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한 게임 개발자가 너무 유능함 99화
66. 그림을 배우는 이유
대표가 된 이후부터는 정시 퇴근이 힘들었다.
그래도 최대한 많은 시간을 넘기지 않고 퇴근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이 눈치 안 보고 빨리 퇴근할 수 있으니까.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오빠 왔어? 마침 식사 준비 끝났으니 잠시 기다려!”
“알았어.”
아내인 윤아와 함께 보는 오붓한 시간도 소중했다.
“난 여기서 조금 더 운동 좀 하고 갈게.”
“그래. 알았어.”
작업실 PC 앞에 앉아 오른손에 장갑을 착용하고 펜을 들어 올린다.
‘어제 어디까지 작업했더라?’
최신 파일을 골라 실행시키자 미완성 캐릭터 그림이 떠오른다.
‘오늘은 채색까지 끝내야지.’’
그림.
일러스트.
이것이 바로 태연이 공들이는 새로운 취미였다.
* * *
태연은 어려서부터 혼자 게임을 만들었고, 이로 인해 모든 파트의 작업을 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사림이기에 다 잘할 수 없었다.
그게 늘상 아쉬웠는데 팔찌의 존재와 경험치 상승 스킬 덕분에 상황이 바뀌었다.
공부하고 노력하면 역량이 증가한다.
아주 조금씩이지만…… 그게 중요하다.
재능 유무와 관계없이, 노력하는 만큼 능력치 상승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로 인해, 기획, 프로그램 등등. 아쉬웠던 분야 공부를 시작했고 그로 인해 게임 개발 역량이 꾸준히 상승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공을 들였던 분야가 바로 아트.
특히 일러스트였다.
‘예전부터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이 정말 부러웠지.’
그림에는 정말 재능이 없었다.
이것만큼은 아무리 노력해도 실력이 잘 늘지 않았다.
그런데 신비한 팔찌의 능력치 상승 옵션이 이 재능 문제를 해결해 줬다.
그래서 모방을 시작으로, 열심히 그림에 몰입했다.
아주 조금이지만 실력이 느는 것이 느껴지니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태연에게 그림은 연습이 아닌 게임과 같았다.
슥, 스윽.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됐다.”
마침내 그림이 완성됐다.
뿌듯한 얼굴로 모니터를 가득 채운 그림을 바라본다.
수많은 관중, 취재진이 가득한 경기장에서 리듬 체조를 하고 있는 윤아의 캐릭터 일러스트였다.
그림을 보는 태연의 눈빛이 감동으로 일렁였다.
‘내가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는 날이 오다니…….’
회사에서 함께 일하는 탑 일러스트들에게 미칠 정도는 아니지만, 어디 가서 빠지지 않을 훌륭한 그림이었다.
특히 사방에서 터지는 플래시 세례 한복판에서 당당히 연기에 몰입하고 있는 윤아의 표정과 동작의 디테일함은 정말이지…….
“와…… 이거 나 아니야?”
“……!”
그때 뒤에서 들려온 음성에 화들짝!
“오빠 이런 것도 할 줄 알았어? 이렇게 그림을 잘 그린다고?”
“어, 언제 왔어?”
“아까부터 보고 있었지. 오빠 그림 그리는 거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이렇게 잘 그릴 줄은 몰랐어.”
민망함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비켜 봐. 나 좀 제대로 보고 싶어.”
“으, 으응.”
멋쩍게 일어서서 의자를 양보해 준다.
자리에 앉은 김윤아가 그림을 확대해서 보다 상세히 확인한다.
“나 팬 아트 정말 많이 받은 거 알지?”
“그야 뭐…….”
방 두 개를 윤아의 전시장으로 쓰고 있었다. 전 세계 이름 있는 아티스트들로부터 선물 받은 그녀를 위한 작품들로 가득 채워진 공간이었다.
그곳에 정말 잘 그려진 그림들도 많았다.
“내가 그림 전문가는 아니라 디테일한 것까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안목은 있거든. 전시회도 많이 다녔고…….”
그림을 향한 윤아의 눈빛이 어느 때보다도 반짝거리고 있었다.
“이거 정말 잘 그렸어. 특히 내 표정과 동작 디테일이…… 이거 내 마지막 올림픽 결승전 장면 보고 그린 거지?”
“으응.”
그때 윤아는 엄청난 연기를 선보이고 압도적인 점수 차로 금메달을 획득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 중 하나를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이거 나 줘! 줄 거지? 응?”
“그야 뭐…… 그런데 어쩌려고?”
“자랑해야지! 이거 메신저에 파일로 보내줘.”
“파일로?”
“SNS에 올릴 거야. 빨리!”
“으응…….”
태연은 민망했지만 윤아가 저렇게 재촉하니 마지 못해 그림 파일을 보내줬다.
“잠깐 기다려 봐.”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윤아가 씩 웃었다.
“지켜봐. 엄청 신기한 일이 벌어질걸.”
드드드드드!
미친 듯이 알림 메시지가 쏟아진다.
“오빠 이런 거 처음 보지?”
SNS 게시물에 대한 피드백이 폭주하고 있었던 것.
“이렇게 올렸어.”
본인이 올린 게시물을 보여준다.
두 장의 사진이었다.
작업에 몰입 중인 장면을 뒤에서 촬영한 사진. 그리고 자신이 보내준 최종 결과물.
다음과 같은 코멘트가 달려 있다.
[우리 오빠의 깜짝 선물. 설마 그림을 이렇게 잘 그릴 줄은 몰랐어요. 놀랍기도 하고 감동스럽기도 하고…… 오빠 고마워. 사랑해!]
좋아요가 여섯 자리를 넘고 댓글 수는 네 자리를 넘었다.
“이렇게 새로고침을 하면…….”
갱신된 화면에서는 좋아요 수가 일곱 자리였다.
백만 개를 넘긴 것이다!
그 짧은 시간에!
SNS를 하지는 않지만 돌아가는 흐름은 잘 알고 있다.
이 정도 수치는 웬만한 아이돌 스타에게도 나오기 어렵다.
‘이런 게 가능한 건 윤아가 세계적인 스포츠 스타이기 때문이겠지?’
“댓글 봐. 다들 오빠 그림 칭찬하고 있어!”
-오, 정말 대단한 그림 실력이군요!
-게임 프로듀서라고 들었는데……원래 아트 출신이었나요? 실력이 상당합니다.
-대단하네요. 전문 일러스트레이터 못지않은 솜씨입니다.
더 이상은 얼굴이 화끈거려서 읽을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좋아요, 댓글 수가 비정상적인 속도로 상승 중이었다. 윤아는 알림 설정을 꺼버리고 말했다.
“그림 계속 그릴 거지?”
“그렇겠지?”
“그러면 이 기회에 SNS 시작해 봐. 기껏 좋은 그림 그렸는데, 여러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업로드해서 피드백 같은 거 받으면 기분 좋잖아. 보람도 있고.”
“음…….”
내 그림을 보여준다?
‘끌리는군.’
“어디 한 번 해볼까?”
“내가 도와줄게!”
윤아의 도움으로 계정을 생성했다.
아이디어는 (Love_YunaQueen001)
장난스럽고 대충 만든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도 않았다.
비슷한 이름의 팬 계정이 굉장히 많아서 정하는 데 고생깨나 했다.
“됐다. 아이디 예쁘지?”
“…….”
“왜 대답이 없어? 그 표정 뭐야? 싫어? 마음에 안 들어?”
“아니…… 예쁘고 좋네.”
“그치?”
“응.”
험악해지려던 표정이 다시 화사해졌다.
“앞으로 그림 그리면 제일 먼저 나한테 보여줘. 알았지?”
“그래. 알았어.”
“나 샤워하고 올게!”
묘한 미소를 날리며 욕실로 향하는 윤아.
‘위험했군. 아니, 아직 위험한 건가?’
머리를 긁적거리던 태연은 의자에 앉고 다시 윤아의 SNS 계정이 접속했다.
좋아요 : 1,744,667
댓글 : 566,443
“정말 어마어마하군,”
평범한 사람들은 상상도 못 할 엄청난 양의 피드백!
댓글을 천천히 확인해 본다.
아쉬운 점을 지적하는 것도 있고 무분별한 욕설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칭찬이었다.
하지만 태연이 주목한 것은 바로 이런 평가였다.
-프로 수준은 아니지만 그래도 상당한 실력이네요. 구도가 좋고 특히 표정, 동작 디테일이 좋습니다. 대상에 대한 애정이 잔뜩 묻어나 있어요. 그림에 재능이 있는 것으로 보이니 더 노력하면 훨씬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게 냉정하고 정확한 평가야.’
그림 좀 그릴 줄 아는 아마추어 수준!
‘윤아가 아니었다면 크게 주목받지 못했겠지.’
다시 펜을 잡았다.
‘더 잘 그릴 수 있도록 노력해 보자.’
목표가 있었다.
‘아트까지 완벽한 게임을 혼자 만들어서 출시해 보는 거야!’
* * *
회사에 출근하자 사방에서 말을 걸어온다.
“피디님 그림 그리신 거 봤습니다! 실력이 상당하시던데요?”
“아니, 왜 대표에 자리에 계시는 거예요? 지금 원화팀 사람 부족해서 고생 중인 거 뻔히 아시는 분이…… 빨리 합류하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가장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일러스트레이터 출신들이었다.
홍민석이 예의, 능글맞은 미소로 다가와 말한다.
“월 십만 원!”
“……?”
“한 달 수업료입니다. 제가 빠르게 프로 일러스트레이터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와하핫!”
그는 장난으로 던진 말이었겠지만, 태연은 진심으로 혹했다.
‘과외를 받으면 실력이 빠르게 늘겠지?’
마침 집도 가깝겠다.
이거……?
“어? 정말 해보시려고요?”
태연이 반응에 홍민석이 깜짝 놀란다.
“홍민석 AD님은 제가 아는 한 최고의 원화가니까요. 가르치는 실력도 뛰어난 편이죠.”
“그, 그야 뭐…….”
“정말 10만 원을 드리면 절 실력 있는 프로 원화가로 만들어주시는 겁니까?”
“……네?”
“진지하게 고민 중입니다. 정말 가능합니까?”
그제야 홍민석이 주춤했다.
정말 농담이 아니었던 것이다.
“에, 에이…… 아무리 그래도…….”
필사적으로 회전하는 두뇌!
“월 10만 원은 조금…… 그냥 장난으로 던져본 거라서…….”
현역 최고 실력자의 과외.
잘만 하면 될 것 같은데?
태연의 승부사 기질이 번뜩였다.
“일주일에 한 번, 한 시간씩 월 백만 원! 식사 제공!”
“……!”
“장소는 편한 대로 정하셔도 됩니다. 우리 집에 오셔도 되고 제가 방문해도 되고…….”
“으으…… 자, 잠깐만요. 갑자기 조건이 너무 좋아지는데…….”
홍민석 AD의 그림 과외?
생각해 보니 굉장히 좋은 행운이었다.
“이백만 원!”
“하겠습니다!”
거래 성립!
“토요일 오전 열한 시에 한 시간 과외 하고 점심 식사를 집에서 같이 하시죠. 이영애 AD님도 같이 오시면 좋고요.”
마침 옆에 다가온 그녀에게 묻는다.
“어떻습니까?”
“전 찬성! 이 기회에 우리 체조 여신님과 친해질 수 있다면 굉장히 좋은 일 같은데요?”
“그, 그런가? 그걸 생각 못 했네. 체조 여신님과의 친분…… 으음!”
태연이 못을 박는다.
“한 달에 한 번 바비큐 파티를 하는 것도 좋을 것 같군요. 제 아내가 그런 자리를 참 좋아합니다.”
“큽, 바, 바비큐 파티…….”
“가끔 부부 동반으로 여행을 가는 것도 좋겠군요. 안 그렇습니까? 이영애 AD님.”
“와, 재미있겠어요! 전 할래요.”
결국.
“으으……!”
탁!
홍민석이 힘껏 테이블을 내려쳤다.
“콜! 토요일 오전 열한 시. 부부 동반 방문!”
“좋은 거래였습니다.”
거래 성립의 의미로 악수를 하는 두 남자.
이 같은 상황에 이영애가 고운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식사 시간.
“지금도 충분히 준수한 실력인데 이제 와서 진지하게 배우려는 이유가 따로 있는 겁니까?”
“음…….”
이 사람들이라면 말해도 되겠지?
“취미 삼아 다시 한번 1인 개발을 해보려고 합니다.”
“1인 개발이요?”
“이제 와서요?”
“팀이 함께 하는 것도 재미있지만, 혼자 개발하는 것도 그 나름대로의 맛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학창 시절부터 만들어 둔 수많은 게임 기획서들을 살짝 공개한다.
“와…….”
“이렇게 많이…….”
태연이 게임 개발에 얼마나 미쳐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 중 하나였다.
태연은 살짝 들뜬 얼굴로 말했다.
“제 부족한 아트 실력 탓에 개발을 포기해야 했던 기획들이 몇 개 있습니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개발해서 구현해보려고 합니다.”
꺼내 든 것은 방치형 모바일 게임.
“정령사 키우기입니다.”
어설펐던 실력으로 그린 컨셉 아트들도 공개했다.
“육성 시뮬레이션과 방치형 RPG를 결합한 형태로, 작중 플레이어가 숲에서 주운 엘프 소녀를 훌륭한 정령사로 성장시키는 게임이죠.”
신나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점심 시간이 다 지나갔다.
혼자 일방적으로 떠드는 상황이었지만 홍민석, 이영애 부부는 흥미롭게 경청 중이었다.
“……대략 이런 기획입니다.”
“재미있겠다. 정령과 양녀인 엘프 소녀 디자인들이 중요하겠네요. 최대한 귀엽고 사랑스러워야겠어요.”
“아무래도 그렇겠죠.”
“그거 혼자 하시려면 힘들 것 같은데…… 셋이 하면 어떨까요?”
“셋이요?”
“사실 우리도 게임 기획, 개발을 진지하게 공부 중이었는데 좀 어려운 부분이 많아서…… 이렇게 해요! 피디님이 우리에게 개발을 가르쳐 주시고, 우리는 피디님께 아트를 가르쳐 드리고. 그러면서 셋이 만들어 보는 거예요!”
“오오, 그거 재미있겠네.”
괜찮은…… 아니, 재미있을 것 같은 제안이었다.
“승낙하시면 개발을 배우는 대가로 그 그림 과외비는 받지 않을게요!”
“……응?”
홍민석이 당황해서 쳐다보자 이영애는 웃는 얼굴로 옆구리를 강타했다.
“컥!”
“어때요?”
태연은 굉장히 고통스러워하는 홍민석을 보며 땀을 삐질 흘렸다. 그리고 대답했다.
“그, 그렇게 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