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한 게임 개발자가 너무 유능함 61화
40. 반전(5)
엘크로스 사내 테스트가 시작됐다.
이른 아침부터 안내에 따라 클라이언트를 다운받아 설치하고 접속을 기다렸다.
그런데.
“분명 10시부터 시작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랬는데…….”
서버를 오픈하지 않는다.
곧 안내문이 발송됐다.
[급한 이슈로 긴급 점검을…….]
개발자들은 어이가 없어서 한마디 했다.
“아니, OBT도 아니고 사내 테스트 오픈하기도 전에 긴급 점검이라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시작부터 심상치 않았다.
‘뭐, 그럴 수도 있지.’
태연은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온라인 게임에 있어 점검은 항상 붙어다닐 수밖에 없는 거니까.
그런데 한 시간, 두 시간이 지나도 점검이 끝나지 않았다.
결국.
[엘크로스 테스트는 오후 세 시 정각부터 진행하겠습니다. 불편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에이, 이것 때문에 일도 제대로 못 하고 있었는데…….”
“이럴 거면 테스트 시기를 좀 늦추던가!”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온다.
태연은 한숨 쉬며 모두에게 말했다.
“밥이나 먹으러 갑시다.”
테스트가 시작된 시간은 오후 세 시 삼십 분.
예고한 시간에서 30분이 추가 연장된 것이다.
“와, 인트로 범상치 않네!”
“그래픽은 확실히 좋다!”
“커스터마이징 끝내주는데?”
우여곡절 끝에 시작된 게임.
시작부터 탄성이 나올 정도로 그래픽이 수려하다.
일단 커스터마이징부터가 굉장히 뛰어나다.
아트팀 누군가는 본인이 좋아하는 아이돌 가수로 꾸미고 있었는데 높은 싱크로율을 자랑했다.
‘이건 배울 가치가 있겠어.’
스타 개발자 명성은 딱지치기로 따낸 게 아닌 것이다.
심지어 아트디렉터 역시 3대 일러스트레이터 중 한 명으로 꼽힐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시작부터 눈이 즐겁다.
커스터마이징이 끝나자 시네마틱 영상이 이어진다.
빛의 신 ‘루’가 수호하는 엘크로스 제국.
수백 여년 동안 대륙을 지배해 온 영광의 대지에 환란이 몰아친다.
황제의 의문사.
그에 따란 의혹이 빚어낸 치열한 내전!
제국의 위기 앞에 외부 수많은 세력들이 역습의 기회를 노린다.
플레이어는 가장 먼저 노려진 막내 황자의 호위 기사로서, 그를 안전하게 탈출시켜 외할아버지인 변경백, 클로드 백작의 영지까지 호송해야 한다.
그렇게 시작된 튜토리얼은 황제의 자리를 노리는 황태자, 황자들이 보낸 세력을 피해 제국 수도를 벗어나는 것으로 꾸며졌다.
그 과정이 화려한 그래픽으로 다채롭게 꾸며져 있다.
‘시작이 좋다!’
진부한 스토리지만 연출이 굉장히 좋았다.
각 분야 최고의 장인들이 디테일까지 신경 썼다는 게 느껴졌다.
‘모처럼 재미있는 게임을 할 수 있게 되는 건가?’
송재희가 어떤 사람인지는 제쳐 두고.
게임광인 태연으로서는 모처럼 좋은 게임을 접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그저 기쁠 뿐이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몇 시간 만에 사라졌다.
‘음.’
플레이 중반을 넘어가면서부터 퀄리티와 디테일이 눈에 띄게 저하됐다.
그리고.
“어? 뭐야. 캐릭터가 성벽을 막 뚫고 가는데? 이 부분 충돌박스 처리 안 해놨나?”
“엌! 퀘스트 진행이 안 된다! 분명 퀘스트를 받았는데 목록창에 안 떠!”
이 시점부터 자잘한 버그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몰입감이 박살 나는 건 한순간이었다.
‘캐릭터 성격이 갑자기 바뀐 기분이야. 퀘스트 지문도 쓸데없이 길어진 걸 보니 여기서부터 담당자가 바뀌었군.’
초반 부분에서 느꼈던 명작의 향기가 씻은 듯 사라졌다.
‘어떤 사유로 초창기 시니어급 인력이 대거 이탈한 모양이군,’
사실 초반 부분도 문제가 없었던 건 아니다.
재미없는 전투.
신화 온라인 느낌이 가득한 시스템 등등.
이런 단점들을 화려한 그래픽과 연출로 커버하고 있었다. 그런데 게임에 익숙해지고, 특히 중반 부분부터 전반적인 퀄리티가 저하되니 단점만 부각된다.
‘신화 온라인 시스템을 기반으로, 단순한 핵앤슬래시에서 벗어나 더 발전된 무언가를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인데…….’
방향성이 애매하다.
대체 이 게임 장르가 무엇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이런 건 아무래도 좋아. 끈기 있게 몰입할 요소만 있으면 되는데…….’
태연의 표정이 갈수록 심각해졌다.
어느새 저녁 여섯 시.
세 시간 동안의 테스트가 끝났고 이제 퇴근할 시간이었다.
태연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떤 것부터 지적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히는군.’
분명 못 만든 게임은 아닌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 * *
‘아깝다. 이렇게 망가질 게임이 아닌데…….’
3일간의 테스트가 끝났다.
엘크로스는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반전’.
처음에는 명작인데 갈수록 졸작이 되어버린다.
‘500억 지원을 받은 뒤, 자기가 아는 최고의 인재들에게 엄청난 연봉과 대우를 약속하고 함께 이직해 왔겠지.’
그리고 기세등등하게 프로젝트를 시작했을 것이다.
‘1, 2년 동안은 분위기가 좋았을 거야.’
그때 만들어진 것들이 대작의 향기를 풍기던 초반 부분이다.
‘하지만 바로 그 시점, 어떤 이유 때문에 퇴사가 시작됐다.’
인트라넷 데이터베이스를 확인해 봤다.
‘역시.’
추측대로, 엘크로스를 TF부터 같이 했던 시니어급 인력 절반이 2년 흐른 시점부터 하나둘 퇴사했다.
‘이 시점부터 이 게임은 망가진 거나 다름없어.’
분명 게임 개발은 팀워크가 중요한 작업이다.
처음부터 프로젝트를 끌어왔던 주요 인력 한 명이 빠져나가는 건 생각보다 큰 문제다.
“흠.”
현재 갈대나무 숲이 굉장히 시끄러웠다. 엘크로스 테스트를 한 직원 한 명이 올린 후기글이 발단이었다.
-500억 회식비로 다 날려 먹었냐? 게임 진짜 가관이다. 초반 몇십 분 동안은 그래도 할 만했는데 중간부터는 아주…… 엘크로스 혹시라도 기대하셨던 분들 있다면 깔끔히 접으세요. 개판입니다.
글은 지워졌지만 캡쳐본이 사방에 퍼져 나가고 있었다. 앱뿐만 아니라 게임 커뮤니티 사이트까지도 난리였다.
“…….”
고민하던 태연은 워드 문서를 열어 타이핑을 시작했다.
그리고 출력한 문서를 뽑아 어디론가로 이동했다.
엘크로스 스튜디오는 초상집 분위기였다.
태연이 들어서는 순간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다.
송재희 집무실을 노크해 보지만 조용했다.
근처에 앉아 있던 개발자 한 명이 조심스레 말했다.
“피디님 아직 출근 안 하셨어요.”
현재 시간 열한 시.
‘오후에 다시 와야겠군.’
오후 두 시 삼십 분 경에 다시 집무실에 방문했다.
“피디님 계시나요?”
“계시긴 하는데 그게…….”
노크를 했지만 조용하다.
몇 번 노크를 해보고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
송재희는 엎어진 채 잠들어 있었다.
그런데.
‘술 냄새……?’
진탕 마신 듯 단정하던 헤어스타일과 옷차림이 살짝 흐트러져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충 짐작이 된다.
‘생각보다 멘탈이 약하군.’
카이스트를 졸업하고 네로 소프트에 입사해서 신화 온라인의 주역으로 성장하기까지 많은 일을 거쳤을 것이다.
이 정도 실패에 이런 태도를 보인다는 게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늘은 글러 먹었어. 내일 다시 와야겠군.’
* * *
그러나 다음 날에도 송재희 피디와 이야기할 수 없었다.
“피디님 연차 쓰셨어요.”
토요일, 일요일이 지났다.
월요일부터는 태연이 시간이 없었다.
코엑스에서 개최된 국제 게임 컨퍼런스에서 강연을 몇 개 진행하게 된 것이다.
-유저를 위한 게임 운영 기본!
-게임 퍼블리싱 이해
-게임 개발과 팀워크
컨퍼런스 조직위원회 측에서 태연을 콕 집어 협조 공문을 보내온 것.
그것도 모자라 전화까지 몇 차례나 걸어왔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올해에는 유태연 개발자님만큼 업계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낸 사람이 없어서…….
그렇게 어쩔 수 없이 승낙하게 된 강연이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야지.’
어쨌든 자신의 이름을 걸고 나가는 자리 아닌가?
열심히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준비했다.
‘지금 진행 중인 프로젝트에 대해서도 뭔가 보여주긴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래서 판테온 원화 몇 점과 프로젝트 D의 짧은 테스트 영상 하나 정도를 공개하기로 했다.
마지막 세 번째 강연 중 일본인 개발자가 질문을 던졌다.
“몬스터 이터에서의 활약, 굉장히 감명 깊게 봤습니다. 현재 몇 개의 신규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라고 들었는데, 조금이라도 정보 공유가 가능한지 묻고 싶습니다.”
예상했던 질문이었다.
모두의 눈이 반짝거린다.
“그러실 줄 알고 몇 점 준비했는데…….”
말을 끝맺기도 무섭게 터져 나오는 환호성.
제일 먼저 첫 번째 판테온의 원화를 공개했다.
“와우.”
“오오……!”
강연장이 탄성으로 가득하다.
게임을 오래 만들어오며 다양한 아트웍을 경험했던 이들조차도 경탄할 퀄리티였다.
공중에 떠 있는 거대한 신들의 도시!
과거, 현재, 미래.
그리고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환상적인 그림!
‘이런 반응이 나올 줄 알았어.’
누가 봐도 환상적인 그림이니까.
‘역시 이영애 AD님의 실력은 전 세계에서도 통용될 만큼 놀라운 경지에 있군.’
“이 원화를 실제 엔진에 구현하는 데 성공하셨나요? 만약 성공했다면 혹시 지금 볼 수 있겠습니까?”
일본인 개발자의 두 번째 질문.
질문하면서도 그의 두 눈에 ‘에이 설마……’ 의구심이 가득했다.
그뿐이 아닌 다른 개발자들의 표정도 그랬다.
“의구심을 가지고 계신 듯 보이는데……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도 사실 이 원화를 봤을 때 퀄리티에 놀라서 이걸 100% 구현 가능할지 의문이 들었을 정도니까요. 하지만…….”
전환되면 화면.
원화 이상으로 아름다운 그래픽이 펼쳐진다.
“오오오!”
기립 박수가 터져 나왔다.
캐릭터가 필드를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NPC들과 말을 걸며 대화를 나누는 광경은 차라리 극장 개봉용 그래픽 애니메이션 퀄리티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일본인 개발자는 환희에 가득 찬 얼굴로, 더듬거리며 묻는다.
“저, 저게 정말 인게임 영상입니까?”
“물론입니다.”
“언제 플레이할 수 있겠습니까?”
“CBT, OBT를 거쳐 정식 서비스까지 총 3년 정도로 잡고 있습니다.”
태연으로서는 꽤나 넉넉하게 잡은 기간이었지만…….
“겨우?”
“3년이라고? 저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다고 들었는데…….”
개발자들은 경악했다.
이어 프로젝트 D의 테스트 영상도 공개됐다.
1년 미만이라는 제작 기간이 무색하리만치 뛰어난 퀄리티였다.
“아니…… 어떻게 그 짧은 기간 안에 저런 걸 만들 수 있었던 거죠? 대체 비결이 뭔가요?”
또 다른 개발자의 질문.
딱히 숨길 일이 아니니 터놓고 밝힌다.
“디즈니 본사의 적극적인 협조를 받아 원작 리소스를 마구 가져다 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프로젝트 D의 아트디렉터 이영애 님은 디즈니, 블리자드를 모두 경험하신 분으로 애니메이션과 게임의 접목에 누구보다 이해도가 높고 실력도 출중한 분이십니다.”
한 가지 덧붙였다.
“아까 보셨던 판테온 원화를 그리신 분이기도 하죠. 판테온 팀에서는 원화 팀장으로 근무 중이시거든요.”
“와…….”
탄성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개발자들의 시선은 빔 프로젝트 속, 테스트 영상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괜히 입이 근질거려 또 하나 놀라운 사실을 밝힌다.
“저 게임에 등장할 일부 콘텐트가 한국 디즈니랜드에도 크게 반영될 예정입니다.”
“……?!”
어? 아니, 어떻게?
모두의 얼굴에 경악과 의문이 가득하다.
태연은 작게 미소 지으며 당당히 밝혔다.
“제가 한국 디즈니랜드 콘텐츠 기획 총괄입니다.”
태연의 강연은 최고의 인기 강연으로 선정되었다.
폐막 이후 조직 위원장이 직접 나와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유태연 본부장님 덕분에 해외 개발자들에게 자존심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이 은혜 절대 잊지 않고 꼭 갚도록 하겠습니다.”
의미심장한 얼굴.
이에 대해 태연이 할 수 있는 말은 한 가지뿐이었다.
“최선을 다해 재미있는 게임을 만들겠습니다.”
* * *
대화를 마치고 회장을 벗어나는 길.
놀랍게도 송재희 피디를 만났는데 정장을 입은 미남자와 심각하게 대화 중이었다.
‘인사만 하고 가자.’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송재희 피디님도 오셨군요.”
“……!”
필요 이상으로 화들짝 놀라는 송재희.
“어, 어어……”
대화하던 상대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명함을 건넨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넷펀즈 전준영 사업팀장입니다.”
“아, 넷펀즈 사업팀장님이셨군요. 저는 유태연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워낙 유명하셔서 모를 수가 없죠.”
사람은 좋아 보인다.
목소리도 시원시원하고.
태연은 송재희에게 말했다.
“내일 점심 식사나 좀 같이 하시죠.”
“네? 저, 점심 식사요?”
어쩐 일인지, 기세가 굉장히 꺾인 듯하다.
“안 됩니까?”
“아, 아니요. 그렇게 하시죠. 제가 찾아뵙겠습니다.”
두 사람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벗어나며 태연은 속으로 생각했다.
‘넷펀즈 사업팀장이라…….’
자신을 보고 화들짝 놀라던 시선들이 뇌리에 떠오른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