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한 게임 개발자가 너무 유능함 79화
54. 성장의 시작(2)
[유저 조롱 이슈. 문 라이트 스토리 정종철 PD를 포함한 기획팀장, 시나리오 파트장 모두 경질!]
[배틀 시티 ‘기밀 유출 의혹’ 내부 조사 결과 사실로 밝혀져…… 프로그래머가 중국 해커 집단에 돈을 받고 내부 정보를 넘긴 사실이 발각되다.]
[배틀 시티 서종혁 피디 연봉 삭감! 해당 프로그래머는 영업 기밀 유출, 편취로 고발.]
게임 업계에 핵폭탄이 떨어졌다.
넥플 게임 3대장으로 불리던 MMORPG. 문 라이트 스토리의 주요 개발자들이 모두 해고당한 것이다.
또 다른 간판 게임인 배틀 시티 역시 국제 대회 등을 통해 수많은 유저들이 제기해 오던 기밀 유출 의혹이 사실로 밝혀졌다.
-역시 몰살의 유피디……ㄷㄷㄷ
└아무리 잘못이 커도 그동안 인기 게임을 리드해 온 공이 있는데…… 그걸 가차 없이 잘라 버리네;;
└정종철 피디 그렇게 욕했는데…… 저렇게 잘려 나간 거 보니까 왠지 불쌍함. 미운정이 든 건가;;;
└불쌍하기는…… 저게 맞는 거지. 솔직히 정종철이 그동안 한 게 뭐 있냐? 남이 잘 차려 놓은 밥상 뒤늦게 차지하고 앉은 것밖에 없는데…… 떠먹는 것도 제대로 못 해서 사고만 치고.
└그동안 넥플 인기 게임 피디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위세 좀 부렸다던데…… 유태연 피디 체제로 전환되니 가차 없이 처맞고 나가떨어지네;
└이런저런 소문 들어 알고는 있었는데…… 유태연 피디 진짜 무서운 사람 같음;
태연의 또 다른 별명이 다시 한 번 부각됐다.
“어이, 몰살의 유피디?”
“…….”
“넌 어째 별명이 그 모양이냐? 철혈. 저승사자. 머신. 인공호흡기…… 또 뭐 있더라?”
별명이 하나하나 열거될 때마다 회의실에 웃음이 터져 나온다.
표정 변화 없는 태연을 보고 유진성 회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너 인마. 지나치게 FM이야. 그러면 밑의 사람들이 힘들어할 텐데…… 불만 없어?”
“없습니다.”
“없다고? 그럴 리가…….”
“월급 팍팍 올려주고 인센티브 잘 주니 일만 잘하더군요.”
“…….”
“저는 제가 해주는 만큼 요구하는 것뿐입니다. 그조차도 무리한 건 절대 시키지 않습니다. 부당한 요구를 해본 적도 없고요.”
“……너 잘났다 인마. 아무튼, 그래서 문 라이트 스토리 어떻게 할 거야? 네가 피디, 기획팀장, 시나리오 파트장까지 모두 목을 쳐 버렸잖아. 후속 대책은 준비해 놨어?”
“적임자들을 배치했고 업무 공백을 대비해 실력 있는 개발자들과 면접 진행 중입니다. 아무 문제 없습니다.”
“배틀 시티 해킹 문제는 어떻게 할래? 그 문제 빨리 해결해야 하는데.”
“해킹은 배틀 시티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보안 전문가들을 따로 모집해서 전담 연구팀 설립을 추진 중입니다.”
“그건 알고 있는데 그동안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잖냐. 뭔가 하긴 해야지. 특히 배틀 시티는 우리 회사 주요 수익원이라 대책이 시급해. 알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급한 대로 제가 직접 보안 취약점을 분석하고 수정, 강화하는 작업을 진행 중입니다. 시중에 돌고 있는 유명 게임 핵들을 입수하고 분석해서 특정 패턴을 가진 프로그램에 메모리와 프로세스 접근하는 것을 차단할 수 있도록 작업 중입니다.”
“…….”
이어지는 전문적인 설명에 모두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유진성 회장은 손영상을 보며 물었다.
“너 저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냐?”
“그냥 보안을 전 방위적으로 강화하고 있다는 소리입니다.”
“그건 나도 알아 인마! 내용 말이야. 내용!”
“네. 뭐…….”
손영상 이사는 태연을 신기한 생명체 보듯 하며 말했다.
“태연이 저 녀석이 어지간한 보안 전문가들보다 훨씬 실력이 좋네요. 그냥 전담팀 설립할 거 없이 쟤 한 명만 있어도 될 것 같은데요?”
“저 녀석은 대체 못 하는 게 뭐야?”
“그런 게 없으니 지금 엄청난 위세를 부리는 거 아니겠습니까? 당장 회장님을 비롯해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 무슨 중대한 이슈만 터지면 제일 먼저 태연이 찾잖아요.”
“하긴…….”
쏟아지는 시선에 태연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아무 생각 없이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개발팀 직원들과 마주쳤다.
“헛! 아, 안녕하세요!”
“……!”
맹수와 마주친 초식 동물마냥 딱딱하게 굳어버리는 모습들.
다음 층에서 탑승하려던 이들 역시 태연을 보고 멈칫하더니 두 손을 공손하게 상태로 들어온다.
불편한 침묵.
‘대체 내 이미지가 왜 이 모양이 된 거지?’
홍민석 AD가 단순명쾌하게 그 이유를 알려줬다.
“실제 무서우니까 벌벌 떠는 거죠.”
“……제가 험악한 인상입니까?”
“잘생겼죠. 피부 좋고 몸도 좋고 목소리도…… 문제는 분위기가 워낙 싸늘하고 포스가 넘치시니…….”
“포스요?”
“뭐, 카리스마 같은 거죠.”
태연의 표정이 찡그려지자 홍민석이 웃었다.
“전 좋은 거라고 봅니다.”
“이런 이미지가 좋다고요? 다들 마주치기를 꺼려 하고 어쩌다 잠시라도 같이 있게 되면 덜덜 떠는데요?”
“가볍게 보는 것보다야 백만 배는 낫죠.”
“음…….”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리더란 묵직해야 한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리더야말로 팀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죠. 리더가 가벼우면 팀도 가볍게 느껴져요. 반면 리더가 범상치 않으면 그 밑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일까. 기대감을 품게 만들죠.”
“음.”
“솔직히, 제 아내가 이번에 크게 이슈가 된 게 단순히 미모가 뛰어나고 코스츔이 찰떡처럼 잘 어울린 게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
“전 세계가 경악하고 E3가 발칵 뒤집어 놓은 게임을 만든 팀의 아트 디렉터라는 점이 컸다고 봐요.”
장난스러운 미소가 가득한 그의 표정을 보고 태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국뽕 뮤튜브에 심취하신 모양이군요.”
“아무튼 피디님이 조금 불편한 덕분에 저를 비롯한 넥플 엔터테인먼트 개발자들은 어깨에 힘 좀 주고 다니는 거, 아시는지 모르겠네요.”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닌다니요? 이유가 뭐죠?”
“대표님 위명이 워낙 찬란한 덕분이죠.”
“…….”
“비꼬는 거 절대 아니니 그 눈빛에 가득한 의구심은 접어두시고요. 게임 업계에서 정말 믿음직하고 자랑스러워 할 수 있는 리더란, 정말 흔치 않다는 거 아시잖아요.”
“내가 그런 리더라는 건가요?”
“바로 그거죠.”
태연은 동의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지만 홍민석의 말을 계속 이어졌다.
“전 가급적 지금의 이미지를 유지해주셨으면 해요. 가볍고 친근한 포지션은 저를 비롯한 디렉터, 장급들에게 넘겨주시고요.”
홍민석은, 태연이 지금 상황에 가지고 있던 근본적 의문을 해결해 줬다.
“지금 아주 잘하고 계시니 쓸데없는 걱정 할 필요가 전혀 없고, 굳이 변신을 시도할 필요도 없어요. 아시겠죠? 유 묵직씨.”
“…….”
그 후로도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던 태연은 비로소 탄성을 터뜨렸다.
“리더란 묵직해야 한다. 이 말을 어디서 들었나 했더니…….”
* * *
사업총괄. 이태영 이사가 태연을 찾아와 말했다.
“인터뷰 좀 하자.”
“무슨……?”
“별거 없어. 넥플은, 그리고 넥플 엔터테인먼트는 과연 무엇을 꿈꾸는가? 어떤 것을 목표로 하고 그것을 위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대략 이런 내용에 대한 인터뷰야.”
어떤 의도인가.
고민하는 태연에게 이태영 이사는 가볍게 말했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어. 근래에 들어 뉴월드 그룹, 디즈니 컴퍼니와 테마파크를 비롯한 게임 외적인 사업을 시작했잖아? 너도 콘텐츠 플랫폼 사업을 준비 중이고.”
“그렇죠.”
“처음 우리 회사는 그냥 단순한 게임 회사였어. 하지만 게임이 하나둘 성공하고, 그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M&A를 시작하며 어느 순간에는 게임 퍼블리싱에 더 힘을 쏟는 회사가 됐지.”
그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사실 이 경우는 개발보다 인수 합병을 통한 몸집 부풀리기에 여념이 없던 회사의 방향성에 대한 비판이었지.”
태연은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지금은 그보다 더, 한 단계 나아가서 여러 가지를 시도 중이야. 테마파크, 단편 애니메이션 제작 등등. 그리고 이 과정에서부터 많은 이들이 혼란을 느끼고 의문을 갖기 시작한 거지. 그래서 넥플이라는 회사는 뭘 하고 싶은 거야?”
유진성 회장의 꿈은 명확했다.
아시아의 디즈니.
그러나 그건 그 혼자만의 꿈일 뿐이고, 현실은 아득히 멀었다.
“혼란스러운 상황에 그런 꿈같은 소리를 해봐야 비웃음만 살 뿐이지. 그리고 그건 개인의 이상이지, 회사의 비전은 아니야. 안 그래?”
“맞는 말씀이십니다.”
“사실 나와 손영상 이사가 회의감을 느낀 게 그런 이유 커. 이것저것 새로운 시도도 많이 하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목표로 잡아야 하는지 모르겠으니까. 회장님이 바라는 건 알겠는데, 그건 현시점에서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의욕이 떨어진 거군요.”
“바로 그거지. 헤매기만 하는데 무슨 힘이 나겠나? 지금까지는 허공에 삽질하는 기분이었다니까?”
“이해합니다.”
“그랬는데, 최근 들어 긍정적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거야.”
이태영 이사가 씩 웃는다.
“태연이 네 등장으로 인해서.”
“…….”
“우리는 늙었어. 난 그래도 썩 괜찮은 후계자를 몇 명 발굴하긴 했는데 손 이사는 그런 것도 없었지. 그나마 한 명 공들였던 인물이 있었는데 그 꼴이 나버리는 바람에…….”
“엘크로스 송재희 피디 말씀이시군요.”
“그래. 그 인간. 성공 여부를 떠나서 자기 프로젝트도 제대로 간수 못 하는 인간이 회사의 미래를 무슨…….”
그는 자조적인 미소를 띠며 말했다.
“남 말 할 때가 아니긴 하지만…… 아무튼, 우리한테 필요한 건 그거였어. 강력한 리더!”
“그게 저라고 생각하신 겁니까?”
“실제로 그렇잖아?”
“…….”
“아무튼, 넌 말뿐인 다른 사람들과 달라. 결과로 보여주지. 이제 때가 됐다고 생각한 거야. 이 사람이 우리의 미래를 견인할 새 리더다. 이 사람의 이상이 바로 우리 회사의 새로운 비전이다. 이것을 공표하자는 거지.”
“그게 그렇게 중요한 일입니까?”
“암. 중요하지.”
그는 물을 한 잔 마시고 말했다.
“비전이란, 어떤 대상의 존재 이유, 그리고 가치와 직결되는 문제니까.”
여기서 태연은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을 받았다.
‘존재 이유와 가치…….’
“넌 리더의 자격을 차고 넘치도록 증명해냈어. 그러니 이제는 본격적으로 전면에 나서서 수많은 넥플인들에게 새 비전을 주고 그들을 지휘할 차례야.”
이후의 말이 굉장히 무겁게 양어깨를 짓눌렀다.
“그동안 공백이었던 넥플의 새 대표이사로서.”
“……!”
압도적인 무게감에 침음성을 흘리던 태연은 순간적인 의문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면 지금까지 대표 업무는 누가 수행했습니까?”
“나. 정확히 말하면 대표 대리였지. 정식은 아니야.”
“아…….”
“그동안 정말 무거웠다. 힘들었어. 그런데 이제 네가 있으니 홀가분해질 수 있겠다.”
“…….”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옆에서 도와줄 테니까. 넌 천성이 개발자라서 늙어 죽을 때까지 네가 원하는 게임, 콘텐츠를 개발하고 싶잖아. 아니야?”
태연이 처음으로 미소 지었다.
“바로 보셨습니다.”
“그걸 도와주겠다는 거야. 귀찮은 업무는 모두 내가 떠맡아 줄 테니 넌 열심히 개발을 해. 재미있는 거 많이 만들어. 한계 따위 두지 말고.”
태연은 자신 있는 미소로 말했다.
“무슨 의미인지 확실히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