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한 게임 개발자가 너무 유능함 60화
40. 반전(4)
그날 이후 송재희는 유태연에 대해 조사를 시작했다.
‘아무래도 내가 상대를 너무 모르고 있는 것 같군.’
블레스 스튜디오.
강건 대표 외에 크게 주목받을 이유가 없는 중.소 게임 개발사였다.
그에 반하면 자신은 대한민국 최고의 MMORPG 명가, 네로 소프트의 프로듀서이자 신화 온라인의 개발자였다.
그래서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고 외면해 왔다.
‘실수였어.’
누구를 찾아가야 유태연에 대해 많은 정보를 들을 수 있을까?
떠오르는 얼굴이 한 명뿐이었다.
“선배님. 저 오늘 저녁 술 한 잔 사주시면 안 됩니까?”
바로 개발 총괄 손영상 이사였다.
* * *
자주 찾는 고깃집.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송재희는 손영상 이사의 등장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셨습니까?”
“너 태연이하고 저녁 식사 했다며?”
“어, 어떻게 그걸…….”
“다 퍼졌더라. 특히 갈대나무 숲 넥플 라운지에서 굉장한 안줏거리던데?”
“그렇습니까?”
즉시 휴대폰을 꺼내 앱에 접속한다.
-어제 점심시간 송재희, 유태연 피디 같이 일식집 가는 거 봄. 그림 참 묘하더라. 두 사람 거의 라이벌 아니냐? 사이 겁나 안 좋다고 들었는데…….
└두 사람 사이가 왜 안 좋아? 싸우기라도 했어?
└싸운 건 아니고 그냥 송재희가 일방적으로 견제하는 거.
└왜 견제해?
└경력도, 손 이사 배경도 있겠다. 세상 무서울 게 없었고 자기가 차기 개발 총괄이 확실했는데 난데없이 유태연 피디라는 강적이 나타났잖아.
└지난번 아틀란시아 전기 사내 테스트도 송재희 쪽 라인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거. 꼬투리 잡아서 깔 생각이었는데 게임이 생각보다 잘 나와서 당황했다더라.
└아, 그게 그렇게 된 거였어? 옛날 게임 뜬금없이 전사 테스트는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
송재희의 표정이 굳어졌다.
생각보다 상세한 이야기가 이미 다 퍼지고 있었던 것이다.
손영상 이사가 혀를 찼다.
“사람들 모르는 것 같지만 다 알아. 우리 같은 사람들 어디에서 뭐 하고 다니는지.”
“…….”
“너. 네 이미지가 이렇게 안 좋은 거 지금까지 알았어 몰랐어?”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만.”
“이 정도로 엉망일 줄은 몰랐지?”
“…….”
“이거 만회하려면 한 가지 방법뿐이야.”
손영상의 음성에 힘이 가득 실렸다.
“엘크로스 대박 터뜨리는 것!”
때맞춰 주문한 요리가 도착했고, 곧 고기 굽는 소리와 냄새가 요란하게 퍼져 나갔다.
“한 잔 하자.”
잔을 부딪힌 뒤 단번에 털어 넣고, 살짝 머뭇거리던 송재희가 말했다.
“제가 뭘 어떻게 해야 개발 총괄이 되고 대표이사가 될 수 있겠습니까?”
정말 진지하게 조언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손영상은 내심을 꿰뚫고 피식 웃었다.
“유태연이 그렇게 신경 쓰여?”
“솔직히…… 네. 그렇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그렇게 신경 쓰이냐?”
“입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회사 권력의 중추에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럴 수가 있나 싶은 생각이 자꾸 듭니다.”
“그 이유가 뭘 것 같아?”
“일을 잘해서겠죠.”
“또?”
“사람들의 환심 사는 법을 잘 아는 것 같습니다.”
손영상은 순간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 녀석이……?’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송재희에게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계속 말해봐.”
“당장은 떠오르는 건 이 정도가 전부입니다.”
“그렇군. 그러면 어디 보자. 일을 잘하고 환심 사는 법을 안다.”
손영상은 피식 웃었다.
“간단하네. 너도 그렇게 하면 되잖아.”
“…….”
“최대한 많은 사람들의 환심을 사. 그리고 일을 열심히 해서 최고의 성과를 내. 너도 할 수 있는 일 아니야?”
말없이 빈 잔만 만지작거리는 송재희.
“쯧.”
혀를 차며 술을 따라주는 손영상.
이어 송재희가 어떻게 할 틈도 없이 자신의 잔을 가득 채운 뒤 잔을 들어 올린다.
짠.
맑은 소리를 신호로 두 사람은 동시에 술을 들이켰다.
코끝을 자극하는 알싸함에 얼굴을 찡그리며 손영상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날 보자고 한 이유가 뭐야?”
* * *
“커피 한 잔 하자.”
이른 아침, 갑작스러운 손영상의 방문이었다.
의아했지만 태연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따라 이동했다.
도착한 곳은 회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커피숍.
“조용히 나누고 싶은 대화가 좀 있어서…… 일단 한 가지 묻자. 너 혹시 넥슨 대표 자리 관심 있냐?”
순간 태연의 인상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손영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야, 그렇게 싫어? 무슨 끔찍한 소리를 들은 것처럼 반응하고 그러냐?”
“……그렇게 보였습니까?”
“싫은 이유가 뭐야?
“안 그래도 일이 많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하루빨리 라이브 본부장 자리도 털어버리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지 그러면?”
“다 뒤집어 놓고 빠지는 건 무책임한 겁니다. 빠질 때는 빠지더라도 성과가 나오는 모습까지는 보여주는 게 맞죠.”
“그렇지!”
손영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넥플 엔터테인먼트 키울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아픕니다.”
“그래도 자회사보다는 본사 대표가 더 낫지 않냐?”
“제 회사는 아니지 않습니까? 반면 넥플 엔터테인먼트는 엄연히 제 회사입니다.”
“아무튼, 넌 넥플 개발 총괄이나 대표 자리 같은 것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손영상의 표정이 더 심각해졌다.
“만약 송재희가 대표 자리에 오르게 되면 어쩔래?”
“뭘 어쩝니까?”
“너한테 불편한 상황이 있을 수도 있는 거 아니냐? 그 녀석이 너 경계하는 거 잘 알잖아.”
“경계하면 뭐 어쩔 겁니까? 설마 쫓아내기라도 한답니까?”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갸늠해 보는 듯한 시선 앞에 태연은 태연하게 웃을 뿐.
손영상은 마침내 깨달았다.
“넌 송재희는 안중에도 없구나?”
“제 최대 관심사는 부인과 행복하게 사는 거고, 두 번째는 좋은 사람들과 게임 만들며 재미있게 사는 겁니다.”
“네 기준에 나는 좋은 사람이냐?”
처음으로 태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커피 리필 좀 해야겠…….”
“야!”
* * *
-개발을 해야 할 사람이 정치에 힘을 쏟는 이유는 하나라고 봅니다. 자신이 없으니까.
태연은 또 하나 놀라운 사실을 알려줬다.
-실은 전환 배치 문의가 가장 많이 쏟아지는 곳이 엘크로스 팀입니다. 몇 번 만나서 이유를 물어보면…… 그리 좋은 이야기는 없더군요.
“음.”
-그 정도만 해도 게임, 팀 상황이 어떤 지 정도는 대충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피디라는 사람이 그러고 다니니…… 제 입장에서 한마디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알고 지낸 기간은 짧지만, 손영상은 태연이 어떤 남자인지 확실히 이해하고 있었다.
송재희는 그 내면이 굉장히 복잡해서 파악하는 데 피곤하지만, 유태연은 숨김없이 직설적이고 꾸밈없이 솔직했다.
‘그래. 이쯤 해서 한 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지.’
엘크로스는 과거 두 차례 클로즈 베타 테스트를 진행한 전적이 있다.
당시 테스터들 사이에서 평가가 나쁘지 않았고 회사 내부에서도 반응이 좋았다.
하지만 의구심이 없는 건 아니었다.
테스트 규모가 작고 기간이 굉장히 짧았다는 것.
당시에는 좋은 분위기 탓에 넘어갔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꽤나 의미심장한 평가가 있었다.
-테스트가 아니라 그냥 게임 홍보를 위해 마련된 자리 같은데? 이게 의미가 있나?
“…….”
걸음을 멈추고 심각하게 무언가를 고민하던 손영상은 한 가지 결정을 내렸다.
‘전사 테스트가 필요한 건 아틀란시아 전기가 아닌 엘크로스였던 것 같군.’
* * *
엘크로스 스튜디오를 찾아간 손영상은 따로 마련된 개인 집무실을 노크했다.
“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손님이 있었다.
“아, 손영상 이사님 아니십니까?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정장을 입은 시원시원한 인상의 미남자.
“전준영 팀장님 아니십니까?”
국내 게임 업계 중, 모바일 게임으로는 최고를 자랑하는 넷펀즈의 사업 팀장이었다.
“이곳에 어쩐 일이십니까?”
“동기 만나서 사담이나 좀 나누러 온 거죠. 응원도 할 겸. 올 크리스마스에 마침내 엘크로스가 선보이지 않습니까?”
넷펀즈의 새로운 실력자로 급부상한 전준영 사업팀장.
그는 송재희와 동갑내기 친구였다.
신화 온라인 전담 사업팀 소속이기도 했고.
‘그런데 왠지…….’
내부 공기가 심상치 않았다.
하지만 단순히 기분상 문제일 수도 있었고, 이제부터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 시기였기에 가볍게 흘려 넘겼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나올 필요 없어. 나 혼자서도 갈 수 있어.”
전준영 팀장은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혹시 내가 방해한 거냐?”
“그런 거 아닙니다. 그냥 영양가 없는 잡담이었어요. 요즘 저 녀석 많이 힘든가 보더라고요. 응원 왔다는 놈이 푸념만 하다가 돌아갔으니…….”
“……그래. 그러면 잠깐 대화 좀 하자.”
문을 닫고, 소파에 앉은 손영상 이사는 잠깐의 침묵 끝에 용건을 말했다.
“엘크로스 말이야. 출시 전 사내 테스트 한 번 하자. 오픈베타 스펙으로 말이야.”
“…….”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손영상은 그 변화를 세심하게 관찰하며 말했다.
“너 못 믿어서 이러는 거 아니야. 엘크로스가 우리 기대작이니 회사 차원에서 지원 한 번 해주려는 거야. 프로젝트 문제없는지 점검할 목적도 있긴 하지만.”
“…….”
“해보고 아무 문제 없다. 혹은 게임이 정말 괜찮다. 내가 제대로 밀어줄게. 그러니까 한 번 해보자.”
“…….”
아주 잠시 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손영상이 다시 한번 말했다.
“지금까지 다른 신규 프로젝트들도 다 했어. 그러니까 너도 해야지.”
“굳이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출시 전 오픈 베타 테스트를 진행할 예정인데 그때까지는 다들 개발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뭔 말이 그렇게 많아? 하자고.”
제안이 아닌 개발 총괄로서의 지시 사항이었다.
그 사실을 확인한 송재희가 무겁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준비 기간 많이 잡을 필요 없지? 이미 유저용 빌드 버전은 개발 버전과 별도로 운용하고 있을 거 아니냐.”
“그렇습니다.”
“그거 그대로 테스트하자. 개발 기간 5년 줬으면 많이 줬다.”
“…….”
“본사 건물 안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을 상대로 테스트하는 거야. 보안 문제도 있으니 전사 테스트는 아무래도 조금 그렇지.”
통보를 마친 손영상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한마디 했다.
“이번 테스트는 회장님도 참여할 테니 그렇게 알고 있어.”
* * *
[엘크로스 사내 테스트 공지!]
넥플 인트라넷과 직원 메일 계정으로 도착한 공지로 회사 전체가 떠들썩해졌다.
“갑자기 사내 테스트라니, 이게 웬일이야? 엘크로스는 그런 거 없이 바로 오픈하는 거 아니었어?”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다른 신규 게임 다 했는데 엘크로스도 하는 게 당연하지.”
“원래는 그게 당연한데 엘크로스 팀 엄청 편애받았잖아. 특히 송재희 피디는 손영상 이사 직계 후배기도 하고…….”
어디를 가든 테스트 이야기였다.
시원한 아이스 커피를 들고 스튜디오에 돌아온 송민석이 태연에게 다가가 건네주며 물었다.
“들었습니까? 엘크로스 사내 테스트 한답니다.”
“흠…….”
“다들 깜짝 놀라던데요? 로얄 로드를 걷던 프로젝트가 갑자기 다른 신규 게임들처럼 사내 테스트를 한다니까.”
주변을 확인 후 은밀한 음성으로 묻는다.
“혹시 손영상 이사와 송재희 피디 사이에 무슨 일 있었던 것 아닙니까?”
순간 떠오르는 것이 있었지만 태연은 시치미를 뗐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잘 나왔을까요? 전환 배치 면담 요청 때 그쪽 개발자들 하는 이야기들 들어보면 영 아닌 것 같던데.”
“…….”
“아무튼 상황 재미있게 되었네요. 최대 기대작이자 넥플 내부에서는 사실상 귀족 집단이던 프로젝트의 실체가 낱낱이 까발려지게 되었으니.”
기대감 가득한 미소로 돌아가는 송민석.
태연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설마 이렇게 바로 일을 벌이실 줄은 몰랐는데.’
아무래도 손영상이라는 사람에 대한 이해도가 조금 낮았던 것 같다.
‘젊은 시절 한 성격 했다더니, 상상 이상이었겠어.’
그래도…….
‘잘됐군. 이 기회에 신화 온라인 주역들의 역량을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
게임을 좋아하는 태연으로서는 굉장히 기대되는 이벤트였다.
‘과연 넥플 500억 기대작의 실체는 어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