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한 게임 개발자가 너무 유능함 55화
38. 전사 테스트
넥플은 국내외에 수없이 많은 해외 법인을 지배하거나 일부 지분을 소유 중이다.
수십 개가 넘는 라이브 본부가 존재하고, 신규 게임 개발 스튜디오만 무려 십여 개가 넘는다.
전사 테스트란 이 수많은 업체에 근무하는 직원들의 협조를 받아 테스트를 진행하는 것을 말한다.
유저들도 아니고 같은 개발자들에게.
심지어 테스트라는 명목하에 작정하고 뜯기는 이 날은 개발 당사자들에게는 심히 공포스러운 날이기도 하다.
신규 개발 중인 게임이 소리소문없이 엎어졌다면 대부분은 이 전사 테스트에서 평가가 박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사실은 넥플 직원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무슨 일이 있더라도 평정심을 지키세요. 세상에 완벽한 게임은 없으니까요.”
태연은 덧붙였다.
“이 시간 이후로 듣게 되는 모든 비난은 여러분의 책임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지시를 내리는 디렉터들의 책임이고, 그 디렉터들까지도 총괄하는 바로 저의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제가 시키는 대로 작업을 수행한 것뿐입니다.”
신규 게임도 뜯어먹힐 게 얼마나 많은데…….
심지어 그동안 넥플 3대 게임으로 무수히 많은 일을 겪어온 자신들의 게임이 아닌가?
모르긴 해도 그 여파가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
그 공포심을 태연은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최대한 자상한 음성으로 다독였다.
“문제가 있다면 다 제가 책임집니다. 그러니 마음 편히 테스트에 임하세요. 여러분에게 피해가 갈 일은 없을 겁니다.”
얼마나 위안이 됐을지 모르겠지만…… 사실 긴장된 것은 태연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부 개발자들이라고는 하나, 어쨌든 그동안의 결과물을 외부에 처음 선보이는 순간이 아닌가?
그리고 마침내.
“테스트 서버 오픈합니다!”
전사 테스트가 시작됐다.
* * *
수많은 이들이 접속해서 게임을 플레이한다.
이들이 유저가 아니라 같은 회사, 혹은 자회사에서 근무 중인 이들이라고 생각하니…….
‘도저히 다른 일이 잡히지 않아.’
이미 테스트 범위, 방식, 요구 사항 같은 것들이 전사에 떨어진 상태. 그럼에도 문의 사항은 항시 발생하게 마련이었다.
-저기 퀘스트 어떻게 받나요?
└아, 먼저 치트키 기능을 활성화하시고…….
-치트키 활성화 명령어가 뭐예요?
└아 그것은…….
채팅창을 뚫어져라 보고 있다가, 자신들의 업무 영역에서 문의 사항에 채팅창에 뜨면 즉각 대답해 준다.
태연은 그 광경에 헛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개발자들의 사내 테스트 준비라고 해봐야 별거 없다.
게임 모니터링을 하면서 본인 업무를 계속 이어가는 것.
사실 문제점은 회사 차원에서 리포트로 통합, 정리되어 보고받는다. 테스트 가이드도 오늘을 위해 투입된 운영팀원들이 알아서 다 해준다.
그럼에도 개발자들은 긴장감과 책임감을 참지 못해 이렇게까지 신경 쓰며 나서고 있는 것이다.
-오, 시네마틱 영상…… 돈 좀 썼겠다.ㅎㅎ
-유료 캐시템 기간 한정으로 바뀐 것들이 꽤 많네. 캐시템 삭제 예정인 게 꽤 많다.
-콘솔 어드벤쳐 게임에서 하던 퀘스트 연출이 많이 들어가서 좋음. 타임 어택 퍼즐이라던가, 함정 돌파라던가…….
“전반적으로 평가가 나쁘지 않군.”
대놓고 악플을 던지는 이들은 없다.
일단 전사 테스트였고 로그를 조금 확인하면 어디에서 누가 접속했는지 모두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요한 것은 설문지였다.
그것만큼은 모든 것이 익명처리 되니까.
* * *
테스트는 이틀 동안 진행됐다.
그동안 아틀란시아 연대기를 플레이했던 넥플 직원들은 묘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게임이 이렇게 바뀔 수가 있다고?’
새로 업데이트된 분량은 그래픽부터 글자 한 줄까지, 모든 것이 아예 다른 게임을 하는 기분이다.
‘버그가 안 보이네.’
‘오타도 없고…….’
그래서 진행이 굉장히 시원시원하다.
거슬리는 점이 안 보이니 몰입감이 한층 더 강화되는 것이다.
-아 레이드 또 망했네.ㅠ.ㅠ 패턴 왜 이렇게 복잡해졌어?! 저거 살아 있는 거 아녀?!
-이번 레이드 몹…… 기존 몹 AI하고 차원이 다른 수준인데?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거 아니죠??
-ㅇㅇ 처음에는 어느 정도 일정한 패턴에 맞춰서 움직이는데 두 번째, 세 번째 페이즈부터는 패턴이고 나발이고 없어진 기분…… 유저 플레이 패턴을 학습해서 대응하는 것 같음.
-설마 머신러닝 알고리즘을 적용한 건가?;;;;
-에이 설마…….;;
-아냐, 그런 것 같은데요?; 애가 너무 똑똑함!
-그냥 님이 발컨이라 그런 거 아님?
뜨거운 반응.
어느새 평가뿐이던 글들은 사라지고, 게임에 대한 감탄, 즐기는 내용만이 올라온다.
테스터들이 게임에 빠져든 것이다.
오죽하면.
“어, 피디님. 이미 테스트 시간 지났는데 사람들이 로그아웃을 안 해요! 이거 어떻게 하죠?”
게임을 끝낼 생각을 안 한다.
가만히 지켜보던 태연이 한마디 했다.
“놔두고 여러분들은 시간 되면 퇴근하세요. 제가 보고 갈 테니까.”
그 말을 듣고 마음 편히 퇴근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눈치만 보고 슬며시 가방을 내려놓으려는 직원들.
서버 팀장이 퉁명스레 말했다.
“저 한 명이면 충분하니 괜히 아까운 시간만 보내지 말고 프로그램팀 다들 퇴근해요.”
“기획팀도 퇴근하세요.”
“아트팀도 모두…….”
팀장들의 음성에 태연은 피식 웃고 말았다.
* * *
전사 테스트가 끝났다.
이른 아침. 태연은 개발자들에게 말했다.
“모두 수고하셨고 팀장님들은 점심에 식사 같이합시다.”
팀장들이 태연을 따라 도착한 곳은 구내식당이 아닌, 조금 멀리 떨어진 고급 일식집이었다.
“테스트 기간 동안 팀장님들이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괜히 저 때문에 안 해도 되는 야근도 하시고…….”
“……설마 이거 회식 대신입니까?”
“회식은 아니고 제가 고마운 마음에 사비로 대접해 드리는 겁니다.”
당혹스러운 시선을 교환하는 팀장들.
서버 팀장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피디님.”
“네?”
“우리 빨리 퇴근시켜 주려는 마음은 알겠는데…… 요즘 팀원들 사이에서 한 번씩 말이 나오고 있는 거 알고 계십니까?”
“어떤…… 말이 나오고 있나요?”
“회식이라는 걸 한 번 해보고 싶답니다.”
태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한 달에 한 번.
금요일 오후에 근무 대신 파트 끼리 먹고 싶은 음식을 먹고 알아서 퇴근하도록 조치를 하고 있었기 때문.
“회식은 이미 하고 있을 텐데요?”
이게 태연만의 방식이었다.
서버 팀장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말고 남들 하는 것처럼요. 근무 끝나고!”
“음, 요즘 직원분들은 그런 식의 회식 기피하지 않나요?”
“원래는 그렇긴 한데 이번에는 예외입니다. 피디님 때문에요.”
“저 때문이라고요?”
“네. 피디님하고 사적으로 대화도 좀 나눠보고 싶고 친해져보고도 싶은데 회사에서는 그럴 기회가 없지 않습니까? 한 달에 한 번 하는 그 괴상한 회식도 피디님은 참가하지 않고 다른 업무를 보시고…….”
“음…….”
“피디님. 이번 첫 번째 대규모 업데이트가 끝나면 나머지는 박명훈 디렉터님께 맡기고 물러나실 거죠?”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물론 유저들의 반응이 좋아야겠지만…….”
“업데이트가 성공적으로 적용하면 회식 한 번 하시죠. 단체로 고기도 좀 굽고, 술잔도 돌려보고, 이야기도 좀 많이 나눠보고…… 네?”
팀장들도 그러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회식이라…….’
참 특이한 경우였다.
‘내게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는 거겠지?’
리더는 소통을 마다해서는 안 되는 법.
“좋습니다. 단, 익명 설문을 해보고 과반수가 넘었을 때 추진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놀랍게도 그날의 설문은 만장일치!
이렇게 됐으니 태연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업데이트가 성공적으로 끝나면 회식하러 갑시다.”
터져 나오는 함성과 박수.
그때 한 여직원이 손을 치켜들고 물었다.
“2차로 노래방도 가나요?!”
예쁘장한 외모와 발랄한 성격으로 남자 직원들에게 인기가 많던 스물일곱 살의 원화가였다.
“여러분이 원한다면.”
또다시 터지는 함성
아틀란시아 전기 스튜디오.
태연이 주관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단체 회식이 결정된 순간이었다.
* * *
업데이트 이틀을 남겨 둔 날.
“오늘 점심에 특별한 약속 없으면 식사 같이하자.”
아침부터 최종학이 찾아와 제안했다.
그렇게 성사된 식사 자리.
“형. 송재희 PD 알지?”
“엘크로스 피디?”
“그 사람이 이태영, 손영상 이사님들 직계 라인이야. 카이스트 컴퓨터 공학과 후배.”
“음…….”
“원래 네로 소프트에서 신화 온라인 기획팀장으로 근무했고, 런칭 이후에는 디렉터 자리 물려받아서 3년 정도 이끌어 오다가 스카우트 제안받고 우리 쪽으로 넘어온 거야.”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꽤나 흥미로웠다.
“손영상 이사님. 황희 정승마냥 계속 은퇴 각만 노리던 분인데 회장님이 거절해서 어쩔 수 없이 자리 유지하고 계시는 거 알지?”
“음. 대충은?”
“아끼던 후배 송재희가 경쟁사에서 대박 터뜨리는 걸 보고 개발 총괄 자리를 물려줄 생각을 하셨던 것 같아. 그래서 개발비 500억 지원 조건 걸고 데려왔대.”
최종학의 미소가 의미심장해진다.
“게임 성공하면 개발 총괄 자리 물려줄 생각으로.”
손영상 이사 주관, 디렉터 모임 때 아틀란시아 전기 사내 테스트를 가장 먼저 제안했던 사내가 떠올랐다.
금테 안경을 낀 학자 타입의 중년 남자.
그가 바로 넥플 최고 기대작, MMORPG 엘크로스의 총괄 프로듀서 송재희였다.
참고로 엘크로스는 5년 전부터 줄곧 넥플 최대의 기대작이었다.
“그런데 형이 갑자기 부각되기 시작한 거지.”
“그래서 날 경계하기 시작했다는 거야?”
“바로 그거지! 사실 지금 상황에서 보면 두 이사의 후계자로 가장 가까운 인물이 형이잖아. 오죽하면 요즘 형의 별명의 왕의 남자야.”
“왕의 남자?”
“회장님의 남자라고.”
“아…….”
별 소문이 다 있다.
태연은 피식 웃으며 물었다.
“넌 그런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된 거야?”
“어제저녁 이태영 이사님과 한잔하다가 들은 내용이야.”
최종학은 사내 그 어떤 라인에도 속해 있지는 않지만 그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존재감을 가지고 있다.
2년 만에 뚝딱 만들어 한일 동시 런칭한 모바일 게임이 첫해에만 6,000억 매출을 올렸기 때문!
전통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넥플 3대장 게임에 속하지는 못하지만, 최고의 성적을 기록 중이다.
일본에서는 국민 모바일 게임이었다.
이쯤 해서 떠오르는 의문이 있다.
“너는 개발 총괄 하고 싶은 생각 없냐?”
“왜, 생각 있으면 양보라도 해주려고?”
“난 처음부터 관심도 없었어.”
“그러시겠지. 퇴근하자마자 형수님에게 가야 하니까.”
“아무튼, 생각 없어?”
최종학은 피식 웃었다.
“난 내 회사 차릴 건데?”
“투자 제안은 받았고?”
“넥플에서 400억. ND 소프트에서 500억. 중국 텐제트에서 600억. 대략 이 정도?”
“…….”
할 말을 잃어버렸다.
‘단위부터가 다르구나.’
내가 독립 회사를 차린다고 하면…… 100억이나 받을 수 있을까?
고민해 보던 태연은 고개를 저었다.
‘몬스터 이터는 내 타이틀이 아니니까.’
판테온으로 첫해 6,000억 이상의 매출을 올릴 수 있다면 또 모르지만……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최종학이 그런 업적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은 원작 IP가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것도 있었다.
‘난 그냥 넥플 엔터테인먼트나 열심히 키워야지.’
생각을 마친 태연이 말했다.
“아무튼 잘 알았어. 요는 넥플의 새 권력자가 되고 싶었던 송재희 PD가 나 때문에 똥줄이 타서 혼자 난리 치는 상황이라는 거잖아.”
“너무 무시하지 않는 게 좋아. 우리 회사 신규 프로젝트 출시하려면 사내 테스트, 특히 디렉터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하는 거 알지?”
“듣긴 했지.”
“물론 결정은 회장님이 하는 거지만…… 내부에서 크게 반발하면 무턱대고 강요 못 하니까.”
그래도 태연은 걱정 따위는 하지 않는다.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게임을 만들면 되지.”
“…….”
태연은 시간을 확인하고 입을 닦았다.
“다 먹었으면 일어서자. 슬슬 업무 시간이다.”
계산서를 들고 카운터로 이동하는 뒷모습을 보며 최종학은 피식 웃었다.
‘확실히 변했어. 카리스마도 생겼고…… 훨씬 보기 좋아.’
역시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법인가보다.
왠지 느낌이 좋았다.
‘저 형, 조만간 초대형 사고 한 번 칠 것 같아.’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유태연이 만들 게임도.
그로 인해 사내 정치판에 벌어질 일들도.
‘형 데려오기를 참 잘했어.’
스스로를 칭찬하며 최종학 역시 자리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