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퇴사한 게임 개발자가 너무 유능함-37화 (37/147)

퇴사한 게임 개발자가 너무 유능함 37화

23. 제안, 그리고 제안

판테온 개발자들을 대상으로 한 태연의 프레젠테이션이 시작됐다.

“그래서…….”

이미 내용을 달달 외우고 있는 백영훈은 주변 반응에 집중했다.

‘역시……!’

한눈팔거나 조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모두 몰입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게 훌륭한데…… 당연하지.’

심지어 문답에도 막힘이 없었다.

이미 예상했다는 듯, 이름처럼 태연하게 대답을 이어나간다. 그 광경에 다른 사람들도 감탄하고 있었고.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이상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프레젠테이션이 끝났다.

백영훈은 누구보다도 힘껏 박수를 쳤다.

직후 업무 분배가 이뤄졌다.

“제가 다녀올 동안 ‘가이아’의 원화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가능하겠습니까?”

“물론이죠.”

대답은 원화 담당인 이영애가 했다.

“맨해튼을 비롯한 현대 도시의 형태를 참고하되, 그 도시에 거주하는 신화 속 모습이 녹아들어야 합니다. 보면 아, 이건 어디 신화를 모티브로 만든 구역이구나! 이런 말이 나올 수 있도록요.”

“한마디로, 익숙한데 독창적이어야 한다는 뜻이군요.”

무표정하게 엄지를 치켜세우는 태연의 모습에 모두가 피식피식 웃는다.

“플레이어 캐릭터와 튜토리얼 몬스터 디자인부터 부탁드립니다. 아시죠? 힘 팍팍 실어야 하는 거.”

“물론 잘 알고 있죠.”

홍민석 AD가 자신감을 드러낸다.

“그거 제가 전문입니다. 튜토리얼을 보고 어? 이게 온라인이 아니라 콘솔 AAA급 게임인가? 속아 넘어갈 정도로 힘을 주겠습니다!”

“역시 제 마음을 잘 아시는군요.”

“잘 알죠. 이게 다 첫 티저 프로모션의 이슈화를 위한 기반 작업 아니겠습니까?”

“바로 그겁니다.”

“두고 보십시오. 디자인은 야무지게, 모델링은 초 하이 폴리곤으로 입이 떡 벌어지게 만들어 볼 생각이니까요.”

“역시 대한민국 최고의 아트 디렉터. 제 마음을 꿰뚫어 보고 계셨군요.”

“대한민국 최고의 프로듀서와 함께 일하려면 이 정도 센스는 있어야겠죠. 으하하!”

두 디렉터의 대화에 이영애가 한숨을 내쉬었다.

“튜토리얼로 사기 치겠다는 대화를 참 화기애애하게도 하시네요.”

* * *

회의를 마친 뒤 곧바로 프로젝트 D 회의를 열었다.

내친김에, 자신이 휴가를 간 2주 동안 처리해야 할 업무 목표량을 제시하려는 것이다.

“프로젝트 D는 큰돈을 벌고자 만드는 게임이 아니에요. 엄밀히 말하면 디즈니 팬들을 위한 서비스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지요.”

어쨌든 게임이니 오리지널 콘텐츠가 제작되기는 해야 한다.

“하지만 이미 존재하는 것을 최대한 활용하면 시간과 비용이 단축될 테니 더 좋을 거예요. 무엇보다 디즈니에서도 그런 걸 원할 테고요.”

왜냐면 디즈니니까.

자신들의 콘텐츠에 아무리 좋은 관계라지만 타사의 오리지널 콘텐츠가 지나치게 개입되는 것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프라이드가 강하기로 유명한 회사잖아요.”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특히 캐릭터, 오브젝트 디자인 쪽에 대해서는 가급적이면 오리지널리티를 부여하려고 하지 마세요. 원하는 디자인을 찾아서 본사에 요청하면 모든 리소스를 다 제공받을 수 있을 겁니다.”

시나리오와 스토리보드를 만들어 제공받은 원안 리소르만 가지고 대강의 형태를 구현해 보자!

이번에는 프로젝트 D의 AD로서 회의에 참여한 이영애가 물었다.

“일종의 밑그림이군요?”

“바로 그렇습니다. 역시 국내 최고의…….”

“국내 최고의 아트 디렉터는 남편이라면서요?”

“……아트 디렉터의 반려되시는 분은 그 센스마저도 남편과 똑같군요.”

이영애는 피식피식 웃었고 사정을 모르는 다른 멤버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회의를 끝낸 태연은 이영애 AD만 따로 불러 남겨놓고 물었다.

“두 분이 하시는 일이 많은데, 너무 힘들지는 않은가요?”

“조금 벅차긴 하죠. 남편은 그래도 본인이 아트 디렉터를 맡아 처음부터 끌고 가는 게임이라 재미있어하지만 저는 또 디즈니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으니…….”

다른 일 해보려고 퇴사했더니 또 전 회사 일을 하게 된다면 누구라도 싫을 것이다.

그래서 한 가지 제안했다.

“제가 하나 약속할게요.”

“……?”

“프로젝트 D를 최대한 빨리 쳐낸 뒤 판데모니움을 시작할 텐데, 그때 이영애 AD님께 아트 디렉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녀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거 재미있겠네요. 사실 제가 블리자드에서 자주 맡았던 컨셉들이 악마, 몬스터 뭐 이런 것들이 많았거든요!”

“저도 알고 부탁드리는 겁니다. 이영애 AD님은 천사의 마음씨와 외모를 지닌 악마 전문 디렉터시니까요!”

“어머나~.”

그녀는 싫지 않은 듯 미소 지었다.

“홍민석 AD님께서는 신들의 대지 판테온. 이영애 AD님께서는 악마의 대지 판데모니움. 두 분은 서로를 굉장히 잘 알고 있고, 두 가지의 게임도 세계관을 공유하며 크로스오버되는 경우가 많죠. 저는 최고의 조합이라고 생각합니다.”

“듣고 보니 그것도 그러네요.”

“그리고 또 하나. 제가 넥플 그룹 자회사, 넥플 엔터테인먼트 대표가 된다는 거 알고 계시죠?”

“네. 저도 들었어요.”

“회장님께서는 한국의 디즈니를 꿈꾸고 계십니다. 제가 많이 생각해 봤는데, 기반 사업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콘텐츠 플랫폼 사업입니다.”

“콘텐츠…… 플랫폼이라고요?”

“만화, 소설, 방송, 애니메이션…… 다양한 콘텐츠를 간편하고 저렴하게 서비스하는 사업입니다. 여기까지 말씀드렸으면 제가 어떤 것을 부탁하려는지 아시겠죠?”

“그 콘텐츠 플랫폼 사업을 저에게 부탁하시려는 건가요? 음, 전 사업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데…….”

“사업은 그에 어울리는 사람이 해야죠. 제가 부탁드릴 것은 바로 그 콘텐츠 플랫폼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입니다. 웹툰 작가로서 경력이 풍부하신 만큼 인맥도 많지 않습니까?”

“아……!”

“소설과 웹툰 쪽에서 좋은 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 창작자들을 물색하고, 전반적인 창작 업무를 총괄해 주시면 됩니다.”

순간 이영애 AD님의 눈빛이 반짝였다.

“재미있겠네요. 사실 제가 해보고 싶었던 일이었어요.”

“그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태연자약한 모습에 이영애가 고개를 갸웃했다.

“사실 제안드리기 전에 홍민석 AD님과 상의를 해봤거든요.”

“아…….”

“강력하게 추천하시더군요. 실제 미국 거주 당시에도 창작 커뮤니티를 만들어 이끈 경험이 있으시다고…….”

“<창작의 숲>에 대해 들으셨군요.”

“가입도 했습니다. 소규모 커뮤니티 수준은 진작 넘었더군요. 몸집이 굉장히 크던데…….”

태연은 헛기침을 터뜨리고 말했다.

“그런 경력을 고려해서 내린 결정입니다.”

그녀는 빙긋 웃더니 짝, 손뼉을 쳤다.

“아무래도 이곳에 오기를 잘한 것 같아요.”

“……?”

“훌륭한 리더 밑에서 마음껏 역량과 꿈을 펼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태연은 빙긋 웃었다.

“프로젝트 D와 콘텐츠 플랫폼, 두 가지 모두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몸이 부서져라 일할게요! 아, 그런데 그 플랫폼 이름 정해졌나요?”

“아직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제가 한 번 고민해 볼까요? 로고 디자인 포함해서요. 그리고 그 플랫폼, 스마트폰으로 서비스할 거죠?”

“태블릿 PC도 포함해야겠죠.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부탁이랄 것도 없죠. 제가 원래 그런 거 전문이잖아요.”

겉으로는 청순 그 자체!

굉장히 여려 보이지만 강단이 세고 역량이 뛰어나며 무엇보다 커뮤니케이션 능력과 무리를 이끄는 리더십이 뛰어난 철의 여인이 그녀다.

이런 인재는 최대한 써먹는 게 국룰 아니겠는가?

“그러면 그것도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그리고 그에 대한 대가는 충분히 챙겨드릴 테니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 * *

[오빠! 나 일정 다 정리했어! 집에서 저녁 식사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을 테니 그때 이야기하자.]

[칼퇴해야겠네. 기대된다.]

윤아와의 채팅을 끝내고, 휴대폰과 함께 실실 새어 나오는 미소를 수납한 뒤 노크를 했다.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가니 유진성 회장이 구겨진 얼굴로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문을 닫고 들어가서 소파에 앉으며 물었다.

“또 무슨 일입니까? 표정이 영 안 좋아 보입니다.”

“나보고 국정감사 출석하란다.”

끽해야 사업적인 문제인 줄 알았는데…… 태연은 깜짝 놀라서 물었다.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확률형 아이템 논란 때문이라는데…… 그건 명목상일 뿐이야. 게임 업계에서 무슨 큰 이슈가 터지면 꼭 날 불러서 망신 주기용으로 뭐라고 하더라고.”

자리에서 일어선 유진성 회장은 미니 냉장고에서 맥주 두 캔을 꺼내 하나를 태연에게 던졌다.

그리고 들고 있던 캔을 까서 꿀꺽 들이켠다.

“업무 중에 그러셔도 되는 겁니까?”

“답답해서 그래. 답답해서. 게임 업계 대우도 별로 안 해주는 인간들이 돈을 무슨 걸신들린 아귀마냥 뜯어 가고, 하라는 대로 해도 그걸로는 부족하다. 이건 또 무슨 일이냐…… 또 그럴 거냐 안 그럴 거냐…….”

다시 맥주를 한 캔 들이켠 그가 욕설을 터뜨린다.

“내가 아주 이것 때문에 우울증이 오려고 그런다. 내 편이 없어. 유저는 유저대로, 정부는 정부대로, 개발자는 개발자대로…….”

남은 맥주를 모두 들이켠 뒤 걸쭉한 트림을 뿜어낸다. 그리고 힘없이 중얼거렸다.

“다들 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지. 내 편이 없어.”

“…….”

“야, 내가 이렇게 힘들어하는데, 넌 인마 위로 같은 거 안 해주냐?”

어깨를 으쓱거린다.

“일단 조금만 참아 보시라는 말씀 밖에 못 드리겠군요.”

“참으면 뭐 달라져?”

“달라지죠. 넥플 엔터테인먼트가 본사보다 훨씬 커져서 회장님이 바라는 아시아의 디즈니로 성장할 텐데요.”

“……!”

눈빛이 번뜩인다.

“그렇게 해줄 수 있어?”

“회장님께서 든든하게 제 뒤를 받쳐주신다면요.”

“…….”

와작!

그는 캔을 거칠게 구겨 휴지통에 던져 버렸다.

“넥플 엔터 팍팍 밀어달라는 거지?”

“네.”

“그렇게 해줄게. 대신 너도 내 부탁 한 가지 들어줘야겠다.”

“뭐죠?”

“우리 회사 대표 캐시카우 게임 알지?”

“문라이트 스토리. 배틀 시티, 아틀란시아 전기 아닙니까?”

넥플은 수많은 게임을 서비스 중이지만 그중에서 특히 압도적인 이용자 수와 매출을 자랑하는 세 개의 게임이 존재한다.

귀엽고 아기자기한 도트 그래픽과 방대한 시나리오, 재미있고 화려한 전투로 MMORPG의 신화를 쓰고 있는 문 라이트 스토리.

다양한 컨셉의 도시를 무대로 다수의 유저가 서바이벌을 진행하는 배틀 시티.

블리자드의 명작,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 맞서겠다며 야심 차게 만든 정통 MMORPG 아틀란시아 전기.

이 세 가지 게임을 통칭 <넥플 3대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엄청난 효자 게임이다.

허나 문제가 있다면…….

“그것들이 돌아가며 사고를 치는 통에 내가 계속 국감에 불려가고 있다는 거 알지?”

“잘 알죠.”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어째 불길한데…….’

뭔가, 일을 맡기려는 건 확실한데 그 내용이 짐작이 가지 않는다.

‘여기서 일을 더하고 싶지는 않은데…….’

그래도 전폭적인 투자 약속이 걸려 있는 조건이니…….

그런데 이어진 말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예측 규모를 훌쩍 뛰어넘는 것이었다.

“너, 영상이가 하던 일 하나 가져가라.”

“……네?”

“네가 라이브 본부장해.”

“…….”

“휴가 돌아오는 대로 인수인계받아.”

“…….”

“대답이 없네. 싫어?”

“아, 아닙니다.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이라…….”

유진성 회장이 슥 웃었다.

“나 도와주려면 이 정도 해줘야지.”

“…….”

“몬스터 이터처럼 라이브 팀 개발 조직 정리 깔끔하게 해줘. 너 지켜보니까 그 방면으로는 거의 도가 텄더만? 규모가 더 커진다고 별문제 없을 것 같아서 맡기는 거야.”

그리고 하얀 봉투 하나를 건넨다.

“여비에 보태 써. 원래 내가 쓰려고 뽑아 둔 건데 갈 일이 없어져서 너 주는 거야.”

“……감사합니다.”

시간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녁 약속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여행 끝나고 돌아오면 하루 정도 시간 비워둬. 술 한잔하자.”

“네.”

집무실을 벗어나며 태연은 중얼거렸다.

“그놈의 라이브 본부장직은 끊이지를 않게.”

대답을 안 했던 건 제안이 갑작스러워서가 아니다.

그동안 같은 제안을 다양한 곳으로부터 셀 수 없이 받은 전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강건 대표에 대한 존경심과 의리로 거절했지만, 내심은 지겨운 것도 있었다.

‘내 게임이 만들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결국 수락하고 말았다.

다른 곳도 아니고 무려 대한민국 최고의 게임 회사 넥플 라이브 본부장직이었다.

‘출세는 좋지만 이렇게 일이 많아져서야…….’

몬스터 이터 하나 덜어냈다고 좋아했더니 더 큰 일이 닥쳐왔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지.’

한숨을 내쉬며 봉투를 확인한 태연은 깜짝 놀랐다.

달러가 종류별로 가득했던 것이다.

금액이 얼마일지 세기도 힘들어 보였다.

“……!”

깜짝 놀라 굳게 닫힌 집무실 문을 돌아본 태연.

“……이거까지 받았으면 더 이상 빼기도 힘들겠네.‘

이렇게 챙겨주고 밀어주겠다는데, 가만히 있으면 남자도 아니다.

‘돌아올 때 각오 단단히 해야겠어.’

0