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한 게임 개발자가 너무 유능함 77화
53. 확장
김재환은 지난달 새로 창업한 게임 회사, ‘바스티안 스튜디오’의 프로그래머였다.
바로 이전에 근무하던 직장은 요 근래에 한창 떠들썩한 넥플 엔터테인먼트. 국내 게임 업계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 온 Disney Fantastic World의 개발자 중 한 명이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새 회사로 이적한 지 겨우 한 달.
아직 뭔가 시작도 하지 않았고, 이게 당연하지만…….
‘아무래도 괜히 이적한 것 같단 말이야. 그냥 남아 있을 것을…….’
마음이 싱숭생숭해진 계기는 최근에 쏟아지고 있는 넥플 엔터테인먼트 관련 기사, 그리고 전해 들은 소식이었다.
‘3차 인센티브로 인당 5,000만 원에 스톡옵션까지 받았다니…….’
뿐만 아니라 연봉 계약을 갱신해서 Disney Fantastic World 개발자 전원은 1억 2,500만 원으로 재계약을 했단다.
-뭐야, 금액이 왜 그래요?
-세금 빼고 1억 챙겨주겠다고 하셔서 이 금액이에요. 하하하!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나도 남아 있었다면 지금쯤……!’
인센티브 총합 1억 이상과 스톡옵션. 연봉 1억에 여러 가지 혜택을 받았을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넥플 엔터테인먼트 사옥 분리. 회사 규모 확장한다!]
강남 역삼동에 새 사옥을 구해 본사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한다는 기사가 떴다.
[한국형 판타지. ‘달의 나라’를 AAA급 게임으로 제작!]
이것도 충분히 업계 전체를 뒤흔들 정도로 놀라운 소식이었다.
하지만 사옥 분리 및 확장 이전이 단순히 이것 때문만은 아니다.
[과천 디즈니랜드 착공! 넥플 엔터테인먼트 콘텐츠 개발 인재 대대적 채용 개시!]
바로 이것 때문.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Disney Fantastic World 개발진 전원의 연봉이 1억 이상으로 책정된 것이 이것과 관련이 있다는 소문이 있다.
콘텐츠 개발 업무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디즈니에서 제작하는 Disney Fantastic World 미디어 화 작업에도 일부 참여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남아 있었어야 했어.’
한편으로는 유태연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내가 나간다고 했을 때 한 번쯤 붙잡으며 이 같은 정보를 귀뜸해 줬었다면…….’
그랬다면 퇴사 같은 거 안 했지!
띠링!
문자가 도착했다.
넥플 경쟁자 네로 소프트 신규 프로젝트로 이적한, 과거 프로그램 팀 동료였다.
‘그래도…….’
희망을 갖게 된다.
나쁘게 나온 것도 아니고.
‘분위기 좋았잖아? 조금 과장하면 가족처럼 화목하고 모두 다 사이도 좋았고 함께 극장도 같이 다니고…….’
그러니…….
‘다시 돌아가도 받아주지 않을까?’
유태연.
남들은 저승사자라느니, 냉혹하다느니 말이 많지만 그는 알고 있다. 사실은 따뜻한 사람이며 누구보다 같이 일하는 개발자들을 위해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라면 따뜻하게 받아들여 줄지 모른다.
“…….”
주위를 둘러본다.
구로 디지털 공단의 벤처 사무실.
나쁜 환경은 아니지만, 이전에 근무하던 곳을 생각하면 더없이 초라하다.
온갖 생각이 들었다.
결국.
“일단 연락만이라도…….”
조심스레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아, 안녕하세요. 피디님. 저 프로그래머 김재환입니다. 저기 혹시…….”
* * *
통화를 마치고 한숨을 내쉬는 태연에게, 프로그램 팀장이 물었다.
“이번에도 퇴사한 직원 전화예요?”
“네.”
“하여튼…….”
혀를 차는 프로그램 팀장.
태연은 상대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방금 통화를 마친 프로그래머 김재환은 지금 눈앞에 있는 프로그램 팀장이 직접 뽑고 가르친 인재였다.
김재환이 퇴사했을 때 그가 몇 번이나 붙잡았고 크게 아쉬워하며 보내줬던 기억이 떠올랐다.
옆에 있던 서버 파트장이 한숨 쉬며 말했다.
“프로젝트 끝내고 이적하는 거야 나쁘게 볼 일도 아니고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사실인데…… 이제 와서 이러는 건 좋게 생각되지 않네요. 지금까지 전화한 사람들 모두 각자 좋은 제안 받고 본인 선택으로 퇴사한 거잖아요.”
함께 식사하던 파트장, 팀장들이 그 말에 동의하며 볼멘소리를 한다.
홍민석 AD가 변호 아닌 변호를 한다.
“이해해 줍시다. 정작 혜택을 받게 된 우리조차도 얼떨떨한 심정 아닙니까?”
그 말에 공감하는 사람들.
그들이 받은 것은 단순한 보상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미래!
앞으로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할지 명확한 길 안내를 받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전 이 회사에 뼈를 묻을 거예요.”
“저도요.”
넥플 엔터테인먼트 핵심 인력들의 다짐을 들으면서도 태연의 표정은 펴질 줄 몰랐다.
그 이유를 어느 정도 꿰뚫어 본 홍민석이 작게 말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그 사람들이 미워서 요청을 거절한 게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거잖아요.”
기사가 나가기 시작한 후 쏟아지는 요청.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요?
하지만 태연은 그들을 받아줄 수 없었다.
TO가 꽉 찼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들의 공백을 채운 이들은 그들보다 훨씬 실력과 경력이 뛰어난 이들이었다.
‘커트라인이 자연스럽게 높아졌어.’
Disney Fantastic World의 대박 행진은 여러 가지를 가져다줬다.
돈, 명예, 회사 규모의 확장 등등.
그중 가장 피부에 와닿는 것은 바로 ‘선망’.
많은 이들이 이곳을 선망하기 시작했다.
근래에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해외에 진출해야 했던 진짜배기 개발자들의 요청이 쏟아지고 있었다.
할 수 있다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 일하고 싶다고.
자기를 받아줄 수 있겠냐고.
이렇게 되며 자연스레 요구 스팩이 높아졌다.
떠났던 그들이 돌아오고 싶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퇴사할 때 품었던 목적을 달성하고, 누구나 인정하는 스타 개발자가 되는 것.
‘대표라고 회사를 마음대로 운영할 수는 없는 일이지.’
심지어 행정 업무까지 넥플 본사와 분리했고, 그 자리를 최고의 경력직 엘리트들이 입사하여 채운 상황이니…….
‘인연이 닿으면 언젠가 다시 함께할 날이 오겠지.’
아쉬움은 고이 접어 가슴 속 한편에 묻어두고, 태연은 지금 눈앞에 있는 동료들에게 집중했다.
“우리 시원한 맥주 딱 한 잔씩만 하고 들어갈까요?”
“오오! 좋습니다!”
“격렬하게 찬성합니다!”
“피디님 만세!”
* * *
-야. 회사 분리 이전해라.
-……?
-본사 건물에서는 더 이상 수용할 곳도 없어. 너희가 나가야 해. 정착금은 얼마든지 지원해 줄 테니 네가 원하는 장소, 빌딩으로 알아봐.
유진성 회장의 제안에 떠오른 것은 탈 판교!
많은 IT기업이 모여 있긴 하지만 교통이 썩 좋지는 않은 곳이다. 여러 가지 조건을 따져보면 강남만큼 좋은 지역도 없다.
‘일단 우리 집에서 가깝기도 하고…….’
인프라, 접근성 등등…… 모든 면에서 최상이다.
‘괜히 전통의 기업들이 본 사옥을 강남에 두고 있는 것이 아니지.’
일단 유진성 회장이 얼마든지 지원해주겠다고 했으니…….
열심히 발품을 팔아 역삼동, 위치 좋고 공간도 넓고 내·외관도 튼튼하고 깔끔한 장소를 찾아냈다.
-자식, 보는 눈 있네.
그렇게 시작된 분리 이전 작업.
-돈 많이 벌어서 이 빌딩을 사 버려. 이왕이면 이 건물이 네 회사 사옥이면 좋잖아. 아니면 아예 신축을 하거나.
새 목표도 생겼다.
언젠가는 우리 회사만의 온전한 사옥을 갖고 말겠다는…….
조금은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이 순간에도 새 직원들이 계속 입사하고 있었기에.
리모델링 업체를 선정하고, 디자이너들과 많은 상의를 하며 사옥 분리 이전 작업을 가속화했다.
그렇게 이전 작업이 끝나고.
“와, 뭔가 회사 생활의 질이 더 올라간 것 같아요!”
“본사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확실히 강남이 좋긴 좋네요!”
“다들 강남 강남을 외치는 이유가 있었어!”
직원들의 얼굴에서 생기가 생겼다.
그리고.
‘확실히 집 근처에서 출퇴근을 하게 되니 피로감만큼은 확실히…….’
태연 역시 그 마음에 공감할 수 있었다.
* * *
유진성 회장이 회사를 방문했다.
“야. 좋다! 본사보다 잘 해놨네?”
“AD님들의 활약이 컸습니다. 인테리어에 적극 관여를 했거든요.”
“그런 것도 할 줄 알았어?”
“집에서 워낙 많이 해봤고 특히 홍민석 AD의 경우는 대학 시절 인테리어가 부전공이었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학원을 다니며 공부한 적도 있었고요.”
“그렇게까지 한 이유가 뭐야? 아트 디렉팅 때문에?”
“관련 분야에 지식과 경험이 많아야 더 좋은 결과물을 만들 수 있으니까요.”
“이야. 그렇게까지 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진짜 대단한 사람 잡았구나 너?”
“그래서 어디 가지 못하게 꼭 붙들어두고 있습니다.”
태연의 농담 아닌 농담에 유진성 회장이 유쾌하게 웃었다.
유진성 회장과 임원들을 대상으로 한 사옥 가이드가 시작됐다.
“굳이 카페테리아와 구내식당은 짓지 않았습니다. 근처에 좋은 곳이 워낙 많아서 그냥 원하는 곳을 마음껏 이용하도록 복지비를 추가 지급했습니다.”
“야, 그래도 둘 중 하나 정도는 있는 게 좋지 않냐?”
“불필요합니다. 그냥 식비와 간식비를 달마다 따로 제공해 주는 게 낫습니다. 시설 짓고 사람 고용하고 업체 계약해서 운영하면…….”
태연은 고개를 저었다.
“개발 외적인 일에 시간을 많이 낭비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단호한 태연의 모습에 모두들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임원 한 명이 물었다.
“……직원들은 만족한답니까?”
“네. 오히려 좋다는군요.”
“정말요?”
“이게 바로 강남 스타일입니다.”
“오오!”
“스타벅스를 비롯한 브랜드 커피가 모두 모여 있고 유명 프렌차이즈 음식점에 맛집에…… 워낙 좋은 곳이 많이 몰려 있죠. 모처럼 대한민국 최고의 인프라 한복판에 온 건데…… 그곳을 이용하게 해주는 편이 낫습니다.”
유진성 회장이 옆에 있던 손영상 이사에게 물었다.
“야, 우리도 강남에 사옥 크게 하나 지을까?”
“돈 많으면 그렇게 하시던가요.”
“이 자식이…… 내가 못 할 것 같아? 야! 내 주식 조금만 엑시트하면 잠실 L타워 능가하는 사옥도 지을 수 있어!”
“이루어지지 않을 이야기는 하지도 맙시다. 어차피 그렇게 안 하실 거잖아요. 그렇다고 사비 때려 부을 것도 아니면서.”
“…….”
“태연아. 직원들 일하는 모습이나 보여줘.”
“……괜찮으신 겁니까?”
“일하는 중 아니잖아. 상관없어.”
업무가 아닌 사석이라면 세상 위풍당당한 손영상 이사였다.
사옥 구경을 마친 뒤 회의실에서 태연은 회사의 미래 청사진에 대해 밝혔다.
“본질은 게임 회사지만 규모를 확장해서 미디어와 테마파크, 스낵 컬처를 아우르는 종합 콘텐츠 회사로 발돋움할 계획입니다.”
현재 제작이 결정되었거나, 이미 진행 중인 프로젝트들을 공개한다.
“내년 1분기 재오픈을 목표로 엘크로스 리뉴얼 작업이 활발히 진행 중입니다. 판테온은 첫 번째 필드를 완성하고 폴리싱 작업을 진행 중이며 두 번째 필드를 구축하는 상황입니다. 이 속도라면 지금으로부터 2년 안에 클로즈 베타 테스트가 가능한 스펙을 뽑아낼 수 있습니다.”
“판테온 개발팀 지금 몇 명이야?
“현시점까지의 개발 인원은 총 95명이고, 잠재적으로 120명까지 확장할 계획이 있습니다. 엘크로스 역시 인원을 확장해 총원 70명을 목표로 인력을 채용 중입니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내용이 있었다.
콘텐츠 플랫폼 <밀키웨이>의 진행 상황이라던가.
얼마 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과천 디즈니랜드의 콘텐츠 개발팀 설립 이슈라던가.
지켜보던 이태영 이사가 한마디 했다.
“유태연 대표 하는 거 보고 있으면 참 신기하지 않습니까? 어느 것 하나 작은 일이 없는데 무슨 잡무 처리하듯 쉽게 쉽게 진행해 버리니…….”
모두가 고개를 끄덕여 공감하는 가운데, 유진성 회장도 한마디 했다.
“이 정도 능력이 있으니 우리 회사 미래 먹거리 사업들을 맡길 수 있는 거지. 너희들도 태연이한테 협조 잘해. 괜히 꼬장 부리다 망신당하지 말고.”
경고.
이 순간 모두가 속으로 생각했다.
‘과연 그럴 사람이 있을까?’
기류를 읽은 유진성 회장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마지막 각오 같은 거나 좀 들어보자.”
각오.
태연은 담담히 말했다.
“넥플 엔터테인먼트를 세계 최대의 콘텐츠 기업으로 만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