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한 게임 개발자가 너무 유능함 83화
56. 스카우트(1)
교토 미나미구 호코다테 공원.
화사한 블론즈 컬러 생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린 미녀가 힘없이 벤치에 앉았다.
“아이고 죽겠다.”
고국을 떠나 낯선 타지에 온 지도 어연…….
“……오래된 건 아니지만 어쨌든 여기 너무 오래 있었어!”
미녀의 고운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이런 곳인 줄 알았으면 지원 같은 거 안 했지!”
사람들도 친절하고 거리도 깨끗하고 회사 대우도 좋고…….
하지만 그러면 뭐 하나?
이놈의 타이틀은 언제 발매될지 알 수가 없고, 뒤엎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물론 원래 그런 회사였고, 조직 성격이 그렇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지독스러울 정도의 장인정신.
이러니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게임들을 줄줄이 쏟아낼 수 있었겠지.
‘……그래도 내 성격하고는 안 맞아.’
이게 다 그 남자에게 길들여진 탓이다.
스마트폰으로 ‘유태연’을 검색, 새 기사 내용을 검색해 본다. 한국은 물론, 일본 게임 업계에서도 그는 큰 이슈 메이커였다.
‘이 나라에서 한국 개발자가 이렇게 큰 관심을 받은 적이 있었던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자신과 함께, 빌어먹을 곳에서 동고동락했던 그 남자는 비로소 제자리를 찾더니, 그야말로 미친 속도로 승승장구하는 중이었다.
“제길.‘
스마트폰을 무릎 위에 얹어 놓고, 멜론 빵과 바나나 우유를 단번에 먹어 치운 그녀는 푸른 하늘을 보며 한숨을 내쉰다.
‘자리 잡았으면 빨리 좀 불러주지.’
다시 스튜디오로 돌아간 그녀는 회의와 업무 파도에 휩쓸려 다니기 시작했다.
말이 디렉터지.
이 회사에는 전 세계에서 ‘게임의 신’이라 불리는 총괄 디렉터가 있었다. 퍼스트 파티 간판 타이틀은 철저히 그의 컨트롤로 유지되고 있었다.
쉽게, 그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팔자였다.
아트 디렉터라고 해봐야 그래픽이 다 똑같고 팬들도 변화를 원하지 않으니 실력을 발휘할 기회 따위는 없고.
‘사실 이게 가장 문제지.’
퇴근 30분 전.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은지 조용하던 회사가 활기를 띤다.
‘조금 참으면 퇴근이다!’
그녀 역시 우울증이 치유되는 중이었다.
이것이 바로 퇴근이 가진 엄청난 마력이었다.
그때.
“디렉터님!”
누군가 다가와 붙임성 있게 말을 건다.
“아, 미나미 짱.”
귀여운 외모와 활발한 성격으로, 사내에서 ‘아이돌’이라는 별명이 있는 시이나 미나미. 원화가였다.
“우리 회사 끝나고 같이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요! 이번에 새로 생긴 가계가 있는데 진짜 유명한 곳이에요!”
커다란 눈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거린다.
‘쓸데없이 호소력이 강한 얼굴이야.’
딱히 일도 없으니 같이 가도 좋지 않을까?
“그러면…….”
그때 전화가 걸려온다.
무심코 액정을 확인한 그녀의 눈이…….
‘어?’
크게 치켜떠진다.
“잠깐 기다려줘. 여보세요!”
달라지는 표정과 음성에 시이나 미나미는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표정이…….’
화사한 외모와 정반대로, 항상 우중충해 있던 그녀였다. 그런데 지금은 밝다 못해 날아갈 것 같은 얼굴이다.
‘애인인가?!’
살짝 다가가 귀를 기울인다.
평상시였다면 주저 없이 밀어냈을 그녀가 통화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역시…… 남자 목소리잖아?!’
애인 맞겠지? 맞을 거야!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묵직하고 멋있는 목소리였다.
틀림없이 데이트에 관한 논의를……?
“나 한국으로 돌아갈 거야!”
“…….”
통화를 끝내자마자 대뜸 폭탄선언을 한다.
멍해 있던 그녀가 경악을 터뜨렸다.
“에에에엑?!”
* * *
[사람 한 명 데려가도 될까요? 제가 굉장히 귀여워하는 아이인데 굳이 따라가겠다고 징징대서…….]
태연은 모니터에 펼쳐진 아트 포트폴리오를 확인 중이었다.
‘캐주얼에 특화되어 있군. 특히…….’
머리에 고양이 귀를 달고 있는 은발 미소녀가 울상을 짓고 있었다.
‘모에 쪽에 재능이 있어.’
이 외에 다양한 작품이 담겨 있는데, 모두 하나같이 귀엽고 사랑스럽다. 취향을 확실히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청량하고 화사한 색깔을 굉장히 잘 쓴다.
‘이 정도면…….’
태연은 즉각 메시지를 보냈다.
[지금 받고 있는 연봉 2배. 월세와 차비까지 지원해 드릴 테니 같이 넘어오시죠.]
판데모니움 메인 원화가가 결정된 순간이었다.
* * *
첫 한국 방문이었다.
‘이곳이…… 한국?!’
지인들 중 한류에 빠져 지내는 이들이 워낙 많아 미디어로는 많이 접했다.
하지만 직접 오게 되니 뭐랄까…….
‘분위기가 달라.’
인천공항은 굉장히 깔끔하고 또 시설도 잘되어 있다. 사람들의 얼굴에 미소와 여유가 가득했다. 외국인도 많았다.
‘내가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하게 되다니…….’
그것도 온라인 MMORPG 메인 원화가를 하게 되다니!
그때 외침이 들려온다.
“마니미 짱! 지금 사람이 너무 많아서 자칫 잘못하면 길 잊어버릴 수도 있으니 정신 똑바로 챙겨!”
“네? 네엡!”
후다닥, 자신의 상사 등 뒤에 찰싹 달라붙고 소매를 꼭 잡는다. 이게 무슨 짓이냐며 찡그리는 얼굴을 보고.
“헤헤.”
그녀는 해맑게 웃는다.
“하여튼…… 쯧.”
마침내 출국장을 벗어났다.
“마중 나온다고 했는데…… 저기 있다! 유 피디님!”
카리스마 있던 자신의 상사가 마치 솜사탕을 발견한 아이처럼 뛰어간다. 열심히 따라붙은 미나미는 등 뒤에 반쯤 숨은 채 어깨 너머를 살핀다.
‘저, 저 사람이 바로…….’
대한민국의 스타 개발자.
거대 기업 대표 이사이기도 한…….
‘우리 디렉터님의 디렉터?!’
내 스승의 스승인가?!
그렇다면 난 뭐라고 불러야 되는 거지?
긴장감으로 가득 찬 순간.
“인사해. 유태연 피디님. 앞으로 우리 보스가 될 사람이야. 미나미 짱을 메인 원화가로 승격시켜 준 분이기도 하고.”
“아, 그, 그게…….”
크흠!
헛기침을 터뜨리고, 그녀는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시이나 미나미입니다. 최선을 다해 실망시켜 드리지 않도록 노력할 테니 많은 가르침 부탁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이 한 마디가…….
“せんせい(센세)!”
“…….”
두 사람을 벙찌게 만들었다.
“미나미 짱은 저 처음 봤을 때도 이랬어요.”
“아아…….”
태연은 룸미러를 통해 시이나 미나미를 바라본다.
차창 너머 풍경에 홀딱 빠져 정신없이 사진과 영상을 찍고 있었다.
그녀, 한설아가 첨언한다.
“성격하고 외모 보시면 아시겠지만 워낙 인싸 타입이고 인플루언서이기도 해서…….”
“SNS를 운영하고 있는 겁니까?”
“그거랑 뮤튜브 채널도 같이…… 구독자 수가 백만 명이 넘어요.”
태연은 깜짝 놀랐다.
일본에서 그 정도라면 정말 굉장한 유명인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 정도면 게임 회사 안 다녀도 먹고살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째서…….”
“게임에 워낙 깊이 빠져 사는 애라서…… 꿈이 AAA급 대작 아트 디렉팅 하는 거래요.”
“……자질이 있더군요.”
“그 정도가 아니라 도쿄예술대학 미대 출신이에요. 솔직히 재능만 따지면 저보다 한참 윗줄이에요.”
그 정도라고……?
갑자기 세상 참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돌 같은 외모에 인싸 같은 성격에 일본 예술대 최고봉이라는 도쿄 예술대학 미대 졸업생이라는 간판까지……
심지어 바로 이전 직장은 게임 매니아라면 누구나 동경하는 ‘그곳’이 아닌가?
“저 정도면 연봉이 문제가 아니군요.”
“맞아요. 쟤 아가씨예요. 준 재벌급 집안인데 심지어 IT 쪽 원천 기술을 보유한 곳이라 현금 보유량만 따지면 뭐…….”
“…….”
가만, 그러면 굳이 월세를 지원할 필요가 없었던 거 아닌가?
태연은 조심스레 묻는다.”
“둘이 같이 사는 겁니까?”
“강남에 아파트 전세로 얻었어요. 거기서 같이 살 거예요. 한국 방문은 처음인 애를 혼자 살게 둘 수는 없잖아요.”
‘어?’
목적지에 도착한 태연은 깜짝 놀라 중얼거렸다.
“우리 집에서 가까운 곳이군요.”
“어? 정말요? 집이 어딘데요?”
“저기…….”
태연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우뚝 솟아 화려한 외관을 자랑하는, 강남 새 랜드마크 아파트였다.
“우와! 원래 원룸 오피스텔에 살지 않았어요? 성공했네요!”
“아내 겁니다.”
“부부는 일심동체잖아요! 그리고 둘이 금슬 좋기로 소문 다 퍼졌더만.”
옆구리를 콕콕 찌르며 웃던 그녀가 입맛을 다신다.
“뭔가 아쉽고 그러네요. 그 오피스텔, 사실상 우리 아지트 같은 곳이었잖아요. 종종 몰려가서 고기 파티 술 파티…… 다 떡이 돼서 드러눕다가 아침에 허겁지겁 출근하고…….”
“그리운 추억이죠.”
태연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내 소개해 줄 테니 집에 놀러 오시죠. 한설아 AD님이라면 좋은 친구가 되어줄 수 있을 것 같군요.”
“정말 그래도 돼요? 체조 여신님 팬이었는데…… 잘됐다!”
이미 모든 것이 갖춰진 집이었다.
“가구 사기 귀찮아서 다 있는 걸로 구한 거예요. 부족한 건 엄마 아빠랑 동생이 먼저 와서 채워줬고.”
“그렇군요. 그래도 잘 꾸며진 좋은 집입니다. 전반적인 상태도 굉장히 훌륭하네요. 인테리어도 잘 해놨고.”
“잊으셨어요? 제 남동생 건축가예요!”
정리를 마치고 강남 먹자골목으로 이동했다.
‘사람들이 모두 쳐다보는군.’
한설아와 시이나 미나미의 비주얼이 워낙 뛰어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두 사람은 다르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디렉터님! 사람들이 우리 보스만 쳐다보고 있어요!”
“키 크고 잘생겼잖아.”
“저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럴 때는 차라리 일본어를 모르는 게 나았을지도…….’
민망함을 애써 숨기며 도착한 곳은 유명한 한우 전문점!
한설아가 물었다.
“피디님이 쏘는 거죠?”
“물론이죠.”
“저 그러면 밥이나 밑반찬 같은 거 안 시키고 소고기만 배 터지게 먹어도 돼요?”
“그러셔도 됩니다.”
그녀는 원래 그런 입맛이었기에 태연은 새삼스레 놀라거나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어진 광경에는 굳을 수밖에 없었다.
“보스! 이거 진짜 맛있어요! 지금까지 먹어 본 와규보다도 더 맛있어요!”
“아아, 이게 바로 투뿔이라는 것이다.”
시이나 미나미.
작고 아담한 체구에 먹을 것이 끝도 없이 쏠려 들어간다.
‘위장에 블랙홀이라도 있는 건가?’
잘 먹기로 소문난 한설아도 그녀라는 태양에 비교하면 반딧불 수준!
두 먹신의 장대한 먹부림 앞에 태연은 식욕을 잃어버렸다.
계산서에 수백만 원이 찍혔다.
“…….”
한 끼에 이 정도 금액을 지불해 보기는 처음이었던 태연은 어안이 벙벙했다.
“저…… 괜찮은 거죠?”
“죄, 죄송해요. 이렇게 많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
미친 듯이 먹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태연은 잠시 법인 카드를 만지작거리다 결국 개인 카드를 꺼내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일에 회사 공금을 쓸 수는 없지.’
쓰린 속을 부여잡고 강남, 넥플 엔터테인먼트 사옥으로 이동했다.
“와, 회사가 정말 강남 한복판에 있네? 심지어 규모도 커!”
“자, 잠깐…… 잠깐만요! 저 사진이랑 브이로그 좀 찍을게요! 제 인생에 역사적인 날을 이렇게 그냥 넘길 수는 없어요!”
“어? 그러면 나도 해야지!”
두 여자를 배려해주느라 사옥 정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으려니.
“어? 대표님 안녕하세요!”
“여기서 뭐하세요?”
건물 안에서 우르르 빠져나온 직원들이 태연을 알아보고 인사를 건넨다.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갔으면…….’
태연은 도망가고 싶은 충동을 애써 억눌렀다.
오늘따라 유난히도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