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한 게임 개발자가 너무 유능함 142화
89. 급변의 시작(1)
“소감이 어때?”
“정말 깜짝 놀랐어. 나도 예전에 방송, 광고 촬영 때문에 VR 기기 체험했던 있었는데 그때와 차원이 달랐어!”
“구체적으로 어떤 점에서?”
“일단 착용이 편하고 해상도가 굉장히 좋아. 가상의 세상에 이질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AR모드에서…… 그…… 남녀가 현실에 나타나서 내 눈앞에서 막…… 음, 그런 걸 했을 때는 진짜 한동안 멍했다니까?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어. 아마 테스트 샘플을 이 기기에 맞게 특수한 방식으로 재가공을 했을 거야.”
“그래? 아무튼 이걸로 성인물이든 영화든 애니메이션이든…… 콘텐츠를 즐기게 되면 앞으로 스마트폰이나 TV는 시시해지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다만…….”
“다만?”
“이것보다 조금 더 간편해졌으면 좋겠어. 구글이랑 애플에서는 안경 형태로 VR 기기를 제작한다고 하던데…… 물론 성능은 이게 훨씬 더 우세하겠지만 그 편의성이라는 부분, 절대 무시 못 하잖아.”
“그렇지.”
“안경 수준 정도까지는 더 개발되어야 대중화가 될 거야. 물론 지금 수준으로도 충분히 혁신적이고,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겠지만 더 간편해지면 좋잖아! 휴대성이 좋아지면 더 좋고.”
편의성, 휴대성.
태연도 중요하게 느끼던 부분이다.
“안 그래도 그 이야기를 했었어. 안경, 스카우터 형태로 필요할 때만 액정을 꺼내 쓰도록 하면 더 좋지 않겠냐고.”
“스카우터는 뭐야?”
“이런 건데…….”
드래곤볼 이미지를 보여줬다.
“음!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
반응이 굉장히 좋다.
이후로 성인물 말고 VR 전용 게임을 함께 즐기며 많은 대화를 나눴다.
‘확실히 고글 형태는 착용을 반복하다 보면 조금 번거롭게 느껴지는군. 일단 휴대성을 위주로 개편하는 게 좋겠어.’
* * *
VR 기기 개발 이상으로 중요한 건 게임 개발이었다.
태연은 그 자신이 게임 개발자고, 넥플이 게임을 만들어 서비스하는 회사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생각지도 못하게 엄청난 인재와 기술을 얻게 되며 들뜬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에 정신이 팔리면 게임도, 가상현실도 모두 놓치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내 가치는 유능한 게임 개발자라는 것에 있으니까.’
모든 기반이 그것이다.
앞으로 어떤 사업을 하더라도, 설령 그 사업이 어떻게 되든 게임 개발을 놓치지 않으면 기회는 계속 주어질 것이다.
근래에는 태연이 총괄 프로듀서이자 디렉터로서 진행하는 게임은 세 개였다.
판테온, 판데모니움. 그리고 소설 원작인 달의 나라.
‘정령사 키우기는 사실상 개인 프로젝트니 제외해야지.’
개발이야 꾸준히 진행되고 있지만 알고 보면 친목 모임에 더 가까웠다.
가끔 등산이나 소풍도 나가고, 여행도 다니고.
구성원 전부 부부, 커플이었고 성격도 서로가 잘 맞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근래에 윤아의 경우, 굳이 모임 없이도 서로 연락하거나 만나서 개별적인 시간을 갖기도 했다.
이외에 현재 회사에서 진행 중인 신규 프로젝트만 무려 10개에 달한다. 태연이 제작 중인 게임을 제외하고, 챌린지 리그의 신규 인디 게임 라인업을 포함한 개수였다.
원래는 이것보다 더 많았지만 퀄리티가 기대에 못 미치는 작품은 모두 잘라냈다.
이제 와서 개선한다고 더 나아질 것 같지 않은 게임.
시작 단계, 구조 설계에서부터 심각한 오류와 문제가 있었던 게임들.
사실 대표이사가 된 이후 가장 어려운 게 진행 중이던 프로젝트를 엎어 버리는 것이다.
이 통보를 할 때 보이는 반응은 대체로 대동소이했다.
처음에는 생각지도 못한 통보에 당황해서 넋이 나가 버리고, 나중에를 현실을 부정하며 화를 내다가 뒤늦게야 매달리며 사정한다.
자신들을 버리지 말라고, 다른 게임들에 그랬던 것처럼 자신들에게도 기회를 달라고.
태연도 마음 같아서는 기회를 주고 싶었지만 무능한 리더인 그들이 프로젝트를 쥐고 있는 이상 회생은 불가했다.
유능한 새 프로듀서가 전체를 뒤집어엎고, 그래픽 소스만 가지고 아예 처음부터 다시 시작을 해야 할 테데, 그럴 거라면 아예 다른 신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게 나았다.
그렇게 사라진 신규 프로젝트만 무려 다섯 개.
TF 단계에서 정식 팀으로의 출범을 준비하던 곳까지 합하면 더 많은 숫자의 팀이 사라졌다.
이 시점에서 선택이 또 갈린다.
남아서 다른 기회를 잡기 원하는 이들.
결국 끝까지 납득하지 못하고 다른 곳에서 해당 프로젝트로 새출발을 하겠다는 이들.
전자의 경우 충분히 납득할 수 있지만 후자는 상황이 달랐다.
아무리 망해서 폐기가 결정된 프로젝트라도, 일단은 회사의 자산이었기에 반출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소수의 디렉터들은 자신이 개발했으니, 모든 권한이 자신에게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그들에게 태연이 말했다.
“프로그램 구성과 기획은 그대로 사용해도 문제없어요. 시장에 비슷비슷한 게임이 한두 개도 아니고…… 하지만 아트 리소스는 회사 자산이니 그것은 아예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야 할 거예요.”
폐기된 프로젝트를 팔아넘기는 방법도 있었다. 일부, 외부 기관에서 투자를 확정받은 이들은 그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이 2, 3억 대의 금액을 제시했기에 거래는 끝까지 성립되지 않았다.
“여기에 투입된 비용이 얼마라고 생각하시나요?”
아트 비용만 산출해서 계산한다고 해도 그 이상의 거금이 나온다. 결정적으로 이 리소스를 다른 방식으로 재활용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기에 태연은 원망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리소스를 넘기지 않았다.
“제가 대표님을 잘못 봤군요! 우리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응원해 주실 거라고 믿었는데……!”
어마어마한 성공작을 보유한 것도 아니고.
프로젝트가 중간에 엎어져서 독립한 이들이 투자를 받았다고 얼마나 많이 받았을까?
설령 수십억 투자를 확정 지었다고 해도 그 돈이 모두 한 방에 들어오는 게 아니다. 세금 문제에 이런저런 비용을 산출하면 본 개발비에 쓸 수 있는 돈이 얼마 되지 않는다.
이런 설명을 하며 저렴한 가격에 리소스를 넘겨주기를 부탁까지 했는데도 요지부동이니…….
“저를 원망하는 거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런데 입장 바꿔서 생각해 보시죠. 3년 후, 제가 여러분이 만든 프로젝트의 모든 권한을 단돈 2, 3억에 넘겨받겠다고 하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들 것 같나요?”
“…….”
“여기서 몇 배가 되는 자원을 실컷 쏟아붓고, 나가서 절반도 안 되는 금액을 제시하며 인정에 호소한다. 참 좋은 방법이네요. 고가의 리소스 저렴하게 만들어 확보하는…….”
무자비한 말이었지만 팩트였기에 할 말을 잃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리소스 못 드립니다. 이건 넥플 재산이니까요. 제 것도 아니고 넥플.”
사실 이 부분이 가장 중요했다.
태연이 대표이사라고, 회사 재산을 마음대로 사용할 권한은 없었다. 넥플의 이름으로 제작된 모든 것은 오롯이 넥플의 것이다.
태연의 의지를 확인한 개발자들은 힘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사실 태연은 그들이 어디로부터 대략 어느 정도의 금액을 투자받았는지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다.
넥플이라는 회사가 업계에 끼치는 영향력이 워낙 막대했고, 태연은 그 대표이사였다. 가만히 있어도 온갖 업계 정보를 접할 수 있었다.
‘역삼동 빌딩 두 개 층을 임대해서 한껏 꾸며놨다고 하던데……. 대략 1년 정도면 개발비가 모두 소진되겠군.’
이제는 대충 보면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을지 감이 잡힌다. 그래서 더 안쓰러웠다.
‘시작부터 욕심이 너무 과해. 좋은 위치의 멋진 사무실, 과도하게 많은 인력 채용과 운용, 대규모의 프로젝트…….’
어쨌든 데리고 있던 사람들이니, 팁을 주고 싶어도 소용없었다. 투자받았고, 자신만의 회사를 갖게 되었다는 사실에 취해 무슨 말도 귀담아듣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까지 퇴사한 이들 대부분이 그랬다.
그리고 그 말로 또한 비슷했다.
그렇게 회사를 많이 차렸음에도, 성공한 팀이 단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넥플에서 성공작을 런칭한 피디들도 그랬다.
‘창업이 그렇게 힘든 일이란 말이지.’
그런 걸 보면 자신 역시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 * *
뉴 월드 컴퍼니.
가상현실 기술과 기기를 개발하는 회사로 태연과 안경원이 공동으로 설립했다.
이 회사에서 관련 기술, 기기에 대한 모든 권한을 갖는다.
그리고 넥플, 머큐리 게임즈, 서성, TSMC 등. 다양한 회사와 협력 관계를 맺어 제품과 콘텐츠를 생산, 시장에 공급할 예정이었다.
‘회사까지 설립하고 뛰어든 이상, 이 분야에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해야 할 공부가 많았지만 개의치 않는다.
태연의 자신의 열정과 노력, 그리고 신비한 팔찌의 힘을 신뢰했다.
‘이 세 가지만 있다면, 마음먹어 못 할 것이 없지.’
판테온, 판데모니움, 배틀시티2, 달의 나라.
넥플에서 거액을 들여 준비 중인 네 가지 AAA급 게임들은 VR 모드가 지원될 예정이다.
이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크게 흥행하고 있는 엘크로스 Re. 그리고 몬스터 이터 또한 VR 모드 지원을 위해 개발을 준비 중이었다.
딱히 태연이 지시하지 않아도 자연스러운 흐름에 의해 진행되는 중이었다.
용산 신사옥에 마련된 체험존이 기폭제 역할을 했다.
안경원이 개발 중인 차세대 VR 기기의 성능을 체감한 이들이 미친 듯이 요청을 쏟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VR 모드 지원해 주세요! 그리고 VR 기기 꼭 사고 싶은데…… 양산은 언제부터인가요?
-넥플 게임에 VR 모드 꼭 지원해 주세요. 어지럽고 번거로워서 싫어했는데, 저런 기계라면 아예 가방에 넣어가지고 다닐 것 같음.
-저 기기 체험해 보니까 스마트폰과 PC, 콘솔 일반 모드가 싱겁게 느껴지더라. 꼭 지원해 줬으면…….
소문이 퍼질수록 더 많은 인파가 체험존으로 몰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안경원은 그동안 몇 번의 기기 업그레이드를 진행했다.
“제 생각에는 아예 프로와 일반으로 등급을 분류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프로는 초 고해상도, 최고 성능의 사운드 시스템을 지원하는 고글 형태. 일반은 그보다 조금 스팩은 달리지만 휴대성이 장점인 안경 형태!”
“샘플은 언제까지 볼 수 있을까?”
“이미 완성 단계예요.”
“벌써?!”
“완제품은 아니에요. 전력 효율, OS 개발, 디테일, 시스템 최적화…… 아직 손봐야 할 게 많잖아요.”
“그건 그렇지.”
“극히 한정된 체험을 제공하는 테스트 샘플이라면 아무 문제 없어요. 아, 그래도 혼자 다 하는 건 좀 버거우니까 사람 좀 필요할 것 같은데, 괜찮은 사람으로.”
“곧 인력 채용 시작하면 사람이 구름처럼 몰려들 거야. 참여하고 싶은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니 세계적인 인재들도 얼마든지 채용 가능하겠지.”
“음, 다 좋은데…… 우리 회사가 그렇게 돈이 많아요?”
“내가 번 돈 다 쏟아부어야지.”
“그…… 형수님이 뭐라고 안 하실까?”
“내가 아무리 돈 많이 벌어봐야 윤아 수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사실 윤아는 일 그만두고 본인 옆에 있어주기를 원하는데…… 아무리 그녀를 사랑해도 그러기는 좀 힘들지.”
“하긴, 체조 여신님이라면 어지간한 톱스타들보다도 수익이 엄청날 테니…… 그러면 안심이네요. 우리 회사가 거덜 날 일은 없을 것 같으니까요.”
“그런 쓸데없는 걱정은 할 필요 없어. 넌 개발에만 집중해. 서두를 필요도 없어. 건강이 우선이라는 걸 기억해 둬.”
사실, 말과 달리 자금 압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믿는 구석이 있었다.
‘내가 디렉팅하는 게임들이 모두 성공하지는 못하겠지만…… 하나만 잘된다고 해도 충분한 인센티브를 받을 수 있지.’
지금도 엘크로스 Re, 디즈니 판타스틱 월드 등.
개발 및 리메이크를 주도한 게임들로부터 상당한 수준의 인센티브가 들어오는 중이다. 사실 대표이사, CTO의 월급 수준으로는 회사 운용이 어렵다.
하지만 사람이 들어오고 회사 규모가 커질수록 이에 필요한 자금 규모 역시 대폭 증가할 것이다.
제품 양산에 성공하고 판매 성적이 좋을 때까지는 계속해서 돈을 퍼부어야 한다.
이를 감당할 방법은 기존 게임 수익을 늘리고, 신규 런칭 게임을 성공시켜 인센티브 축적량을 증가시키는 것뿐이었다.
‘외부 기관 투자와 엑시트는 최후의 선택이지.’
가능하면 하고 싶지 않았다.
태연과 안경원은 ‘미러 컴퍼니’의 자유로운 운영을 위해 투자도, 기업 공개도 하지 않기로 합의를 마친 상황이었다.
언젠가는 하게 되겠지만 그것은 아마 먼 미래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