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사한 게임 개발자가 너무 유능함-49화 (49/147)

퇴사한 게임 개발자가 너무 유능함 49화

33. 고민하다

아틀란시아의 전기의 시나리오는 그 유명한 ‘태초에 선과 악이…….’로 시작된다.

선과 악이 싸우다가 둘만으로는 결판이 나지 않으니 세력을 창조해 세력전을 시작했다.

각자의 성향을 닮은 천계와 마계를 창조하고, 중간계를 만들어 그곳을 먼저 정복한 사람의 승리!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다는 것이 세계관 설정이고 시나리오의 시작이었다.

‘여기까지는 그러려니 넘어갈 수 있지.’

애초에 WOW를 모티브 만든 게임이었다.

와우의 특징인 호드와 얼라이언스 세력전을 가져오기 위해 이 같은 세계관을 만든 것이다.

빛의 신 루맨.

어둠의 신 데모니아.

플레이는 이 두 진영의 여러 종족을 고를 수 있다.

누구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태양의 도시 <바이렌> 달의 도시 <클라렌트>에서 시작하게 된다.

‘이것도 뭐…….’

조금 아쉽긴 하다.

WOW처럼 종족별로 스타팅 포인트와 시나리오가 완전히 달랐다면 더 재미있었을 텐데 말이다.

‘어쩔 수 없지. 당시 개발력이 그 정도에 미치지는 못했으니까.’

당시에는 비용뿐만 아니라 제작 기간, 인원, 개발자들의 수준 등등. 모든 면에서 WOW에 미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WOW 짝퉁’이라는 오명을 쓰긴 했지만 그 당시에는 이런 게임조차 없었고 현지화가 꽤 잘된 편이었기에 게임은 대박을 치게 됐다.

‘이젠 그것도 옛날이야기지.’

잘나가던 게임은 시나리오가 방향성을 잃으며 무너졌다.

아니, 애초부터 방향성 따위가 없었다.

이 기획을 끌고 갈 기획자들이 낙하산이었던 피디와 기획팀장을 제외하면 계속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두 리더는 작품을 끌고 갈 기본 역량조차 없던 인물들이었다.

기획자들은 계속 바뀌고, 시나리오는 그때마다 색과 방향성이 바뀌며 뒤죽박죽…….

‘비즈니스 모델도 순 엉망진창이야. 레어 급 이상의 아이템을 ‘확률’로라도 파밍하려면 아이템 파밍권을 결제해야 하니…….’

이 게임의 아이템 등급은 기본적으로 다섯 가지.

일반, 레어, 유니크, 에픽, 전설.

한 달에 12,000원 하는 ‘아이템 파밍권’을 사지 않으면 아무리 사냥해도 ‘레어’ 이상의 아이템이 드랍되지 않는다.

‘간담회에서 가장 많이 쏟아졌던 비난 중 하나가 바로 이 부분이었지.’

그 외에도 기상천외한 유료 아이템은 많다.

대부분이 능력치 상승과 연관이 되어 있는데 돈을 주고 산다고 최상급의 능력치를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유료 아이템을 사서 강화나 합성을 해야 하는데, 이조차도 확률이 랜덤이다. 등급이 올라갈수록 실패나 파괴 확률도 높아진다.

‘엉망이야.’

이 게임이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메인 디렉터가 바뀌고부터 이게 게임인지 도박인지 분간을 하기 어려울 정도로 엉망이 된 것이다.

수억을 때려 부어도 최고가 될 수 없는 게임.

이 게임은 소위 고래라 불리는 극소수 유저들만의 커뮤니티처럼 돌변했다.

‘하여튼 쓸데없는 것만 잘 따라 한단 말이지.’

원래 이런 건 넥플의 방식이 아니다.

‘네로 소프트가 게임사 여럿 망쳐놨어.’

넥플과 1위를 다투는 경쟁 게임사.

네로 소프트.

넥플이 성공적인 M&A로 몸집을 크게 부풀리기 전까지는 이 회사가 국내 게임사 시가총액 톱이었다.

지금도 게임 단일 매출 최고 기록은 네로 소프트의 MMORPG ‘신화’ 온라인이었다.

수년째 전 세계 모바일, 온라인 게임 통합 매출 순위 1위를 유지 중이다.

‘신화 온라인이 부러웠던 모양이지.’

하지만 판단 착오다.

신화 온라인은 아예 처음부터 그렇게 설계된 게임이지만 아틀란시아 전기는 WOW를 목표로 시작된 프로젝트였다. 조금이나마 그 색채를 내서 성공한 게임인데 엉뚱한 게임을 목표로 드리프트를 해버렸으니…….

“…….”

태연은 잠시 고민했다.

‘정말 이렇게까지 뜯어고쳐도 되는 걸까?’

하락세라지만, 여전히 타 게임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매출을 올리는 게임이다.

이미 정착된 지 오래인 비즈니스 모델을, 자신의 마음대로 뜯어고쳐도 아무 문제가 없을까?

‘보상 문제도 고려해야 하고 이를 대처하고도 남을 수익 모델을 새로 구상해야 하고…….’

위험성이 큰 결정이다.

시나리오 수정하고 오류 사항 몇 가지 고치고 가장 크게 말이 나오는 BM 한두 가지 없애는 것 정도로는 유저를 달랠 수 없다. 여론을 바꾸지도 못했으면서 매출만 날릴 최악의 결정을 하게 되는 셈이다.

‘바꾸려면 완전히 뜯어고치는 수밖에 없지.’

그래서 대격변.

각오는 충분히 되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상황에서 또다시 망설여진다.

정말 이렇게 해도 되는 건지.

잘못된다면 대체 어디까지 책임져야 하는 건지.

‘어쩌면 게임사에 가장 멍청한 결정을 내린 사람으로 기록될 수도 있지.’

한참을 고민하던 태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퇴근하겠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어느새 퇴근 시간이었다.

“…….”

개발실이 텅 비워진 이후에도 태연은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 * *

“오빠 요즘 고민 있어?”

주말, 단골 레스토랑에서 점심 식사 중 윤아가 갑자기 물음을 던졌다.

“오빠 요즘 굉장히 심각해 보이는 거 알아?”

“아, 그랬어?”

집에서는 항상 웃는 모습, 좋은 모습만 보여주려고 노력했었다.

하지만…….

“내 눈은 못 속여. 내가 오빠 감정 변화, 얼마나 예민하게 캐치하는지 모르지?”

슈퍼스타로서, 수많은 이들을 상대해왔던 윤아의 눈썰미와 직감은 피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이야? 솔직히 털어나 봐.”

“회사 일이라 복잡하고 어려울 텐데…….”

“쉽게 설명하면 되지. 오빠 그런 거 전문이잖아.”

“음…….”

“그리고 오늘하고 내일, 시간도 많은데 뭐가 문제야? 느긋하게 이야기해 봐. 다 들어줄 테니까.”

자신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훨씬 어른스러운 그녀였다.

태연은 최근, 아틀란시아 전기 비즈니스 모델 개선 관련, 자신의 걱정과 고민거리를 솔직히 털어놨다.

“음, 내가 오빠 입장이라도 심각하게 고민해 볼 문제네. 참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

해결 방안을 내주기를 기대하고 한 말이 아니다.

그녀가 듣고 싶어 했으니까 솔직히 말해준 것뿐이다.

그런데.

“그런데 내 경우에는 시간이 좀 걸리고 힘들어지더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면 하는 게 정답이었던 경우가 많았어.”

“응?”

“체조 말이야. 아무리 좋은 코치님께 지도를 받아도 연습을 오래하다 보면 안 좋은 버릇이 계속 쌓이기 마련이거든.”

“아…….”

“그걸 무너뜨리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게 절대 쉬운 일은 아니야. 그런데 그걸 못하면 금메달을 따지 못해. 오빠도 이와 비슷한 상황 아니야?”

“……!”

태연은 머릿속이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고민이 설마 이런 식으로 이어질 줄은 몰랐던 것이다.

“교정이 힘들다는 이유로 체조를 때려치울 수는 없는 일이잖아. 금메달은 따고 싶고, 사람들에게 인정도 받고 싶고…… 뭐 어쩌겠어? 이 악물고 해야지.”

“음…….”

“하는 게 맞다고 판단되면 해. 나도 오빠 간담회 영상 봤는데…… 이미 약속 다 해놨던데. 안 하면 오히려 욕먹을 것 같던데?”

태연이 미묘한 얼굴로 말했다.

“그 영상을 봤어?”

“응. 오빠 일하는 모습, 현장에 가서 직접 보고 싶었는데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아니까…… 그렇게라도 본 거지 뭐.”

“…….”

“나 이것도 봤어.”

민망해하는 태연의 내심을 알아차린 윤아는 엄숙한 표정을 따라 하며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게임 개발자 유태연입니다.”

“……!”

“푸하하하!”

* * *

주말이 지나고 회사에 출근한 태연의 머릿속은 무척이나 개운해진 상태였다.

‘하긴, 이미 뭔가 보여줄 것처럼 분위기 다 잡아놓고 이제 와서 망설이는 것도 웃긴 일이긴 하지.’

자신이 해야 할 것은 간단했다.

‘이 게임이 본래 목표했고 가고자 했던 방향으로 되돌린다.’

WOW 같은 MMORPG.

시스템은 물론, 일부 비즈니스 모델의 대대적인 개편은 불가피하다.

‘컨텐츠와 그래픽을 보강해서 북미, 유럽 서버 런칭을 목표로 한다면……?’

거기서 소정의 성과를 낼 수 있다면 비즈니스 모델 개편으로 인한 수익 약화에 대한 부담과 걱정은 크게 덜 수 있을 것이다.

‘MMORPG는 내 전공 분야야. 누구나 재미있어할 게임을 만들 수 있다면 문제는 다 해결된다.’

프로듀서 입장에 서게 되면 이래저래 생각할 것이 많아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하지만 게이머들의 입장은 언제나 항상 간단하다.

‘재미!’

그렇다.

게임은 재미있으면 장땡이다.

그들이 바라는 건 예나 지금이나 오직 하나뿐이었고, 태연은 그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누구나 즐길 수 있던 그 게임으로 다시 만들어 보자.’

아침부터 아틀란시아 전기 개발팀을 찾은 태연은 기획팀을 모두 모아 놓고 물었다.

“김무진 씨. 시나리오 작업 어디까지 진행됐어요?”

“네? 아, 그, 그게…….”

뚱뚱한 체구에 검은 뿔테 안경을 쓴 중년의 남자가 머뭇거린다.

그는 김유현 피디, 오정현 기획팀장이 데려온…… 올해로 아틀란시아 전기만 10여 년을 담당한 시나리오 기획자였다.

“일단 완성한 부분만이라도 보여주세요.”

“…….”

“왜 대답이 없어요?”

“저, 저는 원래 완성하지 않은 문서는 함부로 남에게…….”

“됐고 빨리 보여줘요. 지금 당장.”

머뭇머뭇, 자리에서 일어서서 회의실을 벗어난 그는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태연이 인상을 쓰자 콘텐츠 파트장이 눈치를 보며 일어섰다.

“제가 가보겠습니다.”

“됐어요. 제가 가서 보고 오죠.”

자리에서 일어선 태연은 회의실 문을 열고 나가 김무진 자리로 향했다.

“아, 씨…… 갑자기 이게 무슨……!”

뒤에 태연이 다가왔는지도 모르는 김무진은 한참 바쁘게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시나리오 기획서였고, 빈 여백에 이제 세 줄이 채워져 있었다.

“작업을 안 했군요.”

“……!”

화들짝 놀라며 급히 뒤돌아보는 김무진.

“아, 그, 그게 아니라…….”

“안 했네요. 보니까.”

“아닙니다! 했습니다. 했는데 마음에 안 들어서 지운 게 복구가 안 돼서…….”

“제가 복구해 볼까요? 직접 만든 좋은 복구 프로그램이 있는데…….”

“…….”

태연은 한숨을 내쉰 뒤 속으로 읊조렸다.

‘상태창 On!’

[김무진]

게임 기획자(시나리오)

시스템 : 2/10

콘텐츠 : 4/10

레벨 : 3/10

시나리오 : 4/10

호감도 : 1/10

‘기획 능력이 전반적으로 떨어지는 편이군.’

딱 생각한 대로의 능력치였다.

“솔직히 말해보세요. 제가 지시한 이후 작업, 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

입술을 꽉 깨문 김무진이 느닷없이 저항을 시작한다.

“대격변이니 뭐니, 갑자기 그런 무식한 기획을 지시하면 제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투실투실, 하얀 얼굴이 흥분으로 달아올랐다.

“뭘 해야 할지 몰라서 계속 구상만 했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규모가 크잖아요! 자연스럽게 세계관을 리셋으로 연결될 수 있는 시나리오를 구상해 보라니…… 하, 나 참.”

본인 스스로도 흥분이 과다했다는 사실을 인지했는지, 심호흡을 하며 조금이나마 흥분을 가라앉힌 그가 찡그린 얼굴로 말했다.

“그런 건 누구도 못 할 겁니다.”

“…….”

아틀란시아 전기의 유일한 시나리오 기획자, 김무진에게 지시한 것은 하나였다.

세계관 리셋으로 이어질 수 있는 시나리오 아이디어를 구상해 보라는 것.

시나리오를 쓰라는 게 아니라 브레인스토밍을 하기 위한 소스를 한 번 모아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조차도 안 하고 오히려 지시한 태연의 탓을 하는 것이다. 난이도가 너무 무겁다며.

“…….”

어느새 많은 이들이 모여 있었다.

태연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백영훈 씨. 잠시 제가 있는 곳으로 와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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