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한 게임 개발자가 너무 유능함 137화
84. 메타버스(3)
태연의 구상은 간단했다.
전 세대가 PC와 스마트폰으로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소통의 공간.
“그 소통의 공간 기본은 에버월드 하우징 시스템이 될 겁니다.”
런칭일부터 지금까지 최소 15년 이상.
그 기간 동안 쌓이고, 수정되어온 콘텐츠를 새로운 플랫폼에 맞게 변경하여 하나씩 적용한다.
“목표는 소소한 즐거움과 소통의 재미를 줄 수 있는 세상의 창조입니다. 원대한 목표 같은 것은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게임과 SNS를 합치는…… 그냥 흔한 아이디어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로블록스 같은 메타버스 게임 플랫폼을 만들자는 거창한 계획도 아니다. 이제 와서 뛰어들기에는 로블록스의 체급이 지나치게 거대해졌고 따라잡는 것도 불가능하다.
“서버, 개발자, 유저. 이 세 개체에 큰 부담을 주지 않고 서로가 편하고 즐거운 그런 세계.”
게임의 형태를 빌린 SNS에 가까운 세계.
“여기서 말하는 소소한 재미란 무엇인가.
태연은 김상희 피디를 보며 빙긋 웃었다.
“그건 이제부터 개발팀이 고민하며 해결할 큰 과제 중 하나가 되겠죠. 그런데 이런 건 또 김상희 피디님과 에버월드 개발팀이 가장 잘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마, 맞아요!”
에버월드.
워낙 옛날에 만들어진 게임이라 현재 관점에서 보기에는 부족한 점이 굉장히 많다. 가장 큰 줄기가 되는 부분의 게임성도 약하고. 하지만 곁가지로 볼 수 있는 소소한 콘텐츠, 특히 이벤트 개발에 대한 부분은 누구나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15년이 넘는 세월 동안 어쨌든 수익을 내며 팀이 유지될 수 있었던 비결이 바로 그것이었다.
“저는 김상희 피디님과 에버월드 개발팀의 재능이 어쩌면 이런 분야에서 발휘될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아……!”
김상희 피디의 커다란 눈동자가 촉촉이 젖어 들었다.
당장에라도 왈칵, 눈물을 쏟아낼 것처럼 보였다.
“게임의 형태를 빌린 소통의 공간…… 제가 뭘 해야 할지 알 것 같아요! 시켜주시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당분간은 저하고 함께 호흡을 맞춰 봅시다. 제가 시범 삼아 만든 것도 있고, 적용시켜 보고 싶은 것들도 있거든요.”
“네!”
그리고 최종학을 보며 묻는다.
“뭘 해야 할지 알겠지?”
“와…… 굉장히 어려운 걸 쉽게 쉽게 부려먹으려고 하네.”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니야. 설계 정도만 도와주면 돼. 어차피 넌 마스 게임즈 문제로 미국에 건너가야 하잖아.”
태연은 싱긋 웃었다.
“내 아이디어고, 수익에 대한 큰 기대감을 갖지 않고 진행하려는 프로젝트라 내가 계속 케어할 거야.”
“그런 거라면 뭐…….”
최종학의 얼굴이 펴졌다.
태연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최대한 기존 리소스를 이용할 거고 부담 없이 진행하려는 프로젝트라 회사에 큰 부담을 지게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빠져나가는 부분은 뭐…… 다른 게임의 매출을 높여서 때우면 되고요.”
태연은 손뼉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 여기까지. 김상희 피디님, 유명아 본부장님, 그리고 종학이와 명훈 CP는 따로 저 좀 봅시다. 커피나 한 잔 하며 이야기하죠.”
* * *
사옥에서 떨어진 조용한 커피샵.
자리에 앉자마자 최종학이 물었다.
“그거 이민기 부학장 제안 듣고 떠올린 아이디어지?”
“그렇지. 그 사람은 능력이나 주위 여건에 비해 바라는 게 너무 많았어. 게임 개발조차 해본 적 없는 위인이 뜬금없이 메타버스 게임 플랫폼 개발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그런 프로젝트는 겨우 1, 2백억 조달해서 진행할 수 있는 것도 아니야. 많은 돈과 많은 시간, 인력 등이 필요한데…… 부학장 기획안은 너무 허술하더라고.”
“말도 안 되는 계획이었지 뭐.”
다들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 이야기 들으면서 했던 생각이 오늘 말해준 거야. 그런데 굳이 그걸 내가 그 사람에게 정정해 줄 이유가 없잖아. 나랑 아무 관계도 아니고 박팀도 그 사람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였으니까.”
“아무튼 소통의 공간이라…… 내 생각에 나쁜 아이디어는 아니야. 게임과 SNS의 결합이라니. 가만있자, 그러면 메신저 기능도 있어야 하고 SNS도 필요하겠네? 그건 어떻게 하려고? 그것도 개발할 거야? 폼이 너무 큰데…….”
“굳이 처음부터 새로 시작할 필요는 없지.”
“……?”
어리둥절해하는 사람들.
태연은 미소로 설명했다.
“접혔거나 말미에 폐기된 프로젝트들을 위주로 살펴보니 온갖 것들이 있더라고. 넥플 게임 전용 메신저, 게임 SNS…….”
“아……!”
“폐기된 프로젝트를 되살려서 재활용하려고. 어쨌든 그것도 넥플의 자산이잖아. 마침 당시 책임 개발자들이 아직도 넥플에 남아서 근무 중이기도 하고.”
“그래? 그거 굉장하네! 잘됐다. 그러면 일이 훨씬 편해지지!”
“맞아. 제로에서 쌓아 올리는 것보다 틀이 다 잡혀 있는 것을 조금 수정해서 다시 쌓아 올리는 쪽이 일은 훨씬 편하지. 그리고 당시 최고 개발자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야 뭐…….”
최종학과 박명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연은 빨대를 문 채 큰 눈동자만 또록또록 굴리고 있던 김상희 피디에게 말했다.
“이번 프로젝트는 세 팀이 맞물리게 될 거에요. SNS 팀. 메신저 팀. 그리고 에버 월드. 이 세 개가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갈 필요가 있거든요.”
“제가 생각해도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아요!”
“사실 부담 없이 만들기에는 폼이 좀 크죠. 그래서 총괄 프로듀서 역할은 제가 할 겁니다. 김상희 피디님은 뉴 에버월드 디렉터로 해당 개발 스튜디오를 책임지시는 거죠.”
“뉴 에버월드…….”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뚝뚝 눈물을 흘린다.
“어? 갑자기 왜 울어요!”
“아니, 방금 전까지 싱글벙글 웃던 사람이 참…….”
태연을 포함한 모두가 당황하며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유명아 본부장은 말없이 손을 잡아줄 뿐이었다.
김상희 피디는 한참을 울고 나서야 감정이 가라앉은 얼굴로 말했다.
“에버월드를 이렇게 되살릴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하니 너무 감동스러워서…….”
눈물 탓일까?
태연을 향한 눈동자가 굉장히 반짝거리고 있었다.
“역시 대표님은 굉장하세요! 이런 대단한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진행할 생각을 하시다니……!”
멋쩍었던 태연이 괜히 최종학에게 말을 걸었다.
“아무튼 네 역할이 중요해. 박팀도 합류하는 대로 붙여줄 생각이니 둘이 한 번 세 플랫폼이 맞물려 안정적으로 구동할 수 있도록 기반 시스템 설계를 좀 잘 해봐.”
“괜히 민망하니까…… 아무튼 알았어. 나 혼자라면 조금 버거울 수도 있겠지만 기존 소스 재활용에 박팀과 형까지 합류하는 일이라면 못 할 것도 없지.”
“김상희 피디님도 합류하셔야 합니다.”
슥슥 눈물을 닦으며 다부지게 대답한다.
“물론이죠! 제가 에버월드 디렉터인데 모르는 게 하나라도 있으면 안 되죠!”
“프로그램 할 줄 아시죠?”
“저도 소싯적에 마인 크래프트, 로블록스 같은 거 많이 했어요. 직접 개발도 해봤고 콘텐츠 만들어 공유하기도 했고요. 아, 쯔꾸르도 진짜 많이 했었는데…… 제가 그거 하다가 일본어 마스터하고 그랬어요!”
“캬, 쯔꾸르! 옛날 생각나네! 나도 그거 많이 했었는데…….”
“재미있었지!”
갑자기 라떼는으로 이야기 화제가 변경됐다. 태연도 적절히 어울리다가 시간을 확인하고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데이터 폴더 접속 아이디하고 비번 알려줄게요. 거기에 에버월드 관련 제가 작업하고 모아놓은 데이터가 가득 있으니 확인해 보세요.
* * *
자리로 돌아온 김상희는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이건 절대 놓쳐서는 안 될 기회야!’
인생을 던질 가치가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사랑하는 에버월드를 엄청난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플랫폼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였다.
‘당장 팀원들을 부르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고, 우선은 테이크포스에 집중하는 게 맞지.’
아직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사실은 당장에라도 팀원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공유하고 싶었다. 다시 모여서 에버월드를 새롭게 진화시켜 보자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언제 어떤 이유로 엎어질지도 모르고, 당장 팀원들이 모인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빠르게 판단을 내린 김상희는 태연이 공유해 준 데이터 폴더에 접속했다.
오늘 회의실에서 확인한 에버월드 카툰 렌더링 버전 그래픽 리소소들을 포함, 각종 기획서와 시안, 데이터, 스크립트 등등…….
이 외에도 태연이 재활용할 예정이라는 과거 넥플의 게임 SNS, 메신저 프로젝트 폴더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나씩 살펴볼수록 김상희는 엄청난 전율을 느꼈다.
‘이 방대한 계획을 그 짧은 시간에 혼자서……?’
심지어 개발을 준비 중인 피디도 아니고, 태연은 이미 수많은 프로젝트를 관리하며 국내 10대 대기업의 일원인 ‘넥플’의 대표이사가 아닌가?
‘그리고 수조 원이 투입된다는 과천 테마파크 프로젝트의 기술 총괄이시잖아?’
마스 게임즈로, 해외 서비스와 게임 아카데미를 준비 중이기도 하다.
‘나 같은 사람은 하나도 제대로 감당 못 하고 주저앉을 프로젝트들인데…….’
그 엄청난 것을 동시에 진행하면서도 이 정도 폼의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는 게 믿겨지지 않았다.
‘사람이 아닌데?’
볼수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대표님 외계인이 아닐까?’
그냥 분량만 많은 게 아니라, 내용이 기가 막히다.
‘우리 대표님…… 내가 평생 믿고 따라가야 할 사람이야!’
이 순간, 김상희는 결심했다.
‘내가 목숨을 걸어서라도 이 프로젝트 성공시킨다.’
* * *
박경연이 학교를 그만둔다는 소식이 빠르게 퍼져 나갔다.
학생들이 몰려와 서운한 얼굴로 항의했다.
“아니, 이렇게 갑자기 우리를 내팽개치고 어디로 가시겠다는 거죠?!”
“갑자기 학교를 그만두신다니…… 섭섭해요!”
‘어쩌다가 소문이 퍼진 거지?’
몰려든 학생들에게 박경연은 어색한 미소로 말했다.
“4학년 졸업반 작품은 다 도와주고 떠날 거니 걱정할 필요 없다.”
그 말에 4학년은 내심 안도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 밑의 학년은 달랐다.
자산들은 박경연 교수의 강력한 서포트를 받지 못하게 된다는 뜻이니까.
‘내가 다 챙겨줄 수 있는 건 아니지.’
사실 이 정도만 해도 큰 결심이었다.
넥플에서는 당장에라도 합류해서 우선 ‘뉴 에버월드 테이크포스’에 참여하기를 원했으니까.
마음 같아서야 그러고 싶지만 지금 가르치는 제자들이 걸렸다.
그래서 한 달 말미를 요청했다.
그 정도면 모두들 게임을 마무리하고 출시할 수 있는 기간이었으니까.
그리고 겸사겸사 라이징 스튜디오를 포함한 모두에게 운영 노하우를 최대한 전수할 생각이었다.
거기까지가 한국 대학교 게임 교육원 교수 생활의 마무리였다.
저녁에는 교육원장과 식사를 했다.
그는 넉넉한 풍채와 너그러운 미소를 지닌…… 겉모습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좋은 사람이었다.
“참 아쉬워요. 내심 박 교수를 우리 교육원의 미래를 이끌어갈 동량으로 여겼거든요. 그래도 박 교수에게 다시 좋은 기회가 왔다니 좋은 일이에요.”
좋은 사람이었다.
자신에게 죽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기회를 준 은인이었다. 교수 생활 동안 나서서 이것저것 챙겨주기도 했고 정신적인 위안을 심어줬다.
머뭇거리던 박경연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이민기 부학장 말입니다.”
근래에 있었던 일들을 말했다.
“넥플에는 거절당했지만 제가 보기에 이미 다른 회사로부터 어느 정도 투자를 약속받은 듯 보였습니다. 조만간 자신을 따르는 교수들을 이끌고 퇴사할지도 모릅니다.”
갑자기 공백이 생겨 버리면 교육원 입장에서는 꽤나 힘들어질 수 있는 일이다.
이에 대한 경고를 미리 해주려는 것이다.
“메타버스 게임 플랫폼이라…….”
학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사람은 예전부터 그랬어요. 능력에 비해 지나치게 원대한 꿈을 품고 있었죠. 그뿐이라면 말을 안 하겠는데, 사람이 보기보다 허술하고 서투른 면도 강해서…….”
박경연은 적극 공감했다.
실제 태연을 비롯한 최종학, 박명훈도 똑같은 지적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가져온 기획안과 진행한 프레젠테이션은 진짜 전문가들이 보기에는 허술하기 짝이 없는 몽상에 불과했다.
‘문제는 그 진짜 전문가들이 의외로 그렇게 많지 않다는 거지.’
게임 개발에 도가 텄고 성공 경험까지 넘쳐나는 안목 높은 프로듀서들이 얼마나 되겠나?
“아무튼 좋은 소식 알려줘서 고마워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가 갑자기 뒤통수를 맞을 뻔했군요. 물론 그 정도로 크게 휘청이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당장 곤란해지는 건 사실이죠.”
“학장님 인망이라면 충분히 대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 *
한 달이 지났다.
그동안 4학년 학생들이 모두 게임 출시에 성공했고 소정의 성과를 거뒀다. 시장에서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교육원과 학생들 입장에서는 굉장히 유의미한 일대 사건이었다.
‘이걸 기반으로 더 높이 성장할 수 있겠지.’
이제 이 학교에서 내가 할 일은 모두 끝났다.
그렇게 생각한 박경연은 그 날 교수직을 사임하고 넥플에 이력서를 제출, 뉴 에버월드 테이크포스 팀에 합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