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한 게임 개발자가 너무 유능함 52화
35. 지옥주
“위상변화를 넣자고요?”
“네. 그래야 온 대륙이 쑥대밭이 되는 게 더 실감나죠.”
“흐음.”
태연은 잠시 고민했다.
위상변화.
퀘스트와 이벤트 진행 정도에 따라 주변 환경이 변화하는 시스템이다.
이를테면 퀘스트 수락 이전에는 적진이었던 지역이, 수락 후 클리어가 완료되면 멀쩡한 아군 본진으로 변화하는 방식이다.
이를 제대로 사용한 게임이 아틀란시아 전기가 모티브로 삼은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적군의 침공 탓에 지형이 파괴되는 장면을 실시간으로 감상할 수 있도록 발전시켰다.
“계획을 실행시키려면 확실히 필요하긴 하군요. 그런데 작업 폼이 워낙 크니…….”
“사람 더 뽑으면 되죠. 제가 데리고 일하던 친구들 몇 명 데려오면 그까짓 거 뚝딱 해치울 수 있습니다!”
위상 변화 시스템을 만들어서 적용시킬 수 있겠냐는 질문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걸 가르친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기에.
“좋습니다. 하지만 면접에는 저도 참여하겠습니다. 정말 쓸만한 사람인지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군요.”
“그야 당연하죠, 하지만 마음에 드실 겁니다.”
기획자, 프로그래머, 원화가, 모델러, 애니메이터…… 그리고 그 귀하다는 이팩터까지!
박명훈은 총 여섯 명의 이력서를 올렸다.
‘경력이 준수하군.’
3년 차에서 7년 차까지.
최소 한 개 이상의 게임을 개발 초기 단계에서부터 런칭한 경력이 있고, 유지 보수 경험도 있다.
“면접 봅시다.”
직접 마주하면서 대화로 인성을 파악하고 상태창으로 능력치를 확인해 본다.
‘정말 좋은 인재들이야.’
물론 잠깐의 대화만으로 성격을 완벽히 파악할 수는 없다.
‘이럴 때를 위해 레퍼런스 체크라는 게 존재하는 거지.’
쉽게 말해 면접자가 이전 직장에서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아보는 작업이다. 업계 경력이 오래된 만큼 깊고 얇은 인력이 풍부한 태연이었다.
-아, 김강현 씨요? 좋은 분이죠. 실력도 있고요. 그런데 왜요? 피디님이 채용하시려고요?
-아, 김보현 씨…… 조용히 일만 하는 타입이에요. 그래도 워낙 일도 잘하고 눈치도 빨라서 뭔가 요구하면 작업물을 빨리빨리 잘 뽑아줘요. 그래서 평판이 좋았어요.
‘모난 사람은 없군.’
상태창 능력치와 평판 모두 좋다.
“그렇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지.”
태연은 박명훈에게 말했다.
“일단 아틀란시아 전기 팀에 넣고 위상 변화 시스템을 비롯, 필요한 콘텐츠를 만들도록 합시다. 올해 말까지.”
“내년에 신규 개발팀으로 전환 배치하는 거 맞죠?”
“물론이죠. 설명 잘 좀 해주세요. 당사자 입장에서 혼동이 있을 수 있고 계속 팀이 바뀌는 것에 대해 불만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 * *
개발에 불이 붙었다.
대부분의 작업이 신규가 아니라 베리에이션, 즉 기존 리소스를 재활용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니 더욱 거침이 없었다.
덕분에 태연은 마음 놓고 다른 업무에 열중할 수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감찰팀 회의와 업무를 진행하고, 판테온과 판데모니움 개발하고.
간간이 옆 스튜디오 소식에도 관심을 가졌다.
넥플 플러스의 몬스터 이터!
더 이상은 신규 가입자가 폭발적으로 늘거나 하지는 않지만 접속률이 꾸준히 유지되고 있다는 모양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선방하는 거지.’
모든 것이 순항 중!
‘이 분위기가 계속 이어지기를.’
* * *
근래에 넥플의 분위기가 놀라울 정도로 바뀌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변화는 직장인 앱, 갈대나무 숲 게임 라운지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었다.
-본부장 한 명 바뀌었을 뿐인데 회사 분위기가 정말 크게 달라졌다. 관리 직급들이 예전처럼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꼬장 부리거나 일 안 하고 루팡짓 하는 모습도 진짜 크게 줄어든 것 같은데…… 나만 그렇게 생각하나?
└아님. 확실히 줄었음. 그 이유가 뭔지 암? 본부장님이 수시로 각 라이브 스튜디오 잔업 진척 사항 보고 받으면서 체크하거든. 실무의 달인에 꼼수 마스터라 예전처럼 얌체 짓을 못 하는 거임.ㅋㅋㅋ
└본부장님 진짜 엄격하고 무서운 분이심. 저저번 주, 우리 피디 작업 진척 사항 제대로 체크 안 한 채 주간 업무 보고 들어갔다가 다른 스튜디오 대빵들 보는 자리에서 졸라게 깨짐.ㅋㅋㅋ
└아, 나 그거 봤는데 너네 피디였냐? 진짜 불쌍할 정도로 깨지더라. 나중에는 막 울먹이던데……ㅋㅋㅋㅋ
변화의 시작은 유태연 본부장!
-그냥 본부장 한 명 바뀌었을 뿐인데…….
└이래서 최고 책임자의 역할이 중요한 거지. 눈 부릅뜨고 감시의 눈빛을 보내니까 피디건 팀장이건 다들 긴장하며 일하더라.
이 같은 소식이 업계에 퍼지며 이직 희망자들도 크게 늘었다.
-주위에서 다른 누군가가 업무 집중 안 되게 뻘짓 한다? 본부장님이나 감찰 팀 중 한 명에게 투서 보내셈. 금방 해결됨.
└나도 모종의 이유 때문에 본부장님 메일로 도움 요청 했는데 정말 친절하게 면담까지 하고 해결도 잘 해주시더라. 정말 고마웠음.
몬스터 이터의 대흥행으로 한동안 하락 중이이던 넥플의 주가도 상승세로 변했다.
한편 게임 커뮤니티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큰 이슈 거리였다.
-유태연 피디가 본격적으로 아틀란시아 전기를 뜯어고치기 시작했다!
-아틀란시아 전기는 시나리오, 세계관부터 밸런스까지…… 많은 부분들이 변경될 예정이다. 말 그대로 대격변 수준으로!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 적용할 예정! 이미 개발은 진행 중.
내 친구가 그 팀 개발자인데…….
라는 카더라를 통해 퍼진 소문은 한 가지를 말하고 있었다.
-아틀란시아 전기를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냄새가 나는 MMORPG로 만들겠다더라.
이 부분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도 많았다.
-언젯적 와우냐……
└한때 너도나도 와우 같은 게임 만들어보겠다고 난리였지. 시간이 지나 좀 잠잠해지나 싶었는데……;;;
└정작 와우 매출과 인기는 많이 감소한 상황인데. 이제 와서 그 게임을 목표로 잡는 건 좀 바보 같은 짓 아닌가?
└목표 설정이 잘못된 거 같은데……?
이와 같은 의견에 대해서는 MMORPG를 좋아하고 지금도 플레이하는 유저들이 반박하고 나섰다.
-와우가 뭐 어때서?!
└매출 감소했고 인기가 예전 같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여전히 전 세계 MMORPG 넘버원은 와우임.
└언제적 와우냐니……. 지금도 그런 MMORPG가 없어.
└워낙 잘 만들어진 게임이라 느낌 비슷하게 내는 것도 어려움.
게임 개발은 꽤나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
어떤 좋은 소문이 퍼져도, 그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꽤나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게이머들은 이 오랜 기다림에 익숙한 이들이었다.
특히 아틀란시아 전기 커뮤니티에서는 수시로 개발 루머를 수집하여 침착하게 달라질 게임에 대한 기대감을 쌓아 올렸다.
* * *
이 같은 분위기는 아틀란시아 전기 개발자들도 알고 있었다. 간담회 이후부터 게임 커뮤니티에서 언급되는 일이 많아졌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유저들에게 기대감을 받는 것은 좋은 일 아닌가?
하지만 들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개발 회의.
태연이 폭탄을 떨어뜨렸다.
“명색이 MMORPG인데 PVP 이외의 콘텐츠가 너무 부족합니다. PVE 콘텐츠를 대폭 늘리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게임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우리 게임에서는 못 한다는 건 말도 안 되죠.”
슥 둘러보고 선언한다.
“그런 의미로, 내일부터 한 달 동안 업무 집중 기간입니다.”
“……!”
“이와 관련한 자세한 설명은 디렉터님이 해주실 겁니다. 저는 바빠서 이만.”
태연이 자리를 비우자 박명훈이 읊조렸다.
“지옥주의 시작이로군.”
“그게 뭐예요?”
원화팀 여자 개발자의 말에 박명훈이 물었다.
“지옥주라고, UDT에서 실행하는 특별 훈련이 있어요. 5일 동안 무수면 상태로 강도 높은 훈련을 받는 거죠.”
심상치 않은 설명!
한 남자 개발자가 불길한 예감을 담아 묻는다.
“혹시 크런치 모드를 말하는 건가요?”
“조금 달라요. 야근은 안 하니까요. 그런데 그것보다 더 고단할 겁니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요.”
긴장한 표정의 개발자들.
“업무 외적인 일을 최대한 제약하고, 일정을 빡빡하게 조절해서 일감 쳐내기에만 전념하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걸 말하는 거예요.”
박명훈이 씩 웃었다.
“이걸 지옥주. 또 다른 말로 ‘유태연 모드’라고 말하곤 했죠.”
“유태연 모드?”
“유태연처럼 일하는 시간. 뭐 이런 의미에요.”
“아…….”
“백문이 불여일견. 내일부터 경험해보면 이게 뭔지 체감하게 될 거예요.”
* * *
이른 아침.
아틀란시아 전기 개발 스튜디오에 숨막힐 듯한 정적이 가득했다.
그 중심에 한 남자가 있었다.
깔끔한 네이비 수트를 차려입고, 머리를 빗어 넘긴 채 냉막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응시 중인 한 사람.
타닥. 타다닥……!
가느다란 열 개의 손가락에서 발산하는 키보드 타이핑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울린다.
손가락 힘이 센 것도 아닌데 이상할 정도로 모두의 뇌리에 울렸다.
그 이유는…….
“레벨 파트장 김정원 씨. 신규 맵 기획서 좀 봅시다.”
“네, 네? 자, 잠시만…….”
“다 안 됐더라도 감안하고 볼 테니 가져오세요.”
“……알겠습니다.”
“다음 심주혁 씨 호위 퀘스트 시스템 리뉴얼 문서 준비해 두세요. 비로 검토하겠습니다.”
“네, 네엡!”
바로 이것!
개발실에 본인의 업무 자리를 만들더니, 시간 간격으로 작업물을 검토한다.
조금이라도 잘못되거나 미진한 부분이 있다면…….
“맵 기획 안 해봤습니까? 수치 설정을 제대로 기입해 놓아야지요.”
“헉! 죄, 죄송합니다.”
“특히 고저 측량 설계 부분이 너무 미진합니다.”
가차 없는 지적이 쏟아진다.
하지만 혼내고 끝내는 게 아니다.
“이럴 때는 레퍼런스로 잡은 실제 지형지물 지도를 보고 측량 수치를 참고해서 보완하세요. 그런 건 참고한다고 뭐라고 할 사람이 없습니다. 원래 대부분 그런 식으로 작업을 하니까요.”
“실제 지도를…… 아, 그렇게 하면 되는구나.”
“참고하기 좋은 사이트를 알려 주겠습니다. 만약 레퍼런스로 잡은 실제 지형이 없다면 지금이라도 확인해보고, 최대한 풍부하고 정확하게 맵 기획을 보완하도록 하세요.”
“넵! 감사합니다.”
“명심하세요. 레벨 기획자는 측량용 지도하고 친해져야 합니다. 주요 도시들의 기본 측량 수치 정도는 눈감고도 달달 읊을 수 있도록 공부하세요.”
“알겠습니다!”
“점심 식사 전 11시 30분에 다시 확인해보겠습니다. 다음 심주혁 씨. 호위 퀘스트 리뉴얼 기획서 봅시다.”
그야말로 철인!
아니, 초인!
분 단위로 일정을 정확히 체크하며 작업물을 확인하고 피드백까지 해주는 모습에 개발자들은 완전히 질려 버렸다.
더 놀라운 건 그러면서 본인의 작업을 따로 진행한다는 것이다.
“아, 피디님 여기 계셨네. 판테온 데우스 액스 마키나 디자인 말인데요.”
“이 부분은…….”
“피디님! 지금 면접 보실 시간인데…….”
“오전에 면접 볼 사람이 두 명이죠? 갑시다.”
신규 개발팀 피드백 요청은 물론 인사 등의 온갖 업무 지원 요청에도 응한다.
태연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프로그램 팀장이 옆자리에 앉아 있던 박명훈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원래 저런 분이셨어요?”
“뭐가요?”
“유 피디님이요. 일하고 스케줄 관리하는 모습이 굉장히 살벌한데요? 저 저런 사람 처음 봐요. 사람이 아니야.”
박명훈은 유태연을 바라봤다.
신들린 듯 키보드를 치면서 눈은 타 개발자가 가져온 결과물을 훑고 있다. 그러다가 업무 전화가 걸려오면 두 손을 멈추고, 전화 통화를 하며 손가락으로 업무를 지시한다.
박명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원래 일 빡시게 하기로 유명하긴 했지만 그래도 저 정도까지는 아니었어요.”
“그래요?”
박명훈은 침음성을 흘렸다.
“잠깐 못 본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