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사건의 주역
오후 11시 33분.
S.A그룹의 총수이자 Satisfy의 개발팀장을 역임하고 있는 임철호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철야 근무를 하고 있었다.
Satisfy는 무려 20억 명의 유저가 즐기고 있는 게임인 만큼 항상 셀 수 없이 많은 변수와 맞이한다.
그 20억 명이 각기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서 Satisfy의 전체 흐름이 작게든, 크게든 변하게 되어 있다. 혹 그때마다 오류가 발생했다가는 유지 자체가 불가능하다.
하여 임철호는 보다 완벽한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언제나 열과 성을 다하는 것이다.
‘단 하나의 오류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집중력을 발휘하여 업무에 매진하던 그는 전화벨 소리가 40초 이상 울려서야 그것을 인지할 수 있었다.
운영팀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
“무슨 일인가?”
(퀘스트 B408이 발동되었습니다. 긴급 임원회의 소집을 허가해 주십시오.)
임철호가 두뇌를 회전시켰다. 그리고 기억 한쪽에 자리 잡고 있는 B408의 정보를 상기했다.
B408.
특별한 조건을 충족시켜야지만 발동하는 S급 히든 퀘스트의 코드 네임이다.
‘B408의 클리어 보상은 세컨드 직업이었지?’
B408을 클리어하게 되는 유저는 직업을 하나 더 갖게 된다는 뜻이다. Satisfy 최초로 2개의 직업을 갖게 되는 유저가 탄생할 수도 있다.
하지만 본디, 보상이 큰 퀘스트일수록 난이도가 높은 법.
특히 B408은 퀘스트 내용이 매우 독특했다. Satisfy의 시간을 기준으로 200시간가량을 홀로 밀폐된 공간에 갇혀 있어야만 했다. 현실에 직접적으로 큰 영향을 줄뿐더러, 퀘스트를 수행하는 유저가 정신적으로 심대한 타격을 입을 위험성이 컸다.
‘S.A그룹에게는 유저들의 개인 정보를 열람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조항을 만들어 놓은 이유 중 하나가 B408 같은 부류의 퀘스트 때문이다.
“허가하지. 나도 곧 가겠네.”
즉시 업무를 중단한 임철호는 회의실로 향했다. 그리고 도착한 회의실에서 자신의 자리에 놓여 있는 서류를 펼쳐 보았다.
이번 퀘스트를 발동시킨 유저의 정보가 정리되어 있었다.
“놀랍군. 몽골인이라니.”
본래 몽골은 세계 10번째의 자원 부국이었지만 그 자원을 발굴하고 활용할 만한 기술력이 없었다.
하지만 공산주의에서 탈피한 후, 몽골 정부는 많은 국가들과 수교를 맺었고 동시에 FDI(외국인 직접투자)를 적극적으로 유치했다.
그때부터 실로 수많은 국가와 기업들이 몽골로 진출했다. 거기에는 한국 정부와 한국의 기업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몽골을 ‘기회의 땅’이라 부르며 투자에 나섰다. 그에 따라 거대한 외국 자본이 몽골로 유입되었다.
하지만 2010년대 몽골의 정권이 바뀐 뒤로 FDI가 주춤하기 시작했다. 많은 정책이 급변한 탓이다.
수년 후 정권이 또 한 번 바뀌면서 몽골은 다시금 FDI의 활성화를 유도했지만, 이미 신뢰를 잃은 뒤였다.
결국 몽골 정부의 계획은 의도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몽골은 2030년대까지 개발도상국에 머물렀다.
그러나 현재는 다르다.
2040년대부터 선진국들의 과학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고, 덕분에 세계경제가 호황을 누리게 되자 몽골 FDI가 활력을 되찾았다. 몽골 정부도 협조적이었다. 그리고 성공적인 과정을 거쳐서 현재 몽골은 선진국의 반열에 당당히 올라서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골인들의 유목민 기질은 변하지 않았다. 대다수의 몽골인들은 물질의 혜택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들은 여전히 초원으로 나아가 유목하고 싶어 했다.
그 여파로 인해서 몽골은 Satisfy 회원 수가 가장 적은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통계에 의하면, 선진국들은 전체 인구의 60퍼센트 이상이 Satisfy 회원이었다. 그리고 Satisfy 관련 사업으로 수많은 일자리를 창출했다.
하지만 몽골은 인구의 3퍼센트만이 Satisfy 회원이었다. 초원을 누비고 싶어 하는 몽골인들에게 있어서 자그마한 캡슐에 갇혀 있는 행위는 용납할 수 없는 것과 같았던 것이다.
‘3프로의 기적인가.’
담브 알릉바타르라는, 발음하기 힘든 이름을 가진 25세 청년은 무려 127레벨의 웅변가였다.
전투에 취약한 웅변가로 벌써 127레벨을 찍었다는 사실만 해도 놀라울 지경인데, 거기에다가 몽골인이라니 믿기지가 않았다.
‘퀘스트 위주의 레벨 업을 했군. 웅변가라는 직업의 특성을 살려서 일반인들은 얻기 힘들어하는 퀘스트들을 비교적 손쉽게 얻어 왔고. 효과적인 플레이 방식이다.’
임철호가 서류를 다 읽어 갈 무렵, 집에서 잘 자고 있는 도중에 긴급 호출을 받아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는 임원들의 모습이 하나둘씩 늘어나고 있었다. 개중에는 심한 술 냄새를 풍기는 자들도 있었다.
임철호는 윤상민 이사를 주목했다. 무엇보다도 청결함을 우선시하여 결벽증이 아닐까 의문이 들 정도였던 윤상민 이사가 부스스한 머리에 꾀죄죄한 몰골로 나타나니 실소가 터졌다.
“전쟁 중에도 빗질만큼은 꼭 할 줄 알았더니 내 착각이었군. 윤 이사는 잠에 약한가 보오?”
마침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다른 이사진들이 껄껄 웃었다.
“드디어 윤 이사님의 약점을 찾았군요!”
“하하, 그러게 말일세.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사람이라 로봇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인간이었군.”
임철호의 한마디 농담 덕분에 분위기가 환기되었다. 한바탕 웃고 난 임원들은 이제 잠과 술에서 완벽하게 깨어나 맑은 정신을 갖게 됐다.
‘나를 희생양으로 삼으시다니.’
얼굴을 붉힌 윤상민 이사가 윤나희 팀장에게 손짓했다.
“본사 임원들은 다 모인 것 같은데? 몽골 지부장과 임원들도 다 모였나?”
“네. 즉시 화상을 연결하겠습니다.”
거대한 원탁 중앙으로 입체 영상이 떠올랐다. S.A그룹 몽골 지부의 지부장과 임원들의 모습이었다.
그들이 임철호에게 인사했다.
화답한 임철호가 회의를 진행했다.
“이번 회의의 안건은 B408 퀘스트와 담브 알릉바타르라는 몽골인 유저의 안전성 확보일세. 박 지부장이 일임해야 할 일이야.”
S.A그룹 몽골 지부장 박은혁은 B408 퀘스트가 몽골인 유저로부터 발생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미리 대비를 완료해 놓고 있었다.
“알릉바타르가 Satisfy에 접속해 있는 IP 주소를 추적하여 회원 정보에 등록된 주소지와 현재 거주지가 일치함을 확인했습니다. 만약의 사태가 발생할 경우 의료진과 경찰을 곧바로 파견할 수 있도록 몽골 정부의 협력을 받았습니다. 끝으로, 퀘스트가 진행되는 동안 장혁 이사와 보안팀 직원들이 실시간으로 알릉바타르를 관찰할 것입니다.”
빠르고 군더더기 없는 조치였다. 만족한 임철호가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확인한 박은혁 지부장이 의견을 제시했다.
“몽골 지부는 이번 퀘스트를 기회로 여기고 시장 개척의 발판으로 삼고자 합니다. 이미 퀘스트 정보 중 일부를 언론에 유출시키겠습니다. 현재 Satisfy에서 최초로 두 개의 직업을 갖게 될 수도 있는 유저가 존재하며, 그 유저가 몽골인이라는 사실이 전 세계의 언론을 통해서 대대적으로 보도될 겁니다. 이는 자연스럽게 홍보가 되겠죠. 몽골인들은 Satisfy를 통해 자국인이 세계적인 스타가 되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목격하며 Satisfy에 큰 관심과 호감을 가지게 될 테니까요.”
“오, 그것 참 좋은 생각이군요. 일단 관심과 호감이 생기면 Satisfy를 접해 보려는 인구가 늘어날 터이니.”
“각국의 주요 언론사들, 특히 몽골의 언론사는 필히 매수해야겠습니다. 언론들이 알릉바타르를 기념비적인 인물이라고 추켜세우게끔 만들면 몽골인들의 자부심이 고취될 테니까 홍보 효과도 극대화될 겁니다.”
대부분의 임원들이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소수의 임원들은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알릉바타르가 퀘스트에 성공한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기껏 전 세계가 주목하게 만들었는데 퀘스트에 실패해서 비웃음을 사게 된다면 오히려 역효과가 일어날 수도 있잖습니까?”
어느새 머리카락을 정돈한 윤상민 이사가 고개를 저었다.
“퀘스트의 성공 여부는 관계없습니다. 설령 실패하더라도 S급 히든 퀘스트를 최초로 획득한 유저임을 부각시킨다면,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알릉바타르를 추켜세울 겁니다. 하지만 역시, 기왕이면 성공하는 편이 훨씬 더 극적이겠지요. 그리고 알릉바타르의 신변에 문제가 생겨서 로그아웃하지 않는 이상, 퀘스트는 필히 성공하게 되어 있습니다. 윤나희 팀장, 알릉바타르의 퀘스트 성공 확률을 분석해 놓았겠지?”
“네.”
윤나희 팀장이 대답하자, 그녀의 팀원들이 임원들에게 새로 작성된 서류를 전달해 주었다.
몽골 지부의 임원들 또한 이메일을 통해서 서류를 수신했다.
잠시 후, 서류의 내용을 읽어 본 임원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뭐야. 성공 확률이 고작 9퍼센트라고?”
윤상민 이사는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이, 이게 뭐야?”
아무래도 윤상민 이사는 납득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B408은 퀘스트 진행자가 히든 NPC에게 반드시 구출되는 전개가 아니었던가? 알릉바타르의 건강 상태는 매우 양호하다. 우리가 외부에서부터 알릉바타르를 확실히 보호해 주기만 한다면, 알릉바타르가 도중에 로그아웃할 가능성은 희박해. 알릉바타르가 로그아웃만 하지 않고 버틴다면, 그는 히든 NPC에게 구출되어 퀘스트를 클리어할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성공률이 이렇게 낮은 거지? 나는 성공률을 최소 80퍼센트 이상으로 예측했는데?”
“그게…….”
윤나희가 설명하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크하하하하하하!!”
한동안 잠자코 있던 임철호가 갑자기 큰 소리로 웃는 게 아닌가?
그에 모두가 놀라서 임철호를 돌아보았다.
주목받게 된 임철호가 쯧쯧, 혀를 찼다.
“성격들도 급하군. 질문하기에 앞서 서류부터 끝까지 읽어 보는 게 먼저 아닌가?”
“…….”
임철호가 일침하자 임원들은 군말 않고 서류를 꼼꼼히 읽어 보았다. 그리고 경악했다.
심지어 윤상민 이사는 신경질적으로 서류를 구겨 버렸다.
“또… 또 이 녀석인가…….”
본래 B408 퀘스트의 정상적인 시나리오는 이렇다.
명성이 높은 유저가 윈스톤의 주민들과 호감도를 최대치로 쌓는다. 호감도를 쌓는 과정에서는 윈스톤의 영주와 메로 상단의 악행을 낱낱이 알게 된다. 이때 유저가 윈스톤 주민들에게 동화되어 메로 상단과 영주에게 진심으로 분개하게 될 경우, 이를 감지한 윈스톤 주민들은 유저에게 <윈스톤의 주민들을 위하여>라는 퀘스트를 주게 된다.
유저가 그 퀘스트를 수락하게 되면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한다.
유저는 스테임 백작과의 만남을 시도하지만 거대 상단과 영주의 군대를 상대로 힘을 발휘할 수는 없는 법! 윈스톤에서 벗어나지도 못하고 고립되었다가 결국 붙잡혀 지하 감옥에 갇히게 된다.
이때 <윈스톤의 주민들을 위하여> 퀘스트가 <기다림> 퀘스트로 변경되는데, 이를 유저가 수락할 경우, 어떠한 사정으로 인해서 윈스톤에 몸을 숨기고 있던 ‘수수께끼의 정의로운 검사’ NPC가 유저에 대한 소식을 접하게 되고 200시간 후에 유저를 구출한다.
이 사건으로 유저는 ‘수수께끼의 정의로운 검사’와 인연을 쌓고, ‘수수께끼의 정의로운 검사’의 정체를 알게 된다.
이후 유저는 검사를 돕는 여정에 오르게 된다. 유저가 이때 발생하는 연계 퀘스트들을 모조리 수행하게 되면, 유저는 상상을 초월하는 보상들을 받게 된다.
그런데 현재는 어떠한 변수가 작용한 탓에 퀘스트가 예정된 시나리오대로 흐르지 않게 됐다.
그 변수라는 것은, 알릉바타르가 자신의 퀘스트 정보를 다른 유저에게 공유했다는 점이다.
이로써 예정되어 있던 ‘수수께끼의 정의의 검사’ NPC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그와 관련되어 있던 연계 퀘스트들도 사장되게 생겼다.
알릉바타르가 퀘스트에 실패해서 지하 감옥에 감금되었다는 소식은, 이제 ‘수수께끼의 정의의 검사’가 아니라, ‘알릉바타르로부터 퀘스트 정보를 공유받았던 유저’에게 전해지게 된다.
근데 그 유저라는 것이…
“그리드…….”
정확히 12일 전, 우연과 우연이 겹치면서 발생한 천운을 타고 최초의 레전드리 직업으로 전직했던 한국인 유저.
바로 신영우였다.
“기껏 레전드리 직업으로 전직해 놓고도 여태까지 레벨이 21밖에 안 된다고? 대체 어떤 식으로 게임을 플레이해야 이럴 수가 있지? 대단하군. 레벨 업 못하는 능력이 참으로 대단해. 전직 퀘스트를 얻은 게 용할 정도군.”
윤상민 이사는 신영우가 싫었다.
신영우의 플레이 내역을 확인해 보면, 신영우는 정말로 게임에 재능이 없는 인간임이 확실하다.
한데 그런 자가 레전드리 직업을 가져갔으니, 그야말로 돼지 목의 진주 아닌가? 안 그래도 몇 개 안 되는 레전드리 직업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보기에 이 녀석은 평생 랭커가 될 수 없는 재목이야. 상품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녀석이 레전드리 직업이라는 엄청난 콘텐츠를 소모시키다니. 그리고 이제 또 하나의 커다란 콘텐츠를 소모시키려 하고 있다니…….’
윤상민 이사는 확신했다.
‘독이다. 이 녀석은 Satisfy에 있어서 치명적인 독이야. 더 이상 해를 끼치기 전에 녀석의 계정을 영구 정지시켜 버려야 돼.’
하지만 윤상민 이사에게는 유저의 계정을 관리하는 권한이 없다. 속으로 분을 삭이는 수밖에 없었다.
인상을 잔뜩 구긴 채 신영우를 저주하던 윤상민 이사가 문득, 윤나희 팀장에게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퀘스트 성공 가능성이 9프로나 되나? 고작 이깟 놈이 알릉바타르를 구출할 가능성이 9프로나 된다니? 말도 안 돼. 내가 볼 때 이 녀석이 알릉바타르를 구출할 가능성은 0프로인데?”
다른 임원들도 동의했다.
“이 수치는 잘못된 게 분명합니다.”
“맞아요. 내가 장담하건대 슈퍼컴퓨터 모르페우스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상태임이 확실합니다.”
이번 퀘스트는 실패다. 고작 21레벨짜리 유저가 알릉바타르를 구출할 가능성은 없다.
적극적인 홍보 효과는 물 건너간 것이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며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이러한 와중에 임철호만큼은 즐거워하고 있었다.
‘연달아 이런 큰 사건들의 주역이 되다니……. 레전드리 직업을 얻은 이후 여태까지 제대로 한 일이라고는 에픽 등급 화살을 제작한 것과 전직 퀘스트를 무사히 얻게 된 것, 이 둘뿐이지만, 그래도 나는 왠지 이 청년에게 기대를 품게 되는군.’
굳이 말하자면, 상식을 초월할 정도로 무능해서 예측하기 어렵다고나 할까?
워낙 변수를 일으키니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재미있다.
임철호는 이번 퀘스트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라도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일 생각이다.
다른 임원들, 특히 박은혁 지부장과 윤상민 이사는 속 터질 노릇이었지만 말이다.
***
후로이라는 놈보다 내가 더 일찍 칸과 만났다. 그리고 나는 칸의 대장간을 지켜 주었고 진료비까지 지원해 주었다. 나는 칸에게 있어서 그야말로 커다란 은인인 셈이이다.
반면, 후로이라는 놈은 어떤가? 그 놈은 칸 앞에서 몇 마디 말만 늘어놓았을 뿐이다.
“근데 왜!”
어째서 칸은 <윈스톤의 주민들을 위하여>라는 그 엄청난 퀘스트를 내가 아니라 후로이 따위에게 준 걸까?
나한테는 고작 600골드짜리 퀘스트 하나 떠넘긴 주제에!
‘가지고 있는 퀘스트 전부 다 나한테 뱉는 게 정상 아니냐고!’
칸이 은혜를 아는 NPC였다면 자신이 보유한 모든 퀘스트를 내게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은 걸 보면 은혜를 모르는 NPC다.
“언제 날을 잡아서 칸에게 은혜 갚은 제비… 아니, 까치던가? 어쨌든 그 전래동화의 내용을 이야기해 줘야겠어. 조류보다 못한 NPC라는 소리 듣기 싫으면 앞으로는 처신 잘하겠지?”
생각할수록 기분 나쁘다.
<윈스톤의 주민들을 위하여>는 윈스톤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막중한 퀘스트다. 그러니까 칸은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에게 그 퀘스틀 맡기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아니라 후로이를 선택하다니!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어중이떠중이보다 내가 못하다는 뜻이 아닌가!
“어디서 굴러먹다 온지도 모르는 개뼈다귀 같은 놈을 나보다 더 신용하다니… 크으윽!”
집 근처의 포장마차.
나는 쓰디쓴 소주를 입에 털어 넣으면서 인생을 한탄했다.
본디 주량은 소주 1병 반 정도에 불과하지만, 오늘은 칸에 대한 실망감과 후로이에 대한 질투심 탓에 마음이 괴로워 과음을 하게 됐다.
“크아아아~!!”
소주를 3병째 비울 무렵.
내 마음의 상처는 여전히 달래지지 않았고 급기야 눈물이 흐르려고 했다.
생각할수록 칸이 밉다. 나는 그와 함께하는 시간 동안 진심으로 친구가 되었다고 믿었고 신뢰했지만, 칸은 나와 달랐다. 칸은 나를 믿지 않았다.
“왜 나를 못 믿고 그 좋은 퀘스트를 엉뚱한 놈한테 준 거냐고… 대체 왜… 왜! 제엔자앙!!”
어차피 내일부터 3일 동안 비가 쏟아진다고 한다. 출근 걱정도 없으니 오늘만큼은 끝까지 취하고 싶다.
나는 나지막한 음성으로 포장마차 주인아줌마를 불렀다.
“아주머니.”
순대를 썰고 계시던 아줌마는 내 부름을 듣자 움찔, 놀라며 칼질을 멈췄다.
나는 나와 눈을 마주치는 아줌마의 시선이 바들바들, 작게 경련하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내가 풍기고 있는 고독한 기운이 내 매력을 극대화시키고 있는 것인가.’
지금 내 눈빛에 실려 있는 고독함은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에베레스트 산을 떠올리게끔 할 터.
저 떨리는 눈동자를 보아하니, 아줌마는 아들뻘 나이에 불과한 내게서 매력을 느끼고 마음을 빼앗긴 자신을 책망하며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듯하다.
‘나도 참 죄 많은 남자군…….’
아줌마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공교롭게도 나는 연상에게 흥미가 없다.
특히 상대가 유부녀라면 더욱 더 그렇다.
‘한 가정을 파탄낼 수는 없는 법이지.’
나는 아줌마가 괜한 기대를 갖지 않도록 간단히 용건만 꺼냈다.
“소주 한 병 더 주세요. 그리고 어묵 국물도 리필해 주시고요. 어묵 국물에 무 한 덩어리 서비스로 넣어 주시는 것도 잊지 마시길…….”
콰앙!
아줌마가 손에 쥐고 있던 식칼을 도마 정중앙에 꽂아 넣었다. 그리고 당황하는 내게 삿대질을 하면서 소리쳤다.
“총각 진짜로 너무하네! 소주 3병 마시는 동안 안주는 하나도 안 시켜 놓고 어묵 국물만 벌써 아홉 대접째 리필했잖아?! 더군다나 매번 무를 서비스로 달라고 하고 있고! 총각이 먹은 술값보다 무값이 더 나오겠네! 젊은 사람이 어쩜 그렇게 염치가 없어!”
“…인심 참 야박하군요. 고작 어묵 국물과 무 쪼가리로 손님을 그리 타박하다니……. 이 각박한 세상은 어느 때처럼 제게 또 한 번 커다란 실망감을 안겨 주는군요. 그래요, 마치 칸처럼.”
“뭐라는 거야! 어찌 됐든 이제 서비스는 줄 수 없으니까 안주를 시키든가 하라구!”
주인아줌마는 완고했다.
아무래도, 어묵 국물로 배를 채우겠다는 내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는 듯하다.
“어느덧 술과 작별하고 잔혹한 현실로 되돌아가야 할 때가 다가온 건가…….”
서비스에 대한 미련을 버린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술값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아주머니께 꾸벅 인사한 뒤 포장마차를 떠났다.
터벅터벅, 고독한 분위기를 한껏 발산하면서 걸어가고 있을 때, 뒤에서 아줌마의 성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총각! 천 원 부족해! 천 원 더 내놓고 가!”
이런, 아무래도 술에 취한 탓에 돈 계산을 잘못했나 보다.
그러니까 튀자.
‘천 원을 아낄 수 있는 기회다!’
과거의 나는 절약 정신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하지만 빚쟁이가 되고 보니 절약 정신이 투철해졌다.
나처럼 절약 정신 투철한 젊은이가 많아질수록 대한민국의 미래가 밝아지는 법!
나는 내 절약 정신을 고수하기 위해서, 즉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 부족한 천 원을 지불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도망치려다가 멈췄다.
‘…아니, 아무리 취했어도 이런 궤변을 지껄일 때가 아니지. 무전취식 현행범으로 붙잡혀서 파출소 끌려갈라.’
고작 천 원 때문에 철창신세를 지게 된다면, 그보다 쪽팔린 일이 또 있을까?
아쉬움을 달래고 발걸음을 돌린 나는 아줌마에게 천 원짜리 지폐를 꼭 쥐여 드렸다.
“만약 제가 삭막한 현대사회의 흔하디흔한 젊은이였다면, 도덕성이 결여되어 이 천 원을 지불하지 않고 그대로 도망쳤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듯 돌아와서 아주머니께 천 원을 지불하였죠. 기특하지 않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총각처럼 행동하지 않았을까?”
“이런… 아주머니께서는 세상 물정을 참 모르시는군요. 요즘에 비도덕적인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저 같은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그, 그래? 알았어. 알았으니까 이만 가 봐. 총각 많이 취했어.”
“어허! 아주머니! 어찌 그리 삭막한 마음을 가지고 계십니까? 제법 쌀쌀한 이 날씨에 약 10미터가량을 되돌아와서 천 원을 지불한 젊은이가 기특해서라도 무 들어간 어묵 국물을 서비스로 포장해 줘야 하는 게 상식 아닙니까!”
“…….”
아줌마는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포장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아줌마가 어묵 국물을 포장해서 다시 나올 줄 알고 제자리에 선 채 기다렸지만,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도 아줌마는 돌아오지 않았다.
“하하… 또 한 번 배신을 당하고 말았군. NPC도, 사람도 모두 나의 믿음을 배신하는구나!”
참으로 씁쓸한 세상이다.
역시 세상은 혼자서 살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이번 일로 다시금 절실히 깨달으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
“늦으면 늦는다고 연락을 해야지! 지금이 몇 신 줄 알아?!”
새벽 1시.
집에 도착하자마자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던 세희에게 혼쭐이 났다.
“이 시간까지 누구랑 술을 마신 거야? 여자일 리는 절대 없고, 심지어 오빠는 친구도 없잖아? 그럼 뭐야? 설마 혼자서 마신 거야? 궁상맞게?”
“…야, 너는 내일 학교 가야 할 애가 왜 이 시간까지 안 자고 있다가 사람을 갈구고 그러냐.”
“인력소 나갈 때 아니면 만날 캡슐에만 틀어박혀 있는 사람이 갑자기 사라지니까 걱정… 아니, 이상하잖아!”
“잉? 오빠가 걱정되서 기다린 거야? 이 시간까지?”
“뭐래! 내가 오빨 왜 기다려? T, TV에서 재밌는 프로그램을 해서 그거 보느라고 못 잔 것뿐이거든?”
“근데 왜 그렇게 화를 내는 거야? 얼굴까지 시뻘겋게 붉히고.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
“누, 누구 얼굴이 새빨갛다는 거야! 별꼴이야 정말. 난 잘래!”
쾅!
세희는 뒤도 안 돌아보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어휴, 사춘기 소녀를 대한다는 건 정말 어렵구나.”
세희가 버럭버럭 고함을 지르는 탓에 정신이 번쩍번쩍 들어서 술도 같이 깨 버렸다.
그러자 다시 또 <윈스톤의 주민들을 위하여> 퀘스트를 놓쳤다는 사실이 상기되면서 화가 뻗쳤다.
“젠장, 빨리 자야겠다.”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세희가 방문을 열고 다시 나왔다. 그리고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신신당부했다.
“양치랑 세수하고 발까지 꼭 닦고 자. 술 마시고 샤워하면 몸에 해롭다고 하니까 샤워는 하지 말고. 뭐, 애초에 매일 샤워할 만큼 부지런한 사람이 아니니까 샤워할 생각 따위 없었겠지만.”
“…너 안 자냐?”
“자기 전에 물 마시려고 나온 거거든?”
“눼이, 눼이, 어서 물 먹고 자세요. 안녕히 주무십셔.”
나는 부엌으로 향하는 세희를 뒤로하고 욕실에 들어갔다.
“내가 애도 아니고, 양치랑 세수 정도는 하루에 한 번 이상 꼭 한다고.”
세 번 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나는 칫솔에 치약을 묻히려다가 멈췄다.
아무래도 과음을 한지라 자꾸만 눈이 감긴다.
“양치 하루 안 한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뭐…….”
결국 나는 손만 대충 닦고 욕실을 나왔다. 그리고 그대로 내 방으로 직행했다.
밖에서 세희가 뭐라고 소리 지르는 것 같지만 신경 쓰지 말고 어서 자자.
그렇게 하루가 끝나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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