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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한 게임 개발자가 너무 유능함-135화 (135/147)

퇴사한 게임 개발자가 너무 유능함 135화

84. 메타버스(1)

아는 것이 힘이다.

요 근래 박경연은 이 말의 뜻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체감하고 있었다.

‘살다 살다…… 자기들 멀리한다고 날 꺼림칙하게 대하던 사람들에게 이런 대접도 받아보네.’

유태연과 친하다는 이유로 하루아침에 대접이 달라진 것이다.

특히 눈앞의 이민기 부학장은 평소 엘리트 의식으로 가득 찼던 거만한 인물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차가운 카리스마로 애써 포장했지만 그냥 거만한 거였다.

‘한국대 출신이 뭐 대수라고…….’

대한민국 최고 명문대 한국대!

박경연 역시 졸업생으로 자부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자부심과 자만심은 분명 뜻이 달랐다.

거북할 정도로 뻣뻣하던 그가 지금, 아주 정중히 부탁을 하고 있었다.

“유태연 대표를 만나서 꼭 제안하고 싶은 게 있거든.”

부드러운 미소와 말투로.

‘살다 보니 참…….’

초창기, 그가 부르는 자리를 몇 번 거절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는 완전히 공기 취급이었다. 이래저래 사람 참 얼마나 힘들게 하던지…… 욕이 절로 나왔는데 지금 모습을 보니 구역질이 치밀어 오를 정도였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바뀌냐?’

기가 막혔지만, 그래도 예의를 차린다.

“지금 저와 유태연 대표에 대해 무슨 소문이 퍼지고 있는지 대강 알고는 있습니다만…… 그렇게 절친한 관계는 아닙니다. 말 그대로 친분이 있을 뿐이죠.”

이민기 부학장이 고개를 갸웃한다.

“그것참 이상하군요.”

“네?”

“사적으로 식사와 술자리를 자주 같이할 정도면 친분이 깊다고 봐도 되는 거 아닐까요?”

그러면서 SNS 사진을 보여주는데, 술자리에서 함께 다정하게 찍은 사진이었다.

‘아, 저 인간……!“

최종학의 SNS였다.

“심지어 최종학 PD가 친근하게 형이라도 칭하고 있는데 이 정도면…….”

“다른 사람들하고는 친한 거 맞는데 유태연 대표는 조금 애매한 관계였어요. 친한 동료 사이는 맞는데 그렇다고 형동생 관계까지는 아닌…… 무슨 뜻인지 아시죠?”

“네. 이해합니다. 저도 그런 관계가 몇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그래도 사적인 자리를 같이할 정도라면 말 정도는 해볼 수 있는 거 아닐까요?”

“…….”

박경연은 한숨 쉬는 대신 술을 마셨다. 즉각적으로 다른 교수가 잔을 채워준다.

‘사람 참 불편하게 만드는 데 일가견이 있어.’

박경연은 턱 한숨을 내신 뒤 터놓고 말했다.

“무슨 이유 때문에 유팀을 만나려고 하시는지, 제가 좀 알아도 되겠습니까?”

“…….”

“아시겠지만 유팀이 널널한 사람이 아니에요. 갑자기 누군지도 모르고 뭐하려는 건지도 모르는 사람 소개해 줘서 감정 상하는 일 발생하면 저만 손해잖아요.”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라…… 조금 섭섭하네요. 제가 그런 사람이었나요?”

어깨를 으쓱거렸다.

“한국대 선배님이라는 거 말고 제가 딱히 아는 게 없는데요. 교수 되고 나서 대화다운 대화도 제대로 못 해봤고.”

“…….”

인자하던 표정에 냉기가 내려앉는다.

주위 교수들은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지만 박경연은 태연했다. 아쉬울 게 없고 꿀릴 것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무슨 용건으로 유팀을 만나고 싶어 하시는지 똑바로 말해주셔야 해요.”

더 이상 호칭도 숨기지 않았다.

“유팀 같은 사람은 시간이 곧 돈이라서요. 제가 확신을 가지고 있는 지인이라면야 식사 자리 주선 정도야 어떻게든 해볼 수 있겠는데…….”

박경연의 눈빛도 점점 날이 서기 시작했다.

“부학장님과 제가 그 정도 관계는 아니잖아요.”

“아니, 무슨 말을 그렇게 심하게…….”

“박 교수. 말이 좀 심했어. 어떻게 감히 부학장님께…….”

듣다 못 한 교수들이 핀잔을 시작한다.

그러건 말건 박경연은 흔들림이 없었다.

‘어차피 안 볼 사람들인데 뭐…….’

속 편하게 술을 또 한 잔 마시며 기다린다.

이민기 부학장은 꽤나 자존심이 상한 듯 보였다.

애써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지만, 얼핏 씁쓸함, 분노, 민망함…… 온갖 감정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었다.

“후우.”

술을 한잔 마시고 푹 한숨을 내쉰 뒤.

“사실…….”

힘겹게 말을 이어간다.

박경연은 뚱한 얼굴로 그 말을 들었다.

* * *

이민기 부학장에게 말했던 것과 달리, 박경연은 언제든 태연을 만날 수 있었다. 전화해서 어디 있는지, 몇 시에 시간 되는지 물어보고 맞춰서 가면 된다.

‘강남, 판교 사옥 모두 대표실 직통 카드가 있다는 게 중요한 거지.’

“박경연 교수님. 안녕하세요!”

“대표님 뵈러 오셨나요?”

그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는 이들은 대부분 피디, 임원급들이었다.

박경연을 알고 있는 이들이었다.

지금 어디에서 근무하는지, 앞으로 어디로 가서 근무하게 될 것인지도.

“유팀. 나왔어!”

남들은 두려움에 몇 번이고 망설일 집무실의 문을 아무렇지 않게 열고 들어간다.

“음, 무슨 일이야?”

“바빠?”

“딱히. 잠깐만 앉아 있어.”

기다리는 동안 굉장히 아름답고 지적인 여자 비서가 방긋 웃는 얼굴로 커피를 건네준다.

‘노총각의 심장에 안 좋은 곳이란 말이지.’

그럼에도 계속 찾게 되는 것은…….

“다 됐어. 무슨 일이야?”

“아, 그, 그게 그러니까…….”

당황해서 허둥대는 박경연과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태연.

그 시선의 의미를 박경연이 모를 리가 없었다.

“아, 아니야!”

“뭐가 아닌데?”

“지금 생각하는 그런 거, 절대 아니야!”

“아니라면 다행이고.”

“……뭐가 아니라면 다행인데.”

“박팀이 이주아 씨에게 관심이라도 있는 줄 알았지 뭐야. 혹시 근래에 자주 찾아오는 게 나에게 용무가 있는 게 아니라 주아 씨를 보기 위해서가 아닐까 생각했었지.”

뜨끔!

“아, 아니야! 그런 거. 오늘은 정말 일이 있어서 그런 거야.”

“그래? 중요한 일이야?”

“그럼! 어? 아니지.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니야. 거절해도 돼. 거절하면 좋지. 사실 탐탁지가 않은 일이거든.”

태연도 비로소 진지해졌다.

“무슨 일인데?”

* * *

‘이곳이…….’

이민기 부학장이 판교 테크노벨리에 입성했다.

가장 크고 거대한…… 랜드마크나 다름없는 초대형 사옥이 눈앞에 세워져 있었다.

대한민국 10대 대기업이자, 최고의 게임 회사인 넥플!

최근 들어 그 위세가 전 세계로 뻗어 나가는 중인 회사에 도착한 것이다.

‘처음 오는 곳도 아닌데…… 떨리는군.’

과거, 여러 협력 프로젝트 문제로 종종 방문했던 회사였다. 제자, 혹은 지인들도 종종 거쳐갔던 곳이라 더 친근감도 있었고.

그런데 오늘은 유난히도 떨렸다.

‘자, 가자.’

넥플 판교 본사.

인테리어도, 그리고 내부 분위기도 굉장히 많이 바뀌었다.

“하하, 그래서 이번에…….”

“이번 업데이트는…….”

사원증을 걸고 활보하는 직원들의 얼굴 표정들부터가 남다르다.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고, 웃음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온다.

과거에는 말 그대로 흔한 회사의 분위기였다.

어딜 가든 볼 수 있는 회색빛의 인간미 없고 암울한…….

카페테리아를 비롯한 스튜디오나 복지 시설들을 돌아다니면 분위기 변화가 피부로 와닿는다.

‘저긴…… 방송국인가?’

방송 촬영 현장도 보인다.

기자들과 인터뷰 중인 광경도 보이고…….

‘회사 평가와 주가가 수직 상승하니 이런 변화가 생기는구나.’

역시 대단한 인물이다.

유태연.

‘그 정도 인물이라는 내가 하려는 일의 가치를 이미 알아줄 거야.’

희망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유태연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제가 한국 대학교 게임 교육원 부학장 이민기입니다. 허허허!”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이상하다. 어째서……?’

몸이 으슬으슬 떨린다.

이 느낌의 정체를, 그는 한동안 이해하지 못했다.

“저에게 제안하고 싶은 게 있으시다고 들었습니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더니…….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 어렵습니다. 잠시 후 정부 부처에서 사람이 와서 중요 안건을 논의하기로 했거든요. 양해 부탁드립니다.”

“아, 예! 물론 그래야지요!”

“그러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할까요? 박경연 교수님께 얼핏 듣긴 했지만 제안자인 교수님의 입으로 요건을 듣고 싶습니다.”

“어, 그게 그러니까…….”

당황한 듯 더듬거리며 설명하는 이민기 부학장.

“제, 제가 만들려는 것은 게임이면서 게임이 아닌 플랫폼입니다. 유저들이 직접 콘텐츠를 만들어 참여하는 방식이죠!”

노트북을 동원해 프레젠테이션을 한다.

작고 귀여운 남녀 아바타 캐릭터들이 다양한 장르의 게임을 플레이하는 모습이다.

FPS. 타이쿤류, RPG.

이야기를 귀담아듣던 태연이 단 한마디로 정리했다.

“로블록스 같은 게임이군요.”

세계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끌다가, 한국에는 한 유명 게임 크리에이터의 플레이로 알려지게 됐다.

“바로 그겁니다. 역시 알고 계시는군요!”

태연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소싯적 심심풀이로 게임을 만들어 올려본 전적이 있으니까요.”

“그렇습니까?”

“플레이도 많이 해봤고요. 접은 지 꽤 됐지만 굉장히 인상적이었고 즐겁게 했던 게임입니다.”

태연은 담담히 말했다.

“메타버스 트렌드를 타고 가치가 크게 상승 중인 게임이기도 하죠.”

“바로 그렇습니다. 그걸 우리 감성에 맞게 제작해서 서비스하겠다는 겁니다!”

“흠…….”

그는 열변을 토했다.

“현재 전용 개발 플랫폼 도구를 열심히 제작 중입니다. 제가 과거에 소프트웨어 회사 CTO로 재직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때부터 관계를 맺고 지내온 최고의 동료들과 의기투합했습니다!”

“지금 게임 교육원 부학장님이라고 들었는데…….”

“투자가 확정되면 부학장 자리를 내려놓은 뒤 회사를 창업하고 본격적인 업무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개발팀의 자랑도 늘어놓는다.

하나같이 스펙, 경력이 화려했다.

“헐리우드의 이름 높은 모델러, VFX 전문가들도 합류할 예정입니다. 이들과 함께 극사실 디지털 더블 기술을 활용해서 사업을 다각화할 예정이고…….”

“총 투자금은 어느 정도로 생각하고 계십니까?”

“시리즈 A까지 300억입니다.”

엄청난 금액을 서슴없이 이야기하는 그의 얼굴에 강한 확신이 있었다.

“흠…….”

태연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이 이민기 부학장은 묘한 불안감을 느꼈다.

“지금 메타버스가 전 세계적인 추세임에도 넥플을 비롯한 넷펀즈, 네로 소프트 같은 대형 게임 회사들이 그 열풍에서 물러나 있는 이유를, 혹시 알고 계십니까?”

“……네?”

“게임계에는 이미 그런 내용의 플랫폼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걸 MMORPG라고 부르죠.”

“하, 하지만 그건…….!”

“네. 계획 중이신 로블록스 같은 플랫폼과는 개념이 조금 다르죠. 개발사가 제공하는 ‘게임 세계관’이라는 한정된 범위에서 소통하는 MMORPG와 다르게 그런 게임들은 유저들이 스스로 생태계를 만들고 개발사와 ‘상생’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말입니다.”

태연이 눈에 감정이 보이지 않는다.

“K 메타버스 플랫폼. K 로블록스를 외치며 절 찾아온 사람이나 회사가 과연 부학장님 한 명뿐이었을까요?”

“……네?”

“벌써 국내 유명 업체나 개발자들과 수도 없이 미팅을 했습니다. 일본, 중국, 북미, 유럽의 해외 업체들도 협업 제안이나 문의를 해왔고요.”

“아……!”

“우리 넥플과 동맹 관계라 할 수 있는 머큐리 게임즈에서도 저에게 관련 문의를 해오더군요. 메타버스 게임이 대세라는데 우리도 뭔가 해야 하지 않겠냐. 옆 동네는 천억 달러를 투자한다더라. 우리도 그 정도 투자할 의향이 있다. 뭐 이런 내용으로…….”

“…….”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이민기 부학장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피식 웃는다.

“유명 개발자들, 혹은 머큐리 게임즈에서 저에게 왜 그런 문의를 해왔는지 아시겠습니까?”

“그, 그야 유태연 대표님이 국내 최대 게임 업계 넥플의…….”

“그런 이유가 아닙니다.”

이어 흘러나온 말은 태연의 예상을 깼다.

“제가 근래에 들어 알게 된 건데, 과거 그쪽 플랫폼에 만들어 올렸던 게임들이 클래식 취급을 받고 있는 모양이더군요.”

“……네?”

“과분한 평가라고 생각합니다만…… 아무튼 그런 이유 때문에 저를 국내 메타버스 게임 전문가로 생각하고 찾아와서 조언을 구하거나 협업, 투자 요청을 하는 겁니다. 제가 단순히 넥플 대표이사이기 때문이 아니라.”

“…….”

전혀 몰랐던 내용이었다.

이민기 부학장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태연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메타버스에 대해 대중과 기업 간의 온도, 혹은 개념 차이가 너무 극명합니다. 기업은 메타버스를 무슨 4차 산업 시대의 새로운 먹거리, 황금 광산 정도로 여기는 모양이지만 대중은 사실 심드렁한 편입니다.”

태연은 노트북 프레젠테이션 화면을 바라봤다.

“지금 기업들이 외치는 메타버스는 허상에 불과합니다. 그게 정말 가능하려면 가상현실 기술이 미디어 매체 속 수준으로 발전해야죠. 접속 과정 자체도 굉장히 빠르고 편리해질 필요도 있고요. 콘텐츠 개발을 통한 상생이니, 세계관이니, 가상 통화니…… 이런 것들은 그 후에 다시 생각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태연은 다시 시간을 확인하고 말했다.

“지금 방문할 정부 부처에서도 메타버스가 하도 유행이니 그걸 적용해서 국가나 지역 유명 관광지 홍보용으로 발전시키면 어떨까. 이런 문제에 대한 조언을 구하러 오는 겁니다.”

“…….”

“혹시 MMORPG…… 그게 아니면 온라인 게임을 만들어 오랫동안 서비스하며 흑자를 보신 전적이 있으신가요?”

“아, 아니요. 그런 적은 없습니다만…….”

“일단 그것부터 시작해 보시죠. 이론으로만 아는 것과 직접 만들어 서비스해 보는 것은 차이가 굉장히 크니까요.”

“저, 그, 그렇게 하면 투자를 해주신다는……?”

“…….”

“아, 아닙니다.”

잠깐의 착각, 그로 인한 주접!

이를 인지한 이민기 부학장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태연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냉정하게 말했다.

“여기까지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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