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28화 (24/1,794)

제9장

새로운 서막

그리드와의 거래를 끝낸 행정관은 아이린과 귀족들이 기다리고 있는 회의장으로 돌아가서 거래 내용을 보고했다.

검 한 자루를 무려 22만 골드에 구매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자리의 누구 하나 동요하지 않았다.

충분한 가치가 있는 지출이었기 때문이다.

“이 검을 야탄 신전 토벌대 대장의 증표로서 피닉스 경께 하사하겠어요.”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아이린이 피닉스에게 무아지경의 검을 전달했다.

무릎 꿇고 고개를 조아린 채 공손히 검을 받은 피닉스가 결의를 다졌다.

“신 피닉스, 북부와 스테임 백작 가문의 영광을 위하여 반드시 전투에서 승리해 돌아오겠나이다.”

피닉스가 무아지경의 검을 장착했다.

<무아지경의 검>

등급:레전드리

내구력:365/365 공격력:356 공격 속도:+6% 명중률:+10% 공격 방어율:+10%

*매 공격 시 대상의 레벨 +200의 추가 피해.

*스킬 ‘무아의 경지’ 생성.

대단한 실력과 잠재력을 지녔지만 경험과 명성은 턱없이 부족한 이름 모를 장인이, 모든 욕망과 잡념을 버리고 오로지 기술만으로 승부하여 제작한 검입니다.

장인은 본인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세상에 둘도 없는 검을 완성시켰습니다.

사용 조건:레벨 160 이상. 근력 950 이상. 고급 소드 마스터리 2레벨.

무게:400

<무아의 경지>

2분 동안 모든 스탯이 2배 상승하며 모든 종류의 상태 이상에 저항합니다.

*스킬의 지속 시간 동안 자아를 통제할 수 없습니다.

*스킬의 지속 시간이 끝난 후, 2초 동안 움직일 수 없으며 방어력과 마법 저항력이 30퍼센트 하락합니다.

스킬 마나 소모:1,000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3,000초

“출병하세요! 일곱 종의 머리를 전리품으로 가지고 귀환하세요!”

“예!”

아이린의 명령을 받든 피닉스가 12명의 기사와 1천5백의 병사를 이끌어 야탄의 신전으로 진격했다.

그에 반해 야탄의 신전에 머물고 있는 신도들의 숫자는 고작 150여 명 내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방심하지 않았다.

야탄의 신도들은 최소 레벨이 160인 반면, 병사들의 최소 레벨은 50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실력 차는 명백하다. 그리고 적들 중에는 7명의 종 중 하나까지 있다.

승리하기 위해서는 수적 우세가 기본이었고, 거기에 뛰어난 전략과 전술을 덧씌워야만 했다.

저 멀리 야탄의 신전이 시야에 들어오는 것을 확인한 피닉스가 기사들과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조금도 위축되지 마라! 너희들의 앞에는 바로 나! 북부 최강의 기사, 피닉스가 있다!! 이 손으로 일곱 종의 목을 따 주겠다!! 너희들은 그저 나만 믿고 뒤따르면 된다!! 그리고 승리를 쟁취하면 된다!!!”

“우오오오오!!!”

거대한 함성 소리가 메아리쳤다.

그 소리는 야탄의 신전에까지 전해질 정도였다.

“이교도들입니다!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 놈들이 위대한 야탄 신의 신성한 공간을 더럽히려 진격해 오고 있습니다!”

동요한 신도들이 다급히 외친다.

신전의 지붕 위편에 솟아 있는 벼랑 끝에서, 스테임 백작 가문의 깃발을 위시한 대군을 관찰하고 있던 유라가 나지막이 명령했다.

“당신들은 고지를 점령하세요. 그리고 궁병이 쏘아 오는 화살에 주의하면서 지상의 적들에게 모든 마법을 쏟아부으세요.”

“유라 님께서는……?”

신전의 책임자가 걱정 어린 시선을 보냈다.

그에게 유라가 차가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는 지상으로 내려갈 겁니다. 그리고 저들이 당신들에게 한 발자국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설 겁니다.”

야탄교가 악하다는 사실쯤은 유라도 알고 있다.

온갖 악질적인 퀘스트를 수행하면서 숱한 회의감을 느껴 왔다.

특히 7명의 종은 증오감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사악한 존재들이었다.

하나 이미 택한 길이다. 이곳은 현실이 아닌 Satisfy다. 아그너스나 카츠처럼 히든 직업 전직서라도 얻지 않는 한 되돌아가는 길(직업 변경)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랭커의 자리를 포기할 게 아니라면 순응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이미 핏빛 마녀라는 오명에도 익숙해져 있는바, 유라는 또 한 번 찾아온 살육의 시간을 맞이하기 위해서 몸을 날렸다.

타앗.

저 높은 벼랑 위에서 뛰어내렸다고는 믿기지 않게 깃털처럼 가볍게 착지한 유라는 거침없이 질주해 오고 있던 적의 대군을 홀로 막아섰다.

유라를 발견하고 군대를 멈춰 세운 피닉스가 소리쳤다.

“사이한 기운이 흘러넘치는구나! 그대는 필시 일곱 종 중 한 명일 터! 금일 내 손으로 그대의 추악한 악명을 막 내려 주겠노라!”

피닉스의 착각이다. 유라는 일곱 종 중 하나가 아니다. 새롭게 탄생할 여덟 번째 종의 후보일 뿐이다.

아직 일곱 종에는 한참 못 미치는 힘을 지닌 유라에게 있어서 피닉스와 그의 대군은 필시 부담스러운 강적이었다.

하지만 유라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현재 이곳에 고립되어 있는 야탄의 신도들은 총 143명. 퀘스트 클리어를 위해서 이들을 반드시 구원할 각오였다.

그리고 일곱 종은 여덟 종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위대하신 암흑의 신이시여, 당신의 미천한 종이 청합니다. 이곳을 어둠으로 물드십사 저들의 마음에 두려움을 심어 주시고, 저들이 당신을 경배할 수 있도록 당신의 권능을 보여 주소서.”

일대가 어둠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하늘 위에 찬란한 태양이 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밤보다 더 새카맣게 변했다.

그에 1천5백 대군이 혼란과 공포에 빠졌고, 유라는 그들을 향해서 일말의 자비 없는 힘을 과시했다.

“다크 스톰!!”

쿠콰콰콰콰쾅!!

거대한 칠흑의 폭풍이 거칠게 휘몰아치며 대군을 집어삼켰다.

유라는 저들 중 4분의 1 이상이 죽거나 중상을 입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재차 공격을 가하기 위해서 주문을 외우려다가 멈췄다.

“……!”

말도 안 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기사 피닉스가 칠흑의 폭풍을 꿰뚫고 나와서는 단숨에 유라의 앞까지 말을 달려온 것이다. 유라는 급히 방어 마법을 시전했다.

까아아앙!!

아름다운 빛을 흩뿌리며 펼쳐진 다이아몬드 장벽 위로 말의 돌진력이 가해진 피닉스의 묵직한 일격이 충돌했다.

특히 물리 공격에 대해서 압도적인 방어력을 발휘하는 다이아몬드 장벽!

그 장벽과 정면으로 검을 맞댄 피닉스가 소리쳤다.

“병사들에게 손댈 생각 따위 마라! 너의 상대는 오로지 나다!! 무아의 경지!!!”

쿠와아아앙!!

피닉스의 전신으로부터 보라색의 강맹한 기운이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끼기기기긱!!

“무슨……?”

피닉스의 검이 다이아몬드 장벽에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상대가 설사 보스 몬스터라고 할지라도 물리 공격에 한해서만큼은 꿋꿋하게 버텨 주었던 다이아몬드 장벽이 아니던가! 한데 한낱 기사의 일격 따위에 이런 꼴을 당하다니?

쩌억!!

급기야 반으로 갈라져 버린 다이아몬드 장벽!

빛을 흩뿌리며 소멸하는 다이아몬드 장벽 사이로 발을 들인 피닉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공격해 왔다.

“나락!”

단일 대상을 공포에 빠뜨리는 흑마법의 주문을 이미 외워 두고 있던 유라가 마법을 시전했다.

사아아아아!

칠흑의 가루가 피닉스의 전신을 휘감고 지나갔다.

그는 곧 공포에 빠져서 절망하며 무방비 상태가 되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피닉스는 멀쩡했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유라에게 공격을 가했다.

한시적으로 모든 능력치를 2배 상승시킴과 동시에 모든 상태 이상으로부터 저항하는 스킬, 무아의 경지가 유라를 대위기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유라는 자신의 마법에 완벽하게 저항하는 피닉스를 보면서 누군가를 떠올렸다.

‘그리드……?’

아이러니한 일이다.

과거 유라는 그리드의 S급 퀘스트를 방해하고 결국 실패로 몰아넣었던 장본인이다.

한데 지금은 그녀가 그리드가 만든 검에 의해서 퀘스트를 방해받고 있었다.

서걱!

다이아몬드 장벽의 주문을 채 완성하기도 전에 날아온 일격에 어깨를 크게 베인 유라가 나지막한 신음을 흘린 뒤 속삭였다.

“암흑화.”

정확히 17일 전.

유라의 신앙심 수치가 10만을 달성하였을 때 그녀의 귓가로 야탄 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의 권능으로 그대에게 새로운 힘을 내려 줄지니 원하는 힘이 있다면 기도하라고.

그에 유라는 기도했다.

흑마법이 통하지 않는 존재에게 대항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그리드를 만났던 경험이 있었던 덕분에 떠올릴 수 있었던, 전혀 새로운 형태의 힘!

그 힘이 지금 발동한다.

***

나는 창고에 보관해 두고 있던 마몬의 대검과 멩겔의 플레이트 아머를 비롯해 모든 잡템들을 처분했다. 그로 인해 전 재산이 24만 23골드가량 되었다.

나는 이 중 22만 골드를 아이템 거래 사이트에 등록해서 유저들에게 현금으로 판매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치가 떨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아이템 거래 사이트가 거래 수수료로 5퍼센트를 떼어 간 것이다.

5퍼센트 별거 아니지 않냐고?

웃기는 소리! 2억 6천4백만 원의 5퍼센트에 해당하는 금액은 무려 1,320만 원이다!

내가 온갖 스트레스를 감내하며 피땀 흘려서 번 돈을, 거래 사이트 임직원 놈들은 자리에 앉아 콧구멍이나 후비적거리면서 갈취해 간 거다!

“남의 등 처먹는 방법도 참 여러 가지다.”

욕은 나온다만 솔직히 존경스럽다.

나도 머리가 아주 조금만 더 좋았더라면 남의 등 처먹는 삶을 살 수 있었을 텐데…….

어쨌든 나는, 2억 5,080만 원 중에서 1천만 원을 엄마 마음 행복 금융에 던져 주고, 나머지 2억 4,080만 원이 들어 있는 통장을 아버지께 전해 드렸다.

통장을 확인한 부모님께서는 여전히 믿지 못하는 눈치셨다.

“이거… 혹시 가짜 통장 아니니?”

조심스럽게 의심하시는 어머니!

“너 이상한 일에 손댄 거 아니냐?”

대놓고 의심하시는 아버지!

“오빠… 혹시 장기 매매한 거 아니야? 웃통 좀 벗어 봐. 수술 자국 없나 확인해 보게.”

이상한 생각을 하는 세희!

이 지경에 이르러서까지 나를 믿지 못하다니!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하지만 가족들의 이와 같은 반응이 이해는 간다.

기껏 아쉬울 것 없이 키워 주고 대학까지 보내 놨더니, 26살 먹을 동안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방구석에 틀어박혀 게임만 하다가 빚까지 진 못난 아들이다.

그런 아들이 갑자기 어느 날 이런 거금이 들어 있는 통장을 들고 왔으니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도통 믿을 수가 없을 것이다.

잠시 후, 결국 현실을 인정한 가족들이 입을 열었다.

“어떤 분야에서든 이만큼 큰돈을 벌 수 있으려면 그만큼 최고가 되어야 하는 법이지. 네가 지난 1년 동안 게임을 하면서 시간을 헛되이 쓰지 않고 정말 열심히 게임을 했나 보구나. 그래, 뭐든지 하나만 잘만 하면 되는 세상……. 이제야 네가 적성을 찾은 것 같으니 애비 마음도 조금은 놓인다.”

“얘, 얘, 영우야, 방금 엄마가 엄마 친구랑 통화를 했는데, 엄마 친구 아들한테 네 얘길 해 줬더니 아주 난리가 났다더라. Satisfy로 돈을 그만큼 벌 정도면 네가 엄청난 랭커?일 거라고. 어쩌면 조만간 TV에도 출연할 듯하다던데 사실이니? 응? 내 아들이 TV에 나오는 거야?”

“오빠한테도 재주가 하나쯤은 있었네……. 흐응~ 뭐, 대단하다고 봐. Satisfy에 대한 정보는 나도 언론 매체를 통해서 항시 접하고 있기 때문에 Satisfy를 플레이해서 거액을 벌 수 있는 사람은 20억 명 중에서도 극소수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 오빠는 20억 명 중에서도 자신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걸 증명한 셈이니까… 뭐, 내 오빠로서의 자격이 어느 정도는 있네.”

나를 바라보는 가족들의 시선이 어느 정도 변했음이 느껴진다.

그전에는 가족들 모두 ‘어휴, 저 웬수’라는 뜻이 담겨 있는 일관된 시선들로 나를 쳐다봤다면, 지금은 ‘저게 내 아들이 맞긴 맞나 보구나’, ‘어느 정도 오빠 대접 해 줘도 되겠네’라는 뜻이 담긴 시선으로 쳐다봤다.

‘뿌듯하군……. 후후훗.’

실실거리고 있노라니 세희가 흥을 깨뜨렸다.

“웃지 마. 기분 나빠.”

“…….”

그 후, 우리 가족들은 내가 벌어 온 돈 덕분에 당장의 큰 위기를 모면하게 됐다. 돈 떼먹고 도망친 아버지 친구가 연체시켜 놨던 이자부터 상환한 덕분에 당장 재산이 압류당하는 최악의 사태만큼은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흥흥흥~”

이틀째 울상을 짓고 계시던 어머니가 오래간만에 밝은 표정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세희도 덩달아 기분이 좋은지 엄마 손을 꼭 잡고 함께 어울렸다.

앞서 걷는 모녀의 흐뭇한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아버지와 나란히 걷고 있는 도중,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못난 애비가 아들놈에게 신세를 졌구나. 미안하다.”

“아니, 신세라뇨? 아들한테 그게 할 소리세요?”

“…인마, 이건 가장으로서의 자존심 문제야.”

“…….”

왠지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조용히 입을 닫는 내 어깨 위로 아버지께서 팔을 걸쳐 올리셨다.

“급한 불은 껐으니 앞으로는 걱정 마라. 아빠랑 엄마가 열심히 일해서 남은 빚 따위 3년 내로 갚아 주마. 그리고 너한테 빌린 2억 4천만 원도 반드시 갚겠다. 아빠랑 엄마한테 그 정도 능력은 충분히 남아 있어. 그러니까 넌 더 이상 걱정하지 말고 앞으로 네가 할 일에만 신경 써라. 나이 스물여섯이면 가장 중요한 시기다. 확실한 길을 정하고 매사 최선을 다해야만 해. 네가 걷기로 결정한 길은 게임의 세계이니… 그곳에서 최고가 되도록 노력해라. 아빠도 응원하마.”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시지만, 남아 있는 6억여 원의 빚은 부모님 두 분께서 일해 갚아 나가기엔 너무 부담스러운 액수다.

아버지가 싫다 하셔도 나는 반드시 아버지를 도울 거다.

이게 자식 된 도리이고, 그간 속만 썩였던 못난 아들의 뒤늦은 속죄다.

하지만 그 전에 짚고 넘어갈 건 짚고 넘어가자.

“아버지, 제가 오늘 아버지께 드린 돈은 2억 4천만 원이 아니라 2억 4,080만 원이에요. 은근슬쩍 80만 원 잊지 마세요.”

“…….”

하늘이 푸르다.

내 마음도 푸르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던 나라는 놈이 레전드리 직업을 얻고 레전드리 아이템을 제작함으로써 가족들에게 의지되는 존재로 변모해 가고 있다.

나라는 인간 자체가 한층 더 성장한 듯한 감각이 느껴지면서 충만감에 가득 찼다.

…빚쟁이 신분이라는 점만큼은 변치 않았지만.

‘올해도 동창회는 포기해야겠네.’

윈스톤의 분위기가 흉흉했다.

“들었는가? 야탄의 신전 토벌대가 이번에도 패배했다고 하더군. 피닉스 단장님께서 중상을 입으셨다 하던데…….”

“아니? 피닉스 단장님이라 하면 북부 최강의 기사가 아닌가! 그분께서 친히 군을 이끌고 출병하셨음에도 패배했단 말인가?!”

“상대가 소문의 일곱 종 중 하나였다고 하네.”

“뭐, 뭐라고? 그러면 윈스톤은 일곱 중의 노여움을 사게 된 건가? 앞으로 윈스톤은 어떻게 되는 거지?”

“아아… 메로 상단과 전 영주의 악행에서 벗어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이런 시련이…….”

얼마 전, 윈스톤 교외에서 야탄의 신전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영주 아이린이 신전을 토벌하기 위해서 벌써 3번째 군대를 파견했지만 아무래도 3번 다 실패한 듯하다.

상대는 우는 아이도 그치게 만들 정도로 악명 높은 일곱 명의 종 중 하나라고 하는데… 솔직히 나는 별 관심 없다.

“나랑은 관계없는 세상의 이야기니까.”

나는 불안에 떨고 있는 주민들을 뒤로하고 칸의 대장간에 입장했다.

그리고 장사 밑천으로 남겨 두었던 2만 골드를 깨작깨작 만져 보면서 앞으로의 방침에 대해서 생각했다.

‘사용 조건이 높은 아이템일수록 높은 등급으로 완성될 경우 큰 이윤을 얻게 되고, 낮은 등급으로 완성될 경우 큰 손해를 입게 된다.’

전설적 대장장이의 기술 스킬과 대장장이의 숨결 스킬 덕분에 제작 아이템의 능력치를 총 19퍼센트 상승시키는 나의 능력일지라도, 160레벨 제한 아이템부터는 노멀로 만들게 될 경우 재료값도 못 뽑게 된다.

즉, 사용 조건이 높은 아이템을 만든다고 해서 무조건 돈을 잘 벌게 된다는 뜻이 아니다.

‘아이템이 설령 노멀 등급으로 완성된다고 하더라도 손해 보지 않는 레벨대의 아이템을 만드는 게 좋겠어.’

아이템을 만들면 거의 대부분 노멀 등급이 뜨는 게 현실이었다.

나는 그 부분을 감안해서, 노멀 등급으로 만들어지더라도 딱 본전만큼은 뽑을 수 있는 140레벨 제한의 아이템들을 주력 상품으로 삼아 제작하기로 결정했다.

‘빚 다 갚으려면 빨리빨리 일하자.’

6억 원에 육박하는 빚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월 수백만 원의 이자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일해야만 한다.

나는 작업을 시작하기에 앞서 상태창부터 확인했다.

이름:그리드

레벨:45 (3,400/238,000)

직업:파그마의 후예

*아이템 제작 시 추가 옵션을 더하는 확률이 상승합니다.

*아이템 강화 확률이 상승합니다.

*모든 장비 아이템을 조건 없이 착용할 수 있습니다. 단, 아이템 등급에 따른 페널티가 발생합니다.

칭호:전설이 된 자

*상태 이상에 잘 걸리지 않습니다.

*생명력이 최소치일 때 잘 죽지 않습니다.

*쉽게 인정받습니다.

칭호:최초의 유니크 아이템 제작자

*손재주 +200

칭호:유일한 레전드리 아이템 제작자

*손재주 +350

칭호:나이트 슬레이어

*체력 +100

*근력 +30

칭호:정의의 사도

*모든 능력치 +10

*정의의 사도는 용맹무쌍합니다.

생명력:5,682/5,682 마나:504/504

근력:393 체력:411 민첩:195 지력:168

손재주:838 끈기:190

평정:143 불굴:162 위엄:143 통찰력:143

용기:87

능력치 포인트:0

무게:842/11,660

각종 레어템과 에픽템, 그리고 레전드리템을 만든 대가로 내 모든 스탯은 비약적으로 상승해 있었다. 특히 손재주와 끈기 스탯은 아이템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자연 성장했기 때문에 독보적으로 큰 폭으로 상승했다.

80레벨 전사 시절의 스탯을 뛰어넘은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다 보니, 나는 솔직히 당장이라도 사냥터로 뛰쳐나가고 싶었다.

‘이 정도 스탯에다가 이상적인 단검이면… 방어구 몇 개 대충 만들어서 걸쳐 입으면 100레벨 몬스터도 쉽게 사냥할 수 있겠네.’

호쾌하게 검을 휘두르며 몬스터들을 베어 넘긴다. 그때마다 아이템과 경험치를 획득하고, 급기야 레벨을 올린다.

사냥을 통해서 레벨을 올릴 때 비로소 느낄 수 있는 짜릿한 쾌감!

그 감각을 잊고 산 지가 벌써 몇 달째란 말인가!

‘…잡생각은 관두자. 돈부터 벌어야지.’

나는 근질거리는 손에 검 대신 제작용 망치를 장착했다.

벌써 몇 달째 사용해서 낡아빠지고 볼품없는 제작용 망치!

‘내구력 떨어지는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졌어……. 흠, 차라리 새로 만들어 볼까?’

제작용 망치의 제작법은 따로 습득하고 있지 않지만, 이렇게 간단한 구조의 아이템쯤은 내 개인 역량으로 충분히 만들 수 있다.

나는 새로운 제작용 망치를 만들기 위해서 강철의 제련에 돌입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칸이 물었다.

“이번엔 어떤 작품을 만들려고 하는 겐가?”

“망치요.”

“응?”

“제작용 망치요.”

“허……? 설마 자네가 쓸 것?”

“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칸이 의아해했다.

“자네가 지난 몇 달 동안 그 허접한 망치만 사용하기에, 나는 그 망치에 뭔가 특별한 사연이라도 담겨 있는 줄 알았는데……?”

“사연요? 그런 거 없는데요? 제가 가진 망치가 이것 하나뿐이라 그냥 이것만 사용했던 거지 특별한 의미는 없어요.”

“아니, 그럼 진작 새로운 망치를 제작하지 그랬는가!”

“아오, 깜짝이야! 왜 갑자기 흥분해서 소리를 지르고 그래요!”

칸이 설파했다.

“무구를 제작할 때 가장 중요한 네 가지는 첫째! 뛰어난 기술! 둘째! 엄선된 재료! 셋째! 인내와 정성! 넷째! 성능 좋은 제작용 망치일세! 한데 자네는 그간 아무런 의미도 없이 그딴 허접쓰레기 같은 망치를 사용해 왔단 말인가! 에잉, 어처구니가 없구먼!!”

“…뭐라고요?”

나는 내가 사용해 온 제작용 망치의 상세 정보를 불러 왔다.

<대장장이의 망치>

내구력:50/70 공격력:18~25

대장장이가 아이템을 제작할 때 사용하는 망치입니다만 흉기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사용 조건:없음.

무게:60

바이란 마을에서부터 사용해 온 이 망치에는 아무런 특징이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모든 제작용 망치가 당연히 이와 똑같을 거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칸의 반응을 보아하니 내 착각이었나 보다.

나는 칸이 평소에 사용하던 제작용 망치를 감정해 보았다.

“전설적 대장장이의 감정.”

[전설이 된 대장장이가 범인을 초월하는 뛰어난 안목으로 물품을 감정합니다. 대상 물품에 숨겨진 기능이 존재할 경우 숨겨진 기능을 발견합니다.]

<탁월한 대장장이 망치>

등급:레어

내구력:166/250 공격력:40~50

레어 등급 아이템 제작 확률:+10%

대장장이 칸이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제작용 망치입니다. 매일 정성스럽게 손질하여 사용해 왔기 때문에 여전히 쓸 만합니다.

사용 조건:레벨 80 이상. 근력 60 이상.

중급 대장장이 기술.

무게:80

[숨겨진 기능이 존재하지 않는 아이템입니다.]

[탁월한 제작용 망치를 구성하고 있는 재료와 제작법, 제작자의 의도를 파악했습니다.]

[탁월한 제작용 망치에 대한 이해도가 100퍼센트가 되었습니다.]

[제작용 망치의 제작법을 익혔습니다.]

“헐…….”

처음 안 사실이다.

심지어 제작용 망치에도 여러 종류의 등급과 옵션이 붙어 있을 줄이야!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이 허접쓰레기 같은 망치 따윈 진즉에 버리고 에픽급 망치를 만들어서 그걸로 아이템을 제작했을 텐데!

“나는 제작용 망치는 다 똑같은 건 줄 알았단 말이다!!!”

억울한 마음에 허공을 향해 소리친 나는 이어서 칸을 노려봤다.

“왜! 어째서! 제작용 망치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려 주지 않았던 겁니까! 내가 이 낡아빠진 허접쓰레기 망치만 사용하는 걸 대체 언제까지 지켜만 볼 작정이었죠?!”

칸이 난처해했다.

“파그마의 후예인 자네가 기본 중의 기본을 모르고 있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지……. 그래서 난 앞서 말했던 대로 자네가 뭔가 사연이 있어서 낡은 망치를 사용하고 있는 거라 믿었고…….”

“크윽!”

칸을 물고 늘어질 때가 아니다.

나는 서둘러서 제작용 망치를 제작했다.

계속해서 노멀 등급 망치가 뜨는 바람에 욕이 나왔지만, 끈기 있게 제작을 계속한 끝에 나는 6번째야 비로소 에픽 등급 망치를 만들 수 있었다.

<이름 모를 장인의 대장장이 망치>

등급:에픽

내구력:350/350 공격력:70~80

레어 등급 아이템 제작 확률:+17%

에픽 등급 아이템 제작 확률:+7%

대단한 실력과 잠재력을 지녔지만, 경험과 명성은 비교적 부족한 이름 모를 장인이 제작한 대장장이 망치입니다.

장인 본인이 사용하기 위해서 제작한 망치이기 때문에 다른 대장장이들이 사용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사용 조건:파그마의 후예

무게:80

모든 면에서 내가 사용하기에 적합하도록 설계해서 제작했기 때문일까?

사용 조건이 무려 파그마의 후예다.

20억 유저 중 오로지 나만이 사용할 수 있는 아이템이란 뜻이다.

하지만 그렇게 거창한 사용 조건이 붙은 것치고 성능은 딱히 돋보이지 않았다.

‘명색이 파그마의 후예의 전용템이면 유니크 등급이랑 레전드리 등급 아이템 제작 확률도 좀 올려 주면 어디 덧나나……. 하여튼 더럽게 쪼잔한 게임이야. 응? 근데 아이템 설명이 바뀌었네?’

무아지경의 검을 만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내가 제작한 모든 아이템의 상세 정보에는 ‘대단한 실력과 잠재력을 지녔지만 경험과 명성은 턱없이 부족한 이름 모를 장인’이라는 수식어가 붙었었다.

하지만 이제는 경험과 명성이 ‘턱없이’ 부족한 이름 모를 장인이 아니라, 경험과 명성이 ‘비교적’ 부족한 이름 모를 장인으로 변해 있었다.

조금은 인정받게 된 기분이다.

어쨌든, 새로운 제작용 망치를 손에 넣게 된 나는 레어 등급과 에픽 등급 아이템을 만들 확률이 높아졌고, 노멀 등급 아이템을 만들 확률은 상대적으로 낮아졌다.

이렇게 뒤늦게라도 제작용 망치의 중요성을 깨닫고 새로운 제작용 망치를 손에 넣어서 다행이다.

이로써 한층 더 발전하게 된 나는 예정대로 돈을 벌기 위해서 작업에 착수하려고 했다.

‘망치도 교체했겠다, 에픽템, 유니크템, 레전드리템을 파파팍 만들어 볼까나?’

집중하려는 내게 칸이 청했다.

“그리드, 나와 함께 내 아들의 묘지에 다녀오지 않겠는가? 실은 오늘이 내 아들의 기일이거든.”

아이템을 하나라도 더 만들어서 팔아먹어야 하는 이때 쓸데없는 곳에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칸의 요청은 쓸데없는 것이라고 치부할 수 없다.

칸은 현실과 Satisfy를 통틀어서 내게 유일한 친구였으니까 말이다.

‘NPC가 유일한 친구라니… 우울하군…….’

나는 작업을 미루기로 했다.

“가죠.”

***

윈스톤 북쪽의 작은 언덕.

언덕에는 10여 개의 무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공동묘지라고 보기엔 너무 작은데…….’

살펴보는 내게 칸이 설명했다.

“이곳은 내 아들뿐만 아니라 우리 조상님들까지도 묻혀 계시는 우리 집안 소유의 묘지일세.”

“그렇군요.”

아들의 묘비 앞에 서서 쓸쓸하게 미소 짓는 칸의 곁에 나란히 섰다.

칸이 아들을 그리워했다.

“내 아들은… 대장장이로서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었네. 언젠가 반드시 나를 뛰어넘는 훌륭한 대장장이가 되어서 알바티노 님의 명성을 잇게 되리라, 나는 믿어 의심치 않았지. 한데 애석하게도 병을 얻어 요절하고 말았다네.”

칸의 두 눈에 습기가 차올랐다.

“아들을 잃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어. 죽은 지 이미 10년도 더 지난 녀석이건만, 지금도 너무나 그립고 그 죽음이 안타까울 따름일세. 가능하다면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녀석을 되살리고 싶을 지경이야.”

뭐라 위로의 말을 전해야 할지 모르겠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을 나 같은 놈이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니까 말이다.

어색한 얼굴로 서 있는 내게, 어느새 눈물을 그친 칸이 활짝 웃어 주었다.

“자네가 있어서 참 다행일세.”

“…….”

“매일, 매일… 오로지 그리움과 절망감에 사로잡혀 제대로 일조차 할 수 없던 내가 자네를 만난 후에는 하루하루가 놀랍고 즐거워. 내 자네 덕분에 술도 끊지 않았는가? 자, 내 아들과 인사라도 나누시게.”

칸이 나를 아들의 묘비 앞에 똑바로 마주 보고 서도록 했다. 그리고 묘비를 향해 말했다.

“아들아, 여기 계신 이분이 어릴 적 네가 매일 밤 잠들기 전마다 이야기해 달라고 조르던 전설의 대장장이 파그마의 후예이시다. 반갑지? 놀랍지? 대단하지? 이 애비가 어찌 이런 분과 함께 있는 겐지 궁금하지?”

“칸…….”

칸은 어느새 다시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급기야는 무너지듯이 털썩 무릎 꿇은 그가 묘비를 끌어안고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걱정 마라! 걱정 마! 이 애비는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 마!! 이 대단하신 분께서 이 애비를 잘 돌봐주시고 있단다!! 이대로 사라질 수도 있는 우리 대장간의 명맥도 이분께서 이어 주시기로 약속해 주셨단다!! 그러니 넌 아무 걱정 말고 편히… 편히 지내거라……. 흑… 흑흑!!”

“…….”

Satisfy에는 셀 수 없이 많은 NPC가 존재하고 있다. 한데 그들 하나하나가 이처럼 사연과 감정을 가지고 살아 숨 쉬고 있다.

대단하다. Satisfy의 기술력에는 무한히 감탄할 수밖에 없다.

“…젠장, 좀 적당히 만들어 놓을 것이지.”

눈에 먼지가 들어간 탓에 시야가 뿌옇다.

나는 혹 칸에게 들킬까 염려하여 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약속했다.

“당신의 아버지는 나의 가장 소중한 친구야. 내가 잘 대해 줄게. 그리고 당신이 잇지 못한 대장간도 내가 대신 최고로 만들어 줄게. 그러니… 당신 아버지 말대로 편히 지내.”

그 순간 알림창이 떠올랐다.

[당신과 칸과의 유대가 더욱더 공고해졌습니다.]

[당신이 칸을 생각해 주는 마음에 감격한 칸의 선조들의 영혼이 지하에서부터 출몰하였습니다.]

“…엉?”

눈앞으로 사람의 형태를 가진 푸르른 빛들이 10여 개 솟아올랐다.

그리고 그들이 날 향해서 동시다발적으로 말했다.

“반갑네, 파그마의 후예여. 우리들 후손의 친우여.”

“가, 가만……!”

영혼이라면 귀신 아니야?!

나는 다급히 칸을 불렀다.

“카, 칸! 칸!!”

“드르렁! 드러러렁!!”

“이런 정신 나간 양반을 봤나!!”

칸은 아들의 묘비를 끌어안은 채 코까지 골며 잠들어 있었다. 아니, 대체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잠들어 버릴 수가 있는 거지?

결국 이 귀신들과 맞설 수 있는 건 나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는 귀신들을 향해 주먹을 쥐어 보였다.

“더, 더, 덤벼! 이 귀신들아! 난 옆에 누가 함께 있으면 공포 영화도 끝까지 볼 수 있는 대한의 건아다!!”

…그래, 솔직히 말하자면 난 귀신이 조금 무섭다. 아니, 진짜로 솔직하게 말하자면 난 귀신이 정말 끔찍하게 싫다.

초등학생 시절 실제로 귀신을 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 생각해 보면 헛것을 봤거나 다른 걸 보고 착각한 것이었을 테지만… 어쨌든 그때의 강렬한 공포는 아직까지 내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서 귀신 알레르기를 유발시키고 있다.

내가 싸우자는 듯이 말하자 당황한 것인지, 푸른 영혼들은 아무 말 않고 공중에 둥둥 떠 있었다.

그들에게서부터 적대심을 느끼지 못한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신들… 정말 귀신이야……?”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군.”

그들의 대답이 날 절망케 만들었다.

“이럴 수가! 말도 안 돼! 세상에 귀신이 존재하다니! 역시 내가 초딩 때 봤던 건 헛것이 아니라 진짜로 귀신이었어!”

그들이 웃었다.

“하하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게 어디 있는가? 귀신이 없는 게 오히려 이상한 세상 아닌가?”

“…아!”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잠시 망각했지만 이곳은 현실이 아니라 Satisfy의 세계다. 우주와는 전혀 동떨어진,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인공적인 세계!

이곳에는 귀신은커녕 살아 움직이는 뼈다귀와 시체들도 출몰하고, 말하는 짐승도 있으며, 심지어 불 뿜는 용도 있다. 사람들이 날아다니고 마법과 검기까지 쏘아 대지 않던가?

그래, 귀신이 나타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세계다.

진정한 내가 그들에게 물었다.

“그, 그래서 뭐야? 용건이 뭔데?”

그들이 답했다.

“우리들의 후손에게 진정 어린 마음을 보여 준 그대에게 감격하여, 우리들이 그대에게 보답을 해 주고자 찾아왔다네.”

“…보답?”

돈이라도 주려는 건가!

기대하는 내게, 그들 중 가장 덩치가 큰 자가 앞으로 나서며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130년 전 파그마의 검무를 직접 눈앞에서 목격한 장본인이다.”

“……!”

파그마의 검무!

도통 어떤 식으로 갈피를 잡아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기약 없이 미뤄 두고 있던 첫 번째 전직 퀘스트의 이야기가 지금 이 순간 펼쳐지게 되었다.

“130년 전… 파격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하였고, 그 기세가 하늘을 꿰뚫어 버리는 파그마의 검무를 바로 곁에서 목격하고 매료당한 나는 잔뜩 흥분해서 케산 협곡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협곡의 북쪽 벼랑에 내 뇌리에 똑똑히 각인된 파그마의 검무를 그림으로 묘사하여 새겨 놓았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 잠들 수조차 없었기 때문이야.”

도대체 어떤 식으로 찾아내서 익혀야 하는 건지 상상조차 못하고 있던 파그마의 검무에 대한 단서를, 나는 지금 이 순간 얻게 되었다.

“그 그림이 자네가 파그마의 검무를 계승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줄 것일세.”

[퀘스트 <파그마의 후예>가 갱신되었습니다.]

<파그마의 후예>

난이도:전직 퀘스트

당신은 파그마의 대장장이 기술을 확실히 전수받았다.

하지만 당신은 파그마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고 있는가? 진심으로 그의 의지를 이었다고 자부할 수 있는가?

파그마란 누구인가! 단순히 실력 좋은 대장장이에 불과했다면, 그와 관련된 무수한 전설들이 대륙 전역에 산재되어 있지는 않을 것이다.

우선은, 하늘을 꿰뚫었다는 파그마의 검무를 단서로 시작하여 파그마의 전설들을 쫓아라. 궁극에 이르러서 모든 전설을 수집할 수만 있다면, 당신은 진정으로 파그마를 이해하고 그 의지를 계승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순간 새로운 전설로서 탄생하게 되리라!

*전직 퀘스트는 제한 시간이 없습니다.

*레전드리 직업의 전직 퀘스트를 수락할 경우, 두 번 다시는 직업을 변경하실 수 없습니다.

*레전드리 직업의 전직 퀘스트는 그 결과에 따라서 Satisfy의 세계관을 변형시킬 수 있을 정도의 파급력을 지녔습니다.

전직 퀘스트 클리어 조건:모든 연계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완료하라.

전직 퀘스트 클리어 보상:알 수 없음.

*첫 번째 전직 퀘스트:<파그마의 검무>

130년 전 파그마의 검무를 직접 목격하였던 당사자가 나타나 당신에게 파그마의 검무에 대한 단서를 전해 주었다.

당신은 윈스톤 남부에 위치한 케산 협곡으로 향하여 북쪽 벼랑에 새겨진 파그마의 단서를 획득하라!

첫 번째 전직 퀘스트 클리어 조건:파그마의 검무를 익혀라.

첫 번째 전직 퀘스트 클리어 보상:다인슬레프(모작).

새롭게 떠오른 퀘스트 정보창을 확인하는 사이, 영혼들이 내게 작별의 인사를 건넸다.

“파그마의 후예여, 우리들 후손의 친우여, 그대가 파그마 이상의 위대한 존재가 되기를 기원하며 우리는 이만 우리가 있어야 할 곳으로 되돌아가겠네.”

하나둘씩 영혼이 눈앞에서 거짓말처럼 사라져 간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하나의 영혼이 나지막이 말했다.

“아버지를 잘 부탁합니다.”

스으으으…….

석양 질 무렵에 찾아왔던 이곳에 어느덧 밤이 찾아와 있었다.

쏟아지는 별무리 사이로 반짝이는 푸른 빛가루를 흩뿌리며 사라지는 영혼들의 잔재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노라니 칸이 잠에서 깨어났다.

“으음……? 내가 어쩌다가 잠들었지? 벌써 밤이 된 겐가?”

“노인네가 아무 데서나 자는 버릇 가지고 있어 봤자 건강에 좋을 거 하나 없으니까 앞으론 주의해요.”

“흠… 내 이런 적이 한 번도 없거늘……. 허? 헉! 자, 자네! 사타구니 부분이 왜 그리 축축하게 젖은 겐가!”

“…조용히 하쇼.”

***

후로이가 ‘기다림’ 퀘스트를 클리어한 후 40일이 흘렀다.

그간 후로이는 혹시 모르니 병원에 입원해서 철저하게 건강 상태를 체크하고 요양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S.A그룹 측의 제안을 받아들여 일주일 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었고, 최초의 세컨드 직업 전직자라는 업적을 Satisfy에 등록함으로써 자신의 정체를 세상에 공표할 의향이 있느냐는 S.A그룹 측의 질문에 대답하기까지 또 일주일을 고민했다. 그리고 23일 동안 말을 타고 몽골 대륙을 누비며 유목민의 기질을 달랬다. 마지막으로 3일 동안은 Satisfy에 복귀해서 새롭게 획득한 세컨드 직업에 대한 이해도를 높였다.

그리고 금일!

후로이는 칸의 대장간을 찾아왔다.

주인으로 섬기리라 맹세한 그리드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기뻐해 주시려나? 왜 이제 와 찾아오느냐고 책망하진 않으실까?’

후로이는 엄청나게 긴장했다. 자꾸만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가 차마 쉽사리 대장간 문을 열지 못하고 앞에서 서성이는 사이, 대장간 문이 안쪽에서부터 벌컥! 열리더니 그리드가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왔다.

내가 와 있다는 걸 눈치채고 마중 나와 주신 것일까!

“주, 주군!!”

감격한 후로이가 소리쳤다.

하지만 그리드는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아무래도 주군이라는 칭호가 낯설어 자신을 부르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듯했다.

후로이가 다시 한 번 소리쳤다.

“그리드 님!!”

“엉?”

드디어 그리드가 후로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치는 두 사람!

후로이는 쪼르르 그리드 앞으로 달려가 마치 기사들이 군주에게 예를 갖출 때처럼 한쪽 무릎을 굽히며 조아렸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아무런 연락도 못 드려서 송구할 따름입니다!”

“…후로이?”

“예, 주군! 후로이입니다!”

지하 감옥에서 후로이는 4명의 기사들로부터 그리드를 탈출시키기 위해서 스스로를 희생했었다.

후로이는 그리드가 그때 당시의 이야기를 가장 먼저 꺼내며 걱정했다고 말해 줄 줄 알았다.

한데!

“너 이 새끼 잘 만났다!”

도끼눈을 뜬 그리드가 다짜고짜 후로이의 멱살을 붙잡았다. 그리고 당황하는 후로이에게 욕설을 지껄였다.

“야, 이 거지 같은 놈아! 너, 나 알아? 너 나 아냐고!! 알지도 못하는 놈이 왜 기사들한테 날 꼰질러 가지고는 내가 아이템 제작 승부에서 기권패 처리되고 말도 안 되는 퀘스트까지 떠안게 만든 거냐! 앙?! 몇 시간 동안 입에 재갈 쳐물린 채 독방에 갇히고, 윈스톤의 신성인지 개뿔인지 하는 놈하고 싸우고, 그 무시무시한 미친년 따라다니면서 눈치 보고! 내가 얼마나 개고생했는 줄 네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냐!!”

“…….”

후로이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리드의 태도가 자신이 상상한 것과는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그리드가 왜 화를 내는 것인지, 그 이유를 알 도리가 없었던 후로이는 솔직히 상황이 이해가 안 갔지만, 그래도 무작정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주군!”

주인은 곧 하늘! 그가 화를 내는 이유는 모두 다 부하의 부덕에서 비롯된 것!

그렇게 생각하고서 연신 사죄하는 후로이 탓에 오히려 그리드가 민망해질 지경이었다.

그리드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 자식, 그전에 처음 만났을 때는 완전히 멀쩡하고 똑똑해 보였었는데 감옥에서 만났을 때부터는 완전 미친놈이 돼 버렸네. 심한 고문이라도 당해서 돌아 버렸나?’

어쨌든 같이 있기 싫은 놈이다.

후로이의 멱살을 푼 그리드가 그로부터 거리를 벌리고 떨어져서는 휘휘 손을 저었다.

“야, 야, 됐어. 알았으니까 그만 가 봐.”

후로이가 당황했다.

“어디로 가란 말씀이십니까?”

“네 갈 길 가라고.”

“제 갈 길은 주군의 곁입니다!”

후로이는 이미 그리드를 따르리라고 맹세했다. 푸른 늑대의 후손은 맹세를 저버리지 않는 법! 평생 그리드를 따를 것이다.

그리고 후로이가 획득한 ‘정의의 사도의 파트너’라는 세컨드 직업은 ‘정의의 사도’와 함께 있을 경우에만 모든 능력치가 +20퍼센트 됐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도 그리드의 곁에 있는 게 이득이었다.

“아, 이런 미친…….”

짜증을 느끼는 그리드에게 후로이가 눈치 없이 물었다.

“주군, 혹시 길드에 가입되어 계십니까? 속해 있는 길드가 있으시다면 저 또한 가입시켜 주십시오. 주군을 곁에서 모시기 위해서는 저 또한 같은 길드에 들어가 있는 편이 좋지 않습니까?”

“길드? 난 그런 거 없어. 그러니까 제발 좀 꺼져.”

“오오! 잘되었습니다! 이참에 주군께서 직접 길드를 세우심이 어떻겠습니까? 정의롭고 강인한 주군께서 길드를 만든다면 많은 사람들이 주군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제가 주군을 성심성의껏 보좌하겠습니다!”

케샨 협곡으로 향하기에 앞서, 직접 사용할 방어구를 제작하기 위해 광물을 채취하러 가는 길이었던 그리드!

빨리 다녀오고 싶은 마당에 후로이가 자꾸만 헛소리를 지껄이며 시간을 지체시키자 그리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야, 자꾸 주군이니 개뿔이니 헛소리하지 말고 제발 제 갈 길 가자. 응? 난 간다.”

결국 그리드는 뒤도 안 돌아보고 목적지를 향해 떠났다.

아무래도 그리드가 자신을 싫어하는 것 같자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게 된 후로이는 몰래 그를 추적했다.

아무런 장애물도 존재하지 않는 평탄한 길 위에서 발이 꼬여 자빠지고, 고기를 굽기 위해 불을 지피자마자 맑은 하늘에서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고, 평화롭기로 유명한 장소들에서 도적떼를 만나는 등등.

후로이가 따라다니면서 지켜본 결과, 그리드는 불운을 타고난 인물이었다. 뒤로 자빠지면 무조건 코가 깨질 게 확실했다.

후로이는 사명감에 불타올랐다.

‘반드시 내가 곁을 지켜 드려야 할 분이다!’

정의의 사도의 파트너는 필히 정의의 사도와 함께해야만 한다.

후로이는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퀘스트 성공!]

[지위 ‘여덟 번째 종’을 획득하였습니다.]

[스킬 ‘무한한 신앙’이 생성되었습니다.]

[스킬 ‘교리 설파’가 생성되었습니다.]

[스킬 ‘신벌’이 생성되었습니다.]

쉴 새 없이 북부 전역을 돌아다닌 끝에 300명의 신도들을 구출하는 데 성공한 유라가 결국 퀘스트를 클리어했다.

이로써 7명의 종은 8명의 종으로 거듭나게 되었고, 야탄교의 권세는 더욱더 강력해졌다.

유라는 새롭게 얻은 스킬들의 상세 정보를 확인해 보았다.

<무한한 신앙>

신앙심의 증가율이 2배 상승합니다.

패시브 스킬.

<교리 설파>

Lv.1

야탄교의 교리를 설파하여 단일 대상을 암흑 속성으로 물들입니다. 암흑 속성에 물든 적은 4초 동안 신성 계열 스킬을 사용할 수 없게 되며, 암흑 계열 스킬에 한하여 2초 동안 1.5배의 피해를 입게 됩니다.

마나 소모:800

재사용 대기 시간:100초

<신벌>

데미지 15,000~23,000의 피해를 입히는 칠흑의 벼락을 10미터 이내에 소환합니다.

피해 범위:대상의 반경 3미터.

*이 스킬로 적을 해치울 경우, 해치운 적의 숫자 하나당 신앙심이 50씩 상승합니다.

마나 소모:4,000

재사용 대기 시간:1,200초

흑마법사의 가장 큰 단점은, 다른 계열의 마법사에 비해서 공격 마법의 종류와 위력이 월등하게 떨어진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번에 여덟 번째 종으로 거듭나게 된 유라는 교리 설파와 신벌 스킬을 습득하게 됨으로써 단점을 극복하고 완전체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Satisfy의 모든 유저에게 아래와 같은 알림창이 동시다발적으로 떠올랐다.

[야탄 신의 여덟 번째 종이 탄생하였습니다. 야탄 신의 권능을 목격한 야탄의 신도들이 더욱더 깊은 신앙심을 무장하게 되었습니다.]

[대륙 전역에 야탄교의 영향력이 커집니다.]

[야탄의 신도들의 최소 레벨이 160에서 170으로 상승하였습니다.]

[야탄교에 소속된 플레이어들은 지금부터 72시간 동안 경험치 상승률 20퍼센트의 혜택을 받게 됩니다.]

[지금처럼 야탄교의 성장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면, 야탄교는 하나의 국가를 이룰 정도의 세력을 갖게 될 것입니다.]

비상이 걸렸다.

Satisfy에 존재하는 수십 개의 국가가 모두 야탄교 토벌을 선포했다.

신께 바치는 제물이라는 미명하에 인명을 해치는 사이한 종교의 세력이 강성해지는 것을 묵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저들에게는 야탄교 토벌과 관련된 퀘스트가 쏟아져 들어왔다.

에트날 왕국도 사정이 같았다.

특히, 반야탄교로 유명한 북부의 스테임 백작은 대대적으로 선포했다.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북부에서 야탄교의 씨를 말리겠다!”

북부 전역에 야탄교 토벌의 퀘스트가 내려졌다.

유저들은 합심하여 야탄의 신전을 수색, 토벌에 나섰다.

그에 야탄교의 저항도 매서웠다.

“이건 기회다! 주제 파악 못하고 덤벼드는 이교도들에게 야탄 신의 위대함을 똑똑히 알려 줘라! 온 대륙을 야탄 신의 색으로 물들이는 것이다!!”

야탄교의 교주이자 야탄 신의 첫 번째 종! 대륙 최강의 흑마법사 탈로스!

그가 전쟁을 선포하니 야탄교에 소속된 수백만 명의 유저들에게도 전쟁과 관련된 각종 퀘스트가 무수히 생성되었다.

연합군 VS. 야탄교!

향후 대륙의 판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대규모의 에피소드가 진행되게 된 것이다.

Satisfy가 출시된 이래 가장 큰 사건이 발생하게 되자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과연 연합군은 야탄교의 위세를 저지할 수 있을까요?!』

『야탄교가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국가를 세우게 될 경우 과연 어떤 식의 이야기가 전개될지 추측이 난무하고 있는 가운데…….』

『야탄교는 악입니다! 악! 유저들이 합심해서 놈들을 반드시 몰아내야만 해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은 여덟 번째 종입니다. 한데 이 여덟 번째 종이 NPC가 아니라 유저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여덟 번째 종이 정말로 유저라면 후보로 거론할 수 있는 인물은 단 한 명…….』

『통합 랭킹 제5위! 핏빛 마녀 유라! 세계는 그녀를 주목해야만 합니다!』

세컨드 직업이 등장했을 때도 각국의 언론들이 커다란 이슈로 다뤘었지만 이번엔 그보다 한술 더 떴다.

야탄교와 관련된 뉴스가 하나라도 뜨면 각국의 언론들 모두가 속보로 전파할 정도로 주목도가 높았다.

하지만 그리드에게는 다른 세상의 일이었다.

“전직 퀘스트를 해야 하는 마당에 야탄교는 개뿔…….”

그리드는 지난 열흘 동안 각종 방어구를 제작했다.

그 결과 레어급과 에픽급 아이템들로 완벽하게 무장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으으… 이 정도 무장으로는 케산 협곡에 가기에 무리가 있는데…….”

케산 협곡!

그곳은 북부에서 손꼽히는 최악의 험지 중 하나다.

구불구불한 골짜기가 매우 험하여 이동하기가 힘들고, 양쪽 곡벽은 어찌나 높이 솟은 건지 마치 하늘을 덮으려 하는 듯한 인상을 심어 주었기에 보는 이에게 불길함과 두려움을 안겼다.

그리고 가장 실질적인 문제는 협곡 곳곳에 존재하는 수백, 수천 개의 크고 작은 동굴들이었다.

각 동굴 안에는 최소 160레벨이 넘는 각종 몬스터와 수수께끼의 존재들이 숨어 지냈는데, 놈들은 여행자를 발견하는 즉각 튀어나와 덮쳤다. 자칫 방심했다간 언제 놈들에게 붙잡혀서 쥐도 새도 모르게 세상 하직할지 모를 일이었다.

대체 얼마나 위험하면 윈스톤 왕국의 5대 금역 중 하나가 되었겠는가?

‘북쪽 끝의 동굴’을 찾으라는 아슈르 백작의 퀘스트를 수행할 당시, 케산 협곡을 찾았다가 10번도 더 넘게 죽었던 경험이 있는 그리드로서는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난 예전과 달라……. 스탯도 전사 시절과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나고 엄청난 템빨을 세울 수도 있어. 그러니까 용기를… 크윽!”

그리드는 도통 케산 협곡으로 향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가 봤자 몇 분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죽어 버릴 거라는 사실을 뻔히 알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칸의 선조를 원망하기에 이르렀다.

“아니, 그 정신 나간 귀신은 왜 그림을 그려도 굳이 케산 협곡에다가 그려 놔 가지고……!”

하지만 아무리 원망하면 무엇 하는가!

전직 퀘스트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케산 협곡을 찾아야만 한다. 누굴 아무리 탓해 봤자 현실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당분간은 아이템 제작을 그만하고 사냥하면서 레벨부터 올릴까? 레벨을 최소한 150 정도 올리면 케산 협곡의 몹들과도 충분히 싸울 수 있을 텐데……? 아니, 빌어먹을! 어느 세월에 레벨을 올리고 앉았어! 그렇게 여유 부리다간 빚 이자도 못 갚겠네! 그렇다고 퀘스트 자체를 뒤로 미뤄 두기엔 다인슬레프를 한시라도 빨리 갖고 싶고! 크으! 뭔가 좋은 수가 없을까? 아……!”

그리드가 묘안을 떠올렸다.

“아이템 창조!”

<전설적 대장장이의 창조>

‘전설적 대장장이의 기술’ 스킬 레벨이 하나 오를 때마다 장비 아이템 제작법을 3개 창조할 수 있습니다.

현재 창조할 수 있는 아이템 제작법 횟수 5/6.

*이 스킬을 사용해서 창조한 아이템을 생산 시,

아이템에 창조자의 이름이 자동으로 새겨집니다.

실패작 같은 경우, 제작에 필요한 재료를 푸른 오리하르콘으로만 설정했던 탓에 제작을 시도할 엄두조차 낼 수가 없었다.

그러한 실패의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리드는 이번에야말로 적절한 아이템을 창조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래, 아이템을 창조하는 거야! 케산 협곡의 몬스터들에게 카운터를 먹일 수 있을 만한 그런 아이템을!”

그리드는 케산 협곡에서 10번도 더 죽어 봤기 때문에 케산 협곡의 몬스터들이 대체적으로 어떤 성향과 속성을 가졌는지 잘 알고 있었다.

“좋아, 해 보자. 전설적 대장장이의 창조!”

전혀 새로운 개념의 아이템이 그리드에 의해서 탄생하려 하고 있었다.

***

“벌써 29일이네. 동창회도 얼마 안 남았구나~”

“그러고 보니 영우는 어때? 올해 동창회도 안 나올 것 같아? 내 전환 아예 안 받던데?”

고등학생 시절부터 지금까지 10년간 쭉 친구로 지내온 한 무리가 윈스톤 왕국의 북부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름 아닌 신영우의 동창생들이었다.

그들의 최근 관심사는 바로 보름 뒤에 있을 동창회와 신영우였다.

“아직도 그게 궁금해? 막말로 얘기해서 네가 영우였으면 동창회 나올 맛이 나겠냐? 다른 애들은 다 유학 가거나 취직한 마당에 자기 혼자만 게임에 빠져서 백수, 빚쟁이 됐잖아? 쪽팔려서 무슨 낯짝으로 동창회를 나오겠냐?”

“하긴… 작년 동창회에서 애들한테 엄청 무시당했지.”

“어휴, 내가 영우였으면 진지하게 자살을 고려해 봤을 거다. 물론 영우가 자살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나였다면 그랬을 거라고.”

신영우는 학창 시절부터 딱히 뛰어난 부분이 없는 아이였다. 하지만 성적도, 운동도 항상 중간 수준에는 머물렀고 남들 다 가는 대학도 같이 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영우를 우습게 보는 동창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달랐다. 동창생들 모두 다 영우를 무시하고 비웃었다.

솔직히 말하면 다른 동창들도 딱히 잘나가는 건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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