

“제길! 어차피 죽게 될 거면서 그 미친놈한테 괜히 아쉬운 모습 보이고, 더군다나 얻어맞기만 했잖아! 빌어먹을 미친 새끼! 갑자기 왜 우리 앞에 나타나선 엿 같은 일을 당하게 한 거야!”

이준호와 심기완은 자신을 줘 팬 미친 투구 놈에게 살려 달라며 애걸복걸했었다.

특히 이준호는 살기 위해서 개처럼 왈왈 짖으려고까지 했다. 이는 평생 잊지 못할 수치스러운 기억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막 동굴에서 빠져나온 신영우는…

“근처에 거미 없나? 가능하면 생포해다가 이 동굴 안에다가 풀어 놔야겠다. 그 새끼들, 산 채로 거미한테 잡아먹히는 끔찍한 경험을 하도록 만들어 주겠어.”

신영우는 하늘이 내려 준 복수의 기회를 이대로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협곡 거미를 찾아 열심히 뛰어다녔다.

하지만 무슨 수로 협곡 거미를 생포하겠는가?

일대일로 싸우게 될 경우, 신영우가 협곡 거미를 쓰러뜨릴 가능성은 여전히 낮다.

근데 죽이는 것도 아니라 생포라니? 지금의 신영우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결국, 신영우는 밤이 깊어 올 때까지 거미 생포에 실패했고, 동굴 속 이준호 일행은 굶어 죽었다.

달빛 아래서, 보름달을 등지고 선 그리드는 마치 협곡의 모든 몬스터들을 잠에서 깨울 듯한 기세로 소리쳤다.

“놈들에게 잔인하게 복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다니! 이런 빌어먹으으으으으을!!”

완벽하게 복수하겠다는 일념 속에 거미를 찾아 헤맨 신영우!

그는 이 과정에 온갖 몬스터들을 사냥한 덕분에 어느새 레벨이 92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소란을 듣고 달려온 5마리의 협곡 늑대를 보고도 당황하지 않았다.

“컹컹! 컹!”

“닥쳐, 이 개새끼들아!”

“께겡!”

치열한 사투 끝에 5마리의 늑대들을 모조리 해치운 그리드는 그 누린내 나는 고기로 허기를 달랜 후 잠을 청했다.

“밤도 깊었으니 푹 쉬고… 퀘스트는 내일 마무리하자.”

이제 북쪽 벼랑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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