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사한 게임 개발자가 너무 유능함-43화 (43/147)

퇴사한 게임 개발자가 너무 유능함 43화

28. 조직 개편(2)

잘못된 미투는 도리어 태연의 명성만 높여주는 결과만 낳고 말았다.

[피디님 존경합니다.]

[저 정말 피디님 같은 분은 처음이에요. 저 열심히 해볼 테니 많이 가르쳐 주세요!]

이른 아침. 책상을 가득 채운 쪽지와 먹거리들을 앞에 태연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인기가 굉장하시네요! 스타개발자 유태연 피디가 알고 보니 덕장 기질까지 갖췄다더라! 라는 소문이 파다하던데요.”

“AD님.”

“사실 저도 그 고발 내용 읽고 놀랐어요. 아니, 세상에 어떤 본부장이 일개 사원을 위해 이렇게까지 해줄 수 있을까. 싶어서요.”

“민망하니까 그만하시죠.”

“팀원들하고 카페테리아에서 회의 좀 하고 오겠습니다.”

“네. 다녀오세요.”

회의를 꼭 회의실에서 할 필요는 없다.

일 잘하고, 남에게 피해 안 주면서 팀 화합에 도움을 준다면 어디서 무슨 일을 하건 크게 상관할 생각이 없었다.

* * *

태연의 오전 업무는 이메일 업무였다.

[제목 : 시나리오 기획자 김종욱입니다! 시나리오 기획서 초안 보내드립니다.]

라이브 본부 산하 스튜디오들 중, 태연과 개인 면담을 했던 대부분의 작업자들이 이메일을 보냈다. 자신이 지금까지 한 작업물을 정리해서 피드백 요청을 보낸 것이다.

그 수만 무려 십수 개!

라이브 본부 전체 인원을 생각하면 그리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일개 개인이 봐야 하는 업무치고는 상당한 분량이었다.

아무리 베테랑 관리자라도 이 정도 분량의 업무라면 기가 질려 패닉 상태에 빠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태연은 파트장 시절부터 이런 업무를 해왔던 사람이었다.

‘일단 기획 직군부터 처리하는 게 좋겠군.’

빠르게 엑셀, 워드 파일을 훑어보고 문제점을 파악한 뒤.

[캐릭터 컨셉 기획서는 원화 작업자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특징만 부각시키는 게 좋습니다. 제가 과거 작업했던 예시로 설명드리면…….]

거침없이 타자 소리!

정시에 맞춰 출근한 판테온 개발자들이 인사를 건네며 얼굴로 의문을 드러낸다.

-아침부터 뭘 저렇게 열정적으로 하시는 거지?

태연과 일해 본 사람들은 한 가지, 그의 유별난 특징 몇 가지를 알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그의 몰입도가 높아질수록 키보드를 점점 빨리, 세게 두드린다는 것이다.

정점에 이르면 마치 개틀링 건을 연사하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데 그때는 웬만큼 중요한 용건이 아니면 입도 벙긋하지 않는다.

태연의 업무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나도 일하자.’

‘아침부터 열심히 하시네.’

그리고 또한 그 소리는 기분 좋은 자극제였다.

스튜디오의 리더인 그가 자리를 굳건히 지킨 채 거침없이 업무를 쳐나가고 있다는 증거였으니, 자신들도 그에 뒤지지 않기 위해 열을 올리게 되는 것이다.

* * *

“후우…….”

한 시간 만에 피드백 업무를 깔끔하게 끝내 버린 태연은 시간과 스튜디오 분위기를 차례로 확인했다.

‘다들 열심히 일하고 있구나.’

새삼 상태창 보는 능력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덕분에 정말 좋은 작업자들과 일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어느새 아트팀이 모두 복귀해서 업무에 열중하고 있었다.

태연은 홍민석, 이영애 두 사람을 불러 카페테리아로 이동했다.

“먼저 이영애 AD님. 플랫폼 사업 관련 제가 전에 부탁드렸던 일이 어디까지 진행됐는지 공유해 주시겠습니까?”

“일단 로고 시안부터 보여드릴게요.”

콘텐츠 플랫폼 -밀키웨이

직역하면 은하수.

밤하늘의 아름다운 별들처럼, 훌륭하게 빛나는 콘텐츠를 제공하겠다는 뜻이 담긴 이름이었다.

다양한 로고 시안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에 시선이 멈췄다.

[별을 올려다보는 아이의 뒷모습.]

“이게 마음에 드는군요.”

“그럴 것 같았어요.”

“어디서 영감을 얻으신 거죠?”

“디즈니와 드림웍스 로고에서요.”

“훌륭하군요. 아주 마음에 들어요. 넥플 엔터테인먼트의 콘텐츠 플랫폼. <밀키웨이>의 로고는 이것으로 결정하겠습니다.”

태연이 윤아와 여행을 떠난 시점부터.

이영애는 넥플 엔터테인먼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굉장히 많은 일을 수행했다.

로고 시안 만드는 게 전부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제가 친한 작가들을 독점 연재 작가로 섭외하며 고민을 좀 했었는데, 밀키웨이를 제로에서 키우는 건 아무래도 너무 많은 시간과 노력이 소모될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기존 콘텐츠 연재 사이트의 인수 및 통합으로 방향을 전환해서 시장을 조사해보고 있었어요.”

“흠,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것은 충분히 각오하고 있었습니다만…….”

“시간도 시간인데 문제는 그런다고 원하는 사이즈만큼 플랫폼을 키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는 거죠.”

“이유가 뭐죠?”

“OTT 회사들마냥 결국 콘텐츠 플랫폼을 성장시키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질 좋은 오리지널 작품을 얼마나 많이 확보했고, 또 확보하고 있느냐 여기에 있다고 보거든요.”

“아…….”

“그런 작품들을 불러모을 수 있는 것은 콘텐츠 플랫폼 자체의 ‘규모’에 있어요. 전 앞으로 이 시장이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는데…… 다른 후발 주자들이 자본과 이름값을 앞세워 물량 공세를 퍼붓기 전에 빨리 움직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녀의 말이 일리가 있었다.

“그래서 기존 연재 사이트들을 인수해서 밀키웨이 브랜드로 통합하려는 방향을 고민하고 있었다는 것이군요.”

“아무리 모바일이 트랜드라지만 창작물을 자유롭게 올리고 공유하며 게시판 같은 곳에서 다양한 주제로 커뮤니케이션을 진행하는 데 가장 편한 것은 바로 PC죠. 볼 때는 모바일로 보더라도 말이에요.”

“그건 그렇죠.”

“그래서 더더욱 기존 콘텐츠 연재 사이트들을 인수, 통합할 필요가 있는 거예요. 결국 자본 논리에 잠식될 시장이라면 우리 쪽에서 빨리 손을 써서 조금이라도 지분을 가져가는 게 맞다고 보거든요. 게임이 그러듯이요.”

대한민국 게임 시장은 넥플을 비롯한 몇몇 대형 기업들이 사실상 시장을 양분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중소기업에서 게임이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홍보가 개발만큼이나 중요한 상황이 되어버린 시점에서 자본이 부족한 중소기업이 살아날 길은 대형 자본에 숙이고 들어가는 것밖에는 없었다.

아니면 압도적인 퀄리티의 게임 콘텐츠로 시장에 혁신을 불러오거나.

“우리 등에 넥플이 있는데, 이용해 줘야죠. 그리고 할 수 있을 때 해야 해요. 판테온 성공 이후를 생각하시면 늦어요.”

태연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AD님은 제 생각을 모두 꿰뚫어 보고 계셨군요. 사업 확장의 본격적인 시기를 ‘판테온’ 성공 직후로 잡고 있었다는 것을 어떻게 아셨나요?”

“급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안정적으로 기초 공사를 해보자 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죠. 제가 아는 피디님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사업 감각이 결여된 판단을 내릴 분이 아니었거든요.”

“제 사업 수단에 대한 판단은 또 무엇을 보고 내린 거죠? 혹시 몬스터 이터인가요?”

“물론이죠.”

잠시 고민해 보던 태연은 결정을 내린 듯 말했다.

“조사한 자료를 넘겨주시면 참고하면서 일을 진행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후 판테온, 프로젝트 D와 관련된 아트팀 일정에 대한 논의를 진행했다.

홍민석 AD가 말했다.

“조속한 진행을 위해서 모델링과 애니메이션 몇 개를 외주로 돌릴 생각입니다. 특히 보스 몬스터들과 플레이어 캐릭터는 퀄리티를 생각하면 돈을 더 투자해서라도 고급 인력에게 맡기는 게 낫다는 생각입니다.”

“동의합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어느 정도로 의뢰를 맡기실 생각인지 대략적인 프로필과 포트폴리오 정도는 정리해서 넘겨주시기 바랍니다.”

“바로 넘겨 드리겠습니다.”

백지에서 모든 것을 만들어가야 하는 판테온과 달리, 디즈니와 협업하는 프로젝트 D는 종류별로 거의 모든 소스가 준비되어 있는 상태였다.

이영애가 말했다.

“일전에 피디님이 말씀하셨던 대로 원본 소스를 최대한 재활용하는 방향으로 프로젝트를 진행시키고 있어요. 엔진에 맵과 캐릭터 올려서 이것저것 보고 있는데 조합만 잘해도 괜찮은 게임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시스템은 판테온을 위해 제작 중인 소스 일부와 공유하면 될 것 같고요.”

프로젝트 D. 그리고 판테온 이후 만들어질 판데모니움은 같은 시스템을 사용할 예정이다.

그리고 판테온에 구축되는 시스템은 태연이 넥플 이전부터 꾸준히 구축해 오던 노력과 열정의 집합체였다.

그리고 이것이 굳이 추가적으로 기획자를 더 뽑지 않고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이미 대부분 기획 작업이 끝나 있고 구현만 남겨 놓은 상태니까.

“시나리오 작업이 끝나는 대로 프로젝트 D에 걸맞은 기획서를 작업해서 공유할 테니 그때부터 빠르게 작업에 착수하면 될 것 같군요.”

“작업 마감 기한을 대략 어느 정도로 생각하시나요?”

잠시 고민해 보던 태연이 말했다.

“이번 주 금요일까지 기획 문서를 넘기고, 다음 주부터 작업에 착수한다고 치면 6, 7개월 정도에 모든 맵과 캐릭터, 아이템 구현 작업이 끝나 있을 것 같습니다. 1년이면 게임이 대략적으로 완성되었겠군요.”

부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홍민석이 물었다.

“그렇게 빨리요?”

“더 빨리 끝낼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일부러 기한을 넉넉하게 잡은 겁니다.”

태연은 자신 있게 말했다.

“제가 다른 건 몰라도 작업 속도만큼은 국내에서도 손꼽히는 수준이라고 자신하고 있거든요.”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하죠?”

“머릿속에 모든 그림을 완벽하게 그려놓고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덧붙였다.

“장인 정신보다는 극한의 가성비를 추구해 왔던 버릇도 한몫했고 말이죠. 거쳐온 회사들의 작업 환경이 그다지 좋지 않았거든요.”

순간, 강건 대표를 떠올린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혹한 개발 환경에서 그토록 혹사와 이용을 당하면서도 기어이 성공작을 뽑아냈던 태연이었다.

그것도 몇 차례씩이나!

태연이 이영애에게 말했다.

“프로젝트 D를 1년 안에 쳐내고 판테온과 밀키웨이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해드리겠습니다.”

부부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태연의 말이 그렇게 믿음직스러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 * *

군대에는 마음의 편지라는 게 있다.

병사가 지휘관에게 비밀 편지를 써서 병영 내 부조리를 신고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였다.

대부분의 기업이 내부 신고체제를 운영하고 있고, 당연히 넥플에도 그런 제도가 존재한다.

‘유명무실해진 지 오래지만…….’

그래도 무시할 수는 없다.

자주는 아니지만, 이따금씩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큰 건이 투서로 날아오기 때문이다.

‘성추행이라…….’

한 여직원이 이메일을 통해 보내온 내용이었다.

한 라이브 본부의 아트 디렉터가 업무를 가르쳐준다는 핑계로 계속 추근대다가 성추행까지 갔다는 모양.

[……그런데 주변에는 사귀고 있는 거라고, 내가 성격이 까탈스러워서 가끔씩 급발진을 한다는 식으로 말하고 다니는 모양이에요. 얼마 전 동료 직원들이 알려줘서 그 사실을 뒤늦게 알았는데…….]

사실이라면 고약한 일이다.

‘하지만 사실이 아니라면……?’

모든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한 집단에서 관리직 직위에 있는 사람이라면 말을 가려들을 줄 알아야 한다.

‘중요한 건 비슷한 건이 세 건 더 왔다는 거지.’

이외에 직장 상사의 무능이라던가, 비리를 고발하는 내용서 투서됐다.

혹시나 싶어 손영상 이사에게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냐고 물어봤더니…….

“그거 아마도 유 피디가 본부장이 돼서 그런 걸 거야. 평판이 워낙 좋기로 또 유명하잖아.”

원래 이와 같은 일을 주로 인사팀에서 전담한다.

하지만 그들이 나서서 처리할 수 있는 일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특히 업무와 관련된 내용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담당 분야가 다르니까.

‘일단 확인을 해봐야겠군.’

제일 먼저 면담을 진행한 사람은 안경을 착용하고 회사에서 나눠준 검은 후드티와 청바지를 입고 있는 여직원이었다.

청순한 타입으로, 꽤 인기가 있을 외모였다.

“어메이징 레이싱 팀 원화가 김혜원입니다.”

어메이징 레이싱은 캐주얼 레이싱 게임으로, 올해로 서비스 5년 차에 접어든 인기 게임이었다.

“유태연 피디입니다. 편한 대로 칭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동의 후 녹취와 함께 본격적인 면담이 진행됐다.

“상황을 하나도 빠짐없이, 최대한 상세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

“겁을 먹지 않으셔도 됩니다. 조사 후 증언이 사실로 확인되면 제 권한으로 무거운 처벌을 내릴 테니까요.”

태연은 확언했다.

“저는 저 한 몸 편하자고 부하 직원의 고충을 외면하거나 허투루 대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한 번 속는 셈 치고 믿어주십시오.”

굳건한 태연의 얼굴을 확인한 그녀는 비로소 입을 떼기 시작했다.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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