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한 게임 개발자가 너무 유능함 64화
43. 등판
아침부터 회사 분위기가 굉장히 어수선했다.
“송재희 피디, 결국 엘크로스 뒷수습 못 하고 런했다며?”
“아니, 그래도 초반 부분은 그럴듯하게 잘 만들었잖아. 그런데 왜 후반에 가서 그렇게 망치고 뒷수습도 못 한 거야?”
“내가 알아보니 초창기 네로 소프트에서 함께 넘어왔던 팀장, 파트장급 인력들이 중간에 나가서 그렇게 된 거래. 그 사람들은 다시 네로 소프트로 돌아가서 신화 온라인 3 준비 중이라더라.”
이런 이야기는 고스란히 인터넷 커뮤니티로도 이어졌다.
-엘크로스 피디 뒷수습 못 하고 런했다는 게 사실이냐?
└놀랍게도 사실임.ㅜㅜ
└임원들은 퇴사하겠다니 하라고 놔뒀대?
└송재희 X나 무능한 놈임. 남아 있겠다고 해봐야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걸 윗대가리들도 안 거지.
└명색이 신화 온라인 개발자인데…… 그리고 초반 부분까지는 좋았잖아?!
└문제는 그 개발 실력이 신화 온라인 초창기 개발 수준에 멈춰 있었다는 거지. 그 초반 부분도 중간에 퇴사한 인력들이 다 해놓고 간 거였음.
└헐…… 엘크로스 스튜디오 분위기 지금 어떠냐? 피디는 누구야? 설마 송재희 뒷수습이고 나발이고 다 팽개치고 걍 런한 거 아니지?
└그건 아님. 진작부터 프로그램 팀장님이 실무 지휘 하고 있었는데 보름 전부터 아예 본격적으로 인수인계했었음.
└그래도 인수인계를 하긴 했네.
└웃고 넘기려고 해도 동종업계 사람으로서 상황이 너무 처참하니까 걱정만 된다. 이거 수습 못 하고 망하면 대형 프로젝트 앞으로 안 하려고 할 게 뻔한데…….
엘크로스의 처참한 실패와 송재희 피디의 자진 퇴사 소식은 업게 분위기마저 무겁게 했다.
무려 수백억을 들인 초대형 프로젝트였다.
개발이 진행되는 동안 넥플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했다는 사실도 개발자라면 다 아는 사실이었다. 이런 이유로 타 회사에서 넘어왔던 고급 인력이 꽤나 많기도 했고.
그런 프로젝트가 참담하게 망해 버렸으니, 이후 같은 장르의 신규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었던 회사들의 반응이 어떨지는 불 보듯 뻔했다.
-만약 끝까지 수습 못 하고 서비스 종료하면 넥플 만의 재앙으로 끝나지 않을 거임. 그런데 프로그램 팀장이 그거 수습할 능력은 되나?
└실력이 없는 사람은 아닌데 기획, 아트 쪽 역량은 그저 그런 수준임. 평생 프로그램만 해왔던 사람이라…….
└아…….;;;
* * *
“엘크로스,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계획에 대해 설명해 봐.”
송재희의 뒤를 이어 총괄 프로듀서가 된 전 프로그램 팀장의 안색이 하얬다. 그래도 준비한 게 있는데, 주섬주섬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하려는 모습이었지만 지켜보던 이들은 혀를 찼다.
‘저래서야…….’
‘보나 마나 뻔하군.’
모두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에, 그러니까…….”
대책을 설명하라고 했더니 뜬구름 잡는 소리와 변명만 늘어놓고 있었다. 본인도 마땅한 대책이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어쩐지 유진성 회장의 표정이 굉장히 평온해 보였다.
‘불같이 화를 내실 줄 알았는데…….’
‘설마 다 포기하고 마음을 비우셨나?’
유진성 회장은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고요한 시선으로 경청할 뿐.
“제, 제가 준비한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준비된 프레젠테이션이 끝나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제 질문을 던져야 하는데.
“…….”
모두가 유진성 회장의 눈치만 보고 있다.
손영상 이사와 이태영 이사마저도.
“후우.”
유진성 회장이 무거운 한숨과 함께 마침내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해보자. 너 자신 없지?”
“네, 네?”
“뭘 못 들은 척하고 있어? 엘크로스 회생시킬 자신 없잖아. 그러니까 계속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는 거 아니야. 안 그래?”
“그, 그건…….”
우물거리던 신임 프로듀서는 고개를 떨궜다.
“쯧,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하나뿐이군.”
“……?”
방법이 있긴 있어?
대다수가 놀라는 가운데 손영상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방법이 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유태연. 네가 등판해야겠다.”
“……!”
깜짝 놀라 웅성거리는 사람들.
손영상이 한마디 했다.
“저기…….”
“넌 입 다물고 있어 인마.”
“…….”
“자신 있으면 네가 뒷수습할래?”
할 말이 많았던 손영상이 입을 다물었다.
“아니면 저거 뒷수습할 수 있을 인재 네가 데려오던가.”
그런 사람 있었다면 진작 데려왔지.
물론 업계 어딘가에 숨겨진 실력자가 분명 있겠지만, 그렇게 쉽게 찾아 스카우트할 수 있다면 헤드헌터가 왜 필요하겠나?
“여기서 유태연 개발 실력 의심하는 사람 있어?”
있을 리가 없다.
그나마 흠이 될 만한 게 아틀란시아 전기의 크게 하락한 매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조차 이번 분기 업데이트의 성공으로 매출이 수직 상승하는 중이다. 결국 유태연이 옳았던 것이다.
‘그래, 유태연이라면……?’
‘개발 실력 하나는 최고니까 어쩌면 이번에도……?’
그런데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다.
“전 반대합니다.”
“으잉?”
“어?!”
바로 유태연 본인이었다.
“제가 무슨 사고 수습 전문반도 아니고, 저도 이제 제 게임에만 집중하고 싶습니다.”
“너 라이브 본부장이잖아! 네 관할 구역에서 일어난 사고니까 감당해야지!”
“라이브 본부장은 개발을 대행해 주는 직책이 아닙니다.”
“그건 아는데 너밖에 없다. 다들 네가 해야 한다고 하잖아!”
치열한 논쟁을 교환하는 두 사람.
그러나 사실 이면에는 사연이 있었다.
‘나는 뒤에서 조언 정도만 하고 개발은 신임 피디에게 맡기기로 했는데…….’
유진성 회장이 말을 바꾼 것이다.
물론 상황은 이해가 된다.
지금 프로그래머는 도저히 총괄 프로듀서의 제목은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또 남의 뒷수습이라니…….’
이런 건 해봐야 남는 게 없었다.
무엇보다도.
‘넥플 엔터테인먼트 일만으로도 해야 할 게 태산이야.’
판테온, 프로젝트 D, 그리고 이영애와 추진 중인 콘텐츠 플랫폼 등등.
“야, 정말 안 되겠냐? 내가 이렇게 부탁하는데?”
전략을 바꿔 동정심에 호소하는 유진성 회장!
‘마음이 약해지면 안 된다. 물러서면 피곤해진다.’
그런데 여기서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시, 실은 저 역시 유태연 본부장님의 도움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처참하게 깨지고 혼자 시무룩하게 있던 신임 엘크로스 피디가 나선 것.
“사실 오픈 베타 당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영문 모를 거듭되는 다운으로 고생하고 있을 때, 태연이 나서서 단번에 원인을 찾아내고 해결책을 제시했던 일.
“제가 프로듀서가 되고 알게 된 사실인데, 본부장님께서는 사내 테스트 이후 송재희 피디에게 피드백 문서를 전달한 일이 있었습니다.”
알게 모르게 엘크로스를 위해 해준 일들을 쭉 나열한다.
“결정적으로 아틀란시아 전기를 다시 되살려 낸 최근의 일도 있고, 내부에서도 유태연 본부장님의 적극적인 지휘를 원하는 분위기가 가득합니다.”
태연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느끼며 묻는다.
“그래서 무엇을 원하는 겁니까?”
“디렉팅을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배수의 진을 친다.
“총괄 피디까지 그렇게 떠난 마당에, 더 이상 회생의 여지가 없다면 우리 역시 남아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건 안 된다.
실력 문제를 떠나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게임을 만들어 온 개발자들이 떠나면 문제가 커진다.
프로그램은 특히 더욱.
“야,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진짜 나서주면 안 되겠냐?”
유진성 회장의 눈치에 손영상, 이태영 이사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태연아 게임 때문에 떠나지 못하고 남아 있는 개발자와 유저들이 불쌍하지도 않아? 네가 조금만 수고해주면 모두 행복해질 수 있는데…….”
“게임 좀 살리자. 응?”
태연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를 너무 잘 알아.’
어떻게 해야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는지.
치사하게 개발자와 유저들을 끌어들일 줄이야!
‘하지만 이대로 받을 수는 없지.’
“조건이 있습니다.”
누구도 ‘회장님, 이사님들 지시 사항인데 감히 조건을 걸어?’라고 말하지 못했다.
능력이 있고 없고를 떠나 업무 부담이 굉장히 크기 때문이다.
“뭔데?”
“개발을 완료할 때까지 손 이사님께서 본부장 자리를 맡아주셨으면 합니다.”
손영상이 크게 당황한다.
태연은 묵묵히 말했다.
“송재희를 데려와 초대형 프로젝트를 맡긴 분이 바로 이사님 아닙니까?”
“…….”
이번만큼은 평소 운운하던 ‘퇴사’를 언급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책임을 통감할 뿐.
“기한은 1년.”
그 말의 의미는 다른 이들에게 다르게 들렸다.
유진성 회장이 물었다.
“1년이면 저거 살릴 수 있어?”
“지원이 좀 필요하지만…….”
“야, 이 마당에 못 해 줄 것도 없어. 해달라는 거 다 해줄 테니까…… 빨리 말해봐. 1년이면 되냐?”
“충분합니다.”
“좋아! 야, 손 이사. 해달라는 해 줘.”
“그렇게 하겠습니다. 단, 직책을 공식으로 넘겨받는 게 아니라 잠시 서포트 해주는 정도로 하겠습니다.”
가볍게 돕는 시늉만 하겠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본부장 자리를 내려놓음으로써 같이 내려놔야 할 혜택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배려였다.
“너 제대로 해라. 이전처럼 하는 둥 마는 둥 하지 말고.”
“물론이죠. 젊은 시절 못지않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좋아. 그래야지!”
갑자기 기운이 샘솟았는지, 유진성 회장이 테이블을 내려치며 힘차게 외쳤다.
“다들 들었지? 앞으로 1년 동안은 엘크로스 재생 프로젝트 기간이야. 태연이에게 무조건 협조해. 알겠어?”
“네!”
* * *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태연은 문서 한 장을 화면에 띄웠다.
‘결국 이걸 쓰게 되는군.’
회의에 함께 참여했던 홍민석 AD가 뒤에서 문서 내용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뭐야, 이미 다 준비하셨네요?”
“…….”
“이럴 거면 그냥 처음부터 받아들이시지 그러셨어요. 이렇게 다 준비되어 있었는데.”
화면에 엘크로스는 어떤 이슈를 어떤 식으로 수정해야 할지, 팀과 파트별 작업 지시 사항들이 명확히 적혀 있었다.
페이지 수도 굉장히 많았다.
오늘과 같은 날을 사전에 대비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태연은 담담하게 말했다.
“원래는 이것을 신임 피디에게 넘겨주고 전 뒤에서 조언자 역할만 하기로 했었죠.”
“했었다? 그 말씀은 마치 송재희 피디가 런할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는 것으로 들리는데요?”
“넷펀즈 사업팀장하고 모종의 만남을 갖고 있다가 저에게 들켜서 크게 당황한 전적이 있었습니다.”
“아하…….”
“아무튼, 원래 회장님과 했던 이야기는 거기까지였는데 일이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군요.”
무거운 어조에 홍민석은 애써 위로했다.
“그래도 본부장 업무를 잠시나마 내려놓은 게 어디입니까?”
“프로젝트 D도 마무리 단계여서 집중할 시간이 필요한데 설마 이런 일이…….”
한숨 쉬며 일어서는 태연.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화이팅하십쇼!”
멀어지는 태연의 뒷모습을 보며 홍민석 AD가 혼잣말을 했다.
“소방관이 따로 없다니까. 화재 진압 전문가야. 우리 피디님.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