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한 게임 개발자가 너무 유능함 136화
84. 메타버스(2)
그날 저녁 고깃집.
박경연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나도 처음 설명을 들었을 때 이 양반이 뭘 잘못 처먹었나 싶었는데…….”
“그러면 말 좀 해주지. 허상을 좇지 말고 하던 일이나 좀 열심히 하라고.”
“내가 말한다고 들을 양반이 아니야. 그런 말을 할 관계도 아니고.”
귀를 막는 시늉을 한다.
“자기가 인정하는 사람이 아니면 듣는 척도 안 할 정도로 오만한 엘리트 양반인데, 유팀이 말했으니 듣는 척이라도 한 거라고.”
“하긴, 그런 사람들 있지.”
“나도 많이 봤어.”
최종학과 박명훈이 공감을 했다. 태연을 포함한 네 남자는 다시 술잔을 부딪힌 뒤 단번에 털어 넘겼다.
박경연이 찡그린 얼굴로 말했다.
“메타버스 게임은 얼어 죽을…… 게임 만들어서 서비스해 본 적도 없는 인간이 아주 꿈은 거창하지. 거기에 심지어 그냥 게임도 아니고 플랫폼을 만들겠다고? 어이구…….”
“로블록스 이전에 스타크래프트가 있었지. 스타 유즈맵이 딱 그거잖아. 유저들이 만들어 공유하는 게임 플랫폼! 얼마나 메타버스스러워?”
“오, 그러게. 진짜 그러네?”
“하하하!”
최종학이 드립으로 받아주자 웃음이 터져 나온다.
박명훈이 살짝 취한 얼굴로 묻는다.
“내가 생각하기에 요즘 거론되는 진정한 의미의 메타버스는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에 등장하는 그런 게임이 나와야 시도라도 해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 게 과연 가능이나 할까?”
“그건 애초 말도 안 되는 개념이야. 지금 빅테크뿐만 아니라 모든 기업들을 흡수하는 가상의 거대한 세계가 생겨나고, 그 안에서 현실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가상 사회가 구축되어야 한다는 건데…… 이게 말이 되냐고. 서버 어떻게 할 거야? 그거 누가 어떤 기술로 어떻게 운용할 건데?”
“지금 컴퓨터 기술로는 어림도 없지. 무시무시한 연산 능력이 필요할 테고…… 이게 엄청난 전력 소모로 이루어질 텐데 말이야.”
“가상 경제 구축, 유지 및 보안 작업도 엄청난 문제지. 내가 보기에 이 메타버스라는 게 일개 기업이 감당할 수준이 절대 아니야.”
“300억? 아서라. 몇십조를 때려부어도 안 돼. 그리고 그렇게 해서 될 거였다면 진작 혁신적인 뭔가 나왔겠지.”
굳이 개발자가 아니라도 알 수 있는 내용.
그러면 이민기 부학장은 그것도 모르는 바보라서 투자를 받으러 다니는 걸까?
“그럴 리가 없지. 그건 사업을 위해 자금을 끌어모기 위한 구실일 뿐이야. 진짜 목적은 다른 곳에 있을 거야.“
“그게 뭔데요?”
“그건……!”
최종학의 질문에 말문이 막힌 박경연.
그러더니 대뜸 맥주잔을 들어 올린다.
“마시자고!”
“에이.”
“무슨 재미있는 음모론이라도 나오나 싶었는데…….”
투덜거리며 또 다른 화제로 넘어가는 세 사람.
“메타버스라니. 그건 허상이라고.”
박경연의 이야기를 들으며 태연은 생각했다.
‘정말 그럴까?’
* * *
이른 아침. 누구보다도 회사에 일찍 출근한 태연은 PC를 켜고 에픽 엔진을 가동시켰다. 그리고 불러온 것은 다름 아닌 ‘에버월드’ 리소스.
지금은 서비스를 종료한 추억의 게임으로, 본래 귀엽고 아기자기한 도트 그래픽 스타일이었던 게임이 2D 카툰 렌더링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는 상황이었다.
태연이 아트를 공부하려 만들고 있는 리소스였다.
‘상당히 잘 나왔어.’
기분이 좋아졌다.
이제 나는 아트도 ‘잘하는’ 개발자가 됐다고 생각하면…….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군.’
내가 원하는 대로, 내 방식대로 게임 세상을 꾸밀 수 있다니, 이 얼마나 매력적인 일인가?
‘메타버스라…….’
사실 이걸 어떤 게임으로 만들어 볼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고민만 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다가 전날, 술자리에서 메타버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소소한 힌트를 얻었다.
‘메타버스…… 라는 거창한 네임은 집어치우고.’
카툰 렌더링으로 재구성한 오브젝트를 불러와 빠르게 배치한다.
작고 예쁜 초보마을 맵이 엔진에 구현됐다.
‘돈 부담 없이, 언제든 모여서 즐겁게 소통할 수 있는 그런 공간으로 만들어볼까?’
수익 모델이고 뭐고, 그런 생각은 나중으로 미뤄두고 사람들이 편하게 모여 내 세상을 꾸미고, 소통하고, 이벤트를 열고…….
‘시뮬레이터를 제공해서 원하는 콘텐츠로 손쉽게 재구성할 수 있도록 해보는 것은…….’
음, 이쪽은 부담이 조금 클 것 같긴 하지만…….
‘내가 예전에 로블록스를 연구했을 때 만들어둔 시뮬레이터 소스를 재활용하기로 하고 최종학이나 다른 유능한 프로그래머들에게 리뉴얼을 맡긴다면……?’
무슨 거창한 메타버스 세상을 만들고 싶은 게 아니다.
그저 소통할 수 있고 자유롭게 모여 이것저것 소소한 재미를 챙길 수 있는…… 귀엽고 아기자기한 가상의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거다.
‘무료로 부담 없이, 저사양의 PC나 휴대폰으로도 즐길 수 있는 그런 세상을…….’
크로스 플랫폼은 기본!
‘SNS에 메신저 기능까지 구현하고 서로 연동시킬 수 있도록 하면…….’
작지만 소소한 즐거움이 있는 소통 공간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지금이라면 충분히 가능해.’
사실 로블록스를 하며 생각만 했던 아이디어였다.
그때는 불가능했다.
돈도, 실력도, 여력도…… 모든 것이 부족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가능하다!
‘지금의 나는 대기업, 넥플의 대표이사니까.’
처음부터 손해를 감수하고 진행하는 기획이다.
‘사람이 모이는 플랫폼은 그 자체로 가치가 높아지는 거니까.’
실패한다면?
‘다른 곳에서 충당하면 되는 거지.’
“…….”
태연은 업무 시간이 될 때까지 고민과 구상을 멈추지 않았다.
회의 말미.
태연은 사실상 대기 발령팀이라 할 수 있는 charge 본부 최고 담당자에게 물었다.
“요즘 김상희 피디 뭐하고 있죠?”
“에버 월드 김상희 피디 말씀하시는 건가요?”
유명아 본부장.
실리콘 벨리 빅테크 기업 출신으로, 넥플 입사, charge 본부장으로 근무를 시작한 지 3개월 정도 된 신입이었다.
40대 초반의 나이였지만 20대 후반으로 보일 정도의 동안 미인이었다.
“으음……!”
커다란 눈을 끔뻑 끔뻑이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가 말했다.
“charge 실 발령 이후 총 두 번의 프레젠테이션을 했는데 그중 한 번이 저 입사 다음 날이었어요. 두 번 모두 에버월드를 기반으로 한 모바일 게임이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어땠나요?”
“그냥 흔한 모바일 게임이라 반려 처리했습니다!”
당차게 잔인한 말을 내뱉는 그녀.
“그렇군요.”
-저 진짜 이대로 못 끝내요! 자식 같은 애들이란 말이에요. 엉엉엉!
눈물을 뿌리던 김상희 피디를 떠올리며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회의실의 모든 이들이 회의가 끝났음에도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태연을 바라본다.
뭔가, 새로운 일을 벌일 거라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그녀를 회의실로 호출해 주세요.”
* * *
에버월드 서비스 종료 이후, 김상희는 시든 꽃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이대로 포기해야 하는 걸까?’
주위에서는 에버월드를 포기하고 다른 게임을 기획해 보라는 우려의 제안을 했다. 하지만 김상희는 한사코 거절했다.
‘내 자식 같은 애들인데…….’
어떻게든 다시 세상에 빛을 보게 해주고 싶었다.
할 수 있다고 믿었다.
‘내가 포기하면 이 아이들은 정말 끝나는 거야!’
자식을 포기할 부모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열심히 준비한 두 번의 프레젠테이션은 모두 반려당했다.
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길을 잃은 심정이었다.
‘누가 좀 길을 알려줬으면 좋겠는데…….’
내비게이션을 달라는 것도 아니다. 그냥 작은 이정표 정도만 있다면…….
“……!”
오늘도 그녀는 머리를 감싸 쥔 채 창작의 고통에 몸부림쳤다. 바로 그때였다.
“김상희 피디님?”
“……네?”
“임원 회의실로 빨리 올라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한 직원의 전언.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이, 임원 회의실에…… 지금 바로요?”
“네. 본부장님이 찾으신다고…….”
“……!”
가는 내내 심장이 크게 뛰었다.
‘기어코 그날이 온 건가?’
charge.
갈 곳이 없는 넥플 개발자들이 모이는 R&D 팀의 일종.
말이 그렇지, 사실상 대기 발령 팀이다.
이곳에 가라는 소리는 알아서 나가라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사실 그동안 조용했던 게 오히려 이상했지.’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에버월드도 여기까지인가?’
이대로 퇴사하게 된다고 해도 갈 곳은 많다.
문제는 그렇게 되면 에버월드 부활 프로젝트는 끝이라는 것!
‘정말 여기까지라고?’
머리가 띵했다.
현기증이 밀려오는 것 같다.
‘정말……?’
곧 임원 회의실 앞에 도착했다.
심호흡을 하고, 그 어느 때보다 터질 것 같은 심장으로 출입을 문을 열고 들어갔다.
“헉!”
저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켰다.
유명아 본부장뿐만 아니라.
넥플 모든 중역들이 모여 있었던 것이다.
“오랜만이네요. 김상희 피디님. 이쪽에 앉으시죠.”
“네, 네!”
태연이 가리킨 빈자리에 앉은 김상희.
‘세상에…… 다 있어!’
태연뿐만 아니라, ‘천재 개발자’ 최종학.
라이브의 달인 박명훈 CP까지.
‘이런 곳은 되어야 넥플 3대장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거구나!’
뿐만 아니라 넥플의 전설인 두 명의 이사들.
손영상, 이태영 이사도 있었다.
문제는 그들이 전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김상희 피디님도 오셨으니 시작해야 할 텐데…….”
태연이 주위를 둘러보며 묻는다.
“최종학만 있으면 되는데, 다른 분들은 바쁘지 않아요?”
“네.”
“딱히 바쁘지는 않습니다.”
“시간 널널합니다.”
무엇을 할 생각인지 지켜보겠다는 의지.
반면 최종학은 투덜거린다.
“또 어떻게 부려먹으려고 나만 남으라고 하는 건지…….”
“재미있는 일이야.”
태연이 빙긋 웃으며 김상희를 바라본다.
“에버월드 리소스를 활용해서 제가 요리조리 만져보고 새 콘텐츠 구상을 좀 해봤거든요. 지금부터 그 아이디어를 들려드려고요.”
“……!”
김상희는 깜짝 놀랐다.
‘에버월드 리소스로 새 콘텐츠를……?’
다름 아닌 유태연이?
심장이 다른 의미로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목소리가 떨리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황급히 물었다.
“그, 그러면 저 계속 이 회사에 남아서 에버월드 개발해도 되는 건가요? 저 자르려고 부른 게 아니고요?”
태연은 말없이 웃어보인 뒤 빔 프로젝트로 화면 하나를 보여줬다.
“아……!”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저건…… 에버월드야!’
카툰렌더링으로 다시 태어난 내 게임.
아니…… 내 새끼!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회의실의 중역들도 웅성였다.
“저거 에버월드 맞죠?”
“도트 그래픽 아니었나요? 카툰 렌더링으로 리디자인을 했군요.”
“예쁜데, 작업자가 누구지?”
이어진 태연의 프레젠테이션에 모두가 경악했다.
“지금 보고 계시는 결과물은 근래에 아트 공부를 하며 시험 삼아 제가 만들어 본 겁니다. 에픽 엔진에 띄워본 거고요.”
“……!”
태연은 모두에게 말했다.
“이 리소스를 활용해서, 소소한 재미가 있는 소통의 공간을 만들어보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