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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 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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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맹세
윈스톤 성의 지하 감옥.
지하 3층의 독방에 갇혔다가 유페미나에게 구출된 나는 후로이를 찾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는 중이었다.
“젠장! 모든 방을 뒤져 봤지만 보이질 않잖아? 후로이 그 자식은 대체 어디에 갇혀 있는 거지?”
“아무래도 이 층에는 없는 것 같아요. 더 지하로 내려가야 할 것 같은데요?”
“뭐? 3층이 끝 아니었어?”
“정보에 의하면 4층까지 있다고 해요.”
“4층까지 내려가 봐야 하는 건가…….”
후로이를 구출하기까지 남은 제한 시간은 앞으로 고작 1시간 10분!
점점 초조해진다. 혹시라도 제한 시간이 초과되어 후로이 구출에 실패했다가는 엄청난 페널티를 부과받기 때문이다.
그래, 나는 한시라도 빨리 후로이를 찾아 구출하고 싶다.
하지만 윈스톤 성의 지하 감옥은 굉장히 넓었고, 복도가 마치 미로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길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유페미나의 의견을 따라서 지하 4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찾아 다녔지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 놔! 4층이라는 게 존재하는 게 확실해? 3층이 끝 아니야? 그리고 후로이는 2층이나 1층에 있는 거 아니냐고!”
“저는 당신을 찾기 위해서 1층과 2층도 샅샅이 뒤졌었어요. 하지만 후로이라는 이름의 죄수는 보지 못했어요. 그리고 4층은 정말로 존재해요. 신뢰할 수 있는 사람한테 받은 정보거든요.”
“으으… 하지만 4층으로 내려가는 길은 보이질 않잖아…….”
“그만 좀 징징대요. 짜증 나니까.”
“…응, 미안.”
우왕좌왕하는 와중에도 시간은 계속해서 흐르고 있다.
어느덧 제한 시간이 50분밖에 남지 않았다.
이러는 사이에도 병사들의 추적은 멈추지 않았고, 복도 곳곳에는 함정이 설치되어 있어서 위험천만이다.
‘하지만 그나마 다행이야. 함정이 눈에 뻔히 보이게 설치되어 있어서 함정에 당할 염려는 없겠어.’
감옥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은 암석이다.
바닥이건, 벽이건, 천장이건 사방이 죄다 돌이었다.
그리고 지하답게 햇살 한 줄기 들어오질 않았다.
즉, 이곳은 풀 한 포기 자랄 수 없는 공간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우습게도, 복도를 지나다 보면 꽃과 풀이 자라 있는 지면이 군데군데 보였다.
한술 더 떠서, 천장 곳곳에는 먹음직한 과일과 빵이 실에 묶인 채 대롱대롱 매달려 있기도 했다.
그리고 감옥이라는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휘황찬란한 고가품들이 벽면에 진열되어 있었다.
이 얼마나 부자연스러운 광경들이란 말인가!
‘저 모든 게 함정일 게 뻔하지.’
설령 초등학생 수준의 지능을 가졌다고 해도 수상함을 대번에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허접한 함정들을 비웃어 주면서 달리는 그때였다.
“고개 숙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자칫하단 죽을 수도.”
“어?”
뒤따라오고 있는 유페미나의 음성을 들은 나는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그와 동시에 예리한 화살이 내 뒤통수를 스치며 지나갔다.
벽에 박힌 화살을 육안으로 확인한 나는 십년감수했다.
“헉, 허억……! 가, 갑자기 이게 뭐야? 골로 갈 뻔했잖아?”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 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노라니, 유페미나가 내 등을 세게 밀쳤다.
그 탓에 기우뚱, 균형을 잃고 기울어진 나는 볼썽사납게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가 서 있던 자리 위로 창날이 솟구쳐 올랐다.
유페미나가 날 밀쳐 주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저 창에 꼬챙이처럼 꿰뚫려 죽었을 것이다.
소름이 돋는다.
“힉! 히야아악!! 이게 대체 뭐냐고오!!”
“미안해요. 내가 함정을 작동시켰나 봐요.”
유페미나가 멋쩍어하며 헤헤 웃는다. 그녀의 양손에는 형형색색의 꽃 몇 송이가 들려 있었고.
…이런 미친.
“이런 장소에 꽃이 자라고 있다는 게 이상하지 않아? 함정일 게 뻔하잖아! 근데 꽃을 따고 앉았어? 엉?! 초딩도 안 당할 함정에 당하다니, 이 멍청한 계집! 너는 생각이란 게 없는 거냐! 그리고 애초에 지금 같은 상황에 왜 꽃 따위를 따는 건데? 빌어먹을! 쓸모없는 년! 내가 너 때문에 죽었으면 책임졌을 거냐!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길이나 제대로 찾아!”
…라고 고래고래 소리쳐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만.
‘참자, 참아.’
나는 간신히 화를 억눌렀다.
유페미나는 연약해 보이는 겉모습과 상반되게 엄청난 실력을 가진 인물이다.
추정하기로는 핏빛 마녀 유라와 동급 혹은 그 이상의 전투 능력을 발휘한다.
그리고 단 3명밖에 존재하지 않는 에픽 직업 전직자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만큼 대단한 인물을 함부로 대할 만한 배짱이 내게는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후로이를 구출하기 위해서는 그녀의 힘이 반드시 필요했다.
나 혼자만의 능력으로는 후로이를 구출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녀가 아무리 잘못하더라도 화를 내기는커녕 계속 비위를 맞춰 줘야만 한다.
“조, 조심하라고. 난 너랑 다르게 방어 마법 같은 거 사용하지 못하니깐.”
“네~ 네~ 미안하네요.”
소심하게 한마디 던지는 내게 무성의한 태도로 사과하는 유페미나!
그에 나는 다시 한 번 발끈하고 말았다.
“이런 개 같은 년! 사람을 죽일 뻔한 주제에 잘도 뻔뻔한 태도를 취하는구나! 당장 무릎 꿇고 사죄하란 말이다!”
…라고 소리쳐 주고 싶다만.
“참아야지……. 크으……. 응?”
분해서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던 나는 새로운 불안을 감지했다.
유페미나가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바나나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저 수상쩍은 걸 따 먹으려고? 에이, 설마. 무슨 원숭이도 아니고…….’
내가 설마, 설마 하는 그 순간!
폴짝, 가볍게 점프를 뛴 유페미나가 결국 바나나를 따서 손에 쥐고 말았다.
아니, 대체 왜?
우지끈!
유페미나가 천장에 매달려 있던 바나나를 딴 직후!
내가 밟고 있는 지면이 파열음을 터뜨리더니 급기야 무너져 내렸다.
“끼아아아악!!”
몸을 옆으로 굴림으로써 붕괴의 위험으로부터 간신히 벗어난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유페미나에게 소리쳤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왜 이 상황에 바나나 따위를 따 먹는 거냐고!”
어느새 입 한가득 바나나를 베어 문 유페미나가 무슨 그런 황당한 질문을 하냐는 표정을 짓고 대답했다.
“우물우물. 꿀꺽. 저는 단지 눈앞에 바나나가 있기에 바나나가 먹고 싶어져서 따 먹은 것뿐인데요?”
“평범한 상식으로 생각해 봐라, 좀! 이런 지하 감옥에 바나나가 매달려 있다는 건 이상하잖아! 함정일 게 뻔하지 않냐고!”
“함정이라고 단언하는 게 이상한 거 아닌가요? 순찰 도는 병사들이 배고플 때마다 따 먹으려고 매달아 놓은 바나나였을 수도 있잖아요?”
유페미나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당신, 불쌍한 사람이군요. 세상을 너무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살아가고 있어요. 당신 같은 사람에게는 마음 터놓고 지낼 친구 한 명 없을 게 뻔하네요.”
“…….”
나는 확신했다.
지금 유페미나는 분명히 화가 나 있다. 그래서 일부러 함정들을 발동 시켜서 나를 골탕 먹이고 있는 거다.
‘심정이 이해는 간다.’
유페미나가 이곳까지 나를 구출하러 온 이유는 그녀 스스로에게 득이 되는 어떠한 퀘스트를 수행하기 위함일 것이다.
하지만 후로이를 구출하는 일은 그녀가 얻은 퀘스트와 전혀 연관이 없을 터!
지금 그녀는, 자신의 퀘스트와는 무관한 인물을 구출하기 위해서 행동하고 있는 작금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아 불만이 넘쳐 나는 것이다.
그래서 고의로 함정을 발동시킴으로써 내게 시위하는 거고!
‘성깔하고는…….’
역시, 미인 중에 성격 참한 사람은 드물다. 대부분의 미인들은 공주처럼 떠받들어지면서 살아온 탓인지 안하무인이다.
‘하지만 아영이는 얼굴도 예쁘면서 글래머이고 성격까지 착하지.’
그야말로 완벽한 나의 이상형, 첫사랑 아영을 떠올리자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이다.
“아영이… 보고 싶다…….”
“저기다! 놈들이 저기에 있다!”
“…감히 내 사색을 방해하다니.”
뇌리에 각인되어 있는 아영의 아름다운 모습을 그려 보고 있을 때, 양쪽 복도의 끝에서 소란이 들려오는가 싶더니 금세 병사들이 몰려왔다.
숫자는 무려 50여 명.
절로 한숨이 나왔다.
“어째 저놈들은 쓰러뜨리고 또 쓰러뜨려도 끝없이 나오는 거지? 무진장 귀찮게 하네.”
유페미나가 콧방귀를 뀌었다.
“흥, 어차피 다 제가 처리하고 있는걸요? 당신은 구경만 하거나 도망만 다니기 바쁘잖아요? 아무것도 안 하면서 불평만 늘어놓는 태도, 너무 염치없다고 생각 안 해요? 사람이 기껏 무기까지 찾아다 줬더니 써먹지는 않고 뭐 하자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 당신도 좀 싸워요.”
“내게 싸우라고? 그럴 수 있을 리 없잖아?”
내게는 유페미나가 되찾아 준 유니크 등급의 단검이 있다. 분명 이 단검의 공격력이라면 병사들 따윈 손쉽게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함부로 전투에 나설 수가 없다.
왜냐?
이유야 간단!
“난 방어구가 없다고?”
“…….”
고작 천 옷 한 장 걸치고 있는 내게 방어력이란, 우주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떠나 버린 개념과 같다.
전무한 방어력으로 병사들과 당당히 맞서 싸울 순 없는 법!
마침 유페미나가 나를 돕고 있으니, 기왕 도움 받는 김에 전투는 완전히 유페미나에게 맡기고 나는 조용하고 은밀하게 후로이 구출에만 전념하고 싶다.
“당신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방어구 따위 없어도 이 정도 병사들쯤 손쉽게 처리할 수 있지 않아요?”
“아니. 난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강한 사람이 아니거든. 자, 그럼. 사정이 이렇게 됐으니까 뒷일은 너에게 맡길게.”
“네? 그게 무슨……?”
나는 황당해하는 유페미나의 등을 두드려 준 뒤, 그녀가 발동시킨 함정 탓에 무너져 있는 지면 아래로 몸을 던졌다.
“나 먼저 가서 후로이 찾아올게! 그때까지 시선 끌면서 버텨!”
“이, 이봐요!”
당황한 유페미나가 다급히 나를 붙잡으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녀가 어찌해 볼 새도 없이 난 구덩이 속에 몸을 날렸고,
쿠당탕탕!
“우왓!”
[높은 곳에서 추락하여 2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병사들과 유페미나를 3층에 남겨 둔 채 홀로 4층에 떨어졌다.
“콜록! 콜록! 으으…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았네.”
뿌옇게 일어나는 먼지 속에서 몸을 일으킨 나는 휑하니 뚫려 있는 천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미 유페미나와 병사들의 전투가 시작된 것인지, 빛이 번쩍이면서 병사들의 처절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좋아, 유페미나. 아주 잘~ 하고 있어.”
3층에서 저만큼 요란하게 싸워 준다면, 적들은 나와 유페미나가 여전히 3층에 있다고 믿고서 모든 수비 병력을 3층으로 투입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이곳 4층의 방비는 상대적으로 허술해질 터!
“후훗, 이 틈에 나는 후로이를 찾아서 구출하면 되지. 내가 참 의외로 똑똑하다니까?”
후로이 구출 퀘스트와는 무관한 유페미나에게 모든 전투를 떠맡기다니, 양심도 없냐고?
그래, 잘 봤다. 내게 양심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잘 되기 위해서라면 타인을 이용하고 배신하는 것쯤 식은 죽 먹기다!
홀로 싸우게 생긴 유페미나가 걱정되지도 않냐고?
당연히 걱정되지 않는다. 그녀는 최초의 에픽 직업 전직자로서, 온갖 속성의 마법을 주문 영창도 없이 사용하는 OP(over power)다.
그녀라면 수백 병사, 수십 기사일지라도 단신으로 상대하는 게 가능할 것이다.
‘복제술사라…….’
대한민국 랭킹 1위이자 통합 랭킹 5위에 빛나는 핏빛 마녀 유라!
20억 유저들을 제치고 정점에 올라 있는 그녀조차도 큰 위력의 마법을 사용할 때는 긴 주문을 영창했었다.
하지만 스스로를 복제술사라고 밝힌 유페미나는 유라의 흑마법과 대등한 수준의 강력한 마법들을 주문 영창도 없이 연달아 사용하는 게 가능했다.
‘복제술사… 이름 그대로라면 타인의 스킬을 복제해서 사용하는 마법사 계열 직업 같은데… 아무리 에픽 직업이라지만 저건 너무 사기잖아? 완전히 밸런스 파괴 수준이라고.’
마법사라는 직업의 장점이 뭘까?
다용도의 목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마법의 만능성이 대표적인 장점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보다는 강력한 공격력이야말로 마법사의 가장 큰 장점이다.
검과 창으로 무장한 최강의 전사는 수십 명의 적을 휩쓸 수 있지만, 최강 마법사의 고위 마법 공격은 단 한 방으로 ‘군대’를 궤멸시킬 수도 있다. 그만큼 마법사는 무지막지한 공격력을 발휘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마법을 사용할 때마다 주문을 영창해야만 하고, 고위 마법일수록 주문이 길기 때문에 신속하며 연속적인 사용이 어렵다. 그리고 이는 마법사의 치명적인 단점이 된다.
하지만 유페미나는 마법을 사용할 때 주문을 영창하지 않는다. 신속하게 연달아 마법을 사용하는 게 가능하다는 뜻이며, 마법사라면 응당 안고 가야 할 단점이 그녀에겐 적용되지 않는단 뜻이 된다.
복제술사라는 직업을 간단하게 표현해 보자면, ‘남의 스킬을 복제할 수 있으며 단점이 없는 마법사’쯤이라고 해야 할까? 덤으로 고급 대장장이 기술까지 익히고 있는.
“…음, 그러니까 복제술사는 모든 종류의 스킬을 복제할 수 있고, 페널티 없이 그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뭐… 그런 건가……. 아, 몰라. 어쨌든 개사기야.”
복제술사라는 직업에 대해서 정확하게 추측해 보고 싶었지만, 내 머리로는 생각해 봤자 골치만 아팠다. 그래서 나는 생각을 접고 후로이를 찾는 일에 집중했다.
***
“인간이 저토록 파렴치할 수가…….”
도망쳐 버린 그리드 탓에 병사들 가운데 혼자 남게 된 유페미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자신이 이 냄새나고 칙칙한 지하 감옥까지 달려와서 고생하고 있는 이유가 뭔가?
바로 그리드를 구출하기 위해서다.(구출하려는 이유는 라빗으로부터 받게 된 퀘스트의 클리어를 위해서지만.)
그리드의 압수당한 유니크 등급의 단검을 되찾았을 때, 욕심내서 그것을 빼돌리지 않고 순순히 그리드에게 돌려준 이유는 뭔가?
기왕지사 인연이 이어지게 된 거, 앞으로 잘 지내보자는 뜻에서 보인 호의다.(정확히는 그리드가 유니크 등급의 오브를 만들어 주었으면 해서 보인 호의.)
그렇듯 유페미나는 그리드에게 큰 은혜와 호의를 베풀었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드는 안하무인이었다.
자기가 수행 중인 퀘스트를 클리어하기 위해서 유페미나의 힘을 이용해 먹더니, 이제는 급기야 유페미나를 적들 앞에 혼자 버려두고 자기만 빠져나가 버렸다.
“원활한 퀘스트 수행을 위해서는 한 명을 미끼로 삼아 시선을 끌고, 다른 한 명이 그 틈에 후로인지 후라인지를 구출하는 게 현명하다는 것쯤 나도 알아. 알지만 말이야…….”
참고 또 참았던 유페미나의 분노가 극에 달해서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미끼 역할은 자기가 할 것이지, 은혜도 모르고 나를 미끼로 이용해 먹어? 내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기껏 만든 유니크 등급 단검을 빼앗긴 채 언제까지고 이 감옥에 갇혀 있었을 남자가?”
싸아아아-
유페미나의 주변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뭐, 뭐지?”
“그녀는 마법사다! 마법을 시전할 시간을 주지 말고 당장 제압해!”
유페미나를 둘러싸고 있던 병사들은, 무장한 투구와 갑옷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지기 시작하자 위험을 직감했다. 그리고 서둘러 유페미나를 공격하려고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서리 여왕의 숨결.”
꽈드드드득!!
믿기지 않는 광경이 펼쳐졌다.
갑자기 눈보라가 휘몰아치더니 병사들의 몸이 발끝부터 시작하여 머리끝까지 꽁꽁 얼어붙어 가는 것이다.
“크… 크아아아악!!”
“히익! 몸이… 몸이 굳어 간다아!”
“추, 추워……. 차가워어어!!”
발부터 얼어 버린 바람에 병사들은 도망치지도 못했다.
제자리에서 옴짝달싹하지 못한 채, 끔찍한 고통 속에 꽁꽁 얼어 갈 뿐이다.
잠시 후, 두려움에 물들어 일그러진 표정을 짓고 있는 50여 개의 얼음 동상이 완성됐다.
그 동상들 사이에 고고히 선 유페미나는 새롭게 몰려드는 병사들의 기척을 확인하고 치를 떨었다.
“그리드… 오브 만들어 주기로 했던 약속을 만약에 어기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죽여 버릴 거야.”
피아로 처단 퀘스트에 대비해서 복제해 두었던 수십 개의 마법들이 이제는 11개밖에 남지 않았다.
그에 반해 적들의 숫자는 줄어들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병사들은 마치 공장에서 찍어 내는 공산품처럼 계속해서 끊임없이 몰려왔다.
특히 기사의 존재가 걱정이다.
여태껏 적들은 단 한 명의 기사조차 투입시키질 않고 있다.
윈스톤의 영주가 거느리고 있다는 5명의 기사 전부가 멀쩡히 성안 어딘가에 살아 있다는 뜻이다.
단 11개의 마법만으로 해일처럼 밀려오는 병사들을 모조리 해치우고 5명의 기사까지 상대하는 게 가능할까?
당연히 불가능하다.
기사 NPC의 최소 레벨은 180. 제아무리 유페미나일지라도 쉬이 상대할 존재가 아니다.
“하아…….”
유페미나는 후회스러웠다.
보상에 눈이 멀어서, 그리고 그리드와 친분을 쌓기 위해서 라빗의 퀘스트를 수락한 몇 시간 전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이제 와서 퀘스트를 포기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어? 적은 두 명이라지 않았었나?”
“맞아. 저 여자가 그리드라는 죄인을 탈옥시켜서 둘이 함께 행동한다고 들었는데……. 이런! 그리드라는 놈이 다른 길로 샜군!”
“놈은 후로이의 동료다! 후로이를 구출하기 위해서 4층으로 내려갔을 게 분명해! 당장 병력을 반으로 분리시켜라! 절반은 저 여자를 처치하고, 나머지 절반은 4층으로 향한다!”
새롭게 등장한 병사들은 유페미나가 혼자서만 있는 것을 확인하자 사태를 빠르게 파악했다. 그리고 그리드를 쫓기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처음부터 느꼈던 거지만, 북부의 병사들은 숙련도가 굉장히 높다. 레벨이 낮은 신참 병사일지라도 상황에 대한 대처 능력이 뛰어나다.
평소에 열심히 훈련한다는 반증이다. 비록 약할지라도 방심해서 좋을 대상들이 아니다.
그렇기에 유페미나는 전력을 다했다.
“마왕의 꼬리 불……. 아니, 이곳에서 화염 마법을 사용하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겠지? 빛의 검.”
콰치치칙!
마치 형광등처럼 밝게 빛나는 백색의 검이 허공에서부터 솟아 내렸다.
유페미나는 그리드를 쫓기 위해서 분리된 병사 무리를 향해서 그 검을 발사했다.
서거거거걱!!
빛의 검이 회전하면서 휩쓸고 지나간 자리의 병사들 몸이 갑옷째 두 동강 나면서 잔인한 피의 향연이 펼쳐진다.
그 후, 유페미나는 남은 병사 잔당들을 처리하기 위해서 또 다른 마법을 사용해야만 했다.
이제 남은 마법은 단 9개.
유페미나는 어떻게 해서든 힘을 보존하고 싶었지만, 새로운 병사들이 또다시 몰려오고 있었다.
‘큰일이네. 최악의 경우에는 주사위 굴리기를 사용해야 할 수도 있겠어.’
주사위 굴리기는 대상에게 무작위한 효과를 부여하는 스킬이다.
운이 좋다면 아주 절묘하게 작용해서 상황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스킬이지만, 운이 나쁘면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킬 수도 있는 양날의 검 같은 스킬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행운 스탯이 높아지기 전까진 사용을 자제하려 했지만, 현재 상황으로 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해야 할 가능성이 굉장히 높아 보였다.
기사가 투입되는 게 먼저냐, 후로이를 구출한 그리드가 돌아오는 게 먼저냐가 관건이다.
“…그가 신용할 수 없는 남자라는 게 문제야.”
유페미나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어쩌면 그리드가 자신을 여기에 버려둔 채 혼자서 도망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탓이다.
‘설마 그렇게까지 쓰레기 같은 남자겠어? 최소한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인간으로서의 도리 정도는 지키겠지.’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려 노력하지만…
“으아아앙! 그딴 자식한테 눈곱만큼의 양심이라도 있을 리 없잖아! 나 어떡해!”
유페미나는 울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시간을 되돌려서 라빗의 퀘스트를 거절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
지하 4층 가장 깊은 곳의 독방.
“으으… 으으윽…….”
처음에는 그토록 후각을 괴롭히던 썩은 물웅덩이의 존재를 이젠 인식조차 할 수 없게 된 후로이는 정신의 한계를 맞이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그저 암흑뿐이며 혼자만이 존재하는 좁은 공간 안에서 후로이는 이곳이 어디인지,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 건지, 심지어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제대로 기억할 수가 없게 되어 가고 있었다.
현실 시간으로 50시간, 게임 시간으로는 200시간 가까이 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갇혀 있던 여파다.
“크으으… 크아아아아아!!”
끔찍한 비명 소리가 지하에 메아리친다.
그리고 그리드가 그 소리를 캐치했다.
“…후로이?!”
익숙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낯설지도 않은 음성이다.
그리드는 복도 저 끝에서부터 들려오는 비명 소리의 주인이 후로이임을 대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좋아, 내가 간다! 이 빌어먹을 자식! 나한테 이딴 생고생을 시킨 대가를 반드시 치르도록 해 주마!”
일단 구출해서 퀘스트를 클리어하기만 하면 싸대기를 200대 정도쯤 때려 줄 생각이었다.
이를 악문 그리드는 비명 소리가 울린 방향을 향해서 전력으로 질주했다.
하지만 그의 두 다리는 머잖아 멈추고 말았다.
“기다리고 있었다.”
취조실에서 그리드에게 모욕당하고 엄청난 분노에 휩싸였던 젊은 기사 레오!
그가 그리드의 앞길을 가로막은 것이다.
“뭐, 뭐야. 총각 귀신? 네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지?”
그리드는 대부분의 기사와 병사들이 3층으로 투입되거나 퇴로를 차단하고 있으리라 예측하고 있었다.
하지만 생뚱맞게도 이곳 4층에 기사가 버티고 있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누가 총각 귀신이냐!!”
수치심에 얼굴을 붉히고 소리친 레오가 설명했다.
“너는 후로이와 한패가 아니더냐? 나는 네놈이 혼자서 탈옥하지 않고 반드시 후로이를 구출하러 오리란 사실을 예상하고 기다렸다!”
‘아, 놔. 난 후로이라는 놈이랑 몇 마디밖에 못 나눠 본 사이라는데도 자꾸 한패라고 지랄하네. 어쨌든 NPC 주제에 제법 머리를 썼군.’
그리드는 주변을 살펴봤다. 하지만 레오 외의 다른 기척은 느껴지질 않았다.
두리번거리는 그를 보고 레오가 조소했다.
“핫! 설마 내가 병사들을 대동하고 왔으리라 생각한 거냐? 자의식 과잉이군! 내가 너 따위 저급한 놈을 처단하는 데 굳이 병사들까지 데려올 필요가 있을까? 네놈을 찢어 죽이는 것은 나 혼자만의 힘으로도 충분하다! 그리드……! 그 더러운 주둥이로 날 모욕한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할 것이다!”
레오는 작금의 상황이 기뻐 미치겠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만큼 그리드에 대한 원한이 깊다는 뜻이리라!
그리드는 수 시간 전의 자기 자신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때는 미쳤다고 저 자식한테 까불어 댔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까불지 말걸.’
역시, 사람이 주둥이를 함부로 놀려선 안 되는 법임을 그리드는 새삼 깨달았다.
하지만 후회는 언제나 늦는 법!
레오가 푸른 망토를 휘날리며 돌격해 왔다.
그리드는 서둘러서 스킬들을 사용했다.
“대장장이의 분노! 신속한 몸놀림!”
[대장장이의 분노 효과가 발동합니다. 20초 동안 공격력과 공격 속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신속한 몸놀림 효과가 발동합니다. 1분 동안 민첩성과 회피율이 비약적으로 상승합니다.]
파앗!
레오는 발이 어찌나 빠른지, 그리드와의 거리를 순식간에 지척까지 좁혔다.
한 걸음 떼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코앞인 것이다.
“무슨!”
기겁하는 그리드에게 레오가 섬광 같은 일격을 꽂아 넣었다.
까아앙!
황망히 단검을 뽑아 쥔 그리드가 호선을 그리며 꽂혀 온 레오의 공격을 간신히 방어했다.
그 여파로 인해서 손목부터 어깨까지 찌릿찌릿 저려 와, 일시적으로 오른팔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게 되었지만 그리드는 방어에 성공해서 살아남았다는 그 자체만으로 감사할 따름이었다.
‘이 이상적인 단검이 아니었다면 레오의 움직임을 전혀 따라잡지 못했을 거야.’
사실이었다.
이상적인 단검에 장착된 스킬, ‘신속한 몸놀림’을 사용하면 민첩성이 무려 2배나 상승한다. 그리고 이상적인 단검 자체가 착용자의 민첩성을 20 올려 주기도 한다.
거기에 더해서, 그리드는 이상적인 단검을 제작했을 당시 유니크 아이템을 제작한 보상으로 모든 스탯이 12 상승한 상태였다.
이렇게 도합된 그리드의 민첩성 스탯은 250에 육박했고, 덕분에 레오의 공격을 눈으로 조금이나마 좇고 대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레오가 불쾌하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내 공격을 막았어? 대장장이 따위가?”
레오는 윈스톤의 젊은 기사 중에서 가장 탁월한 실력을 가진 인물이다.
심지어 ‘북부의 신성’이라고 불리며 에트날 왕국 북부 전체에 이름을 날릴 정도였다.
그만한 인물의 일격을, 평범한 대장장이가 요행으로라도 막아 내는 건 결코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레오는 진지하게 전투태세를 취했다.
“네놈, 평범한 대장장이가 아니었군? 아까 취조실에서 잘도 당당히 지껄였던 것은 다 믿는 구석이 있어서였던 게지? 좋다. 내 네놈의 실력을 인정해서 최선을 다해 주마.”
화르륵!
레오의 롱 소드에서부터 붉은 불길이 솟구쳐 올랐다. 화염 속성 마법이 장착된 마법검이었던 것이다.
스탯빨과 템빨을 내세운다면 약간이나마 승산이 있지 않을까, 안일하게 생각하며 일말의 희망을 품고 있던 그리드가 다시금 절망했다.
“마법검이라니……! 안 그래도 강한 녀석이 템빨까지 세워?! 이건 반칙이잖아!!”
후로이 구출까지 남은 제한 시간은 앞으로 25분!
그 안에 마법검을 휘둘러 대는 기사를 해치울 수 있을까?
당연 불가능하다.
1분 안에 살해당할 것이다.
그리드는 완벽하게 전의를 상실했다.
‘무조건 도망쳐야 돼. 이대로는 개죽음을 당할 뿐이니, 퀘스트고 나발이고 도망가는 것밖에는 방도가 없어. 하지만 어떻게 도망치지?’
그리드가 전력을 다해서 뛰어봤자 기사를 따돌릴 순 없을 것이다. 기사의 신체능력은 범인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대상에게 상태이상을 거는 종류의 스킬을 익히고 있다면 또 모를 일이지만, 엄밀히 따지면 대장장이인 그리드에겐 그런 유용한 스킬이 없었다.
결국 그리드는 여기서 레오에게 살해당할 운명이다.
한데 그 순간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레오가 서 있는 자리에서 갑자기 거대한 폭발이 발생한 것이다.
콰콰콰콰콰쾅!!
“우왓!!”
그리드는 폭발의 여파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 몸을 최대한 납작하게 엎드렸다.
하지만 폭발이 워낙 크고 강했던지라 피해로부터 몸을 지키는 게 불가능했다.
[17,3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전설이 된 자는 쉽게 죽지 않습니다. 체력이 최소치가 되어 5초 동안 모든 공격에 저항합니다.]
그리드의 생명력이 1로 고정된다.
그리고 잠시 후 폭발이 멈췄다.
“으윽… 이게 갑자기 무슨…….”
자리에서 일어난 그리드는 가장 먼저 물약부터 마셔서 생명력을 보충했다.
그리고 잔뜩 경계하면서 주변을 살펴보다가 쓰러져 있는 레오를 발견했다.
“쿨럭! 쿨럭!”
피를 토하고 있는 레오. 그는 이미 만신창이였다.
은빛으로 번쩍이며 위용을 뽐내던 갑옷이 넝마가 되었고, 온몸엔 화상을 입어서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못한 채 쓰러져 있었다. 아직 숨이 붙어 있다는 게 기적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레오가 폭발에 휩쓸렸을 때, 그리드는 유페미나가 등장한 줄로만 알았다. 유페미나의 마법이 레오를 덮친 거라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유페미나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질 않았다. 여전히 이곳에는 그리드와 레오 단 두 사람뿐이었다.
영문을 알 수가 없어서 어안이 벙벙해져 있던 그리드가 문득 레오의 검 상태를 확인했다.
레오의 검은 완전히 산산조각 나 있었다. 이번 폭발에서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는 뜻이다. 마치 이 폭발이 레오의 검에서부터 시작된 것만 같았다.
“설마…….”
그리드는 생각했다.
이곳은 지하다.
통풍이 되질 않아 바람 한 점 없고, 3층에서 유페미나가 함정을 발동시킨 탓에 천장이 무너진 상태라 공기 중에 먼지가 가득하다.
이 밀폐된 장소에서 갑자기 화염이 일어난다면……?
그리드는 고등학교 화학 시간에 배웠던 분진 폭발을 떠올렸다.
분진 폭발이란, 공기 중에 떠도는 농도 짙은 분진이 에너지를 받아 열과 압력을 발생하면서 연소, 폭발하는 현상을 말한다.
과거, 분진 폭발 예방 기술이 미흡했던 시절에는 제분소나 탄광, 목재소 등에서 심심찮게 발생한 현상이다.
“하! 뭐야? 그런거였어? 풋! 푸하하핫하핫!!!”
사태를 파악한 그리드는 완전히 긴장이 풀렸다. 그리고 이내 미친 듯이 웃었다.
당연히 레오에게 살해당하며 실패할 줄 알았던 퀘스트를 정말로 운 좋게 성공하게 되었으니 뛸 듯이 기뻤다.
“으윽… 놈… 도대체 무슨 수작을 부린 거지?”
꼼짝 못하고 쓰러져 있던 레오가 간신히 입을 열어 묻는다.
웃음을 그친 그리드가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최대한 멋지게 보이는 표정을 지으려고 애쓰며 말했다.
“이게 바로 너와 나의 실력 차이라는 거다. 사실 난 네가 눈으로 좇지도 못할 엄청난 속도로 움직여서 네 검을 공격, 폭발시켰다. 그 탓에 넌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된 거지.”
“뭐, 뭣이? 어찌 그런 일이 가능할 수가 있지? 넌 대체… 넌 대체 정체가 뭐냐?”
그리드가 단검을 레오의 심장에 겨누며 대답했다.
“난 파그마의 후예다. 그리고 넌 이제 진짜로 총각 귀신이 될 거고.”
푹!!
급기야 그리드의 단검이 레오의 심장을 꿰뚫었다.
말이 씨가 된다더니, 정말로 총각 귀신이 되게 생기다니!
“끄아아아아악!!”
레오는 억울해서 눈도 감지 못한 채 회색빛으로 화해 버렸고, 그리드의 눈앞으로는 수십 개의 알림창이 떠올랐다.
[윈스톤의 기사 레오를 해치웠습니다.]
[칭호 ‘나이트 슬레이어’를 획득하였습니다.]
[8골드를 획득하였습니다.]
[감옥 열쇠를 획득하였습니다.]
[경험치 432,000을 획득하였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북부의 신성’ 레오의 레벨은 정확히 188이었다.
그를 혼자서 해치우고 경험치를 독식하게 된 그리드의 레벨은 21에서 단번에 45까지 올라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덤으로 칭호까지 얻었다.
<나이트 슬레이어>
체력 +100. 근력 +30.
“조오오오오오오았어!!!”
나이트 슬레이어라는 칭호는 기사만 해치우면 얻을 수 있으므로 모든 칭호 중에서 가장 쉽게 획득할 수 있는 칭호다.
다만, 기사를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그만한 실력을 갖춰야 했기 때문에 어지간한 고레벨이 아니고선 획득하지 못하는 칭호이기도 했다.
한데 그리드는 고작 21레벨에 기사를 해치우고 나이트 슬레이어 칭호를 획득한 것이다.
‘고렙의 지표라고도 할 수 있는 나이트 슬레이어 칭호를 내가 얻게 될 줄이야……!’
전사 시절에도 꿈에서나 그려 볼 수 있던 나이트 슬레이어 칭호!
그것을 얻고 전율한 그리드가 여운을 만끽한 뒤, 이어서 환호하며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후로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던 복도 가장 끝 독방 앞까지 도달했다.
“나와라, 후로이!”
철컹!
레오를 해치우고 손에 넣은 열쇠를 이용하자 두꺼운 철문이 쉽사리 열린다.
“윽!”
그리드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독방에 악취가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후로이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해골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피골이 상접해 있었다.
“뭐야, 너. 후로이 맞냐? 전에 봤을 때랑 너무 다른데? 그사이에 대체 무슨 일을 겪었던 거지?”
당초 그리드는 후로이의 뺨을 최소 200대 이상 때려 줄 계획이었지만, 후로이의 상태가 너무 나쁘자 차마 손찌검을 하지 못했다.
측은지심이 들어서가 아니다.
‘한 대라도 때렸다가는 바로 죽어 버릴 것 같은데? 플레이어 살인자로 낙인 찍혀서 범죄자가 될 순 없으니까 일단은 봐주자.’
“…당신은?”
어둠 속에 갇혀 있던 후로이가 서서히 눈을 떴다. 그리고 그리드를 보았다.
그 순간 후로이는 자신이 누구이며 이곳은 어디인지, 그리고 현재 어떠한 퀘스트를 진행하고 있던 중인지 차근차근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당신이… 당신이 바로 나의 구원자이셨군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리드의 눈앞으로 알림창이 떠올랐다.
[퀘스트 성공!]
[칭호 ‘정의의 사도’를 획득하였습니다.]
[용기 능력치가 개방됩니다.]
[모든 능력치가 10 상승합니다.]
[스킬 ‘꺾을 수 없는 정의’가 생성됩니다.]
[윈스톤 내의 명성이 최대치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윈스톤의 주민들은 당신을 극진히 대접할 것입니다.]
[윈스톤 주민들과의 호감도가 최대치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윈스톤의 주민들은 당신과 콩 한 쪽이라도 나눠 먹고자 할 것입니다.]
한편 후로이에게도 온갖 알림창이 떠오르고 있었다.
[퀘스트 성공!]
[세컨드 직업 ‘정의의 사도의 파트너’를 획득하였습니다.]
[용기 능력치가 개방됩니다.]
[정의의 사도와 함께 있을 경우 모든 능력치가 20퍼센트 상승합니다.]
[스킬 ‘꺾을 수 없는 정의’가 생성됩니다.]
[스킬 ‘정의를 위한 희생’이 생성됩니다.]
[칭호 ‘시련을 극복한 자’를 획득하였습니다.]
[불굴 능력치가 개방됩니다.]
[스킬 ‘굳센 의지’가 생성됩니다.]
[축하합니다! 당신은 Satisfy에서 최초로 세컨드 직업을 갖게 되었습니다. 당신만 원하신다면 당신의 업적이 Satisfy에 길이길이 남을 것입니다.]
“아아……!”
후로이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쏟아졌다.
지옥 같은 시련을 견뎌 낸 끝에 얻어 낸 천금 같은 보상들이 그를 감격하게 만든 것이다.
결심한 후로이가 비틀비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곧장 그리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조아렸다.
“그리드 님, 당신과 그때 만났던 것은 단순히 스치는 인연이 아니라 운명이었음이 확실합니다. 나의 구원자, 그리드이시여! 나, 푸른 늑대의 후손 담브 알릉바타르가 정의의 사도의 파트너라는 이름을 걸고 앞으로 일생토록 당신을 따르며 이날의 은혜를 갚아 가겠나이다!”
‘얘 왜 이래?’
자세한 내막을 몰라 어처구니가 없었던 그리드는 후로이를 그냥 미친놈이려니 치부했다.
하지만 후로이는 진심이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저 스치는 인연에 불과하다고 치부했던 그리드를, 후로이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운명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입에 담은 맹세대로 그리드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노력할 예정이었다.
이렇게, 두 사람의 인연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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