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한 게임 개발자가 너무 유능함 115화
72. 단합
-이 기회에 썩은 사과를 모두 골라내야 한다.
-이런 기회 또 없다.
-게등위 조지기 서명 진행합시다!
-겜돌이들 모두 모여라. 여의도로!
이른 아침부터 수많은 유저들이 여의도에 모여들었다.
“줄 서세요! 질서를 지켜주세요!”
“쓰레기 아무곳에다 버리지 말고 여기 쓰레기 봉투에 버려 주세요!”
띠를 두른 자원 봉사자들이 각자 임무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들은 어느새 길게 늘어선 행렬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와, 벌써부터 이렇게 많이 모였다니…….”
“오늘 쉽지 않은 하루가 되겠어.”
유저들은 더욱 많이 모여 들었다.
뒤늦게 도착해서 그 광경을 보고 놀란 이들이 자원봉사자들에게 묻는다.
“대기 시간이 얼마나 되나요?”
“지금 줄을 서시면 두세 시간은 기다리셔야…….”
“헉!”
“……!”
경악하는 사람들.
끼리 끼리 온 이들이 당황한 얼굴로 서로를 보고 묻는다.
“어쩌지?”
“세 시간…… 기다릴까?”
답은 나왔다.
“기다리지 뭐.”
“오늘 이거하려고 시간 비운 거잖아. 줄 서자.”
늘어나는 행렬만큼이나 대기 시간도 더욱 길어진다.
무려 수천 명의 인원이 집결한 순간이었다.
“으…….”
“나 죽는다.”
얼마나 지났을까? 여기저기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자원 봉사자들도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중얼거린다.
“신기하네. 이 많은 인원이 모였는데 이렇게 질서정연할 수가 있다니…….”
“그나저나 배고프고 목도 마르고…… 물 없나? 아까 어떤 유저분이 기증해 주고 간 거 있잖아.”
“진작 다 마셨지.”
“아…….”
팔 다리도 아프고 배고프고 목도 마르고…… 아무 이득도 없는 일이었지만 모두가 꾹 참았다.
지금은 유저들이 단합력을 보여줘야 할 때였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때.
끼익.
트럭 한 대가 멈춰서더니 물, 음료수, 휴지, 간단한 식량 등을 내리기 시작한다.
“뭐지?”
“여기서 무슨 행사 있나?”
어리둥절하던 자원봉사원들은 그 물건이 자신들에게 오는 것을 보고 놀라 물었다.
“이, 이게 뭐예요?”
“어떤 기증자분이 제공하신 겁니다.”
“누군데요?”
“비밀입니다.”
“아…….”
“양은 충분하니 마음껏 드셔도 된다고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어떤 인심 좋은 유저가 지갑을 연 모양이다.
자원봉사자들이 밝은 얼굴로 외쳤다.
“감사합니다!”
“정말 고맙다고 꼭 전해 주세요!”
서명회장에 웃음꽃이 피는 순간이었다.
* * *
겨우 하루 만에 거의 일만 명에 달하는 인원이 서명을 하고 갔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이슈가 될 일이었는데, 태연이 다시 한번 불을 질렀다.
모 유력 언론사와의 공식 인터뷰 자리에서, 이 서명을 공식 지지하는 발언을 한 것이다.
게임 커뮤니티가 뜨겁게 달궈졌다.
-내가 보기에 어마어마한 양의 물품을 제공한 의문의 기증자. 태연이 형이 분명한 것 같다. 대략적으로 계산을 해봤는데 이게 돈이 어마어마하더라고.
└사실 나도 그런 생각했음. 당시에는 몰랐는데 서명 끝나고 돌아가면서 인터넷 검색해 보니 고급 호텔에만 제공되는 특별한 도시락이라고 하더라.
└그런 거였어? 어쩐지 맛있더라;;;
└태연이 형이든 누구든, 우리와 뜻을 함께해 주는 좋은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데 감동받았음. 하루 종일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누군가는 궁금증을 참지 못해 넥플 공식 홈페이지, SNS 계정을 통해 물었다.
-형, 의문의 기증자 태연이 형 맞죠? 그렇죠?
이와 같은 질문이 상당히…… 아니, 굉장히 많았다. 인증샷과 함께 기증품들의 가격이 대략적으로 추산되며 인터넷에서 큰 이슈가 됐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한 넥플 측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죄송합니다. 저희도 확인할 수 없는 사안이라 명확한 답변을 드릴 수 없습니다.
결국 의문의 기증자의 정체는 비밀로 남겨졌다.
그러나 서명 운동과 관련된 일체의 모든 내용은 점점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 * *
서명 운동을 기점으로 수많은 업계인들이 지지를 표명하기 시작했다.
-게등위 비위 의혹 규명은 당연히 철저히 해야 하고, 이번 기회에 게임산업진흥법률도 대대적으로 손을 좀 봐야 함.
-살다 살다 넥플이 이런 이슈에 총대 메고 나서는 꼴을 보게 되네. ㅋㅋ 아무튼 이번 사건은 나도 적극 지지한다! 게등위는 비위 의혹에 해명하라!
이 일에 오래전부터 관심을 갖고 있던 의원들이 부산을 방문했다. 그곳에 게임물관리위원회가 있었다. 참고로 그들은 이번 서명운동을 주도했던 인물들이기도 했다.
“그 말 많고 탈 많은 프로그램 한 번 봅시다!”
수년 동안 수십억의 혈세를 쏟아 부어 완성했다는 자체 분류 통합 관리 시스템!
이것저것 확인해 보던 이들이 황당한 듯 한 마디씩 던진다.
“이거 완전히 엉망인데요?”
“알려진 것 이상으로 개판입니다. 뭐 하나 제대로 작동되는 것도 없고…….”
처음 해당 사건이 모 지상파 언론을 통해 폭로된 이후 수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럼에도 프로그램은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보안된 것 없이 엉망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게등위 측의 반응은 뻔뻔했다.
“아, 돈이 없으니까 못 만들고 있는 거 아닙니까?”
“예산이 부족해서 그래요. 몇 번이나 신청했는데 계속 반려당했단 말이에요. 나보고 어쩌란 말입니까?”
해당 사건은 수많은 언론, 유튜버들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졌다.
유저들은 다시 한번 분노를 터뜨렸다.
-사람을 바보로 아는 건가?
-게등위의 존재 의의가 대체 뭐임? 내가 보기에는 없는 게 더 나은 것 같은데…….
-아오, 저 새X들을 그냥……!
* * *
“대표님.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누구죠?”
“그건 말씀 안 해주시고 대표님을 꼭 뵙고 드릴 말씀이 있다며…….”
말을 전해준 사람은 총무팀 여직원이었다.
항상 생글생글 잘 웃던 그녀가 곤혹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봅시다.”
“어, 유태연 대표님!”
정장을 입은 중년의 사내들이 있었다.
그중 한 명이 나서서 말했다.
“저 이런 사람입니다.”
한 장의 명함을 건네준다.
확인한 태연의 눈이 가늘어졌다.
‘게임물관리위원회.’
다시 한 번 상대를 확인했다.
칙칙한 피부와 보랏빛 입술. 광활한 땀구멍.
눈은 뱀같다.
‘원래 그렇게 태어난 게 아니라면…… 심성을 따라가는 거겠지.’
“조용한 곳에서 대화 좀 합시다.”
강압적인 음성에 태연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한 하루가 되겠군.’
본사 회의실에 들어서마자 헛기침을 터뜨린다.
“그래도 대기업 대표님이신데…… 집무실이 굉장히 소박하군요.”
“회의실입니다.”
“…….”
“녹차, 커피, 생수, 어떤 것이 마음에 드십니까?”
“시원한 녹차로.”
“저는 커피.”
“저는 물이면 됩니다.”
모든 회의실에는 목이 마르면 마시라고 음료 전용 냉장고가 비치되어 있었다. 요구한 음료를 건네 준 뒤 맞은편 자리에 앉은 태연이 말했다.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이 20분뿐입니다.”
그 말에 광활한 땀구멍의 사내가 불쾌한 듯 말했다.
“중요한 일이 아니면 좀 미루는 게 맞지 않나요? 부산에서 힘들게 찾아온 손님 이런 식으로 대접하는 거 아닙니다.”
“미리 연락 주셨으면 시간을 비웠겠지요.”
“아무리 그래도…….”
“18분 남았습니다.”
“…….”
분위기가 금방 싸늘해진다.
“유 대표는 우리가 달갑지 않나 봅니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약속이 있기에 우리를 이 지경으로…….”
“MBC 저녁 뉴스에 특별 초대 손님으로 출연합니다.”
“……!”
휘둥그레지는 눈동자.
“그 직후 방송국 국장님들, 사장님들과의 저녁 식사 약속이 예정되어 있군요.”
“…….”
“내일은 고용노동부 장관님. 문화체육부 장관님과 함께 식사 약속이 있고 모래는 청와대로 가서 대통령님을 접견할 예정입니다.”
줄줄이 쏟아지는 거물급 인사들과의 약속 내역에 잠시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대기업 대표이사는 한가한 자리가 아닙니다. 이렇게 시간을 내드린 것도 꽤나 무리한 일이라는 걸 알아주셨으면 좋겠군요.”
얼어붙은 상대를 앞두고, 손목시계를 확인한 태연이 깍지를 끼며 말했다.
“16분 남았습니다. 용건이 뭡니까?”
“그…….”
목이 막힌 모양.
냅다 냉녹차를 들이켠 그는 숨을 턱 내뱉은 뒤 에라 모르겠다 말을 내뱉는다.
“우리를 그렇게 적대하는 이유가 뭡니까?”
“네?”
“언론에서 우리를 막 비난하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혈세를 어떻게 했다느니, 무능하다느니…….”
“…….”
“우리를 그렇게 적대해서 좋을 게 하나도 없을 텐데요.”
강압적인 분위기.
그러나 지금 태연의 눈에는 기싸움에 눌리지 않으려 발악하는 쥐새끼로 보일 뿐이다.
태연은 냉철하게 말했다.
“나쁠 것도 없을 것 같군요.”
“……응?”
“버그라고 들어보셨습니까?”
“……?”
“프로그램 상의 결함이나 오류로 인한 오작동을 뜻하는 용어입니다.”
“그, 그 정도는 알고 있지.”
“저에게 있어 당신들은 버그와 같습니다.”
예상치 못한 모욕에 분노보다는 당황스러운 감정이 든다.
상대가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강렬한 돌직구를 던져왔기 때문이었다.
“버그를 발견하고 가만히 있을 개발자는 없습니다. 어떻게든 제거해 버려야 마음이 편안해지죠. 그래야 게임이 제대로 돌아가니까요.”
태연의 눈이 경멸을 담고 있었다.
“당신들을 보는 제 마음이 지금 그렇습니다. 가능하면 당장에라도 수정해 버리고 싶습니다.”
“말이 너무 심하군.”
“말이면 다인 줄 알아?!”
“힘들게 찾아온 손님에게 어떻게 그런 무례를…….”
연이은 모욕에 퍼특 정신을 차리고 목소리를 높인다.
“무례는 당신들이 저질렀죠. 저는 당신들이 만나고 싶다고 마음대로 볼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회의실 바깥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저는 장관님, 대통령님께 제안을 할 생각입니다. 당신들이 그렇게 해결하고 싶어 하는 청년 실업, 일자리 부족 문제를 내가 적극적으로 손을 보태서 조금이나마 해소해 주겠다.”
“……!”
“그러니 세상 쓸모없고 비리의 온상인 당신들, 게임물 관리 위원회를 눈에 안 보이게 처리 좀 해달라. 내가 그래야 속 편하게 일에 전념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바들바들 떨지만…… 그들은 아무 말도 못했다.
장관, 대통령이 거론된 이상, 그들이 준비해 온 모든 카드, 수단들은 무력화됐다고 봐도 좋았다.
“오늘 저녁 뉴스에 출연해서 본격적으로 당신들의 행태를 비판할 겁니다. 원래는 강도를 좀 조절하려고 했는데 지금 꼴을 보니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네요.”
시간을 확인하는 태연.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한다.
“시간 다 됐습니다. 전 이만 가볼 테니 부산까지 조심히 돌아가시길.”
문을 열자 수많은 직원들이 있었다.
“게임물 관리 위원회에서 오신 분들입니다. 귀한 손님이니 정중히 안내해 주세요.”
“네!”
덩치 크고 근육질에 귀가 만두 모양인 직원들이 들어왔다.
무시무시한 위압감에 흠칫 몸을 떤다.
직원들은 정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가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