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한 게임 개발자가 너무 유능함 41화
27. 결혼하다
“……!”
이른 아침, 회사로 출근하던 유태연은 빌딩 앞, 강건 대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아니, 저 사람이 왜 여기에……?’
회사 앞에 마련된 산책로 벤치에 강건이 초라한 몰골로 앉아 있었다.
‘피해갈까?’
고민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시선이 마주쳐 버린 것이다.
속으로 혀를 차며, 겉으로는 무덤덤한 척 다가가서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혹시 절 기다리셨습니까?”
“너 만날 거 아니면 이 시간에 내가 왜 여기에 왔겠냐.”
퉁명스러운 어조.
잠시 시간을 확인하고, 태연이 말했다.
“카페로 가시죠.”
“너, 이렇게까지 해야 했냐?”
자리에 앉자마자 던진 말이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몰라서 물어? 네가 애들 선동한 거잖아!”
“…….”
그걸 그렇게 볼 수도 있었구나.
태연은 한숨쉬며 말했다.
“조용히 말씀하시죠. 이곳은 사적인 공간이 아닌…….”
“내가 우습게 보여?”
“…….”
“스타 개발자 소리 좀 듣고, 유진성 회장 비호를 받으니 너 먹여주고 키워주고 개발자 만들어준 내가 같잖게 보이냐고. 어?!”
전혀 들어먹지를 않는다.
그래도 주변 사람을 의식해 어떻게든 진정시키려 했지만…….
“내 몸에 손대지 마!”
오히려 더 신경질을 부리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말싸움을 하고 싶지도 않고.
난감에 상황에 빠져 있는데.
“피디님. 여기서 뭐하십니까?”
“안녕하세요!”
구원자가 등장했다.
판테온 스튜디오 홍민석 AD를 비롯한 아트팀이었다.
홍민석이 강건을 쳐다본다.
“강건 대표님이시군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
“멀리서 보니 우리 대표님 곤란하게 큰 소리로 막 뭐라고 하시던데…… 혹시 이번 사건 때문에 따지러 오신 겁니까?”
태연은 깜짝 놀랐다,
항상 부드럽고 자상하던 홍민석이 스산한 눈빛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이성이 반쯤 나가 있던 강건 대표가 흠칫할 만큼.
그러나 그것도 잠시.
“우리 일이니 제3자는 참견하지 말아주셨으면 하는데요?”
강하게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나 홍민석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 사건은 이미 결론 다 나지 않았습니까?”
“그건……!”
“여기서 대표님의 사견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경찰 조사, 업계 관계자, 그리고 국민 여론이 어떻게 사건을 판단하느냐가 더 중요하죠.”
치욕에 온몸을 떨던 강건은 도망치듯 떠났다.
복잡미묘한 얼굴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태연에게 홍민석이 말했다.
“저 사람은 더 이상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놔두면 알아서 자멸할 테니까요.”
* * *
자리로 돌아온 태연은 바로 호출을 받고 회장실로 불려갔다.
“아침부터 강건이 찾아와서 깽판쳤다며?”
“어떻게 아셨습니까?”
“내 정보원이 도처에 깔려 있어!”
“…….”
“농담이고, 사내 커뮤니티에 글 떴더라. 강건이 요 앞 카페에서 너한테 행패부리고 있다고.”
“그렇군요. 커뮤니티에…….”
태연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망신살이 뻗쳤군요.”
“그냥 미친개에게 물렸다고 생각해!”
이후로도 유진성 회장은 강건에 대해 분노와 욕설을 퍼부어댔다.
‘고마운 분.’
강건이 유진성 회장 같은 인품의 사람이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어릴 적의 우상이 비참하게 몰락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참 힘든 일이었다.
* * *
“죄송합니다. 저 퇴사하겠습니다.”
강건에게 재앙이 펼쳐지고 있었다.
블레스 스튜디오의 직원들이 하나둘씩 퇴사했다.
자리에 공백이 많아졌고 덕분에 회사 분위기는 싸늘해졌다.
아직도 남아 있는 사람들?
“대표님. 이번 달에는 월급 받을 수 있는 거 맞죠?”
“…….”
“저 그거 없으면 진짜…….”
“알았으니까 나가 봐요.”
“주실 거죠?”
“빚을 져서라도 월급을 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밀린 월급 받으려고 남아 있는 사람들이었다.
여기서 강건은 한 가지 중대한 의문을 떠올렸다.
‘왜 이렇게 돈이 부족하지?’
황급히 지출 내역을 확인해 본다.
금방 이유를 파악했다.
“좀 자제했어야 했는데.”
차 바꾸고 접대하고…… 이런 건 아무렇지 않았다.
적어도 그에게는.
왜냐면 항상 있던 일이었으니까.
문제는 넷폭스의 투자를 받으며, 그들이 요구한 퀄리티에 맞추기 위해 최신형 PC와 프로그램 업그레이드에 필요 이상으로 돈을 많이 썼다.
고급 인력 스카웃에 연봉 책정도 너무 높게 했고.
“그리고 또…….”
이것저것 이유를 되짚어보던 그는 어느 순간 허탈감을 느끼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이제 와서 이런 짓이 다 무슨 소용이냐. 이미 난 끝장인데.”
근본적인 문제가 뭐였을까?
사실, 아까부터 아른거리는 이름 하나가 있었다.
허나 그는 필사적으로 외면하고 있는 중이었다.
자신의 실수를, 패배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어떻게 해야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그는 한참 동안을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고민했다.
얼마 후.
[스타 개발자 강건 ‘블레스’ 폐업 위기? 대체 어쩌다가……?]
[위기의 블레스. 과연 돌파구는……?]
* * *
강건의 몰락으로 업계가 떠들썩했지만 태연에게는 그런 일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당장 넥플 엔터테인먼트에서 진행하는 게임 프로젝트만 두 개였고 이외에 넥플 라이브 본부장으로서, 업무 파악에 주력해야 했다.
거기에 가장 결정적으로 바쁘게 만드는 요소가…….
“너 곧 결혼식이잖아. 당분간은 업무 파악 정도만 전념해. 네가 충분히 준비가 될 때까지는 내가 계속 도와줄 테니까.”
바로 코앞으로 다가온 김윤아와의 결혼식.
다행스럽게도 판테온과 프로젝트 D는 팀장급 인력들이 굳건히 지탱해주고 있었고, 라이브 본부는 손영상 이사가 있었다.
그들이 합심해서 부담을 덜어주고 있는 덕분에 결혼식 준비를 차질 없이 이어나갈 수 있었다.
날씨 좋은 일요일.
김윤아가 부모님과 함께 어린 시절부터 출석하던 작은 성당에서 결혼식이 열렸다.
* * *
태연과 윤아의 결혼식 당일.
아침부터 성당 주변은 수많은 이들로 가득했다.
김윤아의 결혼식을 취재하러 온 취재진, 그리고 먼 발치에서나마, 김윤아를 축하해 주기 위해 몰려온 열성 팬들이었다.
비공개였고 초청객들도 일부의 지인들일 뿐이었지만 결국 정보가 유출된 것이다.
오전 11시.
결혼식이 진행됐다.
하객은 청첩장 없이, 개인적으로 연락을 받은 수십여 명뿐이었다.
굉장히 소박하고 경건한 결혼식이었는데, 이는 양가의 성격이 잘 맞아 떨어졌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결혼식이 끝난 직후에야 여러 가지 사실이 공개됐다.
결혼식 총비용이 150만 원도 되지 않았다는 것.
턱시도와 드레스 역시 명품이 아닌 김윤아가 오랫동안 함께 일했던 절친한 스타일리스트의 작품이라는 것.
김윤아가 그동안 좋은 이미지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누구나 그녀가 엄청난 수익을 벌고 있는 것을 알지만 절대 사치하지 않는다. 오히려 선한 영향력으로 사회 여러 분야에 환원하며 살아왔다.
중요한 것은 이게 단순히 이미지를 위한 쇼맨십이 아니라,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타고난 성품이라는 것에 있었다.
태연과 부모님은 그런 부분을 존중해서 이와 같은 결혼식을 진행하게 됐다.
‘사실 필요 이상으로 화려한 건 나도 부담스럽지.’
5성급 호텔, 국내외 유명인사로 가득한 하객!
……이런 호화 결혼식은 분수에 맞지도 않고 생각만으로도 몸서리 처진다.
조심스레 비공개 혼배미사를 제안했을 때 냉큼 받아들인 이유였다.
신혼여행지는 하와이.
2주 휴가 갔다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또 4박 5일로 떠나게 되어 회사 사람들에게 미안할 따름이었다.
‘다녀와서 일 두 배로 열심히 해야지.’
* * *
꿈같은 신혼여행은 금방 끝났다.
신혼집은 태연의 판교 아파트였다.
이사라는 게 하고 싶다고 언제든 바로 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윤아가 바라는 환경에 최대한 맞춰주기 위해 태연이 내린 결정이었다.
“모시고 살기로 작정을 했구나.”
이른 아침 회장 집무실에서 갖는 티 타임.
유진성 회장의 미소에도 태연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당연히 그래야죠.”
그러면서 흘끔, 차 향을 음미 중인 손영상 이사를 보며 말한다.
“어떤 분이 제게 조언해 주시더라고요. 집안일 분배고 나발이고, 그런 거 생각하지 말고 혼자 다 캐리한다고 생각하는 편이 마음 편하고 그래야 싸울 일도 줄어든다고.”
“손 이사를 결혼 생활의 롤 모델로 삼으려고?”
“롤 모델보다는 그 조언이 제 마음에 와닿았기 때문에 수용한 겁니다. 사실 가장 와닿았던 조언은 다른 내용이었어요.”
“뭔데?”
“이제부터 네 가족은 부모님도, 친척이나 친구도 아닌 너와 결혼한 아내뿐이라고요.”
“오호라.”
“누가 뭐라고 해도 넌 무조건 아내 편을 들어줘야 한다며, 설령 부모님 뭐라고 해도 무조건 아내 편에 서라고 조언해 주시더라고요. 저 그 말 듣고 손 이사님 더더욱 존경하기로 했어요. 제가 생각해도 맞는 말이거든요.”
“이야~ 들었어? 손 이사. 널 더 존경하기로 했다잖아! 우리 스타 개발자 유 피디가 말이야. 응?”
사담은 거기까지.
손영상 이사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오늘부터 라이브 본부 진짜 네가 맡아야 해. 아마 정신없이 바쁠 거다. 회장님이 너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서 그거 채우려면 많이 힘들기도 할 거고.”
유진성 회장은 말없이 차를 들이켠다.
“업무 파악은 다 했지?”
“네. 그동안 이사님이 도와주신 덕분에 업무 파악에만 집중할 수 있었으니까요.”
“어떤 거부터 할 거야?”
“…….”
차를 마시며 잠시 대답을 텀을 둔 태연은……
“쭉정이를 걸러낼 겁니다.”
날카로운 눈으로 매서운 말을 던진다.
“역량이 안 되는데 인맥으로 입사해서 개발 분위기만 해치는 작자들.”
공기가 무거워진다.
“자격이 안 되는데 정치질로 관리직 앉아 개발에 아무 보탬도 되지 않으면서 월급을 축내고 능력 있는 사람을 퇴사하게 만드는 작자들.”
태연은 손영상 이사를 보며 말했다.
“이 외에, 제가 보기에 없는 게 차라리 도움이 되는 모든 사람들. 싸그리 걸러낸 뒤 효율적인 재배치를 진행할 겁니다.”
후루룩.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신 유진성 회장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맴돌았다.
손영상 이사는 시선을 직시하며 물었다.
“쉽지 않을 텐데, 자신 있어?”
“그게 제가 가장 잘하는 겁니다.”
“언제까지 가능하겠어?”
“한 달이면 충분합니다.”
착각일까?
손영상 이사는 태연의 눈빛에 묘한 광채가 번뜩이는 것을 발견했다.
잠시 침묵하던 손영상 이사는.
“욕 많이 먹을 거야.”
“애초 그걸 기대하고 절 이 자리에 앉힌 거 아닙니까? 쭉정이 싹 제거하고 업무 환경 재개편해서 효율 높이는 거 말입니다.”
자신에게 향한 시선에 유진성 회장이 황급히 말했다.
“분명히 말해두는데, 너 라이브 본부장 세우기로 한 거 손 이사가 먼저 제안한 거야. 그런 거 잘할 것 같다고. 자기는 이제 그런 걸 못한다며.”
“아니,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뭐가 됩니까?”
“야! 사실이잖아. 아니야? 어디 아니라고 말해보시지!”
“하…….”
나이와 직분을 잊고 티격태격하는 넥플 그룹 1, 2인자의 모습에 태연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시계를 확인한 뒤.
“업무 시간이 됐군요. 전 이제 일을 하러 가보겠습니다.”
업무 시간에 맞춰 칼같이 집무실을 떠나는 태연을 보고, 유진성 회장이 말했다.
“회사에 피바람이 몰아치겠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