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한 게임 개발자가 너무 유능함 54화
37. 업데이트 준비
패치를 받는 동안 클라이언트에서 인트로 시네마틱 영상을 재생한다.
‘태초에 선과 악이…….’로 시작해서 대륙의 분열로 이어지는 내용이다.
‘영상만 놓고 보면 지금도 빠지지 않는 퀄리티야.’
당연하다.
영상 제작 업체가 당시에도 지금도 한국 최고의 영상 제작 스튜디오로 이름을 날린 곳이니까.
‘이 몇 분짜리 영상 제작에 수억을 들였다지?’
퀄리티를 생각하면 충분히 납득 가능한 금액이지만 당시 개발자들 사이에서는 최고 이슈였다.
직후 많은 게임사가 이 게임을 따라 했다.
초 고퀄리티의 시네마틱 영상으로 게임에 대한 기대감을 부풀리는 마케팅.
그리고 그 방식은 지금도 유효하다.
‘게임성에 자신 있다면 나쁠 것 없는 방법이지.’
패치가 완료됐다.
개발자 아이디로 로그인, 대중 캐릭터를 만들고 튜토리얼을 패스한다.
개발자 치트키로 새로 업데이트된 퀘스트를 받고, 레벨을 만렙으로 올린 뒤 새로 추가된 장비로 세팅을 마친다.
그리고 플레이 시작.
아무리 겜돌이여도 테스트라는 게 재미있을 수가 없는데 이번만은 예외였다.
‘결혼한 직후부터는 통 게임을 못 했더니…….’
합법적으로 게임할 수 있는 멋진 시간이 아닌가?
천천히 퀘스트 지문을 읽으며 문맥과 오타를 검수한다.
‘백영훈 씨, 실력이 빠르게 늘고 있어.’
일단 지문.
‘처음 가르쳤을 때만 해도 지문에 군더더기가 많았는데…… 굉장히 깔끔해졌군.’
정말 재미있게 써서 유저의 시선을 잡아끌 자신이 있다면 늘여 써도 괜찮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다. 대부분 유저는 퀘스트 조건만 확인하고 넘기니까.
‘게임은 소설과 다르지. 시동 거는 게 늦어지면 대부분은 짜증을 내게 마련이야.’
백영훈은 ‘절제’를 습득했다.
이것은 시나리오 기획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다.
‘백영훈 씨는 더 좋은 기획자가 될 거야.’
하나하나 뜯어보며 태연은 깨달았다.
‘하나같이 좋은 인재들이야.’
그야 당연하다.
모든 파트 구성원들이 자신의 업무에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가 지금 눈앞에 펼쳐져 있다.
기획뿐만 아니라 프로그램 아트.
모든 분야가 그야말로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거기, 거기…… 아유!”
“아니, 본인이 레이드 보스 패턴 만들었으면서 그렇게 해매면 어떻게 해요?”
그래서 그런 걸까?
다들 테스트가 아니라 순수하게 게임 플레이를 즐기고 있다.
솔로, 파티, 대규모 레이드까지.
다들 각자의 방식으로 게임에 몰입하고 있었다.
조용히 나가서 사내 편의점에 들어간다.
“이거 전부 주세요.”
아이스크림을 잔뜩 사들고 다시 돌아와 크게 외친다.
“먹으면서 합시다!”
“어? 우와!”
“피디님이 아이스크림을? 이게 왠일이야?!”
“잘 먹겠습니다!”
분위기가 더욱 화기애애해졌다.
태연은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때로는 당근도 줘야 힘내서 계속 달릴 수 있지.’
* * *
개발, 테스트, 수정.
이 세 가지를 반복하는 동안 업데이트 일정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기획팀은 테스트와 수정에.
아트팀은 그래픽 디테일 작업에.
프로그램은 전반적인 개발 컨디션 관리에.
세 직군의 개발팀은 본인들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했다.
“이번에 개발 비용을 평상시보다 많이 썼는데 부담 안 되세요?”
감찰팀 회의. 인사총무팀장이 조심스레 물어왔다.
모두의 시선 속에 태연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돈을 많이 쓴 만큼 재미있게 뽑혔다고 자신합니다. 문제없습니다.”
“그래도…….”
잠시 머뭇거리던 인사총무 팀장이 작정한 듯 말했다.
“이번에 쏠쏠하게 수익 내주던 유료 아이템 몇 가지 판매를 중단하게 됐잖아요. 그만큼 다른 곳에서 뽑아야 할 텐데…… 그게 쉬운 일은 아니지 않나요?”
감찰팀이자 아트 디렉터인 홍민석이 물었다.
“사업팀에서 안 좋은 말이 좀 나오나 보네요?”
“네. 뭐…….”
“무슨 말이 나오고 있는데요? 감추지 말고 그냥 속 시원하게 말 좀 해봐요.”
계속 눈치 보는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가 나오는 건 아닌 것 같다.
그가 말하기 곤란해하니 태연이 나섰다.
“좋은 소리가 나올 수 없겠죠. 당장 그래픽 외주와 시네마틱 물량만 생각해도 기존보다 훨씬 많은 예산을 사용한 건 사실이니까요.”
그리고 박명훈을 비롯, 그가 추천한 인재들을 섭외하는 데도 상당한 돈을 썼다.
태연은 담담하게 말했지만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렇게 돈을 쓰고 제대로 결과를 보여주지 못한다면 태연의 입지가 굉장히 위태로워질 수도 있다는 것을.
인사총무 팀장이 조금은 다급해진 어조로 말했다.
“정말 자신 있는 거죠? 지금 사업팀은 물론이고 타 스튜디오 피디들도 뒤에서 굉장히 말이 많아요. 다들 하이에나처럼 본부장님 뜯어먹을 기회만 노리고 있단 말이에요!”
물론 태연도 알고 있다.
지금이야 회장님과 이사들이 밀어주고, 신임 본부장으로 위세가 굉장하니 앞에서 내색은 못 한다.
하지만 뒤에서는 엄청나게 험담을 하며 미끄러지기만을 고대하고 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오직 하나뿐입니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
왜냐면…….
“이번 업데이트. 굉장히 재미있을 겁니다.”
재미있는 게임을 만드는 것.
다른 건 몰라도, 그것 하나만큼은 잘해낼 자신이 있는 태연이었다.
‘유저는 게임만 재미있으면 돈을 써주지.’
확신에 가득 찬 표정을 보고서야 감사팀원들은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 * *
업데이트 일정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느 날은 유진성 회장이 호출했다.
-점심 식사나 같이 하자.
자동차를 타고, 회사에서 꽤 멀리 떨어진 한정식집으로 이동했다.
그 자리에서 물었다.
“너 회사 분위기 알지? 다들 이번 업데이트에 주목하고 있어.”
“그렇다더군요.”
“남 말하는 거 아니야. 너 이번에 잘해야 해. 그래야 너 밀어준 내 체면도 서는 거야.”
그리고 은근히 묻는다.
“매출 잘 뽑을 자신 있어?”
“…….”
“몬스터 이터 때처럼만 하자. 그 정도 해주면 너 돈 쓴 거 가지고 아무 말도 안 할게. 자신 있지?”?
태연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지금 몬스터 이터는 대한민국 온라인 게임 중, 매출 순위에서 압도적 1위를 기록하고 있을 정도로 히트 중이기 때문이었다.
이 영향으로 넥플 주가도 계속 상한선을 기록 중이었다.
고민 끝에 태연은 다음처럼 대답했다.
“투자한 만큼 뽑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빤히 태연을 보던 유진성 회장이 피식 웃는다.
“아틀란시아 전기, 다시 부활하는 모습 보고 싶다. 내가 정말 애착을 가지고 있는 몇 안 되는 게임이거든.”
그건 몰랐는데.
태연의 의아한 시선에 유진성 회장이 말했다.
“내가 말 안 했던가? 세계관을 비롯한 기본 설정과 시스템들. 내가 대학생 시절에 작업했던 것들이야.”
“……그렇습니까?”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데 왜 아무것도 안 알려졌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민망하니까 그렇지 인마. 그리고 내가 기반을 만들긴 했는데 유능한 개발자들이 뜯어고치고, 살을 붙여서 지금 형태로 만들었던 거야. 내가 원작자니 뭐니…… 나서며 공을 가로채는 건 말도 안 되는 짓이지.”
새삼, 유진성 회장이 다시 보인다.
강건 대표와는 완전히 다른 마인드 아닌가?
“그동안 내색은 안 했는데…… 내겐 자식과도 같은 놈이야. 젊은 시절, 개발자로서 가졌던 꿈의 결정체 같은 놈이라고. 너에게 있어 판테온, 판데모니움 같은 존재라고 하면 알아듣겠냐?”
수긍이 가서 고개를 끄덕였다.
“몬스터 이터까지는 바라지도 않아. 네가 말했던 대로 MMORPG 본연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도록만 해주면 돼. 그렇게만 해줘도 내가 너 예뻐서 업고 다니지.”
“제가 거절하겠습니다. 솔직히, 굉장히 끔찍하군요.”
“너무 단호한 거 아니냐? 우리 회사에서 날 이렇게 막 대하는 놈은 너뿐이야, 인마!”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태연은 한 가지를 알았다.
이번 업데이트에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주목하고 있다는 것.
심지어 회장까지 나서서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반드시 성공시켜야겠군.’
* * *
최종 빌드 버전이 내부 서버에 업데이트됐다.
기획, 아트, 프로그램, 시네마틱 영상.
최종 디테일 작업까지 끝마친 버전이었다.
이른 아침.
태연은 개발자들에게 말했다.
“예고 드렸다시피 오늘 오후부터 전사 테스트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지난 금요일.
넥플 넘버 투, 손영상이 주관하는 개발 총괄 회의가 열렸다.
한 달에 한 번씩 전사 디렉터들이 모여 애환을 나누는 자리다. 회사 차원에서 지원이 필요한 것이 있거나, 건의할 내용이 있다면 서로 요청하기도 한다.
바로 이 자리에서, 타 스튜디오 디렉터들에 의해 다음과 같은 제안이 나왔다.
‘아틀란시아 전기 이번 업데이트 규모가 굉장하다던데, 전사 테스트로 내부 검증부터 받고 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신작도 아니고.
이미 서비스 중인 게임이 굳이……?
그런데 몇몇 디렉터들이 찬성했고 손영상 이사도 기대감을 담아 물었다.
“자신 있어? 평가 좋으면 마케팅 제대로 밀어주지.”
음모고 뭐고.
더 밀어준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던 태연은 냉큼 수락했다. 회의 끝나고 최종학과 박명훈이 성질을 냈다.
“저 질투에 눈 돌아간 미친놈들이…… 형, 그걸 냅다 수락하면 어떻게 해? 저 새끼들 의도 몰라? 온갖 걸로 물어뜯을 거라고!”
“거절했어야죠! 신작도 아니고, 서비스된 지 십 년도 훨씬 넘은 게임에 무슨 얼어 죽을 검증……!”
말은 안 하지만 옆에서 홍민석, 이영애 AD도 걱정스러운 기색을 드러냈다. 의도가 너무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태연은 여전히 태평했다.
“그만큼 많은 돈을 들인 업데이트니 철저한 검증을 거쳐서 나쁠 것 없죠. 내부 테스트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던 문제점이나, 좋은 아이디어가 나올 수도 있으니까요.”
주위 사람들은 답답함에 가슴을 치지만 태연은 정말 좋은 기회라고 생각 중이었다.
‘완성도를 높일 수 있는 기회야.’
오히려 이런 제안을 나서서 해준 게 고마웠다.
출시된 지 오래된 게임이라 자신이 나서서 요청하기에는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타 스튜디오 입장에서는 예정된 작업 일정을 그만큼 미뤄야 하는 일이 아닌가? 그런데 저희들이 자처해서 이런 기회를 만들어 줬으니…….
“이번 기회로, 최종 빌드 버전의 완성도를 더 끌어올릴 생각만 합시다.”
개발자들도 알고 있다.
이번 업데이트에 무수히 많은 이목이 집중되어 있음을.
눈이 있고 귀가 있기에 이번 전사 테스트가 어떤 의도로 진행되는지도 짐작하고 있다.
그래서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들이 이렇게 잘 해냈다는 것을.
유태연을 위해서가 아니다.
본인들이 그만큼 열정을 쏟아부었고, 좋은 콘텐츠를 완성했다고 자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개발자로서, 플레이를 하는 유저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것과 똑같은 마음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을 위해서.
이번 전사 테스트는 반드시 성공적이어야 했다.
시간을 확인한 태연이 말했다.
“회의는 여기서 끝내고, 전사 테스트 준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