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한 게임 개발자가 너무 유능함 91화
61. 엘 크로스 재오픈(3)
들려오는 소문이 심상치 않았다.
-엘 크로스가 환골탈태 수준으로 바뀌었다더라!
-테스트 중인 넥플 본사 직원들의 말에 의하면, 이제 비로소 ‘수백억 제작비의 대작’이라는 타이틀에 적합한 게임이 됐다더라.
-게임이 너무 재미있어서 다들 게임만 한다고 업무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더라.
‘그럴 리가 없는데…….’
송재희는 침음성을 삼켰다.
그는 게임 개발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겨우 1년밖에 안 되는 시간으로는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을 텐데…….’
토요일 오후 다섯 시 오십오 분.
‘시간이…… 부족하군.’
넷펀즈와 미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송재희는 시간을 확인했다.
‘카페로 들어갈까?’
주변에 보이는 한산한 카페로 들어가 음료를 하나 주문하고, 구석진 자리에 앉아 스마트폰을 꺼내 든다.
접속한 사이트는 엘 크로스 공식 홈페이지.
메인 스트리밍 창에 넥플 게임 광고 영상들이 재생되고 있었다.
무심하게 쳐다보며 시간을 체크한다.
‘슬슬…….’
여섯 시 정각.
영상이 전환됐다.
-저벅, 저벅.
어둠 속에 한 남자가 걸어 나온다.
배경과 대조되는 새하얀 순백의 정장.
‘저렇게 키가 크고 비율이 좋았던가?’
착각이 아니라면…… 몸이 이전보다 훨씬 좋아진 것 같다.
단순히 근육량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육체의 밸런스가 이전에도 좋은 편이었지만, 지금은 그때보다도 훨씬 더 좋아졌다.
그래서 하얀 정장도 저렇게 잘 어울리며 누가 봐도 감탄이 나올 만큼 멋진 자태를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게임 개발자 유태연입니다.
이제는 시그니처가 되어버린 인사말로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한다.
-오늘 여러분은 이 자리를 통해 놀라운 변화를 목격하게 될 겁니다.
어색함 없이 자연스러운 오프닝 멘트.
곧은 시선이 카메라를 향하고, 멘트에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적절한 제스처를 취해 보인다.
살짝 흥분이 담긴 음성이 지켜보는 이들을 덩달아 흥분시키며 기대감이 생기도록 만든다.
‘프레젠테이션의 달인이라더니…….’
손영상 이사가 해줬던 말이었다.
그때는 내심 코웃음을 쳤지만 이렇게 보니 알겠다.
‘그 말이 과장이 아니었군.’
이번 쇼에서 태연의 역할은 분명했다.
진행자.
멘트를 통해 자연스러운 흐름을 일으켜 특정 항목에 대한 기대감을 일깨운다. 적절한 시기에 해당 담당자, 이를테면 각 팀장과 파트장들을 소환해 담당 분야에 대한 궁금증을 풀 수 있도록 한다.
‘애플 프레젠테이션을 그대로 베꼈군.’
코웃음을 쳐보지만, 내심 알고 있다.
진행 방식을 따라 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쇼 자체에 대한 몰입감을 만들어내는 것은 완전 다른 영역의 일이라는 것을.
그리고.
-핵앤 슬래시, 쿼터뷰 방식을 버렸습니다. 숄더뷰 액션 MMORPG로 바꿔 버렸죠! 말만 들어서는 감이 잘 안 오죠? 자료 화면을 보시죠. 제가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새 인재들을 발굴했다.
‘저 사람, 저렇게 말을 재미있게, 잘하던 사람이었던가?’
물을 만난 물고기마냥, 신나게 입을 놀리며 전투 시스템을 설명하는 개발 책임자를 바라본다.
기억 속에 그는 굉장히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이었다.
‘물론 당시 스튜디오 분위기가 그런 걸 강요했던 것도 있지만…….’
그래도 저렇게, 반전에 가까운 모습을 숨기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쇼맨십이 좋은 게 다가 아니다.
-이런 RPG게임에서 전투는 핵심 중의 핵심이고, 몰입감을 끌어올리는 결정적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 오리지널 버전은 아쉬운 점이 많았죠. 이 중요한 전투를 그저 아이템 파밍을 위한 수단으로만 적용했으니까요.
프로페셔널했다.
이게 왜 좋고 저건 어떤 점에서 아쉽고.
이런 구분도 명확하며 그것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설득시킬 줄도 알았다.
간결하면서, 재미있는 말주변으로 말이다.
‘말 그대로, 환골탈태를 해버렸군.’
내가 만들다가 버린 그 게임이 아니다.
시스템은 말할 것도 없고, 아트도 자세히 뜯어보니 많은 면에서 차이점이 있었다.
‘최적화를…… 정말 과감한 방식으로 진행했군.’
송재희는 알 수 있었다.
‘저건 따라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엄청난 확신, 그리고 실력과 배짱을 가진 사람만이 추진할 수 있는 방식이다.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과감하게 날리고, 자신이 만들어낸 큰 흐름에 맞게 변형, 가공하는 것.
‘나도 저런 걸 할 줄 아는 디렉터가 되고 싶었는데…….’
신화 온라인 개발팀에 합류하고, 당시 메인 디렉터들을 보면서 수백 번도 했던 생각이었다.
이후로도 볼거리가 많은 내용이 계속 이어졌지만 송재희 피디는 그 너머,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내가 저렇게 했어야 했는데…….’
볼수록 괴로워져서 결국은 방송을 꺼버렸다.
아예 휴대폰을 한쪽으로 밀어뒀다.
그는 괴로운 표정으로 얼굴을 감쌌다.
“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어.”
어쩌면 ‘그’도 이 사실을 알고 그렇게 말했던 것이 분명했다.
-바로 대형 프로젝트를 맡기보다는 우리가 확보한 IP를 가지고 스마트폰 게임을 만들어 보는 게 어때?
당시에는 무시당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오히려 현명한 제안이었다.
“…….”
그는 휴대전화를 들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준영아. 아까는 미안했다.”
넷펀즈 사업팀장 전준영.
-아니야. 나야말로 미안했어. 네 심정을 조금 더 배려하면서 말을 했어야 했는데……. 사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 뭐였냐면…….
“말할 필요 없어. 무슨 의도였는지 이제야 알았으니까.”
-…….
잠시 침묵하던 송재희는 결의가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제안했던 스마트폰 게임, 내가 한 번 만들어 볼게.”
다시 시작해 보자.
차곡차곡 실력과 경험을 쌓는 거다.
‘그래서 나도 언젠가는…….’
* * *
엘 크로스 Re 프레젠테이션이 끝나고 게임 커뮤니티는 하루 종일 떠들썩했다.
-게임 진짜 많이 바뀌었더라. 아예 다른 게임이 되어 버렸던데?
└버그 잡고 그래픽 디테일 떨어지는 수정하고 콘텐츠 보완하고…… 그 정도만 생각하고 있었거든. 그런데 상상 이상의 변화라 뒤통수를 맞은 기분도 들었음;;;
└각 파트 개발자들이 직접 나와서 설명해 주는 거 좋더라. 우리나라 게임 업계에서는 잘 쓰지 않는 방식이잖아. 뭐가 어떻게 바뀌었고 어떤 의도로 작업한 건지 제대로 설명해 주는 게 좋았음.
공통된 의견은 다음과 같았다.
-지금까지 분위기는 좋다. 이제 게임만 좋으면 돼!
‘바꿔 말하면 게임이 재미없으면 다 소용없다는 거지.’
이 엘 크로스 Re도 재미가 있다면,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켜 줄 정도가 된다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다.
‘자신 있어.’
그만큼 열심히 만들었다.
모든 개발팀이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최선을 다해준 덕분에 생각 이상의 결과물이 나왔다.
사내 테스트가 끝냈을 때, 넥플 본사에서 이례적으로 항의가 날아왔다.
한창 재미있게 하고 있는데, 캐릭터에 애정을 갖고 열심히 키워놨는데 갑자기 이러기가 있냐는 것이다.
태연과 엘 크로스 개발팀에게는 이보다 더 큰 칭찬은 없었다.
이로 인해 모두 자신감이 붙었다.
요즘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동접이 얼마나 나올까?”
“최소한 아틀란시아 최고 동접 기록은 깨야지. 난 70만 본다!”
“겨우? 난 80만 명!”
이런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돌아다녀도 비웃거나 하는 이들은 없다.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잖아?!”
오픈 베타 서비스까지 일주일.
그동안 사내 테스트를 통해 얻은 버그를 모두 없애 버리고, 최대한 깔끔하고 단정한 상태로 게임을 준비한다.
“저 대표님만 믿고 내일부터 프로모션을 시작하겠습니다.”
마케팅 팀장이 말했다.
“서울 어떤 곳을 가든 우리 게임 광고를 볼 수 있게 될 겁니다.”
* * *
오픈일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이 피부로 체감되고 있었다.
“아니, 여기에도 우리 게임 광고가 있어?”
“와, 이렇게까지 했던 적이 있었던가?”
“이전 흑역사를 지우겠다고 칼을 갈았구나!”
출근길에 오른 넥플 직원들은 정말 어디를 가도 보이는 엘 크로스 광고에 혀를 내둘렀다.
지하철 내외부. 건물 외벽. 시내 전광판 등등.
인터넷과 각종 인기 있는 앱은 물론이고 심지어 카페 체인점에서도 게임이 광고되고 있었다.
특히 사람이 많이 몰린다는 잠실, 명동, 강남, 광화문 지하철과 버스는 온통 엘 크로스 광고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넥플 마케팅팀에서 엘 크로스 광고에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정작 엘 크로스 팀의 분위기는 가라앉은 상태였다.
태연의 다음과 같은 말 때문이었다.
“이제 슬슬 다음 업데이트 준비에 전념합시다. 런칭 성적이 좋아도 다음 업데이트에서 미진한 모습을 보이면 아무 소용이 없으니까요.”
맞는 말이다.
콘솔도 아니고, 온라인 게임에서 다음 분기 업데이트 준비는 무엇보다 중요한 사항이었다.
디데이 3일 전.
이태영 사업 총괄이 진지하게 면담을 요청하더니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국 거대 퍼블리셔들이 엘 크로스에 관심이 많더라. 너하고 자리 좀 만들어달라고 난리인데, 어떻게 할래?”
“…….”
“청룡그룹도 있었는데 그쪽은 거절했어. 급이 떨어지거나 뒤가 구린 곳도 모두 쳐냈고. 지금 염두에 두고 있는 곳이 업계 2위, 4위, 6위. 이 세 기업인데…….”
이태영 이사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태연의 표정이 냉담했던 것이다.
“너 진짜 중국 시장에는 아무 관심이 없구나?”
“이미 서비스 중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새로 서비스될 게임들은 중국 시장을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고 있습니다.”
“검열 때문에 그래?”
“그런 이유도 있지만…….”
태연은 담담하게 말했다.
“중국의 돈맛을 알게 되었을 때의 부작용을 우려한 것도 큽니다. 결국 모든 개발 방향이 그들의 성향에 맞춰지게 될 것인데…… 그건 제가 원하는 길이 아닙니다.”
“…….”
“이건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지금 중국 정부의 성향으로 봤을 때, 문화 규제는 더욱 심해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실제 판호 발급이 급격히 줄고 있지 않습니까?”
“뭐, 그건 그렇지.”
“안 그래도 단점이 많은 시장입니다. 거기에 국가 차원에서 외부 회사의 진입을 막는데 굳이 비집고 들어가야 할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포기해야 하나?
하지만 냉정하게, 수익적인 측면만 고려하면 설득을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이태영 이사였다.
중국 시장에서 대박을 친다면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할 엄청난 거금이 들어올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서두를 필요는 없지. 정식 서비스 후 분위기나 매출 추이를 지켜본 뒤에 다시 설득해도 늦지 않아.’
성적이 좋으면 중국 회사에서 더 열을 내며 달려들 것이다. 조건도 유리하게 받아낼 수 있고.
“알았다. 그러면 이 일은 잠시 접어두도록 하자.”
태연은 그의 심중을 어느 정도 파악했지만 우선은 이대로 넘어가기로 했다.
대표 입장에서 그의 마음을 분명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돈은 아무 죄가 없기 때문이지.’
시간이 흘러.
마침내 엘 크로스 Re의 오픈 베타 테스트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