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한 게임 개발자가 너무 유능함 134화
83. 청탁
오늘따라 집에 가는 발걸음이 굉장히 가벼웠다.
목구멍까지 차올라 당장에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환호성을 필사적으로 억눌러둔다.
외침은 지하, 단칸방에 도달해서야 터져 나왔다.
“아자! 해냈다!”
격정을 이기지 못하고 허공에 연속해서 어퍼컷을 날렸다. 2002년 월드컵 신화 이후 이 같은 감정은 처음 겪는 일이었다.
“해냈다! 내가 해냈어! 으하하하!”
그러기를 한참 후.
제풀에 지친 박경연이 바닥에 주저앉는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본다.
“이 꿉꿉한 반지하 월셋집과도 안녕이구나.”
무려 억대의 연봉에 집과 차 제공이었다.
심지어 그 위치가 꿈만 꾸던 미국 켈리포니아.
‘마스 게임즈 아카데미 교수라…….’
사람 인생 한 치 앞을 모른다더니…….
‘내가 설마 이쪽에 재능과 운이 있었을 줄은 몰랐네.’
물론 단순한 운은 아니다.
그간의 고생이 보답을 받은 것이다.
박경연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내 인생. 이제부터 시작이다!
* * *
물론 당장 무언가가 바뀌지는 않는다.
4학년 다른 제자들이 게임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얘네들까지 도와줘야지.’
전반적인 게임 퀄리티가 스낵 엠파이어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렇다 해도 박경연은 지도 교수로서, 스승으로서 학생들의 게임 출시를 서포트해 줘야 할 의무가 있었다.
계약 문제를 떠나 그것이 스승 된 자로서 해야 할 도리였다.
“교수님! 이것 좀 봐주세요!”
“뭐가 문제야?”
“주사위 눈금이 아무리 돌려도 6이 나오지 않아서…….”
“뭐? 어디…… 에이, 함수 설정을 잘못했네. (1.6) 이 부분! 1 이상 6 미만이라는 뜻이잖아? 이런 값이면 당연히 6이 안 나오지.”
“아……!”
도움 요청 내용은 정말 다양하다.
가끔은 뭐 이런 걸 가지고 도움을 요청하나 싶을 때도 있지만 박경연은 절대 짜증을 내는 법이 없었다.
원래 교육원뿐만 아니라 실제 업무 현장에서도 난해한 문제가 아닌 어처구니없는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대신, 한 번 가르쳐줬는데 또 같은 문제로 끙끙대다가 도움을 요청하는 건 성격상 넘길 수 없는 문제였다.
“이거 예제로 만들어서 학교 게시판에 확실히 공유해 둬. 너희들도 그렇고 다른 팀도 보고 확실히 새겨둘 필요가 있는 문제야.”
“네에…….”
중요한 이슈는 제대로 전파해서 가급적 모두가 공유할 수 있도록 해둘 필요가 있었다.
학생들만 접속할 수 있는 학교 홈페이지 게시판에 <개발 이슈>란을 만들어 주기적으로 예제를 올리고 그것을 확인하도록 하고 있었다.
이게 꽤 도움이 돼서, 어지간한 문젯거리라면 이 게시판 예제들만 제대로 살펴도 해결할 수 있었다.
데이터베이스가 꽤 많이 축적된 덕분이다.
“테스트할 때는 일반 유저들이 게임 플레이하듯이 하지 마. 그러면 사소한 문제점을 발견해도 무심코 지나가게 된단 말이야. 범위를 꼼꼼하게 지정한 뒤 역할을 분담해. 그리고 체크리스트를 꼭 만들어서 꼼꼼히 관리해!”
학과에 따라 개발 파트도 나뉘어지게 된다지만, 개발진으로서 반드시 알아야 할 내용이 꽤나 많다.
이를테면 QA 같은 것.
“테스트는 직군을 떠나 모든 개발자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야. 이 부분에 대해 기본적인 지식과 역량을 갖추고 있어야 해. 그래야만 자기 담당 분야를 이슈 없이 완벽히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야.”
몇 번이고 강조한다.
오늘 이후 절대 잊지 않도록.
“개발은 테스트를 완벽하게 끝마치고 본 서버 업데이트 내용을 점검하는 것까지야! 개발이 그래서 쉬운 게 아니라고. 알아들었어?!”
“네!”
점심 시간.
“교수님! 같이 밥 먹어요!”
“학교 바깥에 진짜 맛있는 고기국수집 오픈했대요! 거기 같이 가봐요!”
박경연은 어느 순간부터 학생들에게 가장 인기 많은 교수가 되어 있었다.
학생들과 이동하며 생각했다.
‘유팀과의 인연이 알려진 직후였나?’
그 사건이 계기이긴 했지만 정확히 말하면 라이징 스튜디오에 자신의 인맥까지 동원하며 전폭적인 지원을 해준 시점부터였던 것 같다.
그때부터 온갖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다른 교수님들과 달리 정말 실력도 있고 인맥도 빵빵하더라! 그것을 제자들을 위해 아낌없이 베풀어주시더라!
이런 이야기가 떠돌아다닌다는 모양이다.
‘잿밥에 관심을 더 보이는 녀석들도 있지만…….’
“교수님. 이번 프로젝트에 성과를 내면 우리도 넥플에 입사할 수 있을까요?”
“넥플 입사가 목표야?”
“네, 지금 넥플은 게임 개발자라면 누구나 입사하고 싶어 하는 꿈의 직장이잖아요! 문제는 벽이 너무 높아서…… 거긴 신입도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 쌩 초짜는 안 뽑는다던데요. 경쟁도 엄청나고…….”
“흠…….”
“공채는 최소 서울, 연고대는 되어야 서류 면접 통과가 가능하다는 이야기도 있고…… 개발 직군으로 이직하려면 실력과 스펙도 중요하지만 그 이상으로 인맥도 중요하다던데…….”
“내가 아는 오빠는 중소 회사에서 3년 있다가 넥플 내부자 추천으로 이번에 입사에 성공했다고 하더라고요.”
“모 게임 학원에 다니는 내 친구는 넥플 출신 교수 추천으로 입사에 성공했다고…….”
무언의 바람이 담겨 있는 시선에 박경연은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애써 돌려 말하지만 속이 너무 뻔히 들여다보였기 때문에.
‘굳이 냉정하게 굴 필요는 없겠지.’
원래 박경연은 선이 분명했고, 그것을 조금이라도 침범하려는 이들에게는 가차 없는 편이었다. 하지만 학생을 가르치는 스승이 되면서 사고가 유연해졌다.
“너희들, 그렇게 넥플에 입사하고 싶어?”
“네!”
반짝거리는 시선들.
“좋아. 그러며 내가 어디 가서 듣기 힘든 입사 꿀팁을 딱 한 가지만 방출하지!”
“왜 한 가지예요?”
“이왕이면 다 알려주시지!”
학생들의 볼멘소리에 박경연은 씩 웃었다.
“영업 비밀이라서 그래.”
“우우우!”
“나도 먹고는 살아야 할 거 아니냐? 어? 듣기 싫어? 싫으면 마라.”
“아니에요!
“말해주세요!”
“다 조용히 해! 교수님 말씀하시잖아!”
가르치면서 배운다.
처음 교수 노릇을 시작했을 때는 인내심을 시험당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더랬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학생들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며 교육자 입장에서 접근하게 되니 사고와 태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모났던 부분이 사라지며 사람 대하는 법을 더 깊이 터득하게 됐다.
‘지금 같았으면 아틀란티스 프로젝트를 더 훌륭하게 이끌 수 있었지?’
그때는 그랬다.
모난 부분이 많았고, 원하는 만큼 따라오지 못하는 팀원들에게 굉장히 까다로웠다.
시야가 좁았다.
‘결국 내 문제였을 수도 있다는 거지.’
이런 사람을 그래도 대표라고, 디렉터라고 끝까지 믿고 따라주며 헌신했던 이들이 고마울 뿐이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그랬다.
“유팀…… 아니 유태연 대표는 시야가 넓은 사람을 좋아해.”
“시야가 넓은 사람이요?”
“자기 직군이 시나리오 기획자라고 딱 그것만 할 줄 아는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야.”
“아…….”
“이유가 뭘까?”
여러 가지 의견이 쏟아진다.
박경연은 가만히 듣고 있다가 말했다.
“시야가 좁은 사람의 결과물은 보고 있는 것에만 최적화되어 있어. 그렇기에 타 직군이 보기에는 아쉽거나 문제되는 부분이 많을 수밖에 없어. 이 상태에서 개발 회의를 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싸우겠죠.”
“바로 그거야. 개발에서 가장 중요한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거지. 사실 여기서 모든 문제가 발생하는 거야.”
꿀팁 방출에서 자연스럽게 가르침으로 이어진다.
학생들은 귀를 쫑긋, 음식이 식는 것도 개의치 않고 집중했다.
“대화가 안 통한다는 소리가 여기서 나오는 거야.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니까 얼마나 답답하겠어. 여기가 학교도 아닌데 하나하나 붙들고 가르쳐줘야 해?”
다들 고개를 젓는다.
“학교 프로젝트에조차도 그런 팀원 만나고 싶지 않잖아. 그치?”
“네!”
“돈 주고 고용하는 회사 입장에서는 오죽하겠냐고. 바로 그런 거야. 시야가 좁은 사람, 그러니까 한 가지만 할 줄 아는 사람을 채용하지 않으려고 하는 이유.”
박경연이 제자들을 보고 씩 웃는다.
“여기까지 말해줬으면 알겠지? 자, 내가 유태연 대표라면 너희들을 상대로 뭘 확인하려 들겠어?”
“시야요!”
“바로 그거야. 본업에서의 깊이감도 필요하지만 그건 당연히 장착해야 하는 거고. 시야. 시야가 중요해. 그걸 감안하고 취업 준비를 하란 말이야.”
“그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프로젝트를 활용해야지. 담당 분야뿐만 아니라…….”
박경연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학생들뿐만이 아니다.
사실 교수들이 더 심했다.
이들은 음험한 꿍꿍이를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박 교수님. 오늘 저녁에 교수들끼리 모여서 가볍게 한잔하기로 했는데, 참여하실 거죠? 김 교수님, 정 교수님, 오 교수님하고 부학장님도 오실 건데…….”
‘그들이로군.’
박경연은 혀를 찼다.
세 명 이상 모이면 파벌이 생기는 법.
눈앞에 있는 교수를 포함, 그가 거론한 이들이 이 교육원의 대표적인 파벌이었다.
딱히 무언가 엄청난 의도가 있는 모임 같은 건 아니지만 거슬리면 굉장히 피곤해진다.
이들의 등쌀에 몇몇 교수들이 버티지를 못하고 나가 버렸다.
‘예전 같았으면 거절하기 어려웠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죄송하지만 전 바빠서 시간을 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정중히 거절하고 등을 돌리려는데 그가 절절한 표정으로 말을 건넨다.
그러더니.
“요즘 이래저래 바쁘신 건 알겠는데…… 그래도 한 번 시간 좀 내주시죠.”
“…….”
간절히 요청한다.
이런 일이 없는데…… 평상시에도 말투는 정중했지만 내용으로 묘하게 까칠하게 굴던 그였다. 그래서 싸우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피했다.
그랬던 사람이 지금은 어떻게든 자신과 진지한 대화 자리를 만들고 싶어 한다.
오히려 자세를 낮추기까지 했다.
“부탁드립니다.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도 있고…… 무엇보다 부학장님께서 마련한 자리입니다.”
‘부학장이?’
아무래도 뭔가 있는 것 같다.
박경연은 고민 끝에 물었다.
“……몇 시까지 어디로 가면 될까요?”
* * *
학교 인근에 위치한 일식 선술집.
구석진 자리에 모여 있던 중년의 남자들은 초조한 얼굴로 출입문을 바라본다.
마침내 기다리던 사람이 도착했다.
“여기에요!”
“여기!”
환한 얼굴로 환대하는 사람들.
한국 대학교 게임 교육원 교수들이었다.
박경연이 자리에 앉아 앞다투어 한 마디씩 건넨다.
“요즘 4학년들 프로젝트 돌보느라 고생이 많으시죠?”
“뭘 좋아하시는지 몰라서 이것저것 시켰어요. 조금 기다리면 금방 술과 음식이 나올 거예요!”
“지갑 걱정 말고 마음껏 먹고 취해 봅시다! 오늘 부학장님이 쏘신대요!”
박경연은 한 중년 남자를 바라봤다.
금테 안경을 착용한 학자 인상의 사내.
‘이민기 부학장.’
그가 술을 권한다.
“한 잔 받아요.”
“네.”
한 잔 마시고 나서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됐다.
“사실, 제가 박 교수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이 자리를 마련했어요.”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꾹 참고 들었다.
“넥플 유태연 대표하고 자리를 좀 만들어줬으면 좋겠어요.”
‘역시나.’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용건에 박경연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