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한 게임 개발자가 너무 유능함 89화
61. 엘 크로스 재오픈(1)
근래에 태연이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게임은 엘 크로스와 판데모니움이었다.
그중에서 특히 엘 크로스에 쏟는 시간이 많았다.
판데모니움은 아트 리소스만 새로 교체하면 되지만, 엘 크로스는 전체를 뜯어고쳐야 했기 때문이었다.
태연이 가장 먼저 지시한 것은 최적화 작업이었다.
“쓸데없이 디테일한 부분은 모두 날려 버리고 콘텐츠 동선에 불필요한 동선은 충돌박스와 오브젝트로 막아버립시다.”
엘 크로스 발적화의 근본적인 문제는 레벨 디자인이었다.
“이건 콘솔 오픈 월드 게임이 아닙니다. 세계관, 시나리오에 합당한 역할극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해줘야죠. MMORPG니까요.”
태연의 MMORPG 게임에 대한 철학은 확고했다.
“우리는 시나리오 연출에 따른 흐름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합시다. 역할극은 무대 위로만 한정 지어야죠.”
필드 지역의 40%에 해당하는 리소스들이 날아갔다.
황량하게 느껴질 정도로 펼쳐졌던 공간 중, 퀘스트 동선에 너무 크게 벗어난 지역은 모두 차단되었다.
이것만으로도 렉이 크게 줄었고 타오를 정도로 가동하던 그래픽 카드들도 잠잠해졌다.
“쓸데없이 디테일한 모델링과 텍스처 스팩도 내립시다.”
그다음으로 신경을 쓴 부분은 ‘전투’였다.
“타격감을 최대로 올립시다. 전투에 대한 재미를 최대한 끌어올려 봅시다.”
태연이 처음에 개발팀에 합류하자마자 했던 말이 핵앤슬래시의 특징인 쿼터뷰를 버리겠다는 이야기였다.
“제가 추구하는 엘 크로스는 아저씨들이 담배 피우며 한 손으로 마우스만 클릭하며 즐기는 그런 게임이 아닙니다.”
이건 신화 온라인의 특징이었다.
처음에는 누구라도 쉽고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게임을 만들겠다는 의도였지만, 갈수록 방향이 변질되어 소수의 헤비 과금 유저들에게 모든 개발 방향이 맞춰졌다.
태연은 그걸 엘 크로스에서도 적용하려고 했던 것이 문제점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런 게임이라면 굳이 신화 온라인 시리즈를 버리고 갈아탈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요즘 시대에 맞지도 않았다.
“거두절미하고, 게임에서 타격감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어떤 개발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내 캐릭터가 몹을 타격하는 순간의 사운드, 이펙트 같은 것들이 아닐까요?”
“틀린 말은 아닙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타격감은 감성의 영역이라 정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디렉터라면 확고한 정의를 내려, 팀원들에게 개발 방향성을 구체적으로 지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태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작. 타격 애니메이션. 사운드. 이펙트. 피격 애니메이션. 데미치 수치.
“저는 타격감을 이렇게 여섯 가지의 단계로 구분 짓겠습니다.”
기존 쿼터뷰 방식에서는 많은 과정들이 생략되거나 크게 축약됐다.
사냥의 목적이 사냥 그 자체의 즐거움보다는 아이템 파밍에 중점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돈 많이 써서 강해졌으니 빨리 적들을 쓸어버리고 좋은 아이템을 먹어야 하지 않겠나?
하지만 태연은 완전히 다른 방향을 제시했다.
“결국 키보드와 마우스를 활용한다는 점에서는 종전과 크게 다를 게 없어 보이겠지만, 이 같은 사항들을 고려해서 섬세하게 설계한다면 유저는 자신이 실제 전투를 하는 기분을 느끼게 될 겁니다.”
마치 그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몰입감!
“특히 피격 애니메이션은 굉장히 중요한 요소입니다. 내 행동에 대한 결과니까요. 반응이 리얼할 수록 저 역시 그에 걸맞은 기분을 느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끄덕끄덕.
“이 부분을 염두에 두고 전투 리뉴얼 작업을 진행하도록 합시다.”
말이 쉬워 전투 리뉴얼이지, 결국 스튜디오 모든 파트가 동원되어야 하는 대공사였다.
그중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 애니메이션 파트장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이런 작업들을 1년 안에 모두 해낼 수 있을까요?”
태연이 웃었다.
“할 수 있습니다.”
변한 것은 개발 내용뿐만이 아니었다.
스튜디오의 분위기도 크게 바뀌었다.
“점심 뭐 먹을까요?”
오전 11시 45분경에 갑자기 울려 퍼진 외침.
여성 기획자에게 시선이 집중됐다.
맞은편 파티션에 떠오른, 호빵을 연상시키는 외모라고 해서 호빵맨이라 불리는 시스템 파트장이 말했다.
“어제 퇴근할 때 보니 뒷골목에 라멘집 생겼더라고요. 아오모리라고, 일본 유명 체인점인데…….”
“아, 거기! 나 알아요! 일본 여행 갈 때마다 찾는 곳인데, 우리나라에도 들어왔구나! 나 거기 가야겠다. 같이 갈 사람?”
“어, 그러면 저도 같이…….”
이와 같은 대화가 가능해진 게 첫 번째 변화라고 할 수 있었다.
송재희 PD를 비롯, 신화 온라인 출신들이 중추를 장악했던 시절에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살얼음판 같았고, 모두가 항상 신경질적이고 예민했다.
작은 실수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발언은 정식 회의를 통해서만, 그것도 기획서를 완벽하게 준비한 상태에서 진행해야 했고, 조금이라도 미진해서 실수라도 하면 그날은 지옥의 시작이었다.
과거 대기업 못지않게 경직되고 지나칠 정도의 원리원칙이 깔려 있었던 것.
태연이 들어온 뒤로는 이 같은 분위기가 사라졌다.
누구라도 자유롭게 의견을 낼 수 있었고, 태연이 배분해 준 업무만 잘했다면 나가서 커피를 마시든, 오락실에 가서 오락을 하고 돌아오든 문제를 삼지 않았다.
가장 큰 변화라면 수시로 게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빈도가 늘었다는 것이다.
“아, 아까 맵에 자꾸 빠지는 현상 체크한다고 돌아다니는데 분명 진입 구간인데 못 들어가는 곳이 있더라고요.”
“네? 그래요? 알려주세요! 제가 확인해 보고 바로 수정할게요.”
이전이었다면 서로 다른 파트 사람들이 스튜디오에 모여 사담을 나누는 경우도 굉장히 드문 일이었다. 더욱이 그것이 서로의 담당 분야에 대한 지적이라면!
강남 사옥으로 옮긴 탓에 개발 환경은 판교 본사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개발 분위기가 180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뀌니 사람들은 만족하며 회사 생활을 했다.
점심 식사 중, 한 개발자가 느닷없이 다음과 같은 말로 이목을 끌었다.
“참 신기하죠? 업무량이 줄지 않고 오히려 더 많아졌는데 갑갑하고, 막막하고, 힘들고…… 그런 느낌은 전보다 훨씬 줄었으니까요.”
콘텐츠 파트장이 말했다.
“그게 바로 운전할 때 내비게이션이 있고 없고의 차이예요.”
모두가 그에게 시선을 주목한다.
“송재희 PD 때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었어요. 그래서 정확히 하고 싶은 게 뭐야? 신화 온라인보다 발전된 게임이라는 게 대체 뭔데?”
“오, 맞아. 저도 그 생각 많이 했었어요.”
사람들이 동의한다.
이에 힘을 얻은 콘텐츠 파트장이 목소리를 높인다.
“이게 다 송재희 PD가 디렉터로서 경험이 부족해서 그래요. 본인이 하고 싶은 건 있는데 그래서 그걸 어떻게 설계하고 조립해야 할지를 모르는 거죠. 프로그램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트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맞아. 게임 프로그램에 대한 이해도가 너무 낮아서 당황했어요. 카이스트 출신이라기에 천재적인 프로그램 실력이라던가…… 그런 걸 기대했거든요.”
“아트도 안목이 영…… 그래픽 작업에 대한 이해도가 전혀 없던데요. 그냥 무작정 높은 퀄리티만 요구하고, 최적화나 충돌 문제는 신경도 안 쓰고…….”
인간이기에, 아무리 좋은 환경을 만들어줘도 업무상 스트레스가 쌓일 수밖에 없다.
그럴 때는 이와 같이, 실컷 깽판만 치고 나간 전 개발자들을 욕하다 보면 기분이 풀린다.
자신들은 틀리지 않았고, 이제야 제대로 쓰임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하며 안도감과 성취감을 동시에 갖게 되는 것이다.
‘송재희 PD가 정말 큰일을 해주는군.’
해우소.
태연은 고마운 마음에 기프티콘이라도 보낼까 고민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그런 무책임한 인간과는 상종조차 하고 싶지 않아.’
최적화, 전투, 콘텐츠, 연출.
태연이 엘 크로스 리메이크에 중점을 둔 네 가지 요소였다.
리뉴얼 9개월 차에 접어들었을 때.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이제 폴리싱 작업을 해봅시다.”
쉽게, 그래픽 퀄리티를 끌어올려 보자는 것이다.
이맘때쯤 메인 퀘스트 시네마틱 영상들이 하나둘씩 도착하고 있었다.
필드당 3개씩. 총 18개.
대부분은 각기 다른 스튜디오에 외주를 보냈고 일부만 넥플 자체 스튜디오에서 제작했기에 디테일이 저마다 다르다.
이것을 폴리싱하는 것 역시 엘 크로스 스튜디오 아트팀의 역할이었다.
퀄리티에 통일성을 줘야 하기 때문이다.
아트팀이 죽어라 작업에 매진하는 동안 타 팀에서는 Q&A팀과 함께 테스트에 열중하고 있었다.
플레이를 하고 눈에 띄는 버그, 혹은 미진한 부분들은 파트별로 리스트화하며 인트라넷에 공유하고.
이것을 모두 수정한 뒤 체크 완료된 문서를 공유하면 최종적으로 태연과 각 팀장들이 확인한다.
리메이크 프로젝트 10개월 차부터의 일과였다.
“테스트만큼 중요한 게 없습니다. 텍스트, 나무 오브젝트도 그냥 넘기지 말고 상세히 보세요.”
태연은 최소 하루에 한 번씩은 테스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렇게 해도 부족했다.
‘이래도 막상 유저 테스트를 진행하면 부족한 부분이 마구 쏟아지니까.’
1년.
예고했던 기간이 도래했다.
태연이 본사 전 스튜디오에 공문을 보냈다.
[엘 크로스 사내 테스트를 진행합니다. 테스트 방법은 기존과 동일합니다.]
이 사실은 넥플뿐만 아니라 업계 전체, 그리고 게임 커뮤니티의 관심까지 한 몸에 받았다.
당연했다.
바로 ‘그’ 엘 크로스가 아닌가?
500억!
한국 온라인 게임 역사상 유례없을 정도의 개발비로 주목받았던 프로젝트.
그러나 공개된 실체는 굉장히 터무니없는 수준이었고 많은 이들에게 큰 실망감을 안겨줬다. 넥플의 주가는 바닥까지 떨어졌고.
송재희 PD가 재빨리 퇴사하지 않았더라면, 넥플과 태연의 결단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재앙 덩어리로 남았을 게임이다.
그랬던 것이 지금, 완전히 새로운 모습을 선보이려 하고 있었다.
[아무리 유태연 피디님이라도 그 망겜을 겨우 1년 만에 되살리는 게 가능한 일일까?]
└솔직히 회의적이지만…… 그래도 유태연 피디님이라면…… 하는 기대감으로 지켜보는 중이다. 그동안 보여준 것들이 있으니까.
└후반부부터 떨어진 퀄리티 어떻게든 끌어올리고 버그 같은 것들만 수정해도 평타는 칠 수 있다고 보는데…….
└다들 그 정도 생각하고 있는 것 같더라. 사실 1년 만에 그 정도만 해줘도 정말 굉장한 거지.
이 같은 반응을 보는 엘 크로스 개발자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마 깜짝 놀랄 거다.”
“우리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지. 아무리 유태연 피디님이라도…… 정말 1년 만에 가능할까? 그런데 그 이상도 되더라고! 흐흐흐.”
“아! 빨리 우리 게임 해보고 놀라 자빠지는 모습 보고 싶네!”
“시간이 왜 이렇게 안 가냐? 빨리 테스트 시작했으면 좋겠다!”
첫 오픈 때와 확연히 다른 모습으로, 엘 크로스 개발자들은 느릿느릿 흘러가는 시간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