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2화 (1,548/1,794)

제1장

원치 않았던 전직

자그마치 세 달간의 여정 끝에 발견한 ‘북쪽 끝의 동굴’에 입장한 나는 온갖 무구가 산처럼 쌓여 있는 압도적인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우와, 쩌네!”

찬란한 무구들의 이름은 기본이 녹색부터였다. 노란색과 보라색 이름도 심심찮게 보였다. 이 중 몇 가지만 챙겨 가도 갑부가 될 수 있을 터!

득달같이 달려든 나는 무구들을 닥치는 대로 쓸어 담으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가질 수 없는 물품입니다.]

“하여튼 더럽게 쪼잔해요.”

눈앞에 분명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획득할 수 없는 아이템들!

가방에 집어넣고, 넣고, 다시 또 넣어 봐도 제자리로 돌아가 버리는 것이 마치 신기루 같다.

이런 상황을 두고 그림의 떡, 혹은 남의 마누라라고 하는 거구나.

아니, 남의 마누라는 그림의 떡과 개념이 다르지.

결국 손가락만 빨면서 바라보고 있자니 강한 미련이 남았다.

‘하긴… 이것들을 유저가 챙길 수 있다면 Satisfy의 경제 밸런스가 무너질 수도 있겠지. 아쉽지만 납득해 주마.’

애초에 내가 이곳까지 찾아온 이유는 이 무구들 때문이 아니었다.

어차피 얻을 수 없는바, 마음을 달래고 관심을 돌린 나는 무구의 산을 기어올랐다. 그리고 번쩍이는 황금 탁자 위에 고고히 놓여 있는 한 권의 낡은 책과 대면했다.

“드디어…….”

여기까지 오면서 겪었던 온갖 고초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웃음이 나오는 것은 기본이요, 코끝이 찡해지면서 눈물까지 핑 돌았다.

내가 끈기 하난 끝내줘서 망정이지, 보통 사람 같았으면 더럽다고 게임을 접어 버렸을 만큼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했던 퀘스트다. 그만한 퀘스트의 클리어를 목전에 둔 내가 스스로 대견하게 느껴졌다.

“큭큭… 푸하하하핫!! 드디어 찾았다아아아!! 오우예에에엣!!”

중도 포기조차 불가능한 빌어먹을 S급 퀘스트!

우연히, 그것도 강제적으로 떠안게 된 이 엿 같은 솔로 퀘스트 탓에 벌써 몇 번의 렙따를 경험했던가? 몇 개의 아이템이 내구력 손상으로 파괴되었던가!

인간이면서 드워프의 기술을 초월한 대장장이, 파그마의 신기(神技)가 집대성되어 있다는 비서!

이거 찾아오라고 에트날 왕국의 5대 금역을 누비게 만든 썩을 아슈르 백작 놈의 능글능글한 면상이 떠올랐다.

“고 쉐끼, 이것만 가져다주면 태양의 검을 준다고 했겠다? 그것만 받으면 너 따위 놈 평생 상종도 안 할 거다, 개자식! 나를 이렇게 뺑이 치게 만들다니!”

밀물처럼 밀려오는 쾌감을 느끼면서 다짐한 나는 책을 집어 들었다.

[전설적 장인의 기서 획득!]

[미감정 상태입니다. 플라리안의 눈을 사용하여 감정하면 상세 정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플라리안의 눈을 사용하시겠습니까?]

“플라리안의 눈? 고작 퀘템 확인하는 데 최고급 감정 아이템이 필요하다고?”

플라리안의 눈은 현존하는 감정 아이템 중에서 가장 고가의 아이템이었다.

반년 전에 혹시나 득템할 때를 대비해서 딱 하나 미리 구입해 놨으나, 슬프게도 득템을 못한 탓에 쓸 일이 없어서 여태껏 인벤토리 한편에 고이 모셔 두고 있었다.

“고작 퀘템 감정하는 일에 쓰긴 아까운데…….”

감정을 보류한 나는 황금 탁자를 살펴보았다.

이 황금 덩어리를 어떻게든 챙겨 갈 방법이 없을까 강구했지만 꿈쩍도 않는다. 발로 차고, 두 손으로 힘껏 잡아당겨 보기도 하고, 이로 물어뜯어 보아도 부질없었다.

다른 무구들과 마찬가지로 플레이어가 소유할 수 없는 물품인 것이다.

“에효, 정말이지 퀘템 말고는 아무것도 건질 게 없네. 세 달 동안 쓴 물약 값이 얼만데.”

나는 손에 든 책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차피 아슈르에게 갖다 바쳐야 할 아이템인데 굳이 비싼 돈 들여 가며 감정해 볼 필요가 있을까?’

고민하던 나는 결국 플라리안의 눈을 꺼내 들었다.

세 달 동안이나 나를 고생시킨 근원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한 것은 당연한 이치였으니까.

“감정.”

<파그마의 기서>

등급:레전드리

인간의 경지를 초월한 대장장이 장인 파그마의 기술이 집대성되어 있는 서적입니다. 책을 펼치는 순간, 어떠한 범인일지라도 전설의 대장장이가 될 수 있습니다.

효과:파그마의 후예로 전직.

조건:없음.

*사용 시 레벨과 능력치가 변동됩니다.

[레전드리 아이템을 발견하였습니다!]

[대륙 전역에 명성이 500 상승합니다.]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헐… 대박…….”

과연 레전드리 아이템!

발견자라는 이유만으로 대륙 전역에 명성이 무려 500이나 오르다니!

일개 도시 안에서조차 명성 100 쌓기가 상당히 힘든 일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굉장한 수확이었다.

‘명성도 명성이지만…….’

나는 내가 잘못 본 건 아닌지 의심해 보면서 아이템 설명을 다시 한 번 읽어 보았다. 그러나 다시 읽어도 내용에 변화는 없었다.

“대~~ 박!!”

내가 헛것을 본 것이 아니었다.

극도로 흥분한 탓에 머리가 띵하고 두근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귀까지 들려왔다.

기서라기에 단지 스킬북인 줄 알았더니 전직서라니?

게다가 레전드리 등급의 전직서라니! 유일한 최강의 직업을 가질 수 있게 해 준다는 뜻이 아닌가!

“더군다나 사용 조건조차 없어…….”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대출 이자랑 Satisfy 계정비 벌겠답시고 학교도 휴학하고 인력소를 전전해 온 지난 1년을 회상해 보았다.

친구들이 하나둘씩 떠나고, 동창들은 비웃고, 주변인들에게는 괄시를 당하고,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한심하고, 노가다 뛰다 보니 몸은 상하고…….

당초 계획은 게임하면서 얻게 되는 아이템들을 현금으로 팔아서 대출비와 계정비, 그리고 학비까지 전부 충당하는 것이었지만, 이 Satisfy가 그리 만만한 세계가 아니었다.

돈 벌기가 워낙 힘들어서 아이템을 팔아 치울 여유는커녕 내 장비 맞추기도 어려운 실정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전율이 일면서 전신이 부들부들 떨렸다.

“끝났어……. 이 악몽 같은 인생과도 이제 작별이다!”

조건 없는 레전드리 전직서!

아이템 거래 사이트에 경매 물품으로 등록하는 순간, 그 거래 가격이 순식간에 수천만 원을 호가할 것이 분명했다.

아니, 20억 명이 넘는 유저 중에서 유일한 최강의 직업을 갖게 해 주는 아이템인데 ‘고작’ 수천만 원밖에 안 할까? 최소 수억 원이 넘는 가치라고 확신할 수 있다. 어쩌면, 나 같은 놈은 상상조차 못 할 천문학적 금액을 손아귀에 쥘 수도!

“푸하하하하핫!! 어머니! 아버지! 밥만 축내던 아들놈이 드디어 해냈습니다! 이제는 게임 관두고 취직하라며 등짝 때리지 않으셔도 됩니다! 동네 창피하다고 아들놈 하나 없는 셈 치겠다는 술주정도 그만두셔도 됩니다! 세희야! 오빠가 드디어 해냈다! 이제 쪽팔린다고 길에서 마주칠 때마다 쌩까지 않아도 돼! 네 친구들이 집에 놀러 온다고 할 때마다 온갖 핑계 대면서 거절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리고 내 친구들아! 동창들아! 더 이상 나를 한심한 게임 폐인, 인생 쪽 난 놈이라고 무시하지 마라! 난 게임으로 성공했다! 고작 해 봐야 사회 초년생인 너희들보다 내가 몇 걸음이나 앞선 거라고! 푸하하하핫!!”

캡슐 구입비를 마련하느라 대출받았던 1천만 원과, 대출금 제때 못 갚은 바람에 매달 수십만 원씩 불어나는 이자와도 이제 안녕일지니!

‘아영이는 여전히 예쁘려나…….’

나는 2년째 참석하지 않았던 고등학교 동창회에 외제차를 끌고 등장하는 상상을 해 보았다.

성공한 나를 더 이상 무시하지 못하는 동창들. 그리고 내 첫사랑 아영이의 얼굴에 홍조가 그려지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좋아, 어서 갖다 팔자!!”

퀘스트? 이제 그딴 건 내 알 바 아니다.

분명, 태양의 검은 에픽 아이템 중에서도 상급에 속하는 무기였다. 하지만 이 전직서에 비할 가치가 못 됐다.

아슈르 백작과의 호감도가 하락할 테지만, 말 시키면 무시하고 줘야 할 퀘스트 안 주는 정도의 반동만이 생길 터. 수억 원의 현금이 걸린 마당에 두려워할 이유가 하등 없었다.

“로그아웃!”

나는 당당하게 외쳤다.

그리고 눈앞으로 알림창이 떠올랐다.

[이곳에서는 게임을 종료할 수 없습니다.]

[아슈르 백작이 출현합니다.]

“……?”

이해하지 못하고 멀뚱멀뚱 있자니 수십 명의 기사들이 동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뒤따라 낯익은 아슈르 백작이 등장했다.

당황하는 나를 발견한 그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

“어리석은 여행자여, 같잖은 욕심을 품었구나.”

[퀘스트 <아슈르 백작의 은밀한 부탁>(S)이 <아슈르 백작의 분노>(SS)로 변경됩니다.]

<아슈르 백작의 분노>

난이도:SS

적당한 능력이 있고 멍청해서 이용하기 쉬워 보이는 당신을 골라, ‘실존하는지 확실치도 않은’ 파그마의 기서를 찾아오라는 얼토당토않은 의뢰를 맡겼던 아슈르 백작.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당신에게 감시자를 붙였던 그는 당신이 ‘북쪽 끝의 동굴’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직접 이곳까지 행차했다.

욕심에 눈이 멀어 파그마의 기서를 빼돌리려 한 당신을 목격한 그는 당신을 용서할 생각이 없다. 당신을 살해하고 파그마의 기서를 빼앗아 갈 작정이다.

*아슈르 백작과의 호감도가 -100으로 하락했습니다.

*신의를 저버린 행동 탓에 파트리안에서 쌓아 온 모든 명성이 사라지고 악명이 높아졌습니다. 파트리안의 모든 주민들과의 호감도가 -40으로 하락했습니다. 그들은 당신을 보면 도둑놈이라고 야유할 것입니다.

퀘스트 클리어 조건:아슈르 백작과 호위 기사들의 전멸.

클리어 보상:칭호 ‘귀족 살해자’ 획득.

*귀족 살해자:지력 -50

귀족 살해자는 모든 나라의 귀족들에게 멸시와 억압을 당합니다. 구직에 제한을 받습니다. 일부 왕족과 평민들에게는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퀘스트 실패 시:레벨 -2.

파트리안에 입장할 수 없게 됩니다.

파트리안의 병사에게 발각될 시 살해당합니다.

내가 캐릭터를 처음 생성하고 시작의 도시로 삼은 곳이 바로 파트리안이었다.

나는 레벨 1부터 지금까지 파트리안의 무수한 퀘스트를 해결해 오면서 상당히 높은 명성을 쌓아 왔고, 덕분에 주민들과의 호감도가 최대치에 가까웠다.

파트리안의 모든 상인들이 내게 물건값을 20프로 할인해 주었으며, 내가 파는 물품은 시세보다 15프로 비싼 가격으로 매입해 주었다.

내가 귀띔하면 숨겨진 퀘스트를 슬쩍슬쩍 건네주는 주민들도 있었다.

그런데 그 모든 메리트가 지금 이 순간 발생한 연계 퀘스트 탓에 자동으로 날아간 것이다.

“…아, 나. 이런 씨팔.”

절로 욕이 나왔다.

“아슈르 백작님… 아니, 야 이 싸가지 없는 새끼야!! 있는지 없는지 확실치도 않은 물건을 찾아오라는 퀘스트를 강제로 떠넘긴 빌어먹을 새끼야!! 만약에 파그마의 기서가 실존하지 않는 물건이었다면 난 영문도 모르고 몇 달 동안 헛고생만 해야 했던 거잖아!! 애초에 사람을 속인 놈은 너면서 파트리안에 내 악명을 퍼뜨려? 이 더러운 새끼!!”

지들 주인에게 욕하자 발끈한 기사들이 당장에 검을 뽑아 들었다.

덤벼들려는 그들을 제지한 아슈르 백작이 씩씩거리고 있는 내게 서늘하게 말했다.

“너는 내게 속았다는 사실을 몰랐던 시점에서부터 이미 배신을 결정했다. 그럼에도 떳떳하게 지껄이다니, 염치없는 녀석이로구나.”

“예상보다 험했던 여정의 고생에 대한 합당한 보상을 얻고 싶어서 잠시 스쳤던 욕심일 뿐이야! 배신을 확실하게 결정했던 건 아니라고!”

뜨끔해진 내가 살짝 포장해서 말하자 그가 비웃었다.

“보답은 내가 해 주기로 이미 약속되었을 텐데? 계약을 체결하고도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 신의를 저버렸으니, 네놈은 나를 욕할 자격이 없다.”

말로써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내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자 기세가 더욱 오른 그가 계속 지껄였다.

“너는 참으로 모자란 놈이다. 상종하면 할수록 여실히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의외의 능력을 발휘할 때가 있단 말이지. 역사에서 사라진 이 북쪽 끝의 동굴을 기어이 찾아내다니, 솔직히 기대치 못했었다. 그 무식할 정도의 끈기만큼은 치하하여 최소한 고통 없이 죽여 주도록 하마.”

‘얄미운 새끼!’

나는 당장 아슈르 놈의 주둥이에다가 검을 꽂아 넣고 싶었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다.

놈의 레벨은 무려 300으로 3차 전직까지 마친 대마법사였다. 그리고 놈을 호위하고 있는 기사들의 레벨도 기본이 180이었다.

반면 고작 73레벨에 불과한 나로서는 저기서 빵셔틀 노릇을 하고 있는 막내 기사와 일대일로 싸워도 승산이 없다.

그런데 퀘스트 클리어 조건을 보라.

저들을 전멸시키란다.

게다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퀘스트를 클리어한다손 쳐도 얻게 되는 보상은 가히 쓰레기라고 표현해도 좋지 않은가?

‘지력 마이너스 50? 우라질, 지금 내 지력이 30인데 마이너스 50이면 백치가 된다는 거야, 뭐야? 그리고 모든 나라의 귀족들이 날 싫어하게 된다고? 그럼 내 출셋길은 대체 어떻게 되는 거냐고!! 뭐 이딴 거지같은 퀘스트가 다 있어, 진짜! 아오오!!’

선택지는 하나뿐이다.

그냥 잡혀 죽는 것.

레벨을 2개나 떨어뜨리게 되겠지만, 어차피 성공할 수도 없고 성공한다고 해 봤자 이로울 게 하등 없는 퀘스트를 깨려고 안달해서야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후…….”

나는 모든 것을 체념했다.

저벅저벅 다가오는 기사들의 위압감이 장난 아니다.

‘이로써 이번 퀘스트 때문에 날리는 레벨이 여덟 개나 되는 건가……. 아슈르… 언젠가 내가 고렙이 되면 네놈에게 어떻게든 복수해 주고 말 거다. 반드시.’

아슈르를 노려보면서 무언으로 복수를 다짐한 나는, 기사들이 손에 쥐고 있는 위협적인 검을 보고 질끈 눈을 감았다. 그러다가 문득 손에 들고 있는 파그마의 기서를 떠올렸다.

‘가만, 이건 어떻게 되는 거지?’

인벤토리에 보관하고 죽을 경우 부활했을 때 그대로 인벤토리에 남아 있을까?

일반적인 퀘스트 아이템의 경우라면 그렇겠지만, 상황을 보아 단언할 수가 없다.

애초에 아슈르의 목적이 무엇이던가?

바로 이 파그마의 기서다.

놈이 나를 죽이려는 이유가 바로 이걸 빼앗아 가기 위해서다.

스토리가 매끄럽게 진행되기 위해서는, 놈이 나를 죽일 경우 파그마의 기서가 내 인벤토리에서 사라지고 놈의 손아귀에 넘어갈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제기랄!”

가져다 팔기는커녕 이대로 잃게 될 수도 있는 파그마의 기서!

새로운 선택지가 떠올랐다.

파그마의 기서를 내가 사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망설여졌다. 나는 제작 관련 직업을 혐오했기 때문이다.

게임이라면 응당 치고받으며 스릴 넘치는 전투를 즐기는 것이 묘미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대장장이로 전직하게 되면 뜨거운 화로 앞에서 땀 뻘뻘 흘리며 망치질이나 해야 할 것이다. 필요한 재료를 모으기 위해 광산을 찾아 헤매면서 곡괭이질을 해야 할 수도 있었다.

그건 그야말로…

‘노. 가. 다.’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현실에서도 공사장에서 벽돌 나르고 삽질하는 인생이건만, 심지어 게임 속에서도 노가다라니!

상상만 해도 끔찍해서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크윽…….”

나는 이대로 전사로서 남고 싶었다. 검을 호쾌하게 휘두르면서 적들을 베어 넘겨 성장하고, 언젠가 군대를 호령하는 장군이 되어 폼도 잡고 봉급도 많이 받는 게 내 꿈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꿈을 포기할 때가 왔다.

현금 수억 원의 가치를 지닌 아이템을 NPC 따위에게 빼앗길쏘냐! 그것도 저 재수 없는 아슈르 놈에게!

“뺏기느니 이게 낫지!”

눈물을 머금은 나는 결국 파그마의 기서를 펼쳤다.

그 모습을 보고 기겁한 아슈르가 다급히 손을 뻗으며 마법 주문을 외웠고, 여유를 잃은 기사들은 전력으로 무구의 산을 뛰어넘어 접근해 왔다.

“하지만 늦었어, 이 새끼들아.”

나는 파그마의 기서의 효과가 적용되자 한 번에 떠오르는 알림창 목록을 확인하면서 놈들을 비웃어 주다가 이내 입을 다물고 말았다.

[파그마의 후예로 전직합니다.]

[레벨이 하락합니다.]

[레벨이 1이 되었습니다.]

[모든 능력치와 스킬이 초기화되었습니다.]

“……?”

나는 눈을 의심했다.

무릇 전직이란 기존의 레벨과 스탯, 스킬을 그대로 간직하거나 강화시키면서 더욱 상위의 직업으로 발전해 강해지는 걸 뜻하지 않던가?

그런데 내 레벨과 스탯, 스킬은 유지는커녕 완전히 초기화되어 버리고 말았으니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이게 뭐야?”

영문 모를 상황에 혼란스러워하고 있을 때 새로운 알림창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손재주 능력치가 개방됩니다.]

[대장장이 장인의 기술 스킬이 생성됩니다.]

[대장장인 장인의 기술 스킬을 마스터하였습니다.]

[대장장이 장인의 감정 스킬이 생성됩니다.]

[대장장이 장인의 감정 스킬을 마스터하였습니다.]

[대장장이 장인의 인내심 스킬이 생성됩니다.]

[대장장이 장인의 인내심 스킬을 마스터하였습니다.]

[대장장이 장인의 분해 스킬이 생성됩니다.]

[대장장이 장인의 분해 스킬을 마스터하였습니다.]

[대장장이 장인의 수리 스킬이 생성됩니다.]

[대장장이 장인의 수리 스킬을 마스터하였습니다.]

[대장장이 장인의 모든 스킬을 마스터하여 극의(極意), 전설적 대장장이의 스킬이 개방됩니다.]

[전설적 대장장이의 기술 스킬이 생성됩니다.]

[전설적 대장장이의 감별 스킬이 생성됩니다.]

[전설적 대장장이의 감정 스킬이 생성됩니다.]

[전설적 대장장이의 인내심 스킬이 생성됩니다.]

[전설적 대장장이의 수리 스킬이 생성됩니다.]

[전설적 대장장이의 분해 스킬이 생성됩니다.]

[전설적 대장장이의 숨결 스킬이 생성됩니다.]

[전설적 대장장이의 축복 스킬이 생성됩니다.]

[전설적 대장장이의 창조 스킬이 생성됩니다.]

[칭호, ‘전설이 된 자’를 획득하였습니다.]

[평정 능력치가 개방됩니다.]

[불굴 능력치가 개방됩니다.]

[위엄 능력치가 개방됩니다.]

[통찰력 능력치가 개방됩니다.]

손재주 같은 경우는 제작 관련 직업으로 전직한 유저들이 보유하고 있는 기본 스탯인지라 익숙했다.

하지만 평정, 불굴, 위엄, 통찰력이라는 스탯들은 당최 생소했다.

좋은 건가?

“좋기는 개뿔!”

나는 절망했다.

전사로서 익혀 왔던 15가지 패시브 스킬과 22가지 액티브 스킬이 모조리 사라지고 그 자리를 제작 스킬들이 메운 상황이다.

이로써 나는 전사로서의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전직의 효과로 인해서 완벽한 노가다꾼으로 탈바꿈해 버렸다.

더군다나 레벨은 무려 1.

지난 1년 동안 간신히 쌓아 온 레벨이 완전히 초기화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라니? 그 지긋지긋한 레벨 업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니!

“뭐 이딴 주옥같은 퀘스트가 다 있어! 염병 *[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

한글로 조합할 수 있는 오만 가지 육두문자를 지껄이고 있노라니, 목을 향해 꽂혀 오는 기사의 쾌속검이 시야에 언뜻 들어왔다.

[회심의 일격을 당했습니다!]

[사망하였습니다.]

레벨 1의 허접한 체력은 180레벨 기사의 일격 한 방에 0으로 떨어져 버렸고.

[퀘스트 실패!]

[파트리안에 입장할 수 없게 됩니다.]

[파트리안의 병사나 기사에게 발각될 시 살해당합니다.]

[레벨이 2 하락했습니다.]

[레벨이 -1이 되었습니다.]

[등록된 거주지가 없습니다. 가까운 신전에서 부활하시겠습니까?]

“……?”

레벨을 본 나는 어이를 상실하고 말았다.

“마이너스? 레벨이 마이너스라고??”

나는 전생의 어떤 잘못으로 인하여 게임의 신에게 저주받은 게 분명하다.

석 달 동안 죽어라 고생한 끝에 간신히 여기까지 도달했더니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이 처참한 결과는 무엇이란 말인가?

게임하기 싫다.

나는 부활 대신 로그아웃을 선택했다.

게임을 종료한 나는 당장 인터넷에 접속했다. 그리고 국내 Satisfy 관련 커뮤니티를 모조리 뒤져 가면서 마이너스 레벨에 관한 정보를 찾아보았다.

하지만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가 없었기에 질문 게시판에 직접 글을 작성했다.

<제목> 님들아 제가 레벨이 ?1이 됐는데요.

<내용> 제가 세 달 동안 무슨 퀘스트를 하다가 레전드리 전직서를 얻어서 어찌저찌 하다 보니까 전직했는데 연계 퀘스트가 이상하게 꼬여서 레벨이 -1이 됐거든요? 왜죠??? 혹시 이런 경우가 또 있나요?????????

확인 버튼을 눌러서 글 작성을 완료한 나는 그제야 캡슐에서 나왔다.

얼핏 본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불치병에 걸린 환자처럼 초췌했다. 세 달 동안 퀘스트에 매진하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고생한 여파였다.

그리고 얻은 거라곤 두 눈 뜨고 수억 원을 잃은 경험과 마이너스 레벨이다.

“내 세 달이 날아갔어……. 세 달 동안 삽질만 한 거라고. 하하하…….”

노가다 나가서 삽질하면 일당이라도 받지, 허공에 삽질해 버렸으니 얻은 게 아무것도 없다.

아니, 얻기는커녕 시간과 레벨만 날렸다.

기운을 잃은 나는 방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열 받고, 허무하고, 안타깝고, 슬프고, 원망스럽고.

온갖 마이너스 감정들이 엄습해 오면서 어마어마한 무력감을 선사했다.

내가 심지가 약한 사람이었다면 자살 충돌까지 느꼈으리라고 확신한다.

“…이 와중에도 똥은 마렵네.”

장시간 게임에 접속해 있던 터라 해결하지 못한 생리 현상의 신호를 전달받은 나는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새벽 3시.

다른 가족들이 모두 잠들어 있는 야심한 시각이다. 자칫 시끄럽게 굴어서 부모님이 깨어나시게 했다간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을 터.

포복으로 은밀하게 거실을 가로지른 나는 화장실에서 조용히 용변을 보고 세수한 뒤, 다시 부엌으로 이동,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냈다.

어둠 속에서 간신히 주걱을 찾아, 밥을 퍼서 방으로 돌아온 뒤에야 나는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었다.

“오, 소시지 볶음이다.”

얼마 만에 맛보는 육류 가공품이던가!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허기를 채워 나가니 기분이 다소 풀리면서 냉정한 사고가 가능하게 되었다.

“레벨이 어떻게 마이너스가 됐을까?”

생각해 보려던 나는, 우선 인터넷에 올린 질문 글을 확인해 보고자 캡슐에 앉았다.

“뭐지?”

그 잠깐 사이 내 게시 글의 조회 수가 무려 1만 회를 넘어가고 있었다.

달려 있는 댓글의 수는 무려 2천여 개!

“서, 설마!”

내가 정보를 찾아내지 못한 것일 뿐, 사실 마이너스 레벨이라는 것은 이미 유저들 사이에서 유명한 현상이며, 그것은 엄청난 혜택이기 때문에 흥분한 유저들이 축복해 주고 있는 상황이 아닐까?

나는 꿈같은 전개를 기대하면서 댓글들을 확인해 보았다.

iksl** 님의 답변:레벨 마이너스가 되면 밤에 귀신 나타나서 님 죽음.

eksk** 님의 답변:우와~~~~~ 난 -5렙인데^.^ 방가방가, 동지.

tutu** 님의 답변:지랄~ 레전드리 전직서가 어딨음?ㅋㅋ 구라를 까려면 적당하게 까라. 관심병이냐??

cm3s** 님의 답변:이분 정신병원에 끌려가셨답니다. 이 글 내려 주세요.

7r14** 님의 답변:레전드리 전직서… 마이너스 레벨이라…….요즘 ㄸㄹㅇ 진짜 많네…….

jk12** 님의 답변:-1이면 랭킹 꼴찌겠네ㅋㅋㅋㅋ 왜 삼? 겜 접으삼ㅋ

kkks** 님의 답변:아직 유니크 전직서도 등장하지 않은 마당에 무슨 헛소리를.

qkr8** 님의 답변:과음?

gjte** 님의 답변:우와, 마이너스 레벨이라니……. 당신의 상상력에 경의를 표합니다. 판타지 소설 작가 하셈. ㄷㄷ

“…….”

무려 2천 개가 넘는 댓글들의 내용이 대동소이했다. 기대했던 내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반응들을 보니까 마이너스 레벨에 대한 정보는 아예 밝혀진 게 없는 것 같은데… 설마 내가 최초인 건가?’

Satisfy의 모든 시스템은 유저들 스스로가 발견하고 발전하게끔 구성되어 있었다. 기존의 온라인 게임들처럼 고객센터에다가 문의하면 운영자가 친절히 답변해 주는 그런 일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때문에 Satisfy의 20억 유저들은 지난 1년간 스스로 정보를 개척하고 서로 교환하면서 Satisfy의 세계를 발전시켜 왔다.

하지만 워낙 광대한 세계인지라, 밝혀진 정보보다는 지금 내가 겪게 된 마이너스 레벨처럼 밝혀지지 않은 정보가 훨씬 더 많았다.

쏴아아아아.

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 일기예보에 따르면 오늘 온종일 내린단다. 이런 날엔 인력소에 나가 봤자 일거리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

마지막 남은 밥 한 수저를 싹싹 긁어 먹은 나는 다시금 게임에 접속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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