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한 게임 개발자가 너무 유능함 69화
46. 예상을 뛰어넘다(3)
애초에 체급이 큰 게임이 아니었다.
물론 최선을 다해 만들긴 했지만, 그래픽이 압도적인 것도 아니고, 뭔가 굉장한 시나리오나 획기적인 게임성을 넣은 것은 아니었다.
애초 가성비를 우선으로 만든 게임이었기에.
그런데 지나칠 정도로 평가가 좋으니 당혹스러울 지경이었다. 심지어 캐릭터 원작 배우까지 섭외해서 성우 녹음을 하고 대대적으로 프로모션을 진행하자는 제안은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뭘 어떻게 해야 할까?’
여기서 제작, 프로모션 비용을 더 늘리는 건 지금도 꺼려진다.
‘이건 가성비 게임이지, 엄청난 걸 기대하고 만든 대작이 아니야.’
주위의 부추김에 휩쓸려 스스로가 정한 선을 넘는 순간 걷잡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곤 한다.
태연은 오랜 경험으로 그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E3 출품은 홍보로 나쁠 것 없으니 굳이 거절하지 않았지만…… 이 이상은 오버야. 계획대로 진행한다.
당혹감은 금방 사그라들고 평정심이 찾아왔다.
이 역시 신비한 팔찌가 남긴 문신의 효능일까?
태연은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주변 반응 따위는 개의치 말자. 계획대로 진행한다.’
* * *
김윤아의 올스타 갈라쇼 특집 1부가 방영됐다.
지상파 M본부에서!
심지어 오후 저녁 시간대에.
“내가 출연하는 방송을 오빠랑 같이 보려니 민망하다.”
유난히도 안절부절하는 그녀.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지금 장난할 때야? 쇼가 우습게 보여? 관객들 앞에서도 이런 식으로 할 거야?!
카리스마 넘치는 여장부의 모습!
수많은 이들을 눈빛과 기세로 제압하고 지휘하는 모습에 태연은 신선한 충격을 느꼈다.
반면 윤아는 울상이었다.
“저거 뭔가 이상해. 악마의 편집이야! 나 저 정도로 엄격하게 굴지는 않았단 말이야!”
그야말로 얼음여왕이 따로 없었다.
이해는 된다.
본인의 이름을 건…… 체조 역사상 처음 진행하는 월드 투어가 아닌가?
눈빛이 칼날처럼 예리하다.
말투는 북풍한설을 연상케 할 정도로 냉정했다.
그 모습에서 태연은 되려 안쓰러움을 느꼈다.
‘정말 고생이 많았구나.’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는 하지만, 남모를 곳에서 저렇게 고생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가만히 윤아를 안고 다독이며 방송을 끝까지 시청했다.
윤아가 눈치를 보며 소심히 물었다.
“나 좀 이상하지 않았어?”
“뭐가?”
“막 소리 지르고 화내고 괜히 차갑게 굴고 그랬잖아.”
태연은 피식 웃었다.
평소 여리고 장난기 가득한 모습만 보았기에 이번 방송에서 드러난 모습이 조금 의외라고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충격적일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세상에 부드러운 카리스마 따위는 없어. 리더는 저래야지. 잘한 거야.”
특히 한가락 하는 실력자들이 모인 집단이라면 좋은 말 따위는 더더욱 먹히지 않는다.
압도적인 실력과 굳건한 권위만이 그들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이다.
윤아는 그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실행한 것이고.
태연은 윤아의 얼굴을 쓸어주며 미소 지었다.
“과연 체조 여신. 대단해. 못하는 게 없다니까.”
그 말에 비로소 마음이 놓인 듯, 윤아가 헤실헤실 웃으며 품에 파고들었다.
그러다 빼꼼 고개를 들고 말했다.
“그거 알아?”
“뭐?”
“방송에서 보인 모습들, 나 사실 오빠 따라 한다고 나름 노력해 본 거야.”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한다.
“어디서 뭘 봤기에?”
회사에서의 모습은 단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을 텐데……?
“이거 보고 참고했지!”
공항에서의 인터뷰 때 영상!
‘아…….’
몰려든 팬과 기자들을 기세로 제압하고 통제하는 자신의 모습이…… 굉장히 생생한 화질로 담겨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런 것도 있더라.”
몬스터 이터 월드 챔피언십.
현장을 지휘하는 모습을 누군가 촬영해 게임 커뮤니티에 공유했다.
“오빠 회사 모습에 대해서도 후기가 굉장히 많던데.”
-너희들, 살면서 누구한테 눈빛으로 처맞아본 적 있냐? 난 있다. 유태연 본부장님 너무 무섭다. 컨펌 받으러 갈 때의 그 기분…… 혹시 공감하는 사람 있냐?
└나! 작업물 확인하다가 갑자기 말없이 슥 쳐다보실 때. 내가 뭔가 또 잘못 했구나! X됐다 싶지. 그 찰나의 침묵이 정말 지옥 같음. 그때 눈빛이 정말…….
└님들은 관리자급이 아니라 그 정도로 끝난 거임. 파트장급부터는 정말 얄짤 없음. 냉혹하게, 정말 가차 없이 탈탈 털어서 상대를 반 시체 상태로 만들어 버린다. ㅠ_ㅠ
└처절하게 당해본 사람들 다 티가 남. 멀리서 그분 실루엣만 보여도 눈치 보거나 도망가기 바쁘던데…… ㅋㅋ
‘이건 또 뭐야?’
어처구니없어하는 태연에게 윤아가 씩 웃으며 말했다.
“이런 거 찾아보는 게 그렇게 재미있더라고.”
“그래서, 이런 걸 따라 했다고?”
“응. 난 이런 큰 집단을 이끌어 본 적이 없잖아! 내심 고민이 많았거든. 어떻게 해야 리더 역할을 잘할 수 있을까. 멋진 공연은 만들 수 있을까. 하고.”
그 고민 끝에 내린 해답이 태연을 모방하는 것이었다고.
그날 밤.
잠자리에 들기 전 태연은 심각하게 고민했다.
‘요즘 회사에서 내 이미지가 그렇다는 건가?’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 * *
이른 아침.
회사에 도착해 출근 체크를 하고 간단히 이메일 업무를 처리했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서 카페테리아로 이동, 아이스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창가에 앉아 시간을 즐겼다.
‘슬슬 출근 시간이군.’
잠시 후,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태연은 휴대폰을 꺼내 들고 업무를 하는 척,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확인했다.
“아침에는 모닝커피를 한 잔…… 으헉!”
“왜 가다가 멀…… 헉!”
기세 좋게 들어서다 자신을 보고 크게 놀라는 사람들.
단순히 움찔하는 선에서 그치는 경우도 있지만 아주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돌리는 경우도 있었다.
대체로 저승사자를 본 듯한 얼굴 표정은 비슷했다.
‘나한테 몇 번씩 크게 혼났던 사람들이군.’
일반 개발자들은 그냥 움찔하거나,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반면 파트장급 이상의 관리자 인력들은 하나같이 경기를 일으키는 수준이다.
‘내가 그렇게 심하게 대했었나?’
그러고 보니 자신의 주위로 사람이 오지를 않는다. 아예 없는 건 아닌데, 대체로 자신의 통제를 받지 않는 신규 개발팀, 혹은 총무팀 인력들이었다.
‘이런 식이었군.’
쓴 미소를 감추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본 순간.
“…….!”
반응이 걸렸다.
움찔거리며 황급히 시선을 피하거나.
“아,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급히 일어서서, 혹은 쪼르르 다가와서 군대 신병마냥 인사한다.
태연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내 이미지가 어쩌다가 이렇게 됐나.’
커뮤니티, 넥플 개발자들의 증언은 결코 과장된 게 아니었다.
‘앞으로 카페테리아나 식당 이용을 좀 자제해야 하는 걸까?’
한편으로 의아한 점도 있다.
‘내가 무슨 정색을 하며 크게 혼내거나 하지도 않았는데…….’
왜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명사, 비슷한 게 되어버렸는지 모를 일이다.
‘혹시 우리 스튜디오 사람들도……?’
평판에 관심을 갖는 것도 잠시뿐이었다.
‘쓸데없는 데 신경 쓰지 말고 일이나 잘하자.’
해야 할 일도 많은데 그런 것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이태영 사업 총괄 이사가 찾아와서 새로운 소식을 전해줬다.
“프로젝트 D를 혹시 모바일로도 제작해서 출시할 생각이 있냐고 물어보더라.”
“……디즈니 본사에서 나온 이야기입니까?”
“응. 아무래도 요즘은 다들 모바일 게임을 많이 하잖아. 퀄리티 보더니 이래저래 욕심이 나기 시작하나 봐. 어때, 가능하겠어?”
그렇게 말하는 이태영 이사의 얼굴에도 기대감이 가득했다.
태연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
“못할 것 없습니다만 퀄리티 저하는 어느 정도 각오해야 합니다. 모바일 환경에 맞게 최적화를 해야 하니까요.”
“그거 작업하는 데 얼마나 걸릴까?”
“6개월 정도 걸리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됐네. 그러면 부탁 좀 하자. 내가 뜯어낼 수 있는 건 최대한 뜯어볼 테니까 넌 바로 작업에 착수해.”
“알겠습니다.”
팀장급 인력을 회의실에 불러 이 소식을 전한 뒤 물었다.
“콘솔, PC 버전 퀄리티를 그대로 가져올 수는 없을 테니 이런 부분을 대처할…… 모바일 버전만의 특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아이디어 있습니까?”
다양한 아이디어가 나왔다.
수집 콘텐츠 도입부터 메인 시나리오 챕터 클리어 시 해당 세계관 경영 시뮬레이션 게임을 개방하자는 이야기까지.
태연은 고개를 저었다.
“작업 폼이 쓸데없이 커지는 건 지양하겠습니다. 본 게임의 성격 자체를 바꿔 버리는 내용도 마찬가지입니다.”
* * *
홍민석, 이영애 AD 부부는 E3 참가를 위해 미국 켈리포니아로 떠났다.
이 시기, 공교로운 소문이 퍼졌다.
넥플의 최대 라이벌이자 MMORPG의 명가, 네로 소프트에서 신작을 선보일 예정이라는 것이다.
다름 아닌 E3에서!
[네로 소프트. 6년 동안 준비한 신작을 자신 있게 선보인다.]
[신화 온라인으로 MMORPG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던 네로 소프트. 다시 한번 세상에 도전장을 내밀다!]
극단적인 상업성으로 무수히 많은 비난을 받아왔지만 어쨌든 국내 게임 업계를 선도하고 있다는 평을 듣는 네로 소프트였다.
심지어 6년 동안 수백억을 들여 만든 신작이라니, 기대감이 쏟아지는 것도 당연했다.
그에 비하면 넥플과 디즈니의 공동 출품 소식은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화제가 안 된 게 아니라 처음부터 이슈화를 시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테스트에서 호평을 받은 사실이 화제가 된 적이 있긴 했지만 금방 사그라들었고, 일단 게임 내용 자체가 크게 화제가 되거나, 업계를 뒤흔들 내용은 아니었다. 기존 디즈니 IP에 오리지널 소스를 입혀 게임화하는 건 수없이 시도되어 왔던 일이었으니까.
이런 건 사전에 아무리 돈을 쏟아부어 홍보를 해봐야 큰 효과가 없다.
유저들로부터 게임성을 인정받아 긍정적 입소문이 퍼지는 것을 유도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태연이 내세운 마케팅 전략이었다.
“당시에는 피디님 말에 공감했고 그게 유일한 승부수라는 걸 인정했지만…… 막상 현장에 와보니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네.”
“뭐…… 전 세계 게임 명가들이 작정하고 승부수를 띄우는 날이니까.”
괜히 세계 최대의 게임쇼가 아닌 것이다.
이영애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현장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솔직히 도착 전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 자신 있었는데…… 이제는 망신만 안 당했으면 좋겠어.”
“피디님이 어디 가서 망신당하지 않을 정도는 된다고 말씀하셨으니 믿어 봐. 그리고 설령 게임이 별로라도 야유는 나오지 않을 거야.”
“어째서?”
“다른 건 몰라도 미모만큼은 당신이 1등일 테니까.”
“…….”
평상시라면 어이없어서라도 웃었겠지만 지금 이영애의 반응은 굉장히 냉담했다.
‘그만큼 긴장을 크게 한 탓이겠지.’
홍민석은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헛기침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