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예상치 못한 전개
아이템 제작 승부가 시작되고 2시간이 지났다.
관중들이 무료함을 느끼며 슬슬 흥미를 잃어 갈 무렵이었다.
어느새 검신을 완성한 유페미나는 벌써 칼자루 제작에 돌입하고 있었지만, 나는 아직 검신의 윤곽조차 만들지 못했다. 철을 계속해서 단련하고 또 단련할 뿐이다.
따앙! 따앙!
뜨거운 쇠를 집게로 쥐어서 고정시켜 주고 있는 칸의 도움 덕분에 나는 망치질에만 더욱더 열중할 수 있었고, 단조 작업은 정말이지 깔끔하고 만족스럽게 진행되었다.
[전설적 대장장이의 인내심 효과가 발동합니다. 1시간 동안 집중력과 체력, 방어력이 극도로 상승합니다.]
한창 집중하고 있을 때 알림창이 떠올랐다.
동시에 나는 솟아나는 기운과 빈틈없이 예리한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고, 덩달아 상승한 손재주 스탯 덕분에 망치질을 보다 힘차고 정교하게 해낼 수 있게 되었다.
까아앙!
소음같이 느껴지던 응원 소리가 어느새 완전히 사그라졌다.
이곳이 수천수만 명의 사람이 모여 있는 윈스톤 중앙 광장이라는 사실을 나는 어느새 잊게 되었다. 바로 곁에서 나를 돕고 있는 칸의 존재조차도 희미해져 간다.
고요하다.
이 세상에 오로지 나와 철과 불만이 존재한다.
따아앙- 따아앙-
망치와 나는 별개의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완벽하게 융합되었다. 망치의 움직임에 일말의 저항감도 없었다. 마치 내 손과 발처럼 나의 의지를 고스란히 따랐다.
따아아앙!
어느덧 검신의 형상을 갖추게 된 강철이 청명한 소리를 울리게 되었다.
그때 눈앞으로 알림창이 떠올랐다.
[전설적 대장장이의 숨결이 제작 아이템의 효과를 증폭시킵니다.]
“……!”
번뜩 정신이 들었다.
한없이 고요하기만 하던 세상이 급변하여 소란스러워졌다.
“에리나! 에리나! 에리나!”
“칸 영감님 힘내세요!”
“그리드 믿는다!”
관중들의 외침.
담장 위 새들의 지저귐.
시계탑의 째깍째깍 초침 소리.
그리고 건너편에서 제작에 몰두하고 있는 에리나의 망치질 소리.
온갖 소음이 난무한다.
“아…….”
내 의식이 오로지 철과 불만이 존재하던, 마치 도원향과도 같이 느껴지던 나만의 세계에서부터 깨어나 현실로 되돌아온 것이다.
‘조금 더 그곳에 있고 싶다.’
아쉽다.
무의식의 세계에 잠겨 버릴 정도로 제작에 몰두한 것은 야파 화살을 제작했을 때 이후로 처음이다.
조금 더 그 세계에 있을 수 있다면, 나는 더욱더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밀물처럼 밀려오는 아쉬움을 느끼고 있을 때 칸의 떨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철이라는 것이 이렇게까지 아름다워질 수 있는 것이었나…….”
그제야 나는 완성된 검신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리고 보았다.
흠잡을 수 없이 정교하고, 그 어떤 예술품보다도 아름다운 작은 검신을!
전설적 대장장이 장인의 안목이 소리쳤다.
이는 특급 야파 화살보다 뛰어난 작품이다!
“대, 대단해… 굉장해! 내 생에 이만한 작품을 만드는 데 일조하는 영광을 누릴 수 있게 될 줄이야! 내가 대장장이 가문에서 태어나 대장장이가 된 이유가 오직 이날을 위해서였다는 생각이 들 정도일세!”
칸은 엄청나게 흥분해서 떠들어 댔다.
하지만 나는 침착했다. 괜히 들떠서 남아 있는 작업 과정을 망칠 순 없었기 때문이다.
“인벤토리.”
나는 인벤토리에서 미노타우르스의 뿔을 꺼냈다.
승부를 앞두고 무려 10골드라는 거금을 들여서 구비해 놓은 이유가 다 있다.
나는 이 뿔로 칼집과 칼자루를 제작할 것이다.
칼집은 상황에 따라서 방어 도구로 사용할 경우가 발생하기 때문에 적당한 무게감과 견고함을 갖추는 게 좋고, 칼자루는 사용자의 피로감을 최소화시키기 위해서 촉감이 단단하지 않고 비교적 부드러운 편이 좋다.
미노타우르스의 뿔은 무게감과 견고함을 겸비했으면서도 의외로 촉감이 단단하지 않다. 황동 주물 수준의 감촉이다.
즉, 칼집과 칼자루의 재료로 사용하기에 매우 적합하다는 뜻이다.
슥슥.
우선 칼집은 칼날의 크기를 기준으로, 칼자루는 성인 남성의 손 크기를 기준으로 삼아서 길이와 폭, 모양을 설계한다.
오로지 실용성만 갖추면 된다.
미노타우르스의 뿔은 그 구조에서 특유의 고풍스러운 무늬를 볼 수 있기 때문에, 굳이 특별한 세공 작업을 거치지 않아도 예술성을 발휘한다.
설계를 끝낸 후, 한창 제작에 집중하고 있을 때 관중석에서부터 어마어마한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에리나가 나보다 한발 앞서 단검을 완성한 것이다.
그녀가 만든 단검을 확인한 진행자가 감탄했다.
“이야, 이건 정말이지 대단한 작품이군요! 3시간도 안 돼서 이처럼 훌륭한 작품을 완성하다니, 감탄밖에 안 나옵니다! 자!”
“대체 어떤 작품이 만들어졌길래 그렇게 놀라는 거야!”
“혼자만 보지 말고 우리도 보여 달라고!”
관중들이 완성 된 작품이 궁금하다며 난리를 쳤다.
그들의 궁금증이 최고조로 이르렀음을 확인한 사회자가 무대 뒤쪽에 설치되어 있는 대형 전광판으로 관중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좋습니다! 여러분도 함께 확인하시죠!”
전광판에 에리나가 만든 단검의 모습이 떠올랐다.
굉장히 예리하면서도 멋진 균형을 갖추고 있는 작품이었다.
보통 단검과 비할 수 없이 뛰어난 공격력을 발휘할 것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황동 주물로 제작한 손잡이에는 화려한 무늬가 음각되어서 장식품으로도 손색이 없을 아름다움까지 겸비했다.
“우오오오!!”
“단검이 주인을 닮았네! 저렇게 예쁜 단검은 처음 봐! 갖고 싶어!”
“생긴 건 둘째야. 딱 봐도 성능이 기가 막힐 것 같은데? 진심으로 탐나는군.”
관중들이 열광했다. 이제는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 유저들조차 에리나에게 호감을 보이고 있었다.
이어서 단검의 상세 정보가 떠올랐다.
<매혹의 단검>
등급:에픽
내구력:60/60 공격력:122~127 공격 속도:+8%
*일정 확률로 적을 매혹.
*적에게 공격을 차단당할 시 내구력이 빠르게 소모.
뛰어난 대장장이가 섬세한 세공 실력과 우월한 미적 감각을 발휘하여 제작한 단검입니다.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때때로 상대방의 마음을 훔쳐 옵니다.
예리하게 단련된 칼날이 높은 살상력을 발휘하지만 견고함이 부족하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사용 조건:레벨 100 이상. 민첩성 200 이상.
지력 30 이상. 중급 대거 마스터리.
비록 내구력이 빠르게 소모된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지만, 보기 드물 정도로 훌륭한 단검이다.
흔한 단검과 비교할 수 없는 공격력을 보유했다. 거기에다가 매혹이라는 옵션까지 갖췄다.
매혹은 대상을 3초 동안 무저항 상태로 만드는 위력적인 기술이다. 암살자들이 사용하기에 매우 적합한 무기인 것이다.
유저들은 확신했다.
“결과는 뻔해! 이 승부는 에리나가 무조건 이겼어!”
심지어 윈스톤 주민들도 절망적인 반응을 보였다.
“아아… 저 여자 또한 대단한 대장장이였군. 그리드가 아무리 칸 영감님께 인정받은 대장장이라지만, 과연 저 이상의 물건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라빗을 비롯한 메로 상단 측 관계자들도 승리를 확신하는 듯, 여유 넘치는 표정을 짓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동요하지 않았다.
칸 또한 마찬가지였다.
칸이 허허 웃었다.
“저 소녀 또한 어린 나이에 가공할 만한 실력을 가졌구먼. 나와 비등할 지경이야. 하지만 자네 앞에서는 어림없지. 그렇지 않은가?”
마침 칼집과 칼자루가 완성되었다.
마지막으로 칼과 칼날을 결합시킨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나는 세상의 못생긴 이들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결코 지지 않아요.”
칸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못생긴 이들을 대표하고 있다니? 그게 무슨 소린가? 자네는 대장간을 위해서, 대장간을 대표하여 싸우고 있던 게 아니었던가!”
“…이런 실례. 말이 헛나왔군요. 자, 어디 대장간을 지키러 가 볼까요?”
단검이 완성되었다.
떠오르는 알림창과 단검의 정보를 확인하고 전율한 나는 진행자에게 내 단검을 선보였다.
진행자 녀석은 내 단검을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 관중들에게 실실 쪼갰다.
“이쪽 팀은 2명이 힘을 합쳤음에도 불구하고 에리나보다 더 많은 시간을 소요했군요. 승부의 결과가 너무 뻔하다는 생각을 감출 수 없네요!”
“하하하! 그러게! 여자 하나 상대로 남자 둘이 덤비더니 결국 개망신만 당하고 끝나겠군!”
관중들이 동조한다.
나는 그들 모두를 조소했다.
“내 작품을 보고 너무 놀라서 심장마비 걸리지 않도록 조심들 하라고.”
그때였다.
창칼을 무장한 병사들이 갑자기 무대 위로 난입했다. 그리고 다짜고짜 내 단검을 압수하더니 나를 포박하기에 이르렀다.
“뭐, 뭐야?”
당황하는 내게 중무장한 기사가 소리쳤다.
“8일 전, 윈스톤에 위해를 가하려다가 발각되어 체포당한 후로이라는 테러범과 네가 한통속이라는 정보가 입수됐다! 이에 대해 추궁해야겠다!”
“후로이?”
후로이라면 <윈스톤의 주민들을 위하여>라는 퀘스트를 날름 받아 갔던 그 빌어먹을 놈? 그 자식, 퀘스트에 실패해서 붙잡혔나?
‘쌤통이다, 자식. 아니… 근데 왜 내가 그딴 놈이랑 한통속이라는 거야?’
나는 반발했다.
“뭔 개소리야! 내가 왜 그 새끼랑 한통속이라고 하는 거냐고! 이거 안 놓냐?!”
내가 저항하자 검을 뽑아 쥔 기사가 경고했다.
“목이 베이고 싶지 않다면 저항하지 마라.”
“넵…….”
이 자식, 수틀리면 진짜로 나를 죽일 생각이다. 내 목에 검을 겨누고 있다고!
비무장 상태였던 나는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고, 병사들은 나를 무대 밑으로 끌고 내려갔다.
칸이 그들을 말렸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오! 어찌 사람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우느냔 말인가!”
기사와 병사들은 칸을 무시하고 그냥 지나쳤다.
칸은 결국 메로 상단 관계자들이 앉아 있는 곳까지 달려갔다. 그리고 후덕한 중년인에게 소리쳤다.
“발몽! 이 비겁한 놈! 승부에서 이기지 못하겠음을 알고 이런 식으로 마무리를 짓는 게냐! 네놈은 정녕 윈스톤의 주민들이 두렵지 않은 게냐!”
칸이 아무리 소리쳐봤자 소용 없었다.
발몽이라고 불린 중년인은 어디서 개가 짖느냐는 듯이 대꾸하지 않고 귀만 후볐다.
그렇게 나는, 무력하게 성으로 끌려갔다.
***
‘저럴 수가!’
라빗이 상인으로서 보내온 세월이 벌써 20년이다. 그동안 수많은 명품을 취급해 오면서 쌓아 온 남다른 안목이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그리드가 만든 단검을 확인한 순간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저건 보통 물건이 아니다! 에리나의 단검과 비교할 수가 없어! 우리가… 우리가 졌다! 설마 저 정도 솜씨를 가졌을 줄이야!’
그의 곁에 앉아 있는 발몽이 노한 음성으로 읊조렸다.
“졌군.”
그리드가 제작한 단검을 확인한 발몽 또한 라빗과 마찬가지로 승부의 결과를 바로 눈치챘다. 그 역시 명품을 보는 안목이 라빗 못지않게 탁월했던 것이다.
라빗이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방심했습니다.”
발몽이 이번만큼은 부하의 실패를 용서해 줬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네의 잘못이 아니지. 자네가 고용한 대장장이는 충분히 대단했어. 하지만 상대가 너무 강했을 뿐이야. 겉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말이야.”
발몽은 처음 그리드를 봤을 때 애송이라고 단언했었다. 하급 대장장이나 됐을까 싶었다. 그런데 결과가 이렇다.
이번 실패는 라빗의 탓이 아니다. 그저 그리드가 엄청난 놈이었을 뿐이다.
“겉모습을 허접쓰레기로 위장해서 상대를 완벽하게 방심시켜 놓고 이런 재주를 부리다니……. 정말이지 어지간한 놈이 아니군. 일단 이 대회는 적당히 수습해야겠어. 이딴 결과를 받아들일 수는 없잖은가?”
발몽은 반드시 대장간을 갖고 싶었다. 승부에 졌다고 해서 대장간을 포기하고 이윤을 놓치는 것은 상인으로서 용납할 수 없었다.
라빗이 그를 설득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공개적으로 약속했습니다. 승부의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번에야말로 민심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잃게 될 것입니다.”
발몽이 언성을 높였다.
“이 와중에도 그딴 소리를 지껄이는 겐가! 그깟 민심 얻자고 대장간을 포기하는 짓 따위, 결코 할 수 없네!”
라빗은 더 이상 발몽을 말릴 수 없었다. 그렇잖아도 지금같이 최악의 사태를 발생시킨 장본인이 바로 자신이 아닌가? 그렇기에 눈치를 볼 뿐이었다.
그때 발몽이 사악한 미소를 그렸다.
“그리고 애초에, 아직 관중들은 승부의 결과를 모르지 않는가? 저들에게는 우리와 달리 물건을 보는 안목이 없어. 자세하게 확인시켜 주지 않는 이상, 그리드가 제작한 단검이 에리나가 제작한 단검보다 월등히 뛰어나다는 사실을 단박에 알아채는 게 불가능하지. 필립슨 경!”
필립슨은 윈스톤의 영주, 로우 남작이 발몽에게 호위로 붙여 준 기사였다.
이것만 봐도 현재 윈스톤에서 발몽의 입지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발몽이 필립슨에게 명령했다.
“저 녀석을 얼마 전 붙잡았던 후로이의 동조자라는 죄목으로 당장 체포하시오. 그리고 저 녀석이 만든 단검을 반드시 압수해야만 하오. 저 단검의 정보가 사람들에게 공개되어선 절대로 안 되니까!”
“알겠습니다.”
명을 받든 필립슨이 병사들을 이끌고 무대에 난입했다. 그리고 신속히 그리드의 단검을 압수하고 그리드를 체포했다.
“괘씸한 놈. 대장장이 나부랭이 따위가 나를 이기려 들다니.”
그리드가 체포되는 모습을 낄낄거리며 지켜보던 발몽이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라빗에게 말했다.
“어떤가? 승부의 결과가 아직 나오기 전에 녀석을 체포해 버렸으니, 민심을 잃을 우려도 없겠지?”
“…그렇습니다.”
발몽의 일처리는 하나부터 열까지 납득할 만했고, 메로 상단의 입장에서는 최선이었다.
평소의 라빗이었다면 발몽과 똑같이 일처리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저 그리드라는 청년…….’
단 3시간 만에 저만큼 대단한 작품을 만들어 낸 인물이다. 저 정도 대장장이 실력이라면, 아마도 대륙을 통틀어 최고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저처럼 젊은 나이에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가 되다니?
그야말로 독보적인 천재다.
‘엄청난 성장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만약 저 청년과 협력할 수만 있다면 지금과 비할 바 없이 큰 부를 축적할 수 있을 터인데…….’
라빗은 오로지 이윤에 따라 움직이는 사내다. 그는 상인의 본능으로서 그리드에게 지대한 관심과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한편, 무대 위의 유페미나는 십년감수하고 있었다.
‘뻔히 질 승부를 무마할 수 있게 됐어.’
매혹의 단검을 만든 순간, 그녀는 이번 승부에서 자신이 이길 가능성이 엄청나게 높다고 자부했었다. 매혹의 단검이 그만큼 뛰어난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리드가 만든 작품은 일견하기에도 자신의 것과 비할 바 없이 대단했다.
그 정보가 전광판에 떠오르는 순간, 유페미나는 자신이 패배하면서 퀘스트에 실패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근데 바로 그때, 그리드가 체포당하는 게 아닌가?
참으로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찝찝하긴 하지만…….’
무대에서 내려온 유페미나가 라빗에게 찾아가 요구했다.
“전개가 이상하게 됐고, 실제 결과는 달랐을 수도 있지만, 관중들은 저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 상황이었어요. 비록 승부가 중단되었다고는 해도 관중들에게는 제가 승리했다는 인식이 충분히 심어져 있죠. 이것만으로도 메로 상단은 승부의 의도를 달성한 거겠죠? 그러니 보상을 원해요.”
라빗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말대로입니다. 약속을 지키지요.”
[퀘스트 성공!]
[1,500골드를 획득하였습니다.]
[칭호, ‘승부사’를 획득하였습니다.]
[투지 능력치가 개방됩니다.]
[행운 능력치가 개방됩니다.]
[주사위 굴리기 스킬이 생성됩니다.]
무리 없이 보상을 얻게 되자 안도감과 기쁨을 느낀 유페미나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녀는 새롭게 생성된 스탯들과 스킬의 상세 정보를 확인했다.
<투지>
생명력이 떨어질수록 공격력과 정신력이 상승합니다.
*수치가 높을수록 효과가 상승합니다.
*이 능력치에는 능력치 포인트를 분배할 수 없습니다.
<행운>
이로운 현상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수치가 높을수록 효과가 상승합니다.
*이 능력치에는 능력치 포인트를 분배할 수 없습니다.
<주사위 굴리기>
정육면체의 주사위를 굴려서 나오는 숫자에 따라서 다른 현상이 발생합니다.
*사용 대상이 자신이나 아군일 경우:주사위에서 4 이상의 숫자가 나온다면 이로운 효과가 발생. 주사위에서 3 이하의 숫자가 나올 경우 해로운 효과가 발생.
*사용 대상이 적일 경우:주사위에서 3 이하의 숫자가 나온다면 이로운 효과가 발생. 주사위에서 4 이상의 숫자가
나올 경우 해로운 효과가 발생.
‘이거 완전히 랜덤 스킬이잖아?!’
투지와 행운.
2개 스탯의 효과는 실로 만족스러웠다. <복수의 대행자> 퀘스트를 실패한 뼈아픈 기억이 잠시나마 희미해질 정도로 기뻤다.
하지만 주사위 굴리기 스킬은 영 아니올시다였다.
스킬을 사용해서 숫자가 잘만 나온다면 좋겠지만, 만약 숫자가 나쁘게 나온다면?
생각하기도 끔찍한 최악의 사태가 발생할 것이다.
‘하지만 행운 스탯을 높이고 나면 주사위가 잘 나올 확률도 올라가겠지? 언젠가 행운 스탯이 높아지면 유용하게 쓸 수도 있을 거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아쉬움을 달랜 유페미나가 라빗과 작별하기에 앞서서 물었다.
“근데, 그 예의 모르고 개념 없는 남자가 왜 잡혀간 건지 아세요?”
“윈스톤에 위해를 가하려던 인물과 함께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목격됐었다고 합니다.”
“공범으로 의심받는 거군요?”
“그렇지요.”
“헤에…….”
그리드는 다짜고짜 시비를 걸고 함부로 폭언을 했었다. 가능하다면 혼쭐을 내 주고 싶었는데, 스스로 알아서 체포당했으니 쌤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덕분에 퀘스트도 클리어했고 말이야.’
정말로 속이 후련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쉬움도 느껴졌다.
‘정체를 알고 싶었는데…….’
그가 정말로 유니크 등급 직업의 전직자라면, 그와 친분을 쌓는 편이 여러모로 이득이었을 것이다.
‘아니, 아니야. 상종하지 않는 게 좋았어. 그 남자 성격이 너무 나쁘잖아? 혹시라도 그와 가까이 지내다가는 미간에 주름이 생길 거야.’
일말의 미련을 떨쳐 낸 유페미나가 그대로 떠나려 하는데 라빗이 불러 세웠다.
“당신, 실은 대장장이가 아니지요?”
“……?!”
기겁한 유페미나가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그,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제가 만든 단검 못 보셨어요? 대장장이가 아니라면 어떻게 그런 물건을 만들겠어요?”
“당신이 굳이 이름을 감추고 있을 때부터 에리나라는 이름이 본명이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챘죠. 그리고 대장장이라고는 믿기지 않게 하얀 피부와 고운 손을 가지고 있다는 점도 수상했고요.”
본래 대장장이란, 직업의 특성상 피부가 검게 그을려지고 손에는 굳은살이 가득 잡히는 법이다. 그런데 유페미나의 생김새는 대장장이와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풀무질은 굉장히 조잡했습니다. 심지어 초급 대장장이보다 못한 실력이었죠.”
“…….”
“당신이 칸을 무대로 불러들였을 때부터 더욱더 눈여겨보았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일하는 모습이 칸과 꼭 닮아 있음을 확인했죠. 아마도 당신에게는 타인의 기술을 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 같더군요.”
라빗이 제시하는 근거들에 유페미나가 요목조목 반박하고자 한다면 못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잠자코 있었다.
어떤 새로운 퀘스트의 전조임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그래서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죠?”
라빗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혹시 저를 도와주지 않겠습니까? 그리드를 구출하도록 하죠.”
“네? 왜요? 당신은 그 남자의 적이 아니었어요?”
라빗이 어깨를 으쓱였다.
“돈 앞에 영원한 적은 없는 법이죠.”
“당최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는데요?”
유페미나는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에 라빗이 그녀를 인적 없는 골목으로 인도했다. 그리고 기척이 없음을 철저히 확인한 뒤에야 입을 열었다.
“메로 상단은 윈스톤에서 최대한 이득을 취하고자 욕심을 부리다가 시한폭탄 같은 위험성을 품게 되었습니다. 언제라도 메로 상단의 악행이 스테임 백작에게 고발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죠. 즉, 메로 상단의 미래에는 암운이 끼어 있단 뜻입니다. 제가 상단을 떠날 때가 된 거죠.”
라빗의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저는 그리드의 솜씨를 본 순간 제가 앞으로 몸담아야 할 새로운 직장이 어디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로 칸의 대장간이죠. 저는 칸의 대장간에 취직할 겁니다. 그리고 그리드와 팀을 이룰 겁니다. 제 인맥과 사업 수완을 이용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드의 작품들을 유통시킬 겁니다. 제가 그리드를 잘만 돕는다면, 저와 그리드 둘만으로도 중소 상단에 버금가는 수익을 창출할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그, 그 정도예요?”
유페미나의 눈도 반짝였다.
일개 유저에게 상단급 이익을 창출할 잠재력이 있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지금 상인 랭킹 1위가 누구더라?’
잠시 후, 기억을 뒤져 본 유페미나가 누군가를 떠올렸다.
‘맞아, 베이가였지. 그는 세 달 전에 유저 최초로 상단의 주인이 됐다고 했어. 하지만 상단의 규모가 워낙 작고, 시장을 선점하고 있던 NPC 상인들의 텃세 때문에 여태까지 이렇다 할 수익을 내지 못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즉, 상인 랭킹 1위조차도 현재 시점에서는 소규모 상단조차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는 실정이라는 것이다.
한데 그리드는 단지 아이템 제작 능력만으로 중소 상단 못지않은 수익을 창출할 수 있을 거라고 한다.
‘보통 직업을 가진 인물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그 정도일 줄이야…….’
그리드를 새삼 다시 보고 있는 유페미나에게 라빗이 계획을 설명했다.
“제가 칸의 대장간에 취직하기 위해서는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 메로 상단과 윈스톤 영주의 몰락. 둘째, 저의 이미지 쇄신.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 일단 그리드를 구출해야 한다는 거죠. 만약 제가 그리드를 구하고 메로 상단과 윈스톤 영주를 몰락시키는 일에 일조할 수만 있다면, 저는 그리드와 윈스톤 주민들에게 호감을 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그 과정에서 제 도움이 필요하다는 거군요?”
“네. 저는 당신의 능력을 높이 사고 있거든요. 사례는 충분히 하겠습니다.”
[퀘스트 <라빗의 취업 활동 돕기>가 생성되었습니다.]
<라빗의 취업 활동 돕기>
난이도:S
라빗은 메로 상단의 미래를 불투명하게 보고 있다. 이대로는 머잖아 메로 상단과 함께 자신까지 몰락하리라 예견한 그는, 차라리 자신의 손으로 메로 상단을 무너뜨리고 이미지를 쇄신하여 새로운 직장에 취직하고자 한다.
라빗을 도와 그리드를 구출하고, 메로 상단과 윈스톤의 영주를 무너뜨려라!
퀘스트 클리어 조건:윈스톤 성의 지하 감옥에 갇혀 있는 그리드를 구출. 메로 상단과 윈스톤 영주의 몰락.
퀘스트 클리어 보상:5,000골드. 라빗과 윈스톤 주민들과의 호감도 최대치.
퀘스트 실패 시:레벨 ?2. 라빗의 사망. 라빗과 관련된
모든 퀘스트가 영구적으로 소멸.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믿기지 않아…….’
퀘스트를 확인한 유페미나는 할 말을 잃었다.
본래 보상으로 칭호를 주는 퀘스트와 S급 난이도의 퀘스트는 결코 쉽게 발생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그리드와 엮이고 나자 연달아 이런 퀘스트들이 발생하고 있다.
그리드라는 인물이 최소한 이 윈스톤에서만큼은 엄청나게 주요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그리드… 그 남자가 밥맛없는 게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커다란 능력과 존재감을 가지고 있음은 확실해. 일이 이렇게까지 된 이상, 이참에 인연을 쌓아 두는 편이 현명할 것 같아.’
결심한 유페미나가 퀘스트를 수락했다.
“좋아요. 돕도록 하죠.”
[퀘스트를 수락하였습니다.]
한 남자가 직장을 옮기겠다는 이유만으로, 거대 상단과 한 영지의 주인이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
윈스톤의 주민들이 칸의 대장간에 모였다.
“후로이가 윈스톤을 벗어나지도 못하고 잡혀갔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후로이에게 의뢰를 맡긴 것이 우리라는 사실을 영주는 이미 알고 있겠죠? 큰일입니다. 제2의 후로이가 나타나지 않도록 우리들에 대한 감시가 더욱더 철저해질 거예요.”
“우리는 이제 정말로 아무것도 못하게 되겠군. 윈스톤은 이대로 영영 메로 상단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는 건가…….”
주민들이 동요하고 있었다.
평소의 칸이라면 그들을 이끌었을 테지만, 현재 칸은 남을 돌볼 여력이 없었다.
‘그리드…….’
후로이는 윈스톤의 실태를 스테임 백작에게 고발하려다가 발각당해 체포되고 말았다. 영주와 메로 상단이 바보가 아닌 이상, 후로이를 평생 동안 감옥에서 내보내지 않을 것이다.
그리드가 칸을 비롯한 윈스톤 주민들과 가까이 지냈다는 점, 그리고 후로이와 공범이라는 죄를 뒤집어썼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그리드 또한 후로이와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그리드가 평생 감옥에서 썩도록 만들 순 없어. 필히 구해 내야 한다!’
결심한 칸이 소리쳤다.
“이대로 두 눈 뜬 채 당할 수는 없소! 우리들의 손으로 우리들의 미래를 지켜 냅시다! 우리 손에 창칼을 쥐는 거요! 그리고 윈스톤에서 영주와 메로 상단을 몰아내는 거요!”
주민들이 기겁했다.
“바, 반란이라도 일으키자는 겁니까?”
“반란? 반란을 일으킨 건 영주 놈이지! 우리는 스테임 백작님의 백성으로서, 스테임 백작님의 뜻을 거스르고 악독한 메로 상단과 손을 잡은 영주 놈을 처단하고자 궐기하는 거요!”
주민들은 자신들에게 영주를 처단할 명분이 충분히 있음을 다시금 상기했다. 그러자 사기가 충천해졌다.
“좋아! 나는 칸 영감님을 따르겠어!”
“우리들의 힘으로는 영주를 몰아내는 게 불가능하겠지. 하지만 우리들이 궐기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세상 사람들은 윈스톤이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알게 될 거야. 그러면 머지않아 스테임 백작님께 윈스톤의 소식이 전해질 테고!”
“우리를 도우려다 감옥에 갇혀 버린 그리드와 후로이를 위해서라도 싸워야만 해!”
“나도 싸우겠어!”
스스로의 힘으로 윈스톤의 운명을 바꿔 놓겠다고 결심한 주민들!
그를 확인한 칸이 창고의 문을 개방했다.
창고 안에는 병장기가 가득했다. 그리드가 아이템 제작 승부에 대비해서 연습하면서 만들었던 물건들이다. 재료의 한계 탓에 성능이 탁월하지는 못했지만 농기구보단 나았다.
“우오!”
칸의 지휘 아래 병장기를 무장한 주민들이 잔뜩 흥분했다.
“당장 메로 상단으로 쳐들어갑시다!”
“그래! 발몽 놈을 잡아 족치는 거야!”
칸이 그들을 제지했다.
“우리가 메로 상단을 우선 습격한다면, 우리의 궐기 소식은 영주에게 빠르게 전달될 것이며 결국 영주 성의 방비가 삼엄해질 것이오.”
“그러면 영주의 성으로 쳐들어가는 게 먼저인 겁니까?”
“맞소. 우리의 궐기 소식이 영주에게 전해지기 전에 영주의 성부터 기습하는 게 옳소. 영주를 인질로 삼으면 병사들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것이고, 우리는 메로 상단을 손쉽게 처단할 수 있을 것이오!”
한 사내가 나섰다.
“지금의 영주 성을 설계한 건축가가 저의 증조할아버지십니다. 그래서 저희 집에는 성의 설계도가 있지요. 설계도를 통해서 비밀 통로를 파악하고, 그곳으로 잠입하면 수월하게 거사를 치를 수 있을 겁니다.”
“오오!”
커다란 희망이 보였다. 여태껏 무력하기만 하던 주민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영주와 메로 상단을 몰아낼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을 얻었다.
하지만 아주 잠시뿐이었다.
쨍그랑!
대장간 2층의 창문들이 불시에 깨어지더니 활을 무장한 병사들이 창틀을 타고 넘어 난입해 왔다.
“벌집이 되고 싶지 않다면 무기를 버려라!”
순식간에 대장간 2층을 점령한 수십 궁병들이 1층에 모여 있는 주민들에게 활시위를 겨눴다.
놀란 주민들이 겁을 먹고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대장간으로 발몽이 들어섰다.
그가 유쾌하게 웃었다.
“이야, 나는 단지 대장간을 넘겨받으러 왔을 뿐인데 공을 세울 기회까지 얻게 되었군! 하하하!”
축 늘어진 턱살이 웃을 때마다 펄럭펄럭 흔들린다.
발몽의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비웃어 준 칸이 일갈했다.
“그리드에게 누명을 씌워 체포하여 승부의 결과를 흐지부지하게 만든 네놈이 무슨 권리로 대장간을 넘겨받겠다는 게냐!”
발몽이 어깨를 으쓱였다.
“승부의 결과가 흐지부지해지도록 만들어? 말도 안 되는 소리. 메로 상단의 승리는 기정사실이었다. 우리가 고용한 대장장이의 작품은 누가 봐도 훌륭했잖아? 너와 그리드가 합심해서 만든 단검이 공개되었어 봤자 그녀의 작품을 넘어서진 못했을 것이다. 관중들에게 물어봐라. 모두 공감할걸? 이는 즉, 메로 상단이 제작 승부에서 승리했다고 말해도 무방하며 대장간의 합당한 주인은 메로 상단이라는 뜻이지.”
“놈! 네놈의 안목이라면 그리드가 만든 작품이 훨씬 더 뛰어났음을 눈치챘을 터! 승부에서 패배할까 두려워 그리드를 급히 체포한 것을 내 모를 줄 아느냐!”
발몽이 조소했다.
“탓하려면 내가 아니라 안목 없는 대중들을 탓해야지 않겠어? 뭐, 어쨌든 무기부터 버려라. 반란죄로 즉각 처형당하고 싶지 않다면.”
“일개 상인 나부랭이 주제에 어디서 명령질이냐!”
“호오, 내가 상인 나부랭이라는 게 문제였어? 그렇다면 내가 아니라 필립슨 경의 명령을 받들도록 해라. 필립슨 경, 전시도 아닌 상황에 일반 백성이 병장기를 무장하게 되면 그것만으로 반란죄가 성립되지 않소? 저들을 어서 진정시키시는 게 좋겠소.”
발몽의 곁에 묵묵히 서 있던 필립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손짓하자 창을 무장한 병사들이 돌입했고, 2층을 점령 중인 병사들은 활시위를 당겼다.
“모두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그리고 칸, 그대는 반란의 주모자로 체포하겠다.”
주민들이 격노했다.
“더러운 자식! 네깟 놈이 기사라고? 영주와 발몽의 개에 불과하다! 네놈의 명령 따위 듣지 않아!”
필립슨이 2층의 병사들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화살비가 쏟아져 내렸다.
푸푸푹!
“크아악!”
“히익!”
일말의 망설임 없이 쏘아진 화살에 상처 입은 주민들이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칸이 치를 떨었다.
“악독한 놈들!”
“다음은 머리를 겨냥하라고 할 것이다. 죽고 싶지 않다면 무기를 버려라.”
비록 똑같이 무기를 쥐었을지언정, 평범한 백성들이 훈련받은 병사를 상대하기엔 어림도 없다.
이대로 싸워 봤자 의미 없는 개죽음을 당할 게 뻔하다는 뜻이다.
“으으…….”
챙그랑!
힘없이 떨어진 창칼들이 지면 위를 나뒹군다.
각오를 다지고 힘들게 손에 쥔 무기를, 무력한 주민들은 공포 앞에 다시금 내려놓고 만 것이다.
분함을 못 이겨 피눈물 흘리는 주민들을 보면서 발몽은 박장대소했다.
“하하하하! 우매하기 짝이 없는 것들! 결국 개처럼 꼬랑지 내릴 놈들이 쓸데없이 저항하기는! 이참에 확실하게 깨달아라! 너희는 지배당하는 쪽이다! 너희가 해야 할 일은 무조건적인 복종뿐이라는 뜻이다! 두 번 다시는 사특한 마음을 품고 반항하지 마라!”
필립슨이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대장간의 모든 병장기를 압수해라. 그리고 반란의 주모자인 칸을 체포해라.”
“예!”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들을 통솔하는 필립슨에게 다가선 발몽이 속삭였다.
“필립슨 경, 주민들의 반란이 실행되어 피해가 발생하기 전에 현장을 적발하고 제압한 나와 경에게 영주께서 큰 상을 내리실 게 자명하오. 오늘 밤 자축하는 의미로 한잔하시는 게 어떻소? 내 경을 위하여 산해진미와 미녀들을 준비해 놓겠소이다.”
“그것참 감사하군요. 오늘 밤은 신 나게 놀 수 있겠습니다. 한데 미녀는 따로 준비해 놓으실 필요가 없겠습니다.”
필립슨의 탐욕스러운 시선이 한쪽에 고정되어 있었다.
발몽이 그 시선을 따라가 확인해 보니, 구석에 모인 채 겁에 질려 떨고 있는 노약자와 여자들이 보였다. 여자 중에는 이제 갓 15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소녀도 있었는데, 성인이 되고 나면 미인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미색을 가지고 있었다.
눈살을 찌푸린 발몽이 혼잣말했다.
“저토록 어린아이를 탐하다니… 나보다 더한 놈이로군.”
“음? 상주, 뭐라고 하셨습니까? 죄송하게도 말씀을 못 들었군요.”
“아니, 아니요. 못 들었다면 되었소. 어차피 단순한 혼잣말이외다.”
반란을 결심한 주민들을 운 좋게 발견해서 제압한 발몽과 필립슨이 영주의 포상을 기대하며 시시덕거리고 있는 그때, 주민들은 포박당해 끌려가는 칸을 보며 절망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뭐가 어떻게 돼? 끝장이지……. 윈스톤에 우리들이 의지할 사람과 장소는 더 이상 남지 않게 됐어.”
“차라리 떠날 수 있을 때 떠날 걸 그랬어……. 이제는 이곳을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도 못하고…….”
칸은 윈스톤 주민들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정신적 지주였다. 하지만 이제 그마저도 지하 감옥으로 끌려가 갇히게 되었으니 주민들은 의욕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구원자가 필요했다.
***
윈스톤 성의 지하 감옥.
“…….”
대체 몇 날 며칠이 흘렀을까?
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아 캄캄한 어둠 속에 홀로 갇힌 후로이의 정신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있었다. 지금이 현실인지 가상현실인지 구분이 안 될 지경까지 이르렀다.
‘여기가 어디였지?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거지? 이 지옥을 벗어날 수는 없는 건가?’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 현실에서 후로이의 뇌파는 심각한 불안정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S.A그룹 몽골 지부의 분위기는 무척이나 무거웠다.
“뇌파가 너무 불안정합니다. 이대로는 담브 알릉바타르의 건강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당장 강제 로그아웃시키지 않으면 담브 알릉바타르는 앞으로 일생을 정신병원에 갇혀 지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전문가 전원이 이번 퀘스트를 포기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하지만 몽골 지부장 박은혁의 생각은 달랐다.
“알릉바타르는 48시간하고도 10분을 견뎌 주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홍보 차원의 문제가 아니야. 알릉바타르라는 한 사람의 피나는 노력을 우리가 함부로 물거품으로 만들 순 없어. 앞으로 남은 시간은 고작 1시간 50분. 그때까지 우리는 끝까지 알릉바타르를 지켜본다.”
강제 로그아웃을 불허한다는 말이다.
임원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Satisfy에 유저를 위험에 빠뜨리는 퀘스트가 존재한다는 자체만으로도 비난을 받아 마땅한 일인데, 유저의 안전까지 책임지지 못한다면 회사는 큰 타격을 입을 겁니다.”
“전 세계가 Satisfy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Satisfy 서비스 중단 운동을 벌일 수도 있어요!”
박은혁은 임원들의 말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나의 독단으로 결정한 일이오. 만약 일이 잘못되더라도 모든 책임을 내가 질 것이니 걱정 마시오. 회사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하겠소.”
“아니,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시겠다는 겁니까? 지금 상황이 고무적인 것도 아니고 오히려 회의적이질 않습니까? 그리드가 후로이를 구출할 확률은 고작 9퍼센트밖에 되질 않습니다! 게다가 그리드는 후로이와 공범이라는 의심을 사고 체포당했어요! 후로이를 구출하기는커녕 그리드도 지하 감옥에 갇히게 생겼다고요! 어차피 실패할 퀘스트, 미련 갖지 말고 조금이라도 빨리 강제 로그아웃시키는 게 현명한 판단 아닙니까?!”
박은혁의 생각은 달랐다.
“그리드가 체포당한 점은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좋지 않소? 어떤 형태로든 지하 감옥과 가까워졌으니까.”
임원들이 혀를 내둘렀다.
“그리드가 제아무리 레전드리 직업 전직자라고 해 봤자 저레벨입니다. 더군다나 아이템도 모두 몰수당한 상태라 무기도 없어요. 저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들 텐데, 지하 감옥에 갇히게 되면 그걸로 게임 오버지 어떻게 후로이를 구하겠습니까?”
“이미 결정한 사항이니 더 이상 아무 말 마십시다.”
일축한 박은혁이 다시금 모니터링에 집중했다.
1번 모니터에는 현실 시간으로 약 48시간. 게임 시간으로는 약 192시간 동안 감옥에 갇힌 채 패닉 상태를 겪기 시작한 후로이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2번 모니터에는 병사들에게 연행되어 이제 막 윈스톤 성에 들어선 그리드의 모습이 보였다.
‘분명, 지금 상황은 절망적이기 짝이 없다. 그리드의 힘으로는 후로이를 구출할 수가 없어. 하지만 뭔가가 일어날 것만 같다.’
<기다림> 퀘스트가 발동된 이후, 박은혁은 그리드를 쭉 지켜봐 왔다.
그리드는 아이디대로 탐욕스러운 사내였고, 말투는 저급하며 행동거지가 신중하지 못했다. 영화에 나오는 정의의 사도와는 완전히 거리가 먼 인물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고 있자니 점점 신뢰감이 쌓였다.
그리드가 노력의 대가였기 때문이다.
그는 몇십 시간이고 뜨거운 용광로 앞에 서서 망치질을 반복했다. 똑같은 재료로 매번 다른 아이템을 구상하고 만들었다.
몸과 머리, 둘 모두를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단 뜻이다.
입으로는 힘들다고 때려치우겠다면서 하루 종일 투덜거리고 있지만, 말과 행동거지가 전혀 상반되었다.
그리고 그는 급기야 아이템 제작 승부 퀘스트에서 굉장한 작품을 만들어 냈다.
‘유저가 만든 최초의…….’
아무리 ‘전설적 대장장이의 기술’이라는 사기적 제작 스킬을 보유하고 있다지만, 벌써부터 저런 아이템을 만들어 낼 줄이야.
‘재능은 모르겠지만 근성만큼은 탁월한 사내다. 믿어 봐도 좋을 것이다.’
영화 속 영웅들은 어떤 역경과 고난을 겪을지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근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영웅은 결국 승리한다.
어쩌면 그리드에게도 영웅이 될 자격이 있지 않을까, 박은혁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