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한 게임 개발자가 너무 유능함 39화
25. 청혼
태연은 뉴욕에 오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오빠! 저기 봐! 저기가 타임스 스퀘어야!”
“TV에서 본 풍경이네. 멋있다.”
“저 녀석에 저기에 가보자.”
“그럴까?”
윤아가 무척이나 행복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데이트할 때 보지 못했던 표정들이 가끔 보인다. 시선에 자유롭지 못했기에 항상 긴장하며 살아야 했는데 이곳에는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나 이번 여행에서 먹고 싶은 거 마음껏 먹을 거야. 그래도 되지?”
“물론이지.”
“나 돼지 됐다고 모른 척하거나 그러면 죽어!”
협박하는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웃음을 주체하지 못한 태연에게 윤아는 얍얍 주먹을 날리지만 간지러울 뿐이었다.
“오빠 은근히 체격도 크고 몸 좋다. 운동해?”
“하지.”
“무슨 운동?”
“손가락 운동.”
키보드 두드리는 시늉을 하며 덧붙인다.
“하루 종일도 할 수 있어!”
“……뭐야! 재미없어.”
“어? 이 대사 몰라? 캡틴 아메리카 명대사인데…….”
“아재 개그는 몰라!”
윤아가 즐거워하니 나도 행복하다.
새삼 자각했다.
‘역시 내 옆에는 윤아가 있어야 해.’
* * *
원래 중요한 이벤트는 여행 마지막에 일어나는 법.
하지만 게임 디렉터로서 번뜩이는 직감과 풍부한 운영 경험을 가진 태연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청혼하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군.’
굉장히 신경 쓰고 있는 눈치였다.
‘이래서야 여행에 집중이 어렵지.’
그래서 이벤트 순서를 바꾸기로 했다.
편한 여행을 위해 그녀가 굉장히 신경 쓰고 있는 이벤트를 먼저 깔끔히 끝내 버리기로.
“여기가 요즘 맨해튼 2, 30대들 사이에서 가장 핫한 스카이 라운지 레스토랑이래.”
“진짜 멋지다! 마음에 들어!”
인테리어에 1980년대 뉴욕 브로드웨이 감성이 가득하다.
실제 <1980 브로드웨이> 영화를 모티브로 만든 레스토랑이란다. 여기 오너가 그 영화와 뮤지컬의 광적인 팬이라나?
예약한 음식을 창가 자리에 앉아 기다리는 동안, 이같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나도 그 영화 진짜 좋아하는데…… 오빠 알지? 나 리듬 체조 쇼에서 1980 브로드웨이 OST <다시 태양이 떠오를 때까지>하고 <마침내 당신이 보여> 두 곡 선곡했던 적 있었잖아!”
알지.
김윤아가 그 영화의 광적인 팬이라는 사실도 물론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 테마 카페를 발견하고 서프라이즈로 데려온 것이기도 하다.
마침 OST 음악이 흘러 나온다.
바라보기만 했어요.
그저 구경꾼처럼.
상상하기만 했어요.
마치 눈 먼 장님과도 같았죠.
“어? 이 노래……!”
심지어 한국어 버전이었다.
태연이 빙긋 웃었다.
“여기 음악 선곡하시는 분이 센스가 좋네. 우리 윤아가 이 노래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알고……..”
‘사실 내가 들어오면서 부탁했지.’
김민과 샬럿 왓슨.
한국과 영국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두 남녀 배우의 하모니가 레스토랑 감성을 황홀하게 물들인다.
이 순간을 기다려왔어요.
서로 마주 보고.
함께 노래하는.
바로 이 순간을.
여기저기, 커플들이 서로 가까이 마주 보며 노래를 따라부르고 있었다.
마침내 당신이 보여!
안개가 걷히고.
당신이 다가왔죠.
윤아 역시 한껏 감성에 취해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귀를 기울여야 들릴 정도로 작았지만 그녀가 현재 분위기에 푹 빠져들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기회가 왔군.’
사랑한다고 말해줘요.
함께 있겠다고 약속해 줘요.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로맨틱한 분위기가 휘몰아치는 레스토랑.
노래가 끝나는 순간 김민은 조용히 청혼 반지를 내밀었다.
“나와 결혼해 줄래?”
“……!”
휘둥그레진 눈으로 어쩔 줄을 몰라하다가 눈물을 흘리며 반지를 받는 김윤아.
-짝짝짝!
-휘이익!
그 광경을 유심히 지켜보던 다른 테이블 사람들과 종업원들이 힘껏 박수를 쳤다.
태연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축하해주는 사람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한 뒤 자리에 앉았다.
처음보다도 더 눈물을 펑펑 쏟고 있는 김윤아에게 다짐했다.
“받아줘서 고마워. 내가 절대 후회하지 않고 행복하게 해줄게.”
* * *
[맨해튼 화제의 동영상! 프러포즈 성공의 주인공은 알고 보니……?]
한국이 떠들썩한 것과 상관없이 태연과 윤아는 신나게 뉴욕을 즐겼다.
프러포즈 이후, 윤아는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아무 거리낌 없이 밝히기 시작했다.
“우리 결혼하면 아파트 조금 더 큰 곳으로 이동하자. 판교 말고 가급적이면 강남으로.”
“판교는 싫어?”
“싫은 건 아닌데 본가가 있는 곳이잖아.”
그게 어때서?
고개를 갸웃하는 태연에게 윤아가 으스스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 신혼집이 판교에 있다? 우리 부모님이 하루에 한 번씩은 꼭 찾아올 거야. 특히 엄마는 반찬이고 뭐고 잔뜩 사들고 와서 하루 종일 귀찮게 할 텐데…… 오빠 그거 감당할 자신 있어?”
“…….”
솔직히 태연도 자신없었다.
“그런 건 나도 싫어. 그러니까 강남 한강뷰 아파트로 가자!”
“시티뷰가 아니라?”
“사실 예전부터 강남 한강뷰 아파트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오붓하게 살아보고 싶었어! 낭만적이잖아!”
그건 그렇긴 하지만…….
‘돈이…….’
윤아의 눈썰미는 날카로웠다.
“오빠 지금 돈 걱정 하고 있지?”
“……!”
“걱정 마. 나 돈 많아.”
“그거야 그렇긴 하지만…….”
“설마 오빠 남자의 자존심이 어쩌고…… 나한테 그런 소리 하려는 건 아니지?”
하마터면 할 뻔했다.
윤아는 찌릿 매섭게 째려보며 한 마디했다.
“앞으로 그런 소리 할 생각 하지 마. 가부장적인 사고방식은 버려. 알겠어?”
여신님께서 버리라면 버려야지!
“그래. 알았어.”
여행을 하는 동안 가장 많이 이야기한 것이 앞으로 둘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부분이었다.
꿈처럼 여겨지던 결혼이 프러포즈 성공 이후 현실로 다가왔으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래서일까?
“이 카페 멋지다. 우리도 집에 작게 카페테리아처럼 쓸 수 있는 공간 하나 만들어둘까?”
“저 소파 진짜 멋있다. 얼마지? 저런 비슷한 거 하나 사두면 이쁠 것 같아.”
대부분 대화가 하우스 인테리어로 이어진다.
무엇을 봤을 때 조금이라도 감명을 받으면 저걸 우리한테 어떤 식으로 적용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이야기 한다.
‘꿈 많은 소녀네.’
무서운 것은 하고자 하는 대부분의 일을 해낼 수 있는 능력이 된다는 것이다.
동화 같은 집에서 한강을 보며 공주님처럼 살고 싶다고?
그녀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재력이 있다.
‘이제부터라도 열심히 벌어야겠군.’
그녀의 신세만 지며 살아가지 않으려면 이제부터라도 정신 바짝 차려야 할 것 같다.
‘투자라도 해봐야 하나?’
* * *
한국에 돌아온 직후 곧장 상견례가 추진됐다.
“질질 끌 필요가 있겠습니까?”
“암요! 제가 하고 싶은 게 바로 그 말이었습니다. 속히 진행하도록 하죠!”
두 아버지의 합심에 인륜지대사가 엄청난 속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해도 넌 가만히 있으라며 눈을 부릅뜨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언론은 연일 태연과 윤아의 결혼식을 보도할 정도로 큰 관심을 보인다.
이는 결국 태연의 신상 파헤치기로 이어졌다.
[국민 예비 신랑 ‘유태연’은 어떤 사람이었나?]
[학창 시절 동창들의 증언 속출!]
[내가 아는 유태연은……!]
속출하는 증언!
심지어 태연의 현재 지인들에게도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대부분은 결혼을 앞둔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서 알아서 피해다니거나 요청을 단호히 거절했다.
그러나 적극 수락한 것도 모자라 악담을 퍼붓는 사람도 있었다.
“인터뷰 요청이요? 당연히 수락하죠. 날짜 잡읍시다!”
바로 블레스의 강건 대표였다.
* * *
유력 언론지와의 인터뷰에서 강건은 속에 담았던 모든 분노를 쏟아냈다.
“꽤 오랜 시간을 함께 일했다고 들었는데요. 유태연 프로듀서는 어떤 부하 직원이었나요?”
인터뷰어의 질문에 강건 대표는 깜짝 놀랄 만큼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주 못된 놈이지요!”
“……네?”
“그 자식은 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와 피해만 안겨준 나쁜 놈이에요! 생각만 해도 이가 갈립니다.”
“아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강건 대표는 유태연이 잘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속에 축적되었던 분노를 모두 쏟아냈다.
“아무것도 모르는 초짜 신입 풋내기를 제가 데려와서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배신이었죠.”
그리고 그 자리에서 놀라운 사실을 밝힌다.
“지금 넥플에서 개발 중인 신작 판데모니움과 판테온 시리즈는 원래 우리 회사의 게임이었습니다. 그 녀석이 저하고 아무 상의도 없이 멋대로 들고 나간 거예요!”
“그럴 수가…… 그게 정말입니까?”
“보여드려요? 그 자식이 비수를 꽂고 나가기 전까지 진행되고 있던 프로젝트 모두 고스란히 가지고 있습니다! 그게 증거예요!”
유태연이 만들고 있던 버전의 프로젝트까지 공개!
‘특종이다!’
기자는 속으로 환호를 터뜨리며 모든 증거를 빠짐없이 기록한다.
“보셨죠? 넥플에서 투자해 주겠다니 더 큰 과실에 혹해 도리고 뭐고 저버리고 떠나 버린 거라고요! 그 자식이 그런 놈이에요!”
“지금 하신 말씀, 그대로 실어도 되겠습니까?”
강건 대표는 두려울 것 없다는 듯 외쳤다.
“오히려 제가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김윤아 씨를 포함한 세상은 그 녀석에게 속고 있어요. 저는 정의를 사랑하는 선량한 시민으로서, 당금 잘못된 시선과 의식을 바로잡고 싶을 뿐입니다!”
* * *
그날.
강건 대표의 인터뷰가 대한민국 전역을 뒤흔들었다.
[강건 대표. 유태연은 배신자.]
[심지어 넥플에서 개발 중인 프로젝트도 원래는 모두 내 프로젝트였다!]
특히 게임 판이 뒤집혔다.
-이게 정말이야?
-강건 대표 말만 들으면 천하의 나쁜 놈인데…… 이게 정말이야?
몬스터 이터의 성공적인 도입과 월드 챔피언십의 흥행으로 게임 판에서 유태연은 긍정적인 이미지가 가득했다.
그런데 그것을 완전 뒤엎어 버리는 인터뷰가 나온 것이다. 특히 몬스터 이터 유저들 중 유태연을 추종하던 수많은 팬들이 충격에 빠졌다.
태연 역시 이 기사를 접했다.
특히 태연의 스카우트에 크게 관여했던 이태영과 손영상.
사업 총괄과 개발 총괄은 진실을 모두 알고 있었기에 분노를 금치 못했다.
“미친놈이 작정하고 총질을 하는군!”
“내가 이상한 놈이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 하여튼 강건 그 자식, 언제고 사고 칠 것 같았는데…….”
유진성 회장은 진지하게 물었다.
“이 인간이 갑자기 왜 이러는 것 같아?”
“원한 때문이죠. 투자는 결국 무산됐지. 자기 밑에서 노예질 해주며 이름값 올려주던 공신인 유태연은 넥플로 가서 승승장구하지…….”
손영상 이사가 이를 갈았다.
“나라의 관심이 태연에게 쏟아지는 이 때를 노려서 판을 작정하고 엎으려는 겁니다.“
여기저기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반면 당사자인 태연은 담담했다.
“넌 괜찮냐?”
유진성 회장의 물음에 태연이 대답했다.
“이와 비슷한 일을 몇 번 겪어서 그런지 담담해지는군요.”
더불어 언제고, 강건 대표가 자신과 관련해 크게 사고를 한 번 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내가 너 절대 가만 안 놔둬. 이 배은망덕한 자식, 나하고 마주치지 말아라. 응? 알았어?
태연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반박 자료는 모두 갖추고 있지만…….’
머리가 아프다.
왜 하필 이 시점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고 튀어나와 사람을 곤란하게 만드는가.
반박 자료를 제시해도 쉽게 물러서지 않을 것이고, 결국 진창 싸움이 될 것이다.
그 과정이 뻔히 그려지니 골치가 아플 수밖에.
‘그래도 해야지. 결백을 증명하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