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뉴스의 주인공
“으아아아아악!!! 도란, 그 개자식!! 하기 싫다는 퀘스트를 강제로 떠넘긴 것도 모자라서 팀킬을 해? 염병! 도둑이고, 강도고, 도적이고 죄다 왜 이름에 도 자가 들어가는지 이제야 알겠다!! 도란 놈! 앞으로는 네 이름 자체가 욕이다!!”
캡슐에서 뛰쳐나온 나는 어떻게든 울분을 토해 내기 위해서 창문을 열고 고래고래 소릴 질렀다.
내리는 빗줄기가 강한지라 빗소리에 목소리가 묻혀서 동네 사람들한테 욕먹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덕분에 한참을 마음껏 떠들 수 있었던 나는 간신히 분을 삭인 뒤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새벽 4시가 채 되질 않았다.
오후 늦게까지 내린다는 비 덕분에 가족들 눈치 안 보고 쉴 수 있는 날이건만, 이런 황금 같은 연휴에 12시간씩이나 게임에 접속을 못하게 되다니!
“마이너스 3레벨… 생각할수록 열 받네. 도란 놈, 도란 놈, 도란 놈!”
나는 일단 화장실로 향했다. 세수라도 해서 분노로 인해 뜨겁게 달궈진 머리를 식히기 위함이었다.
찬물로 얼굴을 적시고, 시원하게 뿜어지는 물줄기 소리를 듣고 있자니 차츰 진정이 된다.
이틀째 감지 않은 머리까지 감는다면 기분이 한결 더 나아지겠지만 귀찮으니 관두자.
“…도란을 욕할 상황이 아니야.”
도란은 내 예상과 달리 엄청나게 강했고, 잘 싸워 주었다. 나는 들러리였을 뿐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었다. 도란 혼자서 적들을 모조리 해치웠다. 도란의 힘에만 의지하고도 퀘스트 성공을 목전에 뒀었다.
그래, 도란은 정말로 잘해 주었다.
다만 도중에 발생한 의외의 상황이 문제였다.
최고 랭커의 등장.
“그 마녀 계집…….”
유라가 왜 그곳에 나타났을까?
그녀는 흑마술사다. 야탄의 신전은 흑마술사의 중요한 거점이니까 그녀가 언제 그곳에 나타나도 이상할 일이 아니다.
유라는 왜 나를 적대시했을까?
나는 신전의 침입자였고, 그녀는 신도였으니 신전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당연히 적대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이제야 이해가 간다.
‘내가 그 퀘스트를 수락했을 당시 신전 내에 있던 흑마술사들에겐 나를 저지하라는 별도의 퀘스트가 발생했겠지. 진정한 적은 NPC들이 아니라 유저들이었던 거야. 도란이 강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어. 어쩐지 S급 퀘스트가 너무 쉽게 느껴지더라니.’
나는 결론을 내렸다.
‘마녀… 내가 퀘스트를 발동시킨 덕분에 마침 그곳에 있던 너까지 덩달아 퀘스트를 받았던 거구나. 피도 눈물도 없는 계집. 감사할 줄도 모르고 보자마자 죽이려 들다니…….’
내가 죽은 후 유라는 퀘스트를 성공했을 것이다. 유라는 강했고, 도란은 상당히 지쳐 있었으니까.
정말로 얄밉다.
애초에 유라가 퀘스트를 얻게 된 것이 내 덕분이고, 도란이 그렇게까지 지쳤던 이유도 내가 약했기 때문이다. 유라는 그냥 앉아서 떡 먹은 셈이다. 내가 그녀의 입에 떡을 쏙 넣어 준 것이고.
“나쁜 년…….”
200레벨도 넘는 최상위 랭커 주제에 마이너스 레벨 허접찌끄레기의 퀘스트를 방해하고 날름 가로채 가다니!
다시 캡슐로 돌아와 앉은 나는 인터넷에 접속했다. 그리고 유라를 검색해 보았다.
유라, 단 두 글자를 입력하자 수백, 아니 수천만 개의 관련 링크들이 인터넷 화면을 가득 채웠다.
그중 노출도가 높은 블로그와 대규모 커뮤니티의 게시 글들만 간추려서 확인해 본 결과, 단 수 분 만에 유라에 대한 세간의 평가를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핏빛 마녀’라는 오싹한 별명과는 달리 사랑받고 존경받았으며, 또한 선망의 대상이었다.
극상의 미모와 완벽한 게임 실력, 그리고 언론을 통해서 비추어지는 이상적인 이미지 덕분에 그녀는 남녀노소에게 찬양을 받았다. 인종까지 초월한다. 해외 서버에서 만들어진 팬클럽만 해도 수천 개가 넘었다.
얼핏 봐도 할리우드의 톱 배우들을 월등히 능가하는 인기다.
‘요즘 세상엔 그게 당연한가.’
그 어떤 영화보다 화려하고 스릴 넘치면서 드라마틱한 Satisfy의 주역이 일개 영화배우보다 못한 인기를 누린다면, 오히려 그게 비정상일 것이다.
요즘 TV를 틀어 보면 수백 개의 채널 중 대다수가 Satisfy 관련 방송을 위주로 방영하고 있다. 어느 시간대에서든 높은 시청률을 보장받았기 때문에 Satisfy 전문 뉴스 채널들이 따로 생겨났을 정도다.
물론 대한민국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Satisfy의 유저가 자그마치 20억 명을 넘는다. 전 세계의 방송 시장 역시 대한민국과 사정이 같았다.
이에 따라서 아무리 흥행한 영화의 배우라도 Satisfy의 주역(랭커)보다는 노출도가 훨씬 떨어졌고, 이는 인지도와 직결되었다.
특히 유라는 그 미모 덕에 다른 랭커들보다도 인지도가 훨씬 더 높았다. 덕분에 돈과 명예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품에 안았다.
Satisfy 때문에 오히려 빚만 떠안은 나와는 완벽하게 대조되는 인물인 것이다.
‘난 단순히 게임 폐인 소리를 들을 뿐인데, 넌 게임 덕분에 오히려 환상적인 인생을 사는구나.’
좋아하는 게임을 즐기면서 세상에 인정받는다?
엄청나게 부럽다. 내가 유라였다면 삶에서 아쉬움을 찾지 못할 것 같았다.
“…너 정도나 되는 인물이 나처럼 불쌍한 놈의 퀘스트를 굳이 빼앗아 가야만 했던 거냐.”
괜히 마녀라 불리는 게 아니다. 정말이지 악독한 계집이 아닐 수가 없다.
꽈드득!
이를 간 나는 홀로그램 키보드를 띄웠다. 그리고 유라와 관련된 게시 글들에 하나하나 댓글을 달기 시작했다.
‘유라 쓰레기임. 저렙 유저 퀘스트 방해함. TV에서 온화하게 나오는 거랑 실제는 완전 달라요. 성격 대박 썩었음.’
‘유라 실물로 보면 별로 안 예쁨. 제가 직접 봄. 성형한 거 티 남. 코에 분필 박힘ㅋ 성격도 더러워서 표정도 똥 씹은 표정임. TV에서 웃는 건 다 가식임.’
‘유라가 왜 좋아요??? 완전 나쁜 년인데. 걔가 등 처먹은 사람만 해도 셀 수 없이 많을걸요? 걔가 내 등도 처먹었음.’
‘랭커 주제에 저렙 퀘스트 방해하는 못된 년입니다!! 방송에서 만들어진 이미지에 속지들 마세여!!’
“흐흐흐……! 크크큭큭!”
나는 내가 실제로 겪고 느낀 유라에 대해서 모두 사실대로 사람들에게 알려 주었다.
거짓 정보에 속아 온 우민들에게 진실을 전파해 주는 위대한 언론인이 된 심정이라 기분이 좋아진다. 조금 전 경험했던 끔찍한 현실이 점차 뇌리에서 잊혀져 갈 정도!
타닥. 타다닥.
계속되는 댓글 공작!
은은한 야광 빛을 발하는 홀로그램 키보드를 두드리는 나의 열 손가락이 마치 경쾌한 음악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의 것처럼 거침없이 신명나게 움직인다.
어두운 방, 캡슐 안에 자리 잡은 채 미소를 머금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지금의 내 모습, 누군가가 목격한다면 아름답고 신비롭게 느낄 테지.
“오빠… 드디어 미친 거야?”
실실거리면서 악성 댓글… 아니, 진실을 알리는 운동을 한참 벌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흠칫 놀라서 방문으로 시선을 돌려 보니, 살짝 열린 방문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민 세희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놀래라.”
내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 사이, 아예 방 안으로 들어온 세희가 팔짱을 끼고 말했다.
“화장실 가는데 오빠 방에서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리잖아. 게임에 미치더니 드디어 현실에서까지 미친 게 아닐까, 동생으로서 걱정이 돼서 확인해 본 거야. 미쳤어? 아니라고 대답해 주길 바랄게.”
“…오빠한테 한다는 소리가. 안 미쳤다.”
“아직은 안 미쳤다니 다행이네. 어휴, 냄새. 머리에 떡 진 것 봐. 좀 씻으면서 살아. 밥 먹은 그릇은 재깍재깍 치우고! 아니, 왜 애초에 밥을 방구석에서 혼자 먹는 거야? 같이 먹으면 좋을… 흥, 아니야.”
세희는 말을 독하게 하면서도 내가 아까 먹고 한쪽에 대충 쌓아 두었던 빈 밥공기와 반찬통들을 주섬주섬 정리해 주고 있었다.
‘녀석, 예쁜 얼굴만큼이나 착하단 말이야. 날 안 닮은 게 다행이지.’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자, 시선을 느낀 세희가 고개를 돌리고 노려봐 왔다.
“가만히 앉아서 보고 있지만 말고 바쁜 일 없으면 같이 좀 치우지? 아니다. 내가 치울 테니까 가서 얼른 씻고 와. 그 몰골, 너무하니깐.”
“알아서 할 테니까 그냥 놔둬. 왜 자다 일어나서 꼭두새벽에 네가 그런 걸 치우고 있냐? 어서 가서 자.”
“오빠가 기분 나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봤더니 소름이 돋아서 잠이 싹 달아났단 말이야. 잔말 말고 어서 씻고 와. 오래간만에 제대로 된 얼굴이 보고 싶… 아, 아니! 더러워서 불쾌하니깐 어서 씻고 오라굿!”
올해 고1인 세희와 나의 나이 차이는 무려 9살이나 난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늦둥이 동생의 명이니까 이 정도는 따라 줘야지?
‘어차피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아까 세수할 때 머리까지 감을걸.’
나는 귀찮음을 무릅쓰고 욕실로 향했다. 그리고 비누로 머리를 후딱 감고 수건으로 물기를 탈탈 털었다.
근데 머릿결이 어째 너무 뻑뻑하다?
“…빨랫비누였냐.”
개털이 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면서 방으로 돌아온 나는, 방에 진동하던 홀아비 냄새가 희미해졌음을 느꼈다. 오히려 상쾌한 향기가 난다.
방향제까지 뿌려 준 건가? 꼼꼼하기도 해라.
머리를 감고 온 잠깐 사이에 방이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새벽에 자다 일어난 애가 이 정도까지 해 주다니, 나와 달리 참 부지런한 녀석이다. 누가 데려갈지 몰라도 멋진 신붓감이야.
나는 캡슐에 앉아 있는 세희를 확인하고 침대에 몸을 눕혔다.
“인터넷 하려면 해~”
어차피 게임 접속도 못하는 상황. 나는 오빠답게 의젓한 태도로 동생에게 캡슐을 양보했다.
으쓱해하고 있는 나에게 세희는 예상과 달리 경멸의 시선을 보내왔다.
“오빠… 키보드 워리어였어?”
“키보드 워리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세희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캡슐 정면에 떠올라 있는 모니터를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였다.
“자기보다 한참이나 어린 여자에게 함부로 욕을 하고 얼토당토않은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이유가 뭐야? 설령 이유가 있더라도 이런 행동은 너무 치졸해 보여. 오빠한테 정말로 실망이다.”
착 가라앉은 음성을 들으니 알 수 있다. 지금 세희는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뒤늦게 실수를 떠올린 나는 긴급히 모니터를 확인했다.
내가 유라의 욕으로 도배해 놓은 댓글 목록이 주르륵 떠올라 있었다.
이런 제기랄! 인터넷 창을 꺼 뒀어야 하는 건데!
“세, 세희야, 이건…….”
“저질.”
나는 세희에게 나름의 해명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세희는 그대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방문을 걸어 잠그고 내게 말할 기회조차 주질 않았다. 아무리 방문을 두드려 봐도 문은 열리지 않는다.
오빠로서 간신히 남겨 두고 있던 일말의 체면이 이 순간 완전히 바닥났음을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이게 다… 이게 전부!
“마녀 년 때문이라고!!”
나는 세희 방 앞에서 억울함을 호소했다. 도중에 나도 모르게 억양이 높아졌는지, 소란에 놀라 잠에서 깨신 어머니께 등짝을 후려 맞고 말았다.
아무리 맞아도 단련되지 않는 등짝! 아프다…….
나는 시뻘겋게 달아오른 등짝에 쿨파스를 붙인 후에야 잠들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후아아아~~암.”
눈을 뜨고 시간을 확인하니 오전 11시다.
부모님께서는 새벽부터 출근하셨을 테고, 세희도 이미 3시간 전에는 등교했을 느지막한 시간이다.
“여섯 시간밖에 안 잤네. 부지런해서 늦잠도 못 자니 탈이야……. 신은 어째서 날 이렇게 부지런하게 만들어 놓으셨을까?”
나는 팬티 위로 엉덩이를 긁적이면서 주방으로 향했다. 배고파서 밥상을 차리려고 했지만 너무 귀찮다.
“관두자.”
배 속이 꼬르륵 소리를 내면서 항의했지만 사뿐히 무시한 나는 거실로 향했다. 그리고 소파에 드러누워서 TV를 틀었다.
돌리는 채널 족족 Satisfy 관련 방송을 방영하고 있었다.
심지어 주부 대상 채널에서도 Satisfy를 다루고 있다. 프로그램의 제목은 ‘Satisfy를 통해서 젊은 남자 만나는 법!’ Satisfy의 캐릭터를 최대한 젊고 예뻐 보이게 치장하는 방법부터 시작해서 영계를 꼬이기까지의 과정을 상세하게 다룬 프로그램이었다.
‘…PD 천잰데?’
시청률이 꽤 높을 것 같다. 마누라 둔 남자들로부터 항의 전화가 빗발쳐서 장수할 것 같진 않다만.
나는 ‘Satisfy 핫이슈’라는 프로그램에서 채널을 멈췄다.
귀엽게 생긴 여자 리포터가 내 또래의 동양인 청년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청년의 얼굴이 잠시 클로즈업된다. 화면 하단으로 ‘카츠’라는 아이디와 ‘203’이라는 레벨 정보가 자막으로 떠올랐다.
‘카츠가 벌써 200레벨을 넘겼다고?’
카츠는 유명인이다. 싸가지 없는 놈으로 악명을 떨쳤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전사 클래스 중에서 항상 상위 랭킹에 속해 온 탓이 컸다.
하지만 세 달 전까지만 해도 170 초반 레벨이었던 녀석이 벌써 203레벨이라니?
저 정도 레벨이면 통합 랭킹에서도 최상위에 속할 터.
‘어떻게 세 달 만에 30레벨을 넘게 올린 거지?’
마침 TV 속 리포터가 내 의문을 해소시켜 주겠다는 듯이 질문하고 있었다.
『Satisfy의 요즘 가장 큰 이슈 중 하나가 바로 카츠 님이라는 사실, 혹시 카츠 님 본인도 알고 계셨나요? 우리 제작진들은 엄청 놀랐어요. 단 세 달 사이에 카츠 님의 통합 랭킹이 53위까지 올랐더군요. 짧은 기간 동안 급격한 성장을 이뤄 내신 비결이 뭔가요?』
잘 정돈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카츠가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세 달 전에 에픽 전직서를 구했거든. 오늘 내가 이 인터뷰에 응한 것은 내가 전직한 에픽 직업에 대해서 공개하기 위함이었고.』
『네에?!』
리포터가 경악했고, 나 또한 놀라서 사타구니를 긁적이던 손을 멈추고 말았다.
에픽 전직이란 말이 너무 충격적이라, 카츠가 방송 인터뷰에서 반말을 지껄여 대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 지적할 겨를이 없었다.
지난 1년간 Satisfy에 등장한 에픽 전직서는 단 두 권.
그 가치는 상상 초월이다. 그런데 카츠가 새로운 에픽 전직서를 손에 넣었다는 것이다.
‘세 번째 에픽 직업…….’
처음 등장했던 에픽 전직서에 대한 정보는 밝혀진 바가 아예 없다. 전직서의 내용은 비공개인 채로 아이템 거래 사이트를 돌고 돌다가 결국은 거래가 되었으며, 주인이 누구인지는 모르는 상황.
두 번째 등장한 에픽 전직서도 통합 랭킹 7위 아그너스가 획득했다고만 알려졌을 뿐, 그가 무슨 직업을 갖게 됐는지는 결국 아무도 모른다.
이처럼 대부분의 유저들, 특히 상위 랭커 유저들은 자신들의 정보가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꺼려하는 경향이 있었다.
정보는 곧 힘!
Satisfy의 치열한 경쟁 구도에서 살아남기 위함이었다.
대형 공략 사이트들에서 공유되는 정보도 실은 상당히 한정되어 있는 편일 것이다. 알짜배기 정보들은 자신들만 독점할 테지. 나만 해도 그럴 것 같고.
한데 카츠는 오히려 스스로 직업을 밝히려 하고 있다. 화려하고 눈에 띄는 것을 좋아한다고 정평 난 놈답다.
어쨌든 이건 엄청난 특종이다. 순간 시청률이 최고 기록을 갱신할 수도.
당장 나만 해도 채널을 고정시켜 놓고 있지 않은가.
나는 집중했고, 특종을 잡았음에 흥분한 리포터는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어떤 직업으로 전직하신 건가요?』
『‘블러드 워리어’ 그것이 내가 전직한 에픽 직업의 이름이다.』
『이름부터 특별하고 무시무시한데요?』
특별하고 무시무시하기는 개뿔. 지극히 흔하고 평범한 이름이구만. 에픽 직업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허접한 이름이네.
하지만 카츠는 그 유치한 이름이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이름만 대단한 것이 아니야. 아주 환상적인 직업이지.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을 알려 주자면…….』
카츠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발산되는 예기가 엄청난 명검임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저거 하나만 갖다 팔아도 내 빚을 전부 갚고도 남을 것 같다.
『잘 봐라.』
카츠의 안광이 붉게 물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검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카츠의 검이 클로즈업된다.
수백, 수천 가닥의 혈관 같은 것들이 검날 곳곳에서 솟아나더니 빠른 속도로 자라나 검날을 완전히 뒤덮어 버렸다.
이내 시뻘겋고 시퍼런 혈관들로 완전히 감싸여진 카츠의 검은 마치 살아 있는 심장처럼 박동했다. 그러면서도 예기는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날카로워졌다.
굉장히 위협적인 모습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속이 매슥거릴 정도로 기괴하고 역겨운 생김새다.
하지만 카츠는 그 꿈틀거리는 붉은 검이 사랑스럽다는 듯이 쓰다듬었다.
『이건 내 패시브 스킬이다. 그 어떤 무기일지라도 내 손에 쥐어지면 이런 모습으로 변형되지. 이처럼 변형된 무기로 적을 공격하면 공격력에 비례하는 일정한 수치만큼의 생명력을 흡수할 수 있다. 덕분에 신관이나 물약에 대한 의존도가 대폭 줄었고, 단독 사냥이 수월해졌다. 공격하면 할수록 차오르는 생명력은 내게 엄청난 사냥 속도를 선물했지. 이 외에도 매우 강력한 전투 스킬들이 새롭게 생성됐기 때문에 나는 빠르게 레벨을 올려 올 수 있었다.』
얼굴이 파랗게 질린 리포터가 흉측하게 생긴 검을 애써 외면하면서 인터뷰를 속행했다.
『에픽 직업이 일반 직업보다 확실히 강력한가 보군요?』
『멍청한 질문이군. 당연한 거 아니냐? 레어 직업만 하더라도 일반 직업보다 특수한 위력을 발휘하는데, 그 상위인 에픽 직업은 어지간할까? 내가 이참에 단언하지. 나는 조만간 랭킹 1위에 오를 것이다. 내게는 그만한 능력이 있거든.』
『지난 1년간 10위권 랭킹은 변동이 없었잖아요? 10명 모두 자신의 순위를 유지한 채 아무에게도 그 자리를 내어 주지 않고 있죠. 그만큼 10위권 랭커들은 특별하고, 유난히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뜻일 텐데요. 단지 직업 하나만 믿고 그들을 따라잡겠다고 선언하기엔 무리가 있으신 거 아닌가요?』
저 리포터 초짠가? 저 지랄맞은 카츠가 또 난리 치겠군.
내 예상대로 카츠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가 리포터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면서 말했다.
『너는 내가 단지 직업 하나만 믿고 까분다고 말하고 싶은 거냐? 웃기는 소리! 내겐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 블러드 워리어라는 직업은 그런 내 재능을 효과적으로 이끌어 주는 수단에 불과해! 나보다 훨씬 먼저 에픽 전직서를 얻었으면서도 랭킹 7위 자리를 유지만 할 뿐, 위로 올라가지 못하고 있는 아그너스 따위와 나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조만간 모두에게 알려 주도록 하지!!』
소문에 의하면, 카츠는 일본 굴지의 대기업 회장의 아들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싸가지 없고 프라이드가 높기로 유명했다.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언사를 지껄인 초짜 리포터에게 잔뜩 겁을 준 후, 그녀로부터 마이크를 빼앗아 든 카츠가 카메라를 향해서 선포했다.
『모두 잘 들어라! 이 카츠가 곧 통합 랭킹 1위 자리를 쟁탈할 것이다! 내가 오늘 직업을 밝힌 이유는, 기존의 랭커들이 내 강함을 미리 인지하고 두려워하며 벌벌 떨고 있으라는 의미에서였다! 큭큭, 오줌 지리면서 기다려라! 조만간 너희들을 모조리 제쳐 줄 테니까!』
울먹이는 리포터에게 마이크를 거칠게 집어 던지더니 자리를 떠나려던 카츠가 문득 멈춰 섰다. 그리고 리포터에게 물었다.
『한국 방송국이라고 했지?』
리포터는 사색이 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게 카츠가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침 잘됐군. 유라에게 전해라. S.A그룹 말고는 아무것도 봐줄 게 없는 소국의 계집 주제에 언제까지고 기고만장하지 말라고. 조센징이 게임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시대는 과거에 끝났어. 조센징들의 마지막 자존심인 그녀를 조만간 내가 짓밟아 줄 테니, 조센징들은 손가락 빨면서 구경이나 하라고! 하하핫!』
분해하면서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는 리포터의 모습이 처량하다.
나는 카츠를 보면서 혀를 찼다.
“마이크는 방송국에만 한정으로 제공되는 아이템이라 희소성이 있어서 비싸게 팔릴 텐데 그걸 순순히 돌려주다니. 돈 많다고 자랑하냐? 씨부럴 새끼. 그런데 블러드 워리어라…….”
부럽다.
생명력 흡수 스킬은 과거부터 어느 게임에서든 큰 효율을 보였다. 더군다나 카츠가 자신감 넘치게 자랑한 전투 스킬들은 에픽 등급 전사 직업의 스킬이니만큼 상당한 위력을 발휘할 터.
얼핏 봐도 블러드 워리어는 막강한 직업이었다.
“나보다는 못하겠지만.”
파그마의 후예는 생산 직업이다.
보통 생산 직업은 공격 스킬이 전무했기 때문에 파그마의 후예도 마찬가지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전투가 약할 거라는 생각은 이제 하지 않는다. 유라와의 일전에서 파그마의 후예가 괜히 레전드리 직업이 아님을 체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상태 이상 저항력이 엄청나게 높았고, 5초간의 불사신 모드는 가히 사기급이었다. 어마어마한 탱커로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었다.
그뿐이랴?
모든 장비를 아무런 제약 없이 착용할 수 있다. 부족한 전투력을 템빨로 커버하는 게 가능할 수도 있다.
“그리고 생산 직업은 돈이 된다, 이거지.”
사냥도 힘들고 레이드에는 도전조차 할 수 없는 생산 직업을 택하는 유저가 왜 그리 많을까?
그야 돈이 되기 때문이다.
파그마의 후예는 전설급 대장장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될 것이다.
‘좋은 아이템을 제작해서 판매하면 빚쟁이 신세에서 벗어날 수도 있어.’
현금 수억 원 가치의 직업이니만큼 돈값을 하리라 믿는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캡슐의 전원을 켰다. 그리고 인터넷에 접속해서 대장장이에 대한 정보들을 찾아보았다.
내겐 너무 생소한 전문 용어들과 암기해야 할 지식들이 많아 골치 아팠지만 최대한 집중해서 공부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허기도 잊은 채 또 다른 공략 글들을 찾아보던 나는 틀어 두었던 TV로부터 큰 소란을 듣고 거실로 나왔다.
TV 화면에 긴급 뉴스라는 자막이 큼지막하게 떠올라 있었다.
『방금 들어온 속보입니다. 에트날 왕국의 북부 지역에 위치한 야탄의 신전이 처참하게 붕괴되었다고 합니다. 멀쩡하던 신전이 하루아침에 붕괴되다니, 놀랍고 생소한 사건입니다. 대체 무슨 사연일까요? 현장으로 가 보시겠습니다. 이경민 기자.』
화면이 스튜디오에서 낯익은 장소로 전환됐다.
“저긴…….”
TV에서 비추어 주는 장소. 그곳은 어제 내가 부활했다가 도란을 만나 강제로 퀘스트를 떠맡게 됐던 야탄의 신전이었다.
국회의사당 건물보다 컸던 그 거대한 신전이 놀랍게도 반파되어 있었다.
그 광경을 본 나는 유라가 불러일으켰던 칠흑의 폭풍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 마법… 어마어마하다 싶더니 신전마저 박살 낼 정도였던 거야? 그런 무시무시한 마법을 사람한테 쓰다니, 정말로 무지막지한 계집이다.’
어제 잠시 대면했던 마녀에 대한 두려움이 시간이 지날수록 증폭된다. 언젠가 우연히 길에서 만나게 되면 나도 모르게 오줌을 지려 버리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될 지경!
카츠가 그녀를 꺾는다고 했겠다?
“미친놈, 정말로 주제 파악 못하는 소리를 지껄여 댔군. 그 여자는 이미 다른 차원에 존재하고 있어. 괴물이라고.”
남자 기자가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현실 시간으로 오늘 새벽 3시 40분경, 한 유저가 이곳을 찾았다가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고 합니다. 대한민국 1위 랭커이자, 통합 랭킹 5위에 빛나는 유라가 누군가와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는데요. 그녀 정도나 되는 인물이 신전을 무너뜨릴 정도로 전력을 쏟아 전투에 임했다니, 과연 상대가 누구였을까요? 같은 상위 랭커와의 알력 다툼이었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왜 굳이 이런 장소에서 싸워야만 했던 걸까요? 혹시 숨겨진 퀘스트와 연관된 일은 아니었을까요? 여러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그럼 목격자의 증언을 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어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소년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소년의 아이디와 레벨이 하단에 자막으로 떠오른다.
소년이 말했다.
『어제 제가 퀘스트 때문에 이 근처에 왔다가 몬스터에게 쫓기게 돼서 어쩔 수 없이 여기까지 도망쳐 왔었거든요. 근데 원래라면 바글바글했을 신도들의 모습이 온데간데없고, 지하에서는 큰 소란이 일어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지하로 내려가 봤더니…….』
말을 멈춘 소년이 기자에게 질문했다.
『지금 제 얼굴 모자이크 되고 있어요? 저 지금 학교 가야 할 시간인데, 캡슐방 와 있는 거 엄마한테 걸리면 맞아 죽어요.』
그 발언과 거의 동시에 소년의 얼굴과 아이디가 완벽하게 모자이크 처리됐다.
기자가 소년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모자이크 됩니다. 음성 변조까지 되고 있는걸요. 안심하고 말씀해 주세요.』
멍청한 소년이 안도의 숨을 내쉰다.
불쌍한 놈… 엄마한테 잘 맞아 죽어라.
남의 불행은 곧 나의 행복! 기분이 좋아진다.
소년의 말이 이어졌다.
『지하에 내려가 봤더니 유라 님이 계시더라고요. 정말 어찌나 아름다우시던지 넋을 잃고 봤어요. 아저씨도 유라 님 실제로 본 적 있어요? 쩔어요, 진짜! 김태이 리즈 시절보다 훨씬 더 예쁘더라고요! 완전 여신 강림!』
『그녀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전 세계 사람들이 이미 충분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이야기는 접어 두죠. 지하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죠?』
『참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죠.』
『그러니깐 구체적으로 뭐가 놀라웠다는 겁니까?』
『거의 20명 정도 되는 흑마술사들이 어떤 형을 향해서 계속 마법을 난사하고 있더라고요? 근데 그 형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어요. 저주조차 하나도 안 걸렸어요. 전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오히려 웃으면서 유라 님에게 성큼성큼 전진하더라고요. 유라 님은 잔뜩 긴장하고 계시고.』
기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야탄 신도 NPC들의 기본 레벨은 160이라고 알려졌는데요. 그는 160레벨의 신도들에게 공격을 받으면서도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겁니까?』
『그냥 아예 저항하는 것 같던데요? 정말로요.』
『수십 개의 마법을 모조리 저항했다고요? 그건 최상위 랭커들이라도 불가능할 것 같은데요……. 그는 유라보다 상위의 랭커였습니까?』
기자가 못 미덥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소년은 개의치 않고 말해 나갔다.
『상위 랭커는 아니에요. 완전 처음 보는 얼굴이었거든요. 그런데도 흑마술사들의 마법들을 전부 다 씹어 버리면서 유라 님을 위협했어요. 유라 님이 급기야 다크 스톰이라고, 좆나… 아니, 열라 짱 세 보이는 마법까지 쓰셨는데요. 그게 너무 세서 신전이 부서질 정도였는데도 그 형은 맞고도 멀쩡히 서 있더라니까요? 그 형을 바라보는 유라 님의 표정이 가관이었죠. 마치 두려워하는 듯한……. 제가 유라 님 팬클럽 회원이라서 아는데, 유라 님은 절대로 그런 표정 지을 분이 아니거든요. 유라 님이 그런 표정을 지을 날이 오리라곤 상상도 못했었어요.』
기자가 반신반의하면서도 지대한 흥미를 보였다.
『그래서 결국은 어떻게 됐습니까? 그리고 그 의문의 남자의 아이디는 뭐였죠?』
소년이 고개를 저었다.
『아이디라……. 글쎄요, 그… 뭐였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이 안 나요. 제가 유라 님의 아름다움에 넋이 팔려서 그 형을 제대로 관찰 못했거든요. 그리고 저는 유라 님 마법에 맞아서 무너진 기둥에 깔려 죽어 버린 바람에 결과는 몰라요.』
『그렇군요……. 최상위 랭커가 아님에도 20여 명의 흑마술사들과 유라를 단신으로 상대했다는 그 의문의 남자는 대체 누구였을까요? 정체를 꼭 알고 싶습니다. 현장의 이경민이었습니다.』
이럴 수가!
리모콘을 쥐고 있는 손이 바들바들 떨린다. 심장이 쿵쾅거린다.
뉴스에서 말하는 의문의 남자, 그건 다름 아닌 나다.
이건 기회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TV에 출현한다면 각종 매체로부터 인터뷰 요청이 쇄도할 것이고, 나는 출연료로 짭짤한 수익을 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
마침 스튜디오로 전환된 화면에서는 남녀 앵커가 전문가들을 앉혀 놓고 의문의 남자, 즉 나에 대해서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나는 당장 방송국으로 전화했다.
(안녕하세요, BCC 시청자 상담 센터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긴급 속보를 보고 있는 사람인데요. 지금 속보에서 다루고 있는 남자 있죠? 유라랑 싸웠다는 사람.”
(네. 혹시 제보를 하시려는 건가요?)
“그거 접니다.”
(…아, 네. 확인 절차를 위해서 Satisfy 내의 아이디와 간략한 정보를 알려 주실 수 있을까요?)
“아이디는 그리드. 직업은 파그마의 후예고, 레벨은 마이너스 3입니다. 아, 파그마의 후예라는 직업은 레전드리 전직서를 통해서 얻은 직업으로서…….”
뚜뚜-
“…….”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린 방송국에선 두 번 다시 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 번호 자체를 스팸으로 등록한 것 같았다.
“멍청한 것들! 너넨 특종거리 놓친 거 평생 후회하게 될 거다!”
다른 방송국에 제보해 볼까 싶었지만, 그냥 관뒀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니, 마이너스 레벨과 레전드리 직업에 대한 정보를 함부로 누설하기가 꺼림칙했던 탓이다.
“아직은 때가 아니야. 응?”
나는 TV 화면에 집중했다. TV 속에서 낯익은 인물을 본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도란……?”
정말로 도란이다.
현재 TV에는 전문가들이 토론을 벌이고 있는 화면을 상단에 작게 띄운 상태로, 무너진 야탄 신전의 전경을 큰 화면으로 담아 촬영해 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큰 화면 구석탱이에 도란이 보였다. 너무 작게 잡혀서 카메라맨은 그를 인식하지 못한 듯했지만, 도란의 실루엣이 익숙한 나는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다.
나는 TV 바로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고서 도란을 가만히 주시했다.
그는 무너진 신전에서 상처투성이의 모습으로 간신히 기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품에는 넝마가 된 여인이 안겨 있었다.
여인의 정체는 도란이 그토록 구하고자 했던 백작 영애 같았다.
신전이 파괴됨으로써 신도들 사이에선 큰 혼란이 발생했고, 덕분에 상대적으로 관심을 덜 받게 된 그녀는 어떻게든 도란에게 구출이 된 것 같다.
곧 도란의 품에서 빠져나온 여인이 일어나서 도란에게 뭐라고 소리친다. 아무래도 여인은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여인에게 도란은 조그마한 무엇인가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이내 맥없이 고꾸라지더니 회색빛으로 화해 버렸다.
눈물을 훔친 여인은, 도란으로부터 건네받은 무엇인가를 소중히 품은 채로 어디론가 떠나갔다.
“도란… 죽은 거냐…….”
NPC는 인간이 아니다. 시스템으로 만들어진 거짓 생명에 불과하다.
하지만 인연을 쌓은 NPC의 죽음을 보고도 기분이 편할 리는 없다. 그들에게도 분명 마음이 있었고, 체온이 있었음을 나는 기억하니까.
“그리고 반지도…….”
나는 도란이 끼고 있던 진귀한 반지의 효과를 떠올리면서 치를 떨었다.
“NPC가 죽으면 장착 중인 장비도 다 같이 증발해 버리는데……. 그 반지, 네가 어차피 죽을 줄 알았다면 달라고 한번 부탁이라도 해 볼 걸 그랬다, 도란.”
나는 비 내리고 있는 창밖을 잠시 동안 바라보았다. 기분이 영 별로다. 하지만 배는 고프다.
찬밥으로 허기진 배를 달랜 나는, 다시금 인터넷에 접속해서 대장장이에 대해 최대한 많은 정보를 수집하고 지식으로 축적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오후 3시 55분이 되었다.
12시간 접속 불가능 페널티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나는 Satisfy에 접속했다.
“로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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