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한 게임 개발자가 너무 유능함 109화
68. 스타개발자 최종학(3)
모든 설명을 들은 최종학이 벌떡 일어서서 소리쳤다.
“이 사기꾼! 그런 일이 있었으면 진즉에 말했어야지!”
“지금은 내부가 어수선해. 어느 정도 정리가 되면 말하려고 했었어.”
최종학의 눈이 가늘어진다.
“그게 아니라 날 시험하려고 했던 거 아니야?”
“무슨 시험?”
“이 자식이 의리 있는 놈인가 아닌가를 보려고…….”
“…….”
말없이 바라보던 태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망상은 그쯤 해두고 일단 앉아. 다른 사람 보기 민망하지도 않냐?”
안 그래도 시선이 쏠려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사과하고 자리에 앉는 최종학.
혀를 차던 태연이 말을 이어간다.
“현시점에서는 누가 봐도 넷펀즈 대표이사 자리가 훨씬 좋은 제안이지. 넷펀즈는 이미 대기업이잖아.”
“그건 그렇지만 미래 가능성이…….”
“망할 수도 있지. 당장 엘크로스 Re 수익이 갑자기 떨어진다거나, 혹은 판테온, 판데모니움 성적이 예상보다 좋지 않으면 분위기를 바꿀 수도 있어. 이 정도는 너도 알고 있을 텐데?”
“…….”
무언의 동의.
태연은 그를 빤히 보며 말했다.
“내가 언젠가 말했지. 넌 꿈꾸는 소년이라고.”
“한계돌파 만들었을 때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지금도 그래. 넌 꿈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타입이지. 하지만 대부분은 안 그래. 만약 너 같은 상황이었다면, 주저 없이 넷펀즈 대표이사가 되는 길을 택했을 거다. 승낙하는 즉시 2만 주의 지분, 연봉 4억이 보장되는 거니까.”
“뭐…… 그렇겠지?”
“물론 어느 정도 예측은 하고 있었어. 네가 그런 길을 택하지 않을까? 하지만 예상일 뿐이지. 그리고 그런 선택은 내가 강요할 문제도 아니야. 내 생각에는 가진 건 미래에 대한 가능성뿐인 마스 게임즈 대표 자리 같은 거보다는, 넷펀즈 대표 자리가 훨씬 이득이었어. 그래서 굳이 말하지 않은 것도 있는 거야. 네가 좋은 길을 택했으면 했으니까.”
그리고 씩 웃는다.
“넷펀즈 대표이사를 2년 정도 해보고 마스 게임즈 대표가 되는 길도 있잖아.”
“그건 아니지.”
최종학은 단호했다.
“그런 기회는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니야. 그리고 분명 내가 아니라도 형이 원하는 포지션을 해줄 수 있는 인재는 많아. 만약 그 사람이 마스 게임즈 대표 임무를 잘 해내고 있었다면 어떻게 할 건데? 그 사람 밀어내고 나에게 기회를 줄 자신이 정말 있어?”
“음…….”
“설령 형이 기회를 준다고 해도 멀쩡히 자기 임무 잘 하고 있는 사람 쫓아낼 정도로 독한 사람이 되지 못해.”
“그 사람이 제대로 못 해낼 수도 있지.”
“형이 그런 사람을 중용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 사람 보는 안목은 특출나잖아.”
그 정도는 아니지만…… 태연은 부정도 못 한 채 씁쓸한 미소를 삼켜야 했다.
“아무튼…….”
최종학이 테이블이 가볍게 내려치고 상쾌한 얼굴로 웃는다.
“넷펀즈 제안 거절하기 잘했네. 나 그거 할게. 마스 게임즈 대표 자리.”
“정말?”
“응. 그쪽이 훨씬 마음에 들어. 그러니까 형과 내가 만든 게임 북미 유지 보수 전담하면서 트리플 A급 게임 만들 수 있게 해준다는 거 아니야?”
“그렇지.”
“딱이네. 내가 넥플에서 만든 게임 북미 수출도 그쪽을 통해 서비스된다는 뜻이잖아. 맞지?”
“그렇게 되겠지.”
“좋아. 마음에 들어. 한다.”
그리고 슥 묻는다.
“그러면 대우는 어떻게 해줄 거야?”
50만 불. 집과 차, 전담 비서 제공. 지분 2만 주.
“최소한 2년은 해줘야 되고, 1년 단위로 업무 평가 후 계약 갱신 여부 결정할 거다.”
“그런 건 어딜 가나 다 똑같네. 뭐, 좋아. 조건 굉장히 좋네.”
“다음 사항이 중요한 건데, 너 미국에서 근무해야 해.”
“……어?”
“유지 보수팀 관리해야 하는데 당연하지. 그리고 마스 게임즈는 미국 회사야. 오너는 나고.”
“아, 형이 오너야? 유 회장님이나 머큐리 게임즈 부사장 그 사람이 아니고?”
“두 기업으로부터 내가 투자받아서 미국에 설립한 회사니까.”
“아항…….”
“너 잘하면 지분 더 많이 주고 임원급은 보장해 줄 테니까…… 어때? 미국 갈래?”
“…….”
최종학은 고민했다.
‘미국이라…….’
“근무지가 정확히 어디야?”
“실리콘 밸리나 허드슨 야드. 두 곳에 머큐리 게임즈 사옥이 있어. 그중 하나를 택하면 돼.”
“워우, 둘 다 좋네. 뉴욕이냐 IT 성지 실리콘 밸리냐. 날씨 생각하면 실리콘 밸리 괜찮은데…… 난 대도시, 특히 뉴욕 특유의 분위기를 사랑하는 사람이란 말이지.”
“어느 쪽을 선택해도 나쁜 제안을 아닐 거야.”
“내가 생각해도 그래. 아, 집하고 차는…… 당연히 나한테 주는 거 아니지?”
“법인 소유지.”
“그러면 그렇지.”
“그래도 네가 계속 마스 게임즈 대표 자리를 유지할 생각이라면 사실상 네 소유나 다름없게 되는 거지. 집도 신경 써서 최대한 위치 좋고 규모 좋은 곳에 마련해 줄 거야.”
“…….”
최종학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 결정하기 어렵네. 이 부분은 조금 더 고민해 볼게.”
“참고로 당장 가는 건 아니야. 판데모니움 런칭 이후야.”
“당연히 그래야지. 아무튼 알았어.”
* * *
최종학은 또 다른 고민에 직면해 있었다.
‘미국이라…….“
가는 건 좋지.
일단 회사 미래가 참 밝다.
세계 최대의 게임 회사 머큐리 게임즈. 대한민국 게임 대기업 넥플의 합작.
오너는 지금까지 실패를 모르는 최고의 개발자 유태연! 회사 시작이 엘크로스 Re를 비롯한 북미 게임 유지 보수였으니 적자 위험도 없다.
‘거기에 회사 소재지가 미국이니, 미국의 엄청난 개발풀을 이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형을 제외하면 제대로 된 콘솔용 패키지 타이틀을 만들 줄 아는 사람이 없으니…….’
아예 그런 문화가 오랫동안 정착된 미국 현지 개발자들과 함께 협업하면, 꿈에 그리던 게임을 수월하게 만들 수 있게 된다.
‘여기까지는 참 좋단 말이야.’
문제는…….
휴대폰을 보며 머리를 긁적거린다.
누구에게도 아직 공개하지 않은…… 특히 넥플 사람들에게는 보여줄 수 없는 사진이 띄워져 있다.
‘같이 가주려나?’
여자 친구 이야기다.
‘지금 회사에 굉장히 만족스러워하고 있는 것 같던데…….’
일단 말이라도 해봐야겠지?
문자를 보냈다.
[오늘 저녁에 식사 같이 하자.]
금방 답변이 날아왔다.
[어디에서 볼까?]
[저번에 갔던 일식집 지하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어. 내가 차 끌고 갈게.]
[알았어~]
문자 메시지를 끝내고, 최종학이 중얼거렸다.
“어떻게든 설득해 봐야지 뭐.”
주위에서 쏟아지는 식사 요청을 모두 거절한 최종학은 차를 타고 약속 장소로 이동했다.
일식집 건물 지하 주차장에 검은색 캐주얼 차림에 야구 모자를 깊이 눌러 쓰고,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여성이 보였다.
‘저기 있군.’
미소를 머금은 채 조심스레 차를 몰고 간다. 차가 앞에 멈춰 서자 여성은 익숙한 듯 조수석에 탑승했다.
“어디 갈 거야?”
“삼성동 코엑스 부근에 있는 스카이라운지 레스토랑.”
“아, 첫 데이트 때 갔던 장소?”
“기억하네?”
“문화 충격이었거든. 아, 이런 곳도 있었구나 싶어서…….”
평소와 같이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했다.
최종학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하고 싶은 말 있어?”
“응?”
“분위기가 평상시와 다른데…… 내 말이 맞지?”
“어…… 달라? 뭐가? 어떻게?”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내 말도 몇 번이나 놓쳐서 다시 되묻고…… 뻔하지 뭐.”
그녀는 가늘게 뜬 눈으로 묻는다.
“설마 청혼……?”
“뭐? 에이…….”
“어? 그거 아니야?”
“그런 건 아니…… 응? 잠깐만, 아닌 게 아닌데?”
“……뭐라는 거야?”
역시 오늘 상태가 이상하다.
“아무래도 중요한 용건인 것 같은데…… 뭐야? 식사도 거의 다 했겠다. 말해줄 때도 되지 않았어?”
“음…….”
“설마 이별 통보…….”
“에헤이. 그거 아니야. 절대 아니야!”
정색하는 남자 친구의 모습에 배시시 웃는 그녀.
“그게 아니면 안심이고.”
“…….”
머뭇거리던 최종학이 말했다.
“나 사실 이런 제안을 받았었어.”
그렇게 시작되는 넷펀즈, 마스 게임즈에 대한 이야기.
놀라운 이야기였지만 그녀는 내색하지 않고 조용히 경청했다.
결과적으로 정석환 의장의 제안을 거절하고 마스 게임즈 대표이사직을 받아들였다는 이야기.
“문제는 미국에 가야 한다는 거야.”
“……뉴욕 어디?”
“실리콘 밸리나 뉴욕 둘 중 한 곳으로. 집, 차 모두 제공해 주고 연봉도 50만 불 주겠다고 하고…….”
“음…….”
“그래서 말인데…….”
우물쭈물하다가 눈치를 보며 묻는다.
“같이…… 갈래?”
그녀는 비로소 깨달았다.
청혼을 거론했을 때 최종학이 갑자기 혼란에 빠져 이상한 행동을 보였던 이유를.
그녀 역시 떨리는 음성으로 묻는다.
“오빠가 바라는 게 뭐야?”
“응?”
“오빠가 나에게 바라는 거.”
“…….”
“오빠가 생각하는 최선의 상황이 뭐냐고”
그녀의 크고 맑은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는 것을 확인한 순간.
최종학은 그녀에게 처음 고백했던 그때의 용기를 다시 한번 쥐어 짜냈다.
“너하고 결혼해서 같이 미국 가서 살고 싶어.”
“…….”
“난 너 없으면 안 돼.”
심장이 터질 듯 뛴다.
대답을 기다리는 이 순간.
최종학은 그녀의 작은 표정 변화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한참 후에야 그녀는 입을 뗐다.
“…….”
* * *
[저번 주에 갔던 서초동 일식집에서 같이 저녁 식사 하자.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최종학답지 않은 문자였다.
보통은 직접 찾아와서 말했을 테니.
‘바쁜가 보군.’
그럴 때도 있지.
근래에 최종학은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판데모니움 개발이 가속화되고 있었고 개인적인 미팅 약속도 많았던 것이다.
‘어디에 갈지 정한 모양이군.’
아마 그 용건이겠지.
퇴근 후, 태연은 약속 장소인 서초동 일식집으로 향했다.
‘아직 안 왔군.’
주문을 하고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누군가 들어온다.
최종학.
‘……혼자가 아니네.’
모자를 눌러 쓴 여자가 같이 있었다.
긴 생머리의…….
‘어딘가 익숙한데?’
실루엣이 분명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두 사람이 앞자리에 나란히 앉는 순간.
“형. 일단 내 여자 친구부터 소개할게.”
그리고 그녀가 모자를 벗고 어색한 미소를 짓는 순간.
“누군지는 형이 더 잘 알지?”
“…….”
“우리 결혼하기로 했고, 같이 뉴욕에 갈 거야. 그동안 사귀는 걸 감췄던 이유는…….”
“…….”
태연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성태희.
자신이 직접 뽑은 원화가이자 아끼는 부하 직원이었다.
엄청난 학력과 미모, 좋은 성격으로 넥플에서 인기도 굉장히 많은…….
‘태희 씨랑 종학이가?’
분명 접점이 없었을 텐데?
‘도대체 어떻게……?’
상상도 하지 못했던 사실에 태연은 극심한 충격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