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한 게임 개발자가 너무 유능함 76화
52. 성공 후에 따라 오는 것들
“저 회사 나가겠습니다.”
기획팀장의 퇴사 통보.
이처럼 갑작스러운 소식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투자 제안이라도 받았나 보군.’
대부분의 개발자라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내 회사를 차려서 나만의 게임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
성공한 타이틀의 팀장이라는 경력은 그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태연은 묵묵히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이유는 묻지 않으십니까?”
“합당한 이유가 있었겠지요.”
“붙잡지도 않으시네요.”
서운하다는 표정.
참 이율배반적이다.
먼저 퇴사를 통보했으면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흔쾌하게 보내준다니 섭섭해진 것이다.
태연이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가 쓴 미소로 말했다.
“아무튼…… 그동안 많이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프로젝트 D의 기획팀장이 퇴사했다.
기획자 두 명과 프로그래머 한 명을 데리고.
* * *
“소식 들었어요? 전 기획팀장, 판교에 사무실 얻었는데 투자처가 넷폭스랍니다.”
점심 시간.
홍민석 AD가 전해 준 소식에 태연이 멈칫했다.
“넷폭스라면 중국 상해에 있는 회사 말하는 겁니까?”
“오, 잘 아시네요?”
“강건 대표가 마지막에 투자받았던 회사입니다.”
“아하. 그래도 꽤 건실한 회사라고 들었는데요. 갑질이 좀 있긴 하지만 다른 회사에 비하면 그렇게 심한 것도 아니고.”
“흠.”
“그쪽으로 프로젝트 D 출신 몇 명이 더 건너갈 것 같던데, 괜찮으시겠어요?”
이영애의 시선에도 걱정하는 기색이 있었다.
태연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본인의 선택 아니겠습니까? 프로젝트 중간에 회사 기밀 유출시키고 도망가는 것도 아니고, 제 할 일 제대로 해주고 떠나는 건데요.”
“그건 그렇긴 한데…… 저는 개인적으로 배신감이 좀 들어서요. 당장 며칠까지만 해도 같이 울고 웃고…… 서로 협력하며 정말 분위기 좋게 잘 지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단체 이적이라니…….”
이영애의 표정 또한 시무룩했다.
그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환상적인 팀워크를 자랑했던 필드의 전우가 아닌가?
그 전우가 팀을 떠나 버린 것이다.
“잘돼서 나중에 웃는 얼굴로 만나는 것도 좋습니다.”
태연도 초창기에는 그런 일을 겪으며 적잖은 허탈감과 배신감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오늘은 이것이 극히 자연스러운 상황이며, 리더라면 항상 이 같은 헤어짐을 각오하고, 닥치면 웃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걸 알게 됐다.
이영애는 한껏 푸념했다.
“그게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은 쉬운 게 아니라서…… 아무튼 저는 좀 섭섭하고 그러네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입이 댓발 튀어나온 AD 부부의 모습에 태연은 피식 웃고 말았다.
* * *
프로젝트 D 제작자 중 무려 절반에 달하는 인원이 이적했다.
관계성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국내에서 몇 안 되는, 성공한 콘솔 타이틀의 개발진이기 때문이었다.
타사 입장에서는 그들을 자사 프로젝트에 합류시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홍보 효과를 누릴 수 있다.
더불어 함께 일하는 과정에서 개발 노하우를 배울 수도 있으니 섭외에 열을 올리는 것도 당연했다.
개발자 입장에서는 돈도 더 주고 대우도 더 좋게 해주겠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고.
심지어 지금은 프로젝트도 끝난 상황 아닌가?
아트디렉터로서, 팀의 얼굴을 맡았던 이영애는 무척 허탈해했다.
“아무리 그래도 거의 절반에 달하는 인원이 빠져나갈 줄은 몰랐는데요.”
“AD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이건 게임 업계에서 지극히 당연한 일이에요.”
“아무리 그래도…….”
가득 찼던 스튜디오가 텅 비었다.
웃고 떠들며 재미있는 게임을 만들어보자고 결의를 다졌던 동료들이 절반씩이나 퇴사해 버렸다.
태연은 허탈감에 빠진 그녀를 위로했다.
“세상은 넓고 좋은 개발자는 많습니다. 기존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도 좋지만, 또 어떤 인연을 만나 어떤 과정을 쌓아가며 무엇을 만들게 될지 기대해 보는 것도 좋을 겁니다.”
한숨을 푹 내쉰 이영애가 물었다.
“그래서, 뭘 만들지는 정하셨어요?”
* * *
판데모니움과 달의 나라.
현재 태연이 프로젝트 D 차기작으로 고민 중인 것들이다.
현시점에서는 자신의 드림 프로젝트인 판데모니움 쪽으로 거의 기울이었다.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달의 나라는 내 취향이 아니야.’
호불호가 극명한 소설이다.
열광하는 사람은 반지의 제왕, 얼음과 불의 노래와 같은 선상에 올려야 한다고 난리다.
아닌 사람은 아무리 참고 보려고 해도 재미없어서 완독을 포기했단다.
‘억지로 다 읽긴 했지만 난 후자에 가깝지.’
아무 재미를 못 느끼는 이야기를 어떻게 게임으로 만들라는 건가?
오늘, 태연은 유진성 회장에게 거절 의사를 밝힐 생각이었다.
그런데.
“달의 나라를 거절하시겠다고요?”
“네.”
“진심이세요?”
이영애 AD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여보! 아니 이게 아니라…… 홍 AD님!”
기어이 홍민석을 부르더니.
“피디님이 달의 나라 게임화 제안을 거절할 생각이시라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상황을 그대로 전달하는 게 아닌가?
마치 일러바치듯!
그런데 홍민석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아니…… 그런 엄청난 제안을 받았으면서 거절하시겠다니…… 그러면 뭐하시려고요?”
“……판데모니움?”
“아니, 그건 우리가 만들 게임이고요. 프로젝트 D팀에 뭘 맡기실 거냐고요! 설마 다른 제안 온 거 없었어요?”
“아뇨. 많았죠. 일본에서 몬스터볼 IP 게임 제안도 있었고 디즈니에서는 달라는 거 다 줄 테니 AAA급 게임 한 번 같이 만들어보자는 제안도 있었고…….”
“아하, 그러니까 그런 해외 거대 IP에 마음을 빼앗겨서 우리나라 장르 문학, 환상 문학의 자존심이자 최초, 최후의 한국형 판타지 ‘달의 나라’를 거절하시겠다는 거군요! 제 말 맞습니까?”
“그, 그게 아니라…….”
태연을 당황하게 만들 정도의 광기!
이영애가 그 이유를 알려줬다.
“우리 부부가 달의 나라 팬이에요! 한정판도 사서 모았고 심지어 작가님 사인회, 팬 미팅도 갔었어요!”
“아하…….”
그렇게 말하는 이영애의 눈빛도 상당히 불타오르고 있었다.
홍민석이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주십시오!”
태연으로부터 이야기를 전해 들은 홍민석이 말했다.
“진행하시죠. 하셔야 합니다! 달의 나라는…… 우리나라 환상 문학의 자존심과 같은 글이란 말입니다!”
“……그 정도입니까?”
“항간에서는 반지의 제왕, 얼음과 불의 노래와 동급으로 쳐야 한다는 이야기도 많습니다.”
“…….”
“아니, 왜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그 정도로 열혈 팬이 많다는 뜻입니다! 달의 나라 팬덤은 거의 광신도 수준이에요! 인기 아이돌 팬덤 이상이라고요!”
“혹시 두 분도……?”
“하, 이제 와서 무엇을 숨기랴? 그렇습니다! 우리 역시 달의 나라 팬클럽 정규 회원입니다!”
태연은 고민했다.
자신이 무엇보다 신뢰하는 두 사람 아닌가?
그들이 이렇게까지 말할 정도라면 재고의 여지는 충분했다.
고민 끝에 태연이 제안했다.
“그렇다면 두 분 중 한 분이 프로듀서로서 제작을 해보시는 것도……?”
단번에 거절당했다.
* * *
-제가 포인트를 몇 가지 짚어드릴 테니 그걸 생각하고 다시 한번 읽어 보시죠. 정 보시기 힘들면 팬카페에 웹툰이 있으니 읽어 보시고요. 퀄리티가 상당히 좋습니다!
“흠…….”
게임화 제안 거절을 거절한다!
이것이 두 부부의 입장이었다.
태연은 한숨을 쉬며 부부가 권해준 자료들을 위주로 재독을 시작했다.
‘굉장히 심도 깊게 구성된 세계관이라는 건 알겠어.’
하지만 이야기 자체가 재미있는 건 잘 모르겠다.
‘혹시 내 취향이랑 너무 안 맞아서 그런 걸까?’
그래서 책을 굉장히 좋아하는 아내, 김윤아에게 권했다.
“이런 책인데…… 한 번 읽어 볼래?”
“……갑자기 이걸 권하는 이유가 뭐야?”
“사실…….”
사연을 말했더니 김윤아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면 해야지! 심지어 오빠가 가장 신뢰하는 AD님들도 적극 권장하잖아!”
태도가 심상치 않았다.
“너 혹시 이거 읽어봤어?”
“응! 나 이 소설 팬이야! 팬카페도 가입했어!”
스스로를 달의 나라 열혈팬이라 자처하는 그녀!
그녀의 문학적 소양이 얼마나 깊은지, 작품 보는 안목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잘 아는 태연은 혼란을 느꼈다.
“오빠가 책보다 게임만 좋아해서 그런 것 같은데…… 이거 진짜 굉장한 작품이야. 재미도 있고 문학적 가치도 높고…….”
심지어 슬그머니 권유하기도 한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오빠가 게임 만든다고 하면 게임 팬들도 굉장히 좋아하지 않을까?”
“으음.”
고민 끝에 물었다.
“그러니까, 넌 내가 이 작품을 게임화했으면 한다는 거지?”
“응. 요즘 오빠가 최근 발매한 콘솔 게임 해보고 있는데, 그런 식으로 작품성을 고려해서 잘 만들면 좋을 것 같아.”
김윤아의 적극적인 추천에 마음이 크게 흔들린다.
‘일단 책부터 다시 읽어보고…… 그래도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는다면 그때는 어쩔 수 없지.’
* * *
2주차.
사업팀장이 소식을 전해왔다.
“스팀에서의 판매량만 300만 장을 돌파했고 패키지까지 포함하면 450만 장을 넘겼습니다. 500만 장도 시간문제입니다.”
기쁜 소식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특별 보너스 지급해 줄 테니 직원 앞에서 목에 힘 좀 줘봐!”
“……얼마 전에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건 인센티브. 이번 건 내가 주는 특별 보너스!”
“…….”
“네 덕분에 내가 요즘 기를 펴고 산다! 들어는 봤나? 갓진성이라고…… 으하하!”
근래에 유진성 회장에게 언론, 네티즌들의 칭찬이 쏟아지고 있었다.
태연의 진면목을 일찌감치 꿰뚫어 보고 지원을 아끼지 않은 행보를 높이 평가한 것이다.
믿음과 신뢰의 투자가 성공한 좋은 케이스라나?
일단 보너스를 준다니, 태연은 고개 숙여 감사하게 받았다.
그런데 이 소식이 회사 전체로 퍼져 나가며 약간의 소란이 발생했다.
-해도 너무한다. 또 넥플 엔터테인먼트 쪽만 챙기는 거야? 특별 보너스라니…… 넥플에 5년 넘게 근무하면서 처음 들어보는 소리임.
└주려면 다 같이 줘야지. 누구는 주고 누구는 무시하고…… 같은 회사 다니는 거 맞나? 사기 떨어지게 정말…….
시기와 질투.
그러나 모두가 이 같은 의견에 공감하는 건 아니었다.
-불평하는 애들은 어디 스튜디오냐? 니들은 대체 뭘 했는데?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저 팀은 한 만큼 받은 거임. 2주 만에 토탈 450만 장을 팔아치웠는데…… 개발비 20억도 안 쓰고…… 내가 유 회장이라도 이것저것 이유 붙여서 마구 챙겨줬을 듯.
└보너스 받고 싶으면 너희도 대박을 쳐. 그러면 되잖아?
유진성 회장이 사비를 털어 거액의 보너스를 지급했다는 소식에 가장 크게 반응한 사람들은 퇴사자들이었다.
퇴사를 하긴 했지만 안 좋게 나간 것이 아니었고, 남아 있던 인력들과 연락망이 가동되고 있는 중이었기에 상세 금액을 들을 수 있었다.
-얼핏 들었는데 특별 보너스로 인당 수천만 원 정도 받았다고 함.
└첫 인센티브도 그 정도 나오지 않았었나? 그게 끝인 줄 알고 나간 건데…… 이럴 줄 알았으면 더 남아 있을 걸 그랬음.
└그러게요. 설마 500만 장 돌파하면 또 챙겨주려나?ㅜㅜ
그들의 추측은 맞았다.
3주차에 접어들며 토탈 판매량이 500만 장을 돌파했다는 기사가 대한민국을 비롯한 북미 지역에도 크게 퍼졌다.
이에 넥플에서는 남아 있는 프로젝트 D 개발자들에게 두 번째 인센티브를 지급했고, 그 금액 역시 상당하다는 소문이 퍼진 것.
심지어 협업사인 디즈니에서도 심상치 않은 대가를 지불했다는 내용이 알려지며 안 그래도 아픈 배를 더욱 곯게 만들었다.
놀라운 소식들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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