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악연의 시작
“젠장!! 제엔자아아앙!!!”
세 번째 에픽 직업 전직자, 카츠는 분개하고 있었다.
쿠엑!!
[중독된 선구자를 해치웠습니다.]
[5골드를 획득하였습니다.]
[독 묻은 천을 획득하였습니다.]
[경험치 543,500을 획득하였습니다.]
“윽……!”
[마음 닫힌 선구자를 해치웠습니다.]
[2골드를 획득하였습니다.]
[경험치 617,000을 획득하였습니다.]
“이런 제기라아아아알!!”
한 달 전, 카츠는 드디어 통합 랭킹 39위가 되었다.
에픽 직업으로 전직한 후, 사냥에 특화되어 있는 직업의 이점을 살려서 그야말로 경이로운 속도로 레벨 업을 한 결과였다.
카츠는 그때까지만 해도 기고만장했다.
53위에서 39위까지 진입하는 데 고작 한 달밖에 걸리지 않았으니, 목표로 삼고 있는 랭킹 1위도 앞으로 머지않았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게 무슨 일인가?
잠자는 시간만 제외하고 하루 종일 캡슐에 앉아 사냥에 매진하건만, 지난 한 달 동안 랭킹은 오르지 않고 39위에서 정체되어 버렸다.
그리고 심지어 오늘은 40위로 랭킹이 하락하기까지 했다.
카츠의 높은 프라이드가 박살 났다.
“이 내가! 이 내가 고작 40위권에서 한 달째 헤매고 있다니!!”
엄청난 에픽 직업을 얻었으니 머잖아 랭킹 1위를 쟁취하겠노라고 방송에서 선포했다.
한데 이게 무슨 꼴인가?
전 세계 사람들이 랭커 목록을 보며 비웃을 게 뻔했다. 일본 굴지의 대기업, ‘JIN’의 둘째 아들이 전 세계에 허풍쟁이로 낙인찍히게 생긴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할 수가 없다.’
카츠는 쉴 새 없이 몬스터를 사냥하면서도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블러드 워리어의 공격력과 전투 지속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해. 이 이상으로 빠르고 수월하게 사냥하는 게 가능한 직업이 존재할 리 없다. 근데 어째서 랭킹이 오르지 않는 거지? 다른 녀석들은 무슨 수로 나 이상의 속도로 레벨 업을 하고 있는 거야?’
현재 카츠의 레벨은 215였다.
210레벨부터는 레벨 업 필요 경험치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하는 탓에 랭커들 사이에서도 헬 구간이라 불리는데, 카츠는 고난이도의 사냥터에서 솔로 플레이를 함으로써 헬 구간에 빠르게 적응하고 있었다.
하지만 랭킹은 오를 생각을 않는다.
지금만 해도 경험치가 쉴 틈 없이 오르고 있음에도 부질없다.
재벌 2세의 재력을 활용해서 최강의 아이템들로 무장했고, 최고의 직업까지 보유한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랭킹을 올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내가… 내가 남들보다 못한 게임 실력을 가졌단 뜻인가!”
카츠는 납득할 수 없었다.
“나는 여태까지 그 어떤 게임에서도 1위 자리를 놓쳐 본 적이 없다고!”
‘천재’라고 불리는 형과 동생에 비하면 두뇌가 다소 뒤떨어지고 처세에 약하여 기업 후계자 후보에선 완전히 제외되어 버렸으나, 게임 재능만큼은 형과 동생보다 자신이 뛰어나며 심지어 세계 최고라 자부해 왔다.
그런데 그 자부심이 산산조각 나기 직전이다.
“인정할 수 없어……. 인정할 수 없어!!”
현실 세계에서 형과 동생의 벽을 넘지 못하고 도태된 패배자, 카츠! 그는 Satisfy에서조차도 패배자가 되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결단을 내렸다.
‘사냥터를 옮기자. 더 강한 곳으로!’
현재 카츠는 평균 230레벨의 몬스터들이 출몰하는 사냥터에 있었다.
이곳의 몬스터들은 최소 3마리씩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하며 상태 이상 스킬을 종류별로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최상급 랭커들조차 파티 사냥을 하는 곳이다.
공격할 때마다 적의 생명력을 흡수하는 카츠조차도 이곳에서 솔로 플레이를 하려면 물약에 크게 의존해야 할 정도였다.
이보다 높은 수준의 사냥터에서 솔로 플레이를 한다?
아무리 카츠라도 현실적으로 힘든 일이다. 조금이라도 방심했다간 사망해서 오히려 경험치 손실을 볼 것이다.
하지만 카츠에게는 돈이 있었다.
‘더 좋은 장비를 무장하고, 더 좋은 물약을 먹으면 된다.’
카츠가 무장한 무기와 방어구, 그리고 장신구는 모두 유니크 등급의 아이템이었다.
하지만 카츠는 만족할 수 없었다. 특히 갑옷과 건틀릿의 성능이 아쉬웠다.
<통한의 갑옷>
등급:유니크
내구력:38/310 방어력:459 이동속도:-11%
*받은 피해의 10퍼센트를 반사.
*내구력이 100 이하로 떨어질 경우, 모든 능력치가 5퍼센트씩 상승.
전 적기사단의 멤버였던 데이모드가 피아로와 함께 누명을 쓰고 배신자로 쫓길 당시 무장했던 갑옷입니다.
갑옷에 데이모드의 원한과 고통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사용 조건:레벨 180 이상. 근력 750 이상. 체력 600 이상. 중급 헤비 아머 마스터리 4레벨 이상.
무게:2,300
<흑풍의 건틀릿>
등급:유니크
내구력:110/170 방어력:57 공격속도:+5% 명중률:+10%
검은 바람을 몰고 다니는 암살자들이 사용하는 건틀릿입니다.
매우 가볍고 착용감이 좋기 때문에 보다 빠르고 확실하게 대상을 공격할 수 있게 됩니다.
사용 조건:레벨 200 이상. 민첩성 220 이상.
무게:200
통한의 갑옷은 매우 좋은 옵션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급 헤비 아머들에 비해서 방어력이 낮은 편이었다.
그리고 흑풍의 건틀릿은 기본 성능이 좋은 반면 특별한 옵션이 없었다.
둘 다 유니크 등급이라고 보기엔 2퍼센트 부족한 아이템들인 것이다.
“새로운 갑옷과 건틀릿이 필요해.”
그렇게 판단한 카츠가 로그아웃을 했다. 그리고 아이템 거래 사이트에 접속해서 갑옷과 건틀릿 목록을 살펴보았다.
수천수만 개의 아이템 목록이 떠올랐지만, 그 많은 아이템 중에서도 통한의 갑옷과 흑풍의 건틀릿 이상의 성능을 보유한 아이템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현재 시점에서는 통한의 갑옷과 흑풍의 건틀릿이 최상급 아이템이라는 반증이다.
“…미치겠군.”
돈을 쓰고 싶어도 쓸데가 없다.
카츠가 애꿎은 대장장이 유저들을 욕했다.
“대장장이들은 죄다 놀고 있는 건가? 놈들은 대체 언제쯤에야 퀘스트나 사냥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드롭 아이템보다 더 뛰어난 아이템을 만들 수 있게 되는 거지? 제기랄, 이건 직무유기 아니야?”
Satisfy의 유저는 무려 20억 명을 넘는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아이템의 수요는 천문학적이다. 하지만 제작 계열 직업을 가진 유저들의 성장이 비교적 느린 탓인지 공급이 따라가질 못하고 있다.
Satisfy의 유저들은 솜씨 좋은 대장장이의 등장을 진심으로 간절히 바랐다.
유페미나가 그리드라는 대장장이를 알게 되고, 그에게 아이템 제작을 부탁할 정도의 사이가 된 것은 모두 다 부러워할 행운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현재 유페미나는 그다지 기분이 좋지 못했다.
스테임 백작령의 수도, 프론티어.
하루에도 수백 명의 상인이 오가는 이곳에서 유페미나는 벌써 일주일째 머물고 있었다.
상가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면서 정보를 수집했고, 매 시간마다 아이템 거래 사이트와 경매장도 모니터링했다.
하지만 오브 제작법은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니, 오브 제작법뿐만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아이템 제작법이 실종되었다.
평소에 아이템 제작법에 관심 없던 유페미나는 모르는 사실이었지만, 본디 제작법이란 것은 굉장히 구하기 어려운 것이다.
특히 레벨 제한이 높은 아이템의 제작법일수록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와 같았다.
“우우… 결국 이곳에서도 허탕을 치네. 제작법이라는 게 정말로 희귀한 거였구나…….”
지난 한 달 동안 에트날 왕국의 내로라하는 대도시들을 전부 찾아 다녔건만 아무런 소득이 없자 유페미나는 울고 싶었다.
아이템 제작 승부와 라빗의 취업 활동 돕기 퀘스트를 연달아 클리어하면서 총 6천5백 골드라는 거금을 획득하였으므로, 이 돈이라면 원하는 제작법쯤 쉽게 구할 수 있으리라 믿었었는데 현실은 너무 냉담했다.
‘안 그래도 짜증 나는데…….’
경매장 앞에서 울상을 짓고 있던 유페미나의 표정이 일순 사늘하게 식었다.
그녀의 비상식적으로 높은 통찰력 스탯이 누군가의 시선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이틀 전부터다.
정체 모를 이들이 조직적으로 그녀를 감시하고 있었다.
‘대체 누구지?’
유페미나는 유명세를 비롯한 수많은 혜택을 포기하고 랭커 목록에서 자신의 이름을 비공개 처리한 ‘시크릿 랭커’다. 또한 평소에 수많은 가명을 가지고 최대한 조심스럽게 활동해 왔다.
즉, 누군가에게 어떠한 이유로 꼬리를 잡힐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뜻이다.
한데 감시를 당하게 되다니, 이는 처음 겪는 일이었다.
“불쾌해…….”
누가? 왜? 어떻게?
유페미나는 생각해 보면서 외진 골목길로 들어갔다. 그리고 허공에 대고 말했다.
“나와요. 거기에 있다는 거 알고 있으니까.”
***
“나와요, 거기에 있다는 거 알고 있으니까.”
“……!!”
관찰 대상의 그 말이 페이커의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만들었다.
‘설마 내 은신을 간파한 건가?’
아니, 그럴 리 없다.
페이커는 Satisfy를 시작하고 단 8개월 만에 랭킹 1위 어쌔신이 된 천재였다.
Satisfy가 출범한 이후 부동의 어쌔신 랭킹 1위였던 노검마조차도 페이커의 재능 앞에 무릎 꿇었을 정도다.
‘일개 대장장이가 나의 은신을 감지할 리 없지.’
확신한 페이커가 파티 채팅창에다가 전했다.
<저거 나한테 하는 말 아니다. 너희들한테 하는 말이야.>
반발이 발생했다.
<웃기지 마! 우리는 확실한 안전거리를 확보하고 있다고! 눈치챘을 리가 없어!>
<야, 야, 애초에 쟤가 쳐다보고 있는 곳은 네가 서 있는 방향이잖냐…….>
<ㅋㅋㅋㅋㅋㅋㅋ 어쌔신 랭킹 1위가 대장장이한테 은신 발각당함.>
<그러게 왜 바짝 붙어서 따라다니는 겨……. 직업 랭킹 1위 찍더니 자만심에 물들었네…….>
페이커를 비롯한 그의 동료들은 전원 체다카 길드원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한 달 전.
윈스톤에서 진행된 아이템 제작 승부의 정보를 뒤늦게 입수한 체다카 길드는 신속하게 윈스톤에 집결했다. 그리고 승부에서 에픽 등급 단검을 제작하였다는 대장장이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당시 승부를 관람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던 덕분에 체다카 길드의 정보활동은 매우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대장장이의 아이디는 에리나. 성별은 여자. 신장은 160센티미터 내외. 연령은 17세에서 19세 사이로 추정. 밝은 금색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내려오게 길렀으며, 한번 보면 잊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외모를 소유.
목격자들의 진술을 토대로 에리나의 초상화를 완성한 체다카 길드는, 조를 여러 개로 나눠서 에리나의 이동 경로를 각 방향으로 추적했다.
그리고 이틀 전, 페이커 조가 프론티어에서 에리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페이커로부터 보고를 접한 지슈카가 명령했다.
{그 아이는 내가 직접 만나 보겠어. 너희들은 내가 프론티어에 도착할 때까지 그 아이를 지켜보면서 실시간으로 위치를 파악해 줘.}
그리고 지금.
페이커 조의 감시가 에리나에게 발각당할 위기에 처했다.
아니, 아직은 발각당했다고 확신할 단계는 아니다.
페이커의 은신 레벨은 무려 7.
최상위 랭커들조차도 그의 은신을 감지하기는 어렵다.
“…….”
페이커는 보다 더 완벽한 은신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숨을 죽였다.
하지만 에리나, 즉 유페미나의 통찰력에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변태처럼 엿보지 말고 어서 나와요. 나오지 않는다면 나올 수밖에 없도록 만들 테니까.”
유페미나의 마지막 경고였다.
분위기가 심상찮게 돌아가자 페이커의 동료들이 동요했다.
<이봐, 페이커, 아무래도 진짜로 눈치챈 것 같은데?>
<계속 숨어 있다간 적으로 인식될 수도 있겠어. 그만 은신을 풀고 정체를 밝혀.>
페이커가 발끈했다.
<대장장이에게 기척을 탐지하는 기술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 아니, 설사 그런 기술이 있다고 해도 내 은신이 발각될 가능성은 아예 없으니까 쓸데없는 걱정 마라. 저 여자는 그저 감이 좋아서 근거도 없이 떠보는 것뿐…….>
페이커의 채팅이 도중에 끊겼다.
퍼어엉!
유페미나의 몸을 중심으로 반경 3미터에 큰 폭발이 발생했다.
“큭!”
범위 안에 있던 페이커가 폭발의 여파를 피하기 위해 급히 은신을 풀고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유페미나는 그를 순순히 보내 줄 생각이 없었다.
“천사의 비명.”
삐이이이이이--
“……?!”
미세한 초음파가 페이커의 고막을 찢어지기 직전까지 뒤흔들었다.
페이커는 귀에서 피를 흘리며 고통에 몸부림 쳤고, 유페미나는 그를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은 누구죠? 어째서 절 계속 감시하는 건가요?”
‘누구냐고?’
페이커야말로 묻고 싶은 말이었다.
대장장이인 줄로만 알았던 여자가 최상위급 마법을 연달아서 사용하다니?
‘설마?’
페이커는 혼란스러웠다. 확인이 필요했다.
스스슥.
페이커의 몸이 살짝 흔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수십 개의 잔상을 남기며 움직였다.
유페미나가 그 모습을 관찰하는 사이, 그녀가 깊이 눌러쓰고 있던 모자가 어느새 벗겨져서 페이커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페이커가 경악했다.
모자가 벗겨지며 완연히 드러난 금발 여자의 얼굴은 초상화 속 인물과 쏙 빼닮아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머리 위로 떠오른 아이디는 에리나가 아니라 유페미나였다.
‘처음부터 잘못됐어. 우리가 추적해 온 모든 정보가 거짓이었다.’
페이커가 추리했다.
특급 야파 화살의 제작자를 원하는 길드는 셀 수 없이 많다. 그들은 특급 야파 화살의 제작자를 다른 길드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지금 이 순간에도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거짓 정보를 흘려서 경쟁 길드를 교란시키거나 함정에 빠뜨리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페이커가 이를 갈았다.
‘우리도 함정에 당한 거군.’
최악의 경우, 윈스톤에서 진행됐던 아이템 제작 승부 자체가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꾸며진 거짓 연극일 수도 있었다.
만약 그렇다면, 체다카 길드는 누군가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셈이다.
“내놔요.”
분함을 금치 못하고 있는 페이커로부터 유페미나가 모자를 다시 뺏어왔다. 그리고 신경질적으로 눌러 쓰며 앙칼진 목소리로 말했다.
“질문에는 대답도 않고 다짜고짜 남의 물건을 빼앗아 가는 건가요? 참 짜증 나네요.”
페이커가 그녀를 노려봤다.
“이번 일, 어느 길드에서 꾸민 일이지?”
유페미나의 입장에선 영문 모를 질문이었다.
“뭐라는지 모르겠군요. 그보다 대답하지 그래요? 왜 사람을 이틀 동안이나 따라다닌 거죠?”
“시치미 떼는 건가……. 그렇다면 무력을 써서라도 진실을 들어 보도록 할까.”
체다카 길드를 간단히 정의하자면, 지존을 꿈꾸는 이들의 모임이다.
길드원 전원이 하나같이 호전적인 성향을 지녔다.
그리고 유페미나의 성깔도 만만찮았다.
“…요즘 만나는 남자들은 죄다 사이코 같아.”
그리드야 보호해야 하는 대상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두고 볼 수밖에 없었지만 눈앞의 페이커는 다르다.
혼내고 싶으면 혼내면 되는 거다.
“멋대로 사람을 감시한 것도 모자라서 헛소리를 지껄이더니 이제는 협박까지? 그 고약한 버르장머리를 고쳐줘야겠군요. 낙뢰.”
파치칙!
페이커의 주변에 정전기가 일어났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맑은 하늘에서부터 날벼락이 떨어졌다.
콰아아앙!!
음속의 몸놀림으로 벼락을 피한 페이커가 수십 개의 잔상을 만들어 냈다. 그러더니 어느새 유페미나의 등 뒤에 서있다.
순간, 유페미나의 손이 페이커의 복부에 닿았다.
“공교롭게도 나는 똑같은 기술에 두 번 다시 당하지 않아요.”
퍼엉!
페이커의 몸이 불길에 휩싸였다.
하지만 페이커는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
고통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페미나가 공격한 대상. 즉, 유페미나의 등 뒤에 서있던 페이커는 본체가 아닌 분신이었던 것이다.
빠각!
“윽!”
사각에서부터 날아온 발차기에 옆구리를 강타당한 유페미나가 신음을 토하며 쓰러졌다.
그녀를 내려다보며 페이커가 말했다.
“같은 기술이라도 응용하기에 따라서 다르게 써먹을 수 있는 법이지. 네가 주문 영창도 없이 마법을 사용하는 건 분명히 대단하다만, 내 적수는 못 돼.”
유페미나는 솔직히 긴장이 되었다. 복제술사로 전직한 이래, 유저와의 전투에서 공격을 허용당한 건 처음이었던 탓이다.
‘이 남자, 강해.’
최상위급 어쌔신 기술을 사용하는 데다 싸움에 능하다.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다.
“기고만장한 것도 잠시뿐이죠. 고대 여왕의 기사.”
강렬한 빛이 번쩍였다.
그에 잠시 시력을 상실하였다가 회복한 페이커가 경악했다.
바로 코앞에, 넘실거리는 칠흑의 기운을 갑옷처럼 몸에 두른 거구의 기사가 서 있었던 탓이다.
“사역마……?!”
마법사가 사역마를 소환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Satisfy에는 소환사라는 직업이 버젓이 존재하고 있다. 사역마는 소환사의 권한이어야만 했다.
-쿠어어어어어!!
몸에 두르고 있던 칠흑의 기운 일부를 떼어 검처럼 손에 쥔 고대 여왕의 기사가 페이커를 공격했다.
그 기세가 가히 태산을 가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큭!”
본래 어쌔신은 은밀함을 무기로 삼는다. 기사와 맞대결해서 승산이 있을 리 없다.
콰앙!!
페이커가 횡으로 베어 오는 기사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회피했다. 그 탓에 대신 얻어맞은 건물 외벽이 와르르 무너지면서 돌과 먼지가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픽!
날카로운 돌의 파편에 뺨을 베인 페이커가 기사를 무시하고 지나쳤다. 그리고 방심하고 있을 유페미나를 향해 3자루 단검을 투척했다.
마법사의 운동신경으로는 결코 피할 수 없을 속도로 날아드는 단검!
설령 방어 마법으로 방어를 시도한다 해도 부질없다. 페이커가 투척한 단검에는 마력에 반응해서 폭발을 일으키는 기능이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됐다!’
페이커는 승리를 단언했지만 예상치 못한 사태가 발생했다.
스스스스스슥.
날아드는 3자루 단검을 포착하고 관찰한 유페미나의 몸이 좌우로 한 번씩 흔들린다 싶더니, 이내 잔상을 남기며 움직여 단검을 모조리 회피한 것이다.
‘이럴 수가! 사역마에 이어서 어쌔신의 기술이라고?!’
본래, 수십 개의 잔상 중 무엇이 본체인지 파악하려면 극도의 집중력이 요구됐다.
하지만 고대 여왕의 기사가 자꾸만 공격해 오는 통에 페이커는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추이를 지켜보고 있던 페이커의 동료들이 어쩔 수 없이 나섰다.
“우리가 돕겠다!”
페이커가 치를 떨었다.
“일대일 싸움에 끼겠다고? 웃기지 마! 나를 무시하는 거냐!”
“어쩔 수 없잖아! 네가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당하게 놔둘 것 같아?!”
“치잇!”
페이커의 동료들은 체다카 길드원답게 전원 각 직업에서 상위 랭킹을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 4명이 힘을 합쳐 함께 덤빈다고 해서 유페미나를 제압할 수는 없었다.
지난 한 달 동안 오브 제작법을 찾아 헤매다가 마주쳤던 랭커들의 기술을 복제, 축적해 놓은 현재의 유페미나는 다름 아닌 최강 모드였기 때문이다.
“지룡의 발톱.”
고대 여왕의 기사가 페이커 일당의 발을 묶어 둔 사이, 지면이 갈라지면서 거대하고 날카로운 돌기둥들이 연속해서 솟아올랐다.
페이커 일당은 몸을 지키기 위해서 사방팔방 분주히 뛰어다닐 수밖에 없었고, 그러는 사이에 하늘에서는 화염의 비가 쏟아져 내렸다.
“이런 엄청난 마법들을 연달아 사용하다니?”
“말도 안 돼…….”
페이커와 동료들의 얼굴에 절망감이 깃들었다.
본인들이 꿈꿔 왔던 지존의 모습을 유페미나에게서 엿보았기 때문이다.
***
도심 한복판이라고는 믿을 수 없이 붕괴되어 있는 현장에 도착한 지슈카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감히 우리 길드를 건드려?”
Satisfy가 출시되기 전 성행했던 L.T.S 시절의 체다카 길드는 감히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최강의 무력 집단이었다.
초거대 길드들조차도 체다카 길드의 눈치를 살피기 바빠했을 정도다.
지슈카는 Satisfy에서도 체다카 길드를 과거처럼 최강으로 만들 각오였다. 그리고 실제로 노력해왔고, 이미 상위 랭커들 사이에서는 매우 유명한 길드가 되었다.
하지만 단순히 유명한 것과 최강으로 인식되는 것은 완전히 별개다.
최강에 군림하기 위해서는 대중에게 조금의 빈틈도 보여선 안 되는 법.
지슈카가 척살령을 내렸다.
“당장 그년을 찾아. 그년과 그년의 배후를 모조리 박살내서 체다카의 위엄을 모두에게 보여주는 거야.”
상대는 페이커를 포함한 4명의 길드원을 단신으로 쓰러뜨린 인물이다.
증언에 의하면, 무슨 영문인지 온갖 직업의 스킬을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아마도 보통 강한 게 아닐 것이다.
‘어쩌면 히든 직업 전직자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슈카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체다카 길드의 진정한 힘은 아직 보여 주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유페미나와 체다카 길드의 질긴 악연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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