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한 게임 개발자가 너무 유능함 127화
81. 태연의 선택(1)
‘굳이 장르를 따지면 소셜 RPG인가?’
특이하게도, 전 세계 간식거리들을 캐릭터화하여 등급을 나누고, 레벨업, PVE, PVP 시스템을 도입하여 다양한 재미를 시도했다.
흔히 팜류로 일컫어지는 영지 꾸미기 시스템도 도입했다.
‘그래픽이 아쉽긴 하지만 그건 지금 시점에서 중요한 사안은 아니지.’
어린 유저층, 그리고 귀여운 것에 사족을 못 쓰는 이들이 좋아할 게임이었다.
‘박팀이 날 찾아오면서까지 난리를 쳤던 이유가 있었군.’
그런데 문제가 있다.
‘저 친구들만의 솜씨는 아닌 것 같고…….’
특히 레벨 디자인, 시스템 디자인 쪽에 박경연의 흔적이 곳곳에 드러나 있었다.
“그래서 이 게임은…….!”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곰곰이 생각해본다.
그러다 깨달았다.
‘아, 그때……!’
블레스를 떠나기 전, 자신의 숙소에서 같이 치맥을 하며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귀엽고 아기자기한 모바일 게임을 만들고 싶어! 어떤 방식이냐면…….’
시선을 준다.
박경연은 제자들의 열정적인 프레젠테이션을 굉장히 흡족한 마음으로 보고 있었다.
“…… 이상으로 <스넥 엠파이어>의 프레젠테이션을 마치겠습니다!”
초롱초롱한 시선들.
태연이 입을 열었다.
“결정을 내리기 전에…….”
박경연을 보고 말한다.
“가르치는 다른 팀도 있겠지?”
“뭐, 그야 당연하지?”
“가능하다면 그 친구들의 발표도 들어보고 싶은데…….”
박경연의 눈을 보고 말했다.
“박팀이 가르친 친구들로.”
“우리 게임은…….”
“에, 그래서…….”
태연은 네 팀의 발표를 들으며 생각했다.
‘박팀의 흔적이 곳곳에 들어가 있군.’
함게 일하고 친하게 지내며 얼마나 많은 대화를 나눴는지 모른다. 안 그래도 기억력이 좋았지만 신비의 팔찌 힘으로 초능력에 준하는 수준의 기억력을 갖게 된 태연은 상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씨앗을 뿌렸다고 봐야 하나?’
확실히 라이징 스톰 스튜디오 수준의 퀄리티를 가진 팀은 없다. 박팀이 괜히 자신 있게 내놓은 팀이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팀의 아이디어도 나쁘지 않다.
‘가볍게 플레이하기에 좋은 것들이 많아.’
그래서 투자할 의향이 있냐고 묻는다면 고민이 좀 되긴 하겠지만…….
‘중요한 건 인재 육성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다는 거지.’
이렇게 되면 이 학생들보다, 학생들을 여기까지 키워낸 박경연이 탐날 지경이다.
‘마스 게임즈가 추진하고 있는 아카데미 교수로 적합한 인재야.’
박경연을 향한 태연의 눈이 반짝였다.
4학년들의 프레젠테이션이 모두 끝났다.
애석하게도 다른 팀들은 아직 테스트 빌드가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그들에게는 도움이 될 조언들을 해주는 선으로 마무리했다.
출시를 준비하고 있는 라이징 스톰 스튜디오에게는 보다 상세한 피드백이 필요할 것 같았다.
“스낵 엠파이어는 제가 직접 게임을 해보고 문서를 정리해서 보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무튼, 오늘 다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태연은 박경연에게 말했다.
“저녁 식사나 같이 하지.”
“그럴까?”
함께 이동한 곳은 역삼동 이면 도로에 위치한 작은 호프집이었다.
“굳이 이곳까지 온 이유가 있어?”
“우리 사원 부모님이 운영하는 곳이라서.”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방에서 건장한 체구의 중년인이 나와 반갑게 맞아준다.
“아이고 대표님 오셨습니까?”
“자리 있습니까?”
“물론이죠! 없어도 만들어드려야지. 제가 안내해 드리죠!”
구석진 곳이지만 더럽거나 찝찝한 느낌 없이 굉장히 아늑하고 깔끔한 위치였다.
“앉아 계시면 맥주하고 치킨 종류별로 다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아니, 그렇게까지 해주실 필요는 없고 후라이드와 500CC 두잔만 가져다 주시면 됩니다.”
서비스 해드리겠다. 그럴 필요 없다. 이러시면 안 된다. 잠시 옥신각신한 끝에 승자는 태연!
남들이 알게 되면 곤란할 수 있다는 말에 주인이 물러선 것이다.
그렇게 태연이 자리에 앉자 박경연이 묻는다.
“되게 친해보이는데, 진짜 단골인가봐?”
그런 것도 있고 이 가게 주인 내외 분의 딸이 우리 회사 기획팀 에이스 중 한 명이거든.“
“오호, 그래?”
“아무튼…….”
본론으로 들어갈 차례.
“스낵 엠파이어. 그거 박팀 기획이지?”
“………….”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 블레스 퇴사 직전 우리 집에서 같이 술 마시며 나눴던 이야기 중에 저 기획 비슷한 내용이 있었잖아.”
“그랬었나? 난 기억이 잘…….”
“술 취해서 내뱉은 소리라 그럴 거야. 하지만 난 똑똑히 기억해. 상당히 재미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했거든.”
“와…… 유팀, 이제보니 무서운 사람이네!”
질린 얼굴을 하는 박경연을 채근한다.
“다른 팀 게임들도 보니 박팀의 흔적이 가득하던데, 무슨 의도야?”
“의도는 무슨…….”
때마침 치킨과 맥주가 세팅됐다.
맥주잔을 가볍게 부딪히고, 시원하게 한 모금 들이키고 난 뒤 이야기를 시작한다.
“다들 열정적인 친구들이야. 배우고 싶어하는 의지가 가득하고.”
“내가 봐도 그렇게 보이더군,”
“우리 집에 데리고 와서 밥이나 술이며 막 퍼먹일 때도 있어. 지방에서 숙식비 정도만 가지고 올라와서 힘들게 살고 있는 친구들도 많거든.”
“음…….”
“처음에는 내가 교수라는 사실 자체가 적응이 안 되고 그랬는데…… 그렇게 계속 지내다 보니 제자로 받아들이게 되더라고. 그때 비로소 유팀 마음이 이해가 됐어. 유팀 사실상 피디 노릇 다하면서 팀원들 조금이라도 더 가르쳐주고, 먹이고…… 퇴사하면 좋은 곳에 보내주려고 애를 썼잖아. 당시에는 그게 이해가 안 됐어,”
“…………..”
“저 친구는 왜 저렇게까지 하는 걸까. 그런데 그때야 비로소 이해가 되더라고. 그래서 막 퍼주다 보니 그렇게 된 거지 뭐. 유팀도 그랬잖아? 최종학 씨 대박 낸 게임 해봤는데 그 시스템이며…… 다 유팀한테 배운 그대로더만.”
태연은 픽 웃었다.
박경연도 미소 지었다.
“같은 거야. 내 모든 것을 쏟아 부어 가르쳤으니 내 흔적이 드러나는 건 당연한 거고.”
“아쉽지 않아? 그…… 다른 건 몰라도 스낵 엠파이어는 조금 다듬으면 좋은 게임이 될 것 같던데.”
“그렇게 보였어?”
“응. 지금 그 상태로도 충분히 좋은 모바일 게임이었어. 문제가 있다면…….”
“뭔데?”
눈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인다.
“뭔데, 빨리 말해 봐. 애들한테 그대로 전해줄테니까. 응?”
“재촉 좀 하지마. 아무튼…… 문제가 있다면 굉장히 부산스럽고 중심이 잡혀 있지 않은 것 같다는 거야.”
“정확히.”
“캐릭터들이 어떻게 태어났고 무슨 배경 스토리가 있는지, 어떤 목적으로 뭉쳐서 모험을 하고, 다른 캐릭트들과 만나 어떤 관계를 맺게 되는 지.”
“아…….”
“너무 게임성에만 집중했어. 이것저것 다 넣고 버무린 것 까지는 좋아. 좋은데 메인 디시가 없이 소스하고 디저트만 만들어졌다는 느낌이 드는 거야. 캐릭터 구축, 관계성, 그리고 스낵 엠파이어가 탄생하기까지의 여정들을 더 집중해서 만들 필요가 있다는 거지.”
“어……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너무 거창해지는데…… 이건 그냥 귀엽고 아기자기한 게임이라고. 무슨 반지의 제왕이나 왕좌의 게임 같은 대서사시가 아니라.”
“아무리 귀엽고 가벼운 게임이라도 이런 밑작업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세계관을 명확히 표현할 수 없어.”
“세계관 설정은 지금도 충분히 해놓은 것 같은데…….”
“그 정도로는 안 돼. 더 철저히 해야지. 캐릭터들과 대사, 전반적인 분위기는 가볍고 유쾌하다고 해도 그 기반이 될 세계관 설정과 배경 스토리는 굉장히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어야 하고 기반이 튼튼하게 다져져 있어야 해.”
“…………..”
“귀여운 대사나 행동들이 개발자들의 즉흥적인 감각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치밀하고 철저히 구축된 설정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도록 해야 하는 거지.”
“그런가? 더 철저히 구축했어야 했나? 난 그 정도로도 차고 넘친다고 생각했는데…….”
“부족해.”
“음, 그렇군. 잠깐만 기다려.”
톡톡톡.
스마트폰을 빠르게 두드리며 태연의 조언을 기록한다.
“또, 또 해주고 싶은 말 없어?”
“저게 장르가 소셜 RPG잖아?”
“굳이 장르를 따지면 그렇겠지?”
“RPG는 있는데 소셜 요소가 굉장히 약하다는 느낌이야. 길드 하우스 길드 사냥, 길드 스킬…… 이 정도로는 뭔가 부족해. 뻔하기도 하고 기대도 안 돼.”
“음, 그건 나도 느끼고 있던 부분이었는데.. 어떻게 하면 될까?”
“흔히 팜류, 혹은 타이쿤 류라는 게 한참 전에 유행이 지났다고는 하지만…… 알고 보면 매니아 층이 두텁고 지금도 꾸준히 출시되는 장르야. 이 부분에 키워드를 두고 더 발전된 형태의 그림을 그리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
“예를 들면?”
“…………..”
태연은 빤히 쳐다보다가 한 마디했다.
“그건 작업자들이 알아서 해야지.”
“와, 이렇게 나온다고? 치사하게? 하던 말은 끝까지 해줘야지! 팜류, 타이쿤 류의 발전 형태라는 걸 생각도 해보지 않았는데…….”
“생각해보게 키워드를 줬잖아. 그러니까 지금도 계속 고민해 봐.”
“끄응…….”
박경연은 골치 아픈 얼굴로 중얼거렸다.
“과제가 갑자기 많아졌네.”
태연은 그런 박경연을 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
다음 날.
학교에 출근한 박경연에게 제자들이 모여 들었다.
“어떻게 됐어요?”
“같이 저녁 식사 하셨죠? 혹시 식사 자리에서 우리 게임에 대해 뭐라고 말씀 없으셨어요?”
“이거 프레젠테이션 통과하면 우리 어떻게 되는 거예요?!”
하나같이 기대감이 극에 달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같은 게임 교육원 교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박경연 교수님이 넥플 유태연 대표와 그렇게 친밀한 관계였을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저…… 박 교수님. 저에게 정말 좋은 아이디어가 있어서 그러는데…… 혹시 유 대표님하고 따로 자리를 좀 만들어 주시면 안 될까요?”
하나같이 안달이 나 있다.
그래도 이해는 간다.
유태연이 누군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거대한 게임 회사 대표이자 가장 잘 나가는 스타 개발자가 아닌가?
그런 엄청난 인물과 깊은 인연이 있다는 것은 정말 굉장한 일이다. 게임 교육원이나 학원의 교수들 중에는
좋은 기회가 있으면 언제든 복직할 의사가 있는 이들이 넘쳐나는 상황이다.
다들 모종의 뜻을 가지고 상담을 요청하거나 혹은 청탁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해는 하지만 적당히 좀 해야지!’
점점 스트레스가 몰려온다.
급기야는 자괴감까지 왔다.
‘아무래도 내가 유팀의 입지와 영향력을 너무 과소평가했던 것 같군.’
그저 제자들에게 좋은 기회를 주려고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을 불러오고 있었다.
심지어는 외래교수들과 원장까지도 난리였다.
자리를 만들어달라는 것이다.
“저, 죄송하지만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유태연 대표님이 워낙 바쁘신 분이다 보니…….”
원장에게는 차마 단호할 수 없었다.
“말이리도 한 번 꺼내보겠지만 너무 기대하지는 마세요. 원장님도 아시겠지만 그 친구가 워낙 바쁘잖아요!”
거절하더라도, 상대 심기 상하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그러면 뭐하나?
“잘난 척 하네.”
“유태연 대표 좀 안다고 어깨에 힘 들어간 거 봐.”
“내가 무슨 어려운 부탁한 것 아니고…….”
돌아오는 것은 무성한 뒷담화!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어쩌다가 상황이 이렇게 됐는지…….
‘신경 끄고 애들만 잘 가르치자.’
특히 졸업을 앞두고 프로젝트에 집중하고 있는 4학년 제자들!
지금이 중요한 시기였다.
멋진 게임을 완성하도록 잘 이끌어줘야 좋은 곳에 취업할 수 있다.
그래서 미친 듯이 개발에 몰입했다.
태연으로부터 피드백 이메일을 받은 이후부터는 그것을 아예 크게 프린팅해서 개발실에 붙여놓고, 하나 하나 체크해가며 작업을 했다.
마침내 두 번째 빌드 버전이 완성됐다.
“이제 됐다. 게임을 한 번 보내보자.”
박경연이 태연의 이메일로 게임 파일을 보내고 전화 통화를 하는 동안, 라이징 스톰 개발진은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제발…….’
‘이 게임 개발 계속 이어서 하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