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한 게임 개발자가 너무 유능함 85화
57. 조공
“어?”
“저건 또 뭐야?”
이른 아침.
판교 넥플 본사에 출근하던 직원들은 정문 앞에 있는 트럭을 보고 호기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에는 또 트럭 시위인가.
어디에서 사고 친 거야?
이런 생각을 했었는데…….
[우리는 아틀란시아 대륙을 지키겠습니다.]
[님들은 서버를 지켜주세요!]
[감사의 마음을 담아…… 아틀란시아 전기 유저 일동!]
현수막 문구를 보고 깨달았다.
‘조공이구나!’
아틀란시아 전기 유저들이 시위 트럭이 아니라 커피 트럭을 보낸 것이다.
“가서 한 잔 마셔볼까요?”
“그럴까요?”
신기한 마음에 커피를 받아 인증샷을 촬영한 뒤 SNS와 커뮤니티 사이트에 업로드한다.
이 신기하면서 기분 좋은 소식을 가급적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던 것이다.
“피디님! 혹시 이거 아셨어요?”
이른 아침.
본사 임원 회의를 마치고 라이브 본부를 돌아다니던 태연에게 한 직원이 무언가를 보여준다.
테이크아웃 커피컵이었는데, 갈색 홀더에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었다.
[아틀란시아 전기를 응원합니다!]
“이거 유저들이 보내준 거예요! 받으셨어요?”
“아니요. 지금 처음 알았습니다.”
“그러면 빨리 나가서 받으시고 공식 홈페이지에 인증샷 올려주세요! 지금 다들 피디님 메시지만 기대하고 있어요!”
“……?”
의아해하던 태연에게 해당 직원이 홈페이지와 커뮤니티 반응을 보여준다.
-야, 지금쯤 태연이 형도 커피 받았겠지? 감동해서 울면 어쩌냐?ㅎㅎㅎ
└그 양반 성격 워낙 냉철하기로 유명한데 과연……? ㅎㅎ
└그래도 감동은 받지 않을까? 이런 경험은 처음일 거 아니야?
└그렇겠지. 한국 온라인 게임에 유저들이 이렇게까지 해줬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
└인증샷 같은 거 안 올려주려나. 벌써 점심 시간이 거의 가까워져 오는데……
“보셨죠? 그러니까 지금 빨리 정문 앞으로 가셔서 커피 받고 인증샷 올리셔야 해요! 유저들이 엄청 기다리고 있어요!”
그 말에 태연은 잔잔한 미소로 말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태연이 정문을 나서는 순간 어디선가 함성이 들려왔다.
커피차 앞에 몇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유태연 피디님이시다!”
“우와! 피디님! 저희 아틀란시아 전기 유저예요!”
유저들이었다.
태연이 다가가 커피 한 잔을 주문한 뒤 유저들에게 물었다.
“설마 아침부터 지금까지 계셨던 건가요?”
“네! 개발자분들에게 고맙다고 한마디라도 하고 싶어서…….”
“사실 피디님 만나고 싶었어요!”
“저 아이돌보다 피디님 더 좋아해요!”
잔뜩 상기된 표정의 유저들을 보니 가슴에 묘한 감정이 휘몰아친다.
‘살다 보니 이런 상황도 겪어 보는구나.’
그저 내 할 일을 열심히 했을 뿐인데…….
태연이 제안했다.
“기념사진 같이 찍을까요?”
* * *
아틀란시아 전기 대형 커뮤니티 사이트에 다음과 같은 게시글이 업로드됐다.
[제목 : 커피 트럭 후기 Feat. 태연이 형!!!]
오전 8시 40분부터 커피 트럭 시작!
넥플 직원분들. 처음에는 기웃기웃…… 섣불리 다가오지 못하시기에 직접 가서 데려옴.
아틀란시아 전기 기획팀 분은 대화하다가 감정이 복받쳤던지 막 눈물을 흘리심. 우리도 당황함.
뿌듯하고 다 좋은데…… 태연이 형이 안 보여! 기다리다 지쳐서 직원분에게 물어보니 항상 8시 이전에 출근해서 업무하고 회의하고 그러신다고…….
직원분들이 태연이 형에게 꼭 말해주겠다고…… 기다려 보라고 하심.
태연이 형 등장!!!
진짜 듣던 것 이상으로 잘생겼고 키도 크고 몸도 좋고…… 차가운 얼음 왕자 이미지더라, 요즘 동인 쪽에서 인기 폭발하던데 직접 보고 납득이 갔음.
이미지와 달리 자상하고 배려심이 가득하심. 한 명 한 명 손도 잡아주시고 직원에게 부탁해서 아틀란시아 전기 굿즈 같은 거 막 나눠 주시고…….
무슨 일이 있어도 지금과 같은 기조 유지할 거고 해외 서비스 시작해도 무조건 한국이 최우선일 거라고 약속해 주심.
내 뮤튜브 채널에 영상 만들어 올렸으니 확인! 태연이 형 인터뷰도 있으니 꼭 봐라!!!
아틀란시아 전기 개발팀의 사기가 대폭 올랐다.
박명훈은 스튜디오에 감도는 활력을 보고 피식 웃었다.
‘순풍이 아니라 신풍이 부네.’
안 그래도 분위기가 좋은 팀이었다.
계속적인 매출 상승으로 넥플 3대장으로서의 위엄을 완전히 되찾았다는 말이 나오고 있었다.
태연이 약속했던 인센티브도 분기마다 팍팍 나오고 있었다. 회사의 이미지 역시 계속 좋아지고 있었고.
“다른 회사를 뭐하러 가? 여기가 최고지.”
“다른 곳에 가봐야 답답한 상사 밑에서 고생만 하지. 그냥 우리 스튜디오가 제일 좋아.”
오죽하면 근래 개발자들 사이에 이런 말이 나오고 있다고 한다.
라이브 팀의 단점으로 꼽히는 것들이 빠르게 개선 중인 덕분이다.
신규 팀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게 책정되는 연봉.
사실상 통보에 가깝고 오르는 게 기적인 연봉 협상.
같은 업무만 반복하며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공무원 마인드. 그로 인한 역량의 퇴보 등등.
태연이 나서서 하나씩 뜯어고치고 있었다.
누구든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낼 수 있다.
아이디어가 통과되면 소규모 조직을 만들어 회사의 지원 속에 콘텐츠를 개발할 수 있다.
‘여기까지는 관리자가 꿈꾸는 개발팀의 이상향 같은 모습일 뿐이지만…….’
그에 합당한 대가가 주어진다는 점이 다르다.
즉, 내가 열심히 해서 게임 매출에 기여한 만큼 보너스를 가져갈 수 있게 된다.
현재 상세한 배분 방식에 대해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뭐, 이 문제는 나중에 생각하도록 하고…….’
“흠흠!”
헛기침을 터뜨리고 크게 소리친다.
“자, 개발팀 잠깐 주목해 주세요!”
“…….”
시끌벅적.
활력이 가득하던 스튜디오가 조용해지며 모든 이목이 박명훈에게 집중된다.
“유저분들이 보내주신 커피, 모두들 잘 받으셨죠?”
“네!”
명랑한 목소리.
“혹시 받지 못하신 분?”
“디렉터님이 사주시는 건가요?”
누군가의 외침에 박명훈이 씩 웃었다.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오오오!
터져 나오는 탄성.
“없는 모양이군요. 자, 선물 받았으니 답례를 해드려야죠? 뭐가 좋을까요?”
온갖 아이디어가 터져 나온다.
그중 가장 큰 지지를 얻은 것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도 게임 속에서 커피 줍시다. 버프 기능 넣어서요.”
“그냥 주는 건 재미없고 성의도 없어 보이니까 트럭 대신 리어카랑 현수막 만들어서 세워 놓고 아이템 교환 이벤트로 진행하면 될 것 같아요.”
“기간 한정 아이템으로 만들어야 할 것 같아요. 소지 개수에도 제한을 넣고요. 기분 내는 것도 좋지만 게임 밸런스도 생각해야죠.”
“그거야 버프 양을 조절하면…….”
얼마 후.
기간 한정 이벤트 ‘커피 수레’가 업데이트되었다.
“어? 이 NPC 어쩐지…….”
“유태연 PD님 닮지 않았어?”
“정장에 안경에 눈매도…… 맞는 것 같은데?”
재미있는 건 커피 아이템을 교환해 주는 NPC가 태연과 굉장히 닮았다는 점이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사업팀장이 태연에게 제안했다.
“이런 일이 정말 흔하지 않은데…… 언론에 알리면 게임 홍보도 되고 브랜드 이미지 상승에도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태연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나설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게 하는 순간 역효과만 일어날 겁니다. 기껏 좋았던 분위기가 이상하게 변질될 수도 있고요.”
“그렇다면……?”
“가만히 지켜보도록 합시다. 워낙 흔치 않은 사례라…… 어떤 식으로든 퍼져 나가게 될 겁니다. 미담은 원래 입소문으로 퍼지는 게 정석이죠.”
태연의 생각은 맞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각종 커뮤니티에 다양한 형태로 퍼져 나간 것.
흔치 않은 업계 미담 사례에 많은 유저들이 흥미를 보였다.
그런데 흥미 수준을 넘어 아예 자극을 받아버린 커뮤니티가 있었다.
-우리도 합시다.
-하는 김에 슬그머니 요구 사항 몇 가지도……ㅎㅎ
얼마 후, 또 다른 커피차가 이번에는 넥플 엔터테인먼트 사옥 앞에 등장했다.
“오, 우리 회사 앞에서 커피 트럭이 나타…… 나야 할 이유가 있었나?!”
“뭐지? 무슨 일이야?”
지난번 커피 트럭 이벤트에서 강남 사옥은 외면당했다!
내심 섭섭했지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갔었는데 반갑기도, 의아하기도 한 직원들이었다.
곧 그 이유를 알게 됐다.
[D.F.W의 승승장구를 축하합니다!]
-DLC나 후속작 좀……제발요ㅠ.ㅠ
“아, D.F.W 유저들이구나.”
“저 몰랐는데…… 거기도 커뮤니티가 따로 있었어요?”
“몰랐어요? 꽤 커요.”
“아하.”
국내와 글로벌 판매량에서 승승장구 중인 Disney Fantastic World! 유저들이었다.
해당 커뮤니티에서 커피트럭을 보내온 것이다.
이 사실은 태연에게도 전해졌다.
홍민석 AD가 커피를 마시며 능글맞은 미소로 물었다.
“다들 저렇게 바라는데, 어떻게 하실 거예요?”
“…….”
태연은 창밖을 바라봤다.
수많은 유저들이 커피트럭 앞에서 즐겁게 웃고 떠들며 대화 중이었다.
태연은 고개를 저었다.
“후속작에 대한 제 입장은 변하지 않습니다.”
“어이쿠, 아무리 그래도 너무 냉정하신 거 아닌가요?”
“박수 칠 때 떠나는 게 맞죠. 소년, 잭으로 할 이야기는 다 했습니다. 억지로 이야기를 만들어봐야 전편과 같은 재미도, 감동도 없을 겁니다.”
그 말에 한편에 앉아 있던 여성 한 명이 조심스레 의견을 표한다.
“저 솔직히 하고 싶은 이야기 아직 좀 남았는데…….”
시나리오 기획자 배수현이었다.
“수현 씨는 일이 많아서 정신이 없을 텐데…… 그럴 여력이나 있겠습니까?”
근래에 그녀는 게임 원작을 소재로 한 책을 집필하며 ‘달의 나라’ 세계관과 시나리오를 정리 중이었다.
그녀가 순박한 미소로 대답했다.
“잠시 미루면 되죠!”
“네?”
“데드라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세계관 정리 작업도 서두르지 말고 여유 있게 하라고 하셨잖아요.”
“분명 그런 말을 하긴 했습니다만…….”
제 말에 무슨 문제라도……?
크고 맑은 눈동자로,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순진하게 눈을 깜빡이는 모습에 태연은 당황했다. 이영애가 웃으며 거들었다.
“괜찮지 않을까요? 어차피 급한 것도 없는데, 그리고 사실 해외에서도 후속 계획에 대한 요청이 쏟아지고 있잖아요.”
사실이었다.
수시로 영어를 비롯, 다양한 언어로 후속작에 대한 요청, 혹은 문의가 줄을 잇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만큼 게임이 인상적이었다는 것이다.
“제가 알기로 디즈니에서도 바라고 있다고…….”
홍민석 AD까지 지원사격을 나섰다.
“무료 업로드라면, 우리가 잘하는 기존 리소스 재활용으로도 충분히 재미있는 콘텐츠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태연은 팀을 돌아봤다.
프로젝트 D를 만들던 이들 중, 상당수는 퇴사, 이직했고 다른 팀으로 전환 배치가 됐다.
몇몇 이들이 ‘달의 나라’ TF팀으로 배치되어 개발을 준비 중이었다.
한마디로 뿔뿔이 흩어졌다는 것이다.
‘팬 서비스 차원에서 진행해 보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다.
이것 때문에 다시 프로젝트 D 팀을 만들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결정은 변하지 않습니다. 후속 콘텐츠 제작은 없습니다.”
“아……!”
배수현이 굉장히 아쉬워했다.
크게 내색은 안 하지만 이영애 AD도 내심 안타까운 눈치였다. 그만큼 게임에 대한 정이 깊다는 뜻이리라.
태연은 다시 커피트럭을 바라보며 물었다.
“후속작 제작은 어렵지만, 대신 다른 게임을 더 재미있게 만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보답이 될 겁니다. 그리고…….”
프로젝트 D는 다른 형태로 선보일 예정이다.
극장, 테마파크, 각종 캐릭터 상품으로.
“잠시 트럭에 다녀오겠습니다.”
업무를 마친 태연이 사무실을 나서자 홍민석이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본인이 가장 아쉬울 텐데…… 프로듀서나 회사 대표 같은 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니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