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한 게임 개발자가 너무 유능함 110화
69. 마스 게임즈(1)
넥플 입사 이후 성태희는 수많은 직원들로부터 대시를 받았다. 같은 개발자뿐만 아니라 온갖 부서의 남자 직원들이 접근했다.
이것은 굳이 태연이 아니라도 많은 이들이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나도 그중 한 명이었어.”
그리고 당연하게도 거절당했다.
“일단 외모부터가 제 스타일이 아니었거든요. 스타개발자라는 명성도 부담스러웠어요.”
“그래도 포기할 수가 없었어. 형은 알겠지만…….”
최종학은 자랑스럽게 성태희를 보며 말했다.
“내 이상형이잖아.”
‘넌 예쁘면 다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하고 싶은 말을 꾹 억누르는 태연.
고백은 계속 이어진다.
“그래서 접근 방법을 바꿨지.”
“어떤 식으로?
접점이 없으니 접근 자체가 힘든 일이었을 텐데?
이어지는 대답이 다시 한번 상상을 초월했다.
“이영애 AD님부터 공략했지.”
“…….”
“그분은 내가 형하고 형제 같은 관계라는 걸 잘 알고 있잖아. 나에게도 어느 정도 호감이 있어서 호감작…… 이 아니라 마음을 얻는 게 그리 어렵지는 않았어.”
이영애에게 신뢰를 얻고,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받은 뒤 우회 공략을 시도했다고 한다.
“이영애 AD님이 내 은인이지. 내 진심을 알고 정말 제대로 지원사격 해주셨거든.”
업무, 혹은 다른 핑계로 같은 공간에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도 마련해 주고 최종학에 대해 칭찬도 꾸준히 해주고.
“계속 듣다 보니 세뇌가 된 건지…… 어느 순간부터 호감이 쌓이더라고요.”
결정적인 순간은 첫 회식 때였다.
“회식?”
“그때 나도 참석했었잖아.”
“아, 그랬지. 네가 오고 싶어 해서…….”
말을 하다 말고 멈칫한 태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
“꿍꿍이는 따로 있었군.”
“부정하지 않겠어.”
어깨를 으쓱하는 최종학.
성태희가 말했다.
“피디님이 그렇게 편하고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 상대는 처음 봤어요. 그때 그렇게 생각했어요. 아, 피디님이 저렇게 믿고 편하게 대하는 상대라면 좋은 사람이겠구나. 믿어도 되겠다. 괜찮은 사람 같다. 뭐 이런…….”
“…….”
태연은 끔찍한 소리를 들은 표정으로 최종학을 바라본다.
“이 녀석이 괜찮은 놈이긴 하지만 믿을 만한지는 잘…….”
“뭐? 아니, 이 형 보소. 형 넥플에 들어올 수 있었던 거 누구 덕분인지 말해볼까?”
“…….”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지금 형 성공 절반은 내 덕분이잖아! 그리고 무슨 일 있으면 제일 먼저 달려와서 걱정해 주는 사람이 바로 나였는데…….”
태연은 피식 웃고 말았지만 성태희의 두 눈동자는 휘둥그레졌다.
“그게 정말이에요?”
“어, 듣지 못했나 보죠?”
“네. 사실 지금도 피디님에 대한 이야기는 잘 안 해서…….”
“원래 종학이는 타인에 대한 이야기를 잘 하지 않습니다.”
“맞아요. 사실 그래서 더 호감이 갔던 것도 있었어요. 무슨 일을 당해도 절대 험담을 하지 않더라고요.”
서로에 열변을 토하는 모습에 태연은 생각했다.
‘신뢰가 두텁군.’
참 재미있는 인연 아닌가?
성태희와 최종학이라는 조합이라니.
‘태희 씨를 짝사랑했던 많은 남자들이 피눈물을 흘리겠군.’
언제까지 비밀로 할 수 있을까?
굳이 관여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한 가지는 물어봐야 할 것 같다.
“종학이 너, 결혼은 하고 갈 생각이냐? 아니면 그냥……?”
“어, 그게…….”
* * *
넥플에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성태희 씨, 최종학 피디님이랑 사귀는 것 같던데?
-뭐? 태희 씨랑 최종학 피디님? 진짜야?
-둘이 같이 다니는 거 목격한 사람이 많다더라. 아무리 봐도 평범한 관계가 아니었다고…….
-헐, 대박.
태연이 이 소문을 접한 것은 스튜디오 개발자들의 질문 공세 덕분이었다.
“피디님, 저 한 가지 물어봐도 돼요?”
“네. 말씀해 보세요.”
“태희 씨랑 최종학 피디님 정말 사귀는 거예요?”
“그런 소문이 퍼지고 있어요?”
“지금 목격담이 한둘이 아니에요. 굉장히 핫한 이슈에요! 우리 회사에서 존재감으로는 피디님 다음으로 강렬한 분들이잖아요!”
“그런가요?”
“그럼요! 그리고 최종학 피디님 성태희 씨, 두 분 모두 피디님하고 친한 분들이잖아요. 그래서 물어보는 거예요. 피디님은 진실을 알고 있을 것 같아서요!”
어느새 태연의 자리로 직원들이 몰려와 있었다.
대부분이 여직원들이었다.
남직원들은 자리에서 미어캣마냥 고개를 빼꼼 치켜든 채였다.
태연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건 제가 대답할 사안이 아닌 것 같군요. 당사자에게 물어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 * *
얼마 후 소문은 사실로 확정됐다.
-네. 사귀는 사이 맞아요.
성태희가 인정했다는 모양이다.
‘차마 최종학에게는 묻지 못한 모양이군.’
그도 그럴 것이, 넥플에서 최종학은 엄청난 입지를 가지고 있었다. 임원들, 심지어 회장조차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존재였으니.
“태희 씨, 요즘 회사 생활 어때요?”
점심 시간.
이영애 AD의 질문에 아트 파트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다. 성태희는 배시시 웃었다.
“요즘처럼 쾌적하고 행복했던 적이 없어요. 더 이상 귀찮게 구는 사람들이 없거든요.”
그녀의 고충을 잘 아는 팀원들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태희는 바로 얼마 전까지도 무수한 시달림을 받고 있었다.
“상대가 무려 최종학 피디님인데, 생각이 있으면 더 이상 개수작은 부리지 않겠네요.”
“잘됐다. 최종학 피디님 정말 멋진 사람인데…… 태희 씨 이제 회사 생활 편히 할 수 있겠어요!”
이곳에 있는 이들은 단순히 같은 팀이 아니다.
마음이 맞는 동료였다.
함께 멋진 작품을 만들기 위해 밤낮을 새며 웃고 울었던……. 태희가 어떤 시달림 속에 살아왔는지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들인 것이다.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고 축하해 주는 사람들을 보며 태희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판데모니움이 런칭되면 이분들하고…….’
그리고 그런 태희를, 이영애가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 * *
오후 업무 시작.
이영애가 성태희에게 말했다.
“저랑 잠깐 카페에서 대화 좀 할까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한다.
“먼저 들어가요.”
이영애의 첫마디는 다음과 같았다.
“종학 씨랑 같이 미국에 갈 거죠?”
“……!”
깜짝 놀라는 성태희.
“어, 어떻게 그 사실을……?”
“제가 넥플 엔터테인먼트 이사라는 사실을 잊으셨나 봐요. 마스 게임즈에 대한 내용은 이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아……!”
맞아. 그랬지.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하는 성태희에게, 이영애가 제안했다.
“오늘부터 저와 함께 기획, 프로그램 회의에 참석하도록 해요.”
“……네?”
“미국 회사는 한국과 많이 달라요. 실무를 잘하지는 못하더라도 게임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야 해요. 거긴 시키는 일만 하는 방식이 아니라 스스로 제안하고, 내부에서 TF팀을 계속 만들었다 해체하며 결과물 만들고 발표하는 식으로 일이 진행되거든요.”
“맞다. AD님 미국 게임 회사에 근무한 적 있으시죠?”
“개념 정도는 확실히 이해할 수 있어야 업무 대화에 참여할 수 있어요. 그리고 요즘 기획, 프로그램 공부하며 느끼는 건데…….”
“어? 기획 프로그램 공부를 시작하셨어요?”
“네. 남편이랑 같이요. 아무튼, 그러면서 느낀 건데 적어도 혼자 작은 게임 정도는 만들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어야 뭔가 제대로 할 수 있겠더라고요. 저도 지금까지는 게임을 겉핥기만 하고 있었던 셈이죠.”
이영애는 근래에 태연과 함께 <정령사 키우기>를 만들며 느낀 점들을 말해줬다.
“시키는 대로만 해서는 프로젝트에 중요한 사람이 될 수 없어요. 태희 씨는 AD가 되고 싶다는 꿈이 있잖아요?”
“네.”
“최근 닌텐도에서 이적해 온 한설아 AD님은 혼자서도 마리오 게임을 만들 수 있을 정도의 역량을 이미 갖추고 있더라고요. 정말 대단한 분이세요.”
“아…….”
“그 한설아 AD님이 마스 게임즈 아트 디렉터도 가계 될 텐데, 그분이 저하고는 비교도 안 되게 엄격하고 무서운 분이세요.”
“대화 해보셨어요?”
“대화만 해봤겠어요? 이미 친구처럼 지내고 있어요.”
역시 친화력 하나는……!
성태희가 보내는 존경의 눈빛을 담담히 받아넘기며 이영애가 조언을 계속했다.
“그분 밑에서 제 몫을 해내고, 인정받아 더 높이 올라가려면 프로그램과 기획…… 아니, 게임 개발 전반에 대한 높은 이해도가 필요해요.”
“아, 그래서…….”
“판데모니움이 런칭하기까지 시간이 좀 있으니 열심히 공부해요. 제가 옆에서 제대로 가르쳐 줄 테니까요. 알겠죠?”
성태희는 감동했다.
부하 직원을 위해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는 상사가 어디 있겠나?
울컥하는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대답했다.
“네!”
* * *
기획 회의에 들어온 성태희를 보고 태연이 물었다.
“태희 씨, 무슨 용건이라도 있나요?”
“아, 그게…….”
“제가 데리고 들어왔어요.”
옆에 앉아 있던 이영애가 말했다.
“앞으로 제가 가는 회의는 대부분 같이 들어오게 될 거예요.”
태연은 영문을 몰랐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자, 그러면 판테온 기획 회의를…….”
기획 회의가 끝나고 간단히 이유를 전해 들었다.
“태희 씨 곧 미국에 가잖아요. 그래서 개발 전반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주려고 제가 권유했어요.”
이영애가 진지하게 말한다.
“한설아 피디님 디렉팅 하는 거 봤는데, 진짜 엄격하던데요. 수준도 저보다 훨씬 높으시고…….”
“아트 실력은 이영애 AD님이 확실히 뛰어나지만 게임 디렉팅 전반은 한설아 AD가 확실히 굉장하죠. 최종학, 박명훈 같은 친구들과 저에게 같이 배웠으니까요.”
“아, 그래요?”
새삼스러운 눈빛에 태연이 물었다.
“왜 그런 얼굴로 보십니까?”
“이 정도면 게임 사관학교 차리셔도 성공할 것 같아서……”
“제가 잘 가르친 게 아니라 그 친구들이 대단한 거였죠. 자기 할 일만으로도 바빴던 시기였는데 본인들이 자처한 거였으니까요.”
이영애 옆에서 덩달아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태희에게 말했다.
“영어는 잘 하십니까?”
“어느 정도는 할 줄 알지만…… 비즈니스가 가능한 수준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공부 열심히 하셔야 할 겁니다. 게임 전반에 대한 이해도는 당연히 중요하고, 언어 능력 역시 현지 회사 적응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니까요.”
“아, 그러고 보니 피디님은 미국에서 마스 게임즈 차리고 안정화까지 완벽히 시키고 오셨다고 들었는데…… 아무 문제 없어요?”
“네. 저는 큰 문제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이영애가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짓더니 영어로 마구 질문을 던진다.
태연은 당황하는 기색 없이 능숙한 영어로 받았다.
워낙 어렵고 전문적인 용어들이 오갔기에 태희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테스트를 끝낸 이영애가 감탄했다.
“와, 정말 대단하신데요? 현지 엘리트 이상으로 영어를 완벽히 구사하셨어요. 이게 노력만으로 가능한 영역은 아닌 것 같은데…….”
“……”
“아무튼, 이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해요. 알았죠? 태희 씨.
“네! 어, 그런데 피디님에게 게임 만드는 거 배우신다고 하셨는데…… 그거 저도 같이 하면 안 돼요?”
“……?”
순진하게 묻는 태희.
“마침 다들 영어도 잘하시니까 영어 공부 할 겸 영어로 대화하며 같이 일하고 배우면 참 좋을 것 같아서…… 아, 제가 요리 하나는 정말 잘해요! 요리사급으로 할 자신 있어요! 식사 야식은 제가 무조건 책임질게요!”
반짝거리는 눈동자.
이영애가 흥미를 가지고 묻는다.
“괜찮지 않을까요? 어차피 사람도 필요한데…… 이 기회에 최종학 피디님까지 해서 우리 세 커플이 함께 게임을 만들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종학이까지 여섯 명이라…….”
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좋겠군요. 그렇게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