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한 게임 개발자가 너무 유능함 50화
34. 포획하다(1)
영문 모르고 달려온 판테온의 시나리오 기획자, 백영훈에게 간단히 사정을 설명했다.
그리고 물었다.
“만약 백영훈 씨라면 어떤 아이디어를 낼 것 같습니까?”
“많죠. 일단 지금 세계적인 시나리오 트렌드가 멀티버스잖아요? 저라면 이걸 이용해서 차원 침공 이벤트 같은 걸 기획할 것 같네요.”
“예를 들면?”
“또 다른 차원의 아틀란시아 대륙이 있는데, 그곳에서도 같은 세력전이 벌어지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고요. 그런데 그곳에서는 어둠의 신, 데모니아를 섬기는 달의 도시 클라렌트와 그 연합군이 승리를 거둔 거예요. 굉장히 치사하고 얄팍하고 더러운 수단으로 말이죠.”
“아……!”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온다.
백영훈의 입에서 트렌드를 반영한 시나리오가 술술 흘러나온다.
“그렇게 천 년이 지나 또 다른 차원의 아틀란시아 대륙은 클라렌트 제국을 위주로 어마어마한 발전을 이룩했어요. 강하고, 오만해진 그들은 결국, 자신들을 창조한 데모니아의 힘과 세력까지 넘보게 되고, 전쟁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승리하죠.”
“그렇게 신의 힘을 얻어 다른 차원의 존재를 알게 되고, 더 큰 힘을 위해 차원 침공 전쟁을 시작한다는 이야기인가요?”
“그렇죠. 그리고 이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강대하지만 우리에게 익숙하면서 베리에이션으로 대부분의 작업을 해결할 수도 있는 진영이 탄생하게 되는 거죠!”
백영훈이 씩 웃었다.
“대격변 프로젝트에 대한 거 저도 들었는데, 중요한 건 작업 시간 단축 아니겠습니까?”
“바로 그렇죠.”
“이런 식이라면 하루 안에 시나리오와 진영, 캐릭터…… 모두 만들 수 있어요. 내일 바로 각 파트에 작업물을 뿌릴 수도 있겠네요.”
“굉장하군요.”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온다.
확실히 그럴듯한 시나리오였기 때문이었다.
태연은 김무진을 보며 물었다.
“아까 뭐라고 하셨죠?”
“으…….”
“그런 건 누구도 못 할 거라고 하셨나요? 여기 있는 백영훈 씨는 김무진 씨보다 경력이 작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도 금방금방 좋은 아이디어를 쏟아내는데…….”
태연의 눈빛이 매섭게 돌변했다.
“당신은 제 지시를 어겨놓고, 그것을 변명하기 바쁘군요.”
“…….”
“정말 아이디어를 떠올리지 못했던 거라면, 패착은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첫째. 시나리오 기획자로서 역량이 떨어진다. 둘째. 게임 기획에 대한 이해도가 낮아 시나리오를 짤 때 뭘 어떻게 작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태연이 눈빛이 번뜩였다.
“제가 보기에 무진 씨는 두 가지 사항에 모두 해당됩니다. 시나리오 작업을 하기 전에 기획에 대한 이해부터 다시 쌓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시스템 파트장님.”
“네!”
건장한 체구의 남성 기획자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김무진 씨에게 시스템을 가르치세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는 꼬시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백영훈 씨. 시나리오 외주, 해볼 의향 있습니까?”
“네? 외, 외주요? 아, 저한테 아틀란시아 전기 시나리오 맡기시려고요? 그렇다면 외주 필요 없이 그냥…….”
“아니요. 외주로 진행하는 게 맞습니다. 전체 시나리오, 퀘스트 얼개, 대사, 캐릭터와 맵, 몬스터 컨셉까지.”
태연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금액에 대한 이야기는 따로 하도록 합시다.”
“……네.”
태연은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들어가서 회의 계속 이어서 합시다.”
* * *
시스템 파트로 이동한 김무진 일주일 만에 퇴사 의사를 밝혔다.
“전 이런 걸 하려고 여기에 온 게 아닙니다.”
태연은 굳이 잡지 않았다.
‘기회를 줬는데도 본인이 차버렸으니 나도 신경 쓸 필요가 없지.’
극약 처방에 가까운 일이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무려 10년 동안 한 게임의 시나리오를 담당했다는 사람이, 게임에 대한 이해도가 터무니없이 낮았다.
‘시나리오가 굉장히 중요한 MMORPG에서 담당자가 저 모양이니 게임이 망가지지.’
그에 반해 300만 원에 시나리오 외주 계약을 한 백영훈은 기대 이상의 성과를 보여줬다.
하루 만에 차원침공 이벤트를 주제로 한 전체 시나리오를 완성해서 보내오더니, 곧바로 퀘스트 얼개 작업에 착수한 것이다.
“메인 퀘스트가 50개. 서브 퀘스트가 200개 정도 나올 것 같아요.”
“……그렇게 많이요?”
“이 정도는 나와 줘야 시나리오를 풍부하게 진행시킬 수 있어요. 아, 그리고 시네마틱 영상도 몇 개 만들었으면 좋겠는데…….”
“넥플에 시네마틱 팀이 있으니 회의용 문서부터 만들고 미팅을 진행해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백영훈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확실히 넥플이 이런 부분에서는 좋네요. 퀄리티를 위해서라면 돈을 아끼지 않으니까요.”
“이런 게 바로 거대 기업들의 장점이죠.”
서로 마주 보며 미소를 교환하는 두 사람.
‘인재가 더 필요해.’
한편으로 태연은 생각했다.
백영훈처럼 실력 있고, 자신과 손발이 잘 맞는 개발자가 필요하다고.
‘한 번 연락을 돌려볼까?’
과거 함께 동고동락했던 개발자 동료들!
자신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주저 없이 나서줬던 그들과 다시 함께 일하고픈 생각이 들었다.
‘누구보다도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야.’
실력도, 인성도.
그중 일부는 최종학처럼 단순한 개발자가 아니라 스타 개발자로, 유명 프로젝트를 책임지는 프로듀서가 되었다.
‘아쉽게도 그들은 함께하지 못하겠지만…….’
관리자가 아니라 개발자로서, 개발 일선에서 맹활약 중인 투사들이라면 충분히 섭외할 수 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능력에 걸맞은 대우. 그리고 믿고 함께 할 수 있는 동료들일 테니까.’
* * *
“오늘 회의 여기까지 합시다. 모두 수고했고 점심 식사 맛있게 해요.”
회의실을 빠져나온 박명훈 기획팀장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회사에 괜히 온 것 같아.’
연봉이 부족해서?
같이 일하는 사람들 실력이 부족해?
아니꼽게 구는 사람이 있어서?
‘그건 아닌데 말이지.’
멍하니 모니터만 보고 있던 그는 이번에도 해답을 도출해내지 못하고 고개를 저었다.
‘회사도 대기업이고, 프로젝트도 몇백억 규모에 대우도 빠방하고…… 다 좋은데…….’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왜 이렇게 날이 갈수록 우울하냐.’
더 정확히 말하면.
‘게임 만드는 게 재미가 없어.’
생기를 잃어가고 있는 느낌.
‘그때는 참 재미있었는데 말이지.’
한창 시절.
대우도 부족하고 최고 상사는 병신 같았지만 그럼에도 하루하루, 게임 만드는 게 즐거웠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젊고, 열정도 가득하고 순수했지.’
더 이상 그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는 걸까?
‘그렇다고 일을 때려치울 수도 없고…… 곧 아이가 태어날 테니까.’
어쩌면 이런 이유 때문일지도 모른다.
더 이상은 회사를 다니는 게 선택이 아니게 되었다는 것.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한 필수적인 일이었기에 재미가 없고 우울해도 견뎌야 한다.
‘어쩌면 이런 악순환 때문에 더더욱 우울해지는 걸지도…….’
그때 누군가에게 전화가 온다.
“오호, 이 양반이 웬일이야?”
[유태연]
박명훈은 즉각 전화를 받았다.
“아이고, 스타 개발자 유 피디님께서 불초 소생에게 어인 일로 전화를 주셨습니까?”
-같이 점심 식사나 합시다.
“으잉? 점심? 지금요?”
-싫어요?
“아니, 아니라 갑작스럽게 식사를 하자고 하니까…….”
-하고 싶은 말도 있고 요즘 우울해 하고 있는 것 같아서 내가 이야기라도 좀 들어주려고 그러는 겁니다.
“그건 또 어떻게 캐치했어요?”
-박 팀장 우울할 때 메신지 프로필 사진에 본인이 촬영한 달 사진 띄워 놓지 않습니까?
“아…….”
-어쨌든 지금 가는 중이니 거절하지 말고, 약속 있어도 취소하십시오. 잠시 후 봅시다.
너에게 선택지 따위는 없다.
친한 사이이기에 할 수 있는 장난이었다.
그렇게 통화가 끊기자 멍해 있던 그는.
“하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순간 스튜디오 개발자들의 시선이 쏠렸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하여튼 재미있는 사람이라니까.’
입가에 미소가 가득했다.
‘모처럼 수다나 잔뜩 떨어야겠군.’
“박 팀장.”
“아이고 유 피디님! 어서 오십시오! 제가 또 뭐라고 유명하신 분께서 이렇게 먼 길을…….”
장난스러운 말과 달리, 운동으로 다져진 근육질 체구를 굽신거리며 태연을 정중히 맞이한 박명훈.
“제가 좋은 식당 예약했어요. 그곳에 가시죠.”
“아무 곳이나 상관없는데…….”
“에이, 유 피디님 대접하는 데 소홀함이 있어서는 안 되죠. 그리고 이 근처 식당은 직원들이 너무 많아서 마음 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곳도 아니에요.”
“그건 좀 곤란하군요.”
“그렇죠?”
* * *
도착한 곳은 조금 멀리 떨어진 장소에 위치한 초고층 빌딩 5층의 고급 중식당이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고급스러운 곳이군요. 이런 곳에 점심 식사를 다닐 정도라니…… 박 팀장의 위상이 굉장한 모양입니다.”
“에히이, 저도 가끔 사장님이 불러서 오는 정도죠. 여기 비싸서 저도 쉽게 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에요.”
“흠, 그러면 점심 식사는 제가 법인 카드로 결제하도록 하죠.”
“어? 그래도 돼요?”
“안 될 거 뭐 있습니까?”
창가 자리에 앉고 얼마나 지나지 않아 고급 요리들이 테이블을 가득 채웠다.
“자, 드시죠!”
태연은 음식을 먹어보고 놀란 표정으로 감상을 말했다.
“깜짝 놀랄 만큼 맛있네요. 아내를 데리고 와도 좋겠어요.”
“제가 자신 있게 권한 이유가 있다니까요.”
박명훈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기분 좋게 웃었다.
“어유, 요즘 왜 이렇게 우울한지 모르겠어요.”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박명훈은 근래에 회사 생활하면서 느끼는 다양한 고충 거리를 마구 쏟아냈다. 태연은 식사를 하며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누가 괴롭히는 사람이라도…… 음, 질문이 잘못됐군요. 박 팀장이 그런 걸 가만 놔둘 사람도 아닌데.”
“흐흐, 역시 사람 보는 눈 있으시다니까. 그건 아니에요. 다들 순하고 일 잘하고…….”
그는 푹 한숨을 내쉰다.
“심지어 연봉도 분수에 넘칠 정도로 좋고 다 좋은데 이상하게 우울하다니까요. 특히 일하는 게 재미가 없어요.”
“흠.”
“피디님이 보시기에 뭐가 문제 같아요?”
태연은 고민하지 않고 즉각 대답했다.
“일이 쉽고 몸이 점점 편해지니 늘어져서 그러는 거죠.”
“엥?”
예상치 못한 대답에 황당해하는 박명훈.
태연은 차를 마시며 변함없는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한때 직장 상사였던 제 입장에서 봤을 때, 박 팀장은 워낙 도전적이라 어려운 난관 속으로 몸을 던진 뒤 그것을 이겨냈을 때 오는 쾌감을 즐기는…… 약간 마조적인 성향이 있습니다.”
“제, 제가요?”
“박 팀장을 부하 직원으로 부렸을 때 그 부분을 알고 역량과 성향을 고려하여 조금 과다하다 싶을 정도의 난이도의 일거리를 계속 만들어 던졌죠.”
“아…….”
“박 팀장은 제 방식에 철저히 길들여진 사람입니다. 다른 곳으로 가면 그렇게 될 거라고 전 이미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
박명훈은 웃을 수가 없었다.
‘그래. 바로 이거였어.’
왜냐면 맞는 말이었기 때문에.
이어진 태연의 말에……
“다시 같이 한번 일해 봅시다. 박 팀장이 필요한 곳이 많아요. 지금 박 팀장 역량과 스케일에 맞는 일거리가 넘쳐납니다. 딱 죽지 않을 만큼 굴려 줄 테니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 겁니다.”
“……!”
온몸에 전율이 밀려왔다.
‘다시 유 피디님하고 일한다?’
이거였다.
자신이 바라던 것.
기다리고 있었던 것.
‘난 유 피디님이 다시 불러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확신한 순간, 박명훈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입가에 미소가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