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한 게임 개발자가 너무 유능함 51화
34. 포획하다(2)
기분 좋게 회사로 돌아온 박명훈은 즉각 담당 PD와 면담을 진행했다.
“저 회사 그만두겠습니다!”
“……!”
말하는 사람은 유쾌하지만 듣는 사람은 청천벽력이었다.
“아, 아니…… 왜요?!”
“이직하려고요.”
“어, 어디로……?”
“넥플 엔터테인먼트라고 아세요?”
“아, 유태연 피디의…… 어? 잠깐만. 박 팀장님 유태연 피디랑 친하다고 하셨죠? 혹시……?”
대답 대신 빙글 웃는 박명훈.
담당 PD는 탄식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퇴사를 선언하시면 프로젝트는 어떻게 합니까? 박 팀장님이 없으면 안 되는데…….”
“에이, 무슨 그런 약한 말씀을…… 피디님 저 없어도 잘하실 수 있잖아요.”
아니다.
없으면 못 한다.
자신은 이미 프로젝트를 두 차례나 실패한 전적이 있었고 이번이 마지막 기회였다. 그럼에도 피디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학벌과 인맥의 힘이었다.
회장 직속 라인이었던 것이다.
프로젝트를 캐리하는 최고의 실력자, 박명훈이 없다면 이번에도 결과는 뻔했다. 그래서 필사적이었다.
“내가 연봉 더 챙겨줄게. 응?”
“아니요. 저 피디님께 실망해서 회사 나가려는 게 아니에요. 피디님 싫지 않아요. 저 믿고 힘도 많이 실어주셨잖아요.”
“그런데 왜…….”
“피디님은 유태연 그 사람이 아니니까요.”
잠시 말문이 막힌 담당 PD는 한숨을 푹 쉬며 푸념했다.
“아무리 그래도 팩트 폭력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물론 유태연 피디가 굉장히 능력 있는 사람이라는 건 알지만…….”
“아니, 그 이야기가 아니에요. 유태연 피디님은 제 인생 스승님이나 다름없는 분이시거든요. 정말 아무것도 모르던 저에게, 게임 개발뿐만 아니라 회사 생활에 대해서도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쳐 주신 분이세요.”
“아…….”
“은인이 필요하다고 부르는데 망설일 이유가 있나요? 무엇보다 유 피디님이랑 일하면 재미있어요.”
“나랑 일하는 건 재미없고?”
“네.”
담당 PD는 검게 죽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끝까지 직구를 던지네. 하긴, 그래서 박 팀장을 좋아하는 거지만…….”
상대가 풀이 죽든 말든 미소를 참지 못하는 박명훈.
“그래. 가. 가버려. 가서 잘 살아.”
“고마워요.”
“정착 끝나면 연락해. 술 한 잔 하자고.”
“피디님은 좋은 사람이에요. 개발자로서는 그저 그랬지만. 하하하!”
“끄응…….”
* * *
‘만렙 기획자를 얻었군.’
태연은 마지막으로 확인한 상태창 정보를 떠올렸다.
[박명훈]
게임 기획자 (시스템)
시스템 15/10(15)
콘텐츠 12/10(15)
레벨 13/10(15)
시나리오 8/10
프로그램 7/10
호감도 : 10/10
‘박 팀장이 함께라면 어떤 기획이라도 구현할 수 있어.’
돌아오는 길에 최종학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박 팀장 스카웃 성공.]
즉각 전화가 걸려왔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박 팀장이라면 내가 아는 그 박명훈이 말하는 거 맞아? 운동 좋아하는 팩트 폭력배?
“맞아. 방금 확답 듣고 오는 길이야.”
-와, 정말 깜짝 놀랐네. 박명훈 스카우트라니…… 설마 과거의 전우들을 모두 소환할 셈이야?
“가능한 선에서는? 내 일이 많아진 만큼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 특히 기획 부분은.”
-아하, 라이브 본부 말하는 거지? 하긴, 형이 모든 일을 도맡아 할 수는 없는 법이니…… 명훈이에게 라이브 본부 프로듀싱 땜빵을 맡길 생각이야?
“응. 박 팀장이라면 내 기대 이상으로 해줄 테니까.”
-그건 그렇지.
“라이브 본부 정리되는 대로 판테온과 판데모니움 개발 맡길 거야. 라이브 뒤처리만 시키려고 부른 건 아니야.”
-그 정도로 두기에는 아까운 인재지. 아무튼 이거 반갑네. 명훈이가 우리 회사에 온다니…….
“정리되는 대로 셋이 술자리 같이하자.”
-좋지!
전화 통화를 마친 태연은 등록된 휴대전화 번호들을 확인했다.
‘기획팀장급으로 한두 명 정도만 더 섭외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 * *
-당장은 좀 힘들어요. 제가 바로 저번 달에 프로듀서가 돼서…… 이거 수습하려면 최소 올해 말까지는 꼼짝도 못 합니다. 내년 2월 정도나 합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괜찮겠습니까?
-저 지금 일본에서 근무 중이라…… 곧 프로젝트 결과물이 출시되니 그 후에 연락드리겠습니다.
‘역시 쉽지 않군.’~~
아쉽지만 그들에게 섭섭한 감정 따위는 들지 않는다.
한 명은 수백억 규모의 AAA급 콘솔 프로젝트를 디렉팅 중이고 또 한 명은 일본 교토, 게이머라면 누구나 선망하게 되는 바로 그 회사에서 근무 중이다.
심지어 메인 타이틀이다.
‘나 섭섭하지 말라고 그렇게라도 말해준 게 어디야?’
오히려 그들의 배려가 고마웠다.
전혀 미안할 필요도, 배려해 줄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전혀 부담 갖지 말라고, 태연은 담담하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해줬다.
-다음에 더 좋은 제안을 드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어? 잠깐만요. 거절하려고 그런 게 아니라…….
-전 괜찮으니 다음에 뵙죠.
태연은 뿌듯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참 좋은 사람들이야. 배려심도 깊고…….’
당사자들이 들었다면 억울해서 팔짝 뛸 생각이었다.
* * *
박명훈은 보름 만에 출근을 시작했다.
“정말 안 쉬어도 됩니까?”
“제 성격 아시면서…… 전 태생이 느긋한 걸 싫어해요. 하루하루 바쁘고 다이내믹하게 사는 걸 좋아한다고요! 하하하!”
“그래요. 그렇다면…….”
본인이 괜찮다니…….
“일단 일감을 주겠습니다.”
“뭐든지 말만 하십쇼!”
“우선 아틀란시아 전기 임시 기획 실무 총괄을 맡길 겁니다.”
“……잠깐만. 아틀란시아 전기라고요? 임시는 또 뭐예요?”
“그리고 판테온, 판데모니움, 프로젝트 D…… 현재 세 개의 신규 프로젝트가 진행 중입니다. 한 달 시간 드릴 테니 네 개 프로젝트 파악에 전념해 주세요. 일주일당 프로젝트 하나씩. 박 팀장이라면 충분하겠죠?”
“……네?”
“아, 이제부터는 팀장이라는 직책 대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는 직책에 익숙해지는 게 좋을 겁니다. 쉽게, 유태연 전용 기획팀장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한마디로 자신이 직접 관여하는 모든 게임의 기획 총괄을 맡기겠다는 뜻이다.
지시를 내린 태연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자, 화이팅.”
멍한 표정으로 홀로 남겨진 박명훈을, 홍민석 AD가 다가와 어깨를 두드려주며 말했다.
“지옥에 오신 것을 환영해요. 그런 의미로 커피 한 잔?”
“…….”
* * *
박명훈은 보름 후부터 존재감을 드러냈다.
시작점은 아틀란시아 전기 회의였다.
“그러니까 멀티버스 아틀란시아 대륙의 차원 침공 이벤트를 기점으로 전체 시나리오 구도를 다시 짜자는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제 생각에는 그 연합 과정이 순탄하지 않을 것 같아요. 일단 그 부분부터 고려해 보자고요.”
“어, 저기 그러면 시나리오가 너무 늘어지지 않을까요?”
“지금까지 죽자고 싸웠던 두 세력이…… 아무리 위기가 닥쳐왔다고 해도 갑자기 찰떡처럼 붙어서 함께 싸우는 건 이상하잖아요. 이야기 사이즈가 워낙 거대해서 과정을 잘 풀어내야 해요. 처음에는 각자가 엄청난 피해를 입고, 그래도 손을 잡지는 못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다가 어떤 충격적인 사건들이 연달아 벌어지게 되고…….”
박명훈은 씩 웃었다.
“이 과정 풀어내는 것만 해도 1년치 콘텐츠 나오겠네. 떡밥을 풀어가는 과정이 얼마나 긴박하고 재미있을지, 기대되지 않아요?”
어느새 회의실을 장악한 박명훈이 강한 어조로 말했다.
“명심해요. DC 코믹스처럼 서두르면 크게 다쳐요. 마블처럼 해야지. 차근차근, 한 걸음씩.”
개발팀은 물론, 외주 시나리오 작가인 백영훈도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수년의 미래를 내다보고 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박명훈을 보며 태연은 만족스레 웃었다.
‘확실히 실력이 더 늘었어. 그동안 꾸준히 노력해 왔다는 뜻이지.’
그리고 아틀란시아 전기의 방대한 콘텐츠와 복잡한 상황을 벌써 파악 완료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아무리 원래 유저였더라도, 개발자로서 파악하는 건 또 다르다. 표면에 드러난 콘텐츠뿐만 아니라 개발 과정과 프로세스, 준비 계획까지 모두 알아야 하니까.
‘개발 진행은 믿고 맡기면 되겠군. 그러면 나는 비즈니스 모델 변경에 대해 고민해 봐야겠어.’
가장 중요하고 민감한 문제였다.
‘어떤 식으로든, 이미 판매되어 밸런스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캐시 아이템들에 제제를 걸면 반발이 쏟아질 거야.’
이미 돈을 쓴 사람들은 뭐가 되겠나?
현재 가장 심각한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아바타였다.
아틀란시아 전기 아바타는 총 세 개의 등급이 나뉜다.
일반, 레어. 유니크.
일반은 게임 골드로도 살 수 있지만 레어부터는 캐시템으로 취급된다.
유니크 아바타는 돈으로는 살 수 없다.
레어 아바타를 ‘합성’할 수 있는 캐시 아이템 ‘합성 시약’을 사서 합성을 해야 랜덤 확률로 얻을 수 있다.
유니크 아바타 능력 상승 옵션이 워낙 뛰어나기 때문에, 고레벨 던전이나 레이드는 유니크 아바타 풀세트가 없으면 끼워주지 않는다.
‘어디서 안 좋은 건 다 보고 배워서…….’
이건 이전 피디였던 김유현이 타 회사의 인기 게임 시스템을 보고 그대로 차용한 것이다.
해당 게임은 지금도 중국에서만 1조 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며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이 부분은 어떻게 조정할 방법이 없어. 그대로 안고 가는 수밖에.’
대신 완화 정책은 필요하다.
이를테면 특정 업적 퀘스트를 해내면 ‘레어’와 ‘유니크’ 등급 사이 정도쯤 되는 특별 아바타를 제공한다든지.
‘아예 유니크 등급을 무료로 제공해 버리면 돈을 많이 쓴 유저들이 반발할 테니 능력치를 조금은 떨어뜨려야지.’
이외에.
유료 강화 주문서.
유료 아이템 파밍 주문서.
유료 버프 주문서.
유료 자동 사냥 주문서.
‘이런 것들은 없어도 밸런스에 아무 문제 되지 않으니 날려도 되겠군.’
대신 퀘스트를 통해 누구나 얻을 수 있도록 해주면 된다.
‘대신, 해당 캐시템을 대량으로 구매해 둔 사람들을 위해서는 따로 보상 대책을 마련하던가 해야겠지. 구매는 막아버리고.’
태연은 혼자만의 고민으로 끝내지 않았다.
이는 충분한 회의와 많은 검토가 필요한 문제였으니까.
캐시템이 게임 밸런스에 지나치게 영향을 행사하는 문제를 최대한 완화시키는 것.
이것이 아틀란시아 전기의 최대 과제이기도 했다.
이는 당장 매출이 크게 줄어드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달성해야 하는 문제였다.
“재미있으면 돈 쓰게 되어 있어요. 재미있게 만듭시다. 떠나간 유저들도 소문 듣고 다시 발걸음을 돌릴 수 있을 만큼!”
이미 흠집이 난 부분을 완벽히 매울 수는 없다.
대신 게임을 재미있게 만드는 건 가능하다.
“박명훈 디렉터의 말이 맞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게임의 모든 순간이 재미있어지도록 하는 것. 이 게임이 어느 순간 상실해 버린 MMORPG의 낭만을 되살리는 것.”
태연의 눈빛이 반짝였다.
“우리, 재미있는 게임을 만들기 위해 다시 한번 최선을 다해 봅시다.”
“네!”
유태연과 박명훈.
실력과 열정을 갖춘 두 디렉터에게 감화된 개발자들이 힘차게 대답했다.
아틀란시아 전기 개발실에 어느 순간 사라졌던 재미있는 MMORPG에 대한 열망이, 다시 피어오르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