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4화 (10/1,794)

제5장

후로이

“칸, 소문을 듣자니 술을 끊었다더군. 한데… 술이 아직 덜 깼는가?”

까앙! 까앙!

대장간에서 대장장이 기술을 열심히 연마하고 있을 때였다.

칸의 친구인 듯한 영감 하나가 찾아오더니 다짜고짜 내 심기를 건드렸다.

“술이 덜 깼다니?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린가?”

“아니, 자네가 맨 정신이었다면 저리 볼품없는 애송이와 매일 같이 붙어 다녔겠는가? 에잉, 쯧쯧. 첫눈에 봐도 세상 물정 모를 것 같은 저딴 애송이 놈이랑 붙어 다니면서 무슨 소꿉놀이를 하고 있는 겐지.”

저 빌어먹을 영감탱이가 언급하고 있는 ‘볼품없고 세상 물정 모르는 애송이’는 당연히 나를 지칭한다.

어떻게 아냐고?

저 빌어먹을 영감탱이가 대장간에 들어온 후부터 지금까지 쭉 나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본 채로 이야기하고 있거든.

“저 양반이 대낮부터 술을 퍼 잡수셨나…….”

망치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간다.

급격히 솟아오르는 살인 본능!

내 손에 쥐어진 망치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음을 눈치챈 칸이 다급히 친구를 말렸다.

“이보게, 그만 조용히 하게나. 지금 자네는 착각을 하는 걸세.”

“착각?”

“그래, 착각. 저 청년이 비록 허접쓰레기 같은 외관을 가지긴 했으나 사람을 겉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네. 저 청년은 사실 엄청난 거물이야.”

…허접쓰레기 같은 외관?

칸은 평소에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건가?

배신감이 솟구친다.

꽈앙! 꽈앙!

나는 용솟음치는 분노를 망치질에 실어서 강철을 더욱 단단하게 단련했다.

그러다가 문득, 현재 내 모습이 어떠한지 돌이켜 보았다.

얼마 전에 폭렙을 하기는 했다지만 그래 봤자 고작 21레벨에 불과하다.

갑옷과 무기를 모두 창고에 맡긴 탓에, 갓 캐릭터를 생성한 초보 유저들이나 입고 다닐 천 옷을 두르고 있다.

NPC가 유저를 판단하는 기준은 레벨과 장비, 그리고 명성과 직위다.

나는 레벨이 낮으면서 장비가 아예 없고, 명성이 낮으면서 직위조차 없으니 NPC들이 보기엔 허접쓰레기같이 보일 만도 하다.

‘건달 패거리들 해치울 때 얻었던 명성 수치로는 어림없는 건가?’

의문을 느끼고 있을 때, 칸과 다른 영감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못 믿겠어? 저 청년의 겉모습에 현혹당하지 말고 저 기술을 유심히 지켜봐 봐. 보통 대장장이의 실력이 아니잖아. 그치? 그리고 사실 이건 비밀인데, 저 청년 혼자서 베일 일당을 모조리 해치웠다니까?”

“어허! 이 친구가 무슨 헛소리를! 그래, 대장장이 기술이 훌륭하다는 건 내 지금 두 눈으로 지켜봤으니 인정하겠네. 아무래도 저 청년은 겉모습과는 달리 제법 뛰어난 인물인가 보군. 하지만 베일 일당을 해치웠다고? 윈스톤 최고의 무법자인 그들을? 그건 어림없는 소리! 대장장이가 어찌 그들을 홀로 해치운단 말인가?”

“내가 두 눈으로 직접 봤으이. 자네, 요즘 거리에서 베일 놈들을 본 적 있는가? 며칠째 행방불명이지? 그게 다 저 청년이 해치워서 그런 거야.”

“허허… 이 친구가 진짜로 술이 덜 깼구먼.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이미 이 바닥에 명성이 쫙~ 퍼졌어야지 않겠는가?”

칸이 쯧쯧, 혀를 찼다.

“생각 좀 해 보고 말하게나. 저 청년이 베일 놈들을 해치웠다는 소문이 퍼지면 메로 상단에서 가만두지 않을 텐데, 내가 왜 굳이 소문을 퍼뜨리겠는가? 마침 내가 유일한 목격자였기 때문에 나는 소문을 흘리지 않았어. 그래서 저 청년의 명성이 아직 마을에 알려지지 않았고.”

“음, 목격자가 자네밖에 없었던 거로군. 저 청년이 정녕 그리 대단하단 말이지? 허헛, 다시 보니 애송이 같지 않고 오히려 늠름해 보이는걸?”

그랬군. 내가 베일 일당을 해치웠다는 소문이 아직 퍼지지 않아서 명성 수치가 적용되지 않았던 거야.

“칸 영감님! 계십니까?”

내가 납득하고 있을 때 웬 사람들이 우르르 대장간에 들어왔다.

그들은 저마다 손에 전단지를 한 장씩 들고 있었다.

중년인 하나가 칸에게 전단지를 보여 주면서 물었다.

“이게 사실입니까?”

전단지의 내용을 확인한 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뭔데 저러지?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슬그머니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이 들고 있는 전단지 내용을 살펴봤다.

‘오호.’

<우리 메로 상단은, 칸과 대장간을 건 아이템 제작 승부를 겨룰 예정입니다. 우리 상단이 칸에게 이번 승부를 청한 이유는, 칸을 인간으로서 존중하며 그의 대장장이 실력을 존경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번 승부에서 우리 상단이 칸에게 패배한다면, 우리 상단은 칸의 빚을 변제해 줌으로써 칸이 대장간을 지킬 수 있도록 도울 것입니다. 반대로 승리하여 우리 상단이 대장간을 양도받게 되더라도, 우리 상단은 대장간의 운영권을 여태까지처럼 칸에게 일임할 예정입니다. 윈스톤 주민 여러분과의 공생이야말로 우리 상단의 궁극적인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가까운 시일 내에 승부 날짜를 공지할 터이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사람들이 들고 있는 전단지 전문이다.

승부의 날이 착실하게 다가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훗! 조금도 긴장되지가 않는군. 메로 상단에서 고용하는 대장장이가 아무리 뛰어나 보았자, 파그마의 후예인 내가 만에 하나라도 아이템 제작 승부에서 질 리가 없으니까!’

파그마의 후예는 ‘전설적 대장장이의 기술’이라는 스킬을 보유하고 있다.

메로 상단이 설사 대장장이 장인을 고용해 온다고 해도, 내가 그보다 높은 등급의 아이템을 제작할 확률이 높다.

하지만 대장장이 장인이 그리 흔할까? 명성 높은 대장장이 NPC라고 해도 대부분 고급 대장장이다.

내가 실제로 승부를 겨루게 될 상대는 끽해야 고급 대장장이가 될 것이다. 파그마의 후예인 내가 고급 대장장이에게 패배할 리 없다.

사람들이 술렁였다.

“메로 상단이 마음만 먹으면 칸 영감님의 대장간을 빼앗는 건 쉬운 일이야. 하지만 그들은 강제로 대장간을 빼앗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요청했어. 그럼으로써 칸 영감님께 기회를 드렸고. 그들의 주장대로, 그들은 진심으로 칸 영감님을 존중해 주고 있는 거야.”

“맞아. 심지어 자신들이 승부에서 이기더라도 칸 영감님께 대장간의 운영을 맡긴다잖아? 메로 상단이 주민들을 위한 일자리 창출 사업을 계획 중이라는 소문이 사실이었던 거 아닐까?”

“이걸 보면 사실일 것 같아. 메로 상단은 우리 생각처럼 못되기만 한 게 아니었어. 진짜로 우리들과의 공생을 꾀하고 있는 거야.”

사람들의 대화 소리를 듣다 보니 정말로 그럴듯하다.

‘메로 상단이라……. 깡패들을 고용해서 영감을 위협했던 걸 보고 나쁜 놈들인 줄 알았더니 아니었군. 제법 괜찮은 곳이었어. 근데 그 깡패 새끼들은 왜 그렇게 싸가지가 없었지? 명령 체계에 오류가 있었나?’

메로 상단에 대한 막연한 적대감이 사라졌다.

‘메로 상단은 내게 600골드를 얻을 수 있는 퀘스트를 공으로 줬다. 굳이 나쁘게 볼 필요는 없지. 암, 그렇고말고.’

그렇게 대부분의 사람들과 나는 메로 상단에게 약간이나마 호감을 가지게 됐지만, 칸만큼은 아니었다.

“이거였군. 이걸 노리고 이번 승부를 요청했던 거였어! 라빗이라는 놈, 보통내기가 아니었군!”

분개한 칸이 전단지를 쫘악! 쫘악! 찢어 버렸다. 그리고 사람들을 비난했다.

“그대들은 고작 이 종이 쪼가리의 내용만 보고서 그간의 수모와 고통을 잊는 겐가! 메로 상단은 윈스톤의 발전 계획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정보를 독점한 채 우리로부터 땅과 일터를 빼앗아 간 악당일세! 모든 것을 빼앗긴 우리는 가난과 기아에 허덕였어! 하지만 그간 메로 상단이 우리에게 해 준 게 무엇이 있는가!”

칸에게 동조하는 자들이 많았다.

“맞아! 메로 상단은 적이야! 놈들의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가는 과오를 또 한 번 범할 생각들이야? 놈들에게 호의를 갖지 마! 방심하다가 뒤통수 맞고 나락에 떨어질 테니까!”

윈스톤의 주민들과 메로 상단은 보통 악연이 아닌 듯싶다. 이들의 상단에 대한 원한은 상당히 깊었다.

“저기요.”

소란스러운 와중에 누군가가 번쩍 손을 들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유저다.’

NPC의 머리 위에는 녹색 이름이 떠올라 있다. 하지만 지금 손을 든 사내의 이름은 흰색이다.

악행도, 덕행도 쌓지 않은 평범한 유저임을 뜻한다.

칸이 그에게 물었다.

“젊은이는 이 마을 주민이 아니로군?”

“제 이름은 후로이. 금일 오전에 윈스톤에 처음으로 방문하게 된 평범한 여행자입니다.”

“그렇군. 그래, 후로이, 뭔가 궁금한 거라도 있는가?”

“네. 여러분의 기분을 언짢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만… 제게 발언권을 주시겠습니까?”

“어디 말해 보시게.”

처음 만난 NPC가 저토록 호의적으로 대해 주다니?

저 후로이라는 녀석, 거지같은 아이디와 달리 상당한 고렙이거나 대륙 전체에서 명성이 높은 여행자인 듯싶다.

“제가 이곳 윈스톤에 도착해서 접하게 된 풍문에 의하면… 윈스톤의 발전 계획을 한발 앞서 접했던 메로 상단이 여러분에게 접근, 아직 윈스톤 발전 계획을 몰랐던 여러분들로부터 땅과 상권을 헐값에 매입했더군요. 직후 윈스톤은 크게 발전하였고, 땅과 상권을 장악한 메로 상단은 커다란 이득을 취하게 되었고요. 맞습니까?”

“그렇다네.”

“한데 메로 상단이 여러분들로부터 땅과 상권을 구매할 당시에 어떠한 강제성이 있었습니까?”

“없었네.”

“그렇다면 여러분께서 메로 상단을 무조건적으로 나쁘게 취급하는 건 비양심적인 행동 아닙니까? 윈스톤을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던 시절, 당장의 돈에 눈이 멀었던 당신들은 자처하여 메로 상단에게 땅과 상권을 판매한 게 아닙니까? 그리고 그때 벌게 된 돈으로 터전을 옮기려 했었죠? 하지만 윈스톤이 발전할 거라는 사실을 뒤늦게 접하게 되어 떠나지 않고 남아서 결국 지금의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게 아닙니까? 궁극적으로 여러분이 원망해야 할 대상은 메로 상단이 아닌, 자기 자신들의 무지와 이기심 아닐까요?”

“저놈이 어디서 폭언을!”

“메로 상단의 하수인임이 분명하다!”

분위기가 심상찮게 변했지만 후로이는 개의치 않고 말해 나갔다.

“무릇 상단이란 부를 쌓기 위해 구성된 집단! 그들이 이득을 취하기 위해서 정보를 독점한 행위는 자연스러운 순리입니다. 여러분들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미운 게 사실이겠지만, 무조건적으로 적이라 규정 지을 필요도 없다고 봅니다. 제 말에 틀린 점이 있습니까?”

“이 자식이 끝까지 지껄여 대는군!”

“그 주둥이를 그만 닥치지 못해?!”

마치 메로 상단을 변호하는 듯한 화법이다. 그에 광분한 사람들은 후로이를 때려죽일 기세였다. 하지만 후로이는 겁먹지 않고 당당했다.

“저는 메로 상단의 편을 들고 있는 게 아닙니다! 제가 이와 같은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누구도 아니고 바로 여러분을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상단과 싸우려 들지 말고, 상단의 의도대로 그들과 공생하는 편을 택하십시오! 그게 훨씬 더 현명한 선택이 아닙니까!”

후로이의 말을 끝까지 들은 사람들이 더 이상 화를 내지 않고 잠잠해졌다. 후로이에게 설득당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그때 칸이 나섰다.

“오지랖이 넓은 청년이군. 굳이 그와 같은 충고를 해 주는 의도가 뭐지?”

칸은 의심의 눈초리를 숨기지 않았다. 후로이가 메로 상단에서 보낸 바람잡이라고 확신하는 듯싶었다.

‘내가 봐도 그런데? 굳이 나설 자리도 아닌데 나서서 저렇게 지껄이는 걸 보면, 분명한 이유가 있겠지.’

후로이는 메로 상단에게 퀘스트를 받은 게 확실하다. 그리고 이대로 사람들이 설득을 당한다면 녀석의 퀘스트는 성공하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미 설득당했어. 안 될 일이다. 내가 나서야겠군!’

사람들이 메로 상단을 적으로 대하든, 공생하게 되든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다. 그런데 왜 굳이 나서려 하느냐? 그건 바로…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 녀석이 내 눈앞에서 퀘스트를 클리어하는 꼬라지를 가만히 서서 보고만 있을 순 없지! 반드시 실패하게 만들어 주마!’

그래, 단순한 꼬장이다!

나는 후로이가 퀘스트에 실패하게 만들고 싶었다.

“어이, 너…….”

후로이를 방해하기 위해서 내가 나서는 순간, 칸 영감이 나를 제지했다.

“여긴 나에게 맡겨 주게.”

내게 ‘자기 일처럼 나서 줘서 고맙다’라는 눈빛을 보낸 칸이 후로이에게 다가가 섰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의 말은 옳네. 큰 권력을 가진 집단과 끝까지 반목하느니 공생하는 편이 우리의 미래에 좋겠지.”

저 영감이 뭐라는 거야?

웅성웅성.

누구보다도 메로 상단을 원망하고 있을 칸이 후로이의 주장에 지지를 보내자 사람들이 동요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장내의 모든 이들은 칸에게 눈과 귀를 집중하게 됐다.

그때를 노렸다는 듯이 칸이 말을 이었다.

“윈스톤이 스테임 백작령에 속하지 않았었더라면, 우리는 자네의 충고대로 메로 상단과의 공생을 택했겠지.”

의미심장한 말이다.

후로이가 의아해했다.

“스테임 백작령에 속하지 않았더라면……?”

“그래. 중요한 것은 이곳이 스테임 백작령에 속해 있다는 걸세. 자네는 타지에서 왔으니 모르겠지만, 스테임 백작령에는 ‘백성의 권리’라는 지방 법령이 존재한다네. 백성을 아끼시는 스테임 백작님께서 친히 발포하신 법령이지. 여기에 서술된 조항 중에는 이러한 내용이 있네. ‘스테임 백작령의 주민은 자신의 거주 지역에 대한 정보를 누구보다 빨리 접할 수 있을 권리가 있다’.”

칸은 그 조항의 존재 의미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지금은 북부 개척 시대다, 라는 말을 한 번쯤은 들어 봤을 테지? 이곳 북부는 기후가 험하고 몬스터가 많아서 개척하지 못한 땅이 수두룩하다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개척자들이 곳곳에서 애쓰고 있지. 그 개척자들이 새로운 땅을 개척하게 되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기본적으로, 인근 도시나 마을에 작건 크건 영향을 끼치게 되겠군요.”

후로이의 대답을 들은 칸이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바로 그걸세. 이번에 윈스톤이 발전을 맞이한 이유가 뭔가? 도로가 개선되고 교통편이 보완되었기 때문일세. 도로가 왜 개선되었고, 교통편은 왜 보완되었겠는가? 이곳과 멀지 않은 곳에 새로운 땅이 개척되었기 때문이야. 윈스톤은 새로운 땅과 수도를 잇는 교두보 역할을 하게 될 테지. 알아들었는가? 이 북부는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다는 뜻일세. 북부의 백성들은 그 급격한 변화로 인하여 피해를 입을 수도, 득을 취할 수도 있어.”

칸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스테임 백작령의 주민은 자신의 거주 지역에 대한 정보를 누구보다 빨리 접할 수 있을 권리가 있다’라는 조항이 생긴 이유. 그것은 백성들이 갑작스러운 변화에 대비함으로써 피해를 최소화시키거나 이익을 극대화시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일세.”

후로이가 설명의 요지를 파악했다.

“윈스톤의 발전으로 이득을 취하는 건 메로 상단이 아니라, 반드시 주민 여러분이어야만 했던 거군요. 하지만 여러분은 오히려 손해를 입었으니, 이는 스테임 백작님의 뜻에 위배되는 것. 여러분은 메로 상단의 횡포에 맞서 싸워야 할 의무와 명분이 있으며, 윈스톤의 발전 계획에 대한 정보를 여러분보다 메로 상단에게 앞서 전파한 윈스톤의 영주는 처벌받아 마땅하다… 제 해석이 올바른 겁니까?”

“그렇지. 우리는 메로 상단과 타협해선 안 돼. 이는 우리의 이득만을 위함이 아닐세. 스테임 백작님의 백성으로서, 스테임 백작님의 뜻을 배반하지 않기 위함이기도 해. 우리는 스테임 백작님의 뜻을 거스르고 스테임 백작님의 위엄을 갉아먹은 윈스톤의 영주와 메로 상단을 반드시 고발해야만 하네!”

그야말로 완벽한 명분이다.

칸의 설파에 흥분한 사람들이 우오오오오! 기합을 내질렀다.

모두 한마음 한뜻이 되어 메로 상단에게 맞서겠다는 결의를 내비치는 것이다.

후로이가 크고 올곧은 음성으로 외쳤다.

“윈스톤의 영주와 메로 상단의 악행은 반드시 스테임 백작님께 고발되어야만 하는 바! 하지만 여러분은 영주의 감시하에 있으니 스테임 백작님께 상소를 올리지 못할 터! 여기는 외지인인 제게 맡기십시오! 스테임 백작님께 윈스톤의 변고를 알리는 임무를 이 후로이가 반드시 수행하겠습니다! 윈스톤을 위해! 여러분을 위해! 그리고 스테임 백작님의 명예를 위해 반드시 윈스톤의 영주를 고발해 내겠습니다!”

“고맙네! 믿고 기다리겠네!”

어?

분명하다. 지금 후로이는 칸으로부터 어떠한 퀘스트를 받았다.

근데 구도가 이상하다?

보통은 NPC가 유저에게 퀘스트를 준다. 유저는 수동적으로 그 퀘스트를 받아서 수행한다.

그런데 지금 후로이는 수동적으로 퀘스트를 받은 게 아니라, 칸이 자신에게 퀘스트를 주게끔 유도한 듯한 인상이다.

‘말도 안 돼.’

나는 사람들에게 꾸벅 인사한 뒤 대장간을 떠나 버리는 후로이를 다급히 뒤쫓았다.

“이봐!”

힐끗, 나를 돌아보는 후로이의 표정은 지극히 냉소적이었다.

조금 전 대장간에서 열정적인 모습을 보이던 것과 전혀 상반되었기 때문에 순간 다른 사람이라고 착각했을 정도다.

“구석에 찌그러져 있던 병풍이 아닌가? 네가 내게 무슨 볼일이지? 난 바쁜 몸이다.”

구, 구석에 찌그러져 있던 병풍?

‘아, 맞다. 나 지금 완전히 초보자 행색이었지.’

성격이 진짜로 착한 사람이 아닌 이상, 일반적인 유저들은 초보자를 상대하기 꺼려한다.

초보자들은 아는 게 없어서 이것저것 귀찮게 질문하고, 심지어 구걸까지 하기 때문이다.

나는 후로이가 나를 무시하고 떠나 버리지 않도록 곧장 용건을 꺼냈다.

“네가 이곳을 찾아온 이유는 메로 상단에게 퀘스트를 받았기 때문이 아니었어? 네 본래 역할은 윈스톤의 주민들을 회유시키는 메로 상단의 앞잡이였을 텐데? 근데 이 전개는 뭐지?”

“호오?”

후로이가 재미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조금 전 내 행동을 보고 현재 내가 무슨 퀘스트를 수행하고 있는 건지 유추한 건가? 너, 초보자가 아니군? 뭐, 나는 더 큰 이득을 따라서 움직였을 뿐이다. 퀘스트 정보 공유.”

[플레이어 ‘후로이’가 퀘스트 정보를 공유해 주고자 합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내가 수락하자, 눈앞으로 후로이의 퀘스트 정보가 떠올랐다.

<윈스톤의 주민들을 위하여>

난이도:A

윈스톤의 주민들은 이기적인 영주와 메로 상단에 의해서 큰 피해를 입고 있다.

본래 당신은 메로 상단의 의뢰를 받아 움직이고 있었지만, 가여운 주민들을 외면할 수가 없었기에 메로 상단을 배신했다.

이제 당신은 메로 상단의 추격을 피해서 스테임 백작령의 수도, ‘프론티어’로 향해야만 한다. 반드시 프론티어에 도착하여, 윈스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스테임 백작에게 낱낱이 고발하라!

퀘스트 클리어 조건:스테임 백작을 알현.

퀘스트 클리어 보상:칭호 ‘정의의 사도’. 윈스톤 주민들과의 호감도 최대치. 윈스톤에서의 명성 최대치. 스테임 백작의 하사품.

*정의의 사도:용기 능력치가 개방됩니다. 모든 능력치 +10. 스킬 ‘꺾을 수 없는 정의’ 생성.

퀘스트 실패 시:레벨 -1. 윈스톤 주민들과의 호감치 하락.

윈스톤의 영주가 바뀌기 전까진 윈스톤에 입장할 수 없음.

“뭐, 뭐야, 이 어마어마한 보상은?”

한 마을에서 명성과 호감도가 최대치가 되면 모든 물품을 값싸게 구입할 수 있으며 숨겨진 퀘스트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고위 귀족의 하사품은 최소한 에픽 등급 이상의 아이템일 것이다.

더군다나 새로운 스탯과 스킬을 개방시켜 주는 칭호는 굉장히 희귀하여 그 가치를 돈으로 환산할 수가 없다.

이건 분명히 히든 퀘스트다. 그것도 내가 받았던 히든 퀘스트보다 더 상위의!

‘배, 배가 아파 온다…….’

끓어오르는 질투 탓에 현기증이 나고 속은 불타는 것처럼 쓰라렸다.

좌절하고 있는 내게 후로이가 득의양양한 미소를 보냈다.

“굉장하지? 이게 바로 히든 퀘스트라는 거다. 나 또한 처음 얻어 본 거라서 무척이나 기쁘군.”

부, 분하다. 하지만 자존심 상하니까 티를 내지 말자.

“헹! 하나도 안 굉장한데? 히든 퀘스트도 별거 없군! 제길! 하나도 안 굉장해! 그깟 보상들 하나도 안 부러워! 안 부럽다고!”

“…아, 그러냐?”

“그래! 안 부러워! 그러니까 자랑은 그만 지껄이고 방금 대체 어떻게 한 건지나 말해 줘!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너는 NPC가 네게 퀘스트를 주게끔 유도한 것 같은데! 맞지?!”

후로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눈치가 빠른 놈이군. 뭐,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어서 조만간 퍼질 대로 퍼질 정보이니 별 가치도 없고, 마침 히든 퀘스트를 받아서 기분도 좋겠다, 특별히 네게도 알려 주도록 하지.”

그리고 나는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Satisfy의 자유도는 무한하다. 나는 그 자유도를 이용해서 원하는 퀘스트를 얻은 거다. NPC가 퀘스트를 줄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지 않고, 네 말대로 NPC가 내게 퀘스트를 주게끔 유도했다. 간단하게 예를 들면 이런 거지. 음식점 주인 NPC 앞에서 ‘나는 발이 빠르고 부지런해서 배달 일을 맡겨 주면 누구보다 잘 해낼 자신이 있다’라고 어필하다 보면, 음식점 주인이 배달 관련 퀘스트를 줄 확률이 높다.”

“대, 대박……. 나는 여태까지 그런 거 몰랐는데… 남들은 다 그런 식으로 퀘스트를 받아 왔던 거야? 그렇다면 그런 방법을 모르고 게임해 왔던 나만 손해 본 거 같잖아?”

“너무 낙심 마라. Satisfy가 오픈하고 1년 동안 쭉 플레이해 온 초창기 유저가 아닌 이상, 대부분의 유저들은 너처럼 Satisfy에 대한 이해도가 아직 부족해서 응용하지 못했을 퀘스트 획득 방법이다. 초창기 유저들을 제외하면 다 너처럼 수동적인 퀘스트만 수행해 왔을 거야. 딱히 너만 손해 본 게 아니다. 소수의 초창기 유저만이 이득을 취해 온 것일 뿐이지. 뭐, 이 정보도 이미 각종 공략 사이트에 올라오기 시작했으니 머잖아 전부 다들 알게 될 사실이지만.”

“…….”

“이봐, 갑자기 왜 그렇게 창백해졌어? 식은땀이 장난 아니게 흐르는데?”

“…내가 말이야.”

“……?”

“내가… 내가 Satisfy가 오픈한 직후부터 지금까지 1년 동안 쭉 플레이해 온 초창기 유전데 말이지…….”

“뭐? 풉! 푸하하하하하!!”

후로이가 배를 쥐어 잡고 박장대소했다.

눈물까지 흘리면서 웃어 젖히던 녀석이, 간신히 웃음을 그치고 내 어깨를 두드리면서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근래에 들었던 농담 중에 가장 웃겼다. 개그에 소질이 있는데? 아, 혹시 현실에서 직업이 개그맨이야? 친하게 지내고 싶은데? 친구 할까?”

“…꺼져.”

농담이 아니다.

나는 정말로 Satisfy가 오픈한 직후부터 지금까지 1년 동안 쭉 플레이해 온 초창기 유저다.

심지어 학교까지 휴학하고 Satisfy만 했었다.

근데 나는 이런 팁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나는 1년 동안 열심히 Satisfy를 플레이하면서 나만의 노하우 같은 걸 만들어 놓은 게 있던가?

전혀 없다.

공략 사이트에 오픈되어 있는, 즉 누구나 얻을 수 있는 평범한 정보들에만 의존해 왔다.

Satisfy에 대한 나의 이해도가 초창기 유저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낮다는 뜻이 된다.

‘이런 한심한……. 스스로가 부끄럽다.’

울컥 눈물이 흘러내렸다.

“젠장! 제에엔장!! 제에엔~~자아아앙!!! 로그아웃이다!!”

“이, 이봐! 뭐야, 왜 그러는데?!”

나는 당황하는 후로이를 그대로 남겨 둔 채 떠났다.

***

“대체 뭐 하는 녀석이지?”

갑자기 오열하더니 급기야 로그아웃해 버리는 그리드 탓에 후로이는 얼떨떨해졌다.

같은 동양인 유저이기도 했고, 유머 감각도 뛰어나기에 친구로 사귀면 좋을 듯싶었는데 훌쩍 떠나 버리자 아쉬운 기분도 들었다.

“풋.”

다시 생각해봐도 웃겼다.

퀘스트 획득 방법조차 제대로 모르는 주제에 초창기 유저임을 자처하다니.

“굳이 초창기 유저를 사칭할 필요는 또 뭐람? 참 특이한 캐릭터야. 자, 그럼 나도 이만 갈 길 가 볼까?”

그저 스쳐지나가는 인연에 불과할 뿐이다.

후로이는 그리드와의 만남에서 그 어떠한 특별함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재밌는 일화일 뿐이라고, 가볍게 치부하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두 남자에겐 이미 운명의 소용돌이가 다가오고 있었다.

‘어서 퀘스트를 수행하자.’

후로이가 Satisfy를 시작한 지 어느덧 1년이 다 되었다.

그리고 지금!

후로이는 Satisfy를 시작한 이래 최초로 히든 퀘스트를 획득했다.

Satisfy가 오픈한 그 날부터 지금까지 참 열심히도 게임했지만 이처럼 큰 행운을 손에 쥔 적은 없었다.

‘꺾을 수 없는 정의라는 스킬은 알려진 바 없어서 그 효용성을 가늠할 수 없지만, 용기 스탯의 위력에 대해서는 소문으로 익히 들었다. 스탯이 10개가 오를 때마다 공격력과 방어력 수치가 영구적으로 상승한다지?’

후로이는 전율에 휩싸였다.

‘이번 퀘스트를 성공해서 정의의 사도 칭호를 얻게 된다면, 나는 용기 스탯을 통해서 강하게 성장할 수 있다. 그러면 나도 랭커 자리를 넘볼 수 있어.’

현재 후로이의 레벨은 127이다.

전체 유저의 평균 레벨과 비교하면 굉장히 높은 편으로, 어딜 가나 고레벨 유저로서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초창기 유저라는 점을 감안해 보면 그리 높은 레벨이 아니었다.

1년 동안, 하루 24시간 중 18시간가량을 꼬박 캡슐에서 보내온 후로이의 레벨이 127에 불과한 원인은 그의 직업에 있었다.

후로이의 직업은 전투 계열도 아니고 제작 계열도 아닌 ‘웅변가’였기 때문이다.

웅변가의 무기는 오직 화술!

전투 계열 직업은 사냥, 제작 계열 직업은 아이템 제작이라는 확실한 레벨 업 수단에 특화되어 있기 때문에 레벨 올리기가 비교적 편하지만, 오로지 주둥이로 승부하는 웅변가는 전투 능력이 빈약하고 제작 능력도 전무해서 레벨 올리기가 굉장히 까다로웠다.

그나마 후로이가 여기까지 레벨을 올릴 수 있었던 이유는, 언변을 이용해 NPC들에게 항상 퀘스트를 받아 온 덕택이다.

하지만 그 방법도 이제 한계를 맞이했다. 레벨이 오를수록 퀘스트 난이도는 올라가는 반면 획득 경험치는 줄어들었다.

남들이 몬스터를 사냥하거나 아이템 제작을 하는 동안 이리저리 발품 팔며 퀘스트를 수행해 봤자 얻는 이득이 적었다.

그래서 후로이는 사냥을 통한 경험치 획득이 절실했다.

하지만 웅변가가 사용할 수 있는 무기는 극도로 한정되어 있었고, 생명력은 모든 직업을 통틀어서 가장 낮은 편이며, 기본적인 전투 능력치와 스킬이 빈약했다. 특히 도주기가 없다는 점이 치명적이다. 그래서 자신보다 레벨이 15가량 낮은 몬스터 잡기도 힘들었다.

주력 스킬 중 하나인 ‘독설’은 대상의 모든 능력치를 하락시키고 큰 타격을 입히는 강력한 스킬이었지만, 생사가 오가는 전투 중에 쉬지 않고 주둥이 나불거리기가 어디 쉬운 일 같은가? 명백한 한계가 있다.

‘전투가 약하다는 치명적인 약점… 이런 내게 용기 스탯이 생긴다면 약점을 극복할 수 있을 터.’

반드시 퀘스트에 성공해서 정의의 사도라는 칭호를 획득하고 용기 스탯을 얻으리!

비장한 마음을 품은 후로이는 곧장 거리를 가로질러 서쪽 성문 앞에 도착했다.

성문은 비교적 한산했다.

최근 윈스톤의 영주가 주민들을 엄격하게 감시, 관리하고 있어서 주민들은 윈스톤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성문을 오가는 사람 중에 윈스톤의 주민은 단 한 명도 없고 오로지 여행자들뿐이었다.

“수고가 많으십니다.”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넨 후로이가 신분증을 제시했다.

윈스톤의 주민도 아니고 수배를 당하고 있는 것도 아닌, 그저 평범한 여행자였기 때문에 후로이는 쉽게 성문을 통과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병사들이 후로이를 내보내 주지 않았다.

창을 세우고 성문을 가로막는 그들을 보면서 후로이는 위험을 눈치챘다.

‘메로 상단이 벌써 나의 배신을 깨닫고 수를 쓴 건가?’

큰일이다. 자칫 시간을 지체했다간 메로 상단에게 붙잡히고 퀘스트에 실패할 것이다.

1년 만에 얻은 커다란 기회를 이처럼 허무하게 놓칠 수는 없었다.

“여러분께서는 어떠한 연유로 제 발을 묶는 겁니까? 업무에 착오가 있는 게 아닙니까?”

“…….”

후로이는 병사들과 대화를 시도했다. 자신의 무기인 언변을 구사하여 병사들을 설득하거나 현혹시킬 작정이었다.

하지만 입을 굳게 다문 병사들은 후로이의 말에 한마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대화를 노골적으로 피하고 있었다.

‘불길하군.’

후로이는 일단 이곳을 벗어나야겠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슬그머니 걸음을 옮기는 바로 그때, 등 뒤에서부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이 아무리 대화를 시도하더라도 병사들은 응하지 않을 겁니다. 나로부터 신호가 떨어지기 전에 혹 당신을 마주하게 된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말을 섞지 말라고 병사들에게 당부해 놓았거든요.”

후로이는 심장이 멎을 만큼 놀랐다.

메로 상단의 2인자이자, 자신에게 윈스톤의 주민들을 선동하라는 퀘스트를 의뢰한 라빗의 갑작스러운 등장 탓이다.

당황한 기색을 숨기고자 노력한 후로이는 우선 인사부터 건넸다.

“라빗 님이 아니십니까? 업무로 바쁘실 와중에 어인 일로 예까지 행차하셨습니까?”

“두통이 생길 정도로 업무가 과한 탓에 잠시 바람이나 쐴 겸 나왔습니다.”

“하하, 휴식이란 중요하지요. 좋지 못한 컨디션으로 업무에 매달려 봤자 제대로 효율을 발휘하지 못하는 법이니까요. 한데 라빗 님, 어찌하여 병사들에게 저와 대화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려 놓으신 겁니까? 오가며 사귀게 되는 지기들과 수다 떠는 낙으로 살아가는 한량의 유일한 낙을 빼앗아 갈 심산이십니까? 참으로 서운합니다.”

넉살을 부리는 후로이에게 빙그레 웃어 준 라빗이 일침을 가했다.

“후로이 님, 당신에게는 나와의 계약에 따라서 윈스톤의 주민들을 선동할 의무가 있을 터. 그 계약을 이행하고 난 후에는 나를 찾아오는 게 당연한 절차입니다. 한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윈스톤을 떠나려 하시면 제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하군요.”

후로이는 침착하게 설명했다.

“말이 무기로써 작용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마음에 자그마한 틈이라도 있어야만 하는 법. 주민들을 확실하게 선동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시기를 기다려야만 합니다. 결코 서두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지요. 저는 명확한 시기가 올 때까지 여유를 가지고 기다릴 셈입니다. 마침 윈스톤 근처의 경관이 유명하기도 하니, 기다리는 동안 성 밖의 풍경을 둘러보고자 했던 것일 뿐이고요. 제가 윈스톤을 떠나다니요? 당치도 않은 오해이십니다.”

라빗이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습니까? 내가 오해를 했군요?”

웅변가인 후로이에게는 ‘설득’이라는 패시브 스킬과 ‘설득력’이라는 스탯이 존재한다.

현재 후로이의 설득 레벨과 설득력 스탯은 굉장히 높은 편으로, 그를 잘 활용하면 어지간한 NPC를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네, 명백한 오해이십니다. 그러니 라빗 님, 병사들에게 지시하여 제가 성문을 통과할 수 있게끔 해 주시겠습니까?”

라빗의 반응을 본 후로이는 그의 설득에 성공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라빗은 지력이 굉장히 높은 NPC였다. 일개 상단을 북부 최고로 키우는 과정에서 쌓은 숱한 경험을 통해 노련함까지 갖추었다.

아직 후로이가 상대할 만한 레벨이 아니란 뜻이다.

라빗이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후로이 님의 언변이 굉장히 뛰어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주민들을 쉽게 선동하시리라 믿었죠. 한데 이제 보니 무능력하시군요. 내가 오해해서 당신의 능력을 과신하였음을 인정합니다.”

“…네?”

“금일 오전, 메로 상단은 예정대로 마을 전역에 전단지를 뿌렸습니다. 그 전단지의 내용을 접한 주민들의 마음에는 커다란 틈이 생겼지요. 그들은 흔들리며 혼란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당신이 나서서, 언어로써 그들을 현혹시키고 그들의 마음을 메로 상단에게 기울도록 하기에 딱 적절한 시기지요. 하지만 당신에게는 시류를 읽는 능력이 부족한가 봅니다. 아니라면… 더 큰 이득을 취하기 위해서 신의를 저버리고 나를 배반했든가.”

“큭!”

마치 매와 같은 눈빛이다.

라빗의 날카로운 시선이 후로이를 관통하면서 어마어마한 위압감을 선사했다.

후로이는 깨달았다.

“라빗, 당신은 저의 배신을 미리 예측했던 겁니까? 제가 말로써 병사들을 현혹하여 탈출을 시도하리라는 것까지 전부 다 예상하고서 병사들에게 저와 대화하지 말라는 지시까지 내려 놨던 겁니까!”

라빗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너무 많은 사람을 만나 왔고 관리해 왔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신의 따윈 믿지 않죠. 당신의 배신을 예측했다기보다는, 당신이 배신할 수도 있다는 가정을 세우고 최악의 사태에 대비해 놨을 뿐입니다. 자, 이리 오시죠. 한동안 갇혀 계셔야겠습니다. 주민들을 설득하기는커녕 그들의 편에 서게 되어 스테임 백작을 만나려 하는 당신을 잠자코 보내 줄 수는 없으니까요.”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라빗을 보고 있자니 후로이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끝장이다. 내 전투 능력으로는 이곳을 벗어날 수 없어. 이대로는 무력하게 갇힌 채 퀘스트에 실패할 게 뻔하다. 안 돼… 포기할 수 없어!’

히든 퀘스트는 두 번 다시 없을 기회일지도 모른다. 절대로 놓쳐선 안 되는, 반드시 잡아야만 하는 기회다.

‘섣부른 행동을 금하고 일단은 로그아웃해서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자. 이 위기를 어떻게 넘겨야 할지에 대해서는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신중하게 생각해야 돼.’

신속한 판단을 내린 후로이가 로그아웃을 시도했다.

특정한 공간에서 진행되는 퀘스트 같은 경우에는 퀘스트 도중에 로그아웃이 불가능했지만 이곳은 마을 한복판이다. 당장 주변에는 흥미롭게 사태를 지켜보고 있는 유저들이 있었다.

이런 공공장소에서는 필히 로그아웃이 되리라, 후로이는 믿었다.

“로그아웃!”

[현재는 게임을 종료할 수 없습니다.]

“뭣……?”

후로이는 경악했다.

예상치 못한, 그야말로 절망적인 알림창이 떠오른 탓이다.

“쓸데없는 저항을 관둬라!”

“크윽!”

로그아웃에 실패한 후로이는 그대로 병사들에게 밧줄로 칭칭 묶여서 포박당하고 말았다.

그에게 라빗이 냉소했다.

“로그아웃. 주신의 가호를 받아 불사의 몸으로 살아가는 당신들을 알 수 없는 먼 곳으로 데려가는 신비한 주문이지요. 그것을 무력화시키는 힘이 우리들 사이에 존재함을 모르고 있었습니까?”

이렇듯 NPC는 유저들과 자신들의 차이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라빗은 배신자 후로이를 죽이지 않고 살려 두는 거다. 섣불리 죽여 봤자 어차피 어디선가 부활해서 후환이 될 수도 있으니, 차라리 감옥에 가둬 놓고 살려 둔 채 감시할 계획이다.

라빗이 병사들에게 지시했다.

“이자를 성의 지하 감옥에 가둬라. 영주님께 이자를 끝까지 잘 감시해야 한다고 전하도록.”

“이, 이런…….”

1년 만에 처음으로 얻어 본 히든 퀘스트를 이처럼 허무하게 실패하게 되다니!

후로이는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진 심정이었다.

절망하는 그의 눈앞으로 알림창이 떠올랐다.

[퀘스트 <윈스톤의 주민들을 위하여>(A)가 <기다림>(S)으로 변경됩니다.]

<기다림>

난이도:S

권모술수에 능한 라빗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당신은 메로 상단과 윈스톤 영주의 악행을 스테임 백작에게 고발하는 임무에 실패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목숨은 연명하였으니 희망이 남았다.

절대로 탈출이 불가능하다고 알려진 윈스톤 성의 지하 감옥!

어둡고 차갑고 비위생적인 그곳에서 당신은 어떻게든 마지막까지 살아남아라!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하염없이 느리게만 흐르는 시간을 견뎌 낼 수만 있다면, 당신은 되지 못했던 ‘정의의 사도’가 나타나 당신을 반드시 구출할 것이다!

퀘스트 클리어 조건:현실 시간으로 50시간 동안 로그아웃하지 마십시오.

*극도로 위험한 퀘스트입니다. 노약자와 심약자는

반드시 퀘스트를 포기해 주십시오.

[퀘스트를 포기하시겠습니까?]

‘대, 대체 이 퀘스트는 뭐지?’

떠오른 정보창의 생소함이 후로이에게 혼란과 긴장감을 선사했다.

‘Satisfy의 시간도 아니고 현실 시간으로 50시간이나 게임에서 로그아웃하지 말라니? 무슨 이런 어처구니없는 퀘스트 클리어 조건이 있지?’

현실 세계의 후로이는 체력 하나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워낙 Satisfy를 즐겨한 덕에, 실제로 20시간 이상 캡슐에 틀어박혔던 적도 있다.

하지만 20시간이 한계였다.

캡슐의 시큐리티 시스템이 20시간 이상의 접속을 허가하지 않은 탓이다. Satisfy에 20시간 이상 접속 시, 유저는 강제로 로그아웃을 당하고 이후 6시간 동안 접속할 수 없다는 페널티를 받게 된다.

즉, Satisfy와 캡슐을 제작, 유통하고 있는 S.A사는 Satisfy에 20시간 이상 접속해 있을 경우의 위험성을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 주제에 50시간 이상 접속해 있는 퀘스트를 만들어 놓다니? 그것도 캄캄한 감옥에 갇힌 채 그저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하는 퀘스트를!

‘현실 시간으로 50시간이면, Satisfy의 시간으로는 8일하고도 8시간이다. 그 시간 동안 홀로 감옥에 갇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지낸다면, 나는 과연 온전한 정신으로 견딜 수 있을까?’

정말로 위험한 퀘스트다. 자칫 미쳐 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어지간한 각오와 정신력으로는 결코 임해선 안 될 퀘스트다.

하지만 기회이기도 했다.

‘이건 난이도가 A급인 히든 퀘스트의 연계 퀘스트다. 그것도 S로 격상된 연계 퀘스트. 결코 놓칠 수 없는 기회야.’

후로이는 퀘스트를 수락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 전에 이것저것 생각해 보았다.

현실 세계의 나는 출근 등의 부득이한 일정을 가지고 있는가? 없다. 백수인 데다 최근에 잡아 놓은 스케줄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캡슐에서 나오지 않는 걸 보고 걱정해서 캡슐의 전원을 강제 종료할 만한 가족이 있는가? 없다. 독신남이기 때문이다.

현관문은 잘 잠갔는가? 나흘째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그동안 지금까지 쭉 현관문은 굳건히 잠겨 있다.

마지막 용변과 식사는 언제였는가? 3시간 전이다. 어차피 캡슐을 가수면 상태로 전환하면 3일 동안 먹지 않고 용변을 보지 않아도 몸이 아슬아슬하게나마 버틸 수 있을 거다.

장기간 캡슐에 접속해 있을 시 문제가 일어날 만한 병력이 있는가? 전혀 없다. 건강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좋아, 어차피 나는 체력 빼면 시체다. 어디 한번 도전해 보자. 그 철저한 S.A그룹에서 만든 퀘스트인데, 설마 유저가 죽게 놔두기야 하겠어?’

단단히 결심한 후로이가 퀘스트를 수락했다.

“퀘스트를 포기하지 않겠다.”

[마지막 경고입니다. 정말로 퀘스트를 진행하시겠습니까?]

“그래.”

[퀘스트를 수락하였습니다.]

<기다림>

난이도:S

권모술수에 능한 라빗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당신은 메로 상단과 윈스톤 영주의 악행을 스테임 백작에게 고발하는 임무에 실패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목숨은 연명하였으니 희망이 남았다.

절대로 탈출이 불가능하다고 알려진 윈스톤 성의 지하 감옥!

어둡고 차갑고 비위생적인 그곳에서 당신은 마지막까지 살아남아라!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하염없이 느리게만 흐르는 시간을 견뎌 낼 수만 있다면, 당신이 되지 못했던 ‘정의의 사도’가 나타나 당신을 반드시 구출할 것이다!

퀘스트 클리어 조건:현실 시간으로 50시간 동안 로그아웃하지 마십시오.

*극도로 위험한 퀘스트입니다. 노약자와 심약자는 반드시 퀘스트를 포기해 주십시오.

*퀘스트를 수락한 순간부터 시스템이 당신의 뇌파를 철저하게 관리, 감독하여 당신의 건강 상태를 실시간 체크합니다. 만약 당신에게서 위험 수준의 이상이 감지될 경우, 시스템은 당신을 강제로 로그아웃시킵니다.

*당신이 강제로 로그아웃된 경우, S.A사는 임원과 의료진을 당신의 거주지로 파견하여 최악의 사태에 대비합니다.

*당신이 무사히 퀘스트를 완료하고 로그아웃한 경우에도 S.A사의 임원과 의료진은 당신을 방문, 당신의 상태를 체크합니다.

*Satisfy의 시간으로 200시간을 인내해야 하는 퀘스트입니다. 최악의 경우, 장시간 동안 가상현실 속에 접속해 있는 탓에 현실과 가상현실을 혼동할 수도 있습니다. 그와 같은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마지막 순간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마시고 강한 정신력을 발휘해 주십시오.

퀘스트 클리어 보상:세컨드 직업 ‘정의의 사도의 파트너’. 칭호 ‘시련을 극복한 자’.

*정의의 사도의 파트너:용기 능력치가 개방됩니다. 정의의 사도와 함께 있을 경우 모든 능력치가 20퍼센트 상승합니다. 스킬 ‘꺾을 수 없는 정의’ 생성. 스킬 ‘정의를 위한 희생’ 생성.

*시련을 극복한 자:불굴 능력치가 개방됩니다. 스킬 ‘굳센 의지’ 생성.

퀘스트 실패 시:페널티가 없습니다.

[지금부터 캡슐이 가수면 상태로 전환됩니다.]

[외부에서 캡슐의 전원을 차단하는 게 불가능해집니다.]

[외부에서 캡슐에 어떠한 충격을 가하거나 전원을 차단하려는 시도가 보일 경우, S.A사의 직원이 당신의 거주지로 파견되어 캡슐을 보호합니다.]

[당신의 도전에 찬사를 보냅니다. 행운을 빕니다.]

“마치 VIP 고객이라도 된 기분이군.”

떠오르는 알림창들을 확인한 후로이의 감상이다.

‘더 이상 걱정하지 말자. 200시간 따위, 정신 똑바로 차리고 견뎌 주마.’

세계 최고의 기업임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S.A사의 철저한 관리, 감독을 믿으며 후로이는 남아 있던 근심을 완벽하게 떨쳐 냈다. 그리고 마음을 굳건히 다졌다.

‘기다리겠다. 정의의 사도를. 그가 나를 구해 준다면, 내가 퀘스트를 클리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나는 그가 설령 NPC일지언정 충성을 다해 모시겠다.’

누군지 알 수 없는 정의의 사도와의 만남을 기약하며, 후로이는 윈스톤 성의 지하 감옥에 순순히 갇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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