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한 게임 개발자가 너무 유능함 63화
42. 런!
엘크로스의 정식 서비스가 시작됐다.
캐시 상점이 공식 오픈 하는 순간 다시 욕설이 쏟아졌다.
-야, 무슨 신화 온라인 캐시 샵 그대로 가져왔냐?
└내 눈을 의심했다. 유료 버프 물약만 몇 종류에 강화 주문서…… 심지어 돈 주고 강화하는 건데 실패 확률이 있음.ㅋㅋ
└게임 제대로 하려면 프리미엄 패키지 9만 9천 원짜리 질러야 하네. 인벤토리 10칸 확장 경험치 5% 증가……. 이건 신화 온라인 2에 있던 그 패키지 그대로잖아?
└그런데 이런 패키지는 요즘 다 그러지 않나?
└그래도 다른 게임들은 이거 안 사도 어떻게든 게임은 할 수 있게 해주는데 엘크로스는 얄짤 없음. 인던 아이템 종류만 해도…….
한편 넥플에서는 마케팅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5년 동안 무려 500억이나 썼는데…….”
“제작비는 회수해야지!”
“제작비 회수도 문제지만 체면은 살려야……!”
그런데 아무리 돈을 쏟아부어도 효과가 없었다.
잠깐 동접자가 늘어나긴 했지만 재 접속률이 현저히 낮았다. 유저 감소 추세를 확인하는 게 두려울 지경이었다.
심지어 운영에서도 문제가 많으니…….
-무성의한 매크로 답변…… 넥플 정말 징글징글하다. 겜 띄울 생각이 없구나?ㅋㅋㅋ
-처리를 안 해주네. ㅅㅂ 내 캐릭터가 땅에 박혀서 움직이지를 않는다고! 재접속해도 해결이 안 된다고!!!
* * *
넥플 수뇌부는 초상집 분위기였다.
“이거 분위기가 너무 안 좋은데요? 마케팅에 돈 태우는 거 여기서 멈추죠. 더 해봐야 효과도 없는 것 같은데…….”
“…….”
회의실에서 대책 대신 깊은 한숨 소리만 흘러나오고 있었다. 유진성 회장은 한쪽을 흘끔 거렸다.
송재희 피디가 시체처럼 앉아 있었다.
“송 피디. 괜찮겠냐?”
“네?”
“이대로 괜찬겠냐고.”
“…….”
현저히 자신감이 떨어진 모습.
머뭇거리던 송재희를 대신해 손영상 이사가 나섰다.
“어떤 게임이든 런칭 초창기에는 말이 많지 않습니까? 전력을 다해 처리하고 있으니 곧 안정화될 겁니다.”
“정말?”
“네?”
“나도 OBT 때부터 꾸준히 플레이 중이거든? 오늘 아침도 잠깐 하다가 나왔는데 내가 보기에는 영 가망이 없어 보이던데…… 야, 고렙 인던존에 사람이 없어서 파티가 안 돼!”
“…….”
“이게 말이 되냐? 사람이 부족해도 파티가 안 된다는 게? 어찌 어찌 인던 들어가도 할 수 있는 게 뭐 몹 잡고 템 먹고…… 이게 다야. 콘텐츠가 없어도 너무 없어!”
“저, PVP가 있는…….”
“야, 무슨 버그 대전이 따로 없더라. 애들이 하나같이 정상적으로 싸우지를 않고 다 무슨 버그만 사용하던데?”
“…….”
유진성 회장은 한숨만 푹 쉬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이번 달까지 버그 싹 처리하고 정상화시켜 놔. 마케팅은 게임이 게임다운 모습을 갖춘 뒤에 해도 늦지 않아. 알았어?”
* * *
회의실을 나선 유진성 회장은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냈다.
잠시 후 전화가 걸려왔고.
-바빠서 나갈 시간 없습니다.
태연 특유의 냉랭한 음성이 돌아왔다.
유진성 회장은 울컥했다.
“야, 너 진짜 너무하는 거 아니냐? 내가 답답해서 죽을 것 같다는데, 걱정도 안 돼?!”
-…….
“딱 한 시간만 시간 좀 내주라. 나 하소연할 곳이 없어서 그래.”
-…….
“손영상 그 자식은 송재희 역적 놈 편만 들고 있고 이태영이는 북미 계약 때문에 출장 가 있고…… 너 말고 하소연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다. 응?”
나지막한 한숨 소리.
-어디로 가면 됩니까?
“잠깐이면 된다더니…….”
“야, 회사 근처에서는 편히 대화할 수 있는 곳이 없잖아!”
“…….”
정문에서 보자더니, 기다리고 있는 건 유진성 회장의 검은 세단이었다. 현재 태연은 반납치를 당한 채 영문 모를 곳으로 끌려가는 중이었다.
도착한 곳은 운중동 외진 지역에 자리잡은 작고 예쁜 카페였다.
“내 지인이 운영하는 곳인데 사람이 잘 안 와서 좋아. 자주 찾는 곳이야.”
“말하는 싸가지…… 인마. 친구 망해가는 게 좋아?”
머리가 하얗게 센, 금테 안경의 중년 바리스타가 쓴 소리를 던진다.
유진성 회장이 소개한다.
“태연아 인사해라. 내 친구 김종복이라고, 이 친구가 넥플 최대 투자자야.”
“……!”
최대 투자자?
태연의 놀란 표정에 김종복이라는 이름의 바리스타가 세게 말했다.
“대단한 건 아니고, 사업 구상 당시 돈 없다고 하도 찡찡대서 투자 명목으로 빌려준 정도라오.”
“아, 그렇군요. 안녕하십니까. 게임 개발자 유태연이고 넥플에 근무 중입니다.”
“물론 잘 알고 있어요. 우리 대한민국이 자랑하는 체조 여신님의 남자 아닙니까? 정말 반가워요! 하하하!”
호탕한 웃음소리와 거리낌 없는 환대.
‘회장님이 왜 자주 찾으시는지 알 것 같군.’
태연은 벌써부터 이곳이 좋아지려 하고 있었다.
커피도 굉장히 맛있었다.
“지금까지 먹어 본 모든 커피 중 최고입니다.”
“그럴 거야. 저 친구가 대한민국 1세대 바리스타인데 외국에서도 마스터라고 부르며 쫓아올 정도거든!”
“투자자에 1세대 바리스타까지…… 대체 정체가 뭡니까?”
“불알친구. 투자 회사에서 근무하다가 나와서 전업 투자 시작했는데 그걸로 떼돈을 벌었어. 어느 정도냐면 우리 회사 살 수 있을 정도로 돈이 많아. 가진 부동산도 어마어마하고.”
“……!”
태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냥 사람 좋은 아저씨인 줄 알았는데……?!
“그것보다는, 나 정말 미치겠다.”
“엘크로스 때문입니까?”
“그거 말고 더 있겠냐?”
방금 전 회의실에서 경험한 일들을 말해준다.
그리고 물었다.
“네 생각에는 어떨 것 같아?”
“한 달이라…… 그 정도면 제가 보기에는 충분한 시간이긴 한데…….”
“한데?”
“송재희 피디. 이미 마음이 엘크로스에서 떠난 듯 보입니다. 크게 상심하고 충격받은 얼굴이에요.”
“뭐, 그건 척 보면 알지.”
“이대로는 엘크로스는 회생 불가 상태에 빠지게 될 겁니다.”
“……!”
확신이 담긴 선언에 유진성 회장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때 김종복 바리스타가 케이크를 비롯한 몇 가지 디저트를 가져다주며 물었다.
“왜 그렇게 죽상이냐?”
“지금 500억이 허공에 날아가게 생겼다.”
“응? 무엇 때문에?!”
깜짝 놀란 그에게 최대한 가볍게 설명했다.
“유명한 놈 섭외해서 해달라는 거 다 해줄 테니 재미있는 MMORPG 좀 만들어 달라고 했더니…….”
“딱! 뒤통수를 맞았다?”
“바로 그거지.”
“어허, 이거 큰일이네.”
“……너 표정이 즐거워 보인다?”
“너 욕먹고 좌절하는 모습이 난 그렇게 재미있더라.”
실제 입가에 미소가 가득했다.
‘불알친구라…….’
김종복 바리스타가 자연스럽게 옆자리에 앉으며 묻는다.
“그래서 어쩌려고?”
“몰라. 그것 때문에 고민이 많아. 일단 체면을 회복할 시간적 여유를 주긴 했는데…….”
“쉽지 않을 것 같다는 거지?”
“이 녀석이 그렇다네.”
그의 시선에 유진성이 말했다.
“최소한 게임에 한해서는 얘가 그렇다면 맞는 거야.”
“오호, 능력이 굉장한가 보네?”
“네가 스타 개발자라고 들어는 봤냐? 얘가 그중에서도 특출난 녀석이야.”
“괜히 이곳까지 데려와서 푸념하는 게 아니라는 거지?”
“그렇지.”
“그렇게 유능하다면…….”
순간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 무능한 자식 잘라 버리고 이 친구에게 맡겨 버려.”
“응?”
“……!”
왜 또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가는 거야?
태연은 경악했지만 유진성 회장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그런 방법이 있었네? 그러고 보니 엘크로스도 이제 라이브 본부로 넘어간 거잖아?”
부담스러운 시선이 닿자 태연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야. 왜 피하냐?”
“…….”
“내가 무슨 말 할 줄 알고 그러냐?”
“…….”
“빨리 말해봐. 내가 지금부터 무슨 말 할 것 같으냐? 응?”
“저에게 떠넘기시려는 거 아닙니까?”
유진성 회장이 씩 웃었다.
“자식, 잘 아네. 어디 네가 한번 살려 봐라.”
“그건 안 됩니다.”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인마! 회장이 까라면 까는 거지!”
“그래도 안 됩니다.”
“이유가 뭔데? 힘들어서?”
“안 그래도 일이 많은데 그것까지 되살리라면…… 초대형 신규 프로젝트를 세 개 담당하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완곡한 거절.
이에 유진성 회장은 전략을 바꿨다.
“그러지 말고…… 야, 너 나 죽는 꼴 보고 싶어서 그러냐? 너 지금 엘크로스 때문에 욕 제일 많이 먹고 있는 사람이 누군 줄 알아? 바로 나야 인마!”
“왜 회장님이……?”
“유진성이 신화 온라인 그렇게 부러워하더니 따라 하는 것도 제대로 못 한다며 놀리고 난리 났어 인마!”
그러고 보니 그런 글을 본 것 같기도…….
“국정 감사 들어온다는 이야기도 있다.”
“네? 아니, 그건 또 갑자기 어떤 이유 때문에……?”
“아무리 봐도 송재희 시켜서 개발비 삥땅 친 것 같다고.”
“…….”
“500억 쓰고 저런 퀄리티는 있을 수가 없다며……. 공정위나 국민 신문고, 국민청원 같은 사이트에 고발하고 그런다더라!”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이야기이기에 태연은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으하하하!”
김종복 바리스타는 재미있다는 듯 박수까지 치며 웃고 있었지만.
“후우.”
태연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당장은 지켜보고 있어야 합니다.”
“아니, 어째서?”
“이제 막 런칭한 게임 아닙니까? 제가 치고 들어오면 주위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뻔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프로젝트를 이끌어 온 팀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그러면 어쩌라고. 망하는 꼴을 손 놓고 지켜보고 있으라는 거야?”
“…….”
순간 태연은 컨퍼런스에서 송재희와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넷펀즈 사업팀장과의 진지한 대화.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지.’
통상적인 대화라면 그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한 달 여유를 줬으니 일단은 지켜보시죠.”
“음?”
유진성의 태연의 어조에 담긴 의미심장함을 눈치챘다.
“뭔가 있구나?”
“사실…….”
* * *
크리스마스와 연말 연초는 양가 가족들과 함께 조촐한 파티를 하며 보냈다.
강남 한강뷰 아파트에서!
이사와 함께 판교 아파트는 정리했고 집들이 겸 파티를 진행하게 된 것이다.
사실 지금 태연의 처지에는 엄두도 낼 수 없을 정도의 초고급 호화 아파트였다. 같은 건물에 사는 입주민들도 이름 들으면 누구나 알 수 있을 법한 정치인, 톱스타, 기업가 같은 이들이었다.
태연의 부모님은 물론, 심지어 윤아의 부모님마저도 처음 방문하고 놀라서 아무 말을 못 할 정도였으니…….
태연의 아버지가 다가와 옆구리를 쿡 찌르며 속삭인다.
“새아가 잘 모시고 살아. 울리기만 했단 봐. 내가 가만히 안 놔둔다. 알았어?”
자동차도 바뀌었다.
그동안 타고 다녔던 독일제 중고 SUV에서 벤츠 S클레스로.
-너 이거 가져라.
유진성 회장이 본인의 자차를 선물한 것.
정말 필요 없어 준 것도 아니고, 산 지 3년 정도밖에 안 되는…… 새것에 가까운 물건이었다.
태연이 한사코 거절하니 유진성 회장이 으르렁대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네가 우리 그룹 최고의 개발 전력인 거 세상이 다 아는데…… 중고차 같은 거 타고 다니면 주위에서 대우도 제대로 안 해준다는 소리 나와. 그러니까 잔말 말고 받아. 내가 욕먹기 싫어서 주는 거니까.
츤데레도 이런 츤데레가 없다.
‘뭔가 주위에서 계속 받기만 하는 기분이군.’
많은 이들이 뭔가 해주고 싶어서 안달인 것 같다. 특히 유진성 회장과 김윤아.
자신에게 이미 많은 것을 베풀어 줬음에도 그것조차 부족하다 여기는지 틈만 나면 무언가를 주려고 한다.
‘당장은 월급쟁이 신세라 힘들지만…… 내 게임들이 잘 되고 넥플 엔터테인먼트가 크게 성장하면 보은할 날이 오겠지.’
1월이 가고 2월이 찾아왔다.
엘크로스 총괄 프로듀서 송재희가 성적 부진에 책임을 지고 퇴사를 표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