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한 게임 개발자가 너무 유능함 81화
54. 성장의 시작(4)
소스 자체는 분명 자신들의 것이다.
그러나 구현 방식에 여러모로 차이가 있다.
맑았던 하늘에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더니 빗방울이 떨어진다. 곧 폭우가 변한다.
순간 운무가 생기고, 바닥에 물이 고이며 캐릭터가 미끄러지거나, 적을 겨냥하기가 불편해진다.
“신형 에픽 엔진이군요!”
태연과 판테온 팀으로 인해 전 세계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제품이었다. 개발자들은 눈이 힘을 주고 화면을 직시한다.
“분명 소스는 우리 건데…….”
“엔진 기능이 강화되며 구현 가능한 것들이 늘어나니 퀄리티가 그냥 아예 다른 게임이 되어버리네요.”
“광원 효과 미치네.”
“창문이나 자동차 표면 반사로 반대편 상황 알 수 있도록 구현된 거 보세요. 저런 식이라면 더 많은 플레이가 가능해지겠어요.”
쉴 새 없이 탄성이 터져 나온다.
최원목 피디는 시선을 빼앗긴 채 본능적으로 물었다.
“넥플 엔터테인먼트에서 신작으로 준비 중인 게임이군요. 정말 굉장합니다.”
“……그게 아니라 저 혼자 작업하고 있었던 겁니다.”
“아, 그렇구나.”
고개를 주억거리던 최원목 피디의 행동이 정지됐다.
다른 개발자들도 마찬가지.
삐그덕, 천천히 태연을 바라본 그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더듬대며 묻는다.
“저, 저걸…… 전부 다 혼자 작업하셨다고요?”
“그렇습니다.”
“……광원 효과, 기상 변화, 스페큘러…… 저걸 다 직접 구현하신 거예요?”
“그래서 좀 어설프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튀어나올 듯 커진 눈으로 다시 게임 화면을 바라본다.
“……전혀 어설프지 않은데요?”
“그냥 프로의 솜씬데?”
“설마, 게임 엔진이 워낙 뛰어나서 리소스 넣으면 다 저렇게 만들어주는 건……?”
“그런 엔진이 어디 있어?”
웅성임이 커진다.
태연이 말했다.
“기존 배틀 시티가 제작되었던 시기와 FPS 게임들의 발전 속도를 생각하면 수명의 한계가 생각보다 빨리 찾아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
“지금 보고 계신 에픽 엔진 최신 버전은 그 기능이 막강하고 개발 및 유저 편의성이 높아 손쉽게 고퀄리티의 게임을 만들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발전 가능성이 굉장히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게임을 만들고 계속해서 다듬으며 퀄리티를 높여 나갈 수도 있죠.”
개발자들은 어느새 태연에게 이목을 집중하고 있었다.
비로소 태연이 두 번째 제안 사항을 꺼냈다.
“배틀 시티2를 제작합시다. 제가 개발 기반은 다 짜놓았으니 리터칭하고 새 콘텐츠를 기획하며 다듬어가면 전편보다 훨씬 뛰어난 게임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 신규 게임 개발을 여기 있는 우리에게 맡기시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여기 있는 인원 전부가 유지 보수만 해와서…… 신규 개발 쪽으로는 더 뛰어난 사람들이 많을 텐데 어째서…….”
“여러분이 넥플의 배틀 로얄 방식 FPS 전문가들이니까요.”
립 서비스가 아니다.
물론 실력 있는 인원을 추가 보강해야 할 필요는 있지만, 그들의 개발 역량은 전반적으로 평균을 상회하는 편이다.
‘배틀 시티 근속 기간까지 고려하면 더할 나위 없지. 이들을 중심으로 배틀 시티2를 개발하면 돼.’
어차피 어렵고 난해한 기반 작업은 자신이 대부분 진행시켜 놓은 상태였다.
이들을 자신이 그린 밑그림을 추가 보강하고, 덧칠하며 작품으로 구현하면 되는 것이다.
“하시겠습니까?”
“…….”
“자신 없으면 다른 팀에 맡겨야…….”
“아니요! 할게요! 시켜주세요! 하겠습니다!”
최원목 피디의 다급한 외침에 태연은 작게 미소 지었다.
* * *
“판데모니움 말입니다. 그거 내용을 조금 더 보강하면 그대로 출시해도 될 것 같은데요. 귀엽고 아기자기한 캐주얼 스타일로요.”
홍민석 AD의 말이었다.
“저거 원래 작업하던 사람들, 다시 영입하시고 그대로 진행해 보시죠.”
태연은 고개를 저었다.
“부족한 점이 너무나 많아서 안 됩니다.”
“내부 평가가 그렇게 좋은데요? 요즘 사내 직원들이 제일 많이 하는 게임이 바로 판데모니움 테스트 버전이라는 말이 많던데, 알고 계십니까?”
“…….”
“일일 평균 접속률이 1,000명 이상 꾸준히 나오고 있는데요. 전체 직원 수가 6,000명인 회사에서요. 오죽하면 접속 권한이 없는 스튜디오에서 자기들도 플레이할 수 있게 해달라며 인트라넷에 청원을 올리고 있지 않습니까”
“안 그래도 그 문제가 참 골칫거리입니다. 사실 정보를 충분히 취합했으니 슬슬 테스트를 끝내려고 생각 중이었는데…….”
“뭐라고요? 테스트를 끝내겠다고요? 아니, 어째서요?!”
화들짝 놀라는 홍민석 AD.
태연이 당황할 틈도 없이 몰아붙이기 시작한다.
“그건 안 됩니다. 요즘 우리 부부…… 아니, 우리 아트팀이 제일 재미있게 하고 있는 게임인데…… 점심 시간에 다 같이 레이드하는 게 얼마나 꿀잼인데 그걸 끝내 버리시겠다니요!”
“…….”
“전 아트디렉터로서 반대합니다!”
어쩌라는 건지.
태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우리도 판데모니움 테스트 서버에 접속할 수 있게 해주세요!
-스튜디오 차별 왠말이냐! 신규 개발 부서도 접속할 수 있도록 해 달라!
-개발자만 챙기는 법이 어디 있냐? 총무, 사업, 마케팅도 게임 좋아한다!
태연은 고개를 저었다.
‘보안에 유의하고 있긴 하지만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니 여기서 접는 게 맞아.’
필요한 데이터 수집은 모두 끝냈다.
그동안 혼자 진행하던 배틀 시티 리메이크 프로젝트를 넘길 예정이니, 이제 판데모니움 개발에 본격적으로 착수할 생각이었다.
당분간은 혼자서!
“좋아. 공지를 올리자.”
굳게 마음먹은 태연은 인트라넷에 접속.
공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판데모니움 사내 테스트 종료에 대한 공지.]
안녕하십니까. 넥플 사우님들.
판데모니움 개발자 유태연입니다.
이번 주 금요일부로 판데모니움 사내 테스트를 종료하기로 결정을 내렸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됐다.”
공지를 올리고 나니 마음이 후련해졌다.
사실 테스트를 계속 유지하는 것도 적잖은 부담이었기 때문이었다.
프리서버 따위를 운영하는 것과 차원이 달랐다.
어디까지나 개발을 위한 데이터 수집이 목적이었으니.
‘오늘 업무는 여기까지, 퇴근할까?’
오늘은 윤아와의 뮤지컬 감상이 예정되어 있는 날이었다. 끝난 후에는 전망 좋은 스카이라운지 바에서 멋진 저녁을 보낼 계획도 있었다.
태연은 기분 좋게 퇴근했다.
다음 날 어떤 일이 기다릴지 짐작하지 못한 채.
* * *
-이게 무슨 소리야? 테스트 종료라니, 그러면 최소 몇 년 동안은 게임 못한다는 소리잖아? 안 돼!
└내가 이 게임에 청춘…… 까지는 아니지만 어쨌든 열정을 불태우고 있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이런 법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항의합시다!!
└옮소! 항의합시다!!
└어…… 정말 대표님한테 항의하시려고요? 무슨 꼴을 당하려고……
└우리가 부당한 요구를 하는 것도 아닌데? 난 항의할 거임! 이렇게 내 캐릭터 못 떠나 보냄.ㅠㅠ
└죽어도 못 보내!
“…….”
인트라넷 상황을 확인한 뒤 이어 대표이사 이메일 계정을 확인해 본다.
[제목 : 안녕하십니까! 저는 문 라이트 스튜디오 개발자 정주영입니다!]
온갖 메일이 가득하다.
너무 많아서 하나하나 모두 읽을 수가 없을 정도!
그래도 개발 방향과 관련된 의견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모두 읽어야 했다.
[판데모니움을 리얼풍 실사화 그래픽으로 제작 고려 중이시라고 들었습니다. 물론 그렇게 해도 좋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지금과 같은 귀염뽀짝한 동화 캐주얼풍이 훨씬 좋다고 생각합니다.]
[악마들을 다루는 세계관인데, 저 컨셉들이 실사화되면 퀄리티를 떠나 지나치게 마니아적인 냄새가 나게 되지 않을지…… 차라리 캐주얼풍으로 어린 유저, 여성 유저들의 유입을 유도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확실히 일리 있는 말이군.’
사실 이것은 스튜디오 내부에서도 몇 번 나왔던 말이었다.
그런데 그와 똑같은 말을 타 스튜디오 개발자들이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컨셉을 최대한 살려야 한다고.
이외에.
[판데모니움을 플레이하며 오래전에 죽었다고 생각했던 게임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 되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기회를 주신다면 판데모니움 개발에 참여하고 싶습니다!]
이 같은 요청이 꽤나 많았다.
이들만 잘 모아도 개발팀 TO를 모두 채울 수 있을 정도였다.
[서버 프로그래머입니다. 저를 개발자로 써주시면 테스트 서버 운영 책임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발……!]
어째 조금 다른 목적이 있는 듯한 메일 내용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모처럼 느긋하게, 오전 일과 시간 동안 이메일 업무를 처리하며 태연은 고민을 더해갔다.
‘캐주얼 MMORPG라…….’
* * *
충분히 고민한 끝에 결정을 내렸다.
‘해보자.’
사실 판데모니움을 캐주얼로 만들었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그때는 지원이 부족했으니까.’
당시 강건 대표의 말에 따르면 한계돌파는 많은 돈을 벌지 못했고, 회사는 생존조차 간당간당한 상황이었기에 최대한 적은 개발비로 최고의 효율을 뽑아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내가 정말 무리하면 15억까지는 어떻게든 끌어모을 수 있을 것 같거든?
제작비 압박이 극심했고 강건 대표는 빠른 시간에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결과를 보여주기를 종용했다.
그렇게 탄생한 게임이었으니 태연이 아쉬움을 가지는 것도 당연했다. 자본이 빵빵한 넥플에서 개발할 수 있게 되었으니, 못해도 200억 이상은 투자해서 AAA급 게임으로 제작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접어둬야지 뭐. 많은 사람들이 이게 좋다는데.’
자신의 생각이, 욕심만이 정답은 아니다.
‘일단 사내에 먼저 개발 공문을 내봐야겠군.’
많은 이들이 합류 의사를 밝혔다.
인사고과와 상태창 능력치를 참고해서 우수한 인력을 위주로 세팅하면 바로 작업 진행이 가능하다.
‘판데모니움을 모두 플레이 해본 사람들이니 이해도도 높지.’
얼마 후, 사내 인트라넷을 통해 다음과 같은 공문이 업로드됐다.
[판데모니움 개발자 모집]
* * *
오늘도 게임 커뮤니티는 넥플 관련 이슈로 뜨거웠다.
-요즘 뉴스란 보면 이게 게임 업계 이슈 게시판인지 넥플 게시판인지 헷갈릴 정도임. 온통 넥플 관련 이야기밖에 없네. 영자 돈 먹었냐?
└이번 건은 내부 정보가 유출된 거라 넥플 뭐라고 할 일이 아님.
└그런데 배틀 시티는 아예 신규 개발로 방향을 전환한 건가? 이것저것 보완 작업하겠다더니…….
└그건 그거대로, 이건 이거대로 한다는 모양.
└아하. 그런데 님은 그걸 어떻게 안 거임? 혹시……?
└갈대나무 숲 앱에 정보 유출됨.
└ㄳㄳ 가서 봐야겠다.
직장인 커뮤니티.
갈대나무 숲을 통해 유출된 정보들이 크게 이슈됐다.
그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다.
-배틀 시티 2 개발 시작!
-MMORPG 판데모니움 테스터들의 의견을 수렴해 캐주얼 MMORPG로 확정. 현재 내부 공고를 통해 개발자들 대거 전배 중.
-배틀 시티 1 튜토리얼, 싱글 캠페인 모드 추가. 혼자서도 시나리오 플레이를 즐길 수 있도록 추가할 예정.
-아틀란시아. 북미 런칭 준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