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33화 (29/1,794)

제5장

케산 협곡

휘이이이잉~~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은 곡벽들 사이를 누비는 바람이 날카롭다. 피부가 따가울 지경이다.

강줄기는 기세가 세차서 자칫 발을 잘못 디뎌 저곳에 빠지기라도 했다간 그대로 익사할 것만 같다.

지구상의 그 어느 곳보다 멋진 경관을 자랑하는 곳임은 틀림없지만, 이곳은 케산 협곡이다. 절대로 겉모습에 현혹되어선 안 된다. 이곳은 몇 번을 설명해도 부족함이 없을 만큼 위험천만한 장소다.

나는 곡벽들마다 빼곡하게 뚫려 있는 작은 동굴들을 살펴보면서 정신을 바짝 차렸다. 그리고 내가 이곳에 찾아온 이유를 다시 한 번 상기하기 위해서 퀘스트 정보를 불러왔다.

<파그마의 후예>

난이도:전직 퀘스트

당신은 파그마의 대장장이 기술을 확실히 전수받았다.

하지만 당신은 파그마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고 있는가? 진심으로 그의 의지를 이었다고 자부할 수 있는가?

파그마란 누구인가! 단순히 실력 좋은 대장장이에 불과했다면, 그와 관련된 무수한 전설들이 대륙 전역에 산재되어 있지는 않을 것이다.

우선은, 하늘을 꿰뚫었다는 파그마의 검무를 단서로 시작하여 파그마의 전설들을 쫓아라. 궁극에 이르러서 모든 전설을 수집할 수만 있다면, 당신은 진정으로 파그마를 이해하고 그 의지를 계승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순간 새로운 전설로서 탄생하게 되리라!

*전직 퀘스트는 제한 시간이 없습니다.

*레전드리 직업의 전직 퀘스트를 수락할 경우, 두 번 다시는 직업을 변경하실 수 없습니다.

*레전드리 직업의 전직 퀘스트는 그 결과에 따라서 Satisfy의 세계관을 변형시킬 수 있을 정도의 파급력을 지녔습니다.

전직 퀘스트 클리어 조건:모든 연계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완료하라.

전직 퀘스트 클리어 보상:알 수 없음.

*첫 번째 전직 퀘스트:<파그마의 검무>

130년 전 파그마의 검무를 직접 목격하였던 당사자가 나타나 당신에게 파그마의 검무에 대한 단서를 전해 주었다.

당신은 윈스톤 남부에 위치한 케산 협곡으로 향하여 북쪽 벼랑에 새겨진 파그마의 단서를 획득하라!

첫 번째 전직 퀘스트 클리어 조건:파그마의 검무를 익혀라.

첫 번째 전직 퀘스트 클리어 보상:다인슬레프(모작).

<다인슬레프(모작)>

등급:유니크

내구력:500/500 공격력:451~635 공격 속도:-8%

*대상의 현재 방어력의 10퍼센트에 해당하는 수치만큼 추가 피해.

*적의 숫자가 많을수록 공격력 증가.

*스킬 ‘금빛 섬광’ 생성.

아직 파그마가 등장하기 이전의 시대, 인류 최초로 ‘대장장이 장인’의 호칭을 얻었던 알바티노가 신화 속 무기인 다인슬레프를 재현하고자 만든 작품입니다.

결과적으로 다인슬레프에는 한참 못 미치는 작품이지만 다인슬레프의 특징 중 일부를 복원하는 것에는 성공하여, 다인슬레프 모작은 이미 그 자체로도 뛰어난 명품입니다.

에트날 왕국의 시조, 북방의 패왕 로란으로부터 ‘인류 역사상 최고의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았을 정도입니다.

전설의 대장장이 파그마도 이 작품에서 큰 영감을 얻었다고 전해집니다.

사용 조건:레벨 250 이상. 근력 1,800 이상. 고급 소드 마스터리.

무게:1,580

이상적인 단검이 +8 강화가 되면서 엄청나게 좋아졌다지만, 이상적인 단검의 레벨 제한은 180인 반면 다인슬레프의 레벨 제한은 250이다.

그러니 기본적인 성능은 다인슬레프가 이상적인 단검을 상회할 수밖에 없다.

거기다가 다인슬레프는 대검이다. 내가 전사 시절 주력으로 사용했던 무기가 대검이니만큼, 다인슬레프에 대한 소유욕은 여전히 건재하다.

무엇보다도 파그마의 검무를 한시라도 빨리 익히고 싶다.

“하늘도 꿰뚫었다고 전해지는 파그마의 검무……. 굉장한 공격 스킬인 게 분명해. 공격 스킬이 거의 없는 내게는 반드시 필요한 스킬이다.”

뚜렷한 목적의식을 갖게 된 나는 북쪽 벼랑을 찾기 위해서 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얼마나 걸었을까?

툭.

머리 위로 작은 돌멩이 하나가 떨어졌다.

“응?”

시선을 올려다보니, 곡벽 사이에서 흙먼지가 조용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나는 직감했다.

‘몹이다!’

그리고 역시나, 서서히 걷힌 흙먼지 사이로 동굴의 입구가 드러나더니 그 안에서부터 몬스터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공룡을 연상하게 만들 정도로 몸집이 거대한 도마뱀이었는데, 녀석이 날름거리는 혓바닥은 그 어떤 검보다도 날카로워 보였다.

나는 저 도마뱀의 정체를 알고 있다.

무려 162레벨을 자랑하는 협곡 도마뱀이다.

“이런 염병!”

지금의 나는 전사 시절 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강하다. 저 협곡 도마뱀과 어쩌면 정면에서 맞서 싸울 수도 있는 수준일 것이다.

하지만 본능이란 무서운 법!

나는 과거, 저 도마뱀의 칼날 같은 혓바닥에 심장이 꿰뚫려서 즉사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반사적으로 위축되어 도망치고 말았다.

그리고 곡벽을 타고 쏜살같이 내려온 협곡 도마뱀은 엄청난 속도로 나를 추적해 오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꺼져! 제발 꺼지라고!!”

나는 협곡 도마뱀에게 애원했다. 하지만 녀석은 자비라는 걸 베풀 줄 모르는 못난 놈이었다.

“키에에!!”

나를 따라잡은 것도 모자라서 어느새 내 앞으로 나타난 협곡 도마뱀이 몸을 옆으로 돌리면서 꼬리를 휘둘러 왔다.

콰앙!!

나는 도마뱀의 꼬리를 간신히 피했고, 나를 대신해서 도마뱀 꼬리에 얻어맞은 거대한 바위가 일격에 산산조각 났다.

바위의 파편에 머리를 얻어맞고 피를 본 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 도마뱀 새끼… 그래, 피할 수 없다면 싸워 주마! 대장장이의 분노! 칼바람!”

쿠콰콰콰쾅!!

날카로운 바람이 협곡 도마뱀에게 날아갔다. 한데 칼바람의 기세가 엄청나게 맹렬했다. 협곡 일대를 울릴 정도로 거대한 굉음을 토해 내며 쏘아진 칼바람이 협곡 도마뱀의 대가리에 강타한 순간, 녀석이 괴로움에 비명을 질렀다.

[대상에게 1,23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헐.”

협곡 도마뱀은 방어력보다 공격력과 민첩성이 발달한 몬스터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거지 방어력이 낮다는 뜻은 아니다.

아마 협곡 도마뱀의 방어력은 서릿빛 오크와 비등하거나 약간 더 높을 것이다.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바람이 협곡 도마뱀에게 입힌 피해량이 어마어마했다.

칼바람의 위력이 서릿빛 오크를 상대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강력해져 있다는 뜻이다.

하긴, 생각해 보면 당연한 현상이었다.

서릿빛 오크를 사냥했을 때 내 무기는 +0짜리였지만 지금은 무려 +8로 강화가 된 상태가 아닌가? 무기 공격력이 상승한 만큼 스킬의 공격력도 덩달아서 상승한 것이다.

“좋았어!”

나는 더 이상 눈앞의 거대한 도마뱀이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서릿빛 오크처럼 만만해 보였다.

“꺾을 수 없는 정의!”

[대상에게 12,507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키에에엑!!”

크리티컬이 터진 것도 아닌데 이 정도 데미지를 입히다니!

협곡 도마뱀이 아파 죽겠다는 듯이 몸을 뒤틀어 댔다. 하지만 무서운 자식, 그 와중에도 반격을 가해 온다.

퍼억!

[2,019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윽!”

시야의 사각에서부터 날아온 꼬리에 싸대기를 제대로 얻어맞은 나는 눈앞이 아찔해지고 말았다.

그나마 서릿빛 오크 족장의 투구와 칸의 역작 등의 유니크, 에픽급 방어구를 무장한 덕분에 이 정도 피해를 받는 것만으로 끝났지, 허접한 방어구를 무장한 상태였다면 막대한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칸, 고마워요.’

칸의 역작은 물리 공격으로부터 받는 피해를 20퍼센트 경감해 주는 옵션을 가지고 있다. 최소한 물리 공격에 대해서는 뛰어난 방어력을 자랑한다는 뜻이다.

나는 이 좋은 갑옷을 공짜로 선물해 준 칸에게 새삼 감사함을 느꼈다.

그리고 도마뱀의 칼날 같은 혀가 정확히 내 심장을 노리고 날아왔다.

나는 발끈했다.

“이 도마뱀 새끼! 예전에도 그 혓바닥으로 날 죽이더니 이번에도 또 똑같은 짓을 하려고 해?! 순순히 당할 것 같으냐, 이 새끼야! 신속한 몸놀림!”

신속한 몸놀림을 시전해서 대폭 상승한 민첩성과 회피율을 활용, 도마뱀의 혓바닥 공격을 어렵지 않게 피해 낸 나는 그대로 도마뱀의 턱 밑까지 접근했다. 그리고 점프를 해서 이상적인 단검을 녀석의 턱에다가 꽂아 넣었다.

[크리티컬!]

[이상적인 단검의 옵션 효과가 발동하여 대상이 즉사합니다.]

“쿠에… 에으으…….”

한때는 꿈에서조차 나타나 나를 괴롭혔던 협곡 도마뱀! 그 공포의 대상이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무기력하게 주저앉더니 급기야 회색빛으로 화해 버렸다.

[협곡 도마뱀을 해치웠습니다.]

[9골드를 획득하였습니다.]

[협곡 도마뱀의 혓바닥을 획득하였습니다.]

[329,000의 경험치를 획득하였습니다.]

“…허.”

나는 스스로에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나 엄청 세잖아?”

아무리 스탯이 높다고는 해도, 그리고 이상적인 단검의 옵션 효과가 발동해 준 덕분이라고는 해도 85레벨인 주제에 162레벨 몬스터를 이렇게 손쉽게 해치우다니!

“이게 바로 템빨의 위력인가!”

이래서 사람들이 현질까지 해 가면서 좋은 아이템을 구입하려고 안달 난 거구나!

“키오오오오!”

전투의 소란을 듣고 새로운 몬스터들이 등장했다.

이번 상대는 협곡 리자드맨 3마리였다.

숫자가 조금 많은 감이 있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애초에 도망쳐 봤자 놈들은 끝까지 쫓아올 테고, 그 과정에 새로운 몬스터들까지 출몰해서 더 많은 몬스터들에게 둘러싸이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길 수 있어. 나는 이길 수 있다!”

나는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 듯이 몇 번이나 되뇌었다.

그리고 언월도를 휘둘러 오는 리자드맨들의 공격을 신속한 몸놀림으로 회피, 대장장이의 분노를 사용한 후 마나 회복 물약을 복용, 꺾을 수 없는 정의를 시전했다.

콰아앙!

“키익!!”

리자드맨은 역시 만만치 않다. 녀석들 3마리는 내가 공격함과 동시에 방패를 들어서 내 공격을 막아 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를 온전히 흡수할 순 없었는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모습을 보고 더욱 큰 자신감을 얻은 나는 칼바람을 사용, 녀석들의 진형을 붕괴시켰다.

그리고 녀석들이 혼란스러워하는 틈을 노리고 난입해서 단검으로 직접적인 공격을 가했다.

푸푹! 푹!

이상적인 단검을 맴도는 푸른빛이 번쩍일 때마다 리자드맨들의 몸에는 상처가 늘어났다.

[대상에게 2,60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대상에게 2,83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최상의 건틀릿의 옵션 효과가 발동하여 대상을 2번 공격합니다.]

[대상에게 5,705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키야아아악!!”

협곡 리자드맨은 협곡 도마뱀과 같은 가죽을 가졌고, 그 위에 조잡하기는 해도 명색이 철갑옷까지 무장하고 있었다.

협곡 리자드맨의 방어력은 서릿빛 오크의 방어력을 월등히 상회한다고 단언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방어력이 무색하게도 녀석들은 내 단검에 베일 때마다 비명을 질러 댔다.

그리고 나는 신속한 몸놀림과 대장장이의 분노의 지속 시간이 끝나기 직전에 녀석들을 쓰러뜨리는 데 성공했다.

[협곡 리자드맨을 해치웠습니다.]

[협곡 리자드맨을 해치웠습니다.]

[협곡 리자드맨을 해치웠습니다.]

[11골드를 획득하였습니다.]

[9골드를 획득하였습니다.]

[12골드를 획득하였습니다.]

[손상된 사파이어를 획득하였습니다.]

[조잡한 언월도를 획득하였습니다.]

[316,000의 경험치를 획득하였습니다.]

[316,000의 경험치를 획득하였습니다.]

[316,000의 경험치를 획득하였습니다.]

“허억… 허억…….”

3마리의 리자드맨을 쓰러뜨리면서 내가 소모한 생명력은 3분의 2였다. 그리고 마나는 완전히 고갈됐다.

‘사용하는 스킬이라고는 4개밖에 없는데도 마나가 이렇게 부족하다니…….’

현재 내 마나 최대량은 500대에 불과하다. 그래서 마나의 회복 속도가 느린 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보유한 전투 스킬을 한 번씩 사용하면 마나가 거의 바닥이 났다.

나는 마나 회복 물약을 충분히 구비해 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며 자리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생명력과 마나가 완전히 회복되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몹 두 마리 정도만 더 잡으면 또 레벨 오르겠네.’

더 이상 협곡의 몬스터들이 두렵지 않았다. 어느새 협곡의 몬스터들도 서릿빛 오크들처럼 맛있는 경험치 덩어리들로 보였다.

하지만 예외의 몬스터가 하나 있었으니…….

타닥! 타닥! 타다닥!!

매우 기괴하고 불길한 발걸음 소리가 곡벽 위에서부터 빠르게 내려와 접근해 왔다.

나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고, 발걸음 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순간 오줌을 지릴 뻔했다.

15톤짜리 트럭 2대를 갖다 붙여 놓은 것보다도 거대한 몸집을 가진 새카만 거미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날 쏘아보고 있었다.

“혀, 협곡 거미!”

협곡 거미는 협곡의 몬스터들 중에서도 최상위 포식자에 속한다. 녀석의 레벨은 무려 180! 협곡 도마뱀이나 리자드맨들조차도 저 녀석의 거미줄에 걸리면 먹잇감으로 전락해 버릴 지경이다.

협곡의 몬스터들이 동굴에서 은둔 생활을 하는 이유는 저 협곡 거미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함이라는 추측이 있을 정도다.

그런 엄청난 놈이 하필이면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히, 히익…….”

과거, 협곡 거미에게 산 채로 잡아먹힌 사건이 트라우마가 되어서 지독한 거미 알레르기가 생긴 나는 협곡 거미를 마주하자 진이 빠지는 감각이 들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으면서 다리에 힘이 풀려서 제대로 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

“끼기긱…….”

협곡 거미는 괴이한 소리를 흘리면서 거미줄을 뽑아냈다. 그리고 그 거미줄을 타고 덩실덩실 내려와 내 코앞에 멈춰 섰다.

“으아아아아아악!!”

거대한 몸집에 비해 엄청나게 작은 협곡 거미의 대가리! 그 대가리가 바로 내 눈 앞에 멈춰 선 순간, 협곡 거미의 주둥이가 쩍 벌어지면서 날카로운 이빨들이 위협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저항하기 위해서 단검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하지만 눈먼 공격은 협곡 거미의 몸에 닿지 않았다. 거미줄에 매달린 채 몸을 흔들거리면서 내 공격을 가뿐히 회피한 협곡 거미가 나를 향해서 거미줄을 발사했다.

쐐애액~!

최초에는 고치 형태로 발사되었다가 공중에서 1초도 안 되는 시간 만에 직경 3미터 넓이로 펼쳐지는 거미줄!

저 거미줄에 옷깃이라도 닿았다가는 그대로 온몸이 칭칭 감겨 버리고 결국 난 협곡 거미의 먹잇감이 되고 만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나는 필사적으로 거미줄을 피하고 싶었지만 여전히 다리에 힘이 풀려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한데 그때!

[전설이 된 자는 쉽게 두려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때마침 파그마의 후예의 특성 효과가 발동되었고, 덕분에 거미 알레르기로부터 해방된 나는 아슬아슬하게 몸을 날려 거미줄을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 문득 보니, 나를 바라보는 거미의 표정이 마치 가소롭다고 말하는 듯했다.

그리고 녀석의 맹공이 펼쳐졌다.

슈욱! 슈욱!

연속적으로 쏘아지는 거미줄!

거미줄로 만들어진 그물망이 하늘 가득히 펼쳐진다.

“이런 빌어먹을!”

나는 거미줄을 피하고, 또 피했다. 그리고 부지런하게 피하던 도중 머잖아 한계를 느꼈다.

‘이 지긋지긋한 거미줄… 아무리 피해 봤자 계속해서 날려 대니까 의미가 없어. 이렇게 피하기만 하다간 지쳐서 아무것도 못하고 결국 당하고 말 거야.’

녀석이 쉽사리 거미줄을 발사하지 못하도록 제약할 필요성이 있다.

“칼바람!”

판단한 나는 협곡 거미의 거대한 몸통을 노리고 칼바람을 시전했다. 그러자 칼바람에 얻어맞은 거미가 거미줄에 매달린 채 허공에서 몇 차례 흔들거렸다. 하지만 실질적인 타격은 입지 않았다.

[대상에게 30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미친! 무슨 방어력이 저 모양이야?!”

+8 이상적인 단검으로 시전한 칼바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경미한 피해만 입는 협곡 거미!

협곡 거미의 방어력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서릿빛 오크와 협곡 도마뱀은 물론이고 서릿빛 오크 족장보다도 뛰어난 방어력이다.

협곡 거미의 레벨이 서릿빛 오크 족장보다 무려 40이나 높다고는 하지만, 서릿빛 오크 족장은 보스 몬스터고 협곡 거미는 일반 몬스터다. 한데 일반 몬스터가 보스 몬스터보다 방어력이 높다니…….

‘물론 체력은 서릿빛 오크 족장보다 월등히 낮을 테지만 무슨 소용이야? 방어력이 워낙에 높아서 체력이 닳지를 않는데.’

좌절하고 있노라니, 한 대 살짝 좀 긁혔다고 잔뜩 열 받은 협곡 거미가 오히려 더 빠르게 많은 거미줄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크! 신속한 몸놀림!”

일시적으로 상승한 회피율과 민첩성!

나는 신속한 몸놀림의 지속 시간이 이어지는 동안 계속해서 날아오는 거미줄들을 어찌어찌 간신히 피했다.

그러는 와중에 기다리고 있던 칼바람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끝났다.

“대장장이의 분노! 칼바람!”

퍼엉!

협곡 거미는 굉장히 거대했기 때문에 조준하기가 매우 쉬웠다. 대장장이의 분노로 강화된 칼바람은 어렵지 않게 협곡 거미의 불룩 튀어나온 배때기에 명중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협곡 거미는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았다.

[대상에게 344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아니, 무슨 방어력이 저 모양이냐고! 개사기잖아!”

“키야아!”

나는 또다시 날아오기 시작하는 거미줄들을 회피하면서도 쉴 틈 없이 머리를 회전시켰다.

‘칼바람만으로는 놈에게 대적할 수가 없어. 꺾을 수 없는 정의라면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 것 같기도 한데…….’

본래 칼바람은 시전자의 공격력의 60퍼센트를 발휘하는 스킬이다. 하지만 난 이상적인 단검의 사용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옵션 효과가 절반만 적용되는 페널티를 당하고 있다. 즉, 내가 사용하는 칼바람은 내 공격력의 30퍼센트 공격력만 발휘한다는 뜻이다.

반면 꺾을 수 없는 정의는 300퍼센트의 공격력을 온전히 발휘한다. 제아무리 협곡 거미라도 꺾을 수 없는 정의에 가격당하면 멀쩡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칼바람은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반면 꺾을 수 없는 정의는 직접 타격 스킬이다. 내가 협곡 거미에게 접근하지 못한다면 사용할 수조차 없다. 그리고 지금 나는 협곡 거미에게 접근하는 게 불가능하다.

‘이대로는 안 돼. 저 거미 놈에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해 보지만, 하늘을 완전히 뒤덮고 있는 거미줄을 보자 부질없어 보였다.

‘거미줄 때문에 접근은 불가능하다. 그럼 나는……?’

이대로 뒈지는 건가? 산 채로 씹어 먹히는 무시무시한 체험을 또 한 번 해야 한다는 말인가!

“이런 씨부럴……. 어?”

나는 문득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가능한 콤보인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도전해 볼 만한 가치는 충분해!”

Satisfy의 자유도는 엄청나게 높다. 그리고 그 자유도는 스킬에도 적용된다. 유저들은 자신이 보유한 스킬들을 어떤 방법으로 사용하느냐, 혹은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효과를 발휘하는 게 가능하다.

나는 그 점에 걸어 보았다. 그리고 칼바람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끝났음을 확인한 순간!

이제는 패턴을 어느 정도 파악해서 피하는 것에 익숙해져 버린 거미줄을 회피하고, 여태까지처럼 정확히 협곡 거미를 노리고 칼바람을 사용했다.

그리고!

“꺾을 수 없는 정의!!”

내가 꺾을 수 없는 정의를 사용한 대상! 그것은 다름 아닌 갓 생성된 칼바람이었다.

키이이이잉!!

칼바람에 꺾을 수 없는 정의의 기운이 충돌한다. 그러자 칼바람과 꺾을 수 없는 정의의 기운이 나의 바람대로 하나로 합쳐지면서 알림창이 떠올랐다.

[새로운 스킬 융합에 성공하였습니다.]

[융합 스킬 ‘정의의 바람’이 생성되었습니다.]

[새로운 스킬 융합에 성공하여 지력이 10 상승합니다.]

<정의의 바람>

칼바람에 꺾을 수 없는 정의의 힘이 깃들었습니다.

최대 6미터 거리의 대상에게 공격력 320퍼센트의 광역 피해를 입힙니다.

스킬 피해 범위:대상의 반경 2미터

스킬 마나 소모:400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100초

스킬 사용 조건:이상적인 단검

쿠콰콰콰콰콰쾅!!

아직은 지극히 적은 NPC들밖에 오르지 못한 경지!

바로 소드 마스터의 오러를 연상하게 만드는, 짙은 푸른색의 검기가 소용돌이치며 날아가 협곡 거미를 습격했다.

“키에?”

칼바람이 날아올 때는 피할 생각도 않던 협곡 거미가 경계하면서 황급히 거미줄을 타고 위로 올라갔다. 하지만 거미가 거미줄을 만나 봤자 바람보다 빠를 순 없는 법!

퍼어어엉!!

“키야아아아아악!!”

협곡 거미의 뚱뚱한 배에 정의의 바람이 정확하게 꽂혔고, 협곡 거미는 입에서 노란 액체를 토해 내면서 거미줄에서 떨어져 내려왔다.

쿠와아아앙!!

지면에 거대한 균열을 일으키면서 추락한 협곡 거미!

녀석은 뚱뚱한 배 탓에 몸을 일으키지 못한 채 누워서 허우적거렸고, 나는 지금이야말로 녀석을 해치울 기회라는 걸 확신했다. 그리고 마나 회복 물약을 마셨다.

“대장장이의 분노! 신속한 몸놀림!”

공격력과 공격 속도, 회피율과 민첩성을 단번에 끌어 올린 나는 전력으로 협곡 거미에게 돌진했다. 그리고 여전히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누운 채 발버둥 치면서도 거미줄을 사방에 쏘아 대며 저항하는 협곡 거미의 가슴 위로 올라갔다.

그 과정에서 날카로운 8개의 다리가 휘둘러지며 나를 몇 번이나 위협했지만, 나는 신속한 몸놀림의 도움 덕분에 어깨와 허벅지를 살짝 베이는 정도의 상처만 입었다.

“지금이야말로……!”

나는 허공에 의미 없이 뿌려지는 거미줄과 꿈틀거리는 8개의 다리들을 비웃어 주면서 이상적인 단검을 협곡 거미의 가슴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

푸욱!

협곡 거미의 등과 배, 대가리와 다리는 모두 두꺼운 껍질로 뒤덮여 있다. 하지만 가슴만큼은 껍질이 아니라 털로 덮여 있을 뿐이다. 즉, 협곡 거미의 가슴은 다른 부위와 달리 압도적인 방어력을 자랑하지 못한단 뜻이다.

[대상에게 2,88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최상의 건틀릿의 옵션 효과가 발동하여 대상을 2번 공격합니다.]

[대상에게 6,04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키에에에에엑!!”

협곡 거미의 끔찍한 비명 소리가 케산 협곡 가득히 울려 퍼진다.

그래, 지금이야말로……!

“진정한… 진정한 복수의 시간이다! 크하하하하핫!!”

과거, 이 케산 협곡의 몬스터들에게 얼마나 많은 수모를 당했던가! 혓바닥에 찔려서 죽고, 꼬리에 맞아서 죽고, 박치기를 당해서 죽고, 눈을 마주친 것만으로도 압도당해서 기절했다가 밟혀 죽고, 심지어 잡아먹히기까지 했다.

이곳에서 잃은 아이템과 경험치는 내 멘탈을 박살 낸 것도 모자라 갈기갈기 찢어 버렸었다. 거미 알레르기까지 생겨서 눈곱만 한 거미를 보고도 기겁하게 됐다.

하지만 협곡의 몬스터들이 워낙에 강했기 때문에 나는 감히 복수를 꿈꿀 수조차 없을 정도로 무력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다르다. 확연히 다르다!

“이제는 너희들이 나를 두려워할 차례다!”

푸우우욱!!

“키야아아아악~!”

[협곡 거미를 해치웠습니다.]

[18골드를 획득하였습니다.]

[협곡 거미의 다리를 획득하였습니다.]

[협곡 거미의 퇴화된 눈알을 획득하였습니다.]

[협곡 거미의 거미줄을 획득하였습니다.]

[경험치 387,500을 획득하였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이 순간 나는 거미 알레르기와 영원히 작별하게 되었다.

한편, 장발의 사내가 높은 벼랑 위에 올라선 채 그리드를 주시하고 있었다.

“혼자서 협곡 거미를 해치우는 사람은 오래간만에 보는군. 아직은 많이 부족한 실력이지만, 저 급격한 성장 속도를 감안해 보면…….”

거미줄을 잃고 지면에 추락한 협곡 거미. 녀석은 하필이면 등부터 떨어진 바람에 균형을 잡지 못했고, 새로운 거미줄을 발사해서 접착시킬 만한 지형이 가까운 곳에 없던 터라 무력하게 당한 감이 컸다.

만약 협곡 거미가 배부터 떨어졌다면, 그리고 새로운 거미줄을 발사해서 접착시킬 만한 지형이 가까운 곳에 있었다면, 협곡 거미는 즉시 몸을 다시 일으켜서 그리드에게 제대로 반격을 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즉, 그리드가 협곡 거미를 해치운 것은 운이 크게 작용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사내는 그 사실을 알고서도 그리드를 높이 평가했다.

“몬스터를 한 마리 해치울 때마다 실력이 성장하는 게 눈에 보일 지경이다. 그 잠재력은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 내 복수의 대행자로 선택하기에 적합한 인물일 듯하군.”

바람에 장발을 흩날리며 팔짱 끼고 선 채 계속해서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는 이 사내의 이름은 피아로!

한때 사하란 제국 최강의 기사였던 인물이다.

본래 적기사단의 단장이었던 그가 배신자라는 누명을 쓰고 케산 협곡에 은둔한 지 수년…….

“아스모펠… 네놈에게 잔혹한 죽음을 선사해 주마!”

대륙 전체에 피아로의 추적자들이 산재해 있는 상태다. 하여 피아로는 이곳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고, 자신을 대신해서 자신과 동료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앗아 간 아스모펠을 처단해 줄 인물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그때 마침 나타난 그리드야말로 자신이 원하던 인물이라고 피아로는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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