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한 게임 개발자가 너무 유능함 59화
40. 반전(3)
금요일 아침부터 대한민국이 떠들썩했다.
갈라쇼를 앞두고 세계적인 체조 스타, 업계 관계자들이 내한했기 때문이었다.
그 자리를 김윤아가 직접 마중 나가 환대했다.
이후 이들의 행보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이 이슈가 되었다.
숙소는 어디인지.
곧바로 이동해서 무엇을 먹었고 어디로 가서 뭘 구경했는지.
-그런데 쉬지 않고 바로 저렇게 돌아다녀도 되는 거임?
└저거 시차 극복하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임.
토요일부터는 고양 실내 체육관에서 본격적인 훈련과 리허설 등이 진행됐다.
그렇게 월요일 아침이 밝았다.
* * *
이른 아침.
조수석에 탑승한 김윤아는 유난히도 말이 없었다. 계속 눈을 감았다 뜨며 무언가를 읊조리고 있었다.
‘마인드 트레이닝이로군,’
그녀의 집중력은 지금 태연이 보기에도 경이로운 수준이었다.
‘역시 국가 대표는 아무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야.’
국가 대표가 됐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일반인의 범주를 벗어났다는 증거지만, 거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금메달을 석권하고 대회를 휩쓸어 버린다는 것은 더욱 대단하고 놀라운 일이다.
이미 은퇴한 몸이라지만 김윤아는 단 한 번도 긴장을 풀고 살지 않았고, 운동을 쉬지 않았다.
본인은 스스로를 배부른 돼지가 됐다며 자책하지만 태연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이 모습이 체조 여신이라 칭송받았을 때의 그 모습이겠지?’
엄청난 집중력과 몰입감에서 뿜어지는 카리스마!
이는 태연조차도 근래 들어서야 처음 경험하는 것이었다.
‘지금 그녀에게는 어떤 말도 필요 없지.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며 응원해 주는 것 외에는.’
그녀는 분명 잘 해낼 것이다.
몇 년 만에 돌아오는 여왕은 다시 한번 대한민국에 큰 감동을 줄 것이다.
태연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 * *
관객으로 가득 찬 실내 경기장에서 갈라쇼가 시작됐다.
태연은 좌석 한편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며 많은 영감을 얻었다.
‘사람의 움직임이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었군.’
지금까지 게임을 만들며 수많은 애니메이터와 만나 작업했다. 개중에는 정말 빼어난 실력으로 일본과 미국 메이저 스튜디오에 진출한 인재들도 있다.
그들이 최근에 만든 결과물을 보고 크게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 어떤 것들도 지금 눈앞에 펼쳐진 움직임만큼 아름답지는 못했다.
태연은 머릿속에 모든 움직임을 상세히 담으며 생각했다.
‘저 움직임을 게임으로 완전히 구현해 낼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하다면 우리 게임도 한 단계 더 진화할 수 있을 텐데…….’
* * *
갈라쇼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감동적인 무대 구성과 현역을 연상케 하는 올스타들의 실력에 사람들은 감동의 박수를 보냈다.
그중에서 특히 김윤아에 대한 환호가 놀라울 정도였다. 사람들은 여신이 돌아왔다며 이름을 연호했고, 언론은 실시간으로 그녀를 찬양했다.
[김윤아는 여전히 체조 여신이었다!]
[성공적인 김윤아의 올스타 갈라쇼! 그다음 행보가 기대된다!]
다음 날에는 뒤풀이 파티가 시작했다.
고급 호텔 만찬회장에서 진행됐는데, 이 자리에서 김윤아는 놀라운 제안을 받게 된다.
“혹시 이번 올스타 갈라쇼를 월드 투어 형식으로 진행해 볼 생각은 없어요?”
“……월드 투어요?”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일이었다.
체조를 월드 투어로 하자니?
윤아의 시선이 자연스레 태연에게 향했다.
그 모습으로 태연은 이미 그녀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도전해. 멋진 추억이 될 것 같은데?”
“저, 정말? 정말 그래도 될까?”
“좋은 기회잖아. 이런 건 무조건 잡아야지.”
“그래도…….”
그녀가 무엇 때문에 망설이는지 알 수 있었다.
“내 걱정은 할 필요 없어.”
태연의 미소에 마침내 김윤아는 마음을 다잡았다.
“알았어. 한번 해볼게!”
* * *
김윤아와 올스타의 월드 투어 갈라쇼 준비가 본격화됐다.
태연은 그녀를 묵묵히 서포터하는 한편, 홍민석 AD를 불러 말했다.
“제가 갈라쇼를 지켜보면서 생각한 게 있는데…….”
김윤아와 올스타가 보여준 아름다운 움직임.
과연 그 특징을 구현할 수 있을 것인가?
홍민석의 대답은 간단했다.
“못 할 거 없죠. 그런데 이 움직임을 구현해서 어디에 사용하시려고요?”
“아예 플레이어블 캐릭터 직군으로 추가하면 좋을 것 같아서요. 줄을 채찍처럼, 볼을 포탄처럼…….”
“오호.”
흥미를 보인다.
“컨셉을 잘만 잡으면 화려하면서도 조작감이 있는 캐릭터가 될 수 있겠네요. 리본을 잘 활용하면 다양한 콤보도 넣을 수 있을 테고요.”
“바로 그거죠.”
“체술만으로는 재미가 없으니 마법을 조합한 하이브리드 캐릭터가 되어야겠군요.”
“아무래도 그렇겠죠. 마법적인 기술과 이펙트가 가미되어야 보는 즐거움도 있을 테니까요.”
“흠, 예전에 이런 캐릭터가 있었던 것 같긴 한데……. 제가 확인해 보고 간단하게 컨셉이라도 한번 만들어볼게요.”
홍민석이 의욕을 보이는 모습에 태연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조금이라도 의아해하거나, 심드렁한 모습을 보이면 바로 폐기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대화를 마치고 카페테리아를 나서는데 우울한 표정의 누군가가 스쳐 지나갔다.
홍민석이 알아봤다.
“<코드네임 블루> 김명헌 피디님이네. 요새 프로젝트 간당간당한다더니 결국 나가리 됐나 보네요.”
“……?”
“저분 누군지 모르세요?”
“알고는 있는데……. 나가리 됐다는 건 또 무슨 말입니까?”
“말 그대로예요. 피디님 자리 비우셨을 때 내부 테스트했었는데 그때 평가가 상당히 안 좋았어요. 특히 디렉터 평가가 너무 안 좋아서…….”
“아…….”
그제야 떠올랐다.
어쨌든 본부장이니, 출장 문제로 며칠 동안 자리를 비우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바로 그때 신규 개발 중인 FPS 게임이 내부 테스트를 진행했고, 평가가 안 좋아 프로젝트가 결국 엎어졌다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심각했습니까?”
“아뇨. 심각할 정도까지는 아니었어요. 나쁘지는 않은데 딱히 좋지도 않다. 뭐 이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네요.”
“그런데 왜……?”
“자세한 사실은 잘 모르겠고, 요 근래 친하게 지내는 몇몇 AD님들이 귀띔해 준 이야기는 있어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작게 속삭인다.
“예전에 일부 디렉터들에게 밉보인 적이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그에 대한 보복으로 저번 테스트 때 거의 악평을 받았다던데요.”
태연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설마…….’
-너 김명헌 피디 누군지 알지?
-이번에 프로젝트 접혀서 퇴사한 사람? 알지. 왜?
-디렉터 평가 때 유난히도 박한 평가 받았던 이유가 일전에 밉보였던 적이 있어서라는데, 그것에 대해서도 알아?
-아, 그 일 말하는 건가?
-무슨 일이 있긴 있었던 거야?
-김명헌 피디님 성격이 굉장히 직설적이야. 스튜디오 내 별명이 노빠꾸 상남자인데……. 그게 문제가 된 케이스야.
송재희를 비롯한 디렉터 집단이 본인 무리에 속한 이들에게만 좋은 평가를 주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견제하는 양상을 보며 대놓고 공식 석상에서 한마디를 했다고 한다.
-그렇게 찌질하게 살지 좀 마쇼!
태연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송재희 피디 영향력이 그렇게 강한가?”
“없다고는 말 못 하지. 사업 1팀장 하고 둘이 같이 넥플 차기 이사라며 위상이 어마어마했으니까.”
“사업 1팀장? 그 사람은 또 뭐가 있는데?”
“사업총괄 이태영 이사님이 데려온 직계 후배야. 참고로 형하고 친분 있는 김명국 대표는 사업 2팀장이었어. 라이브 본부 전담하는.”
“그렇군. 그러면 그 두 사람이 임원 아랫급에서는 최고 실력자라고 봐도 되나?”
“그렇지. 이미 자기 라인 만들어놨고, 두 이사님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중이라 감히 거스를 사람이 없지.”
‘IP 사업팀장이라…….’
이 순간, 태연은 새삼 느꼈다.
‘내가 어지간히도 사내 정치에 관심이 없었구나.’
입사한 지가 얼만데 이런 걸 지금에서야 알게 되다니.
“아무튼 좋은 정보 알려줘서 고마워. 참고할게.”
* * *
예정대로 금요일 점심을 송재희 피디와 함께하게 되었다.
조금 떨어진 고급 일식집.
‘이곳이군.’
익숙한 장소였다.
송재희는 당당했다.
“여기가 회장님을 통해 알게 된 곳인데 알고 보니 굉장히 유명한 쉐프님이…….”
“아이고, 또 찾아주셨군요! 요즘 자주 뵙네요!”
마침 주방에서 나온 쉐프 겸 오너가 반갑게 아는 척을 해온다.
“아, 예…….”
송재희는 자신에게 하는 말인 줄 알고 환한 얼굴로 대답하려 했지만…….
“요즘 태연 씨 덕분에 김윤아 씨도 즐겨 찾는 맛집이라고 소문이 나서 기분이 좋습니다.”
오너 쉐프가 반겨주는 사람은 다름 아닌 태연.
“오늘도 새로운 손님을 데려와 주셨으니 제가 직접 서비스를 해드리겠습니다. 앉아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하하하!”
송재희의 황망한 시선에 태연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아무래도 사장님이 저를 좋게 봐주시는 모양이군요.”
식사와 함께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됐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혹시 회장님으로부터 개발 총괄, 혹은 대표 자리에 대한 제안 받은 적이 있습니까?”
굉장히 노골적이었다.
강렬한 눈빛을 아무렇지 않게 직시하며 대답했다.
“아니요. 그런 제안 받은 적 없습니다.”
“혹시 제안받으면 수락할 의향이 있습니까?”
“…….”
이쯤 되니 태연도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송재희 피디님은 넥플 대표 이사가 되고 싶으신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전 애초 그럴 뜻으로 손태영 이사님의 입사 제안을 받아들인 겁니다.”
“…….”
“이제 대답해 주십시오. 대표이사 제안을 받으면 수락할 의향이 있습니까?”
태연은 새우초밥을 조용히 씹어 삼킨 뒤 대답했다.
“그럴 의향이 있다고 대답한다면 저와 사생결단이라도 낼 생각이십니까?”
“……!”
흔들리는 눈동자.
태연은 무감정하게 말을 이어갔다.
“번지수를 잘못 찾았군요. 혹시 가야 할 길을 모른다면 제가 가르쳐 드릴 수 있습니다.”
그 말이 도발로 들렸던 걸까?
“뭘 가르쳐 주겠다는 건지…… 어디 말씀해 보시죠.”
송재희가 무시무시한 눈으로 반문했다.
“엘크로스 개발 비용으로 지금까지 500억 정도 썼죠?”
“……!”
“올 크리스마스 출시 계획이라고 하던데, 이후 소모될 마케팅 등, 여러 비용을 감안하면 총 700억 이상의 비용이 소모되겠군요.”
송재희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태연의 묵직한 음성이, 싸늘한 눈동자가 점점 심장을 짓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700억 회수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송재희 피디님 이러시는 걸 보니 흥행에 굉장히 자신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그건…… 본부장님이 신경 쓸 문제가 아닐 텐데요?”
발악처럼 뱉은 말.
그것이 태연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 개발 비용이 다 어디서 나왔다고 생각하십니까? 다 라이브 본부 아닙니까?”
“……!”
“엘크로스. 반드시 성공시켜야 할 겁니다. 돈을 그렇게 써놓고 흥행에 실패했다? 단단히 각오하는 게 좋을 겁니다.”
카리스마에 압도된 송재희는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되는 것을 느꼈다.
“당신, 지금 다른 일에 한눈팔 때가 아니야. 나한테 그딴 말을 지껄일 급도 아니고.”
태연은 수많은 라이브 스튜디오를 책임지는 본부장이고, 또한 거대 계열사인 넥플 엔터테인먼트의 대표였다.
일개 프로듀서와 절대 동등한 위치가 아니었다.
태연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으르렁댔다.
“정신 차려. 지금 당장 모가지 날아가고 싶지 않으면.”
태연이 자리를 떠난 뒤에도 송재희는 움직이지 못했다.
그저 굴욕감에 이를 악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